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히브리서4:11-13절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에게 “너희 집에 성경 있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럼요, 언니 성경도 있고, 엄마 성경도 있어요”라고 아이가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선생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성경 속에 뭐가 있는 줄 아니?” 이 아이는 자신 있는 듯 “다 알지요. 언니 성경에는 애인 사진하고 꽃잎이 들어 있고요, 엄마 성경에는 돈 삼천 원 하고 부인 회비봉투가 들어있어요”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내 성경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보았더니 작은 요약설교 쪽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성경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성경에 안에 처음부터 하나님이 넣어 놓으신 것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11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먼저 앞부분에“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찌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비록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받는 자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힘쓰며, 자신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절) 받은 구원을 감사하며 성숙시킨다. 그런 말입니다. 힘을 쓴다. 는 말은 헬라어 “스프다소멘”이라는 말인데 열심히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안식에, 다른 말로 영생을 위해서 얼마나 힘을 씁니까? 다른 일로 바쁘다고 말하면서 신앙생활은 하나도 바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힘들게 하면서도 신앙은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힘쓰라, 영원한 것을 위해서 열심을 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스티븐 코비의「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라는 책의 앞부분에는 스티븐 코비와 결혼한 딸의 대화가 나옵니다. 출산 후 아이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자신의 일을 거의 하지 못하는 딸이 말합니다. "아버지, 이 어린아이 하나를 키우느라고 내 할 일을 전혀 못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활용할 기회가 없어요. 이것이 일종의 시간낭비는 아닌가요?" 그때 스티븐 코비가 "시간관리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말아라. 달력은 없애버려라. 그리고 지금 네가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를 돌보는 것을 감사하고, 즐기도록 하여라. 명심해라.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방향이다." 시계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얼마나 시간 관리에만 마음을 빼앗겼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분주하게 살면서 실상은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은 33년의 짧은 인생을 사시면서도 큰 사명은 모두 이루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바쁘기는 한데 무엇 때문인가를 물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분주하고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신앙을 위해서 바쁜 적이 없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시간이 부족한 적은 한 번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안식, 약속의 땅을 향하여 힘을 쓰고 열심을 다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힘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본 절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불순종해서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신앙을 등한히 하고, 힘쓰지 않는 사람은 애급에서 나왔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처럼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사단은 유혹했습니다. 먹는 것으로 유혹해서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했고, 모세의 지도력에 시비를 걸어서 파당을 지었고, 모세가 시내 산에 십계명을 받으러 갔을 때는 애급 사람들이 섬기던 금송아지 아피스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이집트의 황소 신(神)입니다. 여러분 마귀나 귀신의 역사를 아는 방법은 말씀을 거부하고 불순종하는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의 뒤에 사단이 있다고 보면 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사단이 역사를 했고,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사단이 역사했다, 고 말합니다.(1요3:12절) 음란의 귀신에 빠진 소돔 고모라의 멸망을 볼 때 불순종은 개인의 결정이지만 그 런 사람 뒤에 사단이 있어 유혹의 역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에 힘써야 한다는 말씀을 하다가 12-13절에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누구든지 장차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데 그때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것을 감당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겠습니다. 1. 말씀은“살았고”생명이 있습니다. 말이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인격과 권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니, 그 말씀은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더욱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 자체로서 인간을 살리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고,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마 폼필리우스와 아우구스투는 로마의 황제며 현자(賢者)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 탁월한 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법에 신빙성과 영구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것은 신의 영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황제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 책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들이 만든 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지혜롭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들과 그들이 만든 법률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이름도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폭군들과 율법주의자, 그리고 이단에 의해 수많은 위험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계속 존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친히 지키시기 때문에 폭군도, 불신도, 원수도, 이단도 그것을 파괴하지 못합니다. 