신학논문 소논문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하나님아들 2020. 1. 4. 10:11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 고트프리트 벤과 롤프 디터 브링크만의 시세계 비교-


                                                      이  승  욱**

1. 연구의 목적과 방법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싼 담론의 전개는 이제 상당히 축적된 역사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의 시시비비에 벤과 브링크만, 두 작가의 시세계를 끌어들이려는 것이 본고의 의도는 아니다. 바로 그 논의의 축적된 역사 속에서 이미 거의 이론의 여지없이 수용되고있는 두 사조의 핵심적인 성격에 비추어 두 작가의 시세계를 비교, 고찰하는 것이 이글의 일차적인 목표이다. 동시에 이러한 비교 고찰에서 벤의 시세계가 모더니즘의 모든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거나, 브링크만의 시세계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든 성분을 함유하고 있음을 주장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벤과 브링크만의 시세계는 각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개별적이고도 특수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벤의 모더니즘의 특수한 양상과 브링크만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수한 양상을 들추어냄으로써, 그들 문학의 차이와 본질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근본 의도이다.

어떤 특정의 문예사조의 개념으로 한 작가의 세계를 규정한다는 것이 애당초 무리이기는 하지만, 벤이 독일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시인이라는 사실이 공인된지는 오래이다. 그것은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그의 작품의 내인(內因)들에 있어서도 그렇다. 무엇보다 60년대 중후반에서 70년대에 두드러진 독일시의 ‘일상화’ 경향과 비교되면서 벤은 특히 독일시의 20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의 모범적인 예로 자리매김 된다. 테오발디가 벤을 불란스 상징주의자들을 포함한 유럽의 모더니즘 작가들과 연관시키면서 그를 독일 ‘비의시 das hermetische Gedicht’의 대표자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1)더구나 벤의 유명한 마부르크 강연, 「서정시의 제문제 Probleme der Lyrik」는 당대 독일 모더니즘 시학의 관심사를 총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반면에 브링크만의 시는 넓은 의미에서 ‘팝-아트’에 속한다.2)그의 팝적인 경향 역시 하르퉁 H. Hartung이 지적하듯 당대 독일 팝-문학의 ‘표제어Stichwort’가 되었다.3)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팝-아트’에 대해서 그렇듯이, 그의 시세계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레떼르가 붙여졌다.4)80년대에 본격화된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와 관련해서 그는 특히 독일 초기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불리기도 한다.5)뿐만아니라 그는 자신의 글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팝-아트’가 절정에 달한 시기에 독일을 방문해서 강연한 당대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 피들러Leslie Fiedler의 문학론을 그의 창작의 토대로서 적극 수용하기까지 했다.6)이상과 같이 두 작가의 문학 성향과 관련된 외현적(外現的)인 사실에서도 앞의 관점에서의 두 작가의 비교고찰은 충분한 가능성을 지닌다. 더구나 시사적으로 볼 때, 두 작가는 20세기 독일시의 두 중심적인 흐름을 대변하고 있다. 따라서 두 작가의 성향의 본질적인 차이를 밝히는 작업은 부수적으로 독일 현대시사의 쟁점사항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작가에게는 차이 못지않게 공통성 역시도 드러난다. 두 작가가 말 그대로의 모더니스트나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규정될 수 없는 까닭은 여기서 자명해진다. 당초에 이러한 공통성에 대한 고찰 역시 이 글에 포함시켰었다. 그러나 발표지면의 제약상 부득이 논의에서 제외하게 되었다.

두 작가의 시세계를 비교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고찰하게되는 사항은 작품의 테마적 차원과 언어형식적 차원이다. 이 두 측면은 서로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시의 본질을 밝히는 작업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요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고찰에서 두 작가의 모든 문학적 사료들을 논증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으므로, 매 주제에 연관된 대표적인 시를 중심으로 논점을 개진하고자 한다.    



  2.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깊이와 표면성

  

벤의 시세계를 ‘모더니즘’으로, 브링크만의 시 세계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규정할 수 있게하는 차별화의 준거로서 이 글에서는 ‘깊이 Tiefe’와 ‘표면성 Oberfläche’이라는 두 개념을 끌어들이고자 한다. 개괄컨데 벤의 시적인 성향은 ‘깊이’, ‘중심성’, ‘총체성’을 지향하는 모더니즘 시학의 한 전형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반면에 브링크만의 경우는 그와는 상반되는 ‘표면성’, ‘해체성’을 추구하는 다른 한 전형적인 예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깊이’와 ‘표면성’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름하는 중요한 척도로서 이미 일반화되어 있다. 무엇보다 프레드릭 제임슨 같은 이론가는 두 사조를 유별하는 가운데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으로 ‘표면성’, ‘주체의 소멸’, ‘탈중심화’ 등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7)그 가운데서 지난 시대가 지닌 ‘깊이차원의 상실 Verlust der Tiefendimension’8)이후에 두드러지는 문화 예술상의 ‘표면성’에 대한 강조는 그의 관점을 설명하는 열쇠가 되고 있다. 뿐만아니라 이 글에서 벤이 숭앙하는 예술가 고호가 모더니즘의 예로, 브링크만이 숭앙하는 예술가 앤디 와홀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예로 실증된다는 사실도 퍽 시사적이다. 두 사조와 관련된 개별 이론가들의 논의에 포함된 세부사항들을 무시할 때에, ‘깊이’와 ‘표면성’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들을 비롯한 많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에서 공통적으로 시사되는 중요한 변별개념이다. 제각기 독창적인 다른 접근방식과 주제와 명명법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모더니즘의 총체성, 또는 구조체계의 해체를 기본전략으로 삼고 있거나, 그러한 해체과정 자체를 새로운 문화나 예술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논리들은 공유성분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쟈끄 데리다, 보들리아르, 쟝 프랑쇼와 료따르, 이합 핫산 등은 이와 관련하여 거명할 수 있는 중요한 이론가들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문예비평가인 이합 핫산의 논의는 특히 유익하다. 무엇보다 그는 문학과 관련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정립하는 가운데 작가들을 포함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목록을 작성한 바 있다. 그가 도식화하고 있는 두 사조의 유별 개념들에서도 ‘깊이’와 ‘표면성’이 거의 동일한 내포를 지니고  있는 다른 개념들과 더불어서 열거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하다.9)이러한 사실들과 관련하여 독일 문예이론가 ‘레겐 Gehard Regen’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표면의 시학」이라는 글에서 다음과같이 말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를 규정하기위한 많은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되풀이해서 ‘표면의 중심화 Oberflächenzentrierung’라는 기준에로 되돌아간다. (...) 제임슨에게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은 깊이상실의 미학이자, 바로 이질적인 깊이-모델들의 강령적인 거부로 나타난다. 그러한 깊이-모델들은 모더니즘의 사고에 있어서 기본상황이었으며, 모더니즘 예술작품의 생산과 수용에 있어서도 특징적인 것이다”10)


두 사조의 합당한 변별개념으로서의 ‘깊이’와 ‘표면성’을 이 자리에서 더 강조할 생각은 없다. 다만 위의 레겐의 언급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벤과 브링크만, 두 작가 자신들이 이미 문학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이 두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브링크만의 시학에서 ‘표면성’이라는 개념이 그의 시의 중심소(中心素)로서 강조되고 있는 경우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미국 팝-아트의 수용과정에서 쓰여진 그의 여러 글들은 물론이고, 가장 중요한 시론적 엣세이 「언어로 이루어진 영화 Der Film in Worten」는 그 두두러진 실례가 된다. 벤의 경우에도 그의 예술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는 중요한 개념으로서 ‘깊이 Tiefe’, 또는 그와 유사한 울림을 가진 용어 ‘근원 das Ur’은 시와 시론적인 여러 글들에서 자주 나타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시학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소위 “두번째 단계 Phase Ⅱ”에서 ‘깊이’와 ‘표면성’이 두 상반개념(相反槪念)으로서 시대의 변화와 미래 예술의 새로운 변화를 시사하면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사용된다.11)벤은 아직 이 두 개념을 오늘날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비관계에서 통용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의 대비를 통해 그가 환기시키고 있는 이질적인 두 예술의 경향은 그것과 매우 흡사한 내포를 지니고 있다. 이 글의 성격상 이에 대한 고찰은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밝힌 이유에서 이러한 문제를 포함한 두 작가의 공통성에 대한 논의는 이 글에서 제외되었다.     



3. ‘깊이의 미학’으로서의 벤의 시세계


3.1. 소외/비실용성/근원지향성: 「현실 Wirklichkeit」


  현실이란 필요없는 것.

   그렇다. 그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육감과 피리소리의 근원모티브에서 

   자신의 존재를 실증할 수만 있다면.


   일찍이 그림을 그렸던 사람은

   올림피아나 육체, 라일락을 그리지 않았다.

   그의 황홀, 요컨데 엮어진 노래들이

   그를 내면에서부터 빛나게 했을 뿐.


