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자아의 집: 토마스 베른하르트 - 프란츠 카프카

하나님아들 2020. 1. 4. 10:18

자아의 집: 토마스 베른하르트 - 프란츠 카프카

                                                                                           류  은  희*


I. 비교범위에 대하여

 토마스 베른하르트와 프란츠 카프카. 이 두 작가의 비교 시도는 베른하르트 연구측에서 볼 때 이미 중요한 몇 가지 관점들을 밝힌 바 있다. 탈낭만주의적 현대성이 각인된 베른하르트의 문학세계는 즐겨 ‘카프카적kafkaesk’으로 수용되었고, 현재 독일작가들 가운데 베른하르트는 카프카 문학의 “상속자Erbe”1), 그것도 “철저한 상속자ein entschiedener Erbe”2)로서 조명되었다.  노이마이스터의 견해에 따르면, 카프카의 예술은 모순적이며 역설적이다. 카프카는 그의 작품을 “악마에 봉사한 댓가Lohn für Teufelsdienst” 혹은 “악취Gestank”라고 부르며 줄곧 “자기 자신의 글쓰기에 반하는gegen das eigene Schreiben”3)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예술과 삶의 일치die Einheit von Kunst und Leben”를4)정당화하려는 자기 강요의 계기를 보여준다. “예술과 삶의 일치”는 예술과 삶의 대립이란 현실에서 개인적 사회적 상황의 구속에 대해 거리의 유지를 필수적으로 하며 예술을 삶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예술로써 삶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다. 이 가운데 두드러지는 카프카의 예술에 대한 경멸은 오히려 ‘예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서 1920년대와 193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을 위시한 댄디즘의 예술관과 같이 한다고노이마이스터는 파악한다.5)베른하르트는 1968년 이후 이런 카프카적 예술관을 계승 발전시킨 작가로서 그의 작품에 일관된 “예술가와 예술에 대한 증오Haß von der Kunst und vom Künstler”는6)같은 맥락에서 조명될 수 있고, 특히 그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악성 종양ein bösartiges Geschwür”이며 글쓰기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이 치명적인 종양을 ‘도려내는heraus operieren’(It, DT 80) 작업임을 천명한 만큼 예술의 증오는 또한 ‘죽음’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 폼 호페와 파프는 이같은 두 작가 세계의 근접을 “신학적인 사고구조들에 비추어hinsichtlich theologischer Denkstrukturen”7)증명하려 한다. 카프카 작품에서 지배적인 주제는 “자신의 근거와 그리고 어떤 초월성에 대한 문학적인 주체의 탐색die Suche des literarischen Subjekts nach seinem Grunde und nach einer Transzendenz”8)이다. 이때 카프카의 문학은 ‘자기 성찰적 미학적 실험들’로서 특징지워지는데, 이 실험들에서 초월성의 실체는 회의적이 되고 이는 주체가 그의 근거를 다름아닌 자기 자신안에서 구하고자는 성찰로 이끈다. 무한성과 계시의 경험 대신 “무한한 공허속에서in einer unendlichen Leere”8)길을 잃고 마는 카프카적 성찰은 베른하르트 작품에서 초월적 실체를 부정하고 바로 공허한 허상일 뿐인 이 초월성을 반박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시금 무한한 것이 도입되고 전개되는 양상에서 발견되어진다. 이때 표방되는 절대적 이상적 예술 구상은 언뜻 보기엔 낭만주의적 전통속에 놓여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이와 대조를 이루는 반낭만적인 현대적 특성이 지배적이며 또한 이러한 현대성에서 카프카의 문학과 접촉하는 것이다. 베른하르트의 ‘성찰시Reflexions- poesie’는 카프카의 성찰적 미학적 실험들처럼 자기파괴적인 요인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어쩌면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 예술을 상정해 놓음으로써 더욱 더 희극적이고 더욱 철저하게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삶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테마와 사상구조의 유사성외에 카프카와 베른하르트의 비교를 시도하는 한 다른 관점을 봘터 봐이스는 두 작가의 ‘비유적인gleichnishaft’ 글쓰기에서 찾고 있다.9)봐이스는 “두 작가의 비유적인 글쓰기의 공통성과 차별성이 비단 개인적인 것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문학내에서의 전통적 궤도들과 같은 문학사적인 맥락들에도 관계된다 Die Gemeinsamkeiten und Differenzen ihres gleichnishaften Schreibens sind nicht nur individuell, sondern betreffen auch literarhistorische Zusam- menhänge, z. B. Traditionsstränge innerhalb einer österreichischen Literatur”10)는 대의를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문학을 프란츠 카프카의 것과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두 작가가 모두 ‘구제Rettung’의 실질적인 대안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감금Gefangenschaft’과 ‘죽음Tod’간의 양자택일이란 문제성을 테마화하고11)있는 점에서 찾을 수 있겠다.

  카프카의 단편 ꡔ집Bauꡕ(1923)과 베른하르트의 산문 ꡔ석회공장ꡕ(1970)은 공통적으로 비유적 성격이 뚜렷한 Bau의 모티브를 다루고 있는데, 두 작가의 문학을 연결짓는 “자기 자신의 글쓰기에 반하는” 입장에서 예술이 갖는 자기 강요성의 계기와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 놓은 감옥과 죽음간의 양자택일적이고 유희적 성격을 규명해 볼 수 있는 적절한 작품들이다. 본 논문은 그동안 두 작가간의 연구에서 매우 미흡하였던 작품 중심의 구체적인 비교를 시도할 목적으로 상술한 이론적 관점들을 작품들에 상세히 적용하고 검토하며 나아가 두 작가에게 있어 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Bau에 대한 동기와 그 결함의 내적 원인을 모색하고자 한다.


