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유럽문학에 나타난 가족 정체성의 문제*

하나님아들 2020. 1. 4. 10:16

유럽문학에 나타난 가족 정체성의 문제*


김수용․곽민석․조성애․이상룡․김임구**


I. 들어가는 글


‘가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오랫동안 가치 있고 인간적인 공동체이자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기본 단위로서 이해되어 왔다. 다른 대부분의 공동체가 구성원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 졌고, 그 결과로서 이러한 관계를 조정해주는 법이나 이에 준하는 규율, 규정 같은 타율적 질서를 필요로 하는 반면에, 가족은 혈연을 통한 사랑과 이해, 다른 구성원에 대한 배려와 존중 등의 자율적이며 도덕적인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인간적 공동체로 인식되어온 것이다. 유럽에서도 가족은, 최소한 19 세기 중반기까지는, 국가와 사회, 민족 등의 기본을 이루는 공적 성격의 공동체이자 동시에 신과 자연에 의해 주어진 하나의 성스러운 영역, 개개인의 인격적이며 행복한 자아실현이 가능한, 그래서 다른 어느 것보다도 우선하여 보호받아야 될 소중한 영역으로 간주되었다.1)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급속한 산업화의 결과로 사회의 구조가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성역으로서의 가족의 개념도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2)사회학의 발달과 마르크시즘의 대두로 인해 가족의 개념은 역사적, 체제적 및 구조적 관점에서 고찰되었고, 그 결과로 “시민적 가족”, “산업시대 이전의 가족”, “가부장적 가족”, “파트너십에 의거한 가족”, “전통적 가족” 또는 “현대적 가족”등의 여러 의미로 세분화되었다.3)이러한 사회학적 분석이 문제시한 것은 무엇보다도 가족의 이른바 “자연 소여성 Naturgegebenheit”, 즉 가족이 인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자연에 의해 주어진 유기적 공동체라는 전통적인 가족관이었다.4)이 가족관은 가족 구성원들간의 관계를 유기적인 자연적 조화로서 파악한다. 따라서 아버지의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나 어머니의 가족들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 자식들의 부모들에 대한 절대적 복종 등을 자연의 근원적 질서에 의거한 것으로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자연 소여적 가족 개념이 의문시되면서 가족은 더 이상 유기적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인 구성물로서, 그 안에서 구성원들의 역할과 권리가 상충하며, 세대 차이에 의한 의식이 서로 충돌하는 갈등의 영역으로 파악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해방 운동에 따른 가부장의 권위의 추락이나 최근 법률적인 차원으로까지 그 논의의 폭이 확산된 아동해방5)문제는 이러한 가족관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성역 ‘가족’의 숨겨진 문제들에 대한 집중적인 고찰은 가족을 특별한 장애의 장으로서, 즉 치유가 필요한 “환자 Patient”로서 파악하는데 까지 이르렀다.6)

본 공동 연구는 이러한 가족 개념의 변화가 현대의 유럽 문학에서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18세기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유럽의 현대화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생성과 산업 혁명, 그리고 그 와중에서 급격하게 진행된 사회 구조의 변혁과 가치관의 전도 등이 가족의 개념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독일, 프랑스 및 러시아의 몇몇 문학 작품을 분석하여 밝혀 내려는 것이다. 시민계급의 대두와 봉건 체제의 몰락, 생산방식의 획기적인 발달, 이에 상응하는 산업화와 대도시의 생성, 여성의 생산 현장 투입과 노동 등은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를 크게 바꾸어 놓았으며, 이러한 변화는 여러 가지 형태로 문학화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스스로를 유럽의 현대에 대한 하나의 문화사적 및 사회사적 접근으로서 이해한다. 이러한 접근의 과정에서 역사적 시각이 우선함은 연구의 성격 자체에서 연유된 것일 것이다.


I.1. 18세기 후반기 독일의 “시민적” 가족:

      가족의 도덕화와 은폐된 해방운동


우리는 보통 가족이라는 말에서 “부모와 아직 독립하지 못한 자녀들로 이루어진 기초적 가계(家計) 단위”를 생각한다. 아니면 좀더 광의의 의미에서 이 말은 공동의 가계를 운영하고 있는 친척 (친족과 외족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서)까지도 포함한다.7)전자는 일반적으로 “소가족 Kleinfamilie” 또는 “개별가족 Einzelfamilie”으로 불리며, 사회학에서는 “핵가족 Kernfamili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8)후자, 즉 “대가족 Großfamilie”은 최근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쇠락해서 가족으로서의 실질적 의미를 거의 상실한 상태이다.

이러한 가족의 의미는 중세나 고대에도 큰 차이 없이 통용된 것이기도 한 바, 여기에는 서로 상이한 두개의 요소가 교차하고 있다. 첫 번째 요소는 혈연적인 것이며 이는 부모, 자식 등으로 이루어진 구성원들의 혈연 관계를 말해준다. 두 번째 요소는 경제적인 것인 바, 이는 구성원들이 하나의 동일한 ‘가계’에 공동으로 속해 있음을 말해준다. 혈연적 관점에서는 가족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자연적 공동체이다. 그러나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가족은 경제적 성격이 강한 사회적 공동체이다. 18세기 초까지 가족의 개념에 부모와 자녀 그리고 친척들 외에도 집안의 하인들까지 포함된 사실은 가족이 혈연 공동체일 뿐 아니라 공동의 가계라는 경제적 공동체임을 고려해 보면 수긍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9)

이와 같이 이중적인 본성이 교차하던 가족의 개념에서 혈연적, 자연적 요소가 절대적으로 강조되고, 그 결과로서 가족을 신과 자연에 의해서 주어진 성스러운 공동체로 만든 것은 18세기 중반기부터 급격하게 부상한 유럽의 시민계급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관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시민계급의 결혼과 사랑에 대한 전혀 새로운 주장이다.       

결혼은 가족을 이루는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그러나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독일에서의 결혼관은 귀족이나 시민계층 구분 없이 무척이나 현실적인 것이었다. 결혼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는 결혼당사자들의 서로에 대한 호감이나 애정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대한 고려였다. 19세기 독일의 사회학자 비더만 K. Biedermann이 확인한 것처럼 “사람들은 오늘날의 생각으로 보아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덤덤하고 냉담하게 삶의 합일에 들어선 것이다”.10)이러한 현실적인 결혼관에서 경제적인 고려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11)

그런데 18세기 중반기부터 독일의 시민계급은 사랑을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결혼에 있어서의 이해 타산적 고려는 점차 비인간적 죄악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아직도 전통적인 결혼관을 고수하던 귀족들과의 도덕적인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도덕적 가치관의 갈등은 궁극적으로는 시민계급의 정치적 해방운동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인간적, 도덕적으로 파악된 “가정”과 “가족”의 개념은 이러한 투쟁에 있어서 시민계급의 이념적 무기가 되었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유럽의 역사에서 처음부터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고 지배권을 행사해온 것은 “귀족 계급”이었다. 나라와 왕조들은 몰락하고 또 다시 태어났지만 귀족들의 지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중세의 긴 봉건시대를 거쳐 18세기 후반기 및 19세기 전반기의 시민혁명에 의해 근대적인 의회 민주주의가 태어날 때까지 귀족들에 의한 정치권력의 독점은 거의 절대적이었다.12)기원전 3 - 4세기경의 로마 시대에 이미 귀족과 국가 통치는 동일한 것을 의미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항시 귀족에 속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으로 귀족에 속한 사람은 정치를 했다.”13)그 후 2000여 년이 지난 19세기 전반기의 독일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비록 절대 왕정의 생성으로 인해 봉건귀족의 독립과 자체 통치권은 거의 소멸되었지만, 절대 왕가 자체가 세력이 확장된 귀족 가문이었으며, 국가의 통치권과 권력에의 참여에서 귀족들의 우선권은 절대적이었다. 당시 프러시아의 “일반적 토지법 Allgemeines Landrecht”은 귀족에게 “국가를 방위하며, 국가의 대외적 존엄과 내적인 구성을 지원하는 임무”를 전담시킴으로서 귀족 계급을 국가내의 유일한 “정치적 신분”으로 규정하고 있다.14)로마의 공화정 res publica에서도 그리고 근대적 의미의 국가를 이룬 독일의 절대왕정에서도 귀족들은 통치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유일한 계급이었다.

절대왕정에서 국가의 통치권을 함유하는 “공적 영역”15)이 전적으로 귀족들의 것이기에 국가의 지배권 행사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단지 통치의 대상일 뿐인 시민 계급의 국가 공권력에 대한 관계는 부정적이고 피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피지배자로서 “공적 영역”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있기에 오로지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어야하는 “사인 Privatperson”이어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19세기 초반까지의 언어사용에 있어서 명사 “시민”은 “사적인 인간”, 형용사 “시민적”은 “사적”의 의미로 통용되었다. 그들의 삶의 공간이 가정과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에 국한되어 있기에 사인인 시민계급 출신은 정치가나 국가 권력기관의 관리가 되는 대신 한 집안의 “가장 Hausvater”이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8세기에 집필된 많은 글에서 흔히 등장하는 “시민 = 가장”이라는 등식은 시민계급의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위치의 언어적 반영이다.16)“시민적”이라는 형용사가 “사적”이라는 큰 의미의 틀 안에서 “가정적 häuslich”, “가족적 familiär”의 부차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민계급은 자신들의 ‘사적’ 존재의 영역인 가정과 가족을 하나의 도덕적 성역으로 간주했고 이 성역을 비도덕적인 귀족과의 투쟁에서 중요한 이념적 무기로 사용한 것이다.

아직 귀족에 필적할만한 사회적인 신분상승이나 경제적인 부를 창출하지 못한 18세기 독일의 시민계급은 자연히 귀족과는 다른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이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했으며, 부를 형성하기 위해서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근면’, ‘절약’, ‘소박’, ‘검소’ 같은 단어들은 따라서 오래 동안 시민적 삶의 표상이 되었으며,17)시민계급은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능력에서 기인된 근면하고 검소한 삶의 양식에 높은 도덕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근면함과 검소함은 비록 외면적으로는 화려하지도 않고 돋보이지도 않으나 귀중한 ‘내면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경제적인 합리성에 근거한 독특한 ‘시민적 도덕’이 태생된 것이다. 그리고 이 시민적 도덕 역시 시민적 가정을 도덕적 성역으로 격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시민적 가정은 부부간의, 부모와 자식간의, 형제들간의 관계가 이해 타산적 고려가 아닌 사랑과 애정으로 맺어진 곳일 뿐 아니라, 근면하고 소박하며 검소한 삶의 장소가 된 것이다. 

시민적 가족과 가정의 도덕성은 귀족들의 화려하고 낭비적이며 방탕한 생활과 대비되면 더욱 더 큰 정신적 우월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 자명하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18세기 독일의 시민계급은 시민적 도덕의 내적 가치를 귀족들의 외면적인 삶, 귀족 세계의 굳어져 버린 형식이나 관습, 내용 없는 예식 등과 집요하게 대비시킴으로서 귀족들을 부도덕한 무리로서, 그리고 자신들을 도덕적인 사람들로서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적인 시민’과 ‘부도덕한 귀족’간의 대비는 18세기 독일의 역사적 상황에서 독특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I.2. 시민적 도덕의 정치적 의미


레오 발레트 Leo Balet와 게르하르트 E. Gerhard는 그들의 공저인 『18세기에서의 독일의 예술, 문학 및 음악의 시민화』에서 18세기를 도덕의 세기로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도덕에 대해 철학적 사유가 행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사람들이 모든 예술과 문학, 연극, 음악을 이처럼 남김없이 도덕에 바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사람들이 연극과 소설에서 시대의 도덕이념이 구현된 인물들을 형상화하려고 이처럼 애쓴 적은 일찍이 없었다.17)


18세기에 이와 같이 도덕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고, 또 도덕이 그처럼 강조되고 요구된 것은 당시 시민계급의 정치적 해방운동의 일환으로서 귀족들에 대한 체계적인 이념적 투쟁이 점차 강화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도덕은, 최소한 시민계급이 프랑스 혁명에서처럼 귀족계급에 맞서서 실질적인 정치 투쟁을 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하지 못한 동안에는 귀족들에 대한 최상의 이념적, 사상적 무기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덕의 무기를 통하여 귀족들의 독점적 지배권을 정당화해주는 이념적 근거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시도했다.

유럽의 귀족들이 천여 년이 넘는 장구한 기간동안 지배세력으로서 존속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출생의 원칙을 통하여 시민들과 농부들의 귀족으로의 신분상승을 엄격하게 막아온 것과 동시에 자신들을 끊임없이 국가와 사회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로 내세워서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 해왔기 때문이었다.  독일어로 귀족을 뜻하는 Adel은 고대독어 adal (“고귀한 혈통 edles Geschlecht”의 의미)과 edili (“가장 고귀한 사람들 die Edelsten”의 의미)에서 연유된 것으로 이미 그 말 자체에 귀족이 뛰어난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귀족들이 자신들을 그들이 속한 사회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매번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념들을 자신들의 혈통적 특성으로, 이러한 지배적 이념들에 의해서 이상화된 인간상을 그들 자신의 모습으로, 그리고 이들 이념들이 높이 내세운 덕성을 자신들의 신분적 덕성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대표적 실례로서 유럽의 귀족들과 기독교의 교회간의 이념적 접근을 들 수 있다. 기독교가 전 유럽의 지배적인 종교로, 기독교의 교리가 유럽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자리를 잡자 귀족들은 기독교의 교회에 접근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하여 “귀족 개념의 기독교적 채색”18)이 이루어 졌다. 볼프람 폰 에쉔바하 Wolfram von Eschenbach의 『파르치발 Parzival』은 교회와 귀족의 접근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운문소설이 기독교적 지고의 덕성과 전통적인 귀족적 기사도의 최고의 덕성을 완전한 조화와 합일로 이끌어 가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귀족들에 의한 뛰어난 사람들로서의 자아 파악은 일반적으로 귀족정치를 뜻하는 단어인 Aristokratie (영: aristocracy, 불: aristocratie)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국가론 에서 유래하는 이 단어는 어원적으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의 지배”19)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귀족들에 의한 독점적 지배의 이론적 근거는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 (즉 시민들과 농부들)을 위해서 후견인의 역할을 하는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시민계급이 지속적인 도덕의 논의를 통해서 공적영역 (즉 귀족들의 세계)의 비도덕적 본성을 폭로하고 또 더 나아가서 사적영역의 시민계급을 진정한 도덕적인 집단으로서 내세운 것은 귀족정치를 뛰어난 사람들의 통치로서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를 말살하려는 데에 그 숨은 목표가 있었다. 귀족들의 “비도덕적” 진면목이 밝혀지면, 그들에 의한 지배가 “가장 뛰어난 사람들의 지배”가 아니라 “가장 사악한 자들의 지배”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귀족 정치, 즉 가장 뛰어난 사람들의 지배는, 그런 것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가장 소망스러운 정부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혐오스러운 단어는 항시 속아온 백성들에게는 이제 그 반대를, 즉 가장 사악한 자들의 지배 Kakistokratie를 의미한다”20)라는 게오르크 포르스터Georg Forster의 한탄은 시민계급의 도덕적 공격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8세기 시민계급의 집중된 도덕의 논쟁, 그리고 이른바 “시민적” 장르인 시민비극과 “도덕 주간지 Moralische Wochenschriften”21)를 통해 끊임없이 진행되어온 작업, 즉 비도덕적 집단으로서의 귀족계급의 정체를 폭로하며 진실로 도덕적인 계층으로서 시민계급을 격상시키는 작업은 귀족정치의 이데올로기를 그 바탕에서부터 허물려는 은폐된 정치적 투쟁의 모습이었으며,22)시민적 가정은 이 투쟁에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독일 계몽주의 시대의 가장 뛰어난 극작가인 레씽 Gotthold Ephraim Lessing의 대표작 『에밀리아 갈로티 Emilia Galotti』는, 냉혹하고 이기적이며 타락한 공적영역 (즉 정치 권력을 가진 귀족들의 세계)과 인간적이며 자기 희생적이고 도덕적인 사적영역( 즉 시민적 가정으로 대변되는 시민계급의 세계)의 갈등을 테마화 함으로써, 이 같은 정치투쟁에 대한 대표적 실례를 제시해 주고 있다.


II. 『에밀리아 갈로티』: 시민적 가족의 도덕적 승리


II.1. 궁중의 세계: 정치적, 공적 영역


레씽의 『에밀리아 갈로티』에는 두개의 서로 다른 영역간의 갈등이 작품의 기본 골격을 구성하고 있다. 작품의 모든 사건들이 기본적으로 이 갈등에서 연유하고 있으며, 극중 인물들간의 상호 관계도 두개의 영역간의 갈등구조라는 이 기본 축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말하자면 이 두 영역간의 대립과 갈등은 이 작품의 지배적 현상인 바, 이는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 작가의 등장인물 소개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모두 10여명의 인물중 갈로티 일가의 에밀리아, 클라우디아, 오도아르도는 아무런 직함도 가지지 않은 단순한 사인(私人)으로 소개된다. 오도아르도와 클라우디아에게는 단지 에밀리아의 부모라는 설명만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반면에 헤토레 곤자가, 마리넬리, 카밀로 로타, 아피아니, 오르시나등은 “구아스탈라의 왕자”, “왕자의 시종관”, “왕자의 고문”, “백작”, “백작 부인”등의 공식 직함이나 작위(爵位)를 가진 공인(公人)들로 소개된다. 안젤로를 위시한 하인 몇 명 등 천민 층에 속하는 인물들과 그 소속이 불분명한 화가(畵家) 콘티를 제외하면 등장인물들은 개인적, 사적 영역의 인물 군과 궁중의 세계에 속하는 공적 영역의 인물 군으로 뚜렷하게 양분되어 나타난다.

르네상스 시대, 이태리의 한 절대 왕국을 무대로 삼고 있는 『에밀리아 갈로티』의 제 1막은 절대주의 체제 하에서의 절대군주와 그 주변의 봉건적 귀족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대한 하나의 전형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공적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철저한 도구적 이성과 도덕 불감증이다.

“구아스틸라”라는 소 왕국의 절대적 지배자인 곤자가 왕자는 정부(情婦)인 오르시나 백작부인에게 싫증을 느끼고 시민계급 출신의 에밀리아에 대한 사랑에 빠져있다. 백작 부인의 초상화를 위임받은 화가 콘티가 우연히 같이 가지고온 에밀리아의 초상화를 본 왕자는 콘티에게 큰 대가를 치르고 그 초상화를 구입한다. 이 초상화 앞에서의 왕자의 독백은 에밀리아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왕자: (---) (그림을 향하여) 내가 당신을 구입하는 데는 어떤 대가도 너무 싼값이오. 아! 예술의 아름다운 작품이여, 내가 그대를 소유한 것이 사실이란 말이오? - 자연의 더 아름다운 걸작품이여, 누가 그대를 소유하고 있든 간에! 착한 어머니여, 당신이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든 간에! 늙은 불평꾼이여, 그대가 무엇을 원하든 간에! 그저 요구하시오, 그저 요구만 하시오! - 그러나 나의 마술사여, 나는 그대를 당신 자신으로부터 직접 사들이기를 가장 바란다오! (2, 135)23)


위의 인용문의 “값”, “소유”, “대가”, “사들임”등등의 단어들은 왕자에게 중요한 것은 에밀리아와의 인간적 만남이 아니라 그 여인의 소유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24)에밀리아의 인간적 존엄성이나 품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으며 사람도 상품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판매의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인정하지 않는 왕자의 도덕 불감증은 1막의 마지막 장에서 다시 한번 극명하게 들어 난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에밀리아를 몰래 훔쳐보고 또 기회를 엿보아 사랑을 고백하려는 급한 마음으로 나가려던 왕자는 고문인 카밀로 로타가 내어놓은 사형 집행서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기꺼이 윤허함”이라고 급히 서명한다. 이 서류가 한 인간의 생사여부를 결정짓는 사형집행서이며 그래서 결정에 신중을 기해줄 것을 묵시적으로 요구하는 로타의 발언에 대한 왕자의 대답은 “나 바쁩니다”(2, 142)와 “나 나가야 되오, 내일 (---) 더 이야기합시다”(2, 143)였다. 한 왕국의 절대적 지배자인 왕자는 통치자로서의 책임의식이나 도덕적 원칙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의 최고의 지배 법칙은 자신의 욕구의 충족일 뿐이다. 왕자의 도덕적 성찰의 능력 부재, 인간 존엄성과 생명의 경시, 자신의 욕구에 대한 강한 집착 등을 그에게 집중된 절대적 권력과 함께 생각해 보면 이 비극의 줄거리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즉 그의 소유욕구의 대상인 에밀리아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작품의 비극적 구조는 절대주의적 권력구조와 절대적 지배자의 성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왕자의 이러한 부정적 성격은 그의 시종관인 마리넬리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리넬리의 경우 명철한 계산능력과 냉혹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는 왕자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인 인물로서 묘사되고 있다. 마리넬리에게도 인간은 단지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거나 상품과 같은 거래의 대상일 따름이다. 에밀리아가 아피아니 백작과 당일 결혼하게됨을 알고 절망과 분노에 빠진 왕자에게 마리넬리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전하, 전하께서 에밀리아 갈로티에게 지금까지 고백하지 못하고 미루어 온 것을 이제 아피아니 백작부인에게 고백하시면 됩니다. 새것으로 사지 못하는 상품을 사람들은 중고품으로 사지요. 그리고 이런 상품들은 대부분 중고품이 훨씬 더 쌉니다. (2, 140)


인간을 상품으로, 그것도 처녀는 새 상품, 유부녀는 중고품으로 비유하며 유부녀와의 불륜의 관계를 아무 거리낌없이 권유하는 마리넬리의 세계에는 인간의 존중이나 도덕적 성찰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마리넬리에게는 인간을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것이 차가운 계산의 대상일 뿐이며 왕자도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마키아벨리즘적 권력지향은 그로 하여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자의 신임을 얻으려는 노력을 하게 하며, 그는 이 목적을 위하여 에밀리아를 소유하고픈 욕망에 눈 먼 왕자의 조급한 마음을 교묘히 이용할 줄 안다. 그는 왕자가 전적으로 자신에게 매달리게 만든 다음, 에밀리아와 아피아니 백작의 결혼식을 늦추기 위해 백작을 왕자의 사신으로 외국에 보낼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이 백작의 거부로 실패하자 강도들을 사주하여 신혼 부부의 행렬을 습격해서 아피아니 백작을 살해했다. 왕자가 이 위급한 순간에 “구원자”로 등장해서 에밀리아를 그의 성으로 사실상 유괴한 것도, 그리고 강도 습격사건을 조사해야 한다는 핑계로 에밀리아를 계속 부모로부터 떼어놓고 왕자의 손아귀 안에 두도록 한 것도 모두 그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작품 안의 모든 사건은 마리넬리의 계산에서 출발하거나, 이 계산에서 시작된 일의 진행에 대한 다른 인물들의 반응으로 구성된다. 이 작품의 비극적 원천이 절대주의적 권력구조와 절대적 지배자인 곤자가 왕자의 성격에 있다면 이 작품의 비극적 구조는 마리넬리의 냉철한 계산과 비인간적 계획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곤자가왕자와 그의 시종관 마리넬리, 그리고 이들에 의해 대변되는 궁중세계의 존재 원칙은 무엇보다도 철저한 에고이즘이다. 왕자는 왕자대로, 마리넬리는 마리넬리대로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서만 사고하고 행동한다. 이 에고이즘의 원칙은 두 사람간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즉 왕자는 에밀리아를 소유하기 위해서, 그리고 마리넬리는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확보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서로를 이용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는 신하에 대한 군주(君主)의 인간적인 믿음이나 군주에 대한 신하의 헌신적 충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각기 상대방을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생각하고 이 생각에 맞추어 행동할 뿐이다. 따라서 이 두 사람간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또 이용할 수 있는 한 유지될 수 있으며, 그 관계의 본질은 상호 의존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방의 약점을 빌미로 하여 상대방을 자신의 목적에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에고이즘의 원칙으로 말미암아 궁중세계에서는 인간적인 믿음과 협력을 전제로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과 희생을 근간으로 하는 공동체의 구성은 불가능하다.