   그는 사슬에 묶인채 갈레선의 노를 저었다,

   배의 밑 바닥에서. 물이라곤 보지 못했다.

   갈매기들, 별들- 아무것도. 견딜수 없는

   눈의 중압에 짓눌려서 꿈이 생겨났다.


   백발 성성한 노인이 되자 그는 물신(物神)을 만들었고,

   시련을 당하자 그에게는 피에타상(像)이 생겨났다.

   놀이를 할 때 그는 찻상(茶床)을 그렸지만,

   마시기 위한 차는 거기 없었다.12)

    Eine Wirklichkeit ist nicht vonnöten,

    Ja es gibt sie gar nicht, wenn ein Mann

    aus dem Urmotiv der Flairs und Flöten

    seine Exitenz beweisen kann.


    Nicht Olympia oder Fleisch und Flieder

    malte jener, welcher einst gemalt,

    seine Trance, Kettenlieder

    hatten ihn von innen angestrahlt.


    Angekettet fuhr er die Galeere

    tief im Schiffsbauch, Wasser sah er kaum,

    Möwen, Sterne - nichts: aus eigener Schwere

    Unter Augenzwang entstand der Traum.


    Als ihm graute, schuf er einen Fetisch,

    als er litt, entstand die Pietà,

    als er spielte, malte er den Teetisch,

    doch es war kein Tee zum Trinken da.


위의 시는 그의 시를 있게하는 가장 원천적인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현실과 시적 자아의 (또는 현실과 예술의) 갈등적 이분구조를 뚜렷이 표면화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자아와 현실의 이러한 갈등상황은 그의 초기부터 후기에 까지 거의 일관됨으로서, 그의 문학의 통시적 상황이 된다. 그의 많은 시들은 대부분 이 기본상황의 변주인 것이다. 그리하여 전혀 “필요없는” 현실과 영원한 예술의 대비는 이 시의 중심구조가 된다. 현실의 억압은 특히 ‘갈레船’(Galeere)의 노예 이미지에서 첨예화 된다. 그의 시에서 이와같은 예들은 얼마든지 들 수 있다. H. Steinhagen은 벤의 후기시집 ꡔ정시 Die Statischen Gedichteꡕ를 동일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분류한 바 있다.13)이 시집의 시 「삶-미천한 망상 Leben-niedrer Wahn」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그는 “삶은 미천한 망상”에 불과하며 예술, 즉 “형식만이 믿음이며 행동”이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자아와 현실의 이러한 대치구조는 벤의 소외의 기본 상황이기도 하다. 무수한 벤의 시적 자아들은 이 대치구조를 고착화하고 있는 사회적 소외자들이자, 고전적 자기정체성을 잃어버린 분열적 자아들인 것이다. 그러한 여러 소외적 자아들을 그는 “창살에 갇힌 자아”14), “잃어버린 자아”15), “말기(末期)의 자아”16), “낙인찍힌 자아”17)등으로 개념화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벤의 이분법(二分法)에서 엄격하게 구별되는 “예술보전자와 문화보전자” 가운데 “예술보전자들”이다18). 산문 「현대적 자아」(1920)에서 그는 현대적 자아의 특징을 “개인적인 주체의 자립감의 강화”, “개별적 실존의 의식”에서 찾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전체적인 외부 현실을 내적인 체험으로서” 가지는 자아의 주관성을 옹호한다.19)그의 이러한 관점은 만년의 유명한 시론 「서정시의 제문제」(1951)에서 “서정시인에게는 서정시인 자신 이외의 다른 대상은 없다”라고20)밝히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그가 역설하고 있는 “자아와 세계의 관계의 역사”21)는 외부현실과 자아의 단절의 역사이자,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자아 절대화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벤에게서 볼 수 있는 자아의 분열과 소외가 서구 모더니즘 작가들의 기본상황이 되고 있음은 이미 어느정도 일반화 되어 있다. 무엇보다 시분야에서 보들레르 이래 서구 현대시의 전개과정을 다루고 있는 후고 프리드리히의 ꡔ현대시의 구조ꡕ는 이러한 사실을 공론화한 대표적인 저작이다. 그가 현대시의 현대성을 가르는 척도로서 전제하고 있는 ‘부정의 범주’는 다름 아닌 현실과 시적 자아의 분리를 골간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22)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소외된 주체”, 이합 핫산의 “침묵의 문학”과 모더니즘의 항목들(:도시주의, 공업기술주의, 비인간화 등), 쉐르페의 “몰락의 드라마화 Dramatisierung des Untergangs” 등의 사항들이 시사하는 바도 앞의 프리드리히의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23)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집요한 소외의식 때문에 벤은 그의 전생애를 통하여 삶과 예술에 대한 존재론적인 물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데 자아가 정체성을 구할 수 없는 폭압적인 현실과의 끊임없는 논구가 그의 시를 움직이는 추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니체의 교의(敎義)를 되풀이 하고 있는 그의 표현, “유럽적 허무주의 내에서 삶의 마지막 형이상학적인 행위로서의 예술”24)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그의 예술행위는 삶의 궁극적 가치에 대한 질문과 응답의 한 방편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이 브링크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더니즘적 깊이를 추구하고 있음도 여기에서 실증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사실들과 더불어 벤 문학의 ‘깊이’는 그것의 좀더 고유한 특수성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그의 상상력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근원지향성이다. 시 「현실」에서도 그것은 충분히 시사되어 있다. 노예적 현실과의 대치관계에서 시적 자아는 “육감과 피리의 근원 모티브”의 변주, 즉 예술을 절대적인 가치로 내세운다. 그러한 예술은 동시에 현실의 실용성을 거부한다. 화가의 그림은 전혀 현실편의적인 실용가치를 목표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시적 자아는 소외의 해소를 자신과 사회의 변증법적인 화해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가 대립하고 있는 구체현실의 부정성을 대신할 수 있는 어떤 미적인 가상세계에서 찾는다. ‘현실상실’(現實喪失)의 세계에서 예술이 대용종교(代用宗敎)의 성격을 지니게 됨은 이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시들에서는 거의 동일한 모티브의 변주라 할 만큼 가상의 근원세계를 향한 시적 자아의 추구는 되풀이 된다. 다시 말해 현실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만큼이나 그 대립극인 개인적인 꿈의 세계에로의 탈주(脫走)는 그의 상상력의 통시적인 기본 구조를 이룬다. 현상적 삶의 이면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가상적 깊이의 세계에대한 벤의 이러한 신뢰는 그의 시적인 이상향을 암시하는 ‘근원’(Ur)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말들에서 가장 잘 상장화되어있다. ‘근원이미지’(Urbild), ‘근원체험’(Urerlebnis), ‘근원형식’(Urform), ‘근원얼굴’(Urgesicht), ‘근원신화’(Ur- mythe), ‘근원실체”(Ursubstanz) 등의 개념들이25)그것들이다. 이미 필자는 다른 글에서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벤의 여러 텍스트들에 폭넓게 산재해 있는 이러한 근원 지향성을 구체적으로 검증한 바 있다. 요약하자면 그의 근원은  ‘모성의 세계, 인류사의 원초시대, 신화적이거나 종교적인 화합의 세계, 신비적이고 정태적인(동양적인) 세계’ 등에 대한 그리움으로 묶어질 수 있다.26)그러나 개개 시들의 검증에서 유별될 수 있는 이러한 여러 그리움의 갈래들은 모종의 단자적 (單子的) 합일(合一)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또한 그러한 지향이 거의 인류사의 미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사 이전의 과거, 즉 인류 역사의 분화 이전의 완결된 통합세계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그때문에 그의 근원에의 꿈은 낙원을 ‘잃어버린 자아’의 추수적인 향수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전제했듯이 이 자리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벤의 근원지향성이 그의 시의 특수성이자, ‘깊이’의 본질을 이룬다는 점이다. 엣세이 ꡔ시적인 것의 문제ꡕ(1930)에서 그는 그러한 깊이의 추구를 “신비적인 참여”, “총체성에 대한 기억”(die Erinnerung an ihre Totalisation) 등의 개념들로 특징짓는다. 또한 현실적 가치들이 와해된 시대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고독한 자와 그의 이미지들 뿐”이라고 단언하면서27)그런 고독한 예술가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의 사회적 전제들에 그는 개의치 않는다. 즉 인간들 가운데서 그는 인간으로 살아가기가 불가능하다. 이것은 니체가 헤라클리투스에 대해 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의 삶에 대한 하나의 조롱이 되는 셈이다. 다른 사람들이 (...) 재빨리 해소되는 문제들에 의거해 살아가고자 하는 한, 그는 언제나 그리고 어느 시대에나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일체의 삶은 오직 깊이Tiefe로 부터의 부름, 즉 오래된, 태초의 깊이로 부터의 부름일 따름이다. 그리고 일체의 무상한 것은 그의 내부에서 그 기억들을 찾을 수 있는 어떤 미지의 근원체험들Urerlebnisse의 영상일 뿐이다.”28)