II. Bau의 의미


  먼저 카프카의 작품에서 Bau는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야기의 일인칭 화자는 큰 오소리 종류의 들짐승으로 땅속에 수백 미터에 이르는 건축물을 지어놓았다. 수많은 통로와 그리고 오십 개의 넓은 공터가 있는 이 Bau는 일차적으로 땅속에 파놓은 “굴”11)로 볼 수 있고, 들짐승의 거주처로서의 땅굴은 인간의 “집Haus”(K 367)12)에 상응한다. 그러나 먹이를 저장해 두고 다가오는 노년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주거처로서의 Bau는 이를 보장할 수 있기 위하여 외부 적들로부터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어기지’이어야 하며 또한 온갖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 ‘바깥’에서의 “그 오랜, 절망적인 삶”(K 369)을 접고 깃들 수 있는 ‘안전한’ 칩거지가 될 수 있어야 한다. Bau는 ‘나’가 “할퀴고 물어뜯고 밟아 으깨고 몸으로 부딪쳐서 고른 땅을”(K 372) 자기 피를 적셔 굳게 한 ‘나’의 “성Burg”(K 372)이며 결코 다른 누구의 접근과 출입이 허용될 수 없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아성Ichburg’이다. 따라서 카프카 주인공에게 있어 Bau의 의미는 두 가지로 좁혀진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안전한 삶의 ‘주거처Wohnhaus’와 그리고 단절된 공간 속에 놓인 오로지 자신과 대면한 자기 성찰적 계기를 지닌 ‘자아의 집’이다.

  일상적 ‘주거처’와 자기 성찰을 위한 ‘자아의 집’은 근본적으로 서로 배리되는 모순을 안고 있다. 카프카에 있어서 Bau의 대원칙은 “자기 보전”과 “삶의 구제”의 원칙과 같이 하지만 그러나 “신비적인 자기애”로 인하여 자기 파멸만이 있을 뿐인 “자아의 함정”이 되고 만다.13)Bau의 이러한 양립성은 카프카가 그의 죽음 전 2년 앞서 막스 브로트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입장과 비유적으로 연관짓고 있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어쩌면 다른 글쓰기도 있겠지, 난 단지 이것 밖에는 모르네; 불안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밤에는 난 이것 밖에는 몰라. 그리고 이 글쓰기에 있어서 악마적인 것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어. 그것은 공허와 줄곧 자기의 형상이나 또한 낯선 형상의 주위를 맴돌며 - 움직임은 그러면 배가되고, 공허의 태양계가 되지 - 윙윙거리고 그리고 이 형상들을 즐기는 향유욕이네.

  이때문에 끔찍스러운 죽음의 불안이 찾아와 ... 그는 아직까지 살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는다 것을 너무나도 불안해하고 있어. 난 삶에 여자와 자식, 들과 가축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닐세. 삶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향유를 버리는 것이야, 경탄하고 화환으로 장식하는 대신 집안으로 들어가 사는 것이지.

Vielleicht gibt es auch anderes Schreiben, ich kenne nur dieses; in der Nacht, wenn mich die Angst nicht schlafen läßt, kenne ich nur dieses. Und das Teuflische daran scheint mir sehr klar. Es ist die Eitelkeit und Genußsucht, die immerfort um die eigene oder auch um eine fremde Gestalt - die Bewegung vervielfältigt sich dann, es wird ein Sonnensystem der Eitelkeit - schwirrt und sie genießt.

Daher kommt eine schreckliche Todesangst ... er (hat) schrechkliche Angst zu sterben, weil er noch nicht gelebt hat. Damit meine ich nicht, dass zum Leben Weib und Kind und Feld und Vieh nötig ist. Nötig zum Leben ist nur, auf Selbstgenuß zu verzichten; einziehen in das Haus, statt es zu bewundern und zu bekränzen.”(Br 384/385)


   여기서 카프카 문학의 목적이었던 절대적인 “자기향유Selbstgenuß”는 회의적으로 반추되고 예술에서의 이 자기향유로 인하여 가중되는 “끔찍스러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다시 삶 속으로 진정 되돌아가기 위한 길이 모색되고 있다. 카프카는 삶을 위한 자기 구제는 오직 자기 향유를 버리는 것밖에 없음을 인지하고 실제적인 삶의 터전이 될 수 있는 “집Haus”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때 말하는 “집”의 의미는 미완성 단편으로 남은 카프카의 말기 작품 ꡔ집ꡕ의 모티브와 주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시하여 준다. 작가와 작품간의 “살아있는 연관”14)을 비추어 볼 때 1923년과 1924년의 겨울 ꡔ집ꡕ을 집필할 당시 카프카는 도라 디아만트와 베를린에서 보금자리를 만들어 프라하를 벗어나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삶의 안식처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작가의 전기적 사실이 작품의 저변을 이루고 있음을 감안하고 그리고 그때 카프카가 도라에게 그녀가 그의 이야기에서 중심이 되는 “성광장Burgplatz”이라고 설명한15)점을 미루어 본다면 그의 이 말기 작품에서 도입된 Bau의 의미는 자기향유를 극복하고 실제적인 삶을 위한 글쓰기의 한 시도로서 이해되어진다. 그러나 ꡔ집ꡕ에서 이 시도는 자기향유와의 양립성에서 절망적으로 빠져들고 마는 “자아의 함정”에 귀착되고 만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나’처럼 베른하르트의 ꡔ석회공장ꡕ에서 주인공인 콘라드는 평생을 자신을 위한 집을 갖기 위하여 노력한다. 가동을 정지한 채 허물어져 가는 석회공장을 수 십 년간의 교섭끝에 매입하게 된 콘라드는 건물과 주위를 그의 구상에 맞게 완전히 개조한다.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버려진 이 석회공장에서 그는 자신을 위한 “이상적인 실존과 연구의 벽구조물ein ideales Existenz- und Studiermauerwerk”(Kw 42)을 발견한 것이다. 여느 보통 석회공장에서 그의 실존을 위한 이상적인 유일한 장소로 탈바꿈할 수 있는 토대는 바로 “오랜 벽구조물das alte Mauerwerk”(Kw 15)로, 이 상태의 복구는 콘라드가 석회공장에 깃들기 위한 필수적 전제가 된다. 베른하르트의 주인공에게 있어서 건물의 개조는 기능적으로 오로지 평생토록 몰두하는 그의 연구를 위한 것으로 “실존의 한 정신적인 형식eine geistige Form der Existenz”에 준한 것이다.16)탈바꿈한 석회공장은 이 정신적 실존을 “외부세계로 부터”(Kw 20) 안전하게 지켜주는 “보호처Schutzraum”와 그리고 연구를 위한 “작업처Arbeits-Stätte”17)가 된다. 카프카 주인공의 경우처럼 그렇게 극단적이진 않지만18)원칙적으로 고립상태를 고수하는 ꡔ석회공장ꡕ에서의 Bau가 지닌 “보호처”와 “작업처”의 의미는 베른하르트가 1965년 오스트리아 올스도르프에 소재한 그 지방의 전형적인, 쓰러져가는 낡은 한 농가를 매입하였을 때 자신의 집에 갖는 애초의 바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나의 집에 거는 믿음은, 집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하여 나를 징벌하고, 나의 목적에 집중하게 하며 그리고 가능한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 [...] 나의 집은 내가 하는 일을 숨겨준다. 나는 나의 집을 벽으로 막았다. 나는 나를 벽으로 둘러쌌다. 정당하다. 나의 집은 나를 보호한다.