궁중세계의 또 다른 성격은 이 세계에서 행해지는 사유의 특질(特質)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자의 사유능력은 제한되어 있으나 마리넬리는 놀랄만한 성찰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자신들의 사유능력을 현실적인 목적추구에 집중시킬 뿐 직접적인 현실의 차원을 뛰어 넘은 좀 더 포괄적인 진실, 그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에 대한 사변적 접근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두어자크 M. Durzak의 표현대로 궁중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사유는 현실적인 것을 초월하지 않으며, 단지 도구로서 쓰일 뿐이다.25)궁중세계의 사유는 하버마스 Jürgen Habermas가 그의 계몽주의 비판에서 그 본질을 적나라하게 밝힌 “목적 합리성 Zweckrationalität”의 한 전형적 실례를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26)왜냐하면 목적 합리성은 목적에 이르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생각해 내는 것에만 전념할 뿐, 이르고자 하는 목적이나 이를 위한 수단의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왕자나 마리넬리가 어떠한 도덕적 원칙이나 종교적 법칙도 존중하지 않은 것은 도구화된 목적 합리성의 필연적인 귀결일 것이다.     


II.2. 사적 가정의 세계: 인간적 공동체


마키아벨리즘의 원칙에 따른 냉혹한 계산과 철저한 자기 중심적 사고가 궁중의 공적 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이라면, 그래서 이 세계에서는 어떠한 인간 공동체의 존재도 불가능하다면, 이와는 반대로 에밀리아, 오도아르도, 클라우디아, 그리고 아피아니 백작으로 이루어지는 갈로티 일가는 서로의 서로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축으로 한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가정이라는 이 사적 세계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사유능력을 이기적인 타산에 사용하거나, 또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는 등의 자기 중심적인 삶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에 대한 애정 어린 근심, 이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는 헌신적인 태도들은 이 세계의 존재 원칙이 목적 지향적 이성의 차가운 계산이 아니라 사랑임을, 그리고 자신의 뜻만을 관철시키려는 에고이즘이 아니라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한 휴머니즘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적 세계에서는 아버지, 남편, 가장, 어머니, 딸 등의 명칭은 가족 구성원에 대한 단순한 언어적 명칭이 아니라 책임과 권위와 애정, 그리고 사랑과 존경과 순종의 미덕 등이 함유된, 진정한 공동체로서의 가족 구성원에 대한 도덕적 명칭이기도 하다. 신혼여행길의 아피아니 백작이 마리넬리가 사주한 강도에게 살해당하고 에밀리아가 왕자의 별장으로 사실상 납치되어 갔을 때 아버지 오도아르도는 딸을 구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헛되게 되자 아버지는 왕자의 욕정으로부터 사랑하는 딸의 순결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딸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비극적 과정에서 오도아르도뿐 아니라 허영심이 강하고 속물근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어머니 클라우디아까지도 조금도 자신의 안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딸의 안전과 순결이었기 때문이다. 에밀리아 역시 죽음의 결단을 내리는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갈로티 일가가 보여주는 상호간의 사랑과 유대감은 하버마스가 “시민적 공공성 bürgerliche Öffentlichkeit”의 생성조건으로 내세운 “시민적 가족의 내적인 삶”27)의 한 표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적인 영역의 가족적 삶이 가지는 이러한 “내면성”을 작품에서 가장 잘 나타내는 2개의 상징적 표현은 “덕성 Tugend”과 “경건 Frömmigkeit”이다. 갈로티 일가의 대화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이 말들은 이들이 서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감정이나 연대적 의식이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확고한 원칙에서, 즉 종교적, 도덕적 원칙에서 기원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하면 이들이 궁중의 타산적 오성에 반명제로서 대치시킨 인간적 감정이나 감정적 삶에는 마리넬리가 경멸 적으로 표현하듯이 막연한 “감상”이 아니라 높은 차원의 원칙이 기저하고 있는 것이다.

사적영역의 지배적인 삶의 형식이 종교적, 도덕적 원칙에서 유래한 “감상적”이라는 사실은 사적영역의 사람들이 직접적 현실의 차원을 초월한 그 어떤 질서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공적영역의 오성은, 즉 왕자나 마리넬리의 사유능력은 현실적인 이해타산의 영역을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사고나 행동의 규범이 되어줄 그 어떤 높은 원칙이나 질서를 가지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목표는 오로지 자신들의 직접적이며 현실적인 이익일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오도아르도, 아피아니, 그리고 에밀리아의 삶은 종교나 도덕이라는 초월적 법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지닐 수 있다. 만일 오도아르도의 딸에 대한 사랑이 단지 동물적, 본능적인 것이었다면 그는 딸의 생명보다 딸의 명예와 순결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한 도덕적 성찰에 결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에밀리아가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행위는 어떤 다른 본능보다도 더 강하고 맹목적이며 끈질긴 생명보존의 본능을 극복한, 순교와 비교될 수 있는 도덕적 행위이다. 아피아니 백작이 당시의 현실에서 엄격하기 짝이 없는 신분의 벽을 넘어 시민계급 출신의 처녀와 결혼하려는 의지는 섣부른 사랑만능의 사고에서 유래한 것을 결코 아니다. 그가 전래되어온 비인간적인 신분사회의 인습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가 이 파격적인 결혼을 통해서 갖게될 모든 불이익을 감당할 결연한 의지가 없었다면 이 결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리넬리가 말한 곳처럼 에밀리아와의 결혼은 아피아니에게는 귀족사회로부터의 축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7)아피아니 백작의 모든 행동은 그의 종교적 원칙과 도덕적 확신과의 합일에서 이루어진다. 아피아니의 결혼을 늦추어 왕자에게 시간을 주려는 계획에 따라 마리넬리가 아피아니 에게 왕자의 특사로서 외국으로 갈 것을 왕자의 이름으로 명령하자 아피아니는 이를 거부한다:


당신이 왕자에게 절대적인 복종의 책임을 지니고 있음을 나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닙니다(...) 나는 그에게 봉사하는 명예를 갖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예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더 위대한 주군의 신하입니다.(2, 159)


위의 인용문은 아피아니가 “더 위대한 주군”, 즉 신에 대한 의무를 현실에서의 주군, 즉 왕자에 대한 신하로서의 의무보다 더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28)바로 이러한 종교적 원칙으로 인해 아피아니의 행동은 높은 도덕성을 지니게 되며, 이는 아피아니에게 비도덕적으로 판단되는 모든 요구를 거부할 “자유”를 그에게 준다.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의 견해대로 도덕을 “신념의 해방”으로 정의한다면,29)어떠한 권위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의 결정에 따라서 행동하는 아피아니야말로 이 작품의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진실한 도덕주의자일 것이다.


II.3. 도덕의 “시민”계급적 성격


그러나 아피아니 백작의 높은 도덕성으로 인해 정치적, 공적 세계와 사적, 가정적 세계간의 갈등이 귀족과 시민계급간의 사회적, 정치적 갈등의 한 표현형태라는 일반적인 명제를 작품 『에밀리아 갈로티』에 적용시키는 것은 일단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것이 이 작품에서는 귀족인 아피아니 백작이 의심할 여지없이 사적영역의 도덕적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빌프리트 바르너 W. Barner는 바로 이러한 이유를 들어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귀족적 악덕의 세계와 시민적 도덕의 세계로 뚜렷하게 양분되지 않으며, 따라서 『에밀리아 갈로티』를 사회 계층간의 갈등을 그린 직접적인 “신분극 Ständedrama”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30)

그러나 이 같은 견해는 18세기 후반기의 귀족에 대한 시민계급의 정치적 해방운동의 실상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18세기말까지 유럽에서 귀족들이 단일 지배계급으로서 자신들의 존재를 존속시켜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자신들끼리만 결혼을 함으로써 하나의 “혼인공동체”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 민중들과 자신들 사이에 엄격한 단절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31)즉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귀족이, 시민 신분의 부모를 가지면 시민의 신분을 가지게 되며, 두 계급 사이의 결혼을 통한 혼합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이 이와 같이 오로지 출생을 통해서만 결정되면 개개인간의 능력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시민계급 출신의 사람은 그가 아무리 빼어난 능력과 훌륭한 품성을 지녔다 할 지라도 “귀족”으로의 신분상승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출생에 의한 신분의 고착화는 18세기부터 본격화된 시민계급의 귀족에 대한 해방 운동의 가장 중요한 공격 목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이 귀족계급의 출생의 원칙에 대항해서 내세운 것은 개개인간의 능력과 품성이었다. 즉 출생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질(質)이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나 신분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1774년에 요한 크리스티안 마이어 J.C. Majer는 “사람들의 모든 지위와 신분은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우연에 따라서가 아니라 업적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32)철학자 칸트가 “귀족 Edelmann”과 “고귀한 사람 edler Mann”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33)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보면 아피아니 백작의 극중성격은 분명해진다. 그럴 것이 그의 모든 인간적 장점과 덕성은 그가 귀족계급에 속한 백작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아피아니라는 개별적 인간이 이룩한 정신적 업적이기 때문이다.34)달리 표현하자면 아피아니는 비록 백작의 칭호를 달고 있지만 그의 행동과 사유는 철저하게 시민적이다. 출생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분사회에서 아피아니라는 등장 인물의 출생 신분이 전혀 가치를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순수한 인간성이 강조된 사실은 신분사회의 가치기준을 파괴하려는 혁명적 시민운동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그럴 것이 순수한 인간성, 인간의 도덕적 능력 등은 인간 누구나 출생에 구애받지 않고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성과 도덕적 능력이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는 곳에서는 인간의 출생성분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피아니 백작은  의심할 나위 없이 사적 영역, 즉 시민적 가족의 일원이며, 도덕의 이름으로 거행된 시민계급 해방운동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III. 18세기 프랑스 가족의 정체성과 청소년기

- 루소의 『에밀 Emile』을 중심으로 -


III.1. 들어가는 말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당시까지 프랑스 국가나 사회 전반을 형성하고 있던 모든 분야의 체계, 다시 말하면 소위 ‘구체제’에서 ‘신체제’로의 절대적인 전환점을 이룬 사건이다. 물론, 혁명 이후 19세기에 나폴레옹 제국의 등장, 왕정 복고, 연이은 나폴레옹 3세의 제 2제국 등의 등장은 대혁명의 공화 정신 esprit républicain에 반하는 사건들이었지만, 큰 흐름에서 살펴보면 대혁명을 전후로 한 18세기에서 19세기로의 이행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절대 왕조체제에서 권력이 국민에게 기초하고 있는 공화주의로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변화는 국가나 사회라는 집단에서의 신민 개념에서 국민 또는 시민이라는 개인으로의 무게 중심이 서서히 이동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국가, 사회의 체제와 관습 그리고 그 집단을 지탱해주는 도덕이나 윤리체계와 같은 이데올로기가 당시까지 도외시되고, 국가나 집단의 유지와 이익을 위해 희생되었던 개인의 행복과 이익이라는 근대적 개념의 권리를 위해 그 영향력이 점차 제한 받게 되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대혁명을 분수령으로 과도기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국가의 기본 단위로 간주하며 그것을 적절하게 통제, 관리함으로써 절대 왕조 체제를 유지 할 수 있었던 단위인 가족은 과연 어떠한 위상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일까?35)

본 글에서는 대혁명을 전후로 사회의 기본 구성 요소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가족이라는 영역을 중심으로, 국가와 사회라는 공적 영역과 그 구성원들인 개인들의 삶이 이루는 사적 영역이 교차되는 가족의 위상이 어떤 변화와 해체를 경험하는지를 먼저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이어서 가족의 구성원 중 ‘대물림 descendance’이라는 전통적 역할과 개인의 행복 추구라는 딜레마 사이에서 전통적인 관습 체계나 위계질서에 위협이 되기도 하는 자식, 특히 그 성별에 관계없이 아이들이 유년기. 소년기를 거쳐 사춘기라는 청소년기를 중심으로 이 시기가 국가나 사회 그리고 가부장적인 제도 하에서의 가족 체계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살펴보겠다.

특히, 본 글의 주제인 가족 정체성의 위기로서의 청소년기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이며 체제 유지적 경향을 띠고 있는 집단에서 일종의 커다란 도전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 위험성을 찾아 해결하기 위해 국가나 사회 또는 가정이 취하게 되는 방법 중 하나로서 교육의 역할을 강조하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 적용을 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 18세기 후반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문학가이며 교육학자인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자연 교육론에 입각한 저서인 『에밀 또는 교육론에 관하여 Emile ou De l'Education (1762)』36)에서, 먼저 그가 제시하는 자연 법칙에 따른 자연인의 형성을 위해 제시하는 교육론에 반하는 기존의 여러 가지 교육 방법들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루소의 『에밀』을 중심으로, 특히 가족이라는 사적영역에서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집단의 한 구성원이자 동시에 독립적인 개체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사춘기 puberté’라는 과도기 상의 아이들이 과연 기존의 가족이라는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 현상 유지적 경향을 띠고 있는 집단에서 이 청소년들을 기존의 제도권으로 재 편입하기 위해 어떤 교육적 방법을 적용하려 했는지 살펴보겠다. 또한 이러한 기존의 교육 방법에 대한 루소의 교육론은 어떤 차이점을 보이면서 소위 근대인의 형성 과정에 기여했는지를 밝혀볼 것이다.


III.2. 18 세기 프랑스의 가족: 사적 영역의 등장과 확대


먼저, 사적 영역의 중요한 단위인 가족이 18세기 프랑스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는지를 보자. 시민 계급의 점차적인 증대와 그 권리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게 되는 계몽주의 사상37)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프랑스 18세기는, 대혁명을 기점으로 국가, 사회라는 집단의 공적 영역과 가족과 그 구성원들의 개별적 삶이라는 사적 영역이 서로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그 구획을 명확하게 긋는 시기이다. 이런 두 영역간의 경계는 대혁명을 기점으로 더 확고하게 구별되지만, 이미 18세기부터 소위 신계급이라 일컫는 시민 계급, 즉 부르주아의 전반적인 등장으로 사적 영역인 가족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는 확고하게 정착되어 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계급은 왕족이나 귀족 또는 성직자와 같은 기존의 지배 계급과는 달리 경제적 부와 청교도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가정이라는 영역의 배타성과 독립성을 계속해서 확보, 견지하려고 한다. 특히, 개인의 이익과 소위 행복이라는 개념을 국가와 사회 이익을 위해 도외시하고 통제한 집단과는 달리, 내적이고 내밀한 영역을 확보하려는 시민 계급은, 이러한 사적 영역의 확대를 ‘간섭주의 interventionnisme’ 정책의 국가 권력에 대한 대항 수단으로 삼게 된다. 따라서 가족, 가정이라는 개념은 시민 계급에 있어서 그들 권력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기도 하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 자매들간의 긴밀한 내적 연관성은 이후 획득하게 되는 시민 계급의 권력을 가장 본질적으로 지탱해주는 힘이라 하겠다.

사실, 사적 영역으로서의 가족이 국가와 사회 전반에 등장하기 전까지 역사의 주체는 바로 권력의 핵심에 있던 인물들이었다. 즉, 국왕이건 귀족이건 기존 지배 계급인 이들은 공적인 인물로서 국가나 사회를 대신함으로써, 구체제 하에서의 전체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인 국가 지상주의나 집단이익주의를 대변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가족이나 개인이라는 사적 영역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에서는 그 자리를 확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미셀 페로 Michelle Perrot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생활의 문턱에서 역사가는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처럼 오랫동안 주저하며 망설였다. 수줍음 때문이기도 했고, 감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더욱이 서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역사, 즉 국가․경제․사회에 관한 위대한 역사의 주역으로서 공적인 인물을 지목하던 가치 체계를 존중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38)


이런 의미에서 시민 계급이 자신들의 권력과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권력 또는 영역과의 충돌이 불가피 하게 된다. 그러나 18세기에도 아직은 이들 시민 계급은 그들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기존 계급에 대항할 만한 공적인 권력이나 힘을 완전히는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공적 영역보다는 사적 영역의 기본 단위라 할 수 있고 사생활의 무대인 가족에서부터 자신들의 권력과 힘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미셀 페로는 이러한 두 영역간의 대립에 대해, 공적 영역인 기존 질서를 전복해야만 사적 영역에 진입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의 전면적인 등장을 언급하고 있다.


그 문턱을 넘어 안쪽으로 성큼 들어서려면 기존 질서를 전복해야 했다. 다시 말해, 사생활은 더 이상 저주받고 금지된 어두운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환희, 우리의 예속 상태, 우리의 갈등, 그리고 우리의 꿈으로 가득 찬 장소가 되어야 했다. 어쩌면 일시적인 현상일지 모르나, 이제 이곳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었다. 사생활은 드디어 인정을 받아 탐구되어 마땅한 정당성을 지닌 영역이 된 것이다. 사생활은 곧 우리 시대의 한 경험이라고 하겠다.39)


이러한 배경에서, 프랑스 18세기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이 뚜렷해진 시기라 할 수 있다. 국가와 사회 같은 집단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공적 영역에 대해서, 이전까지 등한시되고 대수롭지 않으며 심지어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기정과 사적 세계가 시민 계급에 의해 강화되면서 재평가되고, 미셀 페로의 용어에 의하면 행복과 동의어가 되기에 이른다40). 이러한 변화 과정은 대혁명으로 인해 더욱 심오한 단절을 보이게 된다. 먼저, 단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적인 이해관계’나 개별적인 이해관계는 음모와 배신을 낳는 그늘진 것으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공적 생활은 투명성을 더 선호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반면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프랑스 혁명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를 더욱 명확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예를 들면 가족에 가치를 부여하고, 정치적인 남성과 가정적인 여성을 대비시킴으로써 성에 따른 역할 분담을 구분하고, 이혼권을 인정하며, 개인의 권리를 선포하게 된 것 등이 그러하다.41)

이렇게 사적 영역으로서 기본적인 틀을 공고히 하게 되는 가족은 과연 18세기와 19세기 걸쳐 프랑스에서는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을까? 또한 가족 안에서의 원칙과 방향은 무엇이었으며, 그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는 어떤 역학 관계를 통해 후에 등장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물결에 영향을 받으면서 가족의 정체성을 유지했을까?

절대 왕권중심주의의 구체제나 소위 핵가족화 되는 신체제의 제도 안에서 공히 가족은 국가와 사회의 기본 단위이자 생산의 기본 단위였다. 이 때 생산이란 경제적인 활동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국가나 사회 나아가 기본 단위인 가족을 구성하는 인적 자원의 생산과 충당으로서의 가족 역할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하나의 사회적 단위로서의 가정은 내부적으로 그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다시 말하면, 국가와 사회라는 공적 영역에서의 가족은 단지 집단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었다면, 이제 자본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하에서는 가족의 위상이 하나의 독립적인 단위로서 그 위상을 차지함으로써, 국가나 사회는 이전의 간섭주의를 최대한 배제하고 오히려 가족의 정체성과 위상의 고양을 통해 공적 영역을 강화시키려는 정책을 취하게 된다. 헤겔은 시민 사회의 기초인 가족은, 그것이 없으면 국가가 사회 집단의 독단과 독재를 야기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42)이는 체제 유지적인 국가 권력과 자유주의적이자 개인주의적이고 방임적인 경향까지 흐르게 되는 일반 시민들의 독립적 개체성사이에서 이전과는 다른 가족의 역할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원칙과 도덕, 체계가 집단에서 개인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가족은 완충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국가가 사회라는 공적 영역에 대해 사적 영역으로서의 가족은 그 자체로서 각 구성원에게는 일종의 관습이나 체제를 대변하는 작은 공적 영역의 역할을 역수행하고 있다. 이미 대가족에서 시민 사회의 소가족 또는 핵가족으로의 변화는 생산 단위로서의 가족의 위상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변화된 위상의 뒤에는 여전히 국가와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의 역할이 다른 방식으로 존속하고 있었고, 또한 시민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준비하고 반영하기 위한 기본적인 장으로서의 역할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18세기와 9세기에 걸쳐 가족은 동시에 기존 공적 영역으로부터 이탈의 영역이자 또 다른 공적 영역을 만들게 되는 기초와 결합의 장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내부적 복잡성과 모순을 띠고 있는 가족은 그 구성원들의 때로는 억압과 통제로 때로는 존중과 자유로운 방식에 의해 조화와 통일성을 견지하면서 20세기 가족의 기초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18세기에는 여전히 개인의 권리나 자유를 충분히 인정치 않는 상황에서 여전히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영역은 가족 안에서 무시되거나 소위 ‘가족의 전통’과 ‘대물림’이라는 기치아래 통제되어 있었던 것이 더 정확인 사실일 것이다.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위에 있는 가족이라는 상위 집단과 그 가치 그리고 그 가치체계에 순응하지 않는 개개인의 저항, 바로 그곳에서 바로 갈등이 야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족 갈등은 이미 언급한 국가나 사회 집단의 체제 유지적 압력이라는 외부 요인뿐만 아니라 가족 내부의 여러 가지 요인, 즉, 유산과 돈 같은 경제적인 문제, 상징적 자산인 명예, 결혼과 출생을 둘러싼 핏줄 그리고 폭력과 간통으로 야기되는 부부관계 등에 의해 증폭되기도 했다.43)

결국, 프랑스에서 가족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영역을 구축함과 동시에 아주 심각한 모순적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족은 사회를 규제할 수 있는 근본적인 수단이라고 여긴 사회 전체에 의해 권력이 증대되고 존엄성이 부여된 가족은 가족이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목적을 가족 구성원들에게 강요하려한다. 집단의 이해관계는 집단 구성원들의 이해관계보다 상위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선언, 지속적인 개인주의의 진전 등은 갈등의 원심력으로 작용하여 분열로까지 치닫는 결과를 초래해서 가족은 그 통일성뿐만 아니라 그것의 비밀까지도 위협받는 미시적 사회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44)

이제, 이러한 가족 위상의 확립시기에 그 구성원중 가족의 미래에 대한 보장으로서의 경제적, 교육적 투자 대상이 되는 아이가 성장 과정을 통해 어떠한 자아 의식을 지니게 되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인식이 가족 정체성에 어떻게 작용하고, 그 해결책을 어떤 방식으로 추구하는 지를 루소의 작품 『에밀』을 통해 살펴보겠다.


