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민주주의는 핵심가치로 평등을 지향하나 결과는 ‘하향평준화’ 초래
서유럽 국가들 ‘사회주의 이념’ 포기했는데 문재인 정부는 뒤늦게 지향
인간 본성에 반하는 사회주의 - ‘조국의 위선과 거짓말의 원인이 됐다’
“대한민국 헌법의 틀 하에서 사회주의적 정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유주의자인 동시에 사회주의자입니다. 경제민주화, 토지공개념 등등은 이론적으로 보면 사회주의 정책의 하나라고 그렇게 봅니다.”(9월6일 법무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조국의 답변 내용)
법무장관 조국이 ‘사회주의자’임을 밝히며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드높였다. 그는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모순되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과연 그럴까.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갖는 모순을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그 위험성을 경시하는 것 같다. 사회주의로 인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헌정체제가 크게 흔들리고 우리 안보와 경제에도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불어 닥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텐데 심히 우려된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두 요소가 금세기 인류 역사의 형태를 결정했다. 하나는 자연과학과 기술의 발달이다. 다른 하나는 실질적으로 전 인류의 삶을 변화시켜온 거대한 이데올로기 폭풍이다. 러시아 혁명, 좌파의 전체주의와 우파의 파시즘,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등등”
이사야 벌린의 말대로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다. 이데올로기란 ‘일관되고 포괄적인 이념의 체계’를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설명하고 평가하면서 세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결정하도록 돕는다. 개인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인생관과 인생철학이 되고, 국가의 이데올리기는 국가가 나아가는 방향이 된다.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공한다. 성장이 먼저인가 아니면 성장을 포기하더라도 평등이 먼저인가? 빈부 격차는 바람직한가? 경제적 불평등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경제 불황은 정상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경제체제가 잘못된 탓인가? 완전고용은 이상인가 몽상인가? 전쟁은 피해야 할 악인가 아니면 어떤 전쟁은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모든 이데올로기는 저마다 자유를 지켜주며 자유를 확장시켜준다고 주장한다. 자유를 증진시켜주지 못하는 사회를 비난하고 자신의 이데올로기만이 자유를 보장해준다고 선전한다. 문제는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이 생각하는 자유가 다르다는 데 있다.
자유주의자는 모든 삶의 측면에서 ‘개인의 자유’에 최우선 가치를 둔다. 반면에 사회주의자는 정치적 자유를 존중하되 ‘경제적 불평등 즉 부자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면서 평등을 지향한다. 공산주의자 즉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특정한 계급, 즉 노동계급의 자유에 초점을 맞추므로 개인의 자유가 희미해진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스스로가 ‘민주주의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를 ‘인민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하나의 ‘이상(ideal)’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현대 정치에서 민주주의는 매우 인기 있는 단어가 됐다.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방식도 나라마다 다르다. 덕분에 민주주의는 속임수나 위선과도 연결됐다. 과거 동독은 독일민주주의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이었고,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이다.
현대 세계에서 민주주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 인민민주주의(공산주의)가 그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됐으며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강조한다. 자유주의 하에서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통치’를 의미하지만, 이 통치의 본질적인 부분에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보호가 포함된다. 다수 권력에 대한 제한, 즉 다수가 개인이나 소수의 기본적인 자유를 빼앗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깔려 있다. 여기에는 종교의 자유, 공직 출마의 자유, 자신의 소유에 대한 권리(재산권)가 기본적으로 인정된다.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의 핵심은 평등, 즉 사회와 정부에서 평등한 권력이 핵심가치가 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유민주주의가 가난한 자와 노동계급을 부자들의 손아귀에 맡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부자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하다. 이들은 현대세계에서 ‘돈은 권력의 중요한 근원’이며, 부를 가진 사람들이 공직 진출이나 정부 정책에도 더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고 파악한다. 당연히 이러한 특혜는 결코 민주적이지 않은 만큼, 정치적으로 ‘1인 1표’를 인정하더라도 경제적 권력을 평등하게 나눠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평등한 영향력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회민주주의는 평등을 증진시키기 위해 부의 재분배, 천연자원과 주요 사업의 공적인 통제, 노동계층의 기업 통제 등을 요구한다. 그들은 ‘부의 거대한 불평등’ 하에서는 대부분의 인민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정치적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다. (조국이 말한 경제민주화나 토지공개념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인민민주주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나타났던 것으로 여기서 보통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 혹은 노동계급이며, 정부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통치할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성취된다고 생각한다.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는 노동계급을 착취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과 부를 사용했던 자본가 계급 혹은 부르주아를 제거하는 데 있다. 