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요12:12~19> 12 이튿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를 맞으러 나가서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14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의 말씀과 같았다. 15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오신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16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며, 또 기록된 그대로 사람들이 예수에게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17 또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일어난 그 일을 증언하였다. 18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께서 이런 표적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19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란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 들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요12:12~13> 12 이튿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를 맞으러 나가서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를 외쳤습니다.
1) 호산나!
2)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3)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종려주일은 종려나무를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예배하시면서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함께 들을 하나님의 말씀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란 모르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전은 깨달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모르고 있던 사물의 본질이나 진리 따위의 숨은 참뜻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됨>. 그리스 사람들은 이 깨달음의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냥 순차대로 흘러가는 평범한 시간에 비하여 하늘로부터 지금 여기 서 있는 나에게로 엄습해오는 특별한 시간의 도래를 카이로스라고 불렀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모르고 있던 그 무엇인가가 확 깨달아지는 순간의 시간>입니다. 믿음을 갖는 것은 깨달음을 얻어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상시에 별 생각 없이 살아가다가 어는 순간 삶의 가치를 생각할 수 있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분주하게 지나치기만 하다가 갑자기 멈추어 서서 풀 한포기를 바라보며 생명의 위대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깨달음이란 어느 날 갑자기 어느 한 순간에 다가오는 하늘의 시간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 깨달음의 시간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1. 깨달음이 없었던 무리들
종려주일에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깨달음이 없었던 무리들의 흔들림과 어리석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영접한 무리들은 불과 나흘 만에 <환영하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예수님을 십자가게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죽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심지어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흉악범인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음모꾼들의 흉계와 선동에 휘말려 부화뇌동했습니다.
<막15:11~15>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무리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떻게 이리도 마음이 쉽게 흔들렸을까?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예루살렘의 무리들은 처음에는 깨달음이 없었고 뒤늦게야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하신 그대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적어도 이 때 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남깁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12:16>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며, 또 기록된 그대로 사람들이 예수에게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말씀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왜 호산나를 하는지도 모르고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자신들이 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는지도 모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뒤늦게 성경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이 없는 신앙은 우왕좌왕, 갈팡질팡, 좌충우돌 하며 흔들리고 어릭석은 결정을 내립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죽이기도 합니다. 무리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자들의 선동에 동조하게 됩니다.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됩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른 채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고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종교가 가장 위험할 때는 <깨달음>없이 형식과 조직으로만 운영될 때입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기독교가 종교의 형식과 종교의 조직으로만 유지되면 기독교가 전파하는 하나님을 죽일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2. 예수님과 무리들의 엇갈림 : 구원관과 천국관의 충돌
예수님과 무리들의 엇갈림이 있습니다. 마주치는 충돌과 긴장이 있습니다. 무리들의 외침 속에 함축된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전하시는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와 달랐습니다. 한 마디로 무리와 예수님 사이에는 생각의 차이가 있었고 가치의 충돌이 있었고 깨달음의 엇갈림이 있었습니다. 이 엇갈림은 예수님이 죽으실 때까지 계속 됩니다. 가롯유다의 착각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십자가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를 잘 드러내줍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눅23: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들을 용서해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극을 만들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무리들처럼 그리스도를 죽이기까지 합니다. 자기의 열정만 믿었던 가룟유다도, 바라바를 살려주고 예수님을 못 박으라는 군중들도,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떠밀려 재판하고 서명한 관리들도 잘 몰랐습니다. 자기들이 죽이고 있는 예수가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자신이 하는 짓이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하나님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던 자들은 자기들이 죽이고 있는 예수가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무리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이런 엇갈림이 있었습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생각이 엇갈리고 내용도 실체도 엇갈립니다. 무리들이 원하는 메시야, 무리들이 원하는 호산나의 실체, 무리들이 원하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무리들이 원하는 이스라엘의 왕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관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달랐습니다.
어쩜 가롯유다도,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달라서 예수님을 포기했는지도 모릅니다. 가롯유다가 속한 열심당은 유대 독립을 지향하는 정치적인 집단이라 자의식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집단이라 자기 생각에만 천착해서 예수님을 오판한 것 같습니다. 가롯유다가 뒤늦게 후회한 것을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마27:3~5>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3. 종려나무의 깨달음 ① : 승리와 부활
종려주일은 우리에게 특별한 깨달음을 줍니다. 승리와 부활의 깨달음입니다. 종려나무는 부활과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종려주일의 행적을 보도하는 성경본문에 나사로의 소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나사로의 살아남을 본 사람들의 증언을 들으면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하여 종려주일의 의미가 <승리와 부활>에 있음을 강력하게 계시해주고 있습니다.
