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영!! 혼!! 육!!

인간론 -최홍석 교수

하나님아들 2019. 4. 25. 22:50
인간론 -최홍석 교수| 인간론

인간에 대한 관심은 현대의 관심이다. 철학적 주제는 하나로 "인간은 무엇인가?"


1. 자연 과학적인 인간관. - 자연 과학에 의해 획득된 인간이해. 시간과 공간. 현상계에 제한 된다.


경험과학의 한계이다. 사실 진술이고, 윤리적, 종교적인 것은 함구할 수 밖에 없다.


2. 철학적인 인간관 - 철학적 사유에 의한것이고, 외곡과 한계를 지적할 수 없고,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3. 신학적인 인간관 - 성격이 다르다. 연역적 (apriari) 권위에 접근. 하나님의 유일한 , 영감된, 성경에 의존한 해답을 찾는다.


본질적인 차이 : 계시의존적인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배타적인 것이 아니고, 가장 중요한 원리하에 경험적, 현상적인 것도 큰원리 태두리 안에서 된 것 이다. 자연계시도, 특별계시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 어거스틴. 핸드북(요람)- 어거스틴의 기독교 강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보면 전 기독교 진술에 대해서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사도신경의 골격에 근거하여 인간론 진술이 되어있다. 어거스틴은 5세기 인물. 칼빈의 15세기 인물이고, 12세기에는 피.롬반두스의 신학총론이있는데 그는 역사 사도신경의 구도에 따라 출간된 이후 400년가 교재로 사용하는 영향력 사도행전 구도에따라 진술한 사람중. 바르트 조차도 그의 교회교리 1932년경. 와 교의학개요 1946년 신정통주의인 바르트는 형식적으로는 사도신경을 교리고 서술하였다. 설교. 교리교육은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서술해야 한다. 설교는 인간의 말이 아님. 사도신경의 구도에 따라 목회교육, 교리교육 계획을 짬이 좋다.


  인간에 대한 진술-내가 믿사오며... CREDO...(인간론에 해당)


교회역사를 보면 인간론이 나오게 된 자리는 신론과 기독론 속에서 다루어졌다. 창조론적 구도속에 나온다 . 왜: 인간은 창조의 면류관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이고, 절대창조를 한 이후에 인간이 생겨난 여건이 배려되었기 때문,. 모든 것이 인간에 집중되어 있다. 인생을 천하보다 귀하다 함. 신론 가운데 창조론 가운데 두 번 째 이유? 신학적 인간론, 교의 학적 인간론은 다르게 접근. 무슨 차이?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접근. 신앞에서 서있는 실존.  그러므로 신론 속에 창조론의 구조속에 인간론이 접근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갈론. 신론.은 긴밀한 관계, 불가분적인 관계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살고, 생득적으로 지식이 축적되어 가고 있다. 두 종류로 나누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 다른 하나는 우리에 관한 지식으로나뉜다. 칼빈이 기도교 강요에서 두가지 지식의 종류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하나님을 안다에서 앎의 성격은 히브리적으로 "야다". 기노스코 의 의미가 아니고 전인적인 앎이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실존적, 고백적인 이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야다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처음부터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이러한 경험이 우리의 실존속에 살아나도록 성령이 내면을 주장해 달라고 해야 하고,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 고착화 될 수는 없고, 주의 도구라도 오늘 새롭게 주께서 함께 하여 달라고 하지 않으면 아무 능력이 없고, 순간순간. 시간시간마다 새로운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항상 경험할 수 있도록. 변화속에 살아야 한다. 그것이 참된 갱신 그것이 하나님의 아는 지식.


  칼빈의 1장1. 선후를 판단하기 힘들다.  무엇이 먼저인지 알지 못하지만 성경에 의지하지 않고는 참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알지 못한다. 기독교적인 인간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결론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못하면 나를 바로 알지 못한다. 나를 바로 알지못하면 하나님을 발로 알지 못한다.


  시편 36편 9절을 보면 대저 생명이 원천이 주께 있아오니....광명을 본다... 전재조건. 주의 광명중에, 주의 빛가운데서 빛을 보나이다. 함축적이고, 영적의미가 있다. 빛이 있다고 인식이 가능한가? 눈과 생명력이 있을 때인식이 가능하다. (인식의 주관적 원리). 따라서 인간이해에 있어서도 빛이 없으면 인간은 참으로 참된 지식을 갖지못한다. 화학적 분석을 철분..인.. 지방질 비누 현시가 즉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지 못한다. 왜? 내재된 표준은 내재적 지식을 위한 절대적인 표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슨말? 항해하는 자가 사방을 둘러봐도 물밖에 없는데, 배 밑창으로 내려가서 본다고 하자. 하루종일 그러나 불가능. 어떻게 위로 위로 올라가서 섬을 관찰. 그것이 어딘인가 확인한 이후 내 위치를 안다. 우리 인간은 관계속에서 목적과 뜻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관계속에서 인간의 의미가 있고, 목적이 발견된다. 해야할 목적, 본질들이 관계한다. 관념주의자는 내면으로 들어가지만, 함정과 오류에 빠진다. 이성의 한계를 말한 칸트. 인간이상의 것을 말하지 않고는 인간을 잘 알 수 없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때. 처음-계시의 영을 주셔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속한 일들을 보게하소서. 부름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부름을 대면한 이후에 실존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만난후 나의 실존에 대해서. 주를 만난후 내 실존을 깨닫고 주를 의지할 수 있게 된다. 호세야 선지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먼저 강조했다. 바로알 때 회개가 따라오기 때문


  칼빈 기독교 강요. 1장 2.1-2 하나님을 앎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미이다. 가까이 함은 s두려움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함이고, 예배를 동반. 사변이 아니다. 그래서 요 17:3 영생...예수그리스도를 아는것이다...히브리적 관점의 "야다"로 봐야 한다. 역사갱신의 시기는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부터. 세상이 감당치못할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의 선험적으로 살게 될 것이다. 한분한분 복된 자리에 들어가자


  방향 - 왜 인간론을 연구? 목적? 그것은 인간을 배우므로 하나님을 더욱 깊이앎. 더 경외하고 음성을 듣고 얼굴을 대하면서 살기 위함이고 그와의 만남이 찬송으로 기쁨으로 머무는 자리마다 변화의 원동력이 있기를 바람.




교회를 위한. 삶을 위한 신학이 되기를 목적하고 있다.


상황(praxis-contex)). 본문(theorie-text))  - 해석학적 순환론적 입장이 있어야 한다.


1) Theorie-praxis shema


2) pr -the shema


3) the - pra einheit


어디로부터 출발을 해야 하는가?


내가 아는 방법으로 수용한다는 인식에서 "유비"에서부터 출발 외부의 것을 습득한다. analogia. 상황이 먼저.?


역사적으로 보면 전통주의 자들은 본무에서부터 출발.


상황주의론자 - 회중. 목회자. 설교 준비시. 회중에서 발생된 그 문제를 도구로 삼고 성경을 본다면... 회중의 문제가 유발되면...해결을 위해서.. 상황이 본문으로 주어진다면 결국 제한적인 것에 의해서 하나님 역시도 제한됨


1) 교리 축소 현상이 일어나게 됨 - 왜곡현상이 일어남. 사랑만 강조하면 공의의 하나님이 없어짐.


2) 해방신학자 (민중신학) - 상황을 분석하고 분석한 상황을 본문으로가져감. 무슨 원리로? 상황분석? 맑스 이론(공산주의) 이념으로 해석. 소유자. 비소유작의 갈등. 자유, 평등... 이데올로기로서 해석. 본문을 통과한 문제는? 구원과 인간관도 다름. 낙관적 인간론. 다른 죄의 관념. 용어의 다중성으로 인해 다른 관념이 나옴. 전체적 구원사적인 구원개념이 다른다. 따라서 교리 외곡현상이 일어난다.


따라서 praxis 로 출발하면 문제가 된다.


출발점은 해답은 어디서 찾느냐의 궁극적인 권위가 어디에 있는냐라는 문제이다.


 


  우리의 인간론 진술 원리는 계시의존적 사색으로 원리를 찾아야 ? 부적합. 특별계시의존적인 사색과 신앙으로 원리로 삼아야 한다. 그럴 때 외로운 길. 독선에 빠졌다. 순환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베드로의 고백이 능력이 있었기에 생명과 구원의 길임을 믿기 때문에 가야 한다.



  부정적 의미의 "성경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교리역사적으로 보면 오류. 성경을 우선적. 성경만을 배타적으로. 성경만을 가지고 인간론. 동기는 좋지만 한계와 문제점 때문에 잘못된 쪽으로 흐림. 성경은 불변. 정확무오하지만 해석하는 인간은 오류에 빠지고, 독선에 빠지기 때문. 역사적 통착이 들어와야 한다. 성경역사. 교회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된다. 내 해석이 그들해석사이에 누구와 유사하고, 다양한 해석중에서 우리가 봄으로 내 해석의 재평가할 수있다. 근원적인 것은 성경으로 두지만 좁은 의미로는 교회의 결정, 유산, 교파들의 주장을 살필 수 있어야 하며 인간이 무엇인지 조명해야 한다.




99년 9월 17일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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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의 1918. I.II중에서


. Magnalia Dei


. Algmeene Genade - 일반은총론. 바빙크의 논문, 세계관 정립에 좋은 책.


A. G. Honig 에게 영향을 줌 - Handbook ...


L. Benkhof 가 영향받음


A. Hoeuema "Created in God's Image"


H. Hoesema.  Reformea Dogmatic - 1900년대 초기 사람. 1920년대 큰 논쟁. 일반은총에 대한 것.


일반은총을 부정한 K. Schilder 사람. 그 당시 아브라함 카이퍼에 대하여 스킬더가 많은 공격을 하였다. 스킬더를 중심으로 카이퍼에 대하여 도전하고, 비판을 함. 교회론. 종말론에 대하여 문제를 야기 시킴. 다우마 교수는 킬더를 비평하면서 칼빈으로 돌아가려 함. 초월성을 많이 강조. 정통 개혁신학자.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이다. 유사한 부분이 없다. 유한과 무한. 따라서 존재론적으로는 공통분모가 없다. 존재론을 부정. 윤리적으로 관계성에서 유사점을 찾으려 함.  바빙크는 베르코프와 동일하게 봄. 원래상태의 세계. 타락상태의 세계. 은혜언약을 말함. 칼빈의 기독교 강요. 구체적인 인간론은 없고. 죄는 부패적으로 인간에 관하여 서술...


. 니겔리. '인간'


. 찰스 하지. 교회론을 쓰지 않음. 192-30년대 사람. 장로교 사람들은 교회론을 쓰지 아니함. 그만큼 그 당신에 교회론의 관심은 희박. 17세기 데카르트 18세가 오면서 성경무오성을 보존하는 관심. 계시에 대한 것이 관심. 이 시대의 신학적 관심은 해석학과 교회론의 관심이 집중됨.


. A.A 핫지는 교회론을 세울 계획으로 자료를 수집했지만 집필기회를 놓쳤다. 시간을 잘 활용하라. 지혜로운 청지기 처럼. 하루를 1년처럼. 한 평생처럼 소중하게.. 성향이 매우 합리적인 경향이 있다. 우리 입장과 공유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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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론이 신학강론의 전재가 되어야 한다. 신론 다음에 인간론이 다루어 저야 한다.


. 무엇을 다룰 것인가?


. 하제의 도움을 받는다.  신학을 연구하는 네가지 방법


1) 주해적 방법 : 리차드손이 대표


2) 실존주의적 방법 : 루톨프 불트만, 한스 코첼만. - 역사와 의미에 대한 미요.


3) 역사적 방법 : 베르너를 G. 퀸맨. 여호와 킴. 예레마이어스


3) 구원사적 방법 : 오스카 쿨만- 바르트적 경향이 있음. 구원사적 의미에서 시간의 본질을. 역사의 중심점에 예수를 놓고 파악. 직선적인 개념. 창조와 타락과 구원과 종말이 있다. 실존주의 적인 시간이해와는 본질을 달리함. 조지 엘먼레드 - 74년에 신약신학 저술.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인간의 구원 문제를 다룸. 하나님 인간 죄를 바람.  고펠트. 하엔리드보스 - '바울의 신학' 주제연구가 끝나자 죄 아래의 삶. 구속의 문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교회. 하나님의백성으로서의 교회. 죄. 구속. 교회. 종말이라는 구원사적인 횡적 구조로 됨. 전통적인 방법은 구속사적인 관점을 취하고있음. \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구속사적인 방법에서 시작.




* 구원사적 방법 - 하나의 주제는 하나님 앞에있는 인간 존재. Coram Deo- Sein des Menschen 인간론의 하나의 주제. 실존의 본질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미래를 바라보나? 오늘의 의미는 무엇인가?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데. 위기는 오늘날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하나님 말씀인 계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섬김을 재해석한다. 철학적으롤 과학적. 사회과학적으로 현대인이 사용하는 언어로 재 구성. 그들에게 쉽게 보급으로 출발. 결과는 기대와는 달릴 기독교 외곡현상이 이루어짐. 1) 슐라이어마허. 리첼 : 18세기인물.  누구의 영향? 칸트의 영향을 받음. 낙관주의 이성만능적. 내재주의적. 기독론에 관해서는 도덕적인 보범으로 도덕선생으로 자율적인 의지와 감성으로 감성적으로 내재적인 노력으로 나타남. 2) 불트만. 칼 바르트 : 초월적. 비관적인 인관관을 수립. 실존주의적 인간관을 수립한다. 철학적인 요인에 의해 강화대는데 문제가 있다. 존재의 의미를 부인3) 불트만. 판넨 베르크 : 소망의 신학(소망의 신학의 철학화). 불러허는 마르크스의 진화론적. 변증법적인 영향을 받음. 헐버크 와같은 신막스주의의영향을 받음. 초월이 없다. 재림이후의 초월이없다. 신령한 영적 세계가 없다. 차세만을 위한 것. 맑스의 선조는 헤겔의 변증법의 영향을 받음, 절대정신적인 것은 역사내재적인 이미. 이 세상외에는 없다. 따라서 종말. 재림은 역사적임이 아니고 실존주의 적으로 재해석 함으로 문제가있다. 우리는 신학적 인간학의 오류를 말할 때 철학적 전개를 제하고 성경이 무엇인가를 인간론제를 말하려는 동기가 있다. 늘 깨어서 작업이 필요.