III.3 『에밀』의 구조와 루소의 교육론


『에밀』은 많은 작품 중에서도 루소가 가장 공을 들여 쓴 저서 중 하나이다. 책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루소는 원래 이 글을 교육에 관한 짧은 단상으로 구상을 했지만, 그의 표현대로 교육이라는 주제에 끌려 일종의 저작이 된 것이다.45)먼저, 저서의 제목인 ‘에밀’은 가상 인물로서, 루소가 자신의 자연주의에 입각한 교육이 어떻게 한 아이의 탄생부터 성년이 될 때까지 적용되는지를 보여주기 창조한 인물이다. 따라서 루소는 이 저서에서 자신의 교육론을 피력하면서 동시에 에밀이라는 가상의 학생을 대상으로 스스로 교사가 되어 자신의 교육 방법이 어떻게 기존의 그것들과 차별성을 두면서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자연인으로 교육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의 에밀이라는 인물은 이후 19세기 근대 교육 형성의 기초가 되는 루소의 교육론을 대표하는 피교육자의 대표성인 것이다.

이 저서는 에밀의 성장 시기를 중심으로 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부분은 루소가 생각한 인간 성장의 다섯 발전 단계에 맞추어 출생부터 5세까지의 유년기, 5세부터 12세까지의 아동기, 12세부터 15세까지의 소년기 그리고 15세부터 20세까지의 청소년기와 이후 성인이 된 에밀이 역시 가상 인물인 소피라는 반려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게 되는 성년기로 구성되어 있다. 각 성장 시기와 그에 따른 루소의 교육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권에서는, 교육에 대하여 루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원칙을 언급하고 교육의 목표를 설정한다. 그가 말하는 교육의 목표는 바로 ‘자연적 교육 éducation naturelle’으로서, 자연의 섭리와 원칙에 입각해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성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적 교육의 목적은 자연이 준 성향을 확대하고 강화시키는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어린 아이가 사회라는 인위적 틀에 들어감으로써 왜곡되어지는 자연성을 막기 위해 최초의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그 교육의 담당은 바로 여성들의 몫이라고 말하고 있다.46)루소는 교육의 원천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자연’, ‘인간’ 그리고 ‘사물’이 그것이다.47)자연의 교육은 우리 인간의 능력과 기관의 내부적인 발육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 발육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인간의 교육이다. 또한 우리를 자극하는 여러 가지 사물에 관해서 우리들 스스로 경험에 의해 얻는 것은 사물의 교육에 의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종류의 교육이 서로 조화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교육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데, 자연과 사물의 교육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반면,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인간의 교육이므로 유년기의 교육이 더욱 중요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루소는 유년기 교육은 아이를 ‘홀로 있게’ 해 줌으로써 자연의 섭리에 따라 길러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른들의 사고와 간섭은 자연적 습성을 지니고 태어난 아이에게 자연에 반하는 인위적 관습을 강요함으로서 본질적인 자연성이 왜곡된다. 결국, 교육은 간섭이 아닌 자연에 의해 주어진 습성을 간직하면서 스스로의 감각을 통해 쌓은 경험들이 앞으로의 사고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유년기의 어린 아이들에게 해줄 교육은 바로 이러한 경험들을 순서에 따라 제공하는 것이다.

2권에서는 5세부터 12세까지의 아동기 교육을 다루고 있다. 아동기는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인 유년기와 구별된다. 이 시기에는 아이의 힘이 증대됨에 따라서 타인의 도움에 덜 의존하게 되며 한 개체로서의 삶이 막 시작되는 시기이다. 루소는 아동기까지의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 시기의 교육이 잘못되면 그 후의 교육은 성공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이 시기에 ‘소극적 교육 éducation négative’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적 성향인 ‘쾌락’에 의해서 아이들이 행동하는 시기임으로, 자연이 그에게 부과한 이러한 습성을 소위 ‘적극적 교육 éducation positive’을 통해 억압하거나 통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동은 ‘동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약함을 느끼게 할 필요는 있지만 또한 반대로 그것을 괴롭게 느끼도록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48)교사로서 루소는 지식을 전수하고 가르치기보다는 에밀의 자연적 본성이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것을 보호하고 인위적인 간섭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연성 그 자체로서 진행을 믿고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교사는 무엇을 직접 가르치기보다는 자연의 섭리가 인간에게 준 것을 안내하고 제시하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 자신이 스스로 발견하도록 유도할 뿐이다. 루소의 이와 같은 교육은 교육자의 입장이 아닌 피교육자로서의 아동의 입장에 서서, 그의 내부에 있는 자연성을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교육론인 것이다. 어른들의 편견과는 달리 아동에게도 그 고유의 사고와 견해 그리고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는 이 시기에 아이의 오관의 기능을 충분히 계발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 오관의 계발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소극적 교육’을 통해서이다.

다음으로 3권은 소년기의 교육에 관한 것이다, 청소년기까지 아이는 일반적으로 ‘연약함’으로 특정 지워지지만, 상대적으로 강한 시기가 바로 이 소년기이다. 이 시기의 교육은 이전 시기와 달리 적극적인 교육의 시기로서, 이성의 단련과 지성의 형성기이다. 이성을 단련함에 있어서도 루소는 계속해서 기존의 지식에 따르지 않고 사물의 교육의 방침은 계속해서 소년이 직접 체험적으로 지식을 쌓아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독서도 자연인의 지적형성의 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스스로 삶을 영위할 수 있기 위한 방편의 습득을 강조하여 제자인 에밀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즉 한창 넘치는 육체적 힘을 좋은 방향으로 발산함과 동시에 육체적 노동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 스스로 경제적 독립성을 지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아동기와 청년기 사이의 과도기로서, 에밀은 모든 일을 제 힘으로 스스로 해내야 하는 것이다. 이 때까지의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에밀은 오직 순수한 ‘자기애 amour de soi’만 지니게 된다.49)이에 대해 루소는 다음과 같이 에밀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또 어느 누구에게 무엇 하나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사회에 있어서 고독한 사람이며 자기 한 사람 밖에는 기대하지 않는다. (...) 그에게 과실이란 없다. 다만 있다면 우리로서는 피할 수 없는 과실만이 있을 뿐이다. 그에게 악덕이란 추호도 없다. 있다면 어떠한 사람이라도 모면할 수 없는 것일 뿐이다. 그는 건강한 육체를 지니고 있고, 민첩한 수족과 바르고 편견 없는 정신, 또한 자유롭고 정념에 번민하지 않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모든 정념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자연적인 자존심마저도 아직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50)


이 소년기는 다른 시기에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끝난다. 이어서 루소는 4권에서 이 저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사춘기의 청소년기에 대해 논하고 있다. 에밀은 감성과 이성 그리고 특히 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이 나타나는  소위 ‘제 2의 탄생 seconde naissance’을 경험하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생존하기 위해서이며, 또 다른 한 번은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그 한 차례는 종(인간)으로서, 그리고 또 한 차례는 성(남자 또는 여자)으로서 태어나는 것이다.51)


루소는 이 제 2의 탄생부터 인간은 인생에서 진정하게 사는 것이며, 인간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하나도 그에게 무관한 것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소년기까지의 교육은 일종의 ‘어린아이 장난 jeux d'enfant’에 불과 했고, 비로소 청소년기에 들어 교육의 진정한 중요성이 나타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이전까지의 교육을 ‘일반적 교육 éducation ordinaire’이라 말하며 진정한 교육은 이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52)

사실, 소년기까지의 삶에서 에밀은 ‘혼자 사는 존재’로 교육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 속에서 홀로 살도록 운명 지워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회 안에서 살도록 예정되어 있다면, 이제 ‘혼자 사는 존재 être solitaire'로서의 교육은 에밀에게 ‘사회적 존재 être sociable’로 살아가도록 해야한다. 바로 이러한 변화는 자연에 부여한 본질에 반하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사회 속에서 자연의 천성과 습성을 ‘자연화 naturalisation’하는 한 과정인 것이다.

이 시기의 청소년이 지니는 모든 감정적 욕구는 아주 자연스런 것이다. 특히 정열과 이성에 대한 성적 욕구는 그것을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막는다고 해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감정들 자체가 바로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자연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감정적 분출을 모두 허용해서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청소년은 바로 자연적 감정을 분노와 파괴 등으로 분출하여, ‘기질의 변화 un changement dans l'humeur’ ‘빈번한 흥분 emportemens fréquens’, ‘계속적인 영혼의 동요 une continuelle agitation d'esprit’를 나타내며 어린 아이를 다루기 힘들게 만들고 ‘열병에 걸린 사자 lion dans sa fiévre’로 만들어서 자신의 지도자를 인정치 않게 되고 감독 받기를 원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53)이는 명백히 자연적 질서가 보여주는 조화의 상태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적 과도함과 일탈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이 이 시기의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까지 혼자로서의 존재를 사회적 존재로 교육하는데 있어 루소는 도덕적, 종교적 감정의 교육을 요구하며, 이러한 감정을 적절하게 유도함으로써 동시에 이성을 완성하려고 한다. 아이의 정서적. 도덕적. 미적 소질들이 보이는 것도 바로 이 사춘기이며, 그의 이성이 완전해지는 것도 이 시기이다. 따라서 루소는 이러한 ‘과도한 감정’을 남자에 대한 ‘우정’, 여자에 대한 ‘사랑’ 그리고 나아가서 루소가 모든 도덕의 근본으로 생각한 동포에 대한 ‘동정심 affection’을 강조하여 교육하게 된다.

마지막 5권에서는 이제 성인이 된 에밀에게 이상적이고 적합한 연인을 선택하여 배우자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특히 이 부분은 소설적 형식을 취하면서 에밀에게 가장 이상적인 여인으로 선택한 소피 Sophie에 대한 일종의 여성 교육론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이 저서의 부분의 끝 부분은 에밀이 스승에게 자신의 아기의 탄생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며 이제 자기 스스로가 피교육자에서 지금까지 받은 교육을 통해 자신의 아이의 교육하게 될 것임을 알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III.4. 위기로서의 청소년기와 가족 정체성 문제


루소는 『에밀』의 첫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은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선하나 인간의 손에 들어오면 타락한다.54)


이는 자연성을 천성으로 하는 인간의 본질을 자연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다섯 단계의 성장 과정과 그에 알맞은 교육 과정을 통해 살펴보면 가장 위험하면서 중요한 시기인 청소년기야말로 바로 기존의 교육 방식과 어른들의 선입관 그리고 보수적인 관습 체제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이는 사춘기라는 자연성의 분출을 인위적인 억압과 통제로 억제를 함으로써 오히려 과도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사실, 근대적 의미의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이러한 청소년기의 사춘기적 특징을 심각하게 간주하지 않았다. 이는, 개인이라는 의미는 오직 국가나 사회 안에서만 의미가 있었고, 그 자체로서 보수주의적이고 통제된 체제에 저항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항적 청소년기의 이해는 18세기 이전의 전통사회에서는 생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18세기에 일어난 사회변동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전통적 가치에 대한 회의를 심어주었고 스스로 정체성을 찾도록 강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전에는 문제시되지 않았던 사춘기 청소년들이 사회와 가족의 존속을 위해 고려해야 할 대상으로 조망되게 된 것이다. 그런데 18세기에는 아직까지 가족이나 사회에 대한 개인의 독립성이 아직 미약하였으며 또한 사회적 발전을 위해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국가와 사회는 반항적이고 반사회적 경향을 보이는 사춘기의 청소년들을 집중적으로 관리하여 기존의 문명적 질서에 통합하려 하였고, 이러한 교육 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개인의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고, 또한 시민 사회의 부상으로 인한 사적 영역의 확대로 인해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 사이에 서구사회의 교육자와 사상가들은 청소년기, 즉 사춘기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체제 안에서의 개인은 오직 전체 집단이 있음으로 해서 그 의미가 있었지만, 이제 서서히 개인과 사생활이라는 사적 영역이 지평으로 떠오르는 시기에 있어, 독립적, 배타적 개체로서의 개인의 자각은 심각한 위기이자 체제에 도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춘기는 개인에게도 위기의 시간이지만 동시에 가족, 집단 및 사회에도 위험한 도전적 시기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사춘기의 청소년들이 자신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정체성을 찾으려 할 때, 극도로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적 행동양식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이나 사회 및 국가와 같이 옛 전통과 규범을 고수하려는 집단은 청소년기를 모든 기존 체제에 대항하는 위협적 요소로 규정하고, 사춘기의 청소년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통제하여 기존의 가치관과 규율에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려 한 것이다.

본 글에서 살펴 본 루소의 『에밀』은 이러한 사춘기 청소년의 위험성과 중요성과 위험성을 보여주면서, 바로 성적 정체성의 확립 시기인 이 중대한 위기의 순간을 묘사하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바다의 울음소리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폭풍을 예고하듯이, 이 파란만장한 변화를 알리는 것은 갓 생겨나는 정열의 속삭임이다. 소리 없는 발효기는 곧 다가올 위험을 알리고 있다.55)


이러한 사춘기는 안정 지향적인 기존제도와 체제에는 위험한 요소이다. 따라서 사춘기 청소년들은 근대국가와 그 사회형성의 필수 불가결한 기본단위인 가족의 유지에 위협적 요소로 인식되었다.

사춘기 청소년이 보여주는 가장 근심스러운 양상은 성적인 변화와 이에 대한 자의식의 성립이다.56)에밀은 성인들의 사회에 대항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데, 여기서 그가 소피에 대해 느끼는 정열적 사랑, 즉 성에 대한 자각은 그에게 제 2의 탄생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정신적, 육체적 변화의 과정은 기존의 관습과 규범체제에 대한 반항과 거부로서 이루어진다.

한편, 루소는 이러한 에밀에게 기존의 교육관과 가치관과는 달리 자연을 통한 교육과 자유의 관념을 전달해 주고자 한다. 바로 이점에서 루소의 자연관이 드러나며 그의 새로운 교육론인 자연주의적 교육론이 성립된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을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데는 교육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사회에 복종하고 순응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사회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연이 이끄는 대로 자연성을 따라 참다운 인간이 되도록 하는 데 그 목표가 있다. 그의 자연주의적 교육론에 의하면, 인간은 ‘필요 besoin’와 ‘경험 expérience’에 의해 모든 것을 배워왔기 때문에 그 필요를 느끼게 하고 경험하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교육관은 자유주의적이자 자율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루소의 교육관은 체제와 권력의 유지를 위한 사회와 국가, 특히 종교기관의 전체주의적 통제 교육에 반하는 것이었다. 즉 루소의 교육관은, 기존 가족제도만으로는 더 이상 통제 할 수 없어 국가 및 종교기관까지 개입하여 행했던 기존 제도적 교육에 대한 저항이자 정면 도전이었다. 루소의 교육이 지향하는 최고점은 바로 자연인의 형성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 원리인 원초적 결백성을 회복할 때 근본적 폐해이자 악인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언제나 다시 자연인으로 회복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자연인 지향의 관점을 루소는 다른 소설 『누벨 엘로이즈 La Nouvelle Héloïse』(1761)에서 쥘리 Julie와 생-프뢰 Sain-Preux그리고 볼마르 Wolmar와의 사이에서 다시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의 등장 인물들은 사회의 구성요인으로서의 가족의 위기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자연인이 됨으로써 결국은, 루소의 표현에 따르면 ‘정치 사회의 원형 archétype de la société politique’인 가족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IV. 가족이미지를 통해 나타난 원형적 세계관과 이데올로기

          - 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를 중심으로  

  

IV.1. 서론   


구체제의 모든 질서를 뒤엎고자 한 프랑스 대혁명과 이후 급속히 발전되는 19세기의 산업자본주의는 가족의 정체성 형성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가족구조와 가족 구성원의 정체성의 급격한 변화는 현대에서도 사회의 쟁점이 되며 사회학자들의 주요 주제가 되고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연구 경향은 주로 현상을 통해 이념을 증명하는 식의 내용의 사회학과 통계학을 중심으로 접근해온 경향이 있다. 가족의 정체성은 인간과 사회가 가족에 대해 갖고 있는 원형적 이미지와 한 시대의 구체적 사회 환경이 복합적으로 융합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가족의 형성을 사회적 이데올로기나 사회현상들의 단순한 반영으로 볼 때에 가족을 포함해 한 시대의 인간과 사회의 행위들을 결정하는 숨은 원인들인 무의식적 차원에 속하는 원형적 욕망 (불안, 희망 등)을 간과할 수 있다. 이런 무의식은 상상과 꿈의 세계라는 예술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문체의 차원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는 가족이 사회를 반영한다는 가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 방식을 문제삼고자 한다. 우리의 분석은 ‘내용의 실질은 오직 형태 하에 의해서 드러나고, 문법적인 구성으로 나타내어진다’ (그레마스)는 전제 하에서 ‘형태적 접근과 동시에 사회학적 측면에서의 재해석’57)을 필요로 한다. P. 마슈레의 문학 텍스트의 정의는 이데올로기의 형태적 접근에 중요한 시점을 제공한다. “문학텍스트는 상반되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가 싸우는 장이며, 상상적인 해결책으로 보통 언어와는 다른 특수한 언어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에서의 해결은 연출의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의미를 배열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문학상의 효과는 구성, 제작, 배합의 과정을 통해 생산된다”58)고 밝히고 있다.

형태 연구의 출발점으로 ‘상상력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원형에 의존하고자 한다. 원형이란 정신적 영속성으로 인간정신의 불변적 요소 또는 본질적 성향으로 인간은 매우 명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사유하고 느끼며, 꿈을 꾸기 위해 프로그램화되어 있다.’59)다시 말해 사회가 텍스트 안에 기재 될 때, 무의식과 직관의 장인 예술이 사회적 상상력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들과 원형적 상상계가 결합되는 방식을 밝히는데 있다. 가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면 정신과 물질, 픽션과 현실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구조화를 통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연구 대상인 가족은 한 시대의 상상계를 밝혀주는 매개적 소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모든 사회적 상상계를 포괄하고 선택하는 역동적 주체로서 다루어 질 것이다. 가족의 정체성을 무의식적 담론의 측면에서 보고자하는 이 시도는 그 정체성 형성의 기원을 밝히면서 가족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열고 진정하고 바람직한 가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에 기여하리라고 본다.

19세기 프랑스 소설의 대표적 작가인 졸라는 ‘한 가족의 사회사와 자연사’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20권의 방대한 『루공-마카르 총서』에서 근대 가족의 문제를 사회적 차원과 자연적 차원 (또는 본능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에서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텍스트라는 분쟁적 공간에서 가족을 통해 드러나는 신화적 또는 원형적 담론이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인 사회적 욕구, 제도적 장치와 대립되거나 결합되면서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고자 한다.

l장 가족과 역사 편에서는 졸라에 의해 루공 마카르가의 기원으로 서문에서 언급된 『루공가의 재산』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프랑스 남부의 소도시라는 작은 공간이지만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격동기를 효과적으로 연출하는 무대의 역할인 플라쌍은 귀족,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라는 각각의 계급에서 생성된 가족에 대한 변화된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2장 가족에 나타난 원형적 상상계와 신화에서는 가족과 관련된 표현 (묘사, 거주지, 행보, 행동, 서사구조 등)에서 계속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모델, 주제, 구조들을 통해 원형적 이미지에 접근하려는 시도로 가족 안에 기재되는 원형적 이미지들을 통해 그 시대의 무의식적 욕망을 밝혀보고자 한다. 결론은 가족과 이데올로기에서는 가족상에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사회의 무의식적 욕망과 연결 지워 설명하고자 한다.      


IV.2. 가족과 역사


가족과 사회와의 관계들은 ‘도덕적 가치와 사회구조와의 중요한 고리’로써, 산업사회의 등장으로 인한 생산양식의 변화와 가족 개념의 변화와의 관계 (마르크스와 엥겔스)로써, 또는 페미니즘이후 ‘사회의 계급 불평등, 성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구조’로써 설명되어왔다.60)주로 가족과 사회제도와의 필연적 관계 -강화효과 또는 대립효과를 위해서- 에서 살펴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족과 사회의 직접적 반영관계에서 출발하는 분석은 어떤 점에서는 가족과 사회에 대한 상투적 정의들을 재발견하는 것에 그칠 수 있다. 우리는 이 두 영역이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한다고 보는데서 이 두 언어의 공통언어를 찾아서, 즉 더 아래로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심층적인 공통언어를 찾아서 비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게 두 관계를 조명할 수 있다고 본다. 졸라도 가족을 사회의 축약구조로 보지만 그의 가족상은 의미의 차원이 아닌 문체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찾고자하는 가족에 담겨 있는 원형적 이미지들은 표면상에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가족과 사회를 동시에 형성시키는 심층적 공통 언어를 밝힐 수 있는 언어, 즉 무의식적 욕망의 기원에 가까운 언어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루공가의 재산』의 서문61)에서, 『루공-마카르 총서』는 하층계급의 기원을 가진 한 가족이 한 사회에서, 한 역사적 시기의 당사자로서 행동하는 방식을 그리며 20여명의 인물들은 깊이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서로 연관성을 가지게 되며 개인적인 욕망뿐만 아니라 전체의 일반적인 욕망과도 연결되어질 것이라고 언급된다. 또한 작가는 기질과 환경에 대해 이중으로 질문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기질과 환경은 『루공-마카르 총서』의 부제인 ‘한 가족의 자연사와 사회사’라는 말로 다시 연결된다. 졸라 시대에는 인간의 자연적 본능에 대한 연구가 많았고 인간에 대해 다시 질문하는 시대였던 만큼 생리적-자연적 차원에서의 질문은 시대적인 인식이었다. 대혁명 이후에나 가능한 소설들이라고 저자에 의해 언급된 대로 이 총서의 주인공들은 대혁명이후 향유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가차없이 세상으로 달려드는 하층 계급의 대중들이다. 루공-마카르가의 선조 아델라이드에게서 시작되는 최초의 기관상의 침해인 신경질적이고 히스테릭한 기질은 유전이라는 생리적 상징을 통해 집단적 욕망의 동질성을 형성하는 상징이 된다.


IV.2.1. 아델라이드, 루공, 마카르 - 새로운 대중의 탄생

   

대혁명이후 태어난 대중의 향유에 대한 욕망의 엄청난 폭발은 한 시대의 폭넓은 붕괴로 이어진다. 이들 부부의 결혼 시점은 혁명의 시기와 일치한다. 혁명이 잉태시킨 가족인 셈이다. 이 붕괴의 육체적 상징이 바로 시조 어머니 아델라이드의 몸이다. 그녀의 몸은 신경증상이라는 침해를 가지며 이 침해는 일종의 균열로써 내재된 에너지가 강력하게 분출되는 틈을 의미한다. 플라쌍 근교 농촌의 가장 부유한 채소 재배업자인 아델라이드의 아버지는 혁명 몇 년 전에 몰락하고 광기로 죽는다. 1768년에 태어난 아델라이드는 18세 때 고아가 된다. 그녀는 이상한 행동으로 아버지처럼 머리가 이상한 cerveau fêlé 아이 (직역: 머리에 틈이 생긴 아이62))로 소문난다. 기존 권위의 상징인 아버지의 죽음과 고아로 남은 약간 머리가 이상한 소녀는 새로운 인류의 출현을 알리는 상징적 서문임을 알 수 있다.