Mein Hof, von dem ich glaube, daß er mich nicht umbringen, sondern züchtigen für die Zukunft, auf mein Ziel konzentrieren und so wenig als möglich konfus machen wird. [...] Mein Hof verbirgt, was ich tue. Ich habe ihn zugemauert. Ich habe mich eingemauert. Mit Recht. Mein Hof schützt mich.”19)


  이 작품의 집필당시 한창 전면적인 보수 개조 공사중에 있던 베른하르트의 이 집과 특히 관련하여 작가의 지우이자 마을 이웃이던 W. 슈미트는 베른하르트가 평생에 걸쳐 세 채의 자기 집에 노력을 기울였던 복구 수리과정을 사진들로써 기록하면서 “베른하르트의 삶과 그가 글 쓴 것간의 차이는 없다. 집들은 그의 산문 주인공들의 실존을 반영하고 구성한다. 집들은 그들의 운명이다”20)고 간명하게 정의내린다. ꡔ석회공장ꡕ에서 Bau는 한 순간도 삶이 허용되지 않는 ꡔ수정Korrekturꡕ에서의 원추형 건물Kegel과는 달리21)콘라드가 5년이란 세월을 그 안에서 살게 되는 ‘사유의 집Denkgebäude’인 동시에 ‘주거지Wohnhaus’로서의 두 가지 목적을 겸비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Bau는 본래부터 내면 속에 갇혀있는 자아를 위한 공간으로 오로지 그 정신적인 실존의 목적인 연구의 실험과 집필을 위하여 설계되어 있어 이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포용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석회공장에서 콘라드의 삶은 보호되고 실현되는 대신 점점 더 깊은 혼란과 끝내 자기 파멸을 자초하게 된다. 이 Bau는 오직 이곳에서만 자아의 삶이 보장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설계하고 건축하였지만 종국엔 스스로 파놓은 무덤과 같은 - 작가의 진술에서 매우 암시적인 - “나를 죽이는 집”이 되고 만 것이다. 이처럼 자아의 칩거지가 결과적으로 자아를 영원히 가두고 죽음에 내맡기는 감옥이 되는 Bau의 근본구조와 전개양상은 베른하르트의 작품과 카프카의 작품에서 놀랍도록 유사하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Bau의 근본적 모순성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III. 둥지Käfig와 감옥Kerker


“새장이 새를 찾아 나섰다 Ein Käfig ging einen Vogel suchen.”(BC 231)


“모든 인간은 종국엔 그 자신을 죽이고마는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J]eder Mensch habe eine ihn schließlich abtötende Idee”(Ko 122).

     

  “새장이 새를 찾아 나섰다.” 카프카의 「죄와 고통, 희망과 그리고 참된 길에 관한 고찰들 Betrachtungen über Sünde, Leid, Hoffnung und den wahren Weg」에서 이 16번째 아포리즘은 ‘새가 새장을 찾아 나섰다’를 역으로 본 반전으로서 카프카의 작품에서 핵심적인 한 역설을 담고 있다. ‘새장이 새를 찾아 나섰다’, ‘새가 새장을 찾아 나섰다’, 이 역설과 반전된 역설은 봐이스에 따르면 두 가지 대안을 드러내 보이지만, 둘 다 “구제의 실제적인 대안이 없는 감금상태와 죽음”을 겨냥하고 있고 카프카 세계의 본질적인 징표인 “대안없는 선택들Alternativen ohne Alternative”을 시사한다.22)이같은 ‘가망없는 한 대안’으로서의 새장은 은유적으로 ꡔ집ꡕ에서 들짐승이 땅속에 구축한 칩거지에 적용되며, 위의 역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Bau의 구조에 이미 내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Bau는 밖에서 보면 하나의 구멍처럼 보이나 수많은 통로들과 수십개의 공터가 있는 미로Labyrinth와 같은 커다란 지하 구조물이다. 이 건축의 역점은 입구Eingang와 성광장Burgplatz에 놓여있다. 입구는 외부로 부터의 침입을 교란시키게끔 설계된 적을 겨냥한 전략적인 곳이며, 들짐승이 드나드는 외부와 연결된 실제적인 통로는 이 입구에서 동떨어진 곳에 이끼층으로 위장되어 있다. 그리고 성광장은 Bau의 중심지로서 사냥한 먹이의 저장소이자 들짐승이 먹이들속에서 만족스럽게 뒹굴고 놀이하며 잠자는 주거처가 된다. 또한 성광장은 Bau의 가장 내밀한 곳에 위치한, “극단적인 위험의 경우를 잘 대비한”(K 361) 유일한 안전지대이며, 동시에 무엇보다 이 건축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인 “정적Stille”(K 361)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작품의 서두는 청년에서 장년에 이르는 긴 세월동안 자기 몸으로 닦고 세운 이 Bau에 대한 들짐승의 긍정적인 자체 평가로써 시작된다: “난 집을 지었고, 집은 잘 만들어진 것같다. Ich habe den Bau eingerichtet und er scheint wohlgelungen.”(K 359) 그러나 성공적인 건축물로 본 이 Bau는 이내 그 결함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러한 문제 직시는 건축설계에 외부의 적에 의해 포위당하거나 위험에 처했을 때 막아 줄 수 없을 만큼 허술한 부분들이 있다는 일종의 강박관념과 같은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로지 외부의 적으로부터 안전함을 염두에 두고 지은 Bau에 이같은 결함은 들짐승에게는 치명적이 아닐 수 없다. 지그재그로 미로처럼 입구를 설치하였을 당시에는 승리감에 들뜨게 했던 것이 지금 그의 눈에는 “너무나 얇은 벽으로 쌓은 장난짓거리eine viel zu dünnwandige Spielerei”(K 365)에 불과하고 적의 공략시 자신을 구제해 줄 아무런 원칙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이 입구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것은 오히려 적의 주의를 끄는 일로 Bau를 더한 위험에 처하게 할뿐이다. 건축설계상의 오점들은 그러나 입구에서만 아니라 Bau의 중심인 성광장에서도 발견된다. 외부의 적에 대한 성광장의 주요기능은 방어이며, 설계상의 결함은 여기 한곳에만 집중된 저장고가 다양한 생존가능성을 막고 있다는 이유에서 환기되어진다. Bau를 전면적으로 뜯어 고치려는 생각을 해보지만 들짐승은 “이 엄청난 일을 하기엔 자신이 너무 약함을 느끼고, 일의 필연성을 자신에게 분명하게 그려보이기엔 너무 힘이 없음을 느꼈다”(K 364).