1) 원래상태의 인간 - 2) 부패상태에 있는 인간 - 3) 은혜의 상태에 있는 인간 - 4) 구원의 상태에 있는 인간. -


* 교회는 지식인들에게 호감을 받으려는 유혹을 받아왔다. 그래서 교의로 변하고, 오류의 축을 이름. 유혹? 영혼의 답답함과 하나님을 만나고자 온것이지. 시사적? 이 아니다. 수수하게 전하길 바란다. 순수히 주의말씀을 전하기를 바란다. 신학도마찬가지. 하나. 신도들이 신학자들을 너무 과신,-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신학하는 우리에대한 눈빛은 우리를 높게 봄. 책임이 중함. 더 기독교적으로 행동하리라 생각한다. 사회에 대한 신도를 잃고 있고, 깊은 반성으로 괴도 수정이 있어야 한다. 신학과 신앙이 별개? 신학자는 믿음이 좋은 자가 아니고 신학의 학문이 있는 사람이라는 무거운 짐을 버리고 있다. 그러나 잘못된 점. 밀접한 관계가 있는 영생의 지식이라 말함. 둘. 하나님과 예수는 예빼의 대상. 그러나 개념화 추상화 하기 쉽다. 양성교리를. 삼위일체교리를 암송. 모두 이해한 것 처럼. 인격적인 하나님을 추상적으로는 설명되지 않음. 신학이 잘못되면 매마름이 있을 수 있다, 신학이 잘못되어 신앙이 잘못된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가 겸손의 덕을 가지지 못해 성삼위를 기쁘게 하지 못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도리어 참회하는 마음을 갖겠다. 모두를 외워도 하나님의사랑과 은혜를 받지 못하면 무슨 지식이 소용있겠는가? 우리의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소망이 없을 때 중단하고 하나님이얼굴을 바라보기 바란다. 먼저 택하고 일을 하기 바란다. 주를 위한 그릇이 되지 못하고 주를 빙자하여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 인간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아무도...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의 기원에 대하여 회피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유와 존재에 대한 대답들 보류하면서 산다. 바람직하지 않다. 심각하고 고통스럽지만 대답하고 살아야 한다. 복음 전파자들은 현재화 하면서 복음 저파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태도가 종말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 찰스 다윈의 종말? 죽음에 임박한 다윈은 나는 미숙한 경험을 알고 있었던 적이 잇엇다.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력 헤매었다. 종교를 만들었다. 소작인들에게 말해달라. 예수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구원에 대하여 말씀해 주길 바란다. 그것이 최고의 주제가 될 것이다. 창문을 열고 찬송해 주길 바라오. 함께 찬송할 것이다. 진화론을 포기하고 죽음전에 창조론을 고백하였다. 




* 기독교 인간관은 창조서부터 시작한다. 창 1.2장에서 1) 우주는 시작을 가지고있고. 영원한 존재가아니고. 하나님 이외에는 하나님에 의해 기인. 의존적 존재이다. 하나님만 높이란. 존귀와 영광을 올리라. 어느 인간의 공로도 파쇄되어야 한다.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긍휼,. 은혜. 자비만이 남아 잇어야 한다. 모든 피조물은 의존적임을 기억하라. 2) 천지창조에 있어서 순수와 진전이 있다. 무에서부터의 창조는 일종한 순수와 진전이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있어서 존재가 아닌 창조의 면류관을 향해 달려가는 순수와진전이 있다. 삶의 조건들.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고 자기의 통치군을 주심. 목적론적인 인간을 관심있게 주목하고 계심.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기억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3) 매 과정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매 순간마다 말씀하심. 힘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인 명령이 주어짐이 아니다.  이러한 구조속에 머물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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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10월 1일




* 인간론의 역사 - 소위 신학(Theologia) . 카이퍼 -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다. 신학의 정의에 따라서 기원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2세기 Apologia 의 변증에서부터 헬라와의 접촉점에서부터 이론적으로 제기되었고, 기독교의 옹호자들이 헬라 철학에 대하여 증명하고자 함...문화의 골자인 헬라의 도구를 가지고 접하기도 함. 개념의 이중성이 나타나게 되고, 플라톤이 모세에게 배웠다고...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 포괄, 배타주의 등의 다양한 양상등이 나타나기도 함. 초개교회의관심은 기독교 근본신앙을 반응하고, 옹호하기 시작함. 요한 서신 1-3서에서 영을 분별하고.... 그 무리에 속하라... 제거하고... 거기에 속하라.  "가현설" - 물질은 악하고, 정신적인 것은 거룩하니... 그러므로 예수가 어떻게 더러운 육체의 몸으로 왔는가? 이원론에 근거. 기독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스도는 구세주 이므로 하나님의 구원문제보다는 구원의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에 관심의방향이 인죄론으로 다루어 지게되었다. 인간론 + 죄론 = 인죄론으로 됨.


* 사도들의 후계자인 속사도 교부들은 예를 들면 로마의 클레멘트, 폴리캅. 바나바. 잉나티우스.. 교량역할을 감당하게 됨. 신학적 사고를 어떻게 표현? 신학저술이 아닌 서술형태로 그들의 신학적 사고를 표현함. 목적도 실천적. 상담적 성격. 구원적 관심에서 그를 바라보며 문제를 해결하는 처방을 함. 차츰. 실천적인 목적에서부터 보다 교의학적이 틀을 갖게 되었다. 발전적 시도가 이루어짐. 무의식적, 의식적으로 반립적 경향이 이루어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반립적인 구조가 이루어지게 됨. 순교자 저스티누스 ad 100-165년. 이레니우스는 서방교회의 원조는 터툴리우스 인데 이레니우스는 라틴교회를 연결고리의 역할을 감당함, 고대교회의 교리사에서 라틴신학의 원조인 터툴리우스는 어떤 관점에 관한 한 이레니우스의 사상을 그대로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구자적 입장. 이레니우스는 서방 저스티누스는 동방의 입장에 섬.


* 저스티누스의 강조 - 자유의지를 강조함. 의지. 지성이 아닌 의지. 자유로운 의지. 책임이 따르게 됨. 실수와 죄를 해석하는 일에 작용하게 됨. 죄와 실수는 그것을 행한 각자의 결정에 있다고 함. 각자의 스스로 결정으로 인해 그 자신에게 있다. 아담은 아담이 나는 내가... 펠라기우스 주의로 종결됨


* 이레니우스는 어거스틴 주의로 종결됨.




* 루터파는 알미니안쪽을 지원함. 루터자신은 하나님의 주권과 절대의지를 믿다가 알미니안쪽으로... 오늘날도 개혁파과 비개혁파의 차이는 많이 난다....70-90년에 이르기 까지 교파의 간격이 허물어져 가는... 일체감을 느끼는... 사실은 자기를 믿기는 성경을 믿는다고 서로 믿고있는데... 우리가 믿는 바를 명료하게 가르치고, 인생관을 삼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의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감리교와 장로교는 합쳐질 수 없는 평행선이 이루어졌다.






* 무엇이 이것으로 하여금 시계이게 하는가? 인간이.. 시계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공동의식의 소환이다. 무엇이 나로하여금 인간이게 하는가? 그것이 없으면 인간일 수 없는 것... 언어를 가지고 있는 존재... 종교성. 영혼... 자기반성.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본질이다 .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의 결과이지만 하나님의 흔적들. 발자취 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구별된 존재. 비교할 수 없는 존재. 살아있는 계시이다.




*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문제.




성경적 근거. 동일한 글 가지고 다양한 해석. 성경적 관점에서 비평하고. 비평의 논리적 발전적으로 거론. 성경의 관점속에 우리의 관점을 결정하고 우리의 삶에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의 의미의 문제. 신앙윤리적으로서의 교훈들의 강의




하나님의 형상 ?


구약 ---


창 1-26,7 -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 5:1- 자기의 형상으로....


창 9:6 - 스스로 목숨을 끊는일...


시편 8편 - 사람이 무엇이관대...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암시적으로..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고..(엘로힘)




신약 ---


고전 11:7 -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요... '에이미'-인간 자체. 인간은 하나님 형상 그 자체요. 영광 자체다.


소유한다의 개념과 다르다. 소유하다가 버리게 되면 전혀 상관없는...


약 7:9 -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지음을 받은 자를 저주하니....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깨끗하다 할 사람이 없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자는.. '기노마'의 완료형. 결과가 계속되는 과거행위. 지금도 계속됨. 그 당시까지 혈과가 지금까지 계속됨. 인간의 타락도, 부패된 인간도... 그렇지만 지금도 형상의 결과가 남아있다.


엡 4:24 -


골 3:10 -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의. 지식.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르는... 중요한 개념이다.






* 두 용어의 사용


형상 - '체레' - 에이코나 - image


모양 - '데무트'-오모이시스 -  likeness




오리게니스는 는 하나님의 계획이 나오고(26),. 하나님의 실행(27)이 나온다.  실제로는 형상으로 지으셨지. 모양으로는 짓지 않으셨다. 창조시 부여받은 형상. 모양은 창조때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난후에 구체적으로 발전되어 드러나게 된 것이 모양이다. 도덕주의 . 대가대로 모양을 받게 된다.




이레니우스는. 터툴리우스는 형상과 모양을 시간적으로 보지 않고, 대조적으로 하나는 영적인., 하나는 신체적. 물리적 성격으로 봄. 영적인 면을 가르킬 때는 모양. 신체적일 때는 형상으로 봄.




내용도 다르고 해석도, 주장도 달랐지만 자스티누스. 어거스틴도 삼위일체의 전통인 힐라니우스. 필라기우스 교부도 16세기에는 일축하고 거부함. 최근에 성경신학의 연구로 인간은 전인적 관점으로 이해하게 됨. 구분이나 구별은 잘못되었다고 함. why? 잘못되었는가? 1) 첼렌과-원형을 조각한 실물을 가르키기 위해. 데무트-유사하다. 비슷하다라는 의미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두 용어가 등치어가 아님. 교부적으로 사용됨. 창 1:26에는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의 창조 27절에는 형상이라는 말로만 인간창조를 묘사 5:1에는 원문은 데무트. 모양으로만 인간창조.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 모양을 창조. 형상으로 창조. 따라서 형상과 모양은 등치어는 아니지만. 의미는 동일하다. 2) 전치사도 아무이유없이 사용됨. 창 1-3절에는 반대로 연결되어있음. 또 신약의 골 3:10, 약 3:9절에 보면 한쪽은 형상. 모양. 전치사는 동일 카타... 그러므로 교어적으로 사용. 그러므로 유사어이고, 동일한 의미로 본다.




* 칼빈은 기독교 강요 1권 15-3절과 주석 1:26절을 종합적으로 보면. 히브리사람은 연구법이 있다. 하나의 사물을 설명하기 위하여 두 다른 단어들을 번갈아 가면서 역동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 많은데, 그것이 모양과 형상이다. 그러므로 다른 단어를 쓰면. 묘사적, 역동적이다. 결론 - 첼렘. 데무트가 쓰인다. 유사어이다. 그러나 첼렘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아르케. 원형이시고, 그에 비해 인간은 원형에 대한 모형이다.라고 볼 수 있다. 데무트가 덧 붙여진 것은 인간은 모형인데, 모든 면에서일치하고, 일치한다고 볼 수있다. 의미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로되 완전한 형상, 존귀한 존재이다  ,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심. 포기치 않고, 생명을 위하여 아들의 생명을 피로바치게 함. 인간을 바로 인식하고 회복하고, 외곡된 형상들을 보면서 온전케하는 일을 이루어가길 바란다.




99년 10월 7일




I. 자연주의적인 견해


맥 도날드 - 플라톤적인 철학적 편향을 가지고 있다. 53p에 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 헤라철학적인 영향이 사유를 지배. 기독교 신학이 전개. 함수관계속에 성경적이며 철학적인 혼합적인 것이 발견됨. 창세기 1:26-27 - 26장은 계획을 27절은 실행을 하셨다고 봄.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원래 하나님의 계획은 형상과 모양을 겸비하도록 계획하셨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만 사람을 지으심. 그래서 이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말은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 능력의 존재로 만들었다고 봄. 계획속에 모양으로 만든다는 것은 실행되지 않았지만. 순종하고, 노력하고, 힘써서 대가로, 보상으로 모양을 얻게 된다고 함. 형상과 모양사이에 공로개념이 있다. 자연주의 자라는 말이 붙음.  이 세상을 대변하는 사람이 있는데. 펠라기우스이다. 그는 인간의 본래상태가 도덕적 중립이라 말함.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 능력이다. 무슨 능력? 완전에의 능력. 완전해질 수 있는 능력.은총을 받지 아니하고, 자연적인 것으로 완전해질 수 잇는 가능성이있다. 이것을 형상. 이 능력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보편성을 말함. 결코 상실할 수 없다. 설령 죄를 보내었다. 본래 창조 모습대로 건재한다. 능력의 보편성, 항구성, 이같이 펠라기우스는 긴 그림자를 느리뜨리우고, 오늘날고 신학작업. 행동파. 낙관주의 자들이 여기에 포함됨. 16세기의 소시티니아네스. 재세례파. 알미니안주의(레몬스트란데). 합리주의자. 초자연주의자들. 많은 신학자들에게 오늘날까지... 공통입장. 원래상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인...그런데 이들은 역사적 사실은 인정하엿지만. 철학적사상은 인정치 않았다. 그러나 적극적인 선의 상태로서의 원래 상태는 부인함. 이들의 입장은 대개 동일한입장을 갖는다. 하나님하나님의 형상 이성적 성질. 도덕적 능력에 있다는, 자유의지에, 종교 윤리적인 능력. 이들은 진화론적 성향을 가진 방향으로 갈 것이다. 과거나 형재에 결정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다. 파라데이스는 우리 뒤에 있는 것이아니다.


소시니안 주의 - 소기노파로 번역. 태표자: 소시우스. 이성주도적인 합리주의자. 낙관론적 인간론을가짐. 펠라기우스 노선에 있다.


재세례파 - 신비주의. 초자연주의적 경향. 예수의 가연성을 주장. 이원론. 물질계약설.. 어떻게 죄 몸으로 육신으로 올 수 있냐? 단순히 마리아의 태를 통하여 온 것이지. 참된 이성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도미니움으로 피조물에 대한 통치권을 봄. 형상으로 지으시되... 만무을 다스리자.. 창조 본래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었다.


둘은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첫사람. 첫인간 아담은 지상적이고 자연적이었다고 같은 입장으로 봄.




II. 반면 이레니우스, 아네나시우스 -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창조때 형상을 먼저 받았고, 즉시 모양도 인간이 받은 것이다. 은총설을 강조함.


이 당시 동방교회사람들은 전자의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원래 상태가? 본질이 무엇인가? 의질문에 원래 상태의 인간의 본질이란 적극적으로 선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거룩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본성이 도덕적 중립의 상태로 창조되었다. 선도, 악고, 의도, 불의도 아닌 중립. 편향이 아닌... 이 말은 하나님이 인간창조시 인간에게 자유의지만 부여하셨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다. 본래는 중립으로. 거룩은 자의적 산물로 보게 됨.




III. 진리로 성경을 믿는 개혁파의 비평


1) 인간의 원래상태를 자연주의 자처럼. 도덕적 중립. 어린아이와 같은 유아기적 상태. 미성숙의 내념. 원래 창조된 첫 인간은 미성숙 존재가 아니고, 물리적으로 신체적으로 보나 첫 인간은 성숙한 성인으로 지음을 받았다. 어린아이와 같은 미성숙의 자체가아닌... 지음받은 다음에 직관하여 이름을 짓는다. 선했고, 정직했다. 어린아이는 수치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유아기적으로 있었다.?