졸라에게서는 ‘한 가계의 순환보다 앞서 나타나는 순환이 바로 여인의 순환이다. 『루공-마카르 총서』에 앞서 발표된 작품들의 여주인공들 (로랑스, 테레즈 라켕, 마들렌 페라)이 의미하듯 신경증과 히스테리를 가진 방탕한 여인의 순환으로 이 여인들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인간 야수, 욕망에 눈뜬 야수, 동물성의 신경질적 발작을 잠재한 인류의 출현을 의미한다.’63)문제가 있는 여성들의 순환은 현재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과거이며 사랑과 함께 태어나는 죽음 (전락, 광기 살인)을 상징한다. 아델라이드의 ‘최초의 기관상의 침해 une première lésion organique'가 유전되는 것도 그런 문제의 순환을 의미한다. 부유한 상속녀인 그녀가 부유한 농가의 젊은이들을 제쳐놓고 임시고용인이었던 루공과 결혼한 것은 세간을 놀라게 하는 첫 번째 사건이 된다. 루공은 촌스런 농부로 뚱뚱하고, 둔한 평범한 사람, 불어로 겨우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결혼 15달 후 당근 밭을 일구는 도중 일사병으로 죽는다. 이름도 없는 미미한 존재인 그는 죽음조차 우스꽝스럽게 소설의 장에서 사라진다. 루공의 모습은 그와의 사이에 태어난 피에르 루공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암시된다. 아들 피에르는 타고난 농부이지만 신경이 유별나게 발전된 어머니의 기질이 아버지의 ‘혈색 좋은 둔중함'(48)보다 우세하게 나타나고, 또한 아버지의 전체적으로 ‘둔중한 성향’들은 어머니 쪽의 정신적 혼란의 영향으로부터 지켜주며 그로 인한 비생산적인 광기를 막아주며, 본능적으로 악덕이 발달되는 그의 의부 동생 마카르 앙투안과는 다르게 성장한다고 설명된다. 여기서 설명되는 아버지 루공의 혈색 좋은 둔중함은 사실 농부를 묘사하는 거의 사회 통념적인 수준일 뿐이다. 이 두 사람의 결혼은 농부들간의 결혼으로 농부라는 계층의 존재를 강조하며 시조 어머니 아델라이드는 농부계층의 심적, 정신적 변화와 이에 따른 행동 양식의 변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틀이 된다. 그것은 이들의 아들 피에르라는 인물의 행동양식의 변화로 증명된다. 그는 아버지 농부의 우직함과 아델라이드의 본능적 행동을 반반씩 받아 이익에 철저하며 어머니의 신경질적 기질을 통해 부르주아적 향유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가지는 인물이다. 농부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는 야심만만한 그가 한 첫 번째 일은 실세력의 공간인 플라쌍 시내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공과 아델라이드의 첫 번째 임무는 자신의 계층을 부인하고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변화되고자하는 루공가를 잉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욕망은 대혁명이 잉태시킨 욕망이다. 이들의 결혼 시기는 고아가 된지 6개월 후라고 언급된 이상 1786년쯤이고 그로부터 일년 후 피에르가 태어난 해는 1787년이 되며 루공이 죽은 것은 결혼 15개월 후이니까 1788년이 된다. 마카르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채 일년이 안되니까 1789년 혁명이 일어난 해로 추정 할 수 있다. 이 부부들은 이런 시간과 맞물려 혁명으로 태어난 새로운 욕망의 계층의 탄생을 의미한다.

아델라이드와 마카르의 결합은 이런 반항을 더욱 도전적으로 나타난다. 루공이 죽은 지 일년도 안되어 그녀가 마카르를 택한 것은 동네를 전대미문의 충격으로 휩싸이게 하는 두 번째 스캔들이었다. 마카르는 농부 루공과는 다른 계층에 속한다. 성밖 농부들의 계층에서도 가장 빈곤층인 마카르는 쇠가죽을 무두질하는 노동자의 아들로 아버지가 죽은 후 동네에서 소외되어 살고 있는 고아이다. 사람들이 그를 지칭할 때는 언제나 ‘그 마카르 자식’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키가 크고 마른 얼굴, 온통 수염으로 뒤덮인 그는 어린이들을 산채로 잡아먹는 식인귀라는 소문이 돌 정도이며 동네에서 절도나 살인이 일어나면 그가 제일 먼저 의심을 받는 산적 같은 인물로 각인되는 인물이다. 정규 수입이 없는 그는 그 곳이 국경과 숲에 가까운 까닭에 밀수와 밀렵으로 살아간다. 그가 가끔씩 동네에 나타날 때에는 언제나 술집에 혼자 앉아 문닫을 때까지 끈질기게 마신다. 그가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지나갈 때면 사람들은 ‘똑바로 걷는 걸 보니 엄청 마셨나본데’라고 말하곤 했다. 평상시 그는 약간 꾸부린 채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면서 겁먹은 듯 소심하게 걷는다. 그러나 ‘무성한 머리와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에서 갈색 눈만 반짝인다. 방랑의 본능을 가진 남자, 술과 빈곤층의 삶으로 찌든 남자의 곁눈질하는 슬픈 눈’ (43)이라고 설명되는 데서는 이들 동네사람들이 보는 시선과는 다른 작가의 연민이 드러난다. 마카르는 땅을 가진 정착민 농부들과는 달리 타지에서 온 가난하고 소외된 빈곤층의 이방인 노동자일 뿐이라는 점이 작가에 의해 암시된다. 이런 동네의 이방인이며 배척받는 파리아 계층의 ‘빈민의 분노를 가진’ 30세정도지만 거의 50세로 보이는 마카르를 아델라이드가 연인으로 택한 것은 동네의 수치이며 완전히 미친 선택으로 보이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기질이 원하는 대로 아주 순진하게 따른 선택이었다(44). 마카르의 오두막과 자신의 땅 사이에 있는 벽을 일부 허물고 문을 낸 그녀의 행동은 그녀가 사회의 통념에 상관하지 않고 가장 소외되고 빈한하고 천대받는 층과의 교류를 행동으로 옮김을 의미한다. 아델라이드가 마카르와 만나면서부터 시작되는 일종의 정신분열증인 신경질적 발작은 이런 보이지 않는 사회적 압박이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작용했음을 암시한다. 마카르가 국경에서 국경수비대의 총에 맞아 죽은 이후 그녀는 아들 피에르에 의해 동네 경계에 있는 마카르 집의 외딴 곳으로 쫓겨나 걸인-광인처럼 살아간다. 그녀의 공간적 위치는 죄를 뒤집어쓰고 동네 밖으로 쫓겨난 희생양을 상징한다. 루공-마카르가는 대혁명 후 태어난 자연적 욕망으로 태어난 새로운 계층으로 배타적이고 생명력 잃은 사회체제를 전복시키는 새로운 힘의 탄생을 뜻하지만 동시에 과거의 지배계급과 같은 탐욕적인 계층을 탄생시킨다. 피에르와 펠리시테 쌍이 후자의 계층을 형상화한다.


IV.2.2. 피에르 루공과 펠리시테-도당으로써의 가족


아델라이드와 마카르가 사랑과 연민을 토대로 한 정적인 가족 구조로 농부의 딸과 노동자 아들의 결합은 기존의 규율을 무시한 도전적 결합으로 동네의 배척을 받는다면 피에르 루공과 펠리시테는 모든 면에서 이들과 반대이다. 아델라이드와 루공의 아들인 피에르는 커가면서 집단의 규율을 위반한 어머니와 사생아 동생들을 벌하고 자신의 합법적인 사회적 위치의 회복을 노린다. 피에르는 교묘한 법적 사기로 어머니의 집과 땅을 차지하고 동생들의 상속 몫까지 차지한다. 루공가를 이루는 피에르 루공의 특징은 바로 어머니 부정이다. 사회에서 배척받는 파리아와 사랑에 빠진 어머니는 사회규약을 어긴 죄지은 여인, 결함을 가진 어머니로 단죄 받아야 된다. 아버지 부정의 가족 로망스는 전통의 부정으로 근대 소설의 전형인 고난을 통해 목적을 이루는 성장소설의 기조를 이룬다. 전통적 인습의 도움 없이 새로운 세계에서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가야하는 근대적 주체들의 의식세계를 반영한다.64)아버지 부정이 성장소설의 기조를 이룬다면 졸라의 소설에서는 아버지는 약화되고 어머니가 많이 등장한다. 모태로서의 여성은 기원과 더 관련이 된다. 죄지은 어머니를 부정하고 단죄하는 아들의 이야기는 달갑지 않은 요소를 제거하고 다시 자신이 일어서고자 하는 욕망의 필요조건이 되면서65)동시에 기원의 정화를 원하는 집단의 욕망과도 관련된다. 이 점이 졸라의 가족 로망스가 다른 가족 로망스와 다른 점으로 사회의 통합성을 해치는 이타적 존재인 모태의 제거는 타자를 제거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집단의 욕망을 보여준다.

어머니와 동생을 경계 밖으로 내쫓고 농부 피에르는 새로운 사회적 신분의 도약을 꿈꾼다.  촌사람의 때를 벗고 영리해진 농부는 ‘음험하고 교활한 야심, 욕망충족에 대한 끝없는 욕구의 부르주아 얼굴’(53)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부르주아란 성밖 촌사람 농부에 비해 읍내사람 같은 의미이다. 그의 꿈은 자신보다 나은 계급의 처녀와 결혼해서 플라쌍 안의 부르주아 계급으로 자리잡는 것이었다. 결혼은 자신의 계급위로 한 단계 올라가는 능란한 방식이었다.  

플라쌍은 큰길을 통해 엄격히 3구역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 구역 안에 3계급이 살고 있다. 귀족계급은 밀폐되어 살고, 신 시가지에는 부르주아, 은퇴한 상인, 변호사, 공증인등 안락하고 야심만만한 자기들만의 작은 세상을 형성한 부르주아 계급이 살고 있다. 구 시가지에는 서민, 노동자, 소매상인들이 공장 등과 함께 살고 있다. 피에르가 제일 먼저 자리잡고자 원한 곳은 바로 이 구 시가지이다. 그는 거기에서 몰락해 가는 기름상점의 딸 펠리시테와 결혼한다. 그의 가족에 대한 나쁜 평판과 하급 계층이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비열한 방법으로 어머니의 땅을 판돈 50만 프랑은 이 결혼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펠리시테는 자신 가족의 경제적 불운을 한탄하면서 이 시를 권력과 재산으로 정복하고자하는 야심에 찬 아가씨이다. 귀족의 사생아인 그녀는 아버지를 부정하고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자하는 사생아적 기질-자신의 사회적 조건에서 벗어나 다른 곳을 창조하고 새로운 낙원으로 가고자하는 탈주 유형-을 보여준다. 상인의 딸이 원하는 낙원은 바로 돈과 권력의 세계이다. 그녀는 남편과는 동업자이며 아들들은 자본을 투자하듯 투자한다. 한편으로 귀족의 사생아라는 그녀의 입지는 구체제의 연속성과 영원성을 의미한다. 그녀가 겨우 촌티를 벗은 농부인 루공과 결혼한 것은 공범을 택하듯 루공을 택한 것으로 자신이 그 뒤에 숨어 조종할 수 있는 건장하고 어느 정도는 바보가 아닌 남자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 젊은 부부는 용감하게 재산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57).

루공가가 플라쌍에서 권력과 재산을 이루는 과정은 하나의 소극이다. 피에르는 합법적인 권리를 위해 나선 노동자들의 봉기를 종탑의 종을 고의로 울려 다시 피의 혁명이 도래한 것 같은 위기의식을 조장하면서 예전의 광폭한 농민 폭동으로 연결시키는 전략을 쓰면서 군대의 살해를 합리화한다. 그의 소극은 위법이 허용되는 대중의 난장판 의식을 연상시킨다. 물론 이 난장판은 가짜 희생제물을 통해 다시 정화되는 대중들의 의식으로 끝나고 마을은 다시 평화를 얻는다. 자신의 조카이며 죄 없는 고아 소년 실베르를 총살시키고 난장판을 일으킨 폭도들을 처형함으로써 다시 평화를 얻는 연출 덕분에 피에르는 마침내 권력과 부를 차지한다. 아들 아리스티드는 동료들을 배반하기 위해 팔을 다친 것으로 위장하다가 매번 다른 상황에 따라 붕대를 풀었다 감았다하는 박쥐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아내 펠리시테는 파리에서 이미 성공한 쿠데타를 자신들의 극적인 승리를 위해 알리지 않는다. 이 모든 연출이 이들의 권력과 재산이 비겁한 강도 짓에 의한 하나의 천박한 소극임을 상징한다.

이 소극에서 특이하게 강조되는 것이 가족의 역할이다. 이들 가족은 아버지의 권리가 중심이 되는 부권적 집단도 아니며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리가 강조되는 ‘가부장적 사회’도 아니다. 파벌 famille politique의 개념에서 볼 수 있는 패거리 (bande), 바로 ‘famille de bandits à l'affut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는 비적 패거리’ (72)이다. 졸라의 가족-패거리의 이미지는 정치, 경제 차원의 패거리를 포함해 마피아 패밀리와 같은 20세기의 패밀리의 이미지를 예고하면서 가족이라는 미명아래 개인들의 희생을 강요한 20세기 국가 또는 대기업의 가족 이데올로기를 심층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피에르 루공이 자신의 동생과 조카 실베르를 희생시키는 모습은 ‘조국을 위해 가족을 희생하는 로마인처럼’ (228)이다 : “여러분, 나는 나의 의무를 다하겠소. 무정부상태에서 도시를 구하기로 맹세했소. 나의 가장 가까운 친척을 희생시킬지라도 나는 이 도시를 구하리다.”(228) 이런 피에르의 가족 이데올로기의 이면에는 동생들과 어머니의 돈을 강탈하고 조카를 살해하는 파렴치한 일들이 깔려있다.

정적인 가족 관계라기보다 전략적으로 제휴한 도당의 관계인 이들 가족들을 묶는 끈은 어떤 휴머니즘이나 진보주의 이념도 아닌 바로 향유에 대한 욕구이다. 이들은 자신의 계급에서 탈출하기 위한 열망에서 공격의 기회만 노리는 배고픈 늑대의 집단으로 가족은 철저히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인 도당이 된다. 이들은 바로 1848년 2월 쿠데타를 통해 들어선 제2제정을 의미한다. 이 두 그룹의 도덕적 퇴행, 역사적 퇴행은 다시 지배-피지배라는 이기적이고 동물적인 인간의 기원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아델라이드와 마카르가 잉태시키고자했던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사회구조에 대한 희망은 또 다른 자리바꿈으로 끝나며 출구 없는 닫힌 원안에서의 반복과 전락으로 간다. 다음의 실베르-미에트 쌍은 이상적 가족을 꿈꾸며 루공가와 대립하는 가족상을 보여준다.


IV.2.3. 실베르와 미에트 - 통합으로서의 가족


실베르와 미에트는 마카르와 아델라이드의 죽음과 광기로 끝난 사랑을 다시 부활시킨다. 아델라이드와 마카르 사이에서 태어난 위르실의 아들로 위르실의 죽음 이후 고아가 된 실베르는 가족들에게도 버려진 존재이다. 가족과 사회의 수치로 각인되어 내쫓긴 탕트 디드 (아델라이드의 이름)만이 그를 받아들여 키웠다. 플라쌍의 노동자인 그는 마카르처럼 자신의 계층의 둔중함을 지닌 노동자이지만 그 안에는 어떤 항거를 느끼는 지적인 본성을 갖고 있다. 이상한 완강함을 보이는 깡마른 얼굴, ‘방랑하는 기사’와 같은 마른 몸매의 이미지는 중세의 전설에 나오는 ‘방랑하는 유대인 구두장이’66)처럼 영원히 세상을 유랑하면서 세상의 불의와 어리석음 앞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비극적 증인의 운명을 상징한다. 그러나 아직 어린애 티를 간직한 사춘기의 모습은 열정과 동시에 어린이의 부드러움과 순수함이라는 양면성을 보여주며 그가 소외자들에게 갖는 사랑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는 탕트 디드에게 연민을 느끼는 유일한 인물이며 또한 사회에서 밀수꾼의 딸, 살인자의 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고아 미에트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이들 비참한 여인들을 구원하고자하는 염원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항거에 대한 그의 열정과 평행선을 이룬다. 아델라이드의 사랑이 새로운 구원을 잉태시키지 못하고 마카르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것을 보상하려는 듯 그는 미에트와의 사랑을 통해 미에트라는 가장 천대받는 계급을 구원하려는 염원으로 가득 차 있다. 졸라의 소설에서 주로 나타나는 ‘요부 femme fatale’에 의한 사랑이 전락과 죽음, 광기로 가게 하는 저주라면 그의 사랑은 구원으로 이끌고자하는 이상적 사랑이다.

미에트 역시 고아이며 그녀의 아버지는 밀렵꾼으로 헌병을 죽인 죄로 감옥에 가게 된다. 혼자 남게 된 그녀는 살인자의 딸이라고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아델라이드의 옛 농가에서 하녀로 살아간다. 그러나 13세의 그녀는 여인으로 가는 과정의 건강한 농촌 소녀이다. 그녀의 풍성하고도 아름다운 머리칼은 투구 같고 너무나 큼직하고 붉은 입술로 즐겁게 터뜨리는 웃음은 그녀를 옛날의 바쿠스 신전의 여제처럼 보이게 하며 생명과 환희의 힘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그 안에는 아직 어린애 티를 벗어나지 못한 13세 소녀의 순수함을 보여준다.(15-16). 강한 투사, 관능적이기까지 한 풍부한 생명력, 순결함의 이미지는 하층계급에서 탄생된 사랑과 자유의 여신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나 (162), 어린 나이에 이미 고되고 힘든 농촌의 일로 변형되기 시작하는 그녀의 손은 빈곤층의 비참함과 부당한 고된 노동을 상징하면서 희생제물이라는 복합적 이미지를 내포한다 (175). 그녀는 노동자의 항거 중 자유의 여신처럼 깃발을 든다. 그녀의 붉은 안감을 댄 검은색 망토는 실베르와 함께 추위를 막기 위해 덮어 쓸 때는 포근한 동굴 (잉태를 상징하는 자궁)이었다가 항거 중 붉은 색으로 뒤집어 입을 때는 혁명의 구원의 여신으로의 변신을 의미한다. 가장 비참한 계층에서 태어나 박해받고 있었던 어린 소녀의 새로운 민중의 여신으로의 변신은 항거하는 노동자들에게 혁명에 대한 열정과 신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붉은 망토, 쳐든 깃발은 군대의 첫 표적이 되면서 너무나 빨리,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그녀는 살해된다. 노동자들의 혁명에 대한 신념이, 단번에 구원될 수 있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낭만적인 하루 밤의 꿈이었음이 증명된다. 사랑이 죽음이라는 악몽으로 끝나면서 실베르는 죽음을 통해 그녀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열망하며 미에트와 만났던 옛 묘지 셍-미트르 공터에서 처형되는 것에 마지막 행복을 느낀다. 이들의 사랑에 죽음이 집요하게 깃드는 것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예고된다. 우물가와 묘지에서의 만남은 죽음을 통해서만이 완성되는 사랑을 예고한다.

실베르와 미에트가 처음 만난 곳은 예전의 마카르와 아델라이드의 집을 가르는 담장 가운데 있는 우물이다. 이들이 담장에 막혀 서로를 보지 못하지만 우물에 비친 서로의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장면은 죽음과 탄생의 이미지인 물의 이미지로 연결된다. 물론 나르시스 신화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절대의 진리에 도달하고자하는 욕망이 있지만 이들의 사랑은 결국 죽음을 뛰어넘지 못하는 비극적인 나르시스와 연결된다. 또한 이들이 만나는 셍-미트르 공터는 플라쌍 남쪽을 나서면 나타나는데 바로 소설의 1장이 시작되는 곳이다. 셍-미트르 오른쪽 막다른 골목에는 탕트 디드와 실베르가 사는 오두막집이 있고 왼쪽에는 이전에는 아델라이드의 농가였으나 미에트가 하녀로 사는 친척 소유의 쟈스-메프렝이 있다. 한 마디로 셍-미트르가 소설의 중심 공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외진 곳, 유랑민 집시가 머무는 곳, 개구쟁이들이나 젊은 연인들이 숨어드는 이 곳은 신화적 위치에서 보면 플라쌍의 경계 밖의 공간으로 위험한 곳이다. 플라쌍의 지형상의 특징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안과 밖을 분명히 구분 짓는 지형을 보여준다. 셍-미트르는 플라쌍 경계 밖의 공간이다. 신화에서 경계 밖의 공간은 나쁜 힘이 있는 곳으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과거 조상들의 희생제 의식에서 희생양의 머리에 죄를 전가하고 내쫓는 곳이 사막 또는 경계 밖의 외진 공간이다. 디드, 마카르, 실베르, 미에트 모두 이 경계 주변의 인물들이다. 이들 주변인들은 경계 밖에서 영원히 내쫓긴 채 살던가 아니면 경계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선택의 운명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경계가 혼란을 겪게되는 시점은 대혁명의 시점과 일치한다. 예전에는 공동묘지였었던 셍-미트르는 죽음의 장소이지만 강한 생명력이 묘하게 어우러진 곳이다. 사람들은 이 비옥한 땅을 쓸모 없이 내버려둘 수 없다고 도시 반대편의 새 묘지로 이장할 것을 정한다. 어떤 종교적 의식도 없이 무덤들은 파헤쳐지고 뼈들은 시내를 가로지르는 마차에 실려 옮겨지는 동안 보도위로 떨어지곤 했다. 이런 끔찍한 기억 때문에 이 대지를 사고자하는 사람도 없고 활용도 되지 않는다. 여기서 뼈를 싣고 가는 마차의 이미지는 대혁명을 연상시킨다. 한쪽에 자리잡은 석재 공장의 계속 오가는 톱날도 기요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묘지의 이장은 옛 묘지의 신성함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런 신성함의 상실은 기존 구체제의 절대적이었던 위계질서가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대혁명의 피와 죽음을 연상시키는 파괴된 옛 묘지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비옥한 땅 덕분으로 점차 우거진 숲의 모습을 띄고 엄청난 생명력의 땅, 개구쟁이들의 놀이터, 연인들의 밀회장소, 사랑의 장소가 된다. 이런 생명력의 이미지와 더불어 셍-미트르는 묘지와 석재공장의 톱날을 통해 여전히 각인되는 대혁명의 이미지, 죽음의 숨결이 예전의 무덤을 통해 뜨겁고도 감미롭게 유혹하는 곳이며 동시에 고아들인 주인공들의 고독과 사랑의 감동적인 장소, 이곳에서 가난하지만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집시들의 모습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장소이다. 다시 말해 죽음과 사랑, 기요틴으로 상징되는 폭력적 제재의 힘과 육체의 향연을 누리는 자유로운 생활, 가난하고 소외된 인간과 자연의 번성이라는 서로 대립적인 힘들이 공존하는 장소이다. 대혁명 이후 귀족왕조를 대신한 서민적인 정서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곳의 밤의 모습은 위협적인 모습으로 바뀌는데 귀족을 대신해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자리잡은 부르주아들이 경계 밖의 소외인들에게서 어떤 위험을 느끼는 내면심리가 투영되는 곳이다. 해가 지면서 이 장소는 ‘드넓은 시커먼 구멍'으로 위협적인 공간으로 바뀐다. 보헤미안 집시가족들, 부랑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이 공간은 시내 부르주아들을 불안케 하는 공간으로 바로 1851년 12월 초순 경, 7시경이라는 정확히 언급된 시간에 이 공간 속으로 한 젊은이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들면서 그 위협의 정체가 분명해진다. 실베르는 내일의 노동자 봉기에 쓰기 위한 소총, 밀수감시인에 의해 살해된 마카르의 유일한 유산인 소총을 이곳에 숨기려 온다. 마카르와 실베르의 고아라는 위치는 자신이 아버지가 되려는, 자신이 새로이 자신의 족보를 쓰고자하는 야심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은 바로 부르주아 계급이 위험시하는 노동자 계급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시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경계에 사는 주변인일 뿐이다.