  이같은 Bau구조의 문제는 ‘소음Geräusch’이 대두됨으로써 완전히 반전된 양상을 띠게 된다. 이제까지 Bau의 결함들은 순전히 외부의 적을 겨냥한 입장에 근거하여 외부로 부터 적의 침입에 대비한 ‘안전Sicherheit’이 허술한 데 있었지만, 이 소음의 출현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잠복해 있는 원인에 촛점을 모으게 한다. 어느 날 성광장에 집중된 저장고를 여러 장소로 분산시켰다가 다시 원상태로 복귀시켜 놓은 다음 달콤한 잠에 빠져든 들짐승은 어떤 소음 때문에 놀라 깨어난다. 소음의 원인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탐색 발굴을 해보지만 어느 곳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들짐승이 소음의 정체를 추정하는 과정은 외부로부터 Bau의 내부로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드는 자기 탐색과정과 흡사하고, 탐색방향은 입구쪽에서 성광장으로 좁혀진다. 성광장은 지금껏 “평화”와 “정적”의 장소였지만, 이제는 가장 불안하고 가장 위태로운 곳으로 되었다. 소음은 바로 이곳 성광장에서 가장 심했고 여기저기서 똑같은 크기로 밤낮으로 끊이지 않는다. 소음은 거의 들릴락 말락한, “나외에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K 376) 작은 소리로, 들짐승은 땅속에서 원을 그리며 이 Bau로 점점 파고드는 “한 거대한 짐승”(K 383)의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외부세계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Bau의 상태는 이 소음에 대해 들짐승을 더욱 민감하게 자극하고, 모든 것이 이러한 Bau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인만큼 그를 방해하고 위협하는 소음의 정체가 외부의 침입자보다는 오히려 그 자신 속에 내재된 것임을 강하게 시사한다. 이는 Bau의 안전성을 이젠 회복될 수 없이 무너지게 한 치명적인 오류가 이미 건축을 시작한 당시부터 잠재하였던 점으로 밑받침된다. 들짐승은 집을 짓기 시작한 무렵 불현듯 멀리서 나는 소음을 들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죄어드는 불안감 대신 그 당시에 “나는 젊었었고 이 일로 불안하기보다는 호기심이 일어났고 Jung wie ich war, wurde ich dadurch mehr neugierig als ängstlich”, “냉정하고 침착했다”(K 385). 어쩌면 ‘나’는 다른 Bau안에 들어있으며, 이 Bau의 원주인이 이제 ‘나’를 향하여 파들어오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음은 서서히 작아지고 어느 시점엔가 완전히 들리지 않아 곧 ‘나’는 다시 본래 구상에 따라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Bau에 안전성이 결여된 결정적인 이유는 들짐승이 이 “경고Mahnung”를 “망각했고”(K 386), 이 소음에 대한 경계를 전혀 Bau에 감안하지 않은 나태함에 있다. 따라서 그토록 강조된 Bau의 안전성은 실로 허울에 불과하며, 이로써 자기 방어의 중대한 목적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Bau의 치명적 결함에 대한 인식은 들짐승의 자기 방어에서 곧바로 성광장의 이상적인 수호에로 그 비중이 바꿔 실리게 한다. ‘나’가 가장 좋아했던 건축 수정 구상 중의 하나는 지금의 성광장을 허물고 성광장 주위를 빙둘러 빈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 빈 공간의 흰 벽에 둥그렇게 매달리고 오르고 미끄럼타고 공중제비하는 유희는 “형식적으로는förmlich” 성광장의 몸체 안에서 행해지는 것이지, 엄밀히 성광장의 “본래 공간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K 377). 그럼으로써 ‘나’는 성광장을 피할 수 있고, 그것을 보는 기쁨을 가질 수 있으며, 무엇보다 성광장을 수호할 수 있게 된다. 늘 그곳을 오락가락하면서 성광장을 지키기 위하여 ‘나’는 평생 그 빈 공간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며, 그러면 벽에서 들리는 소음도 없을 것이고, 성광장에는 “평화가 보장되며”, ‘나’는 이 평화의 “파수꾼”이 되어 소음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대신 “황홀하게, 지금은 내게서 완전히 사라진 것인 성광장위에 서려있는 적막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게 될 것이다(K 377). 실로 실현될 수 없는 이 불가능한 이 구상은 소음으로 인한 Bau의 위험에서 상상으로 다시 한번 도피하려는 노력일 뿐이며, Bau의 구체적인 수정작업 대신 “아주 완벽한 Bau의 꿈Traum eines ganz voll- kommenen Baues”(K 372)속으로 다시금 빠져들게 된다.