인민민주주의는 계급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과도기에 ‘공산당이 대신 통치하는 형태’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국가 자체가 소멸하는 미래 공산주의의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해 인민들을 준비시킨다. 그 과도기에 인민민주주의는 다수 노동계급을 위해 공산당이 대신 통치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정부가 ‘인민민주전정, 인민의 민주주의적 독재’라고 설명했으며, 중국이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 독재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공산당이 언제 독재를 그만둘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세 가지 형태를 보면 ‘경제적 불평등의 개선’을 도모하는 사회민주주의도 언뜻 보기에 나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며, 오히려 세상을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저소득층의 소득을 개선시키기 위해 ‘부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은 고소득층으로부터 무언가를 빼앗는 행위를 수반한다. 이러한 대책은 저소득층의 조건을 개선시키지 못하면서 고소득층의 상황을 악화시켜 전체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을 낮은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경향 즉 하향평준화의 경향을 보인다. 평등이라는 명목에서 채택된 평준화 계획은 오히려 ‘사회적, 경제적 침체’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모순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과거 사회주의에 기울었던 서유럽 국가들도 지금 생각을 확 바꿨다. (이런 낡은 생각이 한국에서 먹힌다는 게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이라는 측면에서 인간 본성에 반한다. 부자를 미워한다면 ‘그럼 가난해지세요!’라는 말이 통해야 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사회민주주의는 특히 ‘이익의 개인화, 손실의 사회화’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현실에 적용하다보면 온통 말썽만 일으킨다. 사람들은 전체적인 대의를 말할 때는 경제적 여건의 평등, 교육 여건의 평등을 강조하지만,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개인의 이익을 가급적 늘리고, 자신의 자녀들은 명문고와 명문대를 보내고 싶어 한다. ‘사회주의자 조국’은 자신의 삶에서 이러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줬고 사람들은 그 위선과 거짓말에 분노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비난했던 자칭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모습,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대체하기 위해 취한 좌파 사회주의정책에 대한 얘기는 다음 글에서 설명할 예정이다)
소련 중국 북한의 위선 ‘겉으로 혁명 외치고, 속으로 자본주의 사치 누려’
문재인의 조국 임명, 불의와 불공정보다 ‘우리 편이 우선’이라는 권력의 속성 보여줘
조국의 사회주의 옹호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대한민국’에 커다란 위험 요소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약점(?)을 물고 늘어진다. 자본주의 즉 자유시장경제가 경제적 풍요를 안겨줬지만, 동시에 불평등과 격차라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에서 모두가 행복해지기는 불가능한 만큼 사회주의와 복지국가를 만들어야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사회주의자들은 ‘경제 권력의 평등화’를 도모했다. ‘돈이 곧 권력’이므로 ‘부의 거대한 불평등’이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시각을 갖고, 부의 창출보다는 부의 분배에 집중했다. 그들은 토지와 공장 등 생산수단을 공유하고 협동으로 생산하는 체제 건설을 시도했다. 경쟁사회가 아니라 협동사회를 통해서 불평등과 격차를 바로잡자는 의도였다.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사회주의는 자유를 억압하고 경제를 망가뜨렸다. 윈스턴 처칠은 이를 두고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폐해는 풍요의 불평등한 분배이지만, 사회주의의 태생적 미덕은 가난의 평등한 분배다.’라고 꼬집었다.
사회주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해졌을까 불행해졌을까? 사회주의 체제를 택한 나라들을 보면 극히 일부 지배층만 대대로 특권을 누렸고, 나머지 사람들 대부분은 불행한 삶을 보내야했다. 자본주의가 소득을 기준으로 한 계층사회라면, 사회주의는 권력을 기준으로 한 계급사회가 되었다. 정치와 경제에서 평등을 추구했는데, 역설적으로 더욱 불평등한 사회가 되는 모순이 발생했다. 왜 그러한 일이 벌어졌을까?
정치권력은 역사에서 오랫동안 경제권력을 지배했다. 동양권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원리 속에서 황제와 선비계급이 모든 권력을 향유했다. 서양에서도 왕과 교회가 지배층이 되어 농민과 상인을 다스렸다. 정치권력은 자유민주주의 도입과 함께 점차 약해졌다.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을 기점으로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에 간섭할 수 있는 힘이 크게 줄었다.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창의력이 보호를 받았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발전한 데는 이처럼 ‘약해진 정치권력’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때로는 견제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균형을 잡아갔다. 그 결과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꿈꾼 사회주의자들은 경제권력에 대한 통제를 꿈꿨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경제는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 프랑스 심리학자인 귀스타브 르봉은 1896년 출간한 <사회주의 심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사회주의가 핍박 없는 모두가 잘사는 평등사회를 주창하지만, 사회 발전 원동력인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억압하기 때문에 결국 핍박과 빈곤을 낳게 된다.” 르봉의 진단 이후 21년만인 1917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국가인 소련이 탄생했고, 소련을 포함해 사회주의 국가들은 르봉의 예언을 현실화시켰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예외 없이 빈곤한 계급사회가 됐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속성을 신랄하게 지적한 선구자로 밀로빌 질라스가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정치가이자 작가인 그는 1956년 <신계급(The New Class)>에서 공산당 지배계급을 자본가나 지주들과 똑같은 기생충처럼 착취하고 특권을 누리는 신계급으로 묘사했다. 공산당 지배계급은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국가의 부를 공산당 지배계급의 개인 소유물로 여기고 행동한다’고 강조한 것. 다른 책에서는 이렇게 썼다. “공산혁명 이전에 귀족이 갖고 있던 별장에서 만찬을 하는데, 귀족의 시종이었던 노인이 여전히 시종 노릇을 하고 있었다. 변한 것은 별장 주인의 얼굴뿐이었다.”