어떤 번역자나, 출판사도 그것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도시들이 붕괴되고, 나라들이 무너지며, 제국들이 연기처럼 사라져도 주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말씀은 심판대 앞에서 대적자와 불신자 그리고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 앞에 펼쳐지고 그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아무리 불태워 보세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뿌리째 뽑아 버려보세요. 다시 싹이 날 것입니다. 외면하고 먼지 속에 던져 놓아 보세요. 자신이 먼저 먼지가 되고 재가 될 것입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7) 여러분 성경 안에는 살아 있는 생명이 있습니다. 2. 말씀은“운동력이 있어” 힘(力)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받으려면, 그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해야 합니다. 무슨 신비한 환상이나 황홀한 체험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방법은 바로 기록된 말씀을 받아먹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셔서 역사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지식적으로 공부하거나,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 말씀에 대한 사랑과 묵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항상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때 말씀은 능력이 되고 하나님 자신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될 때 말씀이 우리를 자극하여 기도하게 만드십니다. 그때 우리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같아지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말씀을 소홀히 대하는 사람은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가장 위대한 기도의 사람 중 한 사람인 조지 뮬러는 기도할 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기도가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우러나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기도를 일으키시고, 또한 그 기도를 친히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콰피리스탄’ 산지에 사는 종족이 선교사를 찾아왔습니다. 선교사가 준 성경책을 사냥개가 먹었다, 고 호소했습니다. 선교사는 위로하면서 한 권을 더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때 원주민은 고개를 흔들며 불평했습니다. "사냥개가 성경책을 망가뜨린 것보다 성경책이 저희 집 개를 망쳐놓았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지요." "아니, 성경책이 당신의 사냥개를 망쳐놓다니요?" "성경을 먹기 전에 우리 집 개는 정말 사냥 하나는 잘하는 뛰어난 맹견(猛犬)이었지요. 그런데 이제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으니 사냥을 하려고 들지 않을 것 아닙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말씀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씨앗은 작지만 가만히 있지 않고 살아나서 싹이 나고 잎을 피우며 결국 양식이 되고 생명을 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문자가 아닙니다.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을 위로하고 일으켜 세웁니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일어 설수 있는 힘과 능력을 줍니다. 반대로 말씀을 계속 무시하고, 외면하면 당신의 양심은 괴로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운동력이 있어서 선한 사람에게는 축복을 악한 사람에게는 심판을 내리며, 회개를 촉구하고, 죽은 양심이 살아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 말씀 앞에 있습니다. 나를 맡깁니다. 3.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다”라고 하십니다. 칼이요 검(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심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죄를 소멸하는 심판의 불이요 칼이 되어서 물로 노아 시대를, 불로 소돔 고모라를 심판하였습니다. 1912년 4월 10일, 마침내 타이타닉 호는 사우샘프턴 항구를 떠나 처녀항해를 시작했습니다. 4월14일, 타이타닉 호는 거대한 빙산을 향해 가는 동안 위험 지역으로 항해하고 있다는 경고 통신을 다른 배들로부터 여섯 번이나 받았습니다. 먼저‘아티나이’ 호에서 전달된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는 접수되고 5시간이 지나서 알게 됩니다. 다음 메시지는 ‘켈리포니안’ 호에서 전송된 것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선장에게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식사 중인 선장을 방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메사바’ 호에서 전송된 메시지도 선장에게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무선 담당자가 혼자 있어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캘리포니안’ 호에서 보낸 마지막 메시지인데 중간에서 끊기고 말았습니다. 무선 담당자가 자신의 사업에 관한 교신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배 갑판에 높게 위치한 선교(船橋)에서 ‘래파하녹’ 호로부터 램프 불빛을 이용한 모로스 부호를 받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높이 11층에 2200명의 승객을 태운 당시 최대의 유람선 타이타닉 옆을 20만 톤에 달하는 빙산이 배의 후면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얼음 조각이 솥아 져 내렸습니다. 