2) 인간의 노력으로 선한성품을 얻게 됨. 철학적 수상. 철학적 허구에 불과함. 왜? 역사적 인물에 두고 이야기함. 역사인물 치고, 그의 의지와 성품에 있어서 특성이 없는 중립적 관계가 가능? 전혀 불가능. 좋은나무는 좋은 열매. 윤리적 철칙. 행위는 본질을 찾는다. what? 모든 행동은 본질에서 부터나온다. 악의 본질에서.. 선한 본질에서... 거룩이란 창조에 잇어서. 재 창조에 잇어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은사적인 적으로. 주께서 그의 주권을 가지고패푸시는 것이다. 거룩의 개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는 없고, 고통속회개하면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셔야 은혜로 주셔야 가능. 거룩을 소유한 자는 계속나타나지만 말과 행동에서는 나타낼 수 없다. 거룩한 말과 행위가 있으면 거짓된 거룩이다. 순간마다 너머져도 항상 우리에게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  책임이 역설적 관계속에 은총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3) 자연주의 자들이 옳다고 한다면 다음의 해석에 난관이 있다. 해석학적 난관 첫 번째. 피조물의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두 번째. 뱀의 유혹도 설명하기 곤란  세 번째. 타락의 성격. 사망이 왕노릇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무책임한 자가 죄를 범했는데, 온 인류가 사망으로 왕노릉하다니....


한마디로 비평한다면 - 이들은 한계가 모호하다. 원래상태와 부패상태의한계가 불명확함. why? 자연주의자들은 이성, 도덕적. 종교적 능력. 자유의지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펠라기우스는 부패상태를인정한다. 하지만 비록 형식과 실질의 개념으로 대비시켜본다. 둘의 관계는 별개의 관계이다. 기계적 관계. 병립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 형시과 이론의 이원론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형식이 깨지면 그 내용도 깨지는.. 한편이 깨지면 둘다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함.




II. 로마 카톨릭 교회의 견해


자연적인 은사를 주셨다. - 이성, 양심. 판단력. 정의감. 영혼의 전승. 의지의 자유. 다양한 은사를 주시면서 서로 조화의 상태를 유지하게 하심. 즉 자연적인 의의 상태로 유지하면서 인간에게는 경향이 있는데. 인간속에 저급한 욕구가 있다. 그래서양심에 대항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 자체는 죄가 아니로되... 행동화 될 때... 죄가 됨.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경향을 제어할 수 있도록 다른 은사 - 초자연적인 은사를 덧부쳐 주심. 목적은 스스로 제어할 수있도록하기 위함 - 추가적 은사. 덧붙여진 은사.라고 함. 이 속에는 원의가 포함되는데, - 원래적 의 - 참된 지식. 의와 거룩이 포함됨. 이것이 창조당시 아담의 모습. 초자연적인 은총 - 데무트 이층 구조로 되어 있다. 하층구조는 신앙. 하면 철함. 자연하면 은총 이성하게 되면 신학을... 드로 봄. 그런데 인간 타락시. 파괴되. 하지만 하층구조는 건재, 그러면 하층과 상층구조의 관계? 관계무이면 기계적 병립의 관계이다. 그런데 이 상태가 로마교회의 원죄 상태이다 영세받을 때 잃은 은총, 초자연적인 은총을 받음을 강조. 헬라철학적으로 해석하며. 초자연적인 상태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초자연적 관계. 자연적 관계의 모습으로 보면. 자연적 은혜로. 초쟈연적 은사가 존재. 논리적 귀결? 첫째. 낙관적 인간론. 둘째. 자연신학을 인정-은총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참이다. 유한적이 한계속에서 아는 지식이 참되다. 왜? 부패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신인식을 알 수 없다. 로카 캐톨릭의 정적인 타락. 부패. 무능력...  셋째. 공적사상을 촉진.




* 덧붙여진 은사교리


바빙크는 로마교의 중요한 전재가 되며 중요한 논재라 함. 로마교회의 핵심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94년 여름호 98pp.   발생배경 - 하나 ; 스타투스 글러리아 - 영광의 상태. 성경의 영광의 상태를 말하고, 어떤 상태? 하나님 형상의 회복. 그리스도와의 연합. 근본적 의미는 성령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자들이 높여진다. 신분의 상승. 롬 8:14-7  둘 ; 선행공적사상  그런데 신플라톤주의적으로 교훈을 채색함. 플로티누스-유출설.; 존재하는 모든 세계의 물질은 1자로부터 유출. 악하고, 죄악됨. 구원의 길은 하나로부터 유출됨. 이러한 성격을 영광의 상태에 연관을 시킴. 그러므로 이 신플라톤주의는 수도원 운동의 중요한 촉발운동을 함. 영광의 상태의 본질을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대면하는 것이라고 함. 어거스틴도 사용함. 그의 얼굴 앞에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인데. 본질을 통하여 하나님을 뵙는 것이다. 본질을 통한 관상... 눈을 통하여 본다. 실체. 본질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데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주의 얼굴을 대하는... 보게 될 때 알게 된다. 앎이란 지식. 헬라적 차원이 아닌 히브리적 차원. 그와 하나되는 것. 영생을 얻는 진리와 같이. 본질을 통하여.. 구원받은 피조물과 남는다. 건널 수 없는 간격은 영광의 상태에 가서도 간격은 있다. 신비주의 적인 신인합일이다...




* 덧붙여진 은사


배경 -


1) 영광의 상태의 본질 -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지나갔다. 성경적 모티브에 신플라톤 주의에 포함.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에 대하여 본질을 통하여 그를 안다. 통합이 되어서 그에게 흡수가 되어서 하나님을 아는 신입합일의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영광의 상태는 자연적인 상태를 초월하는데, 신체적인 의미의 초월을 말하는 것이다. 본질의 내용이 다르다. 결국 신화한다. 신격화한다. 영광의 상태에 이르기 때문에. 그러므로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 뿐만 아니라 신성에로의 육체적인 참여. 신체적인 참여. 존재론적인 것이 합일을 이룬다. 독일 신학자 쉐이르는 하나님과의 융합이란 말을 썼다. 화학적 개념의 융합. 이와같이 영광의 상태에서 선행공적 교리가 작용하게 된다.


2) 선행공적 교리 - 로마 캐톨릭은 영세 받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주입된 은혜입니다. 주입된 은혜가 주어지는데 why? 창조시 아담의 은사는 자연적인 은사들... 의지의 자유. 정의감.. 그 위에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덧붙임. why? 조급한 성격을 인간 스스로 제어하게 하기 위하여.. 두 번째 목적. 자연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초월적인 은사를 받아야지 영생.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하므로 파괴되고 상실됨. 그러므로 자연적인 것만이 남는다. 덧붙여진 상태에서 상실되도 상관이 없는... 그런데 영새를 받아야 하는데 그 때 초자연적인 은사가 남는다. 그 때 능력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전에도 있었다. 그래도 그 전과는 다른데, 선행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된다. 그 전에는 일방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세속적 차원에... 하지만 영새를 받을 때 능력을 얻는데, 영광의 상태에 들어가기에 합상한 상태에 들어갈 초자연적인 것을 얻을 수있다. ...에 일치하여. 공로적 관계. 보속적 관계.. 대가. 선행을 지불하고 들어가게 되는... 현재 로마 교회의 신자들의 구원관이다. 구원교리이다. 로마 교회는 현재 구원받기 위하여 초자연적인 상태가 필요한가?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새 받지 않으면 세속적인 일반적인 일 밖에는 할 수 밖다. 그러므로 영새를 받지 않으면 초자연적인 은사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은혜 때문에 가치있는 선행을 창출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절대로 초자연적인 상태가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공로적 관계. 대가. 보수적 관계로 넘어감. 반 펠라기우스. 반 어거스틴 주의. 영새를 받으므로 초자연적인 은사가 필요. 은혜의 주입은 상태는 누구나 인정하지만. 영새를 받을 때 행 18:19 - 시몬은 사마리아 교적부를 보고세례를 받고 빌립을 따라다님. 그러나 시몬의 믿음은 거짓의 믿음이다. 참 언약의 백성중에 진정한 믿음이 있을 때 영생이 주어지지만 로마교회는 기계적인. 객관적인 영세에 참여하게 되면 되는. 자동적으로 역사하게 된다. 마술적인 성향이 있다. 은혜의 성격이 다르다, 개신교와... 유아 세례도 마찬가지로 초자연적인 은총이 주어지게 된다.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언약론 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언약 백성된 자들에게 신약의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같은... 자신이 신앙이 고백할 수 없는데... 여호와의 집안에 구원에 이르리다.  하지만 펠라기우스는 한가지. 자기를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거룩한 헌신의 표현. 두 번째. 죄 용서에 대한 예표로 된다고 표현함. 하지만 언약백성된 표로 유아세례를 받게 된다. 마술적 능력이 역사함이 아니다.


* 아담에게 유추적용하는데. 영광의 상태. 모든 인생의 생애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아담도 선행을 통해서만 하지만 창조때 받은 자연적인 은사들은 그 성격상 영광의 상태에 들어가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격상. 그러므로 아담의 경우도 영세받을 때의 같은 상황이 있어야 하는데...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주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덧붙여진 은사교리이다. 형상-자연적 은사들. 모양-초자연적인 은사들.. 대가의 관계. 공로적 관계로 시차를 두고 나중에 주어진다고 하는... 결과적으로 아담에게도 초자연적인 능력이 주어지고, 선행을 하게 되며 영광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초자연적인 은사들. 덧붙여진 은사들. 대언적 은사들....이란 명칭으로 사용됨


* 이러한 교리는 일반적으로 스콜라 신학자들이 대부분 지지함. 토마스 아퀴나스. 브로배절. 둔스 스토투스. 이 후에 로마교 교리 문답에 채용되어 교육되어짐. 로마교 안에도 개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얀센주의의 얀센니우스 등이 이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말했지만 공식적인 문자로 바꾸어 갔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 교리는 로마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교리가 잘못 되었을 때. 나머지는 흔들리게 된다.


* 이견이 생기는데


할레니즘. 등이 프렌시스칼 내에 속해있지만.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함. 은혜스럽게 역사하는 은총과 아담이 창조때 받은 원의적 은총과는 구별되어야... 원의를 가진 것으로 지음을 받았고, 참된 지식과 거룩으로 하나님께 잘 순종함으로 보상으로 은혜스럽게 역사하는 은총을 받았다. 즉 공로적인 관계로서 받는다고 말함.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동의 할 수 없다고 두가지 이야기를 말한다. 첫째. 그렇다면 이 은혜는 은혜스럽게 역사하는 은총은 인간의 공로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은혜라는 말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잘못됨. 그러므로 나는 반대한다. 말이 되지 않는다. 두 번째. 아담이 은혜스럽게 역사하는 은총을 소유했다면 소유된 목적? 누구의 공로? 자신의 공로의 결과로 소유하게 됨. 셋이 은혜스럽게 역사하는 은총이 소유하게 된다면 셋의 공로로... 노아도 노아의 공로의 결과로...은혜스럽게 역사하는 은총을 얻는다. 그러면 아담 자신의 공로로 얻은 은혜스럽게 역사하는 은총이 획득했다고 자손들이 획득하는 것이 아니고, 상실했다고 자손이 상실하는 것이 아니다. 즉 한사람 한사람씩 얻고, 잃는 것이다. 즉 언약개념도. 대표개념도 없다.  그들은 펠라기우스개념을 동방교회의 개념을 받았들인 계보를 가지고 있는데... 그 당시의 유아 세례의 관점은 고정되었는데... 그때는 초자연적인 은총이 주어진다고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마 서로의 관계가 통하지 않고, 일관성이 없다. 그러면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은혜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생긴다. 즉 은혜가 아니면 은총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총을 강조한다. 프라스..는 펠라기 우스적인 인간의 공로로서의 위치를 정하고 있다. * 트렌트 종교회의는 결정하기를 아담은 의과 거룩으로 지음을 받았고, 타락으로 상실하고 말았다고 결정만 지음. 여전히 구분되어져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체제만 하나이지. 사상적인 공존의 틀속에 있다.




* 정리와 비평


 1) 영광의 상태의 교리는 잘못된 교리위에 세워짐. 근세와 영세에 대해서 아름답게 묘사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영생... 모두가 일치한다. 그러나 하나) 신 플라톤주의 적으로 해석함. 성경의 교리와 멈. 둘) 그 복을 언제 누리게 되는가? 지불하고 갖는 관계이기 때문에.. 행위에 대한 공로로서 받게 되니까... 재림이후에 받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원리 사랑은 이미. 아직. 그 복은 그 때 결정적으로 받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복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다시 멸망하는 행위의 죄를 범치 않으면 죽을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세 번째) 본질을 통하여 보는 것이 아니다. 통합이 되어서 하나가 되고, 우리의 본질이 하나님의 본질을 흡수함이 아니고... 하나님을 본다는 성경이 있는데,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어떻게 보았는가? 한나님을 본다는 것은? 만난다? 인격과인격의 만남. 생명의 공유. 거룩한 연합. 생명력 관계. 본다는 것의 함축적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내 의가 되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영생. 생명적으로 하나가 된고, 하나님의 지시의개념도 마찬가지. 어떻게 이루게 되는가? 입신? 영적으로.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 본다. 인식한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은혜아니면 진노받을 수 밖에 없는.. 때로는 눈물을 감격해 하기도.. 그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 즉 물리적인 것이 아니고, 신앙윤리적으로 보는 것이다. 영적으로 보는 것이다.


 2) 펠라기안적이다.  - 아담과 우리의 목적은 동일한데, 오늘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내용 자체가 잘못됨. 오늘날 신자에게 있어서 은혜의 상태와 영광의 상태에 공로사상을 개입하였다. 대가를 지불하는...은혜로 넘어감이 아니고, 인간의 공로의 보상으로 전화되는.. 또한 이와같은 상태를 현재 타락하기 전에 아담에게 적용시킨것에도 문제가 있다. why? 타락전 아담은 계약적. 언약적 관계에 있다. 행위언약의 관계속에 있다고 한다. 창 1-3장에서 행위언약이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언약이란 말도 없고, 붙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용어만 비평하지. 실재의 관계에는 인정하는...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운명을 이렇게 정하셨다고 재안하였고, 용어를 사용함. 창조 본래의 상태는 계약적 상태이다. 조건이 함축되어있는데.. 당사자가 있고... 거의 언약적 관계의 본질적 요소들이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보상적 관계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 개혁신앙에는 행위언약이란 말이 있는데,. 아담이 순종하면 대가를 받는.영생을 얻게 된다. 하지만 실패함. 그러나 만일 아담이 순종했다면 그래서영생을 소유했다면...운동하면 건강해지는... 자연적 관계이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연적인 관계인가? 먹고 안 먹고의 가치는? 자체는 가치가 없다. 영생은 대단한 가치인데... 그러니 대가가 지우진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도무지 따먹는 행위는 가치가 없기에 평행의 관계가 아니다. 언약을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계약 조건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즉 계약조건 때문에 은혜로 주어지는.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데... 성경이 말하는 바로는 모두가 진리이다. 은혜로 받음도 진리. 행함도 진리. 보통사람은 하나로 정하려는 그래서 외곡시키려는... 역설적 진리로 말해야 하는데... 행위의 의미는 구원의 원인은 아님. 즉 행위가 동반될 수 밖에 없다. 영감의 산물. 해석적 순환이 이루어wu야 하는... 기도중에 이해하고, 교우들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의 사명을 공유하기를 바람.