  들짐승은 Bau의 안전과 소음의 정체에 대한 “확신Gewißheit”(K 387)을 얻기 위하여 탐색적인 도굴작업을 착수하지만, 그러나 끝내 ‘나’는 스스로 이 확신을 포기하고 “아직 가능성이 있는 한 저장해 둔 풍족한 먹이를 즐기는 것”(K 387)만이 유일하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이라 결론짓는다. 소음으로 인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Bau를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나’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와 Bau는 하나이기에, 나는 태연히, 이곳에 정착해도 되는지 하는 모든 불안에도 태연히 [...]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우리를 지속적으로 갈라놓을 수 없고, 어쨌든 난 결국엔 죽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K 372) 평생을 바쳐 스스로 세워 올린 Bau가 ‘나’의 보존 대신 자기 자신의 삶을 치명적으로 위태롭게 하고 결과적으로 ‘나’를 가두고 오로지 죽음에 내맡기는 감옥Kerker으로 되고 마는 이 역설적인 논리는 베른하르트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나는 밖에서의 삶에 지쳤어, 이곳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것같다, 지금 그리고 이후에도 더 이상은. 여기 모든 것으로 부터 작별을 하고 Bau속으로 내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싶다 ich [...] bin satt des Lebens im Freien, mir ist, als könnte ich nicht mehr hier lernen, nicht jetzt und nicht später. Und ich habe Lust, Abschied zu nehmen von allem hier, hinabzusteigen in den Bau und niemals mehr zurückzukommen”(K 368).


  카프카의 주인공처럼 베른하르트의 콘라드 역시 외부세계와의 절대적인 단절을 원하여 외딴 곳에 버려진 석회공장에 칩거한다. 카프카의 들짐승에게 있어 Bau처럼 콘라드와 이 석회공장은 그의 “실존의 형식들과 실현들로서”23)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철저히 자아만을 위하여 고립된 Bau에서 모든 것이 오직 자기 성찰과 자기 내면의 관찰을 위하여 집중되어 있는 것은 카프카나 베른하르트의 작품에 모두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자기 삶의 보전을 우선으로 삼는 카프카의 Bau와는 달리 베른하르트의 Bau는 관념적인 이상을 전제로 하고 있어 우선 그 출발점을 달리하는 듯 보인다: “모든 인간은 종국엔 그 자신을 죽이고 마는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Ko 122). 평생 오로지 “한 생각”에만 사로잡혀 사는 베른하르트의 주인공에게 집은 이 관념이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콘라드는 이 건물에서 치명적인 정신이상이란 정신적 실존의 종말을 맞음으로써 카프카의 Bau에서와 유사한 역설로 끝난다.

  석회공장은 콘라드에 있어 그의 “청각에 관한Über das Gehör” 연구를 쓸 수 있는 이상적 장소로서 그 자신의 구제를 위한 유일한 대안이었다. 석회공장이 가진 연구를 위한 이상적인 조건은 외딴 곳에 고립된 ‘전원적 풍경Idylle’과는 전혀 거리가 먼 “감옥Kerker”, “갱생원Arbeitshaus”, “교도소Strafanstalt”(Kw 18)의 인상을 주는 이 건물의 표면뒤에 숨겨진 특성에 있다. 콘라드가 허물어져가는 낡은 석회공장의 건물에서 본질적으로 파악한 것은 “오랜 벽구조물das alte Mauerwerk”(Kw 15)이며, 바로 이 구조물 때문에 “감옥”이란 인상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그가 직접 자기 손으로 개조와 수리에 착수한 구상의 원칙은 석회공장의 원상태를, 즉 오랜 벽구조물을 되살려 전면적으로 “감옥”으로 복구하는 작업이다. 오로지 이 “합목적성Zweckmäßigkeit”(Kw 20)에 부합하도록 석회공장의 건물에서 모든 장식물은 제거되고, 창문들에는 쇠창살과 문들에 모두 무거운 빗장을 질러놓았다. 그리고 건물 주위는 높은 나무들을 빽빽이 심어 외부의 눈길을 철저하게 차단되었고 지형적으로 북쪽과 서쪽은 강에 접해있고 남쪽은 바로 암벽을 마주하고 있어 유일하게 동쪽으로 난 험한 작은 길만이 은밀하게 석회공장으로 통하고 있다. 석회공장의 이같은 지형적 조건들은 “습기Feuchtigkeit와 냉기Kälte, 어둠Finsternis과 상해가능성Verletzungmöglich- keit”(Kw 40)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이 벽구조물과 그 주변에 스며있는 지배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감옥으로서의 합목적성을 더욱 완벽히 실현하게 한다. 석회공장의 원상태 복구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다. 하나는 외부세계로 부터의 ‘안전Sicherheit’이며, 다른 하나는 “청각에 관한” 연구와 실험에 중대한 정적과 물소리를 위한 집중이다. 안전율은 오로지 자기 실존의 목적이 있을 뿐인 단독적 삶의 조건에 필수불가결하며 카프카의 Bau에서도 공통된 것이다. 석회공장은 외부적으로는 고립된 자연적인 지형조건을 이용하여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의 접근을 거의 불가능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를 통과하고 석회공장에 접근할 경우 외부인은 건물을 보자마자 “아연 질색하여”(Kw 26) 도망쳐버리게끔 되어 있다. 이는 “감옥”의 인상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킨 덕분으로, 외부인으로 하여금 “사방에서 관찰당하고 있는 느낌”을(Kw 26) 갖게끔 한다. 이처럼 안전율은 침입자의 “완전 착각을 겨냥하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함정에 빠지게 되는 전체의 설계 [d]ie Konstruktion des Ganzen sei auf Totaltäu- schung angelegt, der oberflächliche Beurteiler auf jeden Fall in die Falle gegangen”(Kw 27)에 의하여 마련된다. 석회공장의 내부는 문을 두드리는 작은 소리까지도 “끔찍스러운 소음ein fürchterlicher Lärm”(Kw 27)으로 울리고, 단지 “극미한 움직임의 자유”(Kw 27)만이 있을 뿐으로 낯선 방문자를 옥죄이고 교란시킨다.

  그러나 베른하르트의 작품에서 Bau의 역설은 외부로부터의 낯선 침입에 대해서 경악과 혼란 일으키게 하는 설계구조가 이 건물 속에 사는 콘라드에게 있어서는 바로 그의 실존을 위한 절대적인 전제조건이 되어야 하는 점에 기인한다. 다시 말하자면 낯선 침입자에게는 치명적인 혼란을 주는 요인들이 그에게는 모두 “청각에 관한 연구”를 위하여 “자발적으로frei- willig”(Kw 27) 찾아 들어간 감옥의 장점들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있다.