종려주일은 <승리와 부활>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영접한 주일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던 사람들은 이 <승리와 부활>의 의미를 알았어야 합니다. 종려주일 기사에 덧붙여진 성경은 <나사로의 소생>이야기입니다.
<요12: 17~18> 17 또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일어난 그 일을 증언하였다. 18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께서 이런 표적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종려나무는 대추야자를 말하는데 죽지 않는 나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종려나무는 대추야자를 말합니다. 영어로는 Date palm이라고 하고 히브리어로는 타마르 (תמר)입니다. 그리고 대추야자의 학명은 <Phoenix dactylifera Linn>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듯이 Phoenix라는 말은 불사조를 뜻하는 그리스어 φοινιξ(포이닉스)에서 왔습니다. 북 아프리카의 사하라에서 지중해 연안의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고온 지역에 서식하는 대추야자는 학명에 들어 있는 말에서 보듯이 죽지 않는 불사의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꽃말도 <승리와 부활>입니다.
이 대추야자는 불에 태워서 죽여도 다시 싹이 나오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불사조를 연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강인하게 살아남는 것을 보고 유럽 사람들은 종려나무가 가득한 가나안 지역 곧 페닉스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페니키아라고 불렀다고도 전해집니다. 이처럼 종려주일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이 승리의 의미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던 유대 민족에게 종려나무는 승리를 염원하는 민족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유대 국가의 독립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동전에는 종려나무가 들어 있습니다. 반대로 유대를 정복한 로마도 기념주화에 종려나무를 넣었습니다. 주후 70년에 마사다 전투를 승리함으로 유대를 정복한 로마는 반란군 진압의 기념으로 동전을 발행하면서 종려나무를 넣었는데, 종려나무와 종려나무를 등지고 있는 유대인 여자를 새겨 넣고는 <Judea Capta! 유대 정복되다>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유대 정복자인 로마에는 승리의 상징으로 종려나무를 새겨 넣고, 정복당한 유대에게는 패배의 상징으로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를 등진 문양을 넣었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가 세운 헤롯 가계의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불에 탄 종려나무 가지 같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승리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유대가 승리하고 다시 부활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처럼 종려나무는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의 승리와 독립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흔들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삼일절에 태극기를 흔들던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무리들은 이런 <승리와 부활>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했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며 환영하였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며 환영하였습니다. 이런 환영의 모습은 유대인들의 오랜 신앙에서 유래합니다. 호산나는 시편 118편 25절에 나오는 기도 성구로 <지금 우리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호산나는 히브리어로 <호쉬아 나>입니다. <지금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문입니다.
<시118:25> 25 주님, 간구합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 간구합니다. 나를 건져내 주십시오.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구원인 승리와 부활을 간구하는 기도의 나무이기도 합니다. 호산나의 뜻이 <지금 구원하옵소서> 라는 뜻입니다. 종려주일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모습은 초막절에 아르바 미님이라는 네 가지의 식물을 흔들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네 가지의 식물 중하나가 종려나무입니다. (시118:25)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번제단을 돌 때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칩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 첫 날에 <종려나무와 아름다운 실과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버들>을 취하여 하나님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합니다.(레23:40) 이 때의 네 가지 식물을 <아르바 미님>이라고 부릅니다.
4. 종려나무의 깨달음② : 하나님의 나라의 풍요로움
종려나무는 <승리와 부활>을 상징하고, 또 승리와 부활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하나님의 나라의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승리와 부활이 있은 후 맞이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복된 상징이 종려나무입니다. 이는 종려나무가 성경에서 갖는 다양한 의미 때문입니다. 종려나무는 안식과 정착의 상징이고, 다산과 아름다움의 상징이고, 정직과 공의의 상징이고, 젖과 꿀이 상징이며, 풍요로운 도시의 상징입니다.
1) 안식과 정착
종려나무는 무성한 숲과 물가에서 누리는 안식과 정착을 의미합니다. 출애굽 백성은 광야를 헤매다가 종려나무 70주가 있고 물 샘 열둘이 있는 종려나무 숲인 엘림에 이르러 안식과 쉼을 얻어 정착합니다.(출애굽기 15,27) 물과 그늘이 귀한 광야를 지날 때 오아시스를 이루는 종려나무 숲은 쉼을 누리는 좋은 안식처이며 정착촌입니다. 사막을 지나는 사람들은 종려나무 숲에서 물과 쉼을 얻습니다. 중세의 랍비 마이모니데스가 종려나무를 광야 40년을 상징한다고 말한 것도 이 <안식과 정착> 때문입니다.