러시아 혁명과 그에 따른 내전으로 소련에서는 수백만 명이 전쟁이나 기근으로 죽었다. 귀족과 중산층,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공산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라를 떠나면서 인적자본에 엄청난 손실이 발생했다. 점차 국가가 안정되자 소련은 유토피아 건설에 착수했다. 레닌과 스탈린의 주도하에 소련은 ‘문맹 농민들의 사회’에서 ‘엔지니어의 사회’로 변모했다. 그 시절 공산당에 새로 유입된 출세제일주의자들과 공장 밑바닥에서부터 승진해 올라온 '비드비젠치(발탁자들)'가 소비에트 관료자리를 꿰차며 스탈린 체제의 강력한 지지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소련 체제의 건설기와 국가 위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활약하여 조국 근대화와 전쟁 승리에 이바지했다. 당시에는 대체로 20대, 30대의 젊은 나이였다.
문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발생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정치권력이 고위직들의 자녀로 세습된 것이다. 공산당 간부와 농민, 광부들은 전혀 다른 사회적 자본과 교육 기회, 생활 조건하에 놓인 것이다. 당간부의 아들은 당간부가 되고 광부의 아들은 광부가 된 것. 소련 사회는 ‘노멘클라투라의 세상’이 되었다. 노멘클라투라는 원래 간부 명단이었으나 나중에 공산당 간부 전체를 의미하게 되었고, 이들은 1970년대 이후 복지부동의 부채집단으로 변모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활용했다. 그들은 공식석상에서는 자본주의 세력에 맞서 노동자 농민의 혁명을 수호해야한다고 말했지만,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자본주의 세계의 사치품을 수입하고 즐겼다. 취미부터가 외국산 수입차와 고급 사치품 쇼핑이었다. 한 감찰관이 공산당 간부를 모아놓고 왼손을 들라고 하니 모두 금빛 번쩍이는 롤렉스 시계를 차고 있을 정도였다. 소련 인민들이 국내나 동유럽 단체 관광을 갈 때, 노멘클라투라의 자녀들은 미국과 서유럽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며 윤택한 삶을 즐겼다.
1991년 소련이 붕괴했을 때 젊은 노멘클라투라들은 뛰어난 인적네트워크와 국가 재산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과 정보가 있었다. 그들은 국가 재산을 외국에 팔거나 헐값에 인수하여 엄청난 재산을 쌓았고 ‘올리가르히라는 새로운 특권층이 되었다. 약 150여 명에 이르는 올리가르히가 러시아 전체 부(富)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될 정도다. 그들은 잘난 부모 덕택에 누릴 수 있었던 ‘고등교육과 인적네트워크’를 통해 부의 세습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권력 유지’를 국민 복지보다 우선순위에 뒀다. 정치권력을 거머쥠으로써 부를 쌓고 권력도 세습할 수 있었다. 현재 중국 최고권력자인 시진핑은 권력자들의 자녀를 뜻하는 태자당의 대표주자로서 현 위치까지 올라왔다. 태자당 젊은이들은 권력층에 진입하거나 수십억 달러의 갑부로서 흥청대는 삶을 즐긴다.
2013년 당시 중국 상무위원 9명 중 5명의 자녀가 미국 사립대에 다닌 것으로 나타났다. 연간 수십만 달러의 학비를 거리낌 없이 써댄 것이다. 소련에서 나타난 것처럼 서구체제를 비판하면서 자녀를 해외로 보내는 이중성을 보인 것이다. 이들은 미국 내 인맥이 ‘권력 먹이사슬의 꼭대기를 보장하는 증표’로 인식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딸인 시밍쩌도 하버드대를 다녔다.
중국 공산당의 대표적인 위선 정치인으로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가 꼽히기도 했다. 그는 팔소매가 해진 낡은 잠바를 입고 바닥에 구멍이 난 구두를 신고 다니는 ‘대표적인 청빈 정치인’으로 많은 중국인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다가 2012년 10월 미국 뉴욕타임스에 원자바오 일가의 재산이 무려 27억 달러(약 3조 원)에 달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중국의 권력자들이 권력뿐만 아니라 돈까지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이 곧 돈’이라는 공산당 특유의 독재 권력구조 덕분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세상에서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간 경쟁과 협력이 교차하는데 비해, 사회주의 세상에서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일체화’가 이뤄졌던 것이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보다 더한 계급사회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9월 15만 평양 시민들에게 직접 연설을 하면서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사실 대통령이 본 사람들은 북한의 대표적인 특권계층이었다. 북한에서 선택된 사람들이 아니면 평양에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북한이야말로 ‘정치권력이 경제를 포함한 모든 권력 그 자체’를 의미하므로 최고권력자인 중앙당 간부들이 당연히 최대 부자가 되는 사회가 되었다. 권력서열이 높아야 평양의 고급아파트촌에 들어갈 수 있고, 사치품을 구매하거나 집에 비치할 수 있는 게 북한의 현실이다. 북한의 빈부격차는 대한민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한 것도 현실이다.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흔히 자본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흙수저들’은 늘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사람보다 돈 먼저인 세상’을 만들기 때문에 제한을 가해야한다는 것. 조국 법무장관이 청문회에서 ‘경제민주화나 토지공개념’을 얘기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존재하고 번영하려면 ‘국가의 지배, 즉 공권력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 공권력이 비대해지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를 받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력 집중 혹은 경제권력의 비대화’를 걱정하지만, 더 우려하고 절대적으로 막아야 할 부분은 사회주의가 시도했던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일체화’이다. 이러한 사회주의의 사악한 본질을 소련 중국 북한 등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역사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특히 사람들은 권력의 속성이란 이념이나 성향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우리 편’만 챙긴다는 사실을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법무장관을 임명하면서 “기회의 공정을 해치는 제도를 개혁하겠다”고 말했다. 일반 시민들의 시각에서 볼 때, 아빠가 서울대 교수를 하니 그곳에서 장학금을 받고, 엄마가 동양대에 있으니 그 곳에서 연구보조원으로 등록해 급여를 받은 것은 대표적인 ‘불의와 불공정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권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모든 것도 ‘조국은 우리 편’이라는 사실 앞에서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했을 것이다.