“한번은 내가 연구를 글로 옮길 수 없는 것은 석회공장 때문이라고 믿고, 또 한번은 바로 내가 석회공장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아직 연구를 글로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einmal glaube ich, das Kalkwerk ist schuld, daß ich die Studie nicht niederschreiben kann, einmal glaube ich, gerade weil ich im Kalkwerk bin, habe ich die Möglichkeit, doch noch die Studie niederschreiben zu können.”(Kw 165)


  콘라드의 이 내적 모순은 그가 완전한 고립을 견디지 못함으로써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봐이스의 말을 빌리자면, “고립된 인물과 역설적인 원은 이 역설적인 원이 고립된 인물의 주변과 내부에서 작용하는 한 서로 짝을 이룬다.”24)4층 구조물인 석회공장은 극히 필요한 가재도구 외에 아무 것도 없는 빈 방들이고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지가 전혀 없이 오로지 ‘연구’에만 집중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머리 속에는 완벽하게 들어있는 연구 구상을 단 한 줄도 글로 옮겨 적을 수 없는 베른하르트 주인공에게 이제 완전히 고립된 석회공장은 오히려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 이 속에서 고립은 어느 시점에 이르면 콘라드를 질식시키게 하고,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이상 혼자서는 견딜 수 없어 그는 스스로 사람들과의 교제를 찾아서 자기 방을 벗어나고자 한다. 이때 누군가와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에겐 구원이며, 그리고 이런 순간은 계속 반복되어 콘라드는 끊임없이 ‘연구’로 부터 기분전환할 수 있는 다른 일거리를 찾는다. 이는 물론 연구를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 석회공장에는 외부의 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진정한 적은 바로 끊임없이 기분전환을 찾아야 하는 콘라드의 내면속에 있다: “그러나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석회공장 안에서 조차도 계속 기분전환하게 하는 것들이 생긴다. [...] 사실은 모두가 적들이며, 가장 집요한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 하였다. Aber selbst im Kalkwerk, wo beinahe nichts ist, sei dauernde Ablenkung. [...] lauter Feinde im Grunde und der erbittertste Feind sei man sich selbst.”(Kw 69) 이로써 낯선 침입을 대비한 혼란과 경악의 안전율은 다름아닌 콘라드 자신을 가해하는 “자기상해전술Selbstverletzungsstrategie”(Kw 20)로 역전되는 것이다. “사실 그에게는, 콘라드에게는 늘 폭력범죄에 대한 불안이 있다, 그는 [...] 폭력적인 요소들에 대해 계속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데 석회공장은 폭력범죄에 아주 적합한 장소이며 바로 이같은 범죄를 도발시키는 곳이라 하였다 Im Grunde habe er, Konrad, ständig Angst vor Gewaltverbrechen, er existiere in andauernde Furcht vor [...] gewalttätigen Elementen, und das Kalkwerk sei ja geradezu prädestiniert für Gewaltverbrechen, es fordere geradezu zu solchen Verbrechen heraus”(Kw 36). 석회공장에 스며있는 범죄적인 기운은 콘라드의 실패 인식과 더불어 내면의 불안을 죽음으로 부추킨다. “그가 또한 석회공장과 관련하여 그리고 연구와 관련하여 생각하였던 것은 어쨌든 잘못된 것이었다 [...]. 결국 사람은 본능적으로 되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간접적인 강요에 굴복하게 된다 Aber was er auch in bezug auf das Kalkwerk und in bezug auf die Studie gedacht haben mochte, es sei in jedem Falle falsch gewesen [...]. Schließlich folge man instinktiv, gebe man einer indirekten Erpressung der eigenen Personen nach”(Kw 173)고 콘라드는 그의 관리인 비이저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석회공장과의 종말은 콘라드의 꿈을 통하여 시적으로 강하게 시사된다: “갑작스런, 더 자세히 분류할 수 없는 정신이상(긴장병?)이 발작하여 in einem Anfall von plötzlicher, nicht näher klassifizierbarer Verrücktheit (Katatonie?)”(Kw 187) 그는 석회공장의 내부를 온통 검정 페인트로 칠한다. 건물의 꼭대기에서 맨 밑바닥까지 천장이며 벽, 몇가지 가재도구들 역시 빼놓지 않고 모두 검정 페인트로 칠한다. 심지어 그의 부인의 방까지, 그리고는 그곳에 앉아있는 그녀까지도 검정칠을 한다. 석회공장 내부를 완전히 검정 페인트로 칠한 다음 그는 밖에서 석회공장의 문을 잠그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작품에서 사실상의 종말은 그가 그의 아내를 흉기로 살해하는 것으로 끝이 나고, 그는 석회공장 뒷편 분뇨구덩이에서 발견된다. 콘라드가 추구한 평생의 목적지는 석회공장이었지만, 수년간의 체류 결과는 ‘석회공장으로 인한 죽음’이 되고 만 것이다.



III. 파국적 결함의 원인


  “새장이 새를 찾아 나섰다”. 새가 목적을 잃은 방황 속에서 오히려 좁은 새장의 보호에 의하여 추적당하는 카프카 주인공의 삶의 기본구도를 함축하고 있는 이 아포리즘은25)ꡔ집ꡕ과 그리고 마찬가지로 베른하르트의 ꡔ석회공장ꡕ에서 추적망상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문제에 해당한다. 이제 우리는 Bau의 파국적 결함을 건축구조에서가 아니라 이 건물을 직접 설계하여 짓고 그리고 이곳에서 사는 인물이 안고 있는 내면적 문제로 환원시켜 보려 한다. 카프카와 베른하르트의 주인공에 내재된 이 원인의 출발점은 바로 주체가 Bau를 자아의 동질체로 받아들이는 계기에서 발견될 수 있다. 자아와 Bau와의 독립적인 개체성이 확보된 처음에는 주체가 본래부터 의도한 삶의 목표에 충실히 다가설 수 있지만, Bau가 주체의 객관화로 되는 그 순간, 다시 말해 자아와 Bau가 하나되는 그 순간부터 건축설계의 본래 목적인 외부 침입으로부터의 안전율이 완전히 역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주체와 객체간의 간극이 폐지되는 계기는 조켈의 견해를 빌리자면 “자아가 갖는 Bau와의 나르시스적 연대감die narzißtische Verbun- denheit des Ichs mit seinem Bau”26)에 근거한다. Bau를 벗어나와 이로부터 자신의 거리를 유지하려 하지만 들짐승은 이내 평생을 바쳐 이루어 놓은 그의 Bau에 도취되고 만다: “너희들 통로들과 공터들 때문에 그리고 너, 성광장의 의문들 때문에 나는 돌아왔고, 오랫동안 너희들 때문에 두려워 떨고 돌아오기를 주저한 나의 어리석음 후로 나의 삶은 아무 것도 겁낼 것이 없다. 너희들은 나의 것이고 나는 너희들의 것이며 우리는 서로 결합해 있는데,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K 374) 들짐승은 Bau를 단지 그의 “구제의 굴Rettungsloch”(K 372)로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성광장에 높이 쌓인 고기먹이에 둘러싸여서”, “고요하고 텅빈”(K 372) 내부의 분위기에 젖어들 때면 이미 자기 삶을 지킬 확신은 안중에도 없게 된다. 이같은 자기향유의 순간에서 자아와 Bau는 쉽게 일체감을 얻게 되는데, 조켈에 따르면, 들짐승은 Bau를 “그의 작품으로서, 그의 소유물로서, 자기 자신의 확장과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부분으로서” 사랑하며, 바로 이때문에 Bau와 동시에 자아의 메꿀 수 없는 허점과 위험이 생겨난다.27)