루공-펠리시테가 노동자를 타자로 보면서 이들을 벌하고 내쫓음으로서 자신의 권리와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욕망을 형상화한다면 실베르-미에트는 모두가 평등한 이상적인 사회상을 창조하려는 통합성에 대한 욕망을 형상화한다. 둘 다 대혁명이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욕망을 의미한다. 위에서 보았던 세 가지 가족상들은 어머니라는 이미지로 다시 응축되는데 대립들간의 투쟁과 통합이라는 사회의 숨은 욕망과 희망을 드러내고 있다. ‘사물의 궁극적 실체를 표현하기 위해 정신이 이미지를 이용하는 이유는 이 실재가 개념에 의해 표현되지 못하고 모순되는 방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67)결함을 가진 원죄 어머니의 존재는 금지된 것에 대한 접근으로 새로운 대립의 시작이며 이들의 대립적인 경향들은 통일성의 원칙에 복종되거나 모순적인 종합으로 간다. ‘원죄 어머니’의 존재는 ‘실패한 구원자 어머니’, ‘남성적 어머니’같은 양성적이고 모순적인 어머니 상으로 확장되며 구원자 어머니탄생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IV.3. 가족에 나타난 원형적 상상계와 신화


IV.3.1. 영원한 타자-원죄 어머니


졸라의 신화인류학은 원초적 폭력의 개념 위에서 시작된다. 결함을 가진 어머니, 원죄 어머니는 졸라의 가족구조에 나타난 원형적 구조의 하나로 바로 이 폭력의 기원에 있다. 루공-마카르가의 시조 어머니인 아델라이드는 마카르의 죽음이후 정기적인 발작을 일으킨다. 그녀의 광기와 신경증은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그녀의 주기적인 발작은 영원히 되풀이되는 인간의 발작증, 광기의 순환을 의미한다. 그녀의 광기는 또한 바로 루공가의 광기이기도 하다. 그들이 죄 없는 노동자들을 폭도 또는 밤에 돌아다니는 늑대인간들로 몰아가면서 살해한 것은 자신들의 입신욕망과 탐욕에서 나온 광기임을 보여준다. 그녀의 자식인 피에르 루공의 태초의 살인은 인간에게 전락과 회오리를 몰며 영원히 돌아온다. 이 전락을 끊을 수 있는 길이 있을까. 결함이 있는 어머니의 존재는 그 결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어머니유형을 서술 구조에 이미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거기에 세상을 변화시키고자하는 졸라의 사상이 전개된다. 이 구조의 정반대에 위치하는 것은 마리아-아기 예수와 같은 구원의 모자상이다. “원죄 어머니 vs. 구원의 어머니” (또는 모자상)의 구조는 대립적인 것들의 투쟁과 통합성으로 가는 원형적 구조이다. 그 중간에 과도기적으로 나타나는 어머니 형들이 수치 당한 동정녀와 남성적 어머니이다.

원죄어머니의 다른 중요한 역할은 구원의 어머니를 탄생시키기에 필요한 역할로써 바로 증인의 역할이다. 그녀는 기억과 연결된 인물로 과거와 똑같이 되풀이되는 폭력의 고리를 증명하고 고발하는 위치이다. 아델라이드의 집은 ‘통찰력 있는 광기를 가진 이상한 집 cette étrange maison de la folie lucide'(46)이라고 언급되는데 통찰력 있는 광기란 예언자적 광기이기도 하다. 아델라이드의 유전적 결함은 현재와 과거를 같은 선상에 놓으면서 영원한 순환을 의미하지만 광인에서 보이는 예언자적 역할은 그녀가 이 새로운 대중의 탄생의 증인이 됨을 의미한다. 그녀는 마카르와 실베르의 죽음의 목격자인 동시에 실베르의 죽음이 루공의 출세를 위한 희생물임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다. 실베르의 죽음이후 무당과 같은 ‘성스러운 광기 folie lucide’ 속에서 내뱉는 그녀의 말들은 과거의 귀족들이 혈통으로 지배자가 된 대신 새로이 태어난 루공가는 가엾은 주변인들을 제거한 피 속에서 태어난 늑대들이라는 진실을 담고있다. 그리고 루공가의 출세가 제2제정의 탄생과 동시에 일어난 이상 그것은 바로 제2 제정의 실체를 고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의 역할은 전설적인 예언자, 세상을 떠돌며 세상의 불의를 보는 기사이다. 대혁명 이전의 역사와 이후의 역사간의 순환성을 고발하는 그녀의 존재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잊고자하는 이들에게 불편한 존재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녀는 미친 사람의 영역, 그녀의 사랑은 타락된 사랑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아들 피에르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가둔다. 피에르 루공이 한 일은 바로 동네사람들을 대변하는 일이 된다. 『파스칼 박사』에서 루공가의 마지막 자손이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을 목격하는 그녀의 역할은 한 계층의 광기의 순환이 끝남을 다시 한번 증거 하는 역할이다. 그녀는 파스칼박사처럼 증인으로서의 눈을 가지며 고발을 통해 행동을 유발하는 증인-행동주의자로써 작가의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졸라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IV.3.2. 수치 당한 동정녀


미에트는 마카르 동네의 따돌림받는 하층민이다. 죄를 씌워 동네 밖으로 내쫓기는 scape goat이기도 한 그녀는 희생양이며 동시에 아무 죄 없는 어린 양-순교자이다. 파리아라는 사회적 위치, 어린 소녀이지만 노동으로 착취당하는 존재, 아직 여인이 되기 전의 몸은 노동자들의 열등한 사회적 위치와 미숙한 의식상태를 상징한다. 실베르와의 사랑으로 미에트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복수를 정의와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고자하는 한 차원 높은 연대 의식으로 발전시키면서 노동자들의 사회적 인식의 발전과정을 보여준다. 마카르와 아델라이드가 만들었던 문, 그러나 곧 폐쇄되었던 문을 여는 이들의 행위는 갇혀있었던 노동자들의 봉기와 관련된다. 이들의 이른 죽음, 미에트의 어린 몸, 실베르의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독서로 상징되는 성숙되지 못한 노동자들의 의식에서 이들의 항거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운명 지워진다. 기존 사회는 노동자들을 성밖으로 쫓아내야 하는 위험한 타자로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은 이들에 대해 터무니없는 상상으로 이들을 막강한 괴물로 만드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노동자 자신들도 이러한 테두리 안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음이 드러난다. 이들이 읍내를 정복한 후 다시 성밖으로 나가면서 군대에 의해 쉽게 학살될 수 있는 불리한 상황을 택하는데서 기존의 사회가 만들어놓은 울타리-노동자는 위험한 타자로 성밖에 있어야 함-를 벗어나지 못하는 데서도 증명된다.

수치 당한 동정녀 미에트는 잉태-탄생에 이르지 못한 실패한 구원자 상을 의미한다. 미에트의 본래 이름은 마리아이다. ‘동정녀와 어린이의 결합은 순수함의 신화적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죽음으로 끝나는데 위대함과 순수함을 더 보여주기 위해서이며 죄의식과 벌의 신화와 대립된다.’68)그녀와 실베르와의 순수한 사랑은 죽음을 동시에 잉태하고 있다. 이 젊은이들이 사실 진정 원하는 것이 죽음인 것은 이들의 사랑에 깃든 순결과 순수함은 죽음을 통해서만 완전히 충만된 상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셍-미트르의 생명력처럼 다시 삶을 키운다. 더 이상 분쟁이 없는 곳, 현재와 과거의 계속적인 상호침투가 일어나는 이 곳처럼 이들의 죽음은 재앙도 벌도 아니고 순환의 한 순간이 된다. 실베르와 미에트의 그리스도와 같은 순수한 희생제물의 모습과 실베르가 총살되기 위해 셍-미트르 공터로 걸어가는 모습은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의 모습을 내포하는데서 이들 쌍은 구원자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러나 구원자의 예고는 피에르 루공처럼 권력과 돈을 위해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는 강도 패거리라는 적 그리스도의 등장을 또한 필요로 한다. 권력을 장악한 강도 떼들은 이제 자신들을 합리화할 새로운 이미지가 필요하며 군중들의 구원자에 대한 믿음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태어나는 것이 바로 남성적 어머니이다.


IV.3.3. 남성적 어머니


남성적 어머니는 심리학적 용어로 본다면 ‘남근을 가진 어머니이다. 아버지로부터 팔루스의 상징을 거세한 어머니로 삶과 질서의 상징이 아니라 횡포와 살육을 상징한다.[...] 팔루스를 가진 여자란 나를 흡수하고 나를 무로 환원시킨 어머니로 행복과 동시에 죽음의 유혹이다.’69)현대의 남근은 돈이다. 펠리시테는  아델라이드를 대체하고 자신이 시조가 되고자하는 어머니이다. 『루공-마카르 총서』의 마지막 소설인 『파스칼 박사』의 끝 장면은 돈과 권력에 대해 화려한 이미지를 제시하면서 군중들을 사로잡는 그녀의 승리로 장식된다. 이 장면에서 그녀는 『루공가의 재산』에서 자신이 희생시켰던 노동자들과 제휴하며 한때는 자신의 적이었던 이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신으로 군림한다. 그녀가 이끄는 왕국은 자본주의의 제 2의 전성기이다. 지배를 위해 힘으로 굴복시키는 시대 (『루공가의 재산』)는 지나갔다고 보며 이제는 노동자들을 감동시키는 일이 필요해진 시대를 보여준다. 성밖이나 사막으로 내몰린 희생양-죄인처럼 인식되어 결코 성안으로 들어 올 수 없었던 채 살해되었던 이들 노동자들은 이제는 성안으로 당당히 들어와 펠리시테를 자신들에게 부와 평등을 가져올 새로운 어머니 여신으로 환호한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권력의 지배-피지배관계를 가족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이용해 부드러운 것으로 만들고 복종을 가족 간의 통합처럼 인지시키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효과적인 도구’70)의 이미지 일 뿐이다. 권력과 돈에 대한 잔혹한 욕망을 풍요의 이미지인 어머니로 위장한 펠리시테는 남성적 어머니의 실체를 가장 분명히 보여준다. 그녀와 노동자의 결합은 자본과 기술의 결합으로 인한 진보적 미래라는 황홀한 미래를 보여주면서 아델라이드로부터 시작된 정체성의 불안을 극복하고 통합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자 하지만 이들 노동자 집단들이 펠리시테라는 자본가이며 선동가인 인물에게 매혹되는 무지한 대중의 모습, 그리고 광고의 막강한 힘에 순종하는 소비자의 모습과 겹쳐질 때 현대적 소극의 시작을 알린다. 루공가의 재산이 시간의 역행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그녀가 파스칼이 평생 기록해놓은 엄청난 양의 서류들, 역사의 진실을 기록한 서류들을 태우는 장면에서도 펠리시테의 실상이 드러난다. 그녀의 성공은 시간의 퇴행으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며 사실상 진보적 시간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 시간상의 퇴행적인 인물인 펠리시테를 통해 육화된다는 데서 진보의 믿음에 숨어있는 양면성을 고발한다.


IV.3.4. 구원의 어머니 또는 모자상


‘수태한 어머니 상에는 예전의 청교도적 도덕관 대신 수태가 새로운 가치로 자리잡으면서 성적 본능의 원죄에서 벗어남을 상징한다.’71)졸라의 작품에 존재해온 신경증, 광기, 피를 순환시키는 나쁜 여자들의 순환에서 마침내 벗어남을 의미한다. 남성적 어머니와 대립하는 클로틸드와 아기의 모습은 잉태에 이르지 못한 동정녀가 마침내 잉태를 통해 창조에 이르는 모습을 상징하며 ‘원초적 통일에의 향수, 대립과 양극성을 소멸시키려는 욕구’72)이다. 그녀는 처녀이며 동시에 어머니이다. 처녀의 순결함과 수태의 풍요로움을 동시에 가진 여성성을 의미하며 성처녀 마리아처럼 구약의 죄와 벌의 신화를 인내와 사랑의 신화로 바꾸는 놀라운 인물이다. 그녀의 잉태는 루공-마카르가의 전락의 요인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클로틸드에서 현대인들의 가정과 사회에 품고있는 희망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클로틸드는 우선 루공가의 한 사람이다. 파스칼과의 근친상간적인 면은 도덕적 차원의 불륜이라기보다 루공가의 전락을 극복하기 위해 택해진 서술상의 전략이며 또한 그 당시 국가의 인구 증가 선전과도 맞물리는 아이의 탄생으로 모든 것을 면죄 받을 수 있는 출산의 찬미가 들어있다. 파스칼을 통해 관찰, 진실, 인간애 (사랑)를 배운 클로틸드는 파스칼에 의해 교육되지만 그를 초월한다는 점에서 루공가의 또 다른 미래가 될 수 있는 인물로 펠리시테라는 자본주의적 변질과는 다른 변화를 잉태하고자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펠리시테가 불태운 서류-파스칼이 평생을 기록해놓은 역사- 대신 아기의 신선한 향기를 간직한 아기 옷들로 채워진 옷장은 순결과 풍요를 나타낸다. 동굴처럼 자리잡은 세상과 동떨어진 클로틸드의 집은 이 옷장의 확장으로 모태로 자리잡은 모습, 중심점, 씨앗을 상징한다. 졸라의 집에 대한 상상계에서 ‘닫힌 곳, 벽장의 강화는 순수화의 조건, 어떤 행복의 조건이 된다.’73)이 우주의 배꼽이 되는 클로틸드의 집은 역사적 순환을 초월해서 중심이 되고자하는 욕망으로 자신의 존재의 우주론적 실재성에 대한 향수, 총체적 인식에 대한 욕구이다. 그녀는 새로 시작되는 우주목-가계수에 대한 욕망을 상징한다.

파스칼이 씨앗이라면 클로틸드는 양육의 임무를 띈다. 파스칼과 클로틸드의 아기로 힘차게 젖을 빨고 있는 아기의 모습은 강한 생명력을 가진 인류를 상징한다. 그러나 아직 이름이 없는 아기는 양육자 어머니의 역할을 부각시킨다. 교육된 신지성, 인간애를 갖춘 양육자는 프랑스 혁명기에 남성적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나온 양육하는 어머니 상보다 현대적 접근을 보여준다. 클로틸드는 의지와 굳건함이라는 남성성과 통합과 사랑이라는 여성성의 조화를 보여주면서 완전한 인간을 향한 제안으로 지배와 피지배로 가는 산업자본주의의 악덕에 대항하는 결의를 보여준다. 그녀는 가족, 국가. 사회의 새로운 교육자 상을 보여준다. 『파스칼 박사』에서는 그녀의 구체적 실체가 명시되어있지 않지만 『제 4복음서』는 기술+지성+자본의 행복한 결합으로 다시 설명된다.

펠리시테라는 지배 욕망의 화신인 남성적 어머니가 자신의 권력을 위해 희생물을 요구하는 퇴행적인 순환 구조에 속한다면 클로틸드를 통한 구원의 모자상은 이런 전락을 벗어날 수 있는 행보를 의미한다. 이들의 대립은 현대의 마법적 표현인 산업기술과 진보라는 상승적 직선구조의 허구성과 인간의 자연 친화적인 생명력과의 대립으로 영원한 순환구조 속에 있다.            

IV.4. 가족과 이데올로기 : 진정한 어머니 상을 찾아서


졸라의 가족에 나타난 어머니 상들은 그 시대의 두려움, 희망을 품고 있는 사회적 상상계에 속한다. 이런 상상계야말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을 설명하는 것으로 사회와 가족을 성립시키는 기원을 알려주며 한 시대의 숨은 이데올로기를 설명할 수 있다. “신화적 창조는 하나의 문화적 사실로 주어진 문화의 범주에 비추어 비교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신화적 창조는 한 시대, 역사적 상황과 떨어질 수 없다. 이렇게 갱신된 신화는 자연적 삶과 역사의 중요한 면을 해석하도록 이끈다.”74)

졸라는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의 정서를 남성적 어머니의 출현을 통해 상징한다. 강한 남성적 어머니는 남성을 유혹하고 파멸시키는 요부와는 달리 광고와 연출의 시대에 부합하는 상이다. 역사와 시간의 진보를 부정하고 욕망의 순환적 시간으로의 퇴행을 의미하는 그녀는 통합이라는 여성성을 표면에 내세우나 그 안에는 남성성, 즉 지배력에 대한 인간의 영원한 욕망, 바벨탑의 후손들인 인간의 집요한 지배욕망을 보여주는 원형에 속한다.

가족과 사회의 정체성은 어머니 상을 통해서 말해진다는 점에서 졸라의 가족 소설은 진정한 어머니 상을 찾고자 하는 여정이라고 볼 수 있다. 졸라의 구원의 어머니 상은 펠리시테라는 남성적 어머니상의 정체를 고발하고 극복할 수 있으며 아버지-과학 (관찰과 진실)과 어머니-신앙 (사랑)의 통합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생명력, 삶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한 어머니 상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는 출산을 장려하는 그 시대의 국가관을 대변하는 점도 있지만 현대 프랑스를 충분히 예견하고 있다. 졸라 사후에 일어난 양차 대전은 남성적 어머니의 죽음으로의 유혹을 그대로 재현했으며, 클로틸드 모자상은 이런 죽음의 전락에서 벗어나 새로운 복지국가로 탄생한 지금의 프랑스를 보여준다. 그의 희망이나 예언대로 현대 가정은 물질적인 진보와 풍요가운데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졸라의 어머니 상은 해체의 불안 속에서 이들 상황들의 역동적 관계의 분석으로 가지 않고 구원의 모자상을 통해 서로 인접한 긴장들을 통합시키는 신화를 계속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긴장들의 역동적 관계로 가기보다 신화적 통합으로 감은 긴장해결에 여전히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 문제점은 현대 프랑스에서 다시 나타난다. 현대 프랑스의 복지국가 지향은 국가가 가족의 어머니를 대신해 개인의 질병, 노후를 떠맡는 가운데 국가라는 큰 가족 안에서 기능적 어머니 (국가는 어머니를 대신해 모든 것을 결정한다)가 자리 잡고 개인적 가족이라는 작은 원은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의 순환의 중심에 있는 어머니라는 신비를 간직한 중심대신 성장을 위한 장소만으로 한정된다. 그 결과 부모와 자식관계는 소원해지고 어머니의 위치는 약화된다. 물질의 평등을 이루어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세를 보이는 프랑스 젊은이들의 가출과 자살은 기능으로 전락한 어머니만이 존재하고 자신과 자신의 영혼과의 교류를 의미하는 우주론적 존재로서의 신비를 간직한 어머니상의 결핍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결핍은 남성적 어머니의 등장을 재촉한다고 할 수 있다. 유럽 공동체가 바로 그런 거대한 남성적 어머니 상이 부활된 것이 아닐까. 남성적 어머니는 어머니와 사생아들을 위험한 타자로 보면서 이들의 희생을 당연시 한 루공가처럼 그 안에는 가상의 위험한 대상을 찾아내고 제거하려는 욕구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남성적 어머니의 영원한 순환에 맞서 우리의 욕망을 승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어머니 상을 형상화하는 일은 가족의 정체성 나아가서는 사회의 정체성을 찾는 일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위급한 목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졸라가 가족을 주제로 삼은 것은 바로 이런 필요성을 통찰한 것이라고 본다. 우리 시대에 맞는 ‘구원의 모자상’은 주변인들의 ‘희생’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으며 분리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어야 하며 쉽사리 낭만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상이 아니라 대립적인 것들의 대결과 종합의 변증법’을 담고 있는 통합의식을 보여주는 어머니 상이어야 한다고 본다. 

        

V. 가족의 정체성과 개체성의 은유적 대비: 『안나 까레니나』의 시학

                              

V.1. 가족의 정체성이 정립되는 과정


‘가족’의 정체성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 영역은 아주 역동적이다. 그래서 때로는 그것이 지닌 의미를 우리의 일상적인 서사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을 듯하기도 하고, 때로는 인식의 공간에서 논의해야할 형이상학적 명제로 다가서기도 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가족이란 개념이 단일한 정체성의 관점에서 조망될 것이 아니라, 복합적 정체성이란 관점에서 그 의미가 정립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가족의 정체성이 지닌 의미는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시공간에서 이루어진 행위들이나 사상적 체계 들 속에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의 정체성이 지닌 의미에 대한 논리적 체계를 세워보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그것을 조망하면서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특정한 하나의 영역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이때 이런 종합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가족의 정체성이 지닌 의미를 비교적 심도 있게 분석해 볼 수 있는 담론의 영역이 바로 문학이라고 사료된다. 이런 연유로 이 글에서는 러시아에서 가족의 정체성이 지닌 의미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주요 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러시아에서 ‘가족’의 의미가 보편적인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피터 대제의 개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전에 전개된 러시아문화의 지평에서 가족이라는 개념은 그 어느 곳에도 자리잡을 공간이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농노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러시아 사회 문화 체제가 기본적으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불평등한 계급적 구조에 바탕 하여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인구의 90% 가량을 차지하고 있던 농노들의 인간의 가치를 기본적으로 인정하지 사회적 구조에서, 가족이라는 공동체적 의미는 근본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 다른 주요한 이유는 사회적 구조에서 나타난 신분의 상하관계가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 러시아의 가족은 가부장적 권위가 실현되는 기초단위로서의 기능만을 할 뿐이었다는 점이다. 다수의 농노를 거느리고 있는 장원과도 같은 대가족제도하에서 가부장의 권위는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러시아에서는 한번도 서구적인 관점에서의 휴머니즘이 구현된 적이 없었고, 오로지 남성 위주의 역사만이 전개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터 대제의 서구화 정책의 근간이 되었던 광범위한 공교육의 실천과 프랑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여성들의 지위가 점차로 향상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이라는 추상적 단위의 논의가 차차 구체적인 논의의 장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가 볼테르와 ꡔ깡디드ꡕ에 대해서 서신을 통해 토론을 하기도한 예까쩨리나 여제가 등장하면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고,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기 시작한 여성들이 일정한 문화 세력을 형성하면서 가족의 의미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독일 태생인 여제는 그 당시의 유럽 지성인들과 개인적 교류를 하는 한편 유럽의 계몽주의적 사상을 러시아 사회에 유입시키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75)하지만 자유주의 사상이 사회적 동향의 주요한 흐름을 형성하자 그녀는 개혁주의적 정책을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다시 보수적 흐름이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고 말았다.