99년 10월 29일




3) 하나님의 형상은 전인적으로 나타난다. 인간속의 모습에는 없는 것이 없으며, 영혼속에 나타난다. 심리의 다양한 변화가 하나님의 형상됨을 증거하며, 저급한 형상일수록 단순하다. 새의 노래도 우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반응하며 새는 단순하여 본능적으로 행한다. 그러나 인간의 심리는 복잡하고 단순하다. 스스로 의거하지 못하여 격할 때도 있고, 폭풍후에 바다의 조용함처럼 평점을 유지하기도 함. 감정의 폭은 변화되기도 함.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부요함을 나타냄. 죄 때문에 감정의 변화가 하나님의 부요함으로 반영을 나타남.  하나님의 형상은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이라는 것이 덕행을 통해서 드러난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상태로 창조가 아닌, 본래 인간의내면성 모두가 성숙하게 조정이 되었다. 그의 지성 속에서, 의지 속에는 의로, 마음에는 거룩함으로 채워짐. 중립상태가 아닌, 어린아이 상태가 아닌, 창조 때부터 의롭고, 거룩하고, 진실되게 창조됨. 그러므로 너희는 온전하라. 나 너의 하나님이 온전함 과 같이... 레위기의 너희는 거룩하라... 거룩을 요구하신다. 내가 거룩하니.. 명령을 받을 때에 제한적으로 언약 백성들에게만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만이 가능? 옳은 말씀이지만 본래적인 말씀에서도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다.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으로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다 적용이 된다. 두 종류의 분류되지 않는다. 후에는 예수후의 중보자로 오실 때의 의미가 달라지지만 원 의미를 볼 때는 과소평가해서는 안되며,. 과대평가해서는 안됨. 자연주의자들은 과소평가를 했는데, 어린아이와 같은 도덕적 중립상태가 아닌, 적극적으로 의롭게, 거룩하게 지혜롭게 창조됨. 두 번째 과대평가해도 않되는데 원래 상태를 영광의 상태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루터파. 로스터 파라다인스. 이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생명을 지금 소유하고 있다는 수준으로... 이점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아담이 원래 가지고 있는 지식.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원래대로 생득적으로... 참됨인가? 참된 지식이다. 그러나 그 지식이 제한적이다. 근거는?  직감적으로? 피조물이기 때문에 유한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초월적으로 넘어서지 못함. 미래적 운명에 대해서 생득적 지식을 알고 있었는가? 몰랐다. 하나님이 특별할 계시를 통한 이후에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 알게 됨. 정녕죽으리라.,. 생득적으로는 알 수없었다. 제한성를 가짐.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풍성, 충만해질 여지를 가지고 있다. 점직적 성장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의와 거룩에도 해당된다고 한다. 타락이전에는 의와 거룩했는데, 영광의 상태에 이르는 새하늘과 새땅에 이른 것이 아닌 이것 또한 제한되었으며, 더 발전적으로 깊어저야 할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은사.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다. 영적으로 교통을 하지 않으면 참된 믿음의관계가 없으면, 발전적으로 갈 수없다. 은사이기 때문에 교재가 필요하다. 하나님과의 교재가 없으면, 유지나 발전적인 의미를 가질 수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타락이전에도 중보자이셨는가? 문맥에서 결정되는데, 신인양성의 중보자와 더 보편져인 의미로 중보자를 쓸 수있는데,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그를 통하여 모든 창조는 예수를 통하여 그러므로 중보적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증하셨다. 그와 상관을 가지고... 신비한 연합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의미에서 인간을 위한 중보적 역할을 했다고,,, 구속주로서의 개념이 아닌 더 보편적인 의미에서... 새하늘과새땅에 가서도 십자가의 죽음도 필요없고, 오순절 성령 강림도 역사화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어떠한 양상일지 몰라도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일을 하실 것이다.  항상 의지할 분은 예수이며. 피난처가 된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모든 것을 상대화하며 그리스도에게 미래와 목표의 양상을 둘 때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우리 마음속에 결단이 있기를... 아들이 그러하면 성령또한 창시자의 역할을 했을 수있다. 아담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의와 거룩을 유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더 풍성히 유지할 수없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피조적 인격자이다. 한마디로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나 피조되었기 때문에 피조성은 의존성을 말한다. 자유의 개념과 의존은 공존적이다.  자유가 증가되면 의존은 감소되는.. 이와같은 역설적인 면인 인간에게 공존하도록 창조하심. 의존성 때문에 절대의존적 자세로남아있어야 한다. 성령에 의존하여 지키시고, 밝히시는.. 그러나 성령이 창세기에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볼 때... 성령이 개입.  원 상태를 과대평가는 잘못. 창조때 받은 의와 거룩의 상태가 첫째로 타락했으므로... 창조의 완성면... 영광의 상태는 회복 뿐 아니라 완성적 의미를 둘다 표해야 한다. 월등한 영광의 상태가 되며,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도 에덴의 상태보다는 동일? 회복? 못함? 과연 그리스도안에 있는 상태보다 나은가? 동일한가? 못한가? 타락전에 인간속의 성령의 내주와 타락후의 성령의 내주에는 차이가 있다. 초 자연적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속에 성령에 거하시는데, 육체의 소욕을 거슬리며... 갈등 구조속에 그의 주권속에 거함. 하지만 타락전에는 성령이 거하시기에 적합했다. 본성의 의과 거룩한 존재였기 때문에... 하지만 바빙크는 타락전은 자연적인것이라고 함. 타락적의 인간은 성삼위 전체가 거주하였고, 가장 아름다운 상태였다고...  하나님이 형상은 전인적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4) 인간의 몸도 하나님에게 속한다. 하나님의 형상속에..


경험론으로 기울어지거나 합리주의로 기울어 질 수밖에 없다. 특별계시를 거부등은.. .유물론으로 빠지거나 유신론으로 기울어 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경은 연결성을 갖도록 한다. 중용적 입장에 서도록... 철학사적으로 볼 때 경험론과 관점론이 맞설 때 칸트는 조합할 정도로... 인간은 성령을 가지고 있다 .'퓨뉴마' soul? spirit? 영혼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데. 심리적으로 조직이 되어서 본질상 영혼이 몸에 거하도록 되어있다. 본질적으로... 그러므로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것도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아담의 육신은 시간적이 아니고, 논리적인 부분으로 땅의 흙으로 지음받고, 생명의 호흡이 불어 넣음..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문자적으로 보면 혼. 살아있는 혼. 본문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 설교? 인간의 기원이기 때문에 필요한데... 흙으로 진흙인형을 만들고, 사람의 입기운을 불어넣으니 생령이 됨. 신적인 본성이 투입되고.. 내적인 섬광속에 신의 속성이... 이것은 잘못. 하나님에게 손이있는가? 없다. 의인화적 표현. 창조의 능력으로. 시간과 공간속에서... 하지만 그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기에...그 만큼 낮추어서 설명하심. 창조의 사역... 생령이 됫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 살아 움직이는 자가 됫다. 생명의 공유자로? 혼이라는 말이. 영혼이 생기게 되었다는 잘못. 물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그 생명은 똑같다. 생물은 살아있는 존재.. 살아있는 존재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혼이 생기게 된것만이 아니고, 전인적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논리적인 관점에서 흙으로부터.. 생명의 호흡으로... 아담이라고 불리우게 됨.  아담은 아다마에서 파생된 말로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에서 나오는 지와 는 다른 의미. 먼지. 원질의 의미. 티끌로 돌아가게하니... 에 티끌과 같은... 하나님 여호와는 흙으로 지으시고... 저가 우리의 채질을 아니며 진토임을... 풀과 같고.. 들의 꽃과 같도다.. 진토임을 주께서 기억하시다... 질그릇이 깨질정도로 방치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염려치 말고., 기뻐할 수 있는 내 속에 버려야 할 것을 정리하고, 거룩한 섭리의 과정에 들어감을 감사하고, 그 때는 슬퍼보이나 이후에는 기뻐할 수 있는 현실을 해석할 수 잇는 능력을 받기 원한다. 고전 15:47절에는 첫 사람은 땅에 났으니. 흙에서... 질 그릇이라고 말함. 깨어지기 쉬움. 무가치함. 한 평생 사랑을 받음은 우리 자체가 아닌 내안에 있는 복음과 말씀 때문에 존중함을 받음을 기억하라. 우리 자신은 보잘것과 같은... 우리의 관계가 친구.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깨어지지 않게 회개하고, 사랑할 시간밖에 없음을 기억하고. 사랑의 관계가 인간에게도 나타나기를 바란다. 물질적인 흙이 선하고, 귀하게 형상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예술품이다. 우리의 형상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으시다. 눈도 코도...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예술품이고,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 범죄해도 오래참으시는 하나님. 가을 동산을 보면서 은혜를 감사하고,  참으시며... 잘 돌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을 보면서도.. 지혜를 발견하기를...  억압하고. 탈피하고. 금욕적인 것으로 눌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영육의 대립을 볼 수 있는 부분이있다. 오호라 곤고한... 영과 육의 대립으로 보이지만. 이 육과 영혼의 대립이 아니다. 그것은 싸라크스. 제 3의 윤리적인 의미의 육이다. 물질적인 몸이 아닌. 옛사람의 정체성을 싸라크스라고말함. 영혼의 대립이 아닌. 옛 사람의 성향과 중생한 새 사람의 윤리적인 갈등구조로 보아야 한다. 윤리적인 자아의 갈등 구조로 보아야 한다. 깨끗하게 되어야할 존재로 보아야 한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이원론적인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의식화에서 성경적으로 바꾸어야할 부분들이다. 영혼과 몸이있다. 이것은 결속되어 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기회론이나. 예설조화론자들이 말하는 그런 개념보다는 훨씬 더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다. 이 두 주장은 화란사람이 종교개혁이후에 주장한 사람인데 우리가 아는데로 17c 데카르트의사상은 무엇? 물심 이원론이다. 물질은 정신에 비하면 열등하여 기술적 조작이 가능하다.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 중세기만 해도 종교적 세계관으로 물활론으로.. 너도 나도 살아있는... 맥락이 반적되어 나타남.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없어서 인과론적인 관계를 부인하는... 육체와 정신이 연동적으로 작용하는.. 함수적으로... 얼굴을 빛나게 하는.. 순 빛을 흐리게 하는....


자아 (I-ness)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 존재론적인 이중자아가 아닌, 윤리론적인 이중 자아로 보아야 한다.  롬 7장 중생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잘못된... 진동파... 백파... 무엇이 다른가를 강조하다보니 교단의 분리가 생김... 영혼. 몸도 rm 자체만이 아닌, 영혼과 몸이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어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는... 해석할 수 있고, 개혁파 적이고, 성경적임을 기억하라..




* 1517년 종교개혁 4-500년전의 견해를 말하고 있는데... 변화를...


중요한 변화는 바르트는 비평. 거부한다. 하나니의 형상을 피조물의 통치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비평한다. 최초로 이 주장은 16c의 소시니우스.. 그들의 교리문답에 채택. 18c의 슐라이허 마흐가 기독교 신앙이라는 책 233pp 이하에 같은 입장을 취함. 최근인물로는 페르다윈의 1970년의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형상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도미니언 해븐 - 통치권을 소유한 자임을 강조한다. "A Dominion Haven" 바르트는 통치권이라는 것은 형상 자체가 아니고, 형상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형상자체가 아님을... 형상의 통치권으로 이해하는 성경적인 근거는 땅에 충만하라... 다스리라... 피조물을 통치하는 시 8:5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창 1:27에 주목하여 그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온전히 계시하고 있고,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구절을 필요없없.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구절속에서 형상이 무엇인지 찾으려 함.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인간과 그 동료.. 나와 너. 여기서 구별성. 그리고 관계성. 나와 너의 관계. 사회적 존재.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봄. 모형이고, 원형은 우리가 우리의 형상에 따라서... 에서우리라는 말. 신적인 공동체가 있다고 본다. 우리라는 말 속에 나와 너의 관계가 있다. 우리 속에... 바르트는 우리라는 말을 적어도 복수로 보지 아니하고, 천사의 회의로도 보지 않고,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한다. 성부성자성령이 원형이고, 남자와 여자. 그 동료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적인 관계로... 원형에 대한 모형으로 나타내는 양상으로 보고 있다. 존재에 유비가 아닌...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동일한 범주에 속하면 존재론적을 가능하지만 하나님과인간의 차이는 질적인 차이고, 극복도 무한한 차이이다. 없는 것과도 같은.. 미미한 자와 무한한 자를 비교함이 가능한가? 불가능 하다. 관계의 의미를 말한다. 관계가 닮았다.  여기에 바르트의 신학은 인간의 삶의 양식은 신적인 생명의 양식의 모습이고, 모양이다.




1999년 11월5일


칼 바르트의 견해 - 하나님은 원형이시고, 인간은 그의 모형이고, 모형되는 인간이 닮았다는 점에서 무엇이 닮았는가? 존재에 있어서 닮음이 아니고, 관계에 있어서 닮았다. 골격이 닮음이 아니고, 성품이 닮았다는 것이다. 골격이라는 것은 존재론적인 한도내에서 닮았다는 것이다. 개미와 인간을 비교한다면... 살아있다. 가사적존재. 존재론적인 의미로 보면 다리가 있다. 숫적은 다르지만... 같은 부분이 있다. 미물이 있는 하나님은 창조주와 인간은 피조물 그는 영원. 불멸하고, 인간은 아침과 저녁에 변하는... 그래서다른 점이 많다. 정도의 차이가 아니고 질적인 차이이다. 무한한 질적인 차이이다. 그래서 두 존재를 놓고 닮았다고 할 수있는가? 하나님이 너무 높이 계심을 강조하는데 약점이다. 그리스도로 계시된 하나님은 임마누엘로서 우리 가까이에 내재하시는 역사속에 함께하셨던. 성경의 하나님은 높이 계시면서 마음의 통회하는 자에게 함께하시는... 초월성만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문제가있다. 존재에 관한한 하나님과 인간은 비교할수 없다. 존재의 유비-비교하는 것-를 부정함. 관계의 유비를 주장함. 우리가 우리의 형상에 따라서 사람을 만들었다. 라는 부분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신적 본질속에 우리라는 공동체가 있다.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인간과 그 동료를 창조하신 사회적 존재로 창조한 것이 하나님이 닮은 것이다. 개혁파의 전통속에서 하나의 일부분에 속한다. 하지만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중간의 내용들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잘못된 전재에 의한 것은 전재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바르트의 전재에 의한 것이라면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비평 :


1) 해석학적 문제 - 바르트는 그의 신형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창1:27절 구절만 관찰함.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말함. a 는 b에 대한정의이다. 그런데 둘의 관계는 필연적이다. 반드시 b는 a의 결론. 정의일 수밖에 없다고 말함. 맛소라 사본에는 별개의 문장으로 되어있다. 반드시라는 말은 곤란하다. 있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해석학적인 맹점이 있을 수 있다. 관계성만을 말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초절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다른것보다는 이 부분만이 눈에 들어옴으로... 성경구절의 배타성으로 그의 철학적 존재가 무엇인지 알게 됨.


2) 배타성 - 형상. 내용에 대한 배타성


- 근거 구절에 대한 배타성(창 1:27) 초절주의. 키에르케고르로부터 영향받는 초절주의. 실존주의가 발전된 것. 신과 인간의 단절성. 불연속성. 바르트에 의해서 강조됨. 신학적인 분위기가 내재적익 부분들이 많았다. 기독교가 도덕적인 모범으로. 기독교가 윤리화된... 낙관적으로 이해되고, 인간의 공로가 나타남으로 하나님의 역사속에 나타나는... 사회복음주의까지 나타남. 기독교가 문화로 변화하는... 때문에 상황에서 바르트를 보면 그 시대의 아들이기 때문에 극단에서 극단으로 나아가게 됨. 역사의 교훈을 받는 것은 반동은 반동을 불러일으키는... 그래서 양면을 견재하는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갖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게 됨.