최성해 동양대 총장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조국 법무장관을 이렇게 평가했다. "아내가 구속돼도 장관 하겠다고 하니 권력을 위한 냉혈한이다. 보통 자신이 다치면 몰라도 가족이 다치면 포기한다."
이처럼 여러 측면을 고려할 때, ‘사회주의자 조국’의 권력에 대한 광기어린 집착과 사회주의 옹호는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하에서 번영해온 대한민국에 ‘커다란 위험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상민 칼럼니스트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공격하며 사회주의 세상에서 살지 않으려는 위선의 삶
중국과 인도의 극빈층이 줄어든 것은 사회주의 버리고 자유시장경제를 택한 덕분
자본주의 혜택을 누린 조국 “푼돈까지 챙기는 사회주의자” “조국은 민중처럼 살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끝이 임박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는 2013년 이러한 주장을 폈다. 그는 1990년대 이후 자본주의가 ‘존재의 가을’에 들어섰으며 ‘착취와 저임금’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가 끝이 있는 체제이므로 언젠가 역사적 사회주의로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다. 월러스틴이 전 세계를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라고 나눈 ‘세계체제론’은 386 운동권세대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월러스틴의 영향을 받아 통일문제를 강조하는 분단체제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월러스틴의 말은 현실화됐을까. 세상을 볼 때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으나 항상 팩트(사실)를 신성시하는 냉철함이 필요하다. <팩트풀니스>의 저자인 한스 로슬링은 “세상은 해를 거듭하며 조금씩 나아진다. 이것이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이다”고 강조했다.
<팩트풀니스>에 따르면 전 세계인들의 설문조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계 인구의 50% 이상이 저소득 국가에 산다’고 응답했지만, 실제로 하루 소득 2달러 이하의 저소득 국가에 사는 인구비율은 9%에 불과하다. 세계 인구의 75%는 저소득도 고소득도 아닌 ‘중간소득 국가(하루 2~32달러)’에 산다. 1800년 당시 인류의 85%가 저소득 극빈층이고 기대수명이 평균 30세였지만, 2017년 기준으로 9%만이 극빈층으로 남고 기대수명은 72세가 됐다. 시장경제를 도입한 중국에서 극빈층 비율이 0.7%로 떨어지고, 사회주의 사고방식을 벗어던지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해 급성장을 이룬 인도에서 극빈층 비율이 12%로 하락한 덕분이다. ‘빈곤은 인류가 겪은 고통의 근원’이었는데, 이를 타파한 게 사회주의자들이 그렇게 싫어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였다.
월러스틴이 말한 ‘자본주의의 종말’은 대표적인 거짓 예언이었다. 몽상가인 월러스틴은 비현실적인 얘기만 늘어놓다가 자본주의의 종말도 보지 못한 채 2019년 8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국내에서도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인문학 강연을 하며 인기를 끌었던 인사의 말을 들어보자.
“자본주의의 원리는 딱 하나입니다. 무조건 돈을 가진 사람이 우월한 지위를 확보합니다. 자본주의를 통제하지 못하면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모두가 노예로 살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현실입니다.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취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물건을 구매하지 않으면 됩니다.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공식은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고 지켜나가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생산소비협동조합 같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필자가 쓴 <이기적 국민> 발췌, 이 말을 한 사람은 요즘 거짓말이 모두 들통이 난 듯 조용하다)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돈을 최고로 아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자본은 곧 돈’이라고 생각하는 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자본주의는 미래에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자원의 일부를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인간이 창조적 재능과 에너지를 발휘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이다. 경제, 사회, 법과 제도 등을 포괄하는 문화시스템으로서 단순한 물질주의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돈을 숭배하고 물질을 찬양하며 자기 것만 챙기는 천박한 시스템’으로 이해했다. 그렇게 천박한 시스템은 당연히 오래갈 수 없기에 ‘자본주의는 곧 멸망하리라’는 예언을 쏟아냈고, 저주의 예언은 자본주의가 출현한 이후 계속 이어졌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우리가 가진 돈은 자유의 도구요, 우리가 좇는 돈은 예속의 도구다”라며 사실상 자본주의를 비난했다. 이 문장은 앞뒤가 맞지 않다. 우리가 돈을 가지려면 먼저 돈을 좇아야하는데 그걸 예속이라고 규정하며 비난하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주의자인 프루동은 사적 소유를 비난하면서 “사유재산은 도둑질”이라는 표현을 썼다.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 발표한 <공산당선언>에 잘 녹아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단순화시키면서 계급, 적대, 투쟁, 착취 등의 섬뜩한 단어를 나열했다. 세상사는 매우 복잡하기 마련인데 단순화의 폐해는 말하지 않고, 오로지 모든 게 자본의 탓이며 자본가는 타도의 대상이라고 선언했다. 다른 의견은 모두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반동들의 헛소리일 뿐이라는 지극히 교조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반(反)자본주의를 부르짖는 마르크스의 후예들은 오늘날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한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반대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비판하고, 예고한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는 지성인, 세상의 진실을 알아보고 비판하는 행동하는 지식인, 미래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예언가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세상의 모든 나쁜 현상은 자본주의 탓이라고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말이야말로 후세에게 ‘진리이자 꼭 실천해야 할 프로그램’이라고 역설한다. ‘돈을 멀리하라. 물질을 숭배하는 자본주의를 멀리하라’는 그들의 말은 ‘미래에 대한 혜안이자 전략’이라고 각광받는다.