몇몇 승객은 그 얼음 조각을 주워서 음료수에 넣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배의 수면 아래쪽에는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뉴펄랜드 남쪽 500마일 해상에서 타이타닉 호는 홀로 남겨진 채 이렇게 조금씩 바다 속으로 들어가며 마지막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것도 이렇게 큰 비극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 하다니요? 말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게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한다고 12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우리의 전인격을 의미합니다. 관절은 인간의 몸을 지탱해서 뼈와 뼈를 서로 연결 해주는 부위입니다. 그리고 골수는 뼈 안을 채우고 있는 조직입니다. 말씀은 찔러 쪼개고 인간의 지정의를 감찰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밀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당신의 말씀으로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거역하거나 속이려 들지 말고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입니다. 13절을 읽어 봅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은 상관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셈을 하는 자, 주장을 하는 자,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벌거벗은 것같이“드러나느니라” 라는 말은 ‘트라켈리조라는 말이며 이것에 대한 해석 첫째는 레슬링 선수가 상대의 목을 졸라서 그를 바닥에 누르고 있는 상태로 만물이 하나님 앞에 꼼짝 못하고 항복하는 것을 말하고 둘째는 짐승의 가죽을 벗긴 후 그 속을 드러내듯이 만물이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들어 난다는 것이며 셋째로는 옛날에 중 죄인을 끌고 갈 때 칼을 그 턱밑에 묶어서 그가 창피해서 그 얼굴을 감추려고 고개를 숙이지 못하게 하여 죄인의 얼굴을 보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게 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설때 아무 것도 숨길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 있는 지금 말씀으로 사는 것은 이런 불행을 맞아 주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위대한 설교자 D L 무디는 거듭난 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 것을 서약하고 생활했는데 늘 넘어졌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무디는 산으로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기도 중 어떤 때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하늘의 신기한 복들이 자기 심령에 물밀 듯이 쏟아졌습니다. “아, 이제 나는 됐다!”라는 생각을 하고 산을 내려와 살았지만 큰 은혜가 한 달도 가지 못했습니다. 유명한 부흥 목사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부흥집회를 쫓아다니기도 했지만 이 방법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탄식하기를 “나는 화인 맞은 양심인가보다. 성경 속 비유에 나타나는 길가의 마음처럼 씨가 자라지 못하는 마음인가보다”하며 자신을 혐오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펴든 성경에서 로마서 13장 17절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으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무디는 그때로부터 말씀을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고, 이후 그는 전 미국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결론 지구를 돌리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지구가 달을 끌어당기는 데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바다가 파도를 치게 하는 것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그것을 움직이고, 돌리고, 끌어당기려고 한다면 전혀 불가능하고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연에는 이미 프로그램이 되어 있어서 자연히 그것들은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입력하신 것들은 다 이와 같이 엄청나지만 자연스럽게 문제없이 돌아갑니다. 편안하고,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이 약속이 성경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성경을 봅시다. 순종합시다. 가르치고 전합시다.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손을 펴서 핸드폰의 시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세수를 하면서 내 얼굴을 바라봅니다. 옷을 입으면서 넥타이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본당에 올라가서 불을 켜고 강단의자에 앉아서 성경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새벽기도 나온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불이 꺼지고 기도시간이 되면 캄캄한데도 또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교인들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보면 나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고 있는 나를 또 발견합니다. 그리고 집으로 내려오면 7시가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신문을 1시간 바라봅니다. 얼마나 보느냐 하면 집사람이 아침 먹자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입니다. 이렇게 하루는 바라보는 것으로 만들어 집니다. 그리고 낮이 되면 책을 바라보고, 또 안보이던 교인들을 보기위해서 전화도 걸고, 심방도 하고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북반구에 사는 사람들에겐 북극성이 기준 되는 별이지만, 아르헨티나와 같은 남반구에서 기준 별은 남십자성임입니다. 우리를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 속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수술하는 칼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서 기도보다 더 큰 즐거움을 발견한다면, 성경보다 더 좋아하는 책을 발견한다면, 교회보다 더 좋은 장소를 발견한다면, 주님이 베풀어주신 식탁보다 더 좋은 식탁을 발견한다면, 예수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발견한다면, 천국보다 더 좋은 희망을 발견한다면 여러분은 신앙에 경보를 울려야 합니다.” 평생을 말씀과 기도로 살았던 죤 워너메이커의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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