2) 다산과 아름다움
종려나무는 그 열매가 많이 열리기 때문에 다산을 상징하고 그 모습이 보기에 좋아서 아름다움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의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다말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종려나무를 뜻하는 타마르(תמר)에서 유래합니다. 유다의 아들 에르의 아내가 다말이었고(창세기 38:6), 압살롬의 누이와 딸이 다말이었습니다. 이복형제인 암논이 그를 짝사랑한 나머지 병에 걸릴 정도로 절세의 미인이었습다.(사무엘하 13:1 ; 14:27) 아가서에서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아가서 7장7절) 이 때문에 대추야자는 유대인들에게 미인을 상징하는 나무로 알려지기도 합니다.
3) 정직과 공의
종려나무는 정직과 공의를 상징하며 의인을 상징합니다. 여자 사사였던 드보라는 종려나무 아래서 재판을 했는데 이는 이 나무가 정직과 공의의 상징으로 정직하고 공정한 재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삿4:4) 그리고 종려나무는 의인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시92:12~15> 12 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높이 치솟을 것이다. 13 주의 집에 뿌리를 내렸으니,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크게 번성할 것이다. 14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 15 그래서 나는 선포할 것이다. "주님은 올곧으시다. 그는 나의 반석이시요, 그에게는 불의가 없으시다
4) 가나안의 꿀
종려나무는 가나안의 꿀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최근의 성경학자들은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꿀이 대추야자라는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가나안의 꿀은 대추야자의 열매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대추야자를 말리면 당분이 아주 많아서꿀과 같다는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추야자를 말린 것 두 개면 하루 먹을 당분으로 족하다고 합니다. 벌꿀이나 석청이 아니라 대추 야자를 건조하면 당도가 높아서 꿀과 같다는 것입니다.
5) 풍요로움의 도시
대추야자는 풍요로움을 상징하고 발달된 도시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대추야자는 가나안 지역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풍요로운 나무이기에, 종려나무가 무성한 곳에는 도시가 발달하여 도시의 이름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아모리족이 살던 하사손 다말(창세기 14:7)은 '대추야자의 계곡'이라는 뜻이고, 옛 전적지인 바알다말(사사기 20:33)은 '대추야자의 성소'를 뜻합니다.
그 중에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종려나무의 성읍으로 알려진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는 '종려나무 성읍으로 대추야자의 도시'라는 뜻이다.(신명기 34:3 , 사사기 1:16, 3:13, 역대기하 28:25). 여리고는 로마의 황제 싸움에도 등장합니다. 로마의 권력자 안토니우스는 부인 옥타비안과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면서 여리고의 대추야자 농장을 선물로 주었는데, 전처의 오빠인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하여 승리한 후 여리고의 대추야자 농장을 빼앗아 헤롯에게 줍니다.
이런 모든 종려나무의 상징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누림>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가 무리들이 원하던 하나님 나라와는 달랐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함과 풍요로움은 종려나무가 가지고 있는 의미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5. 깨달음을 얻는 길
이제 마지막으로 묵상할 말씀은 <깨달음을 얻는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에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알 수 있고, 예수님이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하신 그 길을 기게 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성령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임재가 갖고 있는 의미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이런 깨달음의 느낌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했다는 것은 그 순간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시오 구원자이심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그 때,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기까지는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동가식서가숙하면서 늘 같이 다녔어도 예수님이 죽는 순간에는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설명한 부활도 믿을 수 없어서 무덤에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여 불의 혀 같이 임하는 순간 모든 것이 확실하게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자 거리로 나가 담대하게 외쳤습니다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들에게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행2:14~16>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서,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엄숙하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15 지금은 아침 아홉 시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16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불교는 고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어가고, 유교는 사서삼경과 주역의 원리를 배우고 조상 제사를 드리면서 깨달음을 얻어간다고들 말합니다. 또 선을 추구하는 참선자들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연주의자들은 길가에 피어있는 풀 한포기도 깊은 관심으로 바라보며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독교의 깨달음을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성령님의 임재를 구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령의 해방과 성령의 증언을 소개합니다. 성령의 법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합니다.
<롬1:1~2>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1)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 성령은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한다는 말씀입니다.
<롬8:16~14> 14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성령의 기능 가운데 가장 큰 기능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전12:2~3> 2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은 이방 사람으로 있을 때에는, 이리저리 끄는 대로, 말 못하는 우상 앞으로 끌려 다녔습니다. 3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으로 감동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종려주일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시고 고난 주간을 믿음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부활과 승리의 주님이심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 됨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성령을 체험하면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으며, 성령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한주간도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넉넉히 이기시는 믿음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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