반(反)자본주의를 역설하는 사람들 중 예컨대 슬로베니아 출신인 슬라보예 지젝은 ‘자본주의가 만든 현대 물질주의’를 비판하며 세상을 모두 아는 것처럼 말한다. 앞서 언급한 월러스틴은 메시아주의를 들고 나와 평생을 ‘자본주의는 멸망하리라’는 주문만 외웠다. ‘경제성장은 환경을 파괴한다’는 환경주의자, 돈에 대한 집착은 악마숭배라는 종교인 등도 반(反)자본주의 즉 친사회주의자들에 가깝다.
그들은 ‘자본주의는 무조건 나쁘다’는 명제 하나만 붙들고 산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들은 아무도 사회주의 체제에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그렇게 미우면 사회주의 체제에 가서 사세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 답변을 거부한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헛소리를 해도 처벌을 받지 않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집권세력에 반하는 조그마한 목소리도 곧장 목숨과 맞바꿔야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러시아혁명의 공신이자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던 레온 트로츠키는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후 망명생활을 하다가 멕시코에서 비참하게 살해됐다. 중국의 류사오치는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하다가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마오쩌둥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고, 그 후 홍위병으로부터 폭행과 폭언을 당했으며 그 후 난방도 되지 않은 가택에서 병이 악화돼 죽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국군의 뿌리’인 듯 추앙한 6.25전범 김원봉도 1958년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했고, 아내와 두 아들도 처형됐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반(反)자본주의 운동가들은 한사코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기를 거부한다. 자본주의를 성토하면서 자본주의가 주는 자양분과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게 그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팔고 강연을 한 돈으로 스테이크를 썰고 포도주를 마신다.
예컨대,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에서 자본주의를 공격한 토마 피게티는 세계적인 지성인으로 인정받는 삶을 즐기고 있으며,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공언한 미국의 정치인 버니 샌더스는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책을 써서 백만장자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판사와 근로자의 망치질은 같은 값을 받아야한다’는 방송인이 한 번 강연에 천만 원 이상을 받고, 돈을 멀리하라는 자칭 인문학자가 강연에서 수백만 원을 받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본주의와 반(反)자본주의를 외치는 거짓예언자들의 공생관계’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은 천재 중의 천재, 김정은은 인류 역사가 낳은 위인 등이라고 표현한 김정은 찬양단 가운데 북한으로 이주한 사람에 대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민주사회에서 투표를 할 때 좌파 사회주의는 분노 때문에 표를 찍고, 우파 자유민주주의는 불안 때문에 표를 찍는다고 표현한다. 좌파는 사람들의 분노에 호소하기 위해 선전과 선동을 애용하고 감정과 감성에 호소한다. 다만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발을 딛고 사는 공간은 자유시장경제의 공간이기에 그들이 대중에게 하는 말과 실제 삶의 모습은 전혀 상반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걸 우리는 ‘위선 혹은 거짓말’이라고 표현한다.
반(反)자본주의자 즉 사회주의자들은 ‘사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외치며, 무조건적인 돈 숭배를 싫어한다. 그러면서 “성장과 고소득이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언뜻 들으면 그럴 듯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소득의 진정한 목표는 돈을 더 많이 버는 게 아니고, 장수라는 목표는 단지 더 오래 사는 게 아니다. ‘고소득과 장수’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더 늘리는 것이다.
소득이 늘어나면, 그리고 오래 살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걸 더 많이 할 수 있는 자유가 늘어난다. 당신은 자유가 더 늘어나는 세상에 살고 싶은가 아니면 자유가 줄어드는 세상에 살고 싶은가. 분명한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이 오늘날 삶의 여유, 여행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채택해 고성장을 이뤘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좌파 사회주의자들도 고소득 경제, 편리한 교통수단, 효율적인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안전하고 안락한 거주지를 누리고 싶어한다. 이념과 생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을 지지하면서, 결실은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한 아담 스미스’를 원한다. 정말 이율배반적인 삶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1992년 사노맹 산하 남한사회주의과학원 기관자인 <우리사상 2호>에 조국 법무부 장관이 ‘류선종’이라는 가명으로 썼다는 ‘강령의 실천적 이해를 위하여’라는 글이 있다. 그 글에 보면 “사회주의혁명이 공동의 대업이며, 사회주의만이 진실로 현실의 모슨 모순의 대안임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사노맹 활동과 관련해 처벌을 받은 조국 장관은 “자랑스러워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9월 6일 인사청문회에서 “나는 자유주의자이고 동시에 사회주의자”라고 자신을 규정했다.