* 오토 베버(O Weber)  134pp에서 바르트의 제자라는 스승의 견해를 비평하는...


 하나님, 형상. 남자. 여자라는 말이 나옴. 이속에 베버는 이 구절이 신형상 이해를 지지하지 아니함. 하나님의 형상이 이 본문속에 관계의 형상이 있음이 아니고,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요, 분명이 이 구절속에서 관계성속에 닮음이 나오지 아니함. 그래서 바르트를 비평하는 경우였다. 바울의 의도는 바르트의 의도와 달랐다. 관계속에 그것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형상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 내용이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관점에서 볼 때 바르트의 관계성에 대한 이해가 우리 안에 있지만 내재성과 초월성을 조화로서 나오지만 그는 초월성만을 강조하는 문제가있다.




* 피조물로서의 통치개념으로서 이해되지 아니하고, 관계의 유비로서도 설명되지 않는다면 어떻게해야 하는가? J. C. Siukel - 출생의 .. 라는 책에서 창 1:26절이 가장 불가사의한 어려운 구절이다. 어떻게 풀것인가? 피조물의 통치개념으로 해석한 근거구절은 1:28절 다스리게 하라. 관계속에서는 1:27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의 제한성을 극복하기위해서 광범위하게 찾으려 함. 보다 넓은 인간학적인 범주속에서 형상이해를 하려함. 보편적인 근거. 확대된 근거... 실재적인 과정들을 설명해 보자.


* 구약신학자 중에  아이히롯트 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영적인 탁월성이다. 형상의 내용인데 인간의 자의식 속에 드러나며, 인격을 통하여 드러나고, 반영된다고 말함.


* 런던의 멕도날드는 기독교 인간관이라는 책에서 영육 이원론이라고 주장함. 그는 계시에 관한 책을 썼고, 건전한 사상을 가진자이다. 우리와 맥을 같이하는 인물.


*  폰 라트 도 이 문제에 관한한 아이히롯트의 주장은 영육이원론이라고 함께 비평함.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의미를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외에서 배제시킬 수 없다. 몸도. 오히려 형상의 개념이라는 것은 가변적, 유형적인 실체로부터설명되어져야 한다고 주장. 우리와신학이 다른입장인데, 이원론에 대한 비 물질적인 영역에서만 나타난다고 주장함.


* 전인을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고 말하지. 특정한 부분만이 이룬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폰 라트는 391pp에 하나님의 형상은 자유로운 자아에 있음이 아니고, 가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도덕적인 것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은  비물질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정신적과 관계된다는 질문은 무의미. 반 이월론 적인 견해를 가진. 폰 라트.


* 유겐 불트만 등도 다 이원론적인 사람. 왜? 전통적인 사람들은 결국 히브리적 사유에 입각하여.. 거기에는 이원론적인 경향이 없다. 그것은 헬라철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불트만은 신 맑스의 견해. 유물론적인. 일원론적인 성격을 가졌으며, 그들의 생애와는 존재함은 차세밖에 없다. 지금 초월하는 것도 없다. 이후의초월세계도 없다. 이 세상밖에는 없다는 초월의 개념이 없는. 그래서 종말과 부활은 실재로서 재해석하는... 그리고 우리는 히브리적사고를 가짐. 극단적, 보수적인 견해를 가져도 반이원론적인 주장과 헬라철학에서 벗어나기를. 영적인 구분은 가능하나. 분리는 안됨을 주장한다. 구분과 구변의 무엇인가? 구분은 존재론적으로 나뉘는... 마이크와 성경. 우리가 하나의관점으로는 온전하게 해석될 수 없는 너무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하나의 관점으로는 어렵다.




결론 - 나 자신은 어떤 입장? 이걸 취함으로 선포에 있어서 중요하다. 우리의 사상을 가지기를 바란다.


1. 신의 형상 개념은 하나의관점으로 해석될 수없을 만큼 미묘하고, 복잡함. 구원사적으로  볼 때




원래상태부패상태그리스도안의 상태재림영광의 상태


(무죄)(타락의 상태)(은혜의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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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에서의


인간창조.




그리스도의 상태가 회복의 상태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원리적으로는 죽을 수 없는 상태이다. 예수 안에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원리적으로 말해서는 죽음과는 관련없는 영생의 단계. 그래서 처음 보다는 높은 단계. 원래상태와 동등한 상태는 루터파이다. 영광의 상태에서 볼 때는 처음의 창조는 부족한 상태. 씨를 심어서 창조의가능성이 더 풍성해질 수 있는 부분.




죄를 지을 수 있고, 그리고 죽을 수 있는 상태


죄를 지을 수 없고, 그리고 죽을 수 없는 상태.












영적인 것을 수학적으로 말하기에는 불가능하지만 도식화되면 오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에 대한 그리스도안에서의 회복, 창조에 대한 완성.이 영광의 상태를 말해준다. 그러므로단순한 회복은 아니다. 영광의 상태나 회복의 상태가.


두 번째 결론.


소유 정도가 아니가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소유하는 전체가 아니고, 전인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중단한다면 안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돌발적인 사건을 통하여 덧붙여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 본래의 본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한부분 영혼만이 아니고, 이성이나 정신적인 기능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전인적인 부분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영육 이원론이 설 수 없다. 영적, 정신적인 것은 유가치하고, 육체적인 것은 무가치 한 것은 아니다. 특별한 기도, 특별한 예배가 있지만 모든 것이 기도고, 예배이다.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에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지만 이것은 편협한 인간이해이다. 




결론 세 번째.


이원론적인 실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성속에 공간적인 개념에 둔다. 신앙의 생활화, 생활의 신앙화. 하나님의 형상을 두 국면으로 이해 될 수있다. 첫 번째국면은 구조적 국면이고, 기능적 국면이다. 구조-존재의문제, 기능-윤리적 성격. 두 국면으로 이해됨이 옳다. 하지만 각 교회에는 긴장이 보이는데, 한 부분의 국면들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레니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가 구조적 국면을 주장. 인간이 무엇을 할 수있느냐, 예배할 수있다. 사랑으로, 문화를 창조하며 사랑할 수 있다라는 기능적인 국면을 이야기 하는 사람은 칼 바르트-신 정통주의, 베리카우어-건전한 신학 노선에 있었지만 성경관에 있어서는 바르트의 표현하는 경향. 그러나 우리의 노력의 논리에 의하면 둘다 부족하다. 둘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데, 본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해되어야. 전인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존재가 선행되지 않는 기능이 선행되는가? 존재가 있고, 기능을 발휘 할 수있다. 날기위한 새의 기능은 날개가 있을때에야, 존재가 되어야 하기에 성경에 근거하여 두가지 모두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존재를 만들었을 때 존재할 수있도록, 사랑할 수 있도록, 피조물을 다스릴 수있도록 존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타락했을 때에는 둘다 문제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방향이 잘못됫다는 것은 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방향자체만 잘못? 구조 자체에 외곡된 방향으로... 그 전체는 잘 못된 것이다.


전통적인 개혁주의자들은 넓은 의미에 구조적, 협의의 기능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본질이요, 관계로 보기도 하였고, 형식적, 실질적 형상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재능, 창조성이라고 말하기도... 서로를 보면 연결되어 있다. 두 면이 다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에 속한다. 본질, 기능에도 말이다. 문제는 좁은 의미의 윤리의 기능적인 형상의 내용은 무엇인가? 좁은 의미의 형식상이 것은 무엇인가?  a) 참된 지식 b) 의와 c) 거룩.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은 전통적인 주장을 하는 헤르만 바벵크.. 웨스트 민스터 신도 개혁서들은 내용을 말한다. 성경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성경적인 용어로 표현했다. 그래서 성경적인 내용을 일상용어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있을까?  응답이다. 응답은 누가 누구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인데, 바른 응답이다.  똑 혹자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삶. 사랑가운데 연관되는 삶이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삶으로 나타나라. 셋) 하나님 인간. 피조물에 대한 바른 관계속에 영위되는 삶이다. 이렇게 정의 . 무엇을 좋아하는가? 셋 모두 똑같은 말이다. 표현의 문제가 아니고, 배후의 내용이 문제이다. 넷) 구체적으로  역사속에서 이루어 지는 중요한 것은 내면속에 내 거룩함을 세우고, 경건함을 다루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참된경건은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데. 관계성속에서 성화등이 이루어진다. 형상대로 경험되고있습니까 ? 우리 교회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있을까? 늘 부족하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적절한 응답이라고 볼 수있다.


네 번째 결론)


두 국면으로 이해할 때 내용은 매우 유익하고, 죄에 대해서 설명할 때 용이하다. 타락전에는 둘다 견지했다. 늘 바른 순종을 하는 상태였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온 결과는 파괴되고, 상실된 것은 좁은 의미의 형상으로설명될 수있고, 남아있는 것은 남아있는 부분이 있엇도, 죄의 영향안에 다 들어갔다. 오염되어서 전적 부패되었다. 이성적인 구조, 예술을 창조할 수 있는 감수성으로 본래적인 영적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전적인 부패를 말한다. 형식만이 남았지, 참된 본래의 기능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기적인, 유익을 위하여 이성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둘 사이에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유기적인 것이고, 절대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카톨릭은 양심도 건재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릇됨. 기계적으로 봄이 아니고, 유기적으로 봐야 한다.


다섯 번째 결론)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도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 모두가 비피조적인 관계이다. 신약이 교훈하는 바는 그리스도는 가장 탁월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고후 4:4인간속에 잇는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예수를 바라볼 때 그의 삶속에 그의 본질속에 드러나게 된다. 복음서 기자들이 계시한 복음의 내용에 따라 예수님 계신곳으로 가보자. 그는 마굿간에 오셨고, 목자들이. 동방박사들이.. 사관에있을곳이 없어서 마굿간. 해롯의 생명의 위협을 받아 도피하기도 했고, 구원의 경륜이 이끌어 주어서 헤롯이 죽고, 돌아오고, 12살에 내 아버지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공생애 전에 세례 요한이 어찌 세례 받으러 오십니까? 힝 하나님의 의를 이룸이 마땅하다.  그의 삶 자체가 구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대속적인 의미를 가진다. 때로는 삭개오를 만나서 내려오라. 아무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느냐?>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 미래를 열어주는 긍휼을 보여주시기도.. 사랑하는 제자가 입을 맞출 때 이제 곧 체포됨을 아시면서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요구에 자발적인 순종으로 응답하고, 겟세마네의 긴장의 기도는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자처하는...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한 평생을 바라볼 때 그에게서 가까이서 보면 낯선점이 있다.  a) 그의 신성 b) 그의 인성은 죄는 전적으로 없었지만 때 뭍은 우리가 서면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예수의 삶을 볼 때 하나님을 향했고, 전적으로 향함. 요한복은 4장을 보면 나의 양심은 ..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수가성 여인에게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이제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러 갔다가 돌아올 때 내양식은...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 존재를 가능케 하는 것은 양식인데,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 26:32? 내 원이 아니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우리의 갈등 구조속에 나를 부인하고, 전적으로 그의 주권에 옮겨 놓은 것이 참된 형상의 1차적인 기능이 있을 것인데.. 두 교회를 비교하면서 내 자신에 좋을 것인가? 는 형상에 있어서 역행이 되는 것이다. 직업을 선택하는 10계명. 사람이 가지 아니하는 곳으로, 봉급이 작은 쪽으로, 마누라가 반대하는 쪽으로, 단두대가 있는 곳을... 주님을 따른다 하면서 회중의 칭찬과 찬사를 받는 다면 내가 참된 선지자인가? 라는 질문. 100% 지지를 받지 못한다. 날마다 갈등구조가 있고, 참된 형상됨이 있음을 기억하라 둘째) 예수님은 전적으로 이웃을 향했다. 전적으로. 눅 19장 인자의 옮은 , 마가복음 섬기려 하고, 대속물로 주려함이다 전적인 타자이다. 섬김을 받음이 아닌, 섬기려하고, 대속물로 오는 생명을 주고, 그를 구원하고자 하는... 전적으로 그의 관심은 타자를 위한 존재이다. 요 15장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큰 사람이 없나니... 내 목숨을 버리노라.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다. 셋) 그리스도는 자연을 통치한다. 잔잔하라. 나라로야 일어나라. 모두가 회복됨. 이 통치는 이적적이다. 참 하나님이시기에.. 공통점은 피조물에 예속되지 아니하고, 피조물을 주관하는 주도적인 부분에서 우리와 유사하다. 명예. 피조물에 피배됨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 외곡되지 않는.. 현재는 비 인간화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조그마한 생명 부지를 위하여, 작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비 인간적 학대를 감수해야할 일들이있는데., 하나님 형상의깨진 현상들이다. 보편적인 일로 교회가 치부해 버린다면 선지자 적인 , 제사장이며 고난받는이를 교회로 이끌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서 그들을 회복하는 기능까지도 감당해야 하는데.. 민족의 고통을 대신 회개해야 하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데... 창 1장을 보면 창조 사역과 맥을 같이 한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인간의 존재. 전적 의존적인 관계이어야 하는데, 전적으로 향하는 것과 통한다. 두 번째. 인간을 단독자로 만들지 않고, 돕는자를 만들어 주었는데. 인격적인 존재. 사회적인 존재를 만들어 주셨다는.. 이웃을 향했다는 삶의 연속성이있다. 1:18절에 다스리고, 충만케 하라. 피조물에 대한 통치 문화명령등이 예수님이 피조물을 다스리고 통치했다는것과 맥락이 같다. 그러므로 예배적-참 인간일 수 있기에,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둘째-인화 협동적 존재- 나와 너의 관계, 셋째-문화적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 문화창출적 존재.- 참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기능을 볼 수 있다. 방향성이다. 구조가있다. 이성적인 구조, 종교적인 능력, 간성적인 것들...이 연결되어서 작용하도록 그럴 때 존재 자체가 하나님 형상됨을 이루어 간다. 이성양심도덕적이 이런 방향으로 오직 하나님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사랑하는 관계 수단화 하지 않는, 목적으로 대하는, 피조물을 다스리는 청지기적인 입장에 섰을 때형상됨의 현재적인 의미가 있다.  J. P. IC 운동. 평화 정의의 운도. WARC 세계 개혁교회연맹. WCC 이런 개열에서 신학 자극을 해왔다. 두가지 , 하나는 문제를 삼는 중독성은 문제가 있다. 하나님 형상 회복이라는 것은 내면에서 머물러서는 안되는 모든 의 평화, 창조질서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다른점은 그들이 가진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인칭론적, 형이상학적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전적부패가 아니고, 낙관론적으로. 계시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보편적이 관점에서 혼합적인 것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에. 의의 문제가 왜 거론이 되었는가?  셰계대전 이후에 종속관계로 이루어졌다 3세계는 자유와 해방. 권력자들은... 그러나 전쟁을 통해 황패화되어서 의식주가 문제가 됨. 경제 발전이 이런 관계에서 이루어짐. 산업화의 발전은 부익부 빈익빈의 결과를 초래하게 됨. 무위도식하는 것으로. 경제저의가 사회정의로 보고, 군대정의로 봄. 기독교에서 해결하기 위해서 의의 문제는 사회문제, 정치적인 것 이전에 종교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서 종교에서는 몰아내고, 사회, 경제적으로 해결하려는... 그래서 인간에 대해서는 매우 낙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에의해서 유토피아가 일어난다고.. 인간이 역사를 주관하는 원동력이 있다고... 은총이 아닌.. 그래서 우리의 관점과는 다르다. 하지만 주제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의 신학체계 속에서 의의 문제등에 대해서 논의해야 되어야.  하나님의 형상 개념은. 회복 개념은 내면적으로 개별적임이 아니고, 역사의 장 전체에, 삶 전체에 있는 포괄적인 관점에서 봐야 한다. 우리의 원리와 성경을 믿는 바안에서...