‘그의 사회적 전제들에 개의치 않는’ 인간은 현실의 실용적이고 표면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벤이 옹호하고 있는 무수한 예술가와 천재들은 모두 현실에 무능한 비사회적인 인물들이라는 사실을 공유한다. 천재의 퇴행성(退行性), “생체부정성 das Bionegative”에 대한 그의 옹호는 이와 관련되어 있다.29)반면에 많은 카페-시리즈의 시들30)에서 냉소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배금주의적 속물들은 이러한 천재들과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인간들이다. 벤은 그들을 ‘신사 Herr’라는 말로 범주화했다.31)그들은 자본적 가치를 물신화하는 한편으로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소비문화의 보전자들이다. 그들과는 달리 그의 ‘근원인간들’(: “근원숲의 인간 Der Urwaldmensch”32))은 집단사회와는 고립된 자신의 내면성, 정신성, 또는 소박한 문화의 원시주의를33)지향하는 이들이다. 위의 인용 역시 이와같은 벤의 고착된 이분법적인 세계인식을 보여주는 한 실례이다. 그의 근원지향은 “오래된, 태초의 깊이로 부터의 부름”에대한 응답이자, “어떤 미지의 근원체험”의 탐색이다. 그리고 이 근원성은 “어떤 흐릿한, 확고한 형태”를 지닌 것이자, “고향”, “한밤, 모성의 밤”으로 표상될 수 있는 것이며, 별들이 떠 있는 하늘의 궁륭과도 같이 “처음과 끝이 변함없이 동일한 것”이다.34)“처음과 끝의 동일함”은 특히 벤의 ‘근원’의 성격, 즉 ‘단자성(單子性)’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말이다. 이러한 근원세계를 그는 또한 “나와 너 사이의/ 분열”35)을 넘어선 “논리이전의 존재 형식들”(prälogischer Seinsformen), 또는 “옛날의 원시적 생물의 자웅동체성”으로도 표현한다.36)제 3제국의 전체주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변호하고 있는 그의 글 ꡔ사육1ꡕ에서는 훨씬 더 단호하게 이러한 사실이 표면화 된다.


“과거시대의 복수주의적인 국가, 잡종국와는 반대로, 전체주의 국가는 권력과 정신, 개인성과 집단성, 자유와 필연성의 완전한 동일성을 주장하면서 등장하고 있는 바, 그것은 단자적(monistisch)이고, 반변증법적(antidialektisch)이며, 지속적이며, 권위적이다.”37)


벤의 예술적 ‘근원성’이 정치적 ‘근원주의’, 즉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와 맞물리는 기이한 현상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분리, 복수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에서 벤의 ‘깊이’의 모순과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이 ‘깊이’는 시 「여행 Reise」에서 삶의 수직성에 대비되는 ‘수평성’으로 상징되며38), 시 「그대는 누구인가- Wer bist du-」에서는 “빛나는 것은 영원한 기호이며, 순수히 깊이를 연주한다”라는 구절과 더불어 “고통뒤에 잠을 자면서 고향을 찾는 율리시즈(Ulyss)”의 내면성과 연결된다.39)그것은 또한 「정시(靜詩) Statische Gedichte」에서 동방의 현자의 내면적인 성찰의 “깊이”를 가리키기도 한다.40)이러한 예들은 충분히 더 인증할 수 있다. 나찌 권력과의 결탁에 대한 회오와 좌절감이 노골화되어 있는 시 「다리 난간에 기대어 Am Brückenwehr」에서는 “역사의 폭력”에 맞선 ‘아시아적인 깊이’(: “asiatisch tief”)를 염원하면서 “내게 지옥, 가면을 /(...)/ 벗겨다오. / 내게 깊이를, 충일을, / 창조를 다오- 그것을 다오! ”라고 부르짖는다.41)그리고 그것은 시 「지하철 Untergrundbahn」에서 보듯 모성적인 여성이 이끌고 가는 “아득한 행복”의 자리, 즉 ‘바다’로 표상되기도 하다.42)

리오타르의 영역본 저서 ꡔ포스트모던의 조건ꡕ에 대한 서문으로 붙인 글에서 제임슨은 “우리시대에 이르기까지 (...) 정당화해 온 것으로 인정받았지만 이제 그 소명에서 풀려난 두 개의 신화들”을 “인간해방의 신화와 (철학적 체계를 통한) 모든 지식의 사변적인 통일이라는 신화”로 요약하고 있다.43)그리고 독일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 벨쉬 W. Welsch역시 이와 유사하게 리오타르가 위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는 모더니즘의 거대서사(Meta-Erzählungen)를 ‘계몽주의에서의 인간해방, 이상주의에서의 정신의 목적론, 역사주의에서의 의미의 해석학’으로 3분하고 있다.43)그러나 리오타르가 정의하고 있는 이러한 거대서사들은 모두 삶과 세계의 본원적이고 궁극적 가치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동일한 의미가(意味價)를 지닌다. 말하자면 이것들은 현재하지 않는 가상의 유토피아의 세계를 향한 인류의 꿈의 지표들이라 할 수 있다. 벤은 물론 마르크스주의적인 역사의 진보나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세계해석의 가능성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이다. 특히 실증적이고 자연과학적인 세계해석에 대한 거부는 그의 세계관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자아분열이나 세계의 분열을 넘어선 어떤 단자적 합일의 세계에 대한 염원을 버리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 역시 이러한 원대한 꿈의 프로그램, 즉 전통적 거대서사의 원형을 변주하고 있는 깊이의 시인이다. 그에게 있어 복수주의적 구체 현실의 분열은 통합성을 잃어버린 상대주의의 만연, 또는 유령과도 같은 ‘카오스’의 현상으로 치부되는 것이다.43)이상의 논의에서 밝힌 3가지 사항, 즉 〈 1) 소외, 2) 실용성(또는 표면성)의 거부 3) 근원지향성〉은 벤의 깊이의 시가 내장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3.2.독백과 암호의 시: 「가을의 왈츠 Valse d' automne」


      나무들 속의 붉음

      그리고 목적지에 다다른 정원들-

      색채들, 꿈꾸는.

      그렇지만 그것들은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네.

                                                  

      모든 것, 모든 것 가운데 들어있는

      가면의 얼굴:

      “해방- 파멸을 향한,

      충족-없어라.”


      연못가에, 풀밭위에

      기이한 붉음

      그 뒤의 그늘

      거룻배와 보트의.


      영원한 바다의

      물결에 부숴지는 물가

      이윽고 전설과 민족들이

      뒤섞이네.


      시원의 유혹,

      때 늦은 노래

      그리고 그 위대한

      쓸쓸한

      몰락.


      너무나 많은 색채들,

      활짝 열린 꽃받침,

      그리고 목적지들 중의 목적지:

      상실.


      모든 것, 모든 것 가운데서

      목적지에 다다른 정원,

      파멸을 향한 해방

      너무나 많은 색채들의44)

       Das Rot in den Bäumen

       und die Gärten am Ziel -

       Farben, die träumen,

       doch sie sagen doch viel.


       In allen, in allen

       das Larvengesicht:

       “befreit - zum Zerfallen,

       Erfüllung - nicht.”


       An Weihern, auf Matten  

       das seltsame Rot

       und dahinter die Schatten

       von Fähre und Boot,


       die Ufer beschlagen

       vom ewigen Meer

       und es kreuuen sich Sagen

       uns Völker her,


       das Locken der Frühe,

       der späte Sang

       und der große

       einsame

       Untergang.


       Der Farben so viele,

       die Kelche weit,

       und das Ziel der Ziele:

       Verlorenheit.


       In allen, in allen

       den Gärten am Ziel,

       befreit zum Zerfallen,

       der Farben so viel.