이런 일련의 사상적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18세기 러시아 사회가 전반적으로는 계몽주의적 개혁노선을 지향하였지만, 러시아 문화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흐름이 주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가 기존의 틀을 고수하는 가운데 러시아 문화의 영역에서 가족이라는 개념은 보편적인 논의 명제로 자리를 잡지는 못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 사회의 주요 담론을 형성하던 세력이 귀족층이었고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여전히 러시아의 근대적 개혁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갈 것인가76)하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러시아 리얼리즘이 정립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지닌 정체성에 대해 보다 본질적인 논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유명한 1840년대 지식인 중 하나였던 슬라브주의자 악사꼬프의 ꡔ가족 연대기ꡕ를 출판하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작중화자인 어린아이에게 드리운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기운을 아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가족이란 공간이 끊임없는 정신적 방황을 겪어 가는 젊은 영혼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비교할 바 없이 가치 있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악사꼬프의 뒤를 이어 나온 것이 똘스또이의 삼부작인 ꡔ유년시대ꡕ, ꡔ소년시대ꡕ, ꡔ청년시대ꡕ이다. 똘스또이 역시 가족이라는 전통적 의미의 가치와 그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키워나가는 어린이의 성장 과정을 서술하면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지닌 보편적 의미를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다. 물론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지닌 의미를 문학적 서술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여전히 가족이란 낭만주의적 감성을 자아내는 요소, 또는 돌아가야 할 본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주로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지닌 의미에 대해 본질적인 논의를 하면서, 가족의 정체성이 지니고 있는 이중적인 특성을 근본적으로 서술한 작품이 똘스또이의 ꡔ안나 까레니나ꡕ이다. 이 작품에서 똘스또이는 가족이란 공동체의 정체성을 여러 각도에서 조망해볼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전형을 형상화해놓고, 각각의 전형들이 지니고 있는 특성들을 신랄하게 사실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먼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부재해 있는 상태에서 다분히 ‘가족’이라는 관념의 틀에서만 유지되고 있는 가족이 있고, 이와 반대로 서로에게서만 이상적인 모습을 찾으려할 뿐 자기 자신은 본질적으로 가족에게 헌신하고 배려할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는 구성원들이 이루고 있는 가족이 있다. 마지막으로는 이 작품에서 똘스또이가 가장 강조를 하고 있는 가족의 공동체의 모습이 있다. 가족은 본질적으로 일정한 통일성을 지향하는 공동체이지만, 그것이 가장 완성된 모습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개체성이 통일성과 서로 갈등을 빚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조화로운 질서를 이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러시아 사회에서 18세기부터 뒤늦게 정립되기 시작한 가족의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똘스또이의 ꡔ안나 까레니나ꡕ를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물론 위에 간략히 언급한대로 러시아 사회의 발전 흐름에 따라 초기 낭만주의 계열의 문학에서 가족을 주제로 한 희곡과 작품이 있었지만, 가족의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기에는 그 개념이 아직 제대로 형상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여기서는 가족 공동체에 관한 똘스또이의 사상적 관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ꡔ안나 까레니나ꡕ를 중심으로 가족 정체성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V.2. ‘별무리’와 ‘별’의 은유: '가족'의 아이덴티티


똘스또이의 작품 세계가 표상하고 있는 문학성의 본질적인 특성을 논의할 때, 가장 전면에 떠오르는 개념은 심오한 사상성과 인본주의적 도덕성에 근거하는 주제 의식이다. 조화로운 삶의 완전한 형태를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묘사하려는 문학관을 가지고 있던 똘스또이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술 작품이란 인간 영혼의 심연에서 이루어지는 내밀한 흐름에 대한 이해와, 인간 존재의 본질적 목적을 추구하는 심도 있는 문제 의식에 바탕 하여 창조되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역사의 현실 속에서 한 시대가 함축하고 있는 사상과 철학의 창조적 구현을 문학 창작의 근본적 토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근본적인 문학적 이념이었다. 또한 똘스또이는 위대한 예술의 본질적 특성을 바로 고도의 관념적 진지성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해내는데 있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한 연유로 똘스또이는 작품을 창작할 때, 플롯의 발전적 전개와 서술 체계의 흐름 속에 주요한 사상적 특성을 내포시키려 하며, 작가 특유의 관념적 주제가 심층적 의미를 창출해낼 수 있도록 구성의 미학에도 집요할 정도의 관심을 기울였다.

이렇게 도덕적이고 관념적인 사상성으로 대표되는 똘스또이의 문학 세계에서, ꡔ안나 까레니나, 1878ꡕ는 독특한 문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 주제론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 작품의 주제 구성의 방식은 똘스또이의 다른 소설들과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똘스또이의 소설 속에서는 비록 작가가 추구하는 사변적 명제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논의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일정한 지향점이 상정되어 있다. 그래서 바흐찐 같은 비평가는 똘스또이의 작품을 전형적인 ‘단성악적 소설’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ꡔ안나 까레니나ꡕ에서는 의미심장하게도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적 주제의 흐름이 단선적인 방향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다성악적’인 특성77)을 엿보이고 있다. 보다 상세히 말한다면, 개인으로 하여금 인본주의의 가장 본질적 가치를 지향하도록 이끌어 나가려는 통일성과, 개인의 영혼이 고유한 존재 의미를 누릴 수 있도록 절대적인 자유를 부여해주려는 개체성이78)서로 은유적인 대비 구조를 형성하여 이 작품의 주제를 구성하는 두 축을 이루고 있다.

또 이 작품에는 똘스또이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유의 시학적 특성들이 가장 발전적인 형태로 구현되어 있음을 엿 볼 수가 있다. 이를테면, 창작의 절정기에  쓰여진 그의 대표작, ꡔ전쟁과 평화, 1865-69ꡕ와 같은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똘스또이 소설의 시학적 특성이 ꡔ안나 까레니나ꡕ 속에서는 더욱 더 정교하게 다듬어져 형상화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본다면, 이 작품에는 똘스또이 특유의 서술 기법인 ‘낯설게 하기’, ‘내면심리 엿듣기’, ‘곁가지 엮기’ 등이 상당히 세련된 수준에서 이루어져 문학성을 구축하는 주요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또 등장 인물에 개별적 성격을 부여하고 그 특징을 묘사하는 성격 설정의 기법 역시 능숙하게 이루어져 150여명이나 되는 등장 인물들로 하여금 독자적인 색채를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면 먼저 이 작품이 지향하는 통일성의 요체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이 작품을 시작하는 첫 문장이 이미 앞으로 플롯의 방향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 지를 미리 암시하고 있다. “행복해 보이는 모든 가정들은 서로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불행한 가정에는 각각 그럴만한 불행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다.”79)이 말은 앞으로 이 작품의 진행이 바로 전통적인 사회 질서와 가치 체계 속에서 가족이 어떻게 형성되며 어떤 의미와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지를 깊숙이 탐색하는 방향으로 이루어 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똘스또이는 가족의 정체성을 관념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가족이란 인본적 가치의 토대 위에서 구성원들의 조화로운 유대감을 실현해야 하고, 개인과 사회를 이어가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며, 개인들이 참여할 통일적 질서를 도출해 내야 한다. 이런 이상적 관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똘스또이는 세 개 유형의 가족 양식을 이 작품에 제시하고 있다.

가장 먼저 서술되고 있는 것이 오블론스끼 가족이다. “항상 어수선하고 중심이 안 잡혀 있”80)는 이 가족은 서로의 서로로부터의 소외와 내적인 분열을 상징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가족 간의 조화롭고 밀접한 유대감은 한갓 허위이며 실현 불가능한 관념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 가정의 “가족들과 하인들 모두는 공동 생활에 아무런 유대감이나 의미를 못 느끼고, 어느 여관에서 우연히 만나 묵게 된 사람들조차도 자기네들, 즉 오블론스키 백작의 가족과 하인들보다도 훨씬 더 친밀한 유대감을 느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형편이었다.”81)

이 가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어귀는 남편인 스치바의 거듭되는 외도에 깊은 좌절을 느끼며 토로하는 아내 돌랴의 내면 독백에 나오는 말, “허위와 위선으로 꾸며져 있는 인위적인 융합82)”이다. 이 가족은 가문의 전통과 추상적인 관습적 질서에 자리잡은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자발적인 유대감은 거의 없이 최소한 형식상의 봉합만 이루어지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같이 더불어 한 공간에서 존재하고 있는 인간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일정한 세월을 함께 해온 타성적인 관성에 의해서 관계가 반복되는 불안한 공존이 이 가족이 상징하고 있는 정체성의 본질이다.

두 번째의 전형은 바로 안나가 속해 있는 까레닌 가족이다. 자수 성가한 고위관리인 까레닌은 실무적인 공간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의 인식은 항상 일상의 정형화된 틀에 맞춰지는 방향으로만 전개되며, 그의 모든 행위는 이기적인 출세욕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그의 사랑은 완벽하게 계산된 헌신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다하게 비난할 점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브론스끼와의 사랑에 눈뜨기 전에는 그런 까레닌과의 생활에서 안나는 그저 권태만을 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이 가족의 구성원은 폐쇄적인 질서 안에서 생활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들의 행위와 언어는 항상 불일치하게 되고, 심지어 가족 구성원 사이에도 의사 소통의 단절이 일상적인 행위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들은 서로 자신의 깊은 내면세계를 결코 완전히 펴 보이지 못하며 점차로 서로가 서로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가게 된다. 하지만 이 가족은 이런 외면적인 소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안나나 까레닌 모두 가족으로부터 소외와 의사 소통의 단절을 경험하면서 어느 새 자신들도 본래 자신이 지니고 있던 정체성을 잃기 시작하며, 현상적인 자아가 본질적인 자아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느낀다. 서로의 서로로부터의 소외와 의사소통의 단절이 마침내 개인으로 하여금 내면적인 분열을 겪게 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에는 개인이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게 되며, 자신의 내면 세계와 의사 소통이 단절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히 고립된 개체들에게는 이미 가족의 정체성이란 추상적 관념 일뿐 더 이상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이렇게 소외된 가족의 정체성은 가족 구성원간에 유대감이 해체되어버려 가족이라는 관념이 이미 박제화되어 버린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 번째의 전형이 바로 이 작품이 지향하는 통일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레닌의 가족이다. 똘스또이는 본질적으로 해체되어 가는 까레닌 가족과 대비되는 이상적인 가족의 상을 의도적으로 설정하여 이 가족에 부여하고 있다. 똘스또이는 이 작품에서 레빈의 성찰적 사유와 안나의 내면적 독백에 관한 서술을 통해 통일성과 개체성이 서로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게 하지만, 결과는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가만을 심각하게 느끼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개체의 자유와 가족의 통일적 흐름이 서로 타자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하거나 융합을 모색하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만 타자의 견해를 해석하려 들기 때문이다.

세 가족의 존재 양상을 통해 가족이란 공동체가 지닌 특성을 서술하려고 한 똘스또이는 작품의 말미에서 레빈의 말을 통해 가족의 의미와 기능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하늘의 별자리, 그리고 별’은 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런데 레빈이 보기에 그것은 독립적이기도 하고 조화로운 융합을 이루기도 한다. 즉 별 하나하나는 온전히 자신의 의미를 독자적으로 드러내면서 빛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하나의 커다란 별무리에 참여하여, 알지 못할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성좌의 통일성을 이루는 구성원이 되고 있다. 바로 이 묘사가 이 작품에서 똘스또이가 구현해내려고 의도하고 있는 가족의 정체성의 본질적 개념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레빈의 명상적인 내면 풍경을 묘사하면서 똘스또이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그 구성원 사이의 상관적 관계를 알레고리로 서술하고 있다. 즉 개인이 스스로 자신을 ‘절대적 현존’으로 인식하면서도, 일정한 ‘통일성’의 궤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을 가족과 개인의 본질적 관계라고 보는 것이다. 개별적 자아가 일방적으로 제시된 방향을 추종하거나 의도적으로 따르려고 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전체 속의 일원’을 형성하는 것이 똘스또이가 상정하고 있는 개인과 가족, 통일성과 개체성의 가장 조화로운 융합 방향인 것이다.

하지만 별자리와 별의 상관적 관계를 빌어 가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똘스또이의 정의는 상당히 관념적이다. 작품의 말미에 서술된 바를 보면 작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듯한 레빈의 내적 담론은 아내 끼치의 내면 의식과 상관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레빈이 동경하며 추구하는 가족의 정체성이 다분히 도덕적 가치에 근거한 것이라면, 끼치가 그리는 가족의 정체성은 일상성 속의 평안함이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가족 사이에 대화적 관계가 성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온전한 소통성이 정립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83)똘스또이가 상정하고 있는 가족의 정체성이 일상의 구체적 토대 위에 구축된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관념의 공간 위에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가족의 정체성을 구체적인 실체의 관점에서 조망한 것이 안나의 자살의 의미이다. 그것이 질식할 것 같은 가족이라는 통일적 흐름에서 일탈하고자 하는 한 개체의 자유 의지의 발현과 밀접한 상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안나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가족의 통일성과 개체성의 일탈이 빚는 갈등의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가족 정체성의 본질을 극명하게 규정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V.3. 안나의 ‘자살’의 의미: 도덕률에 대한 속죄의 행위인가, 개체의 자기       구원인가?


ꡔ안나 까레니나ꡕ의 플롯의 주요한 한 축은 안나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의 서술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정부 고위 관리인 까레닌의 부인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끼와 사랑에 빠져 불륜을 저지르다가, 동시대 사회의 전통적 질서와 관습과 첨예한 대립을 이루며 도덕적 갈등을 겪다가 급기야는 자살을 하고 만다는 내용이 이 작품의 주요 플롯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명제가 바로 안나의 ‘자살’이 지니고 있는 의미이다. 똘스또이의 도덕적 관념 의식에 익숙한 비평가들은 안나의 자살의 동기가 전통 사회의 규범과 가족 공동체를 파멸로 이끈 한 여성의 속죄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초기에는 그러한 비평적 관점이 ꡔ안나 까레니나ꡕ의 작품 분석에 있어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는데 대체적인 합의를 이루었다.

하지만 한 개인의 영혼, 특히 여성이 아닌 여성성의 자유 의지라는 관점에서 이 작품을 조망해보면 전혀 다른 차원의 주제 의식을 도출할 수 있다. 안나의 자살의 의미는 기존의 사회적 구조의 전통과 도덕을 어긴 사실에 대한 속죄와 회개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여성이 자신의 내밀한 영혼 속에 온존해 있는 자유에 대한 희구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자기 구원적인 행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기존의 사회 체제나 전통적 개념에 매여 자신의 참의지를 굴욕적으로 속박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안나는 자신의 육체적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오히려 궁극적인 영혼의 자유를 추구했다는 역설적 해석84)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는 개인의 자의식을 인정하는 방향에서 보면, 안나의 행위를 통해 여성도 한 사람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열정적으로 지향하고 인식하려는 실존적인 존재임을 함축적인 의미로 담아내려고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평적 토대에 바탕하면 ꡔ안나 까레니나ꡕ가 이루어내고 있는 독특한 문학성의 주요 기반이 ‘여성의 자기 정체성의 탐구 과정’에 근거한다는 비평적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즉 안나의 자살의 보다 본질적 원인과 그 행위가 이루어낸 결과를 여성성 Femininity의 관점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논의의 폭이 확장될 수 있다. 똘스또이가 애초에 의도한 바대로 전통적 관습이나 도덕적 관념에서 일탈된 행위를 보상하려는 관점에서 안나가 자살을 택했다는 해석보다는 안나의 자살이 그러한 보상적 차원의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의 사랑이 해체되고 영혼의 자유가 침식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죽음을 통해 그러한 속박의 세계를 뛰어넘으려 했다는 페미니즘적 비평의 관점을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주제 의식을 상정하고 그에 바탕 하여 새로운 시점에서 작품을 재해석할 수도 있을 법하다. 예를 들면, 순수한 사랑을 추구하는 한 여인의 소외된 내면85)을 그려나갈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한 뒷받침을 작품의 텍스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나가 자신의 최후의 결정을 내릴 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점은 브론스끼까지도 자신들의 사랑이 영혼을 모두 바치는 지순한 것이 아니라, 흔히 있을 수 있는 희롱과 유희로서의 사랑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안나가 자살을 향해 가는 과정의 서술은 내면적 심리 묘사가 상세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똘스또이는 안나가 궁극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추구한 것으로 정의하기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토대 위에서 세워진 전통적 도덕률과 윤리적 가치에 보다 진지한 관심을 기울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이 작품에서 똘스또이가 상정하고 있는 개체의 자기 정체성에 이르는 길이 다분히 정태적이고 목적론적이라는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서 똘스또이가 전제하는 것은, 극단적 이기주의에 의한 개체간의 철저한 상호 소외, 죽음과 같은 좌절의 심연에 빠져듦과 같은 개인주의적 가치 추구는 인간 영혼이 갈망하는 공동체적 연대성을 필연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그는 자신의 소아적 이기심을 극복하고 대승적인 자기애의 회복을 통한 새로운 세계로의 귀의와 같은 단선적인 질서를 가진 체계가 바로 가족이란 공동체를 통해서 구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똘스또이는 가장 기본적이되 어느 새 우리의 영혼에서 사라져 가버린 이기를 극복한 이타의 정신이 가족 공동체의 본질적 토대라고 규정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관념체계는 다분히 도식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개체들의 존재 목적과 가치 체계가 항상 보편적인 조화와 행복에 기초를 둔 합리적 질서나 공동체적 도덕률과 부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똘스또이는 안나의 자살의 의미를 도식적인 체계 속에서 규정하지는 않고 있다. 안나의 내면 심리의 미묘한 전이를 서술하면서 똘스또이는 자신들의 이중성의 모순을 스스로 극복하고 본원의 공간을 향해 나아가려는 자유의지가 바로 인간들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 너머의 진실을 탐구하는 새로운 시점에서 죽음이란 사실을 바라보며, 죽음 바로 너머에 있는 영혼의 자유라는 공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인식의 탄력성을 획득하게 하려는 것이 바로 이 작품에 내포되어 있는 자유의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나타나는 자유는 이성적이고도 합리적인 사유를 통해 존재와 존재 상황간의 대립이나 갈등과 같은 현상적인 모순을 넘어서서, 궁극적인 화해 및 합일의 상태로 전환시키려는 사유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사유에 의한 자유 개념의 설정은 바로 인간이 주체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자유를, 사유하는 자유, 자신의 본모습을 추구하는 자유, 초월적인 공간에 실존하고 있는 영원성을 지향하는 자유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안나의 자살의 의미는 전통적인 도덕률의 위배에 대한 보상의 행위라거나 개체의 자기 구원과는 다른 차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안나의 자살의 의미를 해석해보면, 그녀의 자살은 일상적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소외와 기만을 자신의 의지로 넘어선 것86)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의 한계 상황에서 그녀의 내면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지향하게 되는 무언가 궁극적인 것에 대한 회향과 동경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녀는 하나의 존재로서 자신의 삶과 우주 전체 혹은 존재 전체를 관장하는 영원한 것과의 관계성에 참여하는 것을 느꼈다. 이를테면 자신의 궁극적인 의미를 사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안나는 자신의 남편과 아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되며, 이러한 타인에 대한 사랑의 전조는 그녀의 내면 의식을 보다 자유롭게 운신하도록 하여 준다. 즉 그녀는 처음으로 죽음의 의미를 있는 대로 이해하고 죽음이 삶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의미를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87)똘스또이가 암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바대로 그것이 종교적인 의미이든 자연 발생적인 것이든, 그것은 이미 논의의 공간을 넘는 초극적인 경험이었고 직관적인 인식에 의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안나는 죽음을 경험하면서 처음으로 자유를 느낀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궁극적인 자유 의지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참여하는 개체들의 가장 본질적인 권리이기도 하다. 가족의 정체성은 그 구성원들이 추구해 나가야 할 지향점이 절대적인 관점에서 정의된 공간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이 주체적 관점에서 자유 의지를 발현해 나갈 수 있는 공간에서 정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V.4. 개체성의 의미 규정: ‘내면 심리 엿듣기’와 ‘낯설게 하기’


ꡔ안나 까레니나ꡕ에서 똘스또이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적 정체성과 대비되는 인물들의 개체적 특성을 형상화하기 위하여 특유의 서술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등장 인물이 지닌 미묘한 개별적 특성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내면심리 엿듣기’라는 서술 기법이다. 그는 다양한 등장 인물들을 서사적 흐름의 담론 속에 등장시켜, 그들의 내면 인식의 묘사와 서술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관념주의의 복잡하고 사변적인 전개를 문학적 담론으로 성공적으로 엮어내려는 의도에서 이 기법을 각 작품에서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 ꡔ안나 까레니나ꡕ에서도 안나라는 새로운 의미의 성격을 창조하면서, 똘스또이는 직접적인 서술이나 묘사로 형상화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내면심리 엿듣기’ 서술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화자가 등장 인물의 심리가 내면 속에서 어떻게 전이되고 있는가를 마치 엿듣기라도 한 듯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서술 기법은 똘스또이 소설에 폭넓게 나타나는 기법으로서, 이 작품에서는 특히 안나의 내면에서 급격하게 일어나는 심리적 전이 양상에 관한 직접적인 묘사 없이 주변 상황을 인식하는 그녀의 느낌이나 단상들을 있는 대로 서술하고 있다.