1999년 11월19일


제언 -


1. 인간의 전적인 부패, 전적 무능력 -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 존재하는 자임을 가르치고, 선포해야 할 것이다. 교육 내용속에 남아있도록 깊이 고백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인간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인본주의적인 시도에 대해서 비평해야할 것이다. 행동파 신학속에... 낙관적 상황분석, 처방이 잘못될 때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차이가 올 것이다.


2. 하나님의 은사요, 인간에게 주어진 책무, 과제이다. - 인간이 무엇인가? 피조적 인격적 존재. 창조주에 대해서 의존성, 절대 의존성을 가진다.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자유라는 측면이 본질적으로 주어짐. 의존성과 자유라는 것은 배타적 개념이다. 둘의 관계는 모순관계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모순관계가 현재적 존재적으로 경험되도록 창조됨. 우리는 모순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현존하도록 만든 것이다. 인간의 신비 가운데 하나이다. 구원론과 관련하여 칭의와 성화를 말하게 될 때 칭의는 의존성, 성화는 자유성에 관련되는...읜존성은 은사에 관련되고, 자유성은 책무에 관련됨. 힝하나님의 깊으신 뜻대로, 주권적 사역,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태어나게 해 달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아난 사람들이  후크만은 구원론에서 성화란 인간의 참여를 내포하는 성령의 역사라고 말함.   인간의 참여, 성령의 역사를 신인협동주의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인가? ok. 인간은 구원사역에서 인간은 zero 인가? 빌립보서 1-2장에서 착한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까지 이루실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성경의 두면을 진리로 말하고 있다. 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진다고 하면서... 인간에게도 회개하라. 믿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다. 둘다... 성경이 말하는 두 국면을 어떻게 조합을 할 까? 하다다 신입협동주의로 끌고 간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적인 견해로는 역설이다. 하나의 수평선상에서 조화시킬 수 없는데.... 역설적 관계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내생각은 너희 생각과다르며... 하나님 수준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언급할 수 없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이면서... 인간의 책임도 있는... 이해가 안되는  역설절 개념으로서 개혁주의의특징이다. 신형상 이해를 살펴보면서 칭의와 성화를 조화롭게 말해야 할 것이다. 


  도덕 행위론... 칭의만을 지나친 강조이기 때문에...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법정적인 것만 강조하여 도덕 행위만을 강조하였기에... 성화부분을 강조해야할 부분이 있다. 조화롭게 유지할 수있도록...  야고보서를 많이 공부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 구원의 받은 유무는 크리테리아. 즉 행위와 구분하여 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나무,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고 한다. 행위는 본지를 찾는다. 행위는 열매고, 본질은 나무와 같은데...  참된 믿음을 검증함에 있어서 열매를 봐서 나무를 안다는 것은 진리이지만,  포도를 보고, 포도나무임을 아는데, 감기가 걸리면 입맛이 떨어지고, 단것도 쓰게 되는데... 병이 든 경우에는 나무가 올바러도 결과는 병든 결과가 나오는 두 측면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열매는 나무라는 것은 진리이지만. 우리에게는 병든 상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병이 들었는데, 올바른 나무일 수 있는가? 병도 병 나름. 그 병이 치명적으로 악화한다면... 회복 될 수 있는 병. 이 병을 원죄와 같은 치명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된다.


  기독교 문 화 창 출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정보화 사회를 통해서 세속적인것들이 교류되는데... 이것이 인격이 형성된다고 할 때 큰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교회 교육이 먼저 정립되어야 학원붕괴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그는 단순한 세속주의 교육자가 아닌, 칼빈주의적인 성경적인 신학자요, 교육자였다. 그를 통해서 세속교육 속에도 이 영향력이 나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깊이 연구하여 세속교육에 회복을 위하여 이바지 해야 할 것이다. 형상회복에 차원에 속함. 특히 기독교 문화정립은 쉴 문화 공간이 없는 청소년... 학교에서의 스트레스...


  성경을 이해하는 관점에서는 회중들을 온전히 양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죄가 범람할 때 그들이 방파재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곳곳에서.. 그러므로 결국은 회중을 교육하여 질적인 성장을 함이 좋을 것이다. 뫼비우스의 교육방법중 요류는 자신들의 지적 수준보다 높아지지 못하도록 양육한 것이다. 독서과 기도를 힘쓰도록.. 회중의 수준이 높아질 때 소망이 있어질 것이다. 선포를 통하여 변화된 현 교인들이 삶의 전 영역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영적 각성 운동이 필요하고, 참된 변화가 일어나는 새벽을 깨우도록... 우리의 책임이다.  결국은 이 모든 일들은 말씀 + 성령이 가능하다. 세속교육에 기대하지 못하고, 질적으로 깨진 존재이기에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십자가의 공로,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회복될 수 있도록 하자. 




* 구조 - 이 말대신에 구성요소라는 말을 썼는데... 인간의 구성요소? 이요소, 저요소 들이 집적회로 즉 쌓여 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비성경적. 인간은 어떻게 구조되어 있는가? 삼분설, 이원론, 단일론이 있는데,  바울의 신학개념을 보면 바울의 인간이해가 어떻게 해석되는가? 레디는 a) 삼분설적인 경향이 있다. 그리고 b) 헬라철학의영향을 받아서 나타나게 되는 이분설이 있다. c) 혼, 영등의 분리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닌 용어가 전인을 가르키는 용법으로 혈과 육이 아닌, 인간들과의싸움이 아닌, 전인에 대한 표현이다라고 말한다. (단일론적인 것) 여기서 헬라철학적인 개념의 이분설을 동의하지만, 더 전문적인 용어로 실체적 이분설. 그러나 지금 우리 학교에서의 전통은 이분설이라는 말을 쓰는데, 담겨지 내용은 성경적인 관점에서해석하려는 관점을 가짐. 그래서 이분설도 둘로 나뉘는데, 래드는 데카르트 적인 안목이고, 문제는 이 용어 자체에 있는데, 둘로 쪼갠다, 분리시킨다. 용어 자체가 주장하는 내용과 조화를 이루지못하마. 더 좋은 용어?  최근 학개의 단일론은 칼빈주의 자들이면서 베리카우어.. 래드, 성경연구의 결과 반 이원론적인 경향을 찾는데.. 우리는 성경적 관점으로 이원론에서 보는데, 단일론이 나온 결론은 헬라철학의 반작용에 의해서 나온 것이 단일론인 것이다. 전인으로 살다가 전인이 죽고 주님 재림시 전인이 부활하는데... 성경적 관점에서 성경적 이해를 도출하도록 하자. 수구주의는 아니다. 타당하다면 어떻게, 부족하다면 무엇인? 결론은 부족한 점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 삼분설 - 헬라 세계관을 인간관점에서 이해함. 헬라 세계관이란? 신이 있다. 세계가있다(물질 세계) 헬라인들은 신과 세계의 관점을 이원론으로 해석하는데, 신은 선하고, 세계는 물질적이기에 악하다. 유가치 하고 무가치하는 대립관계로... 완충작용으로 로고스인데, 신과 인간을 로고스로서 중립작용을 하는데... 인간은 퓨뉴마는 영적이 존재이고, 선하고, 유가치, 소마는 인간이고, 악하고, 무가치한 대립적. 그런데 퓨쉬케는 영.육적 성격을 띄는데, 혼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동물적으로서 동물적인 성격. 인간속에 있는 신적 본채의 일부이다. 동물적 생명의 원리. 그래서 영은 신과 관련. 인간의 비 물질적인 퓨뉴마에 관련됨.


역사적 관점 -


고대교회 중세기 종교개혁 18-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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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게 삼분설이 나타나는데 그는 4c기 사람. 그의 문화에는 퓨뉴마, 퓨쉬케, 소마가 나오고... 고대교회는 동방교회는 헬라 중심으로, 알렉산드리아 교부들, 오리게니스, 영지파에 속한 사람들, 클레멘트, 미스아일의 그레고리 등이 삼분설을 대변함. 인간의 구원을 오리게니스는 플라톤적으로 말함. 인간을 위한 구원은 삼중의 의미를 가진다. 문자적, 도덕적, 신비한 영적인 의미. 인간이해에 대해서 삼분설을 주장하는 오리게니스, 이 당시 4c 라오디교회 감독으로 그리스도의 무죄를 설명하기 위해서삼분설을 주장했는데, 모든 사람은 퓨뉴마, 퓨시케, 소마가 있는데, 예수는 로고서가 대치되어서 죄가 없음을 말함. 이 주장은 381년 콘스탄대회에서 이단으로 말하게 됨. 예수님의 참 사람되심을 부인하게 됨. 삼분설이 쇠퇴하는... 반면 서방교회는 이분설로서 터툴리아누스, 어거스틴


중세기는 - 신지학적인 요인. 신비주의적인 접실론을 주장. 이들에게는 삼분설이 주장됨. 중세기에는 동방교회는 삼분설. 다메섹 요한,  서방교회는 이분설. 주창자 안셀무스.


종교개혁은 삼분설에 대해서 영향을 미치지 못함. 교회의 갱신 믿음으로 구원 받음에 대한 것이기에... 중세 스콜라 주의인 서방교회의 의미를 가져옴.


18-19c - 삼분설의 르네상스 시점 특히 중재파 신학자들을 통하여 삼분설이 부흥하게 됨. 중재파 신학자들의 신학 성향? 중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조화를 시도함. 철학과 신학. 이성과 신학. 폴티리히는 나의 사상적 성향은 중재파 신학자들이다. 철학이 문제를 재기하고, 신학이 대답하는.. 상관관계적 관계속에서..  삼분설은 논리적이기에 이성을 강조한 중재파 사람들이 주장한 것은 가능했다. 이 옇향은 독일과 영국에 확대되는 현상이 나타남.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겼는데. 신학자들이 구원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호프만, 토마시우스, 파를레스, 로데 메이어 등등의 신학자들이 비 성경적임을 강조함. 퇴각하는, 쇠퇴하는 삼분설... 지금까지 삼분설주창자인 벨리테까지도 문자적으로 사도는 최종적으로 이분설적이었다. 그렇게 생각함. 많은 신학자들이 바빙크도 삼분설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델리취의 성경심리학. 179pp에 보면 성경은 배타적으로 2분적, 3분설적 으로말하기도한다.  여기에 대한 비평적 견해. 박형룡 교수.. 델리취는 범주 구분을 하지 않고, 차원적으로만 하고있다. 실재적 실체와 기능을 구분하지 않고, 기능에 근거하여 삼분설을 주장했다. 델리취의 글 속에 영, 혼, 영혼 혼은 영의 외적인 국면이요, 영은 혼의 내적인 국면이다. 혼과 영이 존재론적인 구분입니까? 관점의 국면입니다. 이말은 델리튀가 삼분설적이지만 이분설적인 개념을 가지고있으며, 비평자들의 정당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독일의 신학자 뵈는 삼분설을 반박한 사람이라고 델리췌에 대해서 말함.


* 이분설 - 성경을 보면 인간은 두 국면 때로는 퓨뉘마 소마, 푸쉬케 소마로 나뉘는데, 영과 몸, 혼과 몸이라고 하는데.. 영과 혼은 다른 실체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고, 동일 실체를 지침하는 두 다른 용어에 불과함(유사어) 왜냐하면 성경에 아무 의이 없이 나오기 때문이데, 죽음의 문제, 죽은자를 묘사할 때 교체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말만 다르지 똑같은 실체, 사건을 가르키는 것이 아닌가? a) 죽음에 대해서, 70LXX에서는 그 혼이 떠난다고 할 때 죽음 동일한 죽음이지만, 영이 떠난다., 혼이떠난다고 말하고 있다. 창 15:18에는 라헬에서, 엘리야가 죽은 아이가 죽었을 때 그... 아이의 네폐쉬가 돌아왔다고.. 동일한.. b)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원문은 죽임을 당한 혼들이... 히브리 12:13에서는 영들이 죽은 자들은 동일하지만,  혼, 영이라고 표현함. 동일한데...그러나 혼과 영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 삼분설에 대한 이분설의 비평


성경구절들을 살펴보고, 사상적 전재의 부분에 대해서 논의해 보자.\


삼분설들의 성경구절 - 살전 5:23, 히 4:!2, 고전2:14-3:4, 15:44 하나님의 의도를깨닫는 것이중요한데.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을 통해서 준 편지이니까.. 의도를 볼 수있어야지... 너희의 온 영과 혼과 영... 온전히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kai 가 매우 중요한데. 별개의 분리된 실체이다. kai의 용법을 가지고, 영과 혼과 몸이 독립된 실체들이라고 본다. 그리고 정관사가 붙어 있기에... 그러나 막 12:30절에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에서는 kai가 세 번나오는데.. 해석학적 근거에 의해서 한가지는 온 이라는 형용사가 세가지 모두를 수식하는 형용사이다. 이것이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에서 각가 단수인데, 이 안에 있는 세가지 모두가 단수적 개념을 사용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혼영몸은 전체를 하나로 보는 단수적 개념을 봐야 하며, 전인적 표현방식으로 사도바울이 사용하고 있다. 박형룡도 동의, 리덜보스도 '바울의 신학' 128-129pp에서 사도바울이 전인적 표현방식으로 썼다고 표현하고 있다. 히브리적 관점에서 전인을 표현한 관점이다.