이 시는 1940년에 씌어지고, 사후인 1958년에 발표되었다.45)시의 내포를 제처둘 때에, 이 시에서 당장 눈에 띄는 것은 언어의 절제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완결된 구문의 해체, 파편적인 언어들, 특히 명사의 나열이 두두러진다. 그런가운데 시는 정황의 구체적인 서술이기 보다는 시적 자아의 내적인 독백이 되고 있다. 무거운 주제의식과 더불어 음울한 정서 역시 여기에 가세한다. 다른 한편으로 구체적인 정황이나 주제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음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급적 침묵하려함을 증거한다. 그런데 이 시의 침묵과 독백의 언어들에는 모호하면서도 끈끈한 의미가 붙어있다. 그러니까 언어들은 하나의 껍질 뿐인 기호로서 물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구체사물이나 색채어와 연관되는 관념어들, 즉 “목적지”, “해방”, “파멸”, “영원”, “시원 die Frühe”, “몰락”은 특히 이러한 사실을 부추긴다. 이러한 외현적인 사실에서도 벤의 시, 즉 언어-텍스트는 그것의 배후에 은포되어 있는 의미차원을 배제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영미 이미지스트 시인들이 추구하는 이미지의 투명성이나, 독일 구체시인들에게서 압도적으로 드러나는 언어-기호의 물화를 벤의 시들이 지니고 있지 못한 점도 여기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언어의 암호적 성격이 독자로 하여금 확정적인 의미의 해독을 차단하고 있기는 하지만, 텍스트의 꼼꼼한 분석을 통해서 시인이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는 의미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다. 우선 시의 풍경은 ‘붉음 das Rot’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가을의 것이다. 이 ‘붉음’은 정원, 연못, 풀밭을 물들이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자연을 물들이고 있는 조락(:“파멸” 또는 “몰락”, 그리고 “상실”)의 “색채”이다. 그런데 벤에게 있어 “파멸”은 다른 충일의 세계에로의 회귀라는 점에서 “해방”이다. 다시 말해 “목적지 중의 목적지”인 “상실”은 그것을 보상할 수 있는 다른 세계를 가상하고 있으므로, 그것의 비극성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시의 환기적인 명사어 “시원”은 벤의 그러한 가상세계를 담지(擔持)하고 있는 말이 된다. 시의 세 번째 연은 특히 이 점을 환기시킨다. 연못과 풀밭의 붉음 뒤에 드리워져 있는 “거룻배와 보트의 그늘”은 몰락에 처한 구체현실의 이면에 잠복하고 있는 벤적인 이상세계에 대한 은유이다. 여기서 ‘거룻배와 보트’는 현실의 실제사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표현주의 시대의 유명한 나르시스-모티브46)의 울림을 지니고 있다. 이 배들은 희랍 신화에서 망자를 저승(冥界)으로 나르는 ‘카론 Charon’의 것들이다. 그리하여 망자의 저승행은 이 시에서 파멸의 구원처인 “시원 die Frühe”에 이르는 길로 암시된다. 앞서 인용에서 벤은 이 “시원”을 향한 열망을 “태초의 깊이로 부터의 부름”이라 하였다. 이상의 개략적인 해석에서 다른 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벤의 때늦은 노래, 즉 “가을의 왈츠”에서도 얼마나 벤 고유의 콤플렉스인 무거운 주제가 은폐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많은 시들에서 입증할 수 있다. 경험적 현실의 구체성이 거의 제거된 그의 절대시의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밤의 파도 Welle der Nacht」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텅빈 이스트리아 궁전”이 삶의 무상을 환기시킴은 물론, 무엇보다 시의 무대가 되는 바다가 바로 벤의 ‘남방컴플렉스’47)의 중심어이기 때문이다. ‘하얀 진주가 굴러서 되돌아가는 바다’는 현실의 위기 앞에서 벤의 시적 자아가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고향같은 곳인 것이다.47)

언어의 절제는 또한 벤이 작품의 형식성을 중시하고 있음을 반증해준다. 시의 구조나 운률에 대한 분석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뒷받침한다.48)물론 벤의 시론적인 개념 ‘형식 Form’은 시의 형태미와 관련되기 이전에, 예술의 존재론적인 차원을 지닌다. 그가 말하고 있는 언어의 ‘공작성 Artistik’은 인공적인 구조체로서의 시가 삶의 무형식성, 혼돈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공작적인 예술이 그 자율성으로써 허무적 현실을 이겨내는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49)“형식을 요구하는 무의 힘”50)이나, “창조적 환희의 초월”51)이라는 표현이 단적으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시 「하나의 언어 Ein Wort」는 특히 그러한 예술의 존재론적인 성격을 주제로 하고 있다. 즉 “하나의 언어”, 그것의 암호성은 “세계와 나를 둘러싼 텅빈 공간”을 비추는 불꽃, 섬광과도 같은 기능을 한다.52)그러면 이러한 언어적 특성과 관련된 벤 자신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노래한다는 것, 그것은 문장을 만드는 것, 표현을 찾는 것, 기예가가 되는 것. 그것은 차갑고도 고독한 작업을 한다는 것, 그대를 아무에게도 향하지 않게한다는 것, (...) 모든 심연 앞에서 오직 그 벽의 메아리를 시험하는 것, 그 울림, 소리, 다체로운 효과를 시험하는 것”53)  


  “현대시는 모든 것을 창작하고자 한다. 그것의 독백적인 특징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독백적인 예술, 그것은 바로 존재론적인 공허에서 두드러지며, 모든 담화를 넘어서 있으며, 언어가 아직도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 대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라는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대화, 토론 - 그것은 전적으로 안락의자의 투덜거림에, 아무 쓸모없이 개인적인 매혹상태를 불거지게 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를 만들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다른 요소는 깊은 내면에서(in der Tiefe)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54)    


“바다 속에는 하위 동물적인 조직을 가진 유기체들이 살아 있으며, 그것들은 섬모로 뒤덮혀 있다. 섬모들은 특수한 감각적인 에너지로 분화되기 이전의 동물적인 감각기관, 보편적인 촉각기관이자, 바다라는 주변세계에 대한 관계 그 자체이다. 우리는 그와같은 섬모로 뒤덮혀있는 어떤 인간을 상상할 수 있다. (...) 그것의 기능은 특수한 것이며, 그것의 자극에 대한 인지는 예민하게 분화되어 있다. 즉 그것은 언어에, 특히 명사에 해당되는 것이며, 형용사에, 동사적 형태에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암호에, 그것으로 표현된 이미지에, 다시 말해 검은 문자, 그것에만 해당된다.”55) 


기예적 형식예술, 그리고 ‘독백 Monolog’과 ‘암호 Chiffre’의 성격을 설명하는 위의 인용들은 모두 예술의 소통성에 대한 거부를 전제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대화, 토론”은 그에게 범박한 삶의 불완전성만 증대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표면적인 현실이면에 감추어진 세계, 즉 인간의 ‘깊은 내면의 움직임’에 그는 본질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벤의 이러한 언급에는 프로이트의 심층심리학이 은닉되어 있다. ‘깊이’는 그러한 심층의 깊이이다. 그리고 그의 예술이 독백일 수밖에 없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위의 세 번째 인용은 특히 이러한 독백과 더불어 그의 시들에서 드러나는 암호 편애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검은 문자 schwarze Letter”, 암호는 바다속 원생동물을 덮고 있는 섬모의 기능에 비유된다. 그런데 벤이 어떤 논리로 그 의의를 설명하든, 이 암호는 사실적인 의미의 은폐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가장 특징적이다. 그가 많은 시들에서 애용하는 암호어, ‘명사’는 무엇보다 언어의 현실연관성을 제거하는 데에, 그럼으로써 동시에 시인 자신의 내면상태를 환기시키는 데에 소용된다. 인용 시 「가을의 왈츠」에서 색채 암호인 “붉음”이 여기에 해당한다. “붉음”은 단순히 가을 풍경의 사실적인 ‘붉음’을 지시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의 심리의 색채이자, 그 뒤에 “거룻배와 보트의 그늘”을 감추고 있는 은유어인 것이다.56)암호는 물론 은유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벤과 더불어 난해시의 대표적인 시인, 첼란 Paul Celan의 ‘눈 Schnee’, ‘돌 Stein’ 등도 이러한 암호에 해당한다. 귄터 아이히, 크롤로브, 넬리 작스, 바하만 등의 20세기 전반기 독일 모더니즘 시인들에게서 드러나는 이러한 경향은 그들이 언어의 질료성, 일차원성에 만족하고 있지 못함을 증거한다. 그들의 시적인 은유어들은 언제나 현상 이면의 배후세계를 환기시키는 데 보다 근본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 벤의 근원세계는 그러한 배후세계의 대표적이 예이다. 표면적이고 범박한 현실에 대한 그의 부정이 극단적인 만큼이나, 그는 언어의 질료성에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덧씌워 그것을 난해하게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브링크만의 시작 태도와 비교할 때에 이러한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의미환기적인 은유나 파편적인 독백으로 인해 그의 시행들이 최대한의 언어의 경제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역시 그의 시가 브링크만의 시와 구별되는 또 다른 특징이다. 브링크만의 많은 시들이 선명한 이미지나 산문적인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의 시들은 꼼꼼한 형식미를 통한 언어의 축약을 시적인 전략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60년대 중반에 휄러러가 공식화한 ‘짧은 시’와 ‘긴 시’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는 모더니즘의 ‘짧은 시’에 대한 대안으로서 ‘긴 시’의 역할을 강조했던 것이다.57)


4. ‘표면성의 미학’으로서의 브링크만의 시세계


4.1. 허구의 깊이와 순간의 향유:

           「오렌지과즙기 Orangensaftmaschine」


오렌지과즙기가                        

                                        

돌아가고 있고, 바의 주인 남자가 선뜻   

처녀의 노출된 부위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좋다. 처녀는 냉차 한 잔을                               

                                        