낮에는 사회주의의 이념을 ‘소신껏’ 말하고, 밤에는 자본주의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게 좌파 사회주의자들의 삶이었다. 밤과 낮이 다르니 결국 위선자와 거짓예언자로 판명된 게 그들의 인생이었다. 조국 법무장관의 삶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조국 일가에 대한 댓글이 수없이 많았는데, 다음에 언급하는 짧은 두 문장이 지금 상황을 잘 표현해줬다는 생각이 든다.
“조국은 푼돈도 알뜰하게 챙기는 사회주의자”
“조국을 좋아하는 애들아, 조국은 너네처럼 안살아!”
- 김상민 칼럼니스트
- sangminusa@naver.com
“세금을 왜 더 걷지 못하는가”라며 증세하고 ‘공짜와 무상 복지’ 외치며 재정파탄 초래
사회주의와 포퓰리즘은 계급 계층 갈등에 기반 - ‘좌파 사회주의자는 진보주의자와 다르다’
레이몽 아롱 “사회주의 모른다면 머리가 나쁜 것이고, 알고도 추종한다면 거짓말쟁이”
농업사회에서 땅은 생명이자 목숨이다. 농민들은 땅에 모든 인생을 건다. 1945년 광복 당시 한반도는 농업사회였고, 농업인구는 전 국민의 80%에 육박했다.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토지개혁에 착수했다. 북한이 선수를 쳤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을 확립했다. 사고팔거나 소작, 저당이 금지되고 경작하는 사람에게만 권리가 인정되는 방식이었다. 대한민국은 ‘유상매입 유상분배’ 방식이었다. 지주로부터 땅을 사들여 농민들에게 싼 값으로 소유권을 넘겼다. 연평균 생산량의 30%를 5년에 걸쳐 내면 자기 땅이 됐다.
남북한의 토지개혁을 언뜻 비교하면 북한이 훨씬 나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나라의 좌편향 국정교과서에서도 북한의 토지개혁을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표현했다. 이건 전혀 진실이 아니다. 북한에서는 무상몰수만 있었을 뿐 무상분배는 없었다. 무상분배는 농민이 땅을 가진다는 의미인데, 농민들은 매매나 채권 설정이 불가능했으니 사실상 소유권 없이 농사만 지어야 하는 예속된 신세에 불과했다. 농사를 지은 뒤 무려 25%에 달하는 세금을 내야 했으며, 그나마 나중에는 농지 전체가 집단농장이 되었다. 소유권을 잃어버린 농민들은 땅에 열정을 쏟지 않았고, 북한 땅은 황폐화되어 1990년대 대기근의 원인이 됐다. 북한이 토지개혁을 할 때 그 본질을 꿰뚫어본 사람들이 “농민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해도 그들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고, 수확물은 모두 적군(赤軍, 인민군)이 가져갈 것이다”라고 경고했는데 북한에서는 그게 현실화된 것이다. 반면에 대한민국의 농민들은 작은 땅이나마 열심히 가꿔 양식으로 삼고, 여분의 곡식을 돈으로 바꿔 자녀 교육에 투자했다.
인간의 삶을 수만 년, 수십만 년의 길이로 보면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지리 조건과 이에 따른 풍속과 문화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반면에 수십 년, 수백 년의 길이로 보면 인간의 삶은 제도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하버드대의 니얼 퍼거슨은 “권위적이고 착취적인 제도에서는 성장을 이룬다고 해도 결국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으며 포용적 제도가 뿌리 내리지 않는 한 지속성장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제도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비교 사례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대한민국과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북한이었다.
사회주의는 사실상 1991년 소련의 해체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소련 성립부터 몰락까지 사람의 일생과 맞먹는 74년이 걸렸다. 사회주의가 그렇게 오래 유지되고 일찍 망하지 않은 것에 대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1928년에서 1960년까지 (소련의) 국민소득은 연간 6%씩 성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역사상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구가했을지 모른다. 이렇게 빠른 성장은 기술적 변화로 가능했던 게 아니다. 노동력을 재할당하고 새로운 도구와 공장을 만들어 자본을 축적한 덕분이었다.’
소련 경제가 워낙 후진적이어서 계획을 세우고 인력과 자본을 조금만 투입해도 경제가 커질 수 있었다. 이러한 경제성장은 서구 지식인들의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 언론인인 링컨 스테펀스는 스탈린 시절의 소련을 방문한 후 “나는 미래를 보았고, 잘 돌아가고 있었다”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망언(?)을 남겼다.