1999년 11월 26일




오히려 성령은 영육 이원론을 반대한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영과 육과 혼이 온 전히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고후 7:1절 보면 육과 영의 온갖 영에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하자. 벧전 1:2 너희가... 너희의 영혼을 깨끗하여.. 오히려 영혼도 깨끗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와 같은 이유로개혁신학은 영, 육 이원론적인 삼분설을 거절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신학자들이  퓨튜마, 퓨시케를 두 단어로 보더라도 두 용어를 구분할 수 있다고한다. 인간은 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그것은 혼이다 라고 함. 성경적 부류를 할 수있다. 관점의 차이가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동의를 한다. 바빙크, 호니크, 카이퍼, 루이스 베르호프, 죠지 레드도 마찬가지. 루이스 베르코프는 영이라는 말이 쓰일 때 영적인 요소로서 몸을 제어하는 생명의 원리라고 말함. 생명과 행동의 원리로 퓨뉴마를 사용하고 있다. 사람안에 있는 동일한 영적인 요소, 행동의 주체로서의인간. 책임적 존재. 성경적 근거를 보면 시 104편 1절에 내영혼아... 내 퓨시케여... 행동의 초점임을 말한다. 눅에서 내 영혼에게 이르되 내 푸시케에게 이르되... 강조점의 차이점을 루이스 베르코프는 말한다. 하나님과 타인과의 규정속에서 자아를 말할 때 퓨뉴마를 말하며, 퓨시케는 살아있는 존재를 말할 때 사용하고 있다. 즉 관점의 차이가 있다. 리덜보스는 구태여 구분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




정의 : 성경에 혼도 영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아무 이유없이 교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백묵과 분필.. 이럴 때 교어적으로 사용하는 거 보면 유사어로 결론을 내릴 수있다. 그러나 관점의차이는 인정할 수 있다. 관점은 삼분설주장과 같이 영에 의해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혼에 의해서 느끼고... 영과 혼은 분리된 다른 실체라 존재는 같으나 기능과 관점은 다르다. 이분설자들. 결단하고 결의합니까? 아니오. 하나의 동일한 영혼이 사유하고, 결의하고 결단한다.  성경심리학을 보면 용어가 너무 많아 혼돈이 많다. 지. 정. 의지... 매우 혼돈을 경험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한 영혼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지정의지를 말하는 것은 우리속에 독립된 실체로 보는 것입니까? 결단하는 의지적인 구조가 존재론적으로 따로 있다고 볼 수 있는가? 독일 개혁신학자 하일리히 힐페는 영혼이라는 것은 인식의 실체라고 말한다. 인식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인식의 실체로서의 영혼은 두가지. 하나는 지성 다른 하나는 의지로 나타나는데 지성은 그 대상이 선한가 악한가를 판단하는 능력. 대상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는 능력.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과 진의를 구분하는 것은 다르다. 선과악을 구분하는 능력을 실천적이해력이라고 불렀고.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을 이론적이해력이라고 말한다. 거절하는 능력, 거부하는 능력의 의지를 의지이다. 인식의 행위라고 두가지를 볼 수 있는데, 존재는 아니고, 지정의지가 영혼은 구분되어야 한다. 여러 기능으로서의현상이 지정의지이지, 지성적, 감성적 구조가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전인적으로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창 2:7절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니... 생령이 된지라. 내 쉐마를 부으니. 내페쉬하야가 되니라. 루아흐를 불어넣지 않았다. 영의 불어넣음으로 인해 혼이 됨. 영인 동시에 혼인 것이다. 영혼의 시작의 근원을 말하지만.생령이라는 것은 영혼으로 국한시킬 수 없다. 생기를 불어넣으니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물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생물도 내페쉬하야이다. 창조적 능력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보편적인 개혁신학자들의 관점이다. 구약신학자도 그점에 대하여 동일한 의견이다. 이런 관점속에 삼분설과이분설을 비교해 보앗다. 실체적 이분설에도 문제가... 전통적인 이분설은 성경이 말하는 쪽으로지향하고 있다.


제임스 바이어는 1961년에 성경언어의 의미론이라는 책에서 하나의 분수령으로서의 의미. 1915년 출발한 내용에 발전시킨 것인데. 그들은 큰 전환점이 일어난다. 19crl의 언어학과 20crl의 해석학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지난세기의 언어학은 통시론을 20crl 언어학은 공시론을 주장하는 등 큰 변화 통시론은 말의뿌리. 어근을 찾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어떻게 개념이 바뀌었는지를 직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공시적 접근방법은 원 언어들이 어떻게의 경과에는 관심없고, 특별한 시간으로 존재하게 된 의사소통의 구조속에서 말과 말 속의 관계. 주어와 주어와의 관계에서 찾으려는 방법이다. 쉽게 말하면 문맥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어느것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우선적으로 공시적 접근방법을 하고, 나중에 통시적인 것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용어가 같다고 개념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한 단어의 여러 개념이 들어있다. 의미는 그중의 하나. 그 문맥속에는.. 그래서그것을 찾아야 한다. 로버트 로우 아크로는 영어를 쓰는 사람들의 언어의 양태와 맥시칸인들의 스페니쉬의 언어 습관을 보니까 동일한 개념을 가리키는 단어에도 차이가있음을 발견함. 키,렌치.... 멕시칸인은 라베라고사용. 하나의 단어로 여러개로 해석하는데..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의 구별된 종류가 없느냐? 있다. 말 가운데 수도꼭지가 될 수 있고, 열쇠도 될수 있는데.. 그래서 옛 주장의 가설을 무너뜨림. 개념의 차이는 다양한 용어들을 필요로 한다. 가 가설이었는데.. 이를 뒤짚어 엎게 됨. 이렇게 연구된 과정속에 고전된 보편개념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됨. 처음 이 말의 의미는 전재산을 가르켰다. 세월이 지난후 내 말을 가진 재산이, 이후에는 내 재산중에 소과에 있는 재산이라는 단어로 발전적으로나가게 됨. 처음과의 의미가 다르게 되는... 이 말은 지시어이다. 그리고 지시되는 피지시어가 있는데,. 개념일 수 도 사물일 수도 있는데.. 이 관계가 어떤 성격을 갖게 되는다? 필연적인가? 아니. 오히려 인의적이다. 관습에 의해서.. 자연스러운 약속에 의하여... 필연적이지 않는다. 이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논리들이 혼, 영, 몸을 해석할 때 중요한 관점으로 될수 있다. 제임스 바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한 원리를 거절했다. 예를 들면 h.W 로빈슨, 페디슨, 콜라이프 오만...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언어구조는 사용자들의 사상적 특징, 구조를 반영한다. 히브리인의 언어구조는 히브리의 사상과 구조를 갖는데, 제임스 바아는 거절함. 차일즈는 말하기를 히브리적, 헬라적 사고의 차이는 로빈슨의 주장과 같이 차이는 크지않다. 즉 제임스의 주장과동일하다. 논리를 주장할 때 일면의 일리가 있음에 동의하고 논리 전개하겠다. 이와같은 천편논리적인 것이있지만... 톨라이트 오만이 히브리적 사유와의비교속에서 헬라적 사유의 비교. 83p 보면 IS는 보편적으로히브리 사람들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개념을 갖을 때 개념에는 특징이 있는데... IS의 개념은 구체적인 개념, 개체사건에서 나온 추상적인 것만이 아니고. 구체적인 그 자체도 포함된 통전적 사고, 보편적인 것들이 그들의 사유를 지배한다. 즉 히브리인이생각 할 때 헬라인은 분석적이고, 히브리인은 종합적이다. 맞습니까? 헬라인은 사색적, 명사적. 히브리인은 실재적이고, 행동적. 헬라인은 정적이고, 히브리인은 역동적. 전자. 이원론. 후자. 통전적. 전자. 분석적. 후자. 통합적. 모압인 중에서 그가 갖는 보편적인 개념을 먼저 떠올리고, 그속에는 개별적인 것들이 포함되는 등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 노만이 주장한 내용. 구체적인것과 추상적인 것에는 히브리인에게는 구분되지않는다. 예. 톱에는 선, 선한, 선한사람.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구별되지 않고, 종합적으로이해되는... 즉 셈족언어도 품사사이의 구분이 명료하지 않다. 종합적인 사고 때문에.. 신약이 구약을 인용할 때 70인경을 인용하며, 그 해석이 세속적 헬라적인 것으로 해석하면 안되느...


  히브리적인 인간이해. 헬라적 인간이해는 차이가 영육이원론적인 긴장이 없다. 대립이 없다. 히브리적 인간이해에는.. 몸을 말하는 바살이 있는데.. 사람에게도, 동물에게도 적용됨. 1차적인 것은 사람으로서 대립의 개념으로서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쉽게 지나가는 존재... 창 6:3절에 사 31:3 이 사람들이 내페쉬를 쓸 때. 바사르와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고, 히랍사람들이 쓰는 몸과 구분되는 정신적인 세계. 내폐쉬는 구약적인 배경에서 생명의 원리를 말한다. 발전적으로는 인간자신을 가르킴. 생명의 원리. 창12:5절




1999년 12월 3일




   단일론 - 이론적 사고의 신 비평 4권의 책 속에 단일론적인 관점들이 있다. 얀스의 책속에는 피조물에 관하여..


단일론자들이 어떤 배경속에서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되었나? 교회는 삼분설적인 경향을 거부했다. 비평했다. 비평적 태도로.. 이유는? 헬라철학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이원론적인 흔적이 나오고 있고, 윤리적 행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육 이원론적인. 영육 대입이라는 성향 때문에 거부하게 됨. 그러나 단일론자들은 이분설을 주장하는 내에서도 분극적 긴장이 표출되지 않는가? 그래서이분설도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 단일론자들의 표적이 되는 이분설중에는 한 경향이 17c의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은 신학속에 들어오면서 인간이해의 관계에 대해서 실체적 이분설이 비평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분설이라는 용어자체가 디케템네인. 둘로 쪼갠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영과 육이 쪼개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용어를 가지고 성경적인 용어를 담기에는 부적절 하다. 성경적 이분설. 이 자체가 연약한 점이 있기에 연구해 보기 바란다. 인간구조의 성경적 관점. 전통적으로는 실체적 이분설과 일반적인 이분설과는 구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분설을 받아들이는데 용어의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단일론자들은 이분설 속에도 중재의 변증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서로 긴장되고, 대치되는 상치되는.. 중재의 변증법을 쓰지 않느냐? 두 실체가 분리되었다는 것을... 궁극적 긴장. 이원론적 긴장이 있다. 그래서 그것도 성경적인 비평을 가져야 한다고 말함.


 


   * 이원론 - 이중성, 이원성으로 번역, 그러나 전자와 후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원론일 때는 궁극적인 긴장. 영육의 대립으로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고... 하지만 이원성속에는 그런 개념이없다. 조화와 통합을 모색하는 이원성이다. 두 면이다 세상 창조시 이원적인 모습으로 창조한 것이 많은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궁극적 긴장, 대립 갈등이 아니고, 돕는 배필로.. 피차 돕는.. 그리스도안에서 복종하라.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한 목적으로 일치와 조화와 통합을 향하여 두 면이 나아가는 그 의도이다. 이원론이아닌 이원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학에 있어서 논쟁의 초점은 이원론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반에 둔 것으로 궁극적 긴장, 대립, 영육대립이 없어야 한다. 분명히 성경적일 때는 두 이원성이 있다. 눈을 감으면 전혀 보이지 않는 내 자아가 있고, 만저지고, 느끼는 시공간적인 내가 잇다 .영혼이 있고, 몸이 있지만 대립되거나, 상충되는 것이아니고, 본래 선한모습이다.  데카르트의 인간이해. 실체적인 것과. 이원성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원성은 부인하지 않는다고. 마음과 몸을 얀스는 겉사람은 후페하는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겉사람. 속사람. 두 면이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고 말함.  우리의 속이 날로 새로워져야 하는 경험들이 우리 속에 있어져야 한다. 주께로 가까이 나아가길 바란다. 두면이 있기에 단일론, 이원론을 말해도 두 면을 부인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분리나 긴장속에 있는 것으로보는 것이 아니고, 둘다 선하거나, 둘다 악하다라고 봐야.. 우리의 싸움은 전인과 전인과의 싸움이다. 사람과 중생이후의 사람과의 싸움이다. 몸과 영혼의 싸움이 아니다.


451년. 칼케돈회의의 신조 - 인간은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있다.


개혁파 신조로 중요하게 여기는 하이델 케스파이스무스는 1문과 57문은 형벌받는 일을 영혼과 육체가 형벌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영혼과 몸의 구원. 양면을 다 말하고 있다.


벨직 신조 - 라틴판에는 인간은 두 구분으로 되었는데, 몸과 영혼으로 되어 있다.


단일론자드은 전인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이 신조들은 전인을 표현하는 것으로 신조를 해석하게됨.




* 도예베르푀 사상 - 단일론자. 신학자라기 보다는 기독교 철학자이다. 참고상황 ; 인간실존의 문제, 그러나 여러문제중에서 궁극적인 문제.그러므로 중심되는 문제. 이 문제는 어떤 자율적인 철학체계를 통하여서 문제의해답은 결코 얻을 수 없다. 이 문제는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최후의 문제는 그 성격상 종교성을 띄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신 비평 372pp에 그러므로 실존주의 철학을 신뢰하지 않는다. 왜? 인간 실존의 깊은 곳에 직접 접근하여 인간을 규명하고자 하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실존주의의 영향받는 것에 대해서 유감을 표함. 성경이 말하는 바가 가장 중요하다. 사람에 대해서.. 본질적이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된다. 기독교 철학적인 인간학의 임무는 무엇인가? 인간을 분석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교훈의 도움을 받으면서


* 엥캐니스적인 구조책. 의미는? 신학자의 말이기에 도예베르푀의 스스로 만든 말이 아니고, 스위스의 헤이든 하임의 용어를 원용함.  이 말이 무슨 뜻? 그 자체의 근본구조와 근본 원리가 전혀 다른. 식물 광물 사회적인 관계... 서로는 내적 구조가 전혀 다르다. 그 자체의 근본구조도 다르고, 존재로 다르다. 맞지 않는다. 사회적인 관계의 여러 관계가 직조관계속에 있다. 하나의 구조형성되도록 짜는...원래 이 말은 싸다. 함축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엥캅시스적 관계라는 것은 부분과전체. 그 근본내적과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신이론적 사고의 신비평 694pp에 있다. 그러면 인간은 여러 개체구조들이 엥카팁스적으로 복잡한 구조책이라고 말한다. 4가지 개체구조. 첫째. 물리 과학적인 특성을 가진 구조이다. 그 개체로서 인간의 몸이 아니다. 더 높은 개체구조를 통해서 인간의몸으로서의의미를 가지게 된다. 첫 구조는 신체의 부패와 함께 그 과정속에서 풀려나게 된다. 화학적으로 분해되면 성질이 아닌 것이 생겨나게 된다.  두 번째 구조는 생물적인 구조의 특징. 생장하는.. 살아있는 세포의 개념. 합ㄱ성물에 대한 이해. 자체로서 영육 주줘. 통제를 받지 않아도 되는.. 세 번째. 본능적 감각기능. 태어나면서부터 떠날 때까지 자율적으로 활동을 한다. 마지막으로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특징. 인간 신체의 행동구조라고 한다. 행동구조. 인간구조의. 소크라테스가 군복무일 때 막사 밖에서 봤는데, 사색에 잠겨있다. 밤이 지나도 그대로 사색에... 겉으로 보면 아무 일도. 정지된 상태. 하지만 내면속에서 큰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내면속에서. 이것이 직조물로 형성하는 개체구조로 작용하게 된다. 노동을 통해서 그리스도됨을 배워야 한다.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좁은 의미의 십자가의 도리 뿐만 아니라 문화명령도 함께 포함되는.. 이 명령하시는 그리스도의 땅과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권위를 높여야,... 복음명령과 문화명령이 통합적으로 사고되어야... 그러므로 노동이 중요하다. 그러나 신학하는 일이 아무일 아닌 것 같아도. 우리 내면적으로는 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흥망성쇠가.. 이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굉장한 일들이... 직조적 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무엇인가? 듣기도, 보기도, 깨닫기도, 믿기도..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런 다양한 경험하는 자아가있다. 내가 보고, 믿지만 내가 경험하는 하나로 주장되지 않는다. 보는 것으로 내가 규정되지 아니하는... 나 자체. 이것은 신비의 조화이다. 엥캅시스적. 직조이기에 분해가 가능. 몸은... 그러나 나 자체는 분석의 자체가 되지 않는다. 기독교의 신비에 속한다. 그러나 나와 몸은 너무 밀접하다. 나와 몸과 분리하여 경험하지는 못한다. 몸까지 포함하여 나를 파악하게 된다.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실존이 자유롭게 나타나는 영역이다. 성경적으로 인간이 무엇이냐를 깨닫고 나서.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발견한 인간의 진리를 적용하여야 한다는.. 성경적 인간이해를 삶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목회자는 신학자이어야 한다.