  들짐승이 가진 자신도 설명하지 못하는 “죄과Schuld”(K 369)는 바로 이 틈새에서 생긴다. 들짐승은 Bau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하여 스스로 위험한 밖으로 나와 시험굴을 하나 파고서 그 속에 숨어서 Bau를 관찰한다. 그러나 낯선 침입이 없음을 확인하고도 들짐승은 곧바로 이끼층을 들어내어 Bau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그걸 지나쳐 일부러 가시덤불에 처박힌다. 자신의 죄과를 벌주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입구 주위를 맴돌며 마치 “성공적으로 침입하기 위하여 적당한 기회를 염탐하는” “적”의 행세를 한다(K 370). 누군가가 Bau로 들어가는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그의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모두 관찰당하고 있다는 불안과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들짐승의 자기 죄과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응한 자기 처벌은 궁극적으로 “실제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보다 향유와 아름다움, 정적을 우위에 둔”28)Bau의 목적과 이를 위한 완전하고 이상적인 Bau를 통한 나르치스적인 자기애에서 비롯된다.29)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카프카 작품에서 Bau를 둘러싼 시선은 모두 이 속에 사는 주인공인 ‘나’의 내면에 집중되어 있다. “쉭쉭거리는zischen” 소음 역시 외부세계와는 고립된 상태에 있는 들짐승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로서 “항상 숨겨져 있던 들짐승의 실존적 자아”30)의 표출로서 볼 수 있다.31)그러나 위협적인 소음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하여 탐색 발굴하는 과정에서 곳곳을 파헤쳐 놓은 Bau의 내부는 폐허를 방불케 한다. 이때 들짐승 스스로에 의해서 파괴된 Bau의 모습은 다름 아닌 자아의 자기파괴를 형상화한다. 조켈은 카프카의 전기작품과 비교하여32)후기작인 ꡔ집ꡕ에서 이처럼 “자아에 대한 파괴공격”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기주장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추구하는데 있으며, “순수한 자아의 꿈”에 빠져있는 자신에 대한 자기처벌로서 해석한다.33)

  Bau로 인한 자기파멸의 계기는 또한 베른하르트 작품에서도 주인공의 자아속에 내재된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 베른하르트 작품에서 Bau는 외부로 부터의 시선을 엄격히 막고 있을 뿐아니라, 이 구조물속에 사는 주인공의 외적인 관심을 철저히 차단하고 오로지 내적 관조만을 허용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이 Bau가 결과적으로 콘라드 자신이 스스로 빠져든 죽음의 “함정Falle”(Kw 27)이 되고마는 것은 석회공장이 그의 ‘실존’과 ‘연구’ 목적지로 될 수 밖에 없었던 내적 필연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콘라드가 하필이면 허물어져가는 낡은 석회공장을 선택한 이유는 청각에 관한 그의 연구와 그리고 그의 어린시절에 관련된다. 먼저 청각은 “모든 감각기관들 중 가장 철학적인 감각기관”(Kw 66)으로서 완전한 청각은 곧장 인식으로 이어진다. 콘라드는 인식의 필수적 감각기관인 이 청각을 타고났다. “비상하게 민감한 청각”(Kw 23f.)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못 듣는 소리들을 듣는다. 석회공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와 강 저편에서 조그만 소리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하며 대기의 쉼없는 움직임, 그리고 깊은 물속에서의 수많은 소리들까지 감지할 수 있다. 더욱이 내부가 텅 비어 있어 소리가 잘 울리는 석회공장 안에서는 보통 전혀 들리지 않는 소리도 “아주 잘 들을 수 있다”(Kw 24). 이 때문에 석회공장은 청각에 관한 연구를 위해 이상적인 곳이 되며, 남다른 비상한 청각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어려운34)고립한 인물인 콘라드에게 실존의 터전을 마련하여 준다. 그러나 베른하르트의 주인공에게 있어서 소음은 인식을 위한 매체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고통의 원인이 되며 결과적으로 치명적인 혼란과 정신이상을 수반한다. 청각의 실험에서 소음들의 정체는 표면적으로 평온하게 보이는 개별적 자연현상들 뒤에 은닉되어 있다. 베른하르트의 전기 작품에서 소음은 파괴와 해체의 징표로서 파악된다.35)ꡔ석회공장ꡕ에서는 이 파괴와 해체의 소음이 재수용되어 민감한 청각을 바탕으로 그 극복의 시도를 모색하고 있으나, 이 소음은 오직 베른하르트의 주인공에 의해서만 인지되는, 다시 말해 그의 내면에 귀착된 양상으로서36)필연적으로 자기파멸을 초래한다.   