내면 심리 엿듣기에 의한 은유적 형상화는 이 작품에서 안나와 레빈의 성격 묘사를 서술하는 가운데 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형성한다. 하나는 주어진 삶을 긍정하며 받아들이는 현실적 수용의 의미이고, 또 하나는 갈 수 없는 공간을 초월적으로 지향하는 현실 극복의 의미이다. 레빈의 내면에는 세속화된 삶 가운데에서 순수함과 생명력을 잃지 않으려는 현실 극복의 의지가 점차로 굳건하게 깃든다. 그는 삶을 철학적인 사유와 이념적인 지향점을 가지고 승화시켜 나가려는 태도를 취한다. 레빈의 내면에는 가족의 구성원이 내면적 교류를 통하게 되면, 서로 상대방을 보다 나은 차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보완하여 줄 수 있다는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내면 심리 엿듣기를 통하게 되면, 레빈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사유와 인식 체계가 끊임없이 도덕적 가치를 지향하게 하고 있으며, 개인이 느끼는 필요 요소의 결여를 채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등장 인물의 내면에 드는 생각을 은유적 서술을 통해 형상화하면 문학의 독특한 심미성의 창출과 같은 미학적 요소를 작품 속에서 구현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작품에 나타나는 복합적인 플롯의 구조, 예를 들면, 안나와 브론스키가 존재하는 공간의 의미와 키티와 레빈이 살아가는 공간이 지니는 의미 사이의 은유적인 대비와 같은 플롯의 이중 구조88)와 같은 것의 의미가 작품 속에서 명료하게 자리를 잡음으로써 문학성이 고양되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 위에서 이 작품의 주요 플롯의 흐름은 결혼 생활의 권태기에 접어들은 한 여인의 감상적인, 또는 관능적인 연애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으며, 주제도 남녀의 사랑의 단절과 그에 따른 여성의 자살이라는 전형적인 감상적 연애 소설의 구조 안에서 단성적으로 설정이 되고 있는 이 작품의 의미를 상당히 역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여기서 은유에 의한 주제적 의미의 치환이 없었다면, 이 작품의 내적 밀도는 조화롭게 이루어지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은유적인 절제에 의해서 이 작품의 내적 구성 원리는 전체적 통일성을 잃지 않고, 대단원이 종결된 후에도 내면적 교감의 반향이 길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내면 심리 엿듣기와 더불어 나타나는 주요한 서술 기법이 ‘낯설게 하기’이다. ꡔ안나 까레니나ꡕ에서 나타나고 있는 ‘낯설게 하기’의 대표적인 것은 안나의 시점을 통해 본 까레닌의 귀에 관한 묘사이다. 브론스끼와의 우연한 만남을 가지게 되던 바로 그 순간부터 안나의 영혼에는 근본적인 반란의 기운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뻬쩨르부르그 역에서 남편 까레닌을 만나는 장면 묘사이다. 안나는 모스끄바에서 돌아오는 도중 브론스끼의 일방적인 사랑의 고백을 듣고 난 후, 그 이튿날 아침에 뻬쩨르부르그 역에서 까레닌과 재회한다. 그 때 안나는 남편의 귀의 연골 부분이 눈에 뛰게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을 마치 처음이나 본 것처럼 놀라워하며 바라보았고, 갑자기 마음 속 어디에선가 혐오의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바로 이러한 감정은 그들 가족 간에 의사 소통의 단절되고 있음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안나가 자신의 남편을 미워하는 가장 단초가 되는 이 모티프를 똘스또이는 예리하게 분석하여 독특한 서술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것이 바로 쉬끌롭스끼가 정의한 바대로 ‘낯설게 하기’ 서술 기법이다. 쉬끌롭스끼는 똘스또이가 작품에서 구현하고 있는 서술 기법의 대표적 특성을 바로 낯설게 하기 효과89)로 정의하고 있다. 즉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사물에 대한 자동화된 인식을 비자동화시켜 낯설게 만듦으로써, 그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하여 그것이 지닌 내적 의미를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레빈의 형 니꼴라이의 죽음에 관한 서술에서도 ‘낯설게 하기’를 사용하여 레빈과 끼치의 영혼 내부에 깃드는 심리적 전이의 세밀한 특징들이 극명하게 드러나도록 하고 있다. 이 작품 전체에서 소제목이 달린 곳은 이 부분이 유일한데 거기에는 ‘죽음’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레빈은 자신이 사랑하는 형 니꼴라이의 죽음에는 일종의 성스러운 분위기가 감돌 것이며 그가 영원한 세계로의 명예로운 이행을 겸손한 맘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하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니꼴라이에게는 저주와 분노에 휩싸인 추악한 형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고, 더 살고 싶다는 절규 어린 외침을 쏟아낸다. 그런 형의 모습을 감지하는 레빈의 심리 내면에는 갖가지 풍경들이 그려진다. 이러한 서술 기법을 통해 레빈의 내면에서 동시에 흐르는 복합적인 의식을 감지할 수가 있으며, 그러한 섬세한 심리적 전이에 관한 묘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적 유대감의 토대 위에서 개체들이 상호간의 소통성과 자기 내면과의 대화적 관계를 창출하는 주요 요소가 되고 있다.


VI. 현대가족의 정체성 위기 - 그 진단과 치유: 한트케의 소설『긴 이별에 부치는 짧은 편지』


VI.1. 현대가족의 위기: 사랑의 불안정성


루만은 그의 저서 『정열로서의 사랑』에서 사랑의 의미론 Liebessemantik의 역사적 변천을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체계 이론적 시각에서 분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사랑이란 단순히 이성(異性)에 대한 개인의 감정이라기보다는 남녀간의 상호소통을 규정해주는 코드, 즉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문자체계이다.90)사랑코드의 내용과 기능의 역사적 변천에 따라, 이에 상응하게 사회의 남녀간에 대한 사랑의 상념도 변모한다. 18세기 이전 전통사회에서 사랑과 혼인은 타자가 배제된 개인간의 은밀한 조우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통제에 종속하며, 또 사회로부터 지지되던 사회적 성격의 기관이었다. 하지만 각 개별 기능영역의 독립과 분화를 촉진한 18세기의 사회사적 변천은 “사랑”, 즉 남녀간의 교제도 사회의 광범위한 연관관계로부터 해방시켜 독립된 기능분야가 되도록 하였다. 이로써 사랑은 사회적 자율공간이 되었다.

사랑이 사회의 하부 시스템으로서의 독립된 기능영역으로 분화하기 위해서는 몇 단계를 거쳐야 하였다. 전통적 중세사회의 사랑의 의미론에는 파라독스가 내재하여 있었다. 그것은 사랑은 자발적이나 구속적이라는 이중성이다. 누구든지 사랑할 자유가 있으나, 일단 사랑의 대상이 정해진 다음에는 대상에 대한 헌신은 배타적이고 영속적이어야 한다. 사랑의 자유는 이차적 선택의 포기와 자기절제의 강제를 포함한다. 이런 의미론을 보충하는 17세기에 등장한 “정열로서의 사랑 amour passion”이라는 의미론은 사랑의 사회적 분화를 촉진하고 관철시키는 첨병역할을 하였다. 이 의미론에 의하면, 사랑이란 마치 병과도 같고 눈먼 것과 같아 이성에 의한 어떤 통제도 불가능하고 당사자에게 운명과도 같이 찾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정열에 빠진 사람의 느낌과 행위는 비록 매우 특이하고 격렬하며 황홀경에 빠진 형태를 띤다할지라도 사회도 가족도 이를 제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용인하여야만 한다. 이로써 사랑은 사회와 가족의 제재영역으로부터 보호되며 절연되었다.

‘정열로서의 사랑’은 결혼과 가정꾸미기와 관계없이 성립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오직 과도한 상태로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도함은 사랑이 믿을 수 없으며 불안정한 것이 되도록 한다. 과도한 상태에서의 사랑은 일시적으로만 경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에 등장한 “낭만적 사랑”의 개념은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한 사랑의 의미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낭만적 사랑은 남녀 개인간의 유일무이한 인격적 만남을 바탕으로 성립하며 또한 남녀의 모든 차이를 해소시켜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연합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는 정열로서의 사랑과 혼인 사이의 어떠한 괴리도 용납되지 않는다. 또한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의 차이도 무위화 된다. 사랑은 곧 섹스이며 결혼이다. 오직 사랑하는 연인간의 인격적 육체적 만남의 사랑만이 모든 것이며 자아실현과 세상의 획득이다. 낭만적 사랑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우주적 공간이다.

이런 점에서 낭만적 사랑은 계몽주의적 이성의 분리적 경향에 대항하는 인간의 인식능력이다. 계몽주의적 이성이 자연의 법칙을 깨닫고 덕을 통해 이를 실행함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인 반면, 낭만적 사랑은 이성 보다 뛰어난 인식능력으로서 다양한 대상을 꿰뚫어 세계의 비밀스러운 연관관계를 파악하는 눈과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은 세계의 숨겨진 연관관계를 논리적 법칙을 뛰어넘어 직관적으로 인지하는 능력이다. 사랑은 분석적 이성과는 달리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능력이다. 그러므로 낭만적 연인들은 서로의 사랑 속에서 자신의 내적 분리를 치유하고 세계와의 연합을 이룩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낭만적 사랑의 의미론은 기능적 현대사회로 분화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이화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재통합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낭만적 사랑의 개념은 영속성을 약속한다.

하지만 이런 낭만적 사랑이 연인의 상호 주관성의 상승에 의지하는 한, 또는 오직 개인적 차원의 소통에만 기반 하는 한, 그것은 “사회적 차원의 퇴행”91)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 외부와의 연결이 끊어지므로, 사회적 지지기반이 잠식되는 반면, 사랑은 오직 개인적 자원에 의해서만 유지되어야 한다. 채우기 어려운 높은 인격적 사랑의 요구는 내부적 갈등을 상승시킨다. 그러므로 낭만적 사랑 역시 결국은 사랑에 내려진 불안정성의 선고를 극복할 수 없다.

현대의 연애와 결혼은 -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 이런 낭만적 사랑의미론의 후계자이다.92)따라서 현대유럽인은 은밀관계 Intimbeziehung를 통해서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한다. 애인의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이루고 나만의 독특한 개인적 소원을 만족시켜주어야 한다. 이런 기대치는 필연적으로 애인 혹은 부부관계에 과부하(過負荷)를 초래한다. 현대 은밀관계의 특징은 개인적 사랑의 요구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내부적 갈등의 잠재력이 더욱 더 증가한다는 점이다.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개인적 관계의 조화는 오히려 외부관계에 놓여있었다. 그것은 애인 혹은 부부관계는 단지 우정이나 친척관계에 더해지는 관계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유럽 은밀관계에는 개인적 소통의 차원만이 존재하며, 이것이 상호 사랑의 조화를 확인하는 차원이며 동시에 이것만이 갈등해결의 차원이다. 따라서 개인적 관계의 좌절이 쉽게 따라오며 사람들은 이것을 다시 사랑을 통해서 해결하려 한다. 즉 현대적 사랑관계는 사랑과 미움이 연쇄적으로 증가되는 악순환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것은 현대 사랑관계를 지지하는 개인적 관계의 약점을 노정 한다.

주지하다시피, 이런 개인적 사랑의 불안정성은 현대에 있어서 무엇보다 간음과 이혼으로 표출된다. 일반적 도덕의 제재기능의 약화와 아울러, 성도덕의 이완현상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위기의 결과일 뿐, 원인은 아니다. 루만은 그 원인을 현대사회에서 개별 기능영역들의 체계를 통괄하여 그들에게 환경연관 Umweltreferenz으로서 세계를 대표하여 의미를 제공하는 체계의 결여에서 보았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이런 의미제공 체계는 종교였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종교를 대신해서 개인적 관계에만 의존하는 사랑의 불안정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이념적 혹은 사회적 틀을 알지 못한다.


VI.2. 독일 현대문학에 나타난 가족의 위기


(서)독일 전후문학에 나타난 가족 위기는 그 배경원인을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독일인들이 전후 파괴된 사회를 힘겨운 가운데서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듯이 놀랍게 성공리에 재건한 후, 물질적 부요와 복지를 이룬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50, 60년대를 거치면서 호식(好食)과 소비, 여행과 성적 방종의 물결은 독일사회를 휩쓸었고 전쟁의 아픈 상흔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문 듯 하였다. 연합군에 의해 시행되었던 비나치화 교육은 시의성을 잃어가고 있었고 아데나우어 시대는 재무장을 시도하면서 서독 사회는 나치 이전의 사회로 복귀하고자 하였다. 이런 물질적 부요 속에서 사람들은 일상에 젖어들면서 새롭고 진정성 있는 경험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부부관계는 이런 흐름 속에서 판에 박힌 듯한 관계 routine로 전락하며, 서로에 대한 관심은 무관심으로 변한다. 하인리히 뵐은 1953년 발행된 소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Und sagte kein einziges Wort”에서 바로 이렇게 전쟁의 상흔을 딛고 재건에 성공하고도 무관심의 관계로 변한 부부의 위기를 다루었다. 

두 번째 가족의 위기는 나치의 전범(戰犯)과 관련된 과거극복의 문제와 관련해서 등장한다. 전후 독일 가정에는 전쟁세대인 부모세대의 전범의 책임문제에 대한 자녀들의 질문과 도전 혹은 침묵과 회피로 인해 주도적인 갈등이 발생한다. 부모가 민족 집단의 죄과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가 아니면 죄의식을 은폐하고 억압하는가에 따라서 가정의 위기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1988년 한 심층심리학적 연구는 극복되지 못한 과거가 독일 가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였다. 그것은 “집단적 침묵”이었다.


오늘날 만연된 증상은 가정 내에서의 침묵이다. 세대간에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전통은 없다. ‘부모님들은 그때 무엇을 하셨어요?’ 라는 질문에는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그런 곤란한 질문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 그러나 침묵은 마비시킨다. 그리고 침묵된 것, 축출된 것은 다양한 형태로 되돌아온다.93)


참다운 과거극복의 성공과 실패가 독일 현대가정의 위기양상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해결되지 않은 죄의식은 가족과의 관계에서 “감정의 빈곤, 어색하고 생동감이 없는 언어”94)로서 드러난다. 이것은 경험의 진정성 상실과도 연결된다. 예컨대 1980년 문학적으로 성공을 거둔 크리스토프 멕켈의 소설 “숨겨진 그림.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2차대전의 참전장교로서의 나치 과거를 위선적으로 극복하였을 뿐, 진정으로는 극복하지 못한 아버지의 권위상실과 그의 내면적 경험의 진정성 상실을 현실감 넘치게 묘사하였다. 그는 자기가 행하고 행하였던 일련의 작은 선행들을 실제로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과거의 대죄를 상쇄하기에 충분한 인도적 행위로 자신과 타인에게 이해시키고자 한다. 소설은 이런 자기 기만적이며 위선적 아버지가 어떻게 진정성을 상실하며, 그 결과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과 다른 가족들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파괴하여 나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68세대는 이런 서독사회의 복고적 경향과 위선적 기성세대에 대해 격렬하게 반항하였다. 그들은 구애받지 않는 성모랄에 따라 새로운 파트너 관계를 구현함으로써 기성세대와 차별화하며 해방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성의 해방은 독일 70년대를 풍미한 일반적 현상이었다. 68세대가 프리섹스를 통해 기성체제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면, 기성세대는 자유로운 성관계를 누림으로써 전쟁과 재건에 따른 오랜 금욕과 고생스러운 삶을 보상받고자 했다. 이런 일반적 현대사의 흐름 안에서 “바람피우기”, 사랑의 배반 혹은 간음과 이혼 등은 18세기, 특히 19세기 문학의 중요한 주제였으나, 현대문학에 있어서 더 이상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지 못한다. 프리섹스의 물결은 가정이라는 사회적 제도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간음은 편만하고 주변적 이야기로 떨어졌다.95)그러므로 현대문학에서 이런 소재의 분석으로 가족의 정체성 문제에 접근하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루만은 결혼 혹은 가정과 관계를 맺든지 않든지 서로에 대해 사랑의 특별한 요구를 실현하고자 하는 애인들간에 성립되는 은밀 관계를 “상호침투관계 Interpenetrationsverhältnis”라고 지칭하자는 제안을 하였다.96)이런 관계에서는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에게 중요한 것은 항상 나에게도 중요하고, 역으로도 그러하다. 따라서 상호 소통적 관계가 밀집되며 집중화한다. 이 용어는 현대의 남녀관계를 결혼 혹은 가정이라는 사회적 기관의 성립과 관계없이 그 상호 소통적 특징에 따라 규정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루만은 이런 집중된 상호소통의 관계에서 현대의 사랑의 의미론은 무엇보다 ‘이해(理解)의 프로그램’을 중요한 구조적 계기로 수용할 것이라는 전망을 하였다.97)사랑 코드의 전통적인 구성요소인 ‘정열 passion’ 혹은 ‘과도한 탐닉 Exzess’은 현대에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상호 이해에 기반한 “세계에 대해 열린, 자기세계를 구성하는 개인”98)의 개념이며 이렇게 구성된 상대방의 세계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세계를 인정하고 용인하여 주는 것이며, 모든 것을 하나의 일체성에 용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상호이해에 기반한 관계는 실현 불가능한 낭만주의적 사랑의 요구수준을 낮추고 자신의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 받으려는 의도를 포기하는 것 아니면 적어도 약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와 같이 루만이 제시한 현대 사랑의 의미론의 전망을 방위지표로 삼고 현대 독일문학에서 우리의 주제에 대해 대표적 작품을 선정하여 고찰해보고자 한다.


VI.3. 한트케의 『긴 이별에 부치는 짧은 편지』: 진단과 치유


1972년 발간된 이 소설은 비평가들에 의해 “예술가 소설 Künstlerroman” 혹은 “환멸된 발전소설 desillusionierter Entwicklungsroman”로 규정되곤 하였다.99)그것은 일인칭 설화자인 주인공의 직업이 드라마 작가이며, 자신의 삶을 켈러 Gottfried Keller의 발전소설 “녹의의 하인리히 Grüner Heinrich”를 모델로 삼아 성찰하고 있으나 켈러의 발전모델이 각하(却下)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규정과 해석은 작품의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하는 것일 뿐 실제 작품의 전반적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해를 낳는다.100)

60년대에 언어에 대한 집중적 성찰을 주제로 하는 “언어학적 문학”101)으로 등장한 한트케는 무엇보다 『짧은 편지』와 함께 문학적 방향을 재설정하였다.102)그는 인터뷰에서 “상아탑의 거주자”103)로서 천착하였던 언어보다도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다루겠다는 의도를 표명하였다.104)현장감 있는 사회적 현실로 향한 한트케 문학의 전환점은 그 당시 모친의 자살, 아이의 탄생 그리고 아내와의 결별 등과 같은 이력적 사건으로부터 설명되기도 하였다.105)작가적 전환점의 이유야 어찌됐든 『짧은 편지』는 현대 사랑의 문제점을 심도 있게 다룬 유럽현대문학의 대표적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유럽적 정신사의 전통적 배경 하에서 형성된 주체와 남녀간의 관계모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며 이에 대한 대안의 제시이다. 루만의 사랑의 의미론적 시각에서 보면, 이 작품은 모순적으로 닫힌 파트너 관계에서 벗어나 열린 관계로 전이하는 주체의 행동과 내면의 변모를 그리고 있다. 한트케는 이 작품에서 서양적 주체와 그가 맺는 대 자연 및 인간관계를 반성하며 새로운 개념에 기초한 대인관계의 대안을 찾고 있다. 문학비평에서 이 소설을 아직까지 이런 시각에서 읽은 시도가 없기에 필자는 본고에서 때때로 약간은 상세한 작품해석을 하여야만 할 것이다.


주인공 일인칭 설화자는 오스트리아 인으로서 아내 유디트로부터 탈출하여 미국 내에서 여자친구 클레어와 그녀의 두 살짜리 딸 베네딕타인과 여행을 하고 있는 바, 뒤따라온 유디트로부터 협박적인 내용의 짧은 편지를 받는다. 유디트는 그를 살해하려고 한다. 주인공은 미국여행에서 새로운 체험을 하며 나중에 살해의사를 포기한 유디트와 함께 영화제작자 죤 포드를 만난다. 주인공과 유디트는 이 대화 이후 평화스럽게 헤어질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소설은 많은 사건이 일어나기 보다 여행과 함께 행해지는 클레어와의 대화와 화자의 내면적 성찰이 주를 이룬다. 여기서 미국은 실제 미국이라기보다는 유럽에서 불가능했던 자신과 타인 및 자연을 새롭게 경험하는 실험의 장 혹은 “꿈속의 세계”106)를 뜻한다.


위의 스토리 요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특이한 이혼과정을 다룬 이야기이다. 주인공 남자는 아내 유디트로부터 지리적 결별을 하였을 뿐, 아직 내면적으로는 서로 모순적으로 얽혀 매여있는 관계의 틀 속에 잡혀 있으며 새로운 출발을 위한 해방을 이루지 못하였다. 비로소 미국 여행중 일어나는 내면 및 관계 변화과정을 통해 내적 결별이 수행되며, 새로운 관계 맺기의 단초를 획득한다.

그렇다면 주인공과 유디트의 부부관계에는 무엇이 문제였는가? 그들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고정된 역할과 새로움을 상실한 마멸(磨滅)된 언어가 개개인마다의 독특한 인격적 진정성의 발현을 저해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유디트는 일상생활에 흔한 각종 발행물로부터 얻은 정보에 자신의 삶을 맞추며, 주인공은 유디트와 자신의 경험을 “사전에 조정된 원인(原因)게임 im voraus geregelt[es] Ursachenspiel”107)에 맞춰 해석하므로 두 사람의 조우에서 개인적 진정성은 상실된다.108)그들의 만남은 이미 주어진 틀에 따라 해석된 역할에 맞춰 이루어지므로 개별적 인격의 독특한 조우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교류는 상대방을 비인격화하거나 혹은 개별적 독특성이 부정되는 일반성의 차원으로 증발시킨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유디트를 때로는 “사물 Ding”, 때로는 “존재 Wesen”라고 특징짓는다.109)이렇게 비인격화되고 공동화(空洞化)된 만남은 좌절감을 야기하며 결국은 증오감정으로 이어진다. 루만이 현대의 부부관계가 내밀하고 집중적 인격적 만남, 즉 사랑을 요청하면 할수록 증오가 증가한다고 지적한 바와 같이, 주인공과 유디트의 관계는 사랑과 증오가 상호적으로 상승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있다.

주인공과 유디트는 악순환의 고리로부터 오직 폭력적 공격성향과 극단적 증오로써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미국 여행중 주인공을 추격하는 유디트는 여러 기회를 이용하여 주인공을 죽이고자 한다. 불량배들을 고용하여 주인공에게 폭력을 가하여 돈을 빼앗게 하기도 하며 폭발물이 든 소포를 보내기도 한다. 그들의 폭력성의 절정은 유디트가 해변가에서 주인공에게 권총으로 살해하려는 시도에서 이루어진다. 이 부부에게 있어서 진정성은 단지 극단적 미움의 상황에서만 획득되고 경험되어진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 진정성은 파라독스하게도 그 둘을 서로 모순적으로 얽혀 매여있던 관계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과 유디트는 일종의 부정적 사랑의 변증법을 연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은 이런 사랑의 부정성에 대해 다른 긍정성을 대비시키고 있다. 그것은 주인공의 주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신에 대한 과잉된 관심의 집중을 발견한다. 과잉된 자아관심의 이면은 불안의식이다. 이것은 다시금 “나의 상대방이 갑자기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주인공의 “광기 Wahnsinn”110)로 표출된다. 이와 같이 과잉된 자아의식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균형 잡힌 대인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태도는 동시에 개인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공동체에 대한 주인공의 거부태도로 말미암는다. 주인공에게 있어 인간 공동체는 주어진 구술적․비구술적 언어체계 및 역할체계로 개인의 독특성과 자유의 전개를 용인하지 않는 억압체계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전통적 언어와 역할규정을 거부한다. 그는 “모든 개념, 정의 그리고 추상에 대해 격렬한 [...] 구역질”111)을 느낀다. 그에게 있어 언어를 비롯한 공동체의 모든 전통적 자산은 신뢰할 수 있는 권위를 상실하였다. 그가 사용할 수밖에 없는 전통 언어는 닳고닳아 진정성을 상실하였으며, 그 개념 속에 개별적 경험의 진정성을 담아내지 못한다. 주인공의 실존의 문제점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별성과 일반성, 특수성과 보편성이 서로 매개를 이루지 못하고 추상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개인은 주관성이 과잉되어 있으며, 전통은 마모되어 있다. 공동체는 개인에게 제재를 가하지만, 신뢰와 자유의 공간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개인의 자유와 전통의 권위는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유리되어 있으며, 개인적 차원의 갈등을 끊임없이 재생산해 내고 있다.