마시고 있다. “여기가 너무 덥지          

않아요?” 그가 말하는 데, 그건         

실내의 분위기를 다소 치장하는 질문,

                                      

그게 아니라면 뭐 겠는가? 그녀의 육체는 

탄력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팔을      

뻗어서, 잔을                         


유리판자 위에 도로 내려놓을 때,

팔 아래 땀에 젖은, 털 투성이의

반점이 하나 드러나 보이는 데, 그것이


일순 실내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지만,

생각을 바꾸어 놓은 것은 아니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그녀는

그런 식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즐기고 있다. 오랜 휴지(休止) 뒤에

바의 주인 남자가 허둥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런 휴지 속에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환풍기 소리 뿐, 아니면

대개 이런 한낮의 시간동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58)

  Die  Orangensaftmaschine


dreht sich & Es ist gut, daß der Barmann

zuerst auf die nackten Stellen eines

Mädchens schaut, das ein Glas kalten


Tees trinkt. “Ist hier sehr heiß,

nicht?” sagt er, eine Frage, die

den Raum etwas dekoriert,


was sonst? Sie hat einen kräftigen    

Körper, und als sie den Arm

ausstreckt, das Glas auf


die Glasplatte  zurückstellt,

einen schwitzenden, haarigen

Fleck unterm Arm, was den Raum


einen Moment lang verändert, die 

Gedanken nicht. Und jeder sieht, daß

ihr’s Spaß macht, sich zu bewegen


auf diese Art, was den Barmann

auf Trab bringt nach einer langen

Pause, in der nur der Ventilator


zu hören gewesen ist wie

immer, oder meistens, um

diese Tageszeit. 


브링크만의 이 시에는 벤적인 ‘깊이’가 없다. 다시 말해 벤의 시들에서 직접화되어 있거나, 은포되어 있는 거대 세계관을 여기서 찾을 수 없다. 시는 일상의 한 순간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인상적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고 있다. 그 때문에 그의 시들은 표면적이다. 여러 논자들이 지적하고 있거니와, 벤적인 깊이에 대한 이와같은 거부는 그의 시학의 출발점이 된다. 20세기 전반의 독일 모더니즘 시들의 중요한 내포인, ‘은유’, ‘침묵’에 대한 거부가 팝-단계 이전의 그의 초기시들의 가장 뚜렷한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데서 그것은 잘 드러난다. 그것들은 ‘메타퍼-비판 시들’이라 불리기도 한다.59)당대에 이미 피들러가 공언했듯이60), 모더니즘의 시들이 예술과 삶 사이의 갭을 증대시키는 엘리트 예술이라는 점이 거부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시집 ꡔ파일럿 Die Pilotenꡕ의 서문에서 그는 그런 예술의 담당자들을 “개인적인 의구심을 (...) 숭고화하는 직업적인 미학자와 시인들”이라고 공박한다.61)그의 이러한 입장은 60년대 중반 서독문단의 특수한 상황과 더불어, 그가 가장 선도적이었던 미국 팝-예술의 수용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자극받은 것이다. 1969년 미국 문화와 예술에 대한 소개서 ꡔ은막 Silverscreenꡕ과 관련한 ‘메모’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익숙한 표현수단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 시작되는 것이다(...)”62)


특수한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적인 표현수단으로서의 시에 대한 그의 관점이 여기서 강조되고 있다. 아울러 예술의 대중화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술의 확대 Erweiterung der Kunst’라는 그의 시학의 중심개념에도 이러한 사항이 저변에 자리잡고 있음은 물론이다.63)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은 벤이 삶과 분리된 고독한 자신의 언어실험실에서 만들어 내는 인공적 예술의 세계, 즉 표현세계 Ausdruckswelt64)를 삶의 허무를 대신하는 “새로운 현실 eine neue Wirklichkeit”65)로 절대시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더구나 자신의 시는 “아무에게도 향하지 않을” 것을 그는 의식적으로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형식예술이 사라진 종교의 지위를 대신하는 것으로 여기기까지 한다.66)   


위의 사실들에서 드러나는 벤과 브링크만의 차이에서 예술의 형이상학화와 그것의 대중화라는 두 명제의 대립관계를 실증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다음 단원에서 훨씬 더 구체화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인용시에서 두드러지는 다른 하나의 사항이다. 말하자면 시 전체는 지극히 정적인 현실공간 안에 자리잡고 있는 두 남녀 사이의 은밀한 심리적 갈등상황을 순간적이고 인상적인 이미지로 제시하는 데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여성에 대한 묘사는 특히 관능적이다. 그리고 두 남녀의 관계의 중심에도 이러한 관능이 자리잡고 있다. 관능은 벤에게 있어 그의 카페-시리즈의 시들이 보여주듯, 자본적 범박한 일상이나 그것의 퇴폐성을 증거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시의 시적 자아의 시선은 그러한 남녀의 관능성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다. 관능의 추구는 삶에 대한 향유욕구의 발현이다. 브링크만의 많은 시들에서 찾을 수 있는 이 향유성은 벤의 깊이의 세계가 지니고 있는 진중성(珍重性)에 대응되는 그의 시의 뚜렷한 한 양상이다. 앞서 거론한 예술의 반형이상학화, 대중화와 더불어 이 향유성의 추구는 브링크만의 표면적인 시들을 이끌고 있는 다른 하나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다. ꡔ언어로 이루어진 영화ꡕ에서 그는 벤적인 형이상학이나 마르크스주의적인 세계관을 “일관적인 사상 Ein Denken in Folgerichkeiten”67), 또는 “기존의 익숙한 관념모델 bekannte literarische Vorstellungsmuster”68)이라는 개념으로 동일시하면서, 그것을 “맛이간 낭만주의 Ein vergorener Romantizismus”69)라고 비판한다. 반면에 기존의 관념적인 작가들에 대응하는 그의 숭앙인물은 케루악, 버러스 등의 미국 팝,비트 세대의 예술가들이다. 

  “(...) 동시에 윌리엄 버러스, ‘거기 믹스기, 융스 옆에 있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라고 말한 그는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이 호언했다. 즉 ‘회색의 방을 쳐부수고 들어가라’라고.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뇌, 회색의 방, 그것은 갖가지 규정들로 인해 밀폐되어 있는 것이며, 무력하게 타부시되어 있는 것이다.”70)