공산주의 국가를 방문해 자세히 관찰한 경제학자는 없었다. 그들은 일단의 중앙계획 수립자들이 추상적인 수학적 모델을 활용함으로써 자발적인 시장의 힘보다 더욱 합리적으로 그리고 평등주의적으로 경제를 조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사무엘슨는 1961년에 발간된 책에서 소련 국민소득이 미국을 추월하는 데 1984년이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고 1997년이면 확실시된다고 예측했다. 그는 <경제학개론> 1989년판에서도 “많은 회의주의자들이 오래전부터 믿어왔던 사실과는 정반대로, 소련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기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발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의 증명이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정치적 혼란기를 겪었던 시절, 북한의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우수하다고 믿었던 지식인들도 많았다)
얼빠진 지식인들의 전망과 달리 소련의 발전은 딱 거기까지였다. 경제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개인의 창의성이 중요한데 그게 사회주의에는 없었다. 더 이상 투입할 수 있는 추가 인력과 추가 자원이 남아있지 않자 소련 경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일사불란한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속도가 빠르다. 겉으로 보면 대단히 효율적으로 보인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는 법안 하나만 통과시키려고 해도 이런저런 절차를 거쳐 마치 거북이걸음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는 ‘잘못된 결정을 스스로 교정하고 업그레이드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진가를 발휘한다.
예컨대, 시장경제는 효율성을 따지지만 계획경제는 목표달성 여부를 중시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경우 손실 발생이 우려되면 생산량을 줄인다. ‘이윤을 낼 수 있느냐’ 즉 효율성과 가성비가 생산량을 조절하는 자동조절기능을 하게 된다. 좌파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국유화, 공유화’를 통해 집단주의 방식으로 운영한다. 목표량 달성이 더 중요한 사회주의에서는 손실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사회주의를 채택하면 결국 사람들이 별로 원하지 않는 물건만 잔뜩 만들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자원의 낭비가 일어나게 된다. (소련이 담비 털을 사들이는 가격을 올렸더니 너나 없이 담비를 잡으면서 담비의 씨가 말랐고, 담비 털 재고만 쌓이더라는 일화도 있다)
세금을 걷거나 나라 살림을 운영할 때의 태도도 전혀 다르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는 ‘누구로부터 어떻게 세금을 걷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증세는 국민 고통이고 부자도 국민이므로 세금 인상에 신중하다. 증세가 자본 탈출과 투자 감소로 이어져 결국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걱정한다. 사회주의는 ‘세금을 왜 더 걷지 못하는 가’라고 생각하며, 그 방법으로 늘 ‘부자증세’를 외친다. 구체적인 방법론과 후유증은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다.
우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고 가르친다. 북한의 토지개혁처럼 좌파 사회주의에서는 '무상'이라는 말을 즐겨 쓰면서 마치 '공짜는 있다'는 식으로 선전 선동을 한다. 복지를 얘기할 때 수입은 고민하지 않고 ‘왜 더 주지 못하는 가’라고 묻는다. 결과적으로 사회주의를 채택한 나라들은 대부분 재정파탄을 겪었다.
대표적인 국가가 ‘현대판 국가붕괴의 표본’으로 불리는 베네수엘라이다.
1998년 권력을 잡은 우고 차베스는 “가난을 끝장내는 유일한 방법은 빈민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말해왔듯이,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야한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는 없다.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평등과 정의가 살아있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통해서만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차베스 집권 시절에는 석유 가격이 괜찮았다. 베네수엘라는 수출액의 80%를 석유에서 벌어들였는데, 이 돈을 빈민들에게 마구 뿌렸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 주택에 빈곤층이 줄었다. 차베스는 영웅이 되었고 사람들은 선거 때마다 만세를 부르며 그를 찍었다. 차베스는 2013년 암으로 죽었는데 그가 만들었던 베네수엘라의 영광은 석유 값 폭락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차베스의 진짜 잘못은 무엇보다도 시장경제의 기반을 붕괴시켰다는 점이다. 차베스는 2002년 정국 혼란기에 반대 진영의 총파업으로 대형 상점들이 문을 닫았을 때 국가 지원을 받는 생필품 지급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나타난게 정부 지원으로 운영되는 슈퍼마켓 ‘메르칼(MERCAL)’이었다. 메르칼에서는 쌀 빵 햄 우유 등과 같은 기초적인 식료품이 시중 가격의 절반에 공급됐다. ‘메르칼’은 2003년 12월 200개 지역에 생겼고, 2004년 2월에는 2천여 개로 늘었다. 국가보조금으로 운영되는 ‘메르칼’은 시장 가격을 왜곡해 민간경제를 질식시켰다. 시중 가격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막대한 손실 때문에 사업을 접어야했다. 나중에 유가 하락으로 재정파탄이 나타나고 국영상점이 더 이상 ‘반값 판매’가 불가능해졌을 때, 상품 품귀현상이 일어났다.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인들 자체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 베네수엘라에서 올 상반기까지 국민의 10%가 넘는 400만 명 이상이 나라를 등졌다.