  석회공장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자기파멸의 관점에서 청각에 관한 연구와 인과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콘라드의 어린시절에 있다. 콘라드가 맨 처음으로 석회공장을 본 것은 네 다섯 살 때로 그의 부모와 몇 일 휴가를 보내기 위하여 이곳을 방문한 때였다. 그때 그는 무조건 이 석회공장을 소유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고, 이 소망은 다시금 가족들 틈에서 언제나 혼자 고립되어 있었던 유년과 청소년기, 그리고 그를 거부하는 가족들과의 자연스런 관계를 완전히 잃어버리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연루되어 있다. 콘라드는 그의 부모에게서 언제나 그를 “의기소침하게 하고 반발심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비뚤어지고 타락하게 만들며 파멸시키고야마는”(Kw 48) 본성을 보았다. 이런 부모 밑에서의 어린시절을 마치 “지옥”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콘라드에게 있어서 그의 어린시절은 “깜깜한 어둠”과 “냉기” 그리고 “무자비함”(Kw 48) 그 자체이다. 어린시절은 “적어도 십이삼년간의 금고형Kerkerstrafe”(Ko 234)이며 양친의 집은 “어린시절의 감옥Kinderheitskerker”(Ko 233)이다. 석회공장이 실존의 이상적인 주거지로서 여겨진 이유는 바로 이곳이 그의 어린시절의 이 분위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베른하르트 전기산문에서 Bau는 치명적으로 손상된 어린시절의 복구 모티브와 결합되어 있다. 석회공장에 스며있는 ‘습기’와 ‘냉기’ 그리고 ‘어둠’은 “오직 절망을 뜻할 뿐인”(Kw 171) 주변의 분위기와 작용하여 이 벽구조물을 그 원상태인 ‘감옥’으로의 복구를 완벽히 하며, 동시에 이것은 콘라드 자신의 “어린시절의 감옥”을 재현한 것이기도 하다. 콘라드 내적 문제의 원상태, 즉 어둠과 냉기에 찬 지옥과 감옥의 어린시절을 석회공장에서 형상화시켜 청각에 관한 연구로써 극복하려는 시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석회공장은 완전한 ‘연구Studie’라는 예술적 이상을37)실현하여 이 감옥으로 부터, 다름아닌 콘라드 자신속에 있는 이 감옥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전망 대신 이러한 자아 속에 갇혀 스스로를 파괴하는 베른하르트의 주인공을 보여준다. 파괴와 해체의 외적이고 그리고 내적인 이같은 요인들은 손상된 어린시절의 복구와 청각에 관한 연구의 실현을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보겠다.



IV. 맺는 말


  카프카와 베른하르트 작품에서 공통된 모티브인 Bau는 자아의 시적인 형상화로서 외부세계와 단절된 한 정신적 실존의 파멸을 그리고 있다. 베른하르트 주인공의 경우 자기파멸의 내적 원인에는 주관적인 세계 속에 투영된 외부세계의 해체과정과 부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서로 얽혀 작용하고 있으며, 카프카의 ꡔ집ꡕ에서도 역시 직접적으로 나타나진 않지만 자아가 대립해 있는 객관적인 세계의 층위와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는 내적 문제인 소음의 정체속에 포함되어 있다.38)두 작가에게 있어서 Bau는 내면화된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이 소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카프카의 주인공은 ‘정적’에서 자기향유를, 베른하르트의 주인공은 ‘청각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이 소음을 극복하려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이때 카프카 작품에서 완벽한 Bau의 꿈은 베른하르트 ꡔ석회공장ꡕ에서의 청각에 관한 연구가 지닌 절대성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자아의 실현인 이상적 예술에 대한 구상을 담고 있다. Bau가 ‘자기보전’과 동시에 ‘자기향유’ (카프카),  실존을 위한 ‘거주처’인 동시에 ‘사유의 집’이라는 양립한 두 가지 목적을 전제하면서도 후자쪽으로 비중이 실리는 것은 ‘민감한 청각’이라는 비상한 인식기관을 타고난 주인공의 존재 이유에 근거한다. 따라서 실존의 근거지로서의 Bau는 그 합목적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자아의 실현 대신 죽음으로 이끈다. 자발적으로 찾아 들어가 스스로 세워 올린 Bau가 다름 아닌 자기자신의 감옥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은 이상적인 예술이 하나의 허상임을 드러내고, 글쓰기가 바로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감옥으로부터,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두 작가에 공통적인 추구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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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Der Bau des Ichs:Thomas Bernhard - Franz Kafka


   Ryu, Eun-Hee


   Unter den Autoren in der deutschen Gegenwartsliteratur wird der österreichische Schriftsteller Thomas Bernhard als “einen entschiedenen Erben” von der Kafkaesken Welt angesehen. In dieser Abhandlung wird ein Vergleich angestrebt, der eine Ähnlichkeit zwischen Thomas Bernhard und Franz Kafka beleuchten soll. Dazu nimmt sie den Aspekt des 'Baus', der als die dichterische Gestaltung des Ichs zu verstehen ist. In Kafkas letztem Fragment ꡔBauꡕ und in Bernhards frühem Prosawerk ꡔDas Kalkwerkꡕ hebt sich der Bau in seinem gleichnishaften Charakter ab und veranschaulicht "eine geistige Form der Existenz". Kafkas Protagonist sowie der Bernhards hat in seinem Verhältnis zum Bau einen inneren Widerstreit, der auf dem Doppelzweck des Baus beruht: der Bau steht für die Selbsterhaltung des Ichs, wobei die Sicherheit vor dem fremden Angriff als den wichtigsten Faktor der Baukonstruktion in Erwägung kommt. Aber er dient zugleich zum Selbstgenuß (bei Kafka) bzw. zum Denkgebäude (bei Bernhard), was im Grunde das Selbsterhaltungsprinzip für nichts erklärt. Nun als letzeres läßt sich der Bau in dem Moment, wo das Geräusch die innerliche Stille zerstört, als einen Kerker des Ichs feststellen. Das empfindliche Gehör ist bei beiden Autoren das Vermögen, den Grund des Seins und das absolte ideale Kunstwerk zu erreichen. Jedoch stellt das Leben im Bau einen Vorgang zum Selbstkerker dar, der nirgend anders als in sich selbst ruht. Dieser Vorgang ist es eben, der die ideale Kunst des reinen Ichs zum Schein macht und der das Schreiben bei Kafka sowie bei Bernhard als ein Befreiungsversuch aus seinem Selbst heraus zu erkennen gibt. 



출처: https://lectio.tistory.com/1083?category=272960 [Lectio Div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