‘뇌 das Gehirn’는 벤에게 있어서도 분리적 현실의 산실로서 해체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 ‘뇌수적 자아 zerebrales Ich’의 파괴는 벤 시학의 기본 모티브이다.71)그러나 이러한 뇌의 파괴가 벤에게는 그의 근원세계에 이르기 위한 예비작업이 된다. 반면에 브링크만에게 있어 그것은 억압적인 삶의 메카니즘의 파괴를 목표로 하는 한편으로, 그런 억압에서 벗어난 구체현실의 향유를 목표로 한다. 이런 점에서 캄머마이어 M. Kammermeier가 지적하듯이, 벤이 “경험적인 내용의 말소를 통해” 어떤 신뢰성을 구축하려했다면72), 브링크만은 그것의 순간적인 충일을 지상과제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시집 ꡔ풀 Grasꡕ에 실린 시 「모택동을 위한 나의 전기 Meine Biographie für Mao Tse-Tung」에서 그는 인간 억압적인 당대 삶의 메카니즘을 ‘자동문’으로 상징화하면서, “나는 이 문을 몸으로 부딪혀 연다. 계단들이 사라진다. 즉 인식은 끝나고, 삶이 시작된다” 라고 말한다.73)이 시행 속에는 물론 기계적인 이성, 또는 하버마스가 말하는 ‘도구적 이성’74)이 지배하는 서구 사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상력은 벤적인 가상의 세계, 은유의 허구세계로 탈주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구체현실의 가치를 절대화 하면서 그것의 순간적 황홀감에 도취한다. 벤의 시적인 도취와 브링크만의 도취는 이런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코카인 Kokain」, 「이카루스 Ikarus」, 「급행열차 D-Zug」, 「지하철 Untergrundbahn」, 「마비 Betäubung」 등과 같은 벤의 많은 표현주의 시들에서 나타나는 시적 자아의 도취는 최후의 근원세계에 이르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의 섹스-모티브의 시들에 등장하는 긍정적인 여성의 역할 역시 그렇다. 그 여성은 분열적인 삶의 주체인 남성을 구원해주는 근원적인 모성으로서만 찬양된다.75)브링크만은 그와는 다르다. 시 「리즈 테일러의 초대형 사진 Eine übergroße Photographie von Liz Taylor」에서 카페의 벽에 걸린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나체 사진은 순전히 순간적인 향유의 대상으로서만 가치를 지닌다. 벤의 모성이 지니는 신비성, 근원성의 담지자로서의 기능을 이 나체는 갖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해도, 그것은 누구나의 가슴 속에 남게 되는” 유일한 것일 뿐이다.76)앞의 시 「오렌지과즙기」에서 드러나는 관능의 향유적 기능이 이 시에서도 똑같이 되풀이 된다. 팝-수용의 모범적인 예가 되는 그의 시집 ꡔ파일럿ꡕ은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는 많은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물신화된 나체와 관련된 섹스지향성은 특히 그의 시에서 향유성을 증거할 수 있는 가장 뚜렷한 내용물이다. 그러나 범위를 확대할 때, 그것은 시의 내용에서 개별언어의 특징, 구문관계 등의 다양한 형태로도 나타난다.77)시집 ꡔ파일럿ꡕ의 시들 전체가 3부의 ‘코믹’으로 구성되어 있다든가, 시집 ꡔ곶질라 Godzillaꡕ의 시들이 모두 여성의 나체사진 위에 인쇄되어 있다는 점은 이러한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이와 관련하여  ‘약물-모티브’77)는 그의 향유성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제공해 준다. 더구나 이 ‘약물’은 위에서 언급한 벤의 여러 표현주의 시들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약물은 일차적으로 벤의 경험적인 자아(‘뇌수적인 자아’)의 도취에 기여하는 자극제이다. 그러나 위에서 밝혔듯이, 벤의 이 도취는 자아해체의 한 수단이자, 그의 이상세계에 도달하기위한 과정이라는 데에 더 무게가 주어진다.78)반면에 브링크만의 시적 자아는 약물이 불러일으키는 황홀성 그 자체를 향유하는 데 더 커다란 가치를 둔다. ‘록 Rock’을 비롯한 팝-음악에 대한 그의 애호와 더불어 등장하는 마리화나, LSD, Haschisch는 그러한 약물의 대표적 것들이다. 그리고 그의 미국 팝-예술에 대한 소개서인 ꡔACIDꡕ는 약물 이름 자체를 책의 제목으로 달고 있다.79)자신의 시에 대한  입장을 밝히면서 “시는 절대로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금, 여기, 지상의 록큰롤이다”79)라고 그가 단언하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벤적인 깊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실의 일상적 삶의 사실성에, 나아가 그것의 향유에 그는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피들러 L. Fiedler가 공언하고 있는 “문학의 진정한 목표”로서의 “꿈, 비전, 황홀경”의 추구80)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상의 두 작가의 차이는 양자의 세계관적 차이는 물론, 모더니즘적 에로티즘과 포스트모더니즘적 에로티즘의 차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브링크만의 향유성에는 물론 단순히 감적적인 유희나 시적 자아의 황홀한 자기충일에 머물지 않는 다른 중요한 요소, 즉 시대 비판적인 측면이 들어 있다. 요컨데 그의 향유에는 억압적인 메카니즘의 파괴나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메시지가 잠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뷀러스호프는 그의 시를 “총체적인 테러”, 또는 “파괴적인 환상”이라 불렀다.81)이에 대해서는 별개의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상의 논의에서 밝힌 두 가지 사실, 즉 깊이에 대한 거부와 향유성은 테마적인 차원에서 브링크만의 표면적인 시가 드러내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성격이다.


         4.2. 반은유/ 이미지예술론: 「오후에 Nachmittags」

  

       사고와 자살 기사로 둘러싸인 신문조각들은 그 냄새를 잃어버렸

       다. 그는 그것들 가운데서 깨어나서 시계를 쳐다본다. 그가 잠자

       고 있던 동안에, 시계는 넘어졌다.  그는 창을  연다 . . . 바깥은

       그 사이 더 밝아지지 않았고, 정제의 두통약이 화장실 거울앞 선

       반 위의 갈색 유리잔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 기다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몫인 살림살이의  공통된  꿈이다. 그들 둘다

       어느  날  그 약냄새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들은

       창가에 서서 그들의 아들을 내려본다. 그는 그의 피 흐르는 왼쪽

       다리를 움츠리고 있다.82)

        Die Zeitungsausschnitte, die sie mit Unfällen und Selbstmorden

        umgeben, haben  ihren Geruch verloren. Er wacht mitten unter

        ihnen auf und  blickt auf die Uhr, die, während er schlief um-

        gefallen ist. Er öffnet das Fenster ... Draußen ist  es inzwisch-

        en nicht heller geworden, und die  Kopfschmerztabletten ‘wart-

        en’ in dem braunen Glas auf dem Bord vor dem Toilettenspie-

        gel. das ist der  gemeinsame Traum vom  Haushalt, dem  ein

        Mann und eine  Frau verfallen  sind.  Beide  werden sie eines

        Tages wissen, daß  der Geruch  verschwunden  ist. Sie stehen

        am Fenster und sehen auf ihren Sohn herunter, der  sein blut-

        endes linkes Bein nach sich zieht.

         

벤의 「가을의 왈츠」에서와 같은 은유를 이 시에서 찾을 수 없다. 앞서 예시된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상적 상황의 사실적인 재현은 이 시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벤 류의 독일 모더니즘 시들이 지닌 ‘깊이’에 대한 거부가 브링크만의 시학의 출발점이 됨은 이미 밝혔다. 초기의 ‘메타퍼-비판 시들’의 주제, 즉 예술과 삶 사이의 갭을 늘이는 데만 기여하는 침묵의 언어, 은유의 언어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이 시들 가운데는 벤의 남방콤플렉스의 중심어이자, 그의 시적 자아의 구원처인 ‘바다’를 비판적으로 페러디화하고 있는 시도 있다.83)보다 중요한 것은 벤적인 깊이,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가 예술의 실용성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다른 시에서 그는 “그게 뭐란 말인가?/ 한 편의 시보다는/ 닫히고 있는/ 하나의 문이 더 낫다.”라고 단언한다.84)똑같은 어법으로 그는 “오늘날 거대 이념들은 싸구려 일 수밖에 없다! 그 보다는 한 알의 질 좋은 두통약이 더 낫다”85)라고 말하기도 한다. 위의 인용시에 등장하는 “정제의 두통약 die Kopfschmerztabletten”은 이런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그것은 독일 모더니즘의 비의시들이 삶과 예술 사이의 갭을 오히려 조장함으로써 “내면의 상처들”86)을 더욱 증대시키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시집 ꡔ파일럿ꡕ은 이러한 그의 시론이 변주된 전형적인 예이다. 그리고 예술의 실용성을 배격하고 “형식적인 문제들에 그토록 강렬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독일적 문화활동”에 대한 매도는 이 시집의 서문을 구성하고 있다.87)마지막 시집 ꡔ서쪽으로- Westwärts 1 & 2ꡕ에 실린 시 「한 편의 시 Ein Gedicht」에서 브링크만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 이 시 속은 아주 고요하다. 아무도/ 이 시 속에서 탄식하지 않는다. 아무도 여기/ 이 시 속에서 설교하지 않는다. 여기 이 시 속에서는/ 어떤 노동자도 싸워서 상처입지 않는다. 여기 이 시는 // 단순히 여기 있을 뿐이다. (...)”88)


“단순히 여기 있을 뿐인” 시는 ‘있다’는 그 자체의 의미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시 「오후에」에서의 시적 자아의 태도 역시 이러한 관점을 견지한다. 그는 정황을 가급적 즉물적으로 서술할 뿐, 그것을 주석하거나, 그런 서술을 통해 다른 의미를 환기시키려 하지 않는다. 서술 속에 드러나는 시의 내용 역시 진부한 가정적 일상에 관한 것일 뿐, 벤에게서와 같은 형이상학적 거대담론이 아니다. 그런데 브링크만의 이러한 시들에는 그것들을 진부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들어있다. 대상이나 정황의 특정 순간을 인상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시론 ꡔ언어로 이루어진 영화ꡕ는 바로 이러한 그의 고유한 시작의 방법론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재크 케루악Jack Kerouac의 말,  “(...) ‘개개의 인상에 몰두하라 ... 언제나 멍청하게 정신을 빼놓고 있어라 (...)  문학적이고 문법적이며 구문론적인 방해물들을 제거하라 ... 당신이 일을 중단할 때에는 이미지를 보다 잘 볼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당장 말부터 먼저 염두에 두지 말아라 ... 영화시나리오 형태로 된 책이 언어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88)속에는 이러한 방법론이 잘 시사되어 있다. 즉 대상에 대한 인상, 이미지를 중요 표현수단으로 하는 영화의 기법을 그는 자신의 시에다 응용하고자 한다. 시집 ꡔ파일럿ꡕ의 서문에서 그는 이러한 영상매체의 원리를 ‘스냅사진’ 같은 사진제작의 기법에서도 찾는다.89)