이것은 주인공의 대 자연체험에서도 나타난다. 18세기 유럽의 주체는 자연 앞에서 - 횔덜린이 그러하였듯이 - “나의 전(全)존재가 침묵하며 귀를 기울이네”라는 합일과 경건의 체험이 가능했다면, 주인공은 자연 앞에서 오히려 거북살스럽게도 더욱 자기 자신을 느껴야만 한다.112)자연과의 조우는 일반성으로부터 유리된 자아의 소외경험을 집중화시키는 계기가 될 뿐이다.

이렇게 개인의 인격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인격에만 기반한 현대인의 사랑 역시 쉽게 위기에 빠지며, 영속적인 지지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다. 루만이 지적한 바와 같이 현대에서 사회적 하부체계로서의 사랑은 그 의미를 제공해 주는 종교와 같은 환경연관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위기에 당해 『짧은 편지』의 주인공 부부는 각각 자아 폐쇄적 반응을 보인다. 유디트는 남편인 주인공에게 자위행위를 한다고 고백하며, 주인공 역시 유디트에 숨긴 채 혼자서 오나니를 함으로써 성적 욕구를 만족시킨다. 이런 자아 폐쇄적 상황에 대응하여 한트케는 주인공의 극복전략을 두 가지로 전개하게 한다. 하나는 주인공이 자신의 주체를 잊는 것이다. 구대륙에서 형성된 주인공의 과잉자아는 신대륙의 문명과 자연을 체험하면서 약화되며, “제거”된다.113)그것은 파괴적 내적 긴장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114)

그리고 두 번째로 주인공은 구대륙의 질서체계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신호체계를 신대륙에서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며, 이를 스스로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클레어의 나이 어린 딸 베네딕타인은 문명의 신호체계 속에서 자신의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총체적 연관관계를 갖게 되며 여기서 “나름대로의 질서”115)를 저절로 획득한다. 그 아이에게 있어 문명은 제2의 자연으로서 거부감 없이 수용되고 사회화된다. 그러므로 여아에게 있어 미국의 문명은 그 아이의 내면과 외부환경을 서로 매개하며 이끄는 인도자 역할을 한다. 자연을 수탈하는 구대륙에서 자라난 주인공이 어른이 되어서도 획득하지 못한 환경을 해석해 주는 신호체계와 인격의 조화스러운 연결이 베네딕타인에게는 가능하다.

클레어의 딸은 주인공에게 사물의 이름을 많이 묻는다. 주인공은 이런 질문으로 인해 자신의 내향적 경향의 문제성을 깨닫게 되며, 외부 사물을 단지 개념으로써만, 따라서 거리를 둔 채 획득하던 이전의 대사물관계를 극복하고 사물의 내적 질서를 정당하게 수용하게 된다.116)이로써 주인공은 자의적 주관성을 극복하고 잃어버렸던 아들 펠릭스의 아버지 직(職)․Vaterschaft을 받아들여 세상에 대한 객관적 의무를 맡음으로써 내면적 주관성에서 외면적 객관성으로 전향하는 “교양과정”을 완성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에 상응하게 된다.

주인공은 미국 경험을 통해 드디어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하며 중요한 사항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는 자신에게서 자아를 초월하는 일반성에 대한 동경이 있음을 발견한다.


종교는 내게 오래 전부터 거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갑자기 나를 그 무엇엔가 연결시킬 수 있었으면 하는 동경심을 느꼈다. 남과 떨어져서 자기하고만 혼자 있는 것은 참기 어렵다. [...] 필수불가결하고 비인격적 연관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누군가에 대한 관계가 반드시 있어야만 했었다.117)


주인공은 자신의 특수성을 보장하는 일반성, 그리고 동시에 이런 일반성에의 연결을 도외시하지 않는 개별성을 정초 하고자 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나에게 정당하면서 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정당하게 될 수 있는 삶의 방식”118)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비인격적 연관관계’라고 하는 것은 인격성의 말살을 뜻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불안정성을 지닌 개인성을 초월하는 장기적 신뢰가 가능한 관계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베네딕타인이 내면화하는 비(非), 혹은 초(超)개인적 문명의 신호체계와도 상통한다. 주인공은 개인의 진정성과 일반성의 안정성이 서로 연결된 연관관계를 구현한 실례를 미국의 영화감독 죤 포드에게서 발견한다. 물론 그는 허구의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나”는 “우리”로 통합되며, 비로소 “우리”속에서 자신의 진정성을 구현한다.

“꿈속의 세계”로서의 미국에서 맺어지는 주인공과 여자 친구 클레어의 관계는 “나”와 “우리”의 조화가 실현된 또 다른 예가 된다. 필자는 위에서 루만이 현대사랑의 의미론이 주로 “이해의 프로그램”을 도입할 것이라고 예견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주인공과 클레어의 관계는 바로 이런 이해의 프로그램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클레어는 『녹의의 하인리히』를 모델 삼아 자신을 해석하는 주인공을 가장 잘 이해해 주고 또한 그 문제점도 가장 예리하게 지적하여 준다. 주인공은 자신의 숨겨진 의도가 드러나자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파트로서의 클레어를 일반성으로 사상(捨象)하지 않고 끝까지 구체적이면서도 전체적으로 탐구하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 이것은 둘 사이의 에로스적 경험으로 표출된다. 그 날 밤 그들은 흥분된 상태에서 사랑을 느끼며 성관계를 나눈다. 성적 만남은 순환적으로 그들의 관계를 더 깊게 이해시켜주는 단초가 된다. 이와 같이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예리한 이해는 완전한 연합을 가능케 하는 사랑의 출발점이며 목표점이다.

동시에 주인공과 클레어는 서로 결혼과 같은 구속적 요구를 하지 않고 쉽게 만났듯이 쉽게 헤어진다. 물론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하는 한, 무책임과 방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루만이 말하였듯이 “의미연관의 우주성이 모든 당시의 중요한 경험과 행동을 포함할 필요가 없다”라는 지적과 상통할 것이다.119)현대의 사랑은 채워줄 수 없는 요구수준을 낮춤으로써 구원될 수 있을 것이다. 동화적 나라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주인공과 클레어의 관계는 구대륙에서는 불가능했던 열려진, 그러나 이해를 기반으로 한 “필수불가결하고 비인격적 연관관계”에 의해 구성된 관계의 일례이며 한 모델이다. 유디트와 서로 모순적으로 얽힌 관계에서 해방된 주인공은 이제 비로소 클레어와의 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트케의 소설이 재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충고를 담은 종교서적이나 상담서적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과 클레어의 새로운 관계는 구체적으로 개진되지 않았으며 단지 비전으로 제시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짧은 편지』에서 구체적 행동지침을 끌어내고자 하는 시도는 소설의 문학적 성격과 의도를 곡해하고 오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오히려 한트케가 꿈꾼 것은 기능적 사회의 하부체계로서의 개인과 사랑이 그것을 초월하는 보편적 의미제공자로서의 환경연관을 찾아낼 수 있다는 희망이며, 이에 따라 새로운 열린 파트너 관계를 시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물론 그것은 “꿈의 세계”로서의 미국과 같은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서만 가능한 문학적 허구 Fiktion이다. 하지만 문학적 허구는 사회적 실현을 기다린다.



VII. 맺는 글


‘가족’의 의미는 그 본질적 개념의 차원에서 볼 때, 이념이나 역사, 문화적 양상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도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 가족의 정체성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아주 역동적이어서 그 소통의 폭과 밀도가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그것이 지닌 의미를 우리의 일상적인 서사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을 듯하기도 하고, 때로는 인식의 공간에서 논의해야 할 형이상학적 명제로 다가서기도 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가족이란 개념이 단일한 정체성의 관점에서 조망될 것이 아니라, 복합적 정체성이란 관점에서 그 의미가 정립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가족의 정체성이 지닌 의미는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시공간에서 이루어진 행위들이나 사상적 체계 들 속에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가족은 인간 공동체의 가장 기초적이며 본질적인 단위로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의 정체성이 지닌 의미에 대한 논리적 체계를 세워보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그것을 조망할 필요가 있다. 이런 연유로 이 글에서는 가족의 정체성이 지닌 의미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종합적 관점에서 심도 있게 분석해 보았다.

첫 장에서는 18세기 후반기 독일에서 이른바 ‘시민적’ 가족이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과 그 의미를 가족의 도덕화와 은폐된 해방운동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아직 귀족 계급에 필적할만한 사회적인 신분상승이나 경제적인 부를 창출하지 못한 18세기 독일의 시민계급은 귀족과는 달리 가족을 중심으로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근면, 절약, 소박, 검소 같은 단어들은 오래 동안 시민적 삶의 표상이 되었으며, 시민계급은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능력에서 기인된 근면하고 검소한 삶의 양식에 높은 도덕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가족 공동체에 깃들어 있는 내면적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성에 근거한 독특한 ‘시민적 도덕’이 정립된 것이다. 그리고 이 도덕률에 바탕 하여 시민적 가족이 도덕적 성역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ꡔ에밀리아 갈로티ꡕ에서 아피아니는 비록 백작의 칭호를 달고 있지만 그의 행동과 사유는 철저하게 시민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출생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분사회에서 아피아니라는 등장인물의 출생 신분이 전혀 강조되지 않고 그의 순수한 인간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점은 바로 신분사회의 가치 기준을 해체하려는 혁명적 시민운동의 직접적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시민적 가족의 일원으로 자리매김 되며, 도덕의 이름 하에 정립되어 가는 시민 계급 해방운동의 선도자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장에서는 루소의 ꡔ에밀ꡕ을 중심으로 18세기 프랑스 가족의 정체성과 청소년기가 지닌 의미를 살펴보았다. 반항적 청소년기의 이해는 18세기 이전의 전통사회에서는 생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18세기에 일어난 사회변동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전통적 가치에 대한 회의를 심어주었고 스스로 정체성을 찾도록 강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전에는 문제시되지 않았던 사춘기 청소년들이 사회와 가족의 존속을 위해 고려해야 할 대상으로 조망되게 된 것이다. 루소의 『에밀』은 이러한 사춘기 청소년의 위험성과 중요성과 위험성을 보여주면서, 바로 성적 정체성의 확립 시기인 이 중대한 위기의 순간을 다루고 있다.

루소는 이러한 에밀에게 기존의 교육관과 가치관과는 달리 자연을 통한 교육과 자유의 관념을 전달해 주고자 한다. 바로 이점에서 루소의 자연관이 드러나며 그의 새로운 교육론인 자연주의적 교육론이 성립된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을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데는 교육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사회에 복종하고 순응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사회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연이 이끄는 대로 자연성을 따라 참다운 인간이 되도록 하는 데 그 목표가 있다. 그의 자연주의적 교육론에 의하면, 인간은 ‘필요’와 ‘경험’에 의해 모든 것을 배워왔기 때문에 그 필요를 느끼게 하고 경험하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교육관은 자유주의적이자 자율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루소의 교육관은 체제와 권력의 유지를 위한 사회와 국가, 특히 종교기관의 전체주의적 통제 교육에 반하는 것이었다. 즉 루소의 교육관은, 기존 가족제도만으로는 더 이상 통제 할 수 없어 국가 및 종교기관까지 개입하여 행했던 기존 제도적 교육에 대한 저항이자 정면 도전이었다. 루소의 교육이 지향하는 최고점은 바로 자연인의 형성이다.

세 번째 장에서는 가족이미지를 통해 나타나 원형적 세계관과 이데올로기를 에밀 졸라의 ꡔ루공 마카르 총서ꡕ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가족의 정체성은 인간과 사회가 가족에 대해 갖고 있는 원형적 이미지와 한 시대의 구체적 사회 환경이 복합적으로 융합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가족의 형성을 사회적 이데올로기나 사회현상들의 단순한 반영으로 볼 때에 가족을 포함해 한 시대의 인간과 사회의 행위들을 결정하는 숨은 원인들인 무의식적 차원에 속하는 원형적 욕망 (불안, 희망 등)을 간과할 수 있다. 이런 무의식은 상상과 꿈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가족과 사회의 직접적인 반영관계 속에서 보다 문체의 차원에서 드러난다고 본다. 본 연구를 통해 가족과 사회의 표현 방식을 연구하면서 가족상에 숨은 형태를 찾아 가족 이데올로기를 심층적 차원에서 조명해 보았다. 특히 가족의 역사라는 세부 항목에서는 세 쌍의 가족을 조명하면서, 새로운 사회구조에 대한 욕망과 희망을 담고있는 새로운 대중의 탄생, 즉 언제나 존재하는 지배욕망의 이기적 집단이라는 관점과, 하나의 도당으로써의 가족이나 새로운 통합을 시도하는 집단으로의 관점에서 그리고 통합으로써의 가족이라는 관점에서 규정해보고자 하였다. 가족에 나타난 원형적 상상계와 신화에서는 이들 세 쌍의 가족상에 응축된 중심이미지를 찾아 대립들간의 투쟁과 통합이라는 사회의 숨은 욕망과 희망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졸라의 가족에 나타난 어머니 상들은 그 시대의 두려움, 희망을 품고 있는 사회적 상상계에 속한다. 이런 상상계야말로 사회와 가족을 성립시키는 기원을 알려주며 한 시대의 숨은 이데올로기를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논의한 졸라의 신화인류학은 원초적 폭력의 개념 위에서 시작된다. 심도 있는 조망을 통해보면, 영원한 타자-원죄 어머니, 결함을 가진 어머니는 금지된 것에 대한 접근으로 새로운 대립의 시작이며 이들의 대립적인 경향들은 양성적이고 모순적인 어머니 상으로 확장되며 구원자 어머니탄생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원죄 어머니의 정반대에 위치하는 것이 마리아-아기 예수와 같은 구원의 모자상으로 이 둘의 대립은 대립적인 것들의 투쟁과 통합성으로 가는 원형적 구조이며, 그 중간에 과도기적으로 나타나는 어머니 전형들이 수치 당한 동정녀와 남성적 어머니이다. 가족과 사회의 정체성이 어머니 상을 통해서 말해진다는 점에서 졸라의 가족 소설은 진정한 어머니 상을 찾고자 하는 여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네 번째 장에서는 똘스또이의 ꡔ안나 까레니나ꡕ를 중심으로, 가족의 정체성과 구성원의 개체성을 대비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러시아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지닌 의미에 대해 본질적인 논의를 하기란 상당히 난해하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사회는 가부장적 질서에 근거한 보수성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보수성향의 러시아적 전통에서 가족의 정체성이 지니고 있는 이중적인 특성을 본질적인 차원에서 서술한 작품이 똘스또이의 ꡔ안나 까레니나ꡕ이다. 이 작품에서 똘스또이는 가족이란 공동체의 정체성을 여러 각도에서 조망해볼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전형을 형상화해놓고, 각각의 전형들이 지니고 있는 특성들을 신랄하게 사실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먼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부재해 있는 상태에서 다분히 ‘가족’이라는 관념의 틀에서만 유지되고 있는 가족이 있고, 이와 반대로 서로에게서만 이상적인 모습을 찾으려할 뿐 자기 자신은 본질적으로 가족에게 헌신하고 배려할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는 구성원들이 이루고 있는 가족이 있다. 마지막으로는 이 작품에서 똘스또이가 가장 강조를 하고 있는 가족의 공동체의 모습이 있다. 이 가족은 본질적으로 가족의 정체성과 구성원들의 개체성이 조화로운 질서를 이루고 있다.

세 가족의 존재 양상을 통해 가족이란 공동체가 지닌 특성을 서술하려고 한 똘스또이는 작품의 말미에서 레빈의 말을 통해 가족의 의미와 기능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하늘의 별자리, 그리고 별’은 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런데 레빈이 보기에 그것은 독립적이기도 하고 조화로운 융합을 이루기도 한다. 즉 별 하나하나는 온전히 자신의 의미를 독자적으로 드러내면서 빛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하나의 커다란 별무리에 참여하여, 알지 못할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성좌의 통일성을 이루는 구성원이 되고 있다. 바로 이 묘사가 이 작품에서 똘스또이가 구현해내려고 의도하고 있는 가족의 정체성의 본질적 개념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레빈의 명상적인 내면 풍경을 묘사하면서 똘스또이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그 구성원 사이의 상관적 관계를 알레고리로 서술하고 있다. 즉 개인이 스스로 자신을 ‘절대적 현존’으로 인식하면서도, 일정한 ‘통일성’의 궤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을 가족과 개인의 본질적 관계라고 보는 것이다. 개별적 자아가 일방적으로 제시된 방향을 추종하거나 의도적으로 따르려고 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전체 속의 일원’을 형성하는 것이 똘스또이가 상정하고 있는 개인과 가족, 통일성과 개체성의 가장 조화로운 융합 방향인 것이다.

마지막 장은 ‘환자’로서의 가족이 현대에서 어떤 조건 아래서 치유가 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루만은 ‘정열로서의 사랑’이 사랑을 사회에서 유리된 자율적 하부체계로서 정초 되도록 하였으나, 동시에 사회적 지지기반을 상실하도록 하였기에 불안정성이 내재되어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현대의 사랑은 정열과 같은 과도한 감정을 담아낼 수 없으며, 오히려 “이해의 프로그램”으로 대체될 때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트케의 소설 『긴 이별에 부치는 짧은 편지』는 어떻게 서로 과도한 요구를 하는 대신 이해의 프로그램으로 맺어진 현대의 남녀관계가 가능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고 있다.120)



Zusammenfassung


Zum Identitätsproblem der Familie in ausgewählten europäischen Literaturen


Su-Yong Kim․Min-Seok Kwak․Sung-Ae Cho․Sangryong Lee․Ihmku Kim


Der tiefgreifende Werte- sowie sozialstrukturelle Wandel, der in Europa um die Mitte des 18. Jahrhunderts begann und bis heute im Gange ist, hat den Begriff der Familie, einen Inbegriff der selbstverständlichen sozialen Institution der Menschheit, zutiefst unsicher gemacht. Mehr noch: Die Familie wird in der gegenwärtigen Zeit gar als „Patient“ angesehen. Angesichts dieser Situation drängt sich die Frage auf, was die Familie dazu geführt hat und ob - wenn ja, dann wie -, das Problem gelöst werden kann. Fragestellungen dieser Art erfordern naturgemäß, dass historische Dokumente unter soziologischer Perspektive analysiert werden sollen. Wir wenden uns aber mit denselben Fragestellungen eher an ausgewählte literarische Werke, da wir glauben, dass hier „der Problemfall Familie“ brennpunktartig in seiner Tiefenstruktur thematisiert und dessen Lösungsvorschläge ungezwungener- d.i. probeweise gestaltet sind; literarische Visionen helfen uns, das Problem viel schärfer zu fassen und über neue Möglichkeiten frei von sozialen Einschränkungen nachzudenken.

Anhand „Emilia Galotti“ wird nachgewiesen, dass das Konzept der Familie im 18. Jh., demzufolge diese ein Ort der Tugend sei, als ideologische Waffe des Bürgertums im Kampf gegen die korrupte höfisch-adlige Gesellschaft fungiert hat. Insofern war die Familie ein Mittel der bürgerlichen Emanzipation.

J. J. Rousseau thematisiert in seinem Erziehungsroman „Emil“ die Pubertät, die er als „Zweite Geburt“ des Menschen charakterisiert. Diese enthält ein Gefahrpotential für den Staat, sofern die pubertäre Jugend das Bestehende in Frage stellt. Sicherlich stellt dieser Lebensabschnitt sowohl für den Betroffenen wie auch für den Staat eine Krise dar. Aber auch eine Chance, insofern die Jugend mit der natürlichen Erziehung zur Natur zurückgeführt werden kann.

Im 19. Jh. verschärft sich die Problematik der Famile radikal, da mit den Folgen der Französischen Revolution wie auch der Industriellen Revolution ganz neue soziale Situationen den Hintergrund für die Familie bilden. Emil Zola thematisiert diesen Prozess mit seinem Roman „La Fortune des Rougon“. Hier kann man drei neue Typen der Familie, die dem veränderten sozialen Umfeld ihr Entstehen verdanken, unterscheiden: Familie als neue Masse, Familie als Räuberbande und zuletzt Familie als Integrationsleistung. Es versteht sich, dass Zola die letzte Form der Familie favorisiert, in der Liebe als neue Lebensmöglichkeit wieder ersteht.

Im selben Kontext kann man Tolstois Vision der neuen Familie in seinem Roman „Anna Karennia“ begreifen. Er sieht diejenige Familie als ideal an, in welcher Viefalt und Einheit der Familienmitglieder garantiert und ausgelebt werden.

Schliesslich fragt Peter Handke in seinem Roman „Der kurze Brief zum langen Abschied“, unter welchen Voraussetzungen „der Patient Familie“ geheilt werden kann. Niklas Luhman weist darauf hin, dass die Liebessemantik „Liebe als Passion“ Liebe als soziales Subsystem autonom gemacht hat, mit der Folge, dass die Liebe höchst instabil wird, da ihr sozialer Rückhalt abgeschnitten ist. Er meint, dass die moderne Liebe vielleicht dann eine Überlebenschance hat, wenn sie auf exzessive Passion sowie den hiermit einhergehenden hohen Anspruch an den Partner verzichtet und durch das Programm des Verständnisses ersetzt. Handke beschreibt in seinem Roman, wie moderne Liebe dieses Programm umsetzen kann.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핵심어: 가족(Familie), 시민적 해방(bürgerliche Emanzipation), 사춘기(Pubertät),

        원형(Archetyp), 정체성(Identität), 이해(Verständnis)

필자 E-mail: kim1234@yonsei.ac.kr (김수용)

             aube@hanmail.net (곽민석)

             dcsa115@hanmail.net (조성애)

             srlee@yonsei.ac.kr (이상룡)

             ihmkukim@yonsei.ac.kr (김임구)

논문투고일 : 2001.10.8. / 심사일 : 2001.10.27. / 심사완료일 : 2001.11.26.



출처: https://lectio.tistory.com/1084?category=272960 [Lectio Div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