사회주의는 ‘부의 재분배와 소유의 집단화 혹은 사회화’를 통해 평등사회 구현을 추구한다. 그러다보니 세금인상과 재정지출 확대에 거리낌이 없고, 국영화 혹은 공영화를 통해 기업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강화한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세금과 준조세 인상은 단골 메뉴다. 법인세는 25%로 올랐고 세계 최대의 상속세율 65%는 요지부동이다. 실업급여 재원을 위한 고용보험료율은 1.3%에서 1.6%로 오른다. 집값에 붙는 재산세도 크게 올렸다. 한국전력의 적자로 인해 전기료 인상도 조만간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돈은 걱정 마, 돈 워리(Don’t Worry’)“라고 외치는 건강보험의 경우 ‘문재인 케어’로 인해 지난해 적자로 돌아서더니 올해 적자규모가 4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세금 아니면 건강보험료 인상이 불가피한데 어느 길로 가나 결국 국민들의 부담이다. 국민조세부담률은 2016년 24.7%에서 문재인 정부 첫 해인 2017년 25.4%로 오르더니 지난 해에는 26.8%로 뛰었다. 세금이 늘어난다는 것은 일반 국민의 지갑에 있어야 할 돈이 정부 금고로 들어갔다는 것을 뜻한다. 돈을 쓰는 주체가 일반 국민이 아니라 ‘권력을 잡은 정치인과 관료’로 바뀐다는 것이다.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정치인과 영향력을 높이려는 관료가 가정주부처럼 알뜰하게 쓸까 아니면 생색내기만 하면서 펑펑 쓸까. 경제학자인 제임스 뷰캐넌과 고든 털럭은 <공공선택론>에서 ”정치인과 관료 역시 기업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시장 실패’보다 무서운 게 ‘정부 실패’다“라고 주장했다. (정치인과 관료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처럼 절대 착한 존재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도 세금을 늘리면서 쓰는 데는 후하기 이를 데 없다. 내년 예산안을 사상 최대인 513조 5000억 원으로 편성하면서 적자를 메꾸기 위해 60조 원의 국채를 찍어내겠다고 밝혔다. 복지 예산을 더 늘리겠다는 것. 알뜰한 가정주부라면 반드시 ‘수입 내 지출’을 위해 애쓰겠지만, 문재인 정부는 나라 살림의 제1 원칙인 재정건전성 즉 ‘페이고(Pay-Go, 번 만큼 쓴다)’를 무시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를 위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외국인 학자까지 동원했다. 좌파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9월9일 서울에서 열린 콘퍼러스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나란히 앉았고 “한국경제가 디플레이션이 나타나는 것을 막으려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보다 더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단기 부양책이 필요하다”며 ‘확장적 재정정책’을 주문했다. (문재인 정부 내에서는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꿀 노동개혁이나 공공개혁과 같은 구조개혁은 물 건너 간지 오래다)
문재인 정부 들어 경제성장률이 1%대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등 경기는 나빠지는 데 세금은 오르고 정부는 걷은 세금을 펑펑 쓴다. 전형적인 좌파 사회주의 정책이며 그 종착점은 너무나 처참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런데도 9월16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경제가 어려움 속에서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고용 상황이 양과 질 모두에서 뚜렷하게 개선되고 있다”고 말해 민생 현장에서 실물경제 움직임을 잘 아는 많은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경제 현실을 전혀 모르는 개인의 무지인지 아니면 사실을 왜곡하는 국민 속이기인지 참 헷갈리는 대목이다.
여기서 흔히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자 혹은 진보주의자로 포장한다. 한국의 언론에서 ‘좌파 진보 대 우파 보수’의 프레임을 작동시킨다. 하지만 좌파와 진보는 탄생의 역사가 다르다. 미국의 진보주의는 사회주의와 포퓰리즘의 대안으로 발생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갈등을 이념의 기반으로 삼았다. 포퓰리즘은 일반 서민과 기득권층 사이의 갈등을 자양분으로 삼아 일반 서민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미국의 진보주의는 계급이나 계층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적대감을 없애는 것을 추구했다. 진보주의자로 분류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4년 이렇게 말했다. (그는 부패와 싸우고 경제정의를 추구하면서 기업의 독점을 강하게 반대했다.)
“‘나는 노동자 편이다. 나는 자본가 편이다’ 같은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한 말이 정의라는 불변의 법칙을 밀어냈다. 누구든 자기가 계급에 속한 사람이라고 여기면 ‘나는 노동자 편이다’ 또는 ‘나는 자본가 편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공화국(미국)의 중심은 아주 빠르게 파괴될 것이다.”
진보주의는 점진적 개혁을 선호하는 보수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혁신적 개혁을 통해 정치와 사회체제를 바꾸려는 성향이나 태도를 의미한다. 그런 만큼 절대적 개념이 아니다. 프랑스혁명 당시 왕정에 반기를 든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사회주의는 진보주의와 동일하지 않다. 진짜 생각이 있고 미래 지향적인 지식인이라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진보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학자인 레이몽 아롱은 <지식인의 아편>이란 책에서 “정직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절대로 좌파가 될 수 없다. 정직한 좌파는 머리가 나쁘고, 머리가 좋은 좌파는 정직하지 않다. 모순투성이인 사회주의 본질을 모른다면 머리가 나쁜 것이고, 알고도 추종한다면 거짓말쟁이다.”라고 규정지었다.
사회주의는 모순덩어리라는 데 자칭 사회주의자인 조국과 그를 기용한 문재인 대통령은 왜 그렇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