대상의 이미지화(영상화)는 벤의 암호적인 언어나 은유에 대응하는 그의 반양식적 시의 가장 고유한 표현 수단이다. 벤야민의 설명을 빈다면, 그것은 은유의 ‘아우라 Aura’, 깊이에 대응하는 기술복제 시대 예술의 표면성이 갖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90)이러한 방법론은 어떤 소재와 주제를 활용하던, 부분적으로는 그의 초기시에서부터 시집 ꡔ파일럿ꡕ, ꡔ곳질라ꡕ, ꡔ풀ꡕ을 거쳐, 마지막 유고시집 ꡔ서쪽으로-ꡕ에 이르기 까지 일관되게 실천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이미지- 예술론’ 자체를 테마로 하고 있는 시들도 적지 않다. ꡔ파일럿ꡕ의 시 「붉은 토마토 Rote Tomaten」, 「붉은 색 Die rote Farbe」은 그 단적인 예이다. 「붉은 토마토」에서 그는 “미리 토마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이/ 우리가 갑자기 구석에/ 놓여있는 토마토를// 보았을 때의/ 그 뜻밖의 감동. 그것은/ 즉석에서 그대를 충격시키는/ 하나의 이미지이다.(...)”라는 서술을 통해, 실물 보다는 이미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 즉 사물에 대한 인상은 실물이 사라진 뒤에도 “훨씬 더 오래도록 두 눈에/ 간직된다(...)”91)고 말한다. 「붉은 색」에서 “붉은 색은// 붉은 색이다 (...)”92)라는 진술은 아무런 배후 의미도 거느리지 않는 이미지 그 자체의 절대성을 노골화하고 있는 표현이다. 시 「에바 가드너의 맨발 Der nackte Fuß von Ava Gadner」에서는 영화에서 본 배우 에바 가드너의 맨발을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상미로써 반추하고 있다. 그러한 영상미의 강렬한 영향력을 시의 말미에서 그는 “기억은 한 측면이다/ 다른 한 측면을 우리는 절대로 경험하지 못한다”93)라는 진술로 요약하고 있다. 즉 실제의 경험적 대상은 그것의 소멸 이후에는 우리가 절대로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의 영상은 기억 속에서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시구는 말한다. 포스트모던 문화현상에 대한 보들리아르의 관점, 말하자면 실물 보다는 가상의 시물라시옹이 지배하는94)시대현상은 이미 브링크만에게서 현실화 되고 있음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삶 자체가 영화임’을 그는 역설했다. “삶은 복합적인 이미지관련체이다”95)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소멸된 시대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기도 했다.


그늘속에서도 기온이 높은 여름, 어떤 토요일 오후, 늦은 시각, 나는 어떤 텅빈 주차장의 넓은 아스팔트 위를 횡단해 갔다. (...) 그때 회전문이 밀쳐져 열리고, 나는 피짜점으로 들어가 스파게티를 먹었다. 그러는 동안 텔레비젼에서는 공상과학 연속물이 컬러 화면으로 방영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록큰 롤 음악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내가 들어 있었던 이 장면이 실제로는 공상과학이었다.96)


언어적 특징과 관련하여 브링크만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다른 중요한 사실은 일상의 통속적인 질료들의 사용이다. 그의 시의 소재원은 한 마디로 소비상품과 대중매체가 지배하는 도시적 일상 삶의 현실과 그 주변환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소재수용상의 이러한 특징에서도 벤과 브링크만은 대조적이다. 벤은 현대시의 생성과 관련하여 “몽롱한 창조의 핵, 영적인 질료 einen dumpfen schöpferischen Keim, eine psychische Materie”97)가 시작의 원천이 됨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창조의 핵”이 되는 작가 내면의 “영적인 질료”를 현상화 하는 것이 시작의 중요한 방법이 된다. 앞서 거론한 그의 “근원이미지들 Urbilder”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질료”들이다. 현대적 자아의 특징은 “전체적인 외부현실을 내적인 체험으로”98)가지는 데 있다는 그의 말도 사실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반면에 브링크만은 시인의 외부에 존재하는 일상의 질료들 그 자체를 시작의 토대로서 수용한다. 그는 노골적으로 “누구나 쉽게 접해볼 수 있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질료도 존재하지 않는다”99)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브링크만의 질료들이 도시적인 데 반해, 벤의 그것들이 대체로 자연친화적이라는 점도 두 작가의 두드러진 차이를 보여준다. 벤의 시에서도 물론 도시적이고 일상적인 질료들이 전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후기 시들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것들이 시적으로 소용되는 목적에 있어서 브링크만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벤의 시론과 실제 시들이 보여주고 있는 반문명적인 후퇴성, 즉 환원주의Attavismus는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증거한다. 이미 지적했듯이 벤의 이러한 원시주의적 경향은 이합 핫산이 열거하고 있는 모더니즘의 항목들에서도 중요 성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벤의 시 「노래들 Gesänge」100)과 브링크만의 시 「죽은 자연 Nature morte」101)은 이러한 두 작가의 입장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예이다. 다름 아니라 벤이 추구하는 인간의 분열 이전의 원시적인 자연이, 브링크만에게는 그 효험을 상실한 ‘죽은 자연’으로 폄하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사실들을 포함하여 브링크만의 통속적인 소재수용에는 이미 강조한 ‘예술의 실용화, 대중화’라는 그의 문학의 기본강령이 저변에 자리잡고 있다. 테오발디가 70년대 새로운 시의 추세를 요약해서 말하듯이 그의 시는 “독백 대신에 전달, 이념 대신에 체험, 암호 대신에 일상어”102)를 지향한다. 초기시 「반창고 Leukoplast」에서 그는 벤적인 은유의 시들이 갈라놓은 삶과 예술사이의 갭을 메꾸는 데 그의 시의 일차적인 효용이 있음을 강조한다. 요컨데 그는 자신의 시가 그러한 상처의 틈을 메꾸는 ‘반창고’ 역할을 하고자 한다.103)이와같은 그의 의도속에 피들러의 반엘리트 예술, 미래적 대중예술에 대한 선언이 은닉되어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104)ꡔ언어로 이루어진 영화ꡕ에서 그는 새로운 미국 문화의 경향을 열광적으로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거만하게 독점을 요구해 왔던 계몽적인 의식, 그것은 아무 쓸모 없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이미지들로 확장되어야 하며, 표면적인 것(Oberfläche)이 되어야 한다. 예컨데 섹스같은 데서 서양의 계몽적인 의식은 그 효과의 미약함이 실증될 수 있다. 광고는 그 영향력을 보다 효과적으로 발휘했다 (...) 하나의 긴 연속체를 이룬 이미지들, 그것들은 그것들이 위호하는 상품에 대하여 그것들의 고유한 율동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105)             


그의 이미지 예술은 전시대의 엘리트 예술, 즉 계몽적이거나 비의적 세계관의 독점에 대한 대안적 성격을 띤다. 변화된 시대는 그러한 거대담론의 입지를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영상매체의 원리를 응용한 ‘순간적인 지각의 재현’, 또는 시각 예술의 중시는 대상의 배후에 숨어있는 비의적 의미의 해체, 즉 대상의 심층 보다는 표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통속인 질료의 수용에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들에 ‘대중적인 시’라는 부제를 붙이는 데서도 예술의 대중화라는 그의 입장은 잘 드러난다.106)시집 ꡔ파일럿ꡕ에서는 특히 대중가수, 영화와 영화배우들, 코카콜라, 아이스크림, 세제 등의 상품들, 베트 멘, 슈퍼 멘 같은 만화의 주인공들 등이 시의 소재로서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다.107)이와 아울러 시행의 산문화를 비롯한 그의 시의 구성상의 특징들은 벤의 시가 지향하는 엄격한 형식성에 대비되는 또 다른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그후 70년대 서독시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이 자리에서 생략하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특징들이 벤적인 ‘깊이’에 대응하는 그의 표면예술의 중요 성분들이라는 사실이다.



5. 맺는 말


지금까지의 논의 사항들을 개괄, 결론지으면 다음과 같다. 우선 벤의 시세계의 모더니즘적인 성격, 즉 ‘깊이’는 소외적 자아와 그의 ‘근원추구’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삶으로부터의 분리, 소외는 벤의 기본상황이자 모더니즘 시인들의 기본상황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의 문학에 직, 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있으면서 그의 시를 있게 하는 가장 원천적인 동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외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삶과 예술에 관한 존재론적 물음들은 그의 시에 형이상학적 ‘깊이’를 더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의 ‘근원추구’ 역시 이러한 소외적인 자아의 상황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소외를 넘어서는 어떤 가상의 세계를 그의 시들은 최종적인 지향점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형태로 벤의 퇴행적인 상상력이 변주하고 있는 이 가상의 세계는 현실의 분리, 복수주의에 대응하는 단자적인 합일의 세계이다. 특수하기는 하지만 다른 거대담론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이상적이고 총체적인 삶에대한 개인의 원대한 꿈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적이다. 암호나 독백으로 특징화되는 그의 시적인 표현수단들은 이러한 그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 기여하는 요소들이다. 그것들은 언어를 현실연관성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이와 더불어 예술의 비실용성, 정신성, 형이상학적 가치에 대한 옹호 역시 삶과 예술의 극단적인 분리를 토대로 하는 벤의 모더니즘 예술이 보여주는 중요한 사항들이다. 그러나 브링크만의 시세계는 이상의 벤 문학의 현상들과는 매우 상반된다. 우선 그는 벤적인 깊이,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를 그의 시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벤적인 이상주의나, 계몽적이거나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해방의 프로그램이 그에게는 다같이 현실과 유리된 관념론으로 부정된다. 그는 그러한 거대담론들이 현실과 예술 사이의 갭을 증대시켰을 뿐이라고 간주한다. 이와 관련하여 예술의 대중화, 반엘리트화, 실용화는 그의 문학이 표방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다. 벤이나 첼란같은 독일 모더니즘 시인들이 애용한 은유나, 암호에 대한 그의 거부도 이와 연관된다. 그의 시들은 구체현실의 이면에 있다고 가정되는 어떤 세계도 은유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대상 자체의 물적인 가치를 절대화 한다는 점에서 표면적이다. 이러한 표면성은 그의 ‘이미지-예술론’에서 이론적인 근거를 마련한다.

위의 사항들과 더불어 브링크만의 시세계에서 두드러지는 또 한 가지 사실은 시적 자아들이 추구하는 순간적 황홀에의 동경, 즉 향유성이다. 향유성의 추구는 그의 섹스-모티브의 시들을 비롯하여 시의 여러 요소들에서 나타난다. 그 가운데서도 ‘약물-모티브’는 그러한 향유성을 증거할 수 있는 단적 예이다. 그러나 벤의 시적인 도취에 소용되는 약물들이 궁극적으로 그의 이상향인 근원세게에 이르기위한 촉매로서 작용하는 반면에, 브링크만에 있어 그것은 현실의 순간적인 충일 그 자체를 목표로 한다. 벤의 섹스-모티브의 시들에 등장하는 모성으로서의 여성들과 브링크만의 향유대상으로서의  여성들과의 근본적인 차이도 여기에 있다. 브링크만의 향유성에는 물론 시대비판적인 메시지가 함께 들어 있다. 요컨데 그의 시적인 황홀경의 추구에는 계몽적이거나 도구적인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증오와 반항의 감정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벤의 허무적이자 염세적이며, 음울한 자아들이 추구하는 영원한 근원성과 브링크만의 가변적이고 순간적인 자아들이 추구하는 표면성은 여기서 가장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두 작가의 기본성향에서 그들의 시세계가 내포하고 있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을 유별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은유- 예술론’(벤)과 ‘이미지-예술론’(브링크만)의 대비관계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소재의 수용과 형상화 면에서도 이 관계는 설명될 수 있다. 벤이 자신의 내적인 질료(“영적인 질료”)를 창작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브링크만은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외적 현실의 일상적인 질료를 창작의 토대로 수용한다. 동시에 벤의 시적인 질료들이 그 내포에 있어 본질적으로 자연친화성을 지향하고 있는 반면에, 브링크만의 그것들은 도시성, 상품사회의 물적인 표면성을 근본적으로 지향한다.

그러나 앞서 전제했듯이 두 작가에게는 이상의 차이에 못지 않는 공통성 역시 존재한다. 무엇보다 계몽적이거나 도구적 이성사회에 대한 거부를 두 작가는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삶과 예술 사이의 갭을 해소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브링크만의 시에서도 소외는 그의 시세계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기본 테마로서 작용하고 있다. 벤의 허무주의적 세계관과 더불어 특히 그의 퇴행적인 상상력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음을 브링크만 자신이 실토하기도 했다.108)나아가 미국 팝-예술에 대한 열정이 가라앉은 다음에 나온 유고시집 ꡔ서쪽으로-ꡕ는 “몰락의 국면에 처한 서구문명의 상태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서정적 그림”109)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벤과 유사한 종말의식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의도와는 달리 그의 많은 실제의 시들은 구문과 표현상의 특수성 때문에 대중적인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난해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창작의 기법과 관련된 벤의 후기 예술론과 브링크만의 표면예술론 사이에도 분명한 공통성을 추출할 수 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검토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이러한 사항들에대한 고찰을 병행하지는 못했다. 그러한 문제들은 다음 기회에 좀더 심도있게 거론하고자 한다. 결과가 어떻든 이 글의 논의에서 드러난 두 작가의 시세계의 상반성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주제를 넘어, 독일 서정시사에서 60년대 중반이전과 이후의 시사의 전개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 깊다. 그들의 시세계는 각기 그들이 편입된 당대 독일시의 중심적인 내포들을 전형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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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Moderne und Postmoderne

- Ein Vergleich der Dichtungswelt von G. Benn und R. D. Brinkmann -


                                                      Lee, Seung-Uk


Die vorliegende Arbeit versucht, die Dichtungswelt von Gottfried Benn und Rolf Dieter Brinkmann unter bestimmten Gesichtpunkten zu verstehen, und sie zu vergleichen. Vor allem wird Benn als ein typisch moderner Dichter und Brinkmann als ein wichtiger postmoderner Dichter betrachtet. Dazu werden die zwei literarischen Begriffe, 'Tiefe' und 'Oberfläche' eingeführt. Sie sind Kriterien, in der sich ihre Dichtungswelt voneinander unterscheidet: viele Gedichte Benns sind gekennzeichnet durch die moderne 'Tiefe', ebenso wie viele Gedichte von Brinkmann durch die postmoderne 'Oberfläche'. Diese zwei kernhaften Bestandteile können in ihren Gedichten unter den beiden  folgenden größeren Aspekten erklärt werden: 1) in ihren Themen 2) ihren Ausdrucksfor-

men und -mitteln (bes.Wortmaterialien). Unter den  bisher genannten Gesicht-

punkten wird diese Untersuchung wie folgt zusammengefaßt.

1) In der Bennschen Dichtungswelt kann die moderne ‘Tiefe’ in zwei Hauptpunkten am klarsten gezeigt werden: erstens in der Verlorenheit, der Entfremdung des dichterischen Ichs in der Wirklichkeit. Zweitens in der Ur-Idee, die in vielen seinen Gedichten konsequent erscheint. das tief-verwur-

zelte Entfremdungsgefühl von Benn vermehrt einerseits die Kluft zwischen Leben und Kunst, andererseits führt es ihn immer dazu, daß er sich mit den metaphysischen, ontologischen Fragen von Leben und Kunst beschäftigt. Seine dichterische Urwelt ist eine Art von Ersatzwelt für die verlorene Wirklichkeit. Sie stellt eine Utopie vor, bes. eine totalitäre, monistische Fiktionswelt. Die Bennsche Konzeption, die Unnutzbarkeit von Kunst, bezieht sich auf diese Hauptsachen. Seine wichtigsten Ausdruckselemente, Monolog und Chiffre dienen auch dazu.

   2) Die Absagung an die Bennschen 'Tiefe', d.h. an die unwirklichen, fiktionellen Ideen bildet den Ansatzpunkt für künstlerisches Schaffen von Brinkmann. Er will  den esoterischen, hermetischen Sinn hinter den Wirklich-

keitsobjekten ausnehmen, den so viele moderne Dichter wie Benn, P. Celan usw. mit ihren verschiedenen Metaphern in ihren Gedichten evokatieren wollten. Und dadurch will er einen größeren Wert auf die Dinglichkeit, die Oberfläche des Objekts legen. In seiner wichtigsten Kunsttheorie, 'Der Film in Worten' involviert sich wesentlich diese Konzeption. Daneben gibt es noch ein anderes  wichtiges Merkmal in seinen vielen Gedichten: die starken Genußsü-

chte seines poetischen Ichs. Sie sind auch ein wesentlichster Aspekt, der seine Dichtungswelt von Benn differenziert.    

Mit den oben genannten Tatsachen zielt seine 'Ästhetik der Oberfläche' vor allem  auf die Popularisierung, den praktischen Gebrauch der Kunst. Die ver-

schiedenen, trivialen Sprachmaterialien, die seine Gedichte ausbilden, werden dafür benutzt. Sie kommen meistens aus der alltäglichen Lebenswelt,  aus der technisierten Warengesellschaft. Also gibt es einen  großen Unterschied zwis-

chen Benn und Brinkmann in Sprachmaterialien. Damit kann man auch hinzu-

fügen, daß im Gegensatz zu Brinkmann die meisten Bennschen Sprach mater-

ialien naturverwandschaftlich sind. Außerdem hält  Benn “einen dumpfen sch-

öferischen Keim, eine psychische Materie”110)für sein Schaffensurmotiv.   

Die Dichtungswelt der beiden Dichtern kann unter weiteren Aspekten verglichen werden. Ich bitte darum, die Inhalte der vorliegenden Arbeit dabei zu berücksichtigen.



출처: https://lectio.tistory.com/1089?category=272960 [Lectio Div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