* 정리 - 단일론자 ; 인간은 둘이나 그 이상의 부분적인 집접된 것이 아니다. conglameration. 쌓아 모은다. 쌓는다. 인간을 여러 분리된 요소들을 쌓아 놓은 것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단일하다. 집접의 회로개념은 아니다. 사실은 반동적 성향에서 나왔다. 플라톤적인 이원론적인 반동적 성향 반동은 극단은 극단을 표현하기에 반동은 판단중지하에서 언급해야.. 결국 우리의 입장정리 이 모든 것들을 보면서 우리가 이해하기로 성경적 관점이 무엇인가 결국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인간의 영구와 육이 분리되지 않는다. 결코. 영. 혼 두면이 있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조건은 피조조건이 충족되는 한. 살아있는 동안에.. 그러므로 생명적으로 결속되어 있다. 영만 사람? 몸만 사람? 이라고 하지 않느낟. 죄를 지을 때도 영. 몸이 죄를 나속에 통합적 속에서 이해될 때의 그 존재가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속의 두 속의 평행적 관계는 헬라적 사고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일론자의 주장은 전인으로 창조함으로 살고, 죽고, 부활. 전인이 죽는가? 인간 자체가 종식. 극단적 단일론은 죽음과 주의 강림사이에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중간기 상태라고 말한다. 믿는 자의 영혼이 어디로 가는가? 어떤 상태로 있는가... 주 강림하기까지 별세하는 신자들의 영혼은? 어떤 상태? 여기에 대한 주장들이 a. 여호와 증인. 그리고 안식교의 주장 - 주음과 부활사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멸절설. b. 죽은 직후에  중간적인 몸의 형태를 취한다. 낮은 이땅도 아니고, 영광스런 부활체도 아닌 상태 c. 극단적 단일론자들의 언급하는 영혼 수면설을 주장. 잠잘 때 의식이 없는데, 무의식 상태로 존대한다. 재세례파가 여기에 있다. 루터파 신학자. 오스카 쿨만 등.. 빌 3:21, 고전 15:42-43 그가 만물을... 우리의 낮은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태로 변화... 나팔소리가 나매 변화되리니... 낮은 몸과 영광의 몸의 중간상태가 있는가> 없다. 부활장 에는 욕된 것으로 심고,,. 영의 몸으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살며... 중간단계가 없다. a. b. 모두가 곤란한 주장이다. 빌 1:23 - 내가 둘 사이에 끼였으니... 더욱 좋으나 육신으로.. 유익될 것이다. 죽으에 대하여 초연함. 여기 장막에 머뭄도 좋고. 떠남도 좋고... 우리의 관점적으로 생각하지만 죽음을 직면하게 되면 다양한 양떼들로 여러 결과들이 나올 것이다. 훈련을 통하여 죽음에 직면한 상태에서 얼마나 달렸는가? 순간순간 죽음에 직면하는 그로서는 깨닫게 됨. 실천적으로 체득되었으리라. 부디 우리도실천적인 것으로 그의 고백과 같이 되기를..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좋다. 는 것은 의식적 작용이다. 의식은 기능? 실체? 기능이다. 의식할 수 잇는 기능이 있고, 실체가 있기에... 그러므로 의식의 상태가 선행되어야 하기에...a. b.는 잘못됨. 성경을 보면 오늘 내가 너와 함께 낙원에 가 있으리라.. 낙원과 천국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차이가 있는가? 불연속성? 완성되는 그 나라와의 관계는? 앞으로 더 연구. 종말론에서.. 핸드릭슨의 종말론. 오성종 목사님번역. 안토니오 호크마의 입장도 마찬가지. 바울의 고백 삼층천 체험. 그 자신의 체험을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기를 감추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는버리는 사도바울의 모습. 그의간증속에 말할수 없는 경험가운데.. 낙원에. 파라데이소. 같은 경험인데, 낙원, 삼층천의 동일한 말을 함. 즉 같은 곳을 말한다. 삼층천? 핸드릭슨은 a. 구름이 잇는 하는 b 별이잇는 c.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면 낙원이 하나님나라와 같다. 부흥사가 말하는 천국과는 다른.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재리한 이후에 완성될 하나님과의 나라의 차이는 영혼만 주와 함께.. 이상태에 있는 그들은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실 복을 기다리고 있다. 사도바울은 그의 상급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점에서 구별이 있는 것이지 낙원이 열등한 장소가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과 육이 분리된 정녕죽으리라. 죽음의 삼중적 의미에서.  형벌이 집행되는 시간이다. 부자연스러운 상태. 분리는매우 부자연 스러움. 무의식 상태로 된다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영육이 분리되는 것을. 몸은 무덤속에 있고, 홀연히 부활하는, 변화되는.. 먹히든, 빠지든 그들 찾아서 신령한 몸을 부활한다는...  살아잇는 동안에는 영육이 분리되지 않으며, 죽으면 분리되고, 부활 할 때 다시 연합하는.. 이 땅에 사나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극대화 하고, 여기서 누리고, 감사하고, 주를 향해 바라보고 더높이 여겨짐이 이루어지길...




1991년 봄, 여름호에 신학지남을 참조하라. 죄론은 시험범위에서 제외. 기계적인 암기가 아니고, 강의된 내용과 소개된 내용을 섭립하고, 질문에 의도에 따라서 대답해 주기 바란다. 준비한 대로가아닌.. 문제는 %가 있는데, 비중이 큰 것은 분량도 많아야... 염려하지말고, 포도송이를 들어올리듯이.

 

 

인 간 론


1. 인간론의 중요성과 그 종류에 대하여 설명하라.

지식의 주체이자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인간만이 자신에 대해서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자기 반성적 존재라는 말이다. 그래서 현대철학과 현대신학은 인간론에 집중되고 있다. 철학적 인간학의 창시자인 막스 쉘러(Max Scheller)는 철학의 문제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Was ist der Mensch?)라는 하나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했다. 판넨베르그(W. Pannenberg)도 그의 인간학 첫 페이지를 그 질문으로 시작한다. 바르트(K. Barth)는 Theologie를 신론으로 부르는 것을 재고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Theologie에서 다루는 주제는 신론 이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Theo-Anthropologie, 즉 신인간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것은 신학이 ‘인간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Gott als der Gott der Mensch)과 ‘하나님의 인간으로서의 인간’(der Mensch als der Mensch Gottes)을 다루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인간론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제시해주는 좋은 예들이다.

그래서 철학자들도 인간에 관한 탐구를 계속해 왔다. 플라톤은 세계를 현상과 이데아의 이원된 두 세계로 이해하는 이원론적인 철학에 근거하여 인간을 이해했다. 즉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으며,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했다. 플라톤의 사상은 근대의 데카르트에게 이어졌는데, 데카르트는 2중적 3실체론을 주장했다. 무한실체인 신과는 달리 유한실체로서 물질과 정신 두 가지를 인정하고, 인간은 이 두 요소가 결합된 독특한 존재라고 했다. 또한 결합된 두 실체중 물질은 마음보다 열등하다는 견해를 취했다. 이러한 견해는 당대의 케플러에게 적용되었다. 그는 “물질이 있는 곳에 수학이 있다”는 말을 통해서 물질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과학적 세계관을 표현했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에 와서는 인간의 ‘마음(心)’까지도 조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데에 이르렀다.

또한 플라톤의 이원론을 반대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했으나 결국 넘어서지는 못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이라는 원리를 통해 현실 세계에 더 큰 의미를 두었는데,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의 전제가 되었으며, 또 그의 철학은 로마교회 교리의 기본이 되었다. 또 범신론적 경향을 가졌던 플로티누스는 유출설을 통해 일자로부터 유출된 최하위의 존재인 물질은 악하다는 영육이원론적 사고를 가졌다. 이러한 플로티누스의 사상은 어거스틴에 의해서 선별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어거스틴은 악에 관한 형이상학적 해명을 할 때는 유출설적 견해를 빌어 썼지만, 세계에 관한 유출설적 설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학은 자연과학적 인간학, 철학적 인간학, 신학적 인간학으로 구분된다.

자연과학적 인간학은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 획득된 지식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인간에 관한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이론을 성립시키지 못하고 경험과학에 의한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인간의 양상을 사실적으로 기술하는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윤리나 종교적인 영역에는 함구할 수밖에 없다.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본질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한 지식을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획득하고자 하는데, 인간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되며 그것을 조정할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아 독단에 빠질 우려가 많다. 또한 철저하게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이성 독단적에 입장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학적 인간론은 성경적 인간론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이다.

신학적 인간학은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현상적인 것도 아니고 경험적인 것도 아니며 귀납법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연역적이며 아프리오리(a priori)하며 권위 의존적이다. 즉 계시를 전제한 하향적 구도 속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계시적 권위를 가지고 인간을 다루는 것이 신학적 인간학의 특성이요 본성이다.

그런데 교회사를 보면 인간학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의 교리에 관한 진술은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라 진술하고 있다. 어거스틴, 칼빈, 롬바르두스, 심지어 칼바르트조차도 사도신경의 구조 속에서 교리적 진술을 한다. 그것은 인간론은 마땅히 신론의 구조 속에서 파악되어야 함을 시사해주고 있다.


2. 인간론을 신론(창조론)의 구조 속에서 다루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라.

신학적 인간론일지라도 인간론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교회사, 특히 교리사를 보면 인간론은 신론, 특히 하나님의 창조론의 구조 속에서 거론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이요, 창조의 궁극적 목적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 창조 이외의 창조는 모두가 인간을 위한 목적 지향적인 창조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목적의 중심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신론, 특히 창조론적 구조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둘째, 신학적 인간학의 성격 때문이다. 신학적 인간학은 철학적 인간학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 to God)가 다른 인간학과 신학적 인간학을 구분하는 경계이다. 따라서 신학적 인간학의 성격상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셋째,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가분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위기를 맞았을 때 외치는 외마디 소리 “하나님!”은 종교적 내면을 함의하고 있다. 즉 인간은 실존적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종교심’ 또는 ‘종교의 씨’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 즉 창조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인간론이 신론의 구조 속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궁극적인 근거는 인간론을 연구하는 목적과 관련된다. 인간론은 인간을 배움으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기 위함이요, 인간을 배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더욱 깊이 섬기기 위함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신론의 구조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3. 인간론을 연구하는 목적에 대해서 설명하라.

인간론을 연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인간을 배움으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기 위함이요, 인간을 배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더욱 깊이 섬기기 위함이다. 나아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죄악된 존재인가를 알고 하나님이 얼마나 온전하시고 성결하신 분인가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깨닫기 위함이다.

또한 인간론을 연구하는 것은 교회를 위한 인간학, 교회를 위한 신학을 위해서이다. 인간론은 교회를 위하는 신학, 삶을 지향하는 신학, 삶을 위한 신학이라는 지평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즉 Praxis(Context)를 위한 Theorie(Text)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테오리에 집착하고 자유주의는 프락시스에 집착해 왔다. 그러나 양자 모두는 교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테오리와 프락시스는 결코 독립적일 수 없고, 양자 사이에는 해석학적 순환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본문에서 출발하여 상황으로 그리고 다시 본문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Praxis와 Theorie의 해석학적 순환이 이루어질 때 교회와 인간의 삶을 위한 현실성 있는 신학이 된다.

그런데 양자가 해석학적 순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해도 어디에서 출발하며, 무엇을 우위에 두느냐에 따라 다른 양상이 빚어진다. 개혁주의적 정통주의는 본문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그러나 해방신학자들이나 종교다원주의자들처럼 프락시스, 즉 상황에서 시작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상황 우위론적 신학은 상황이 선포를 주도하게 되기 때문에 상황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면 선포가 없어지게 된다. 또한 전부가 선포되어야 할 말씀이 상황에 종속하기 때문에 상황적인 말씀만 선포되고 또 상황만 강조되기 때문에 교리가 변질될 우려가 많다. 상황 우위론적 접근 방법은 교리의 축소와 왜곡, 변질을 초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Praxis를 우선할 때는 교리 축소주의와 교리 왜곡 현상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개혁주의적 신학은 상황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신학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Theorie에 둔다. 삶의 원리가 성경 본문 속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나와야지 현실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론도 특별계시 의존적인 신앙과 신학을 그 진술의 원리로 삼아야 한다. 본문에서 시작하되 상황을 무시하지 않는 해석학적 구조 속에서 성령론의 구조와 더불어 순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신조들과 교회 교의들도 살펴보아야 한다. 교의는 권위가 부여된 제도적인 교회에 의하여 확정되고 공포된 기독교의 진리이다. 그러나 교리가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 앞에서는 상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상황에 따라서 교의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할 때 성경 본문에 근거한 충실한 삶의 원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다.


4. 신학적 인간학이 다루어야 할 주제에 대해 설명하라.

G. F. Hasel은 그의 ������신약신학������에서 신약신학의 방법론에 대해 4가지를 제시했다. 그것은 주제적 방법, 실존주의적 방법, 역사적 방법, 구원사적 방법이다. 주제적 방법은 신약 신학의 연구에 근거하여 모든 가용한 지식에 비추어 연구하는 방법론이다(Richardson). 실존주의적 방법은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적인 분석으로 성경을 비신화화한 후 역사비평과 종교사학파의 기준을 따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론이다(Bultmann, Conzelmann). 그리고 역사적 방법은 신학의 통일성에 중심을 두고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어떤 통일성으로 교회 공동체에 나타나는지를 조사하는 방법론이다(Kümmel, Jeremiahs). 구원사적 방법은 신약의 구속사를 ‘이미’(already) 와 ‘아직 아니’(not yet)의 긴장 안에서 때가 찬 시간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을 재구성하는 방법론으로서 그리스도를 시간의 중심으로 하고 직선적 시간으로 이해한다(Culmann, Ladd, Ridelbos, Goppelt).

그런데 이 중에서 교리 진술의 전통은 구원사적 접근방법이다. 교의학의 배열 순서가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자체가 구원사적 배열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 바빙크(Bavink), 호니히(Honig), 베르코프(Berkhof) 등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폐할 수 없는 구원사적 틀로 인간론을 서술했다. 따라서 개혁주의적 입장에서의 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①원래 상태의 인간(Status integritatis), ②부패 상태의 인간(Status corruptionis), ③은혜 상태의 인간(Status gratiae), ④영광 상태의 인간(Status gloriae)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적 인간학은 “Coram Deo - Sein Des Menschen”, 즉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 실존”을 핵심적으로 다룬다.


5. 신학적 인간학의 당면 위기에 대해 설명하라.

구속사적 관점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 실존으로서의 인간을 이해하고자 할 때 맞게 되는 가장 큰 위기는 하나님 말씀의 재해석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현대인들에게 잘 이해시키겠다는 동기에서 출발하여 계시의 말씀을 철학적, 과학적으로 재해석하려고 한다. 이로 인해 성경적 인간론에 심각한 왜곡 현상이 빚어지고 또 개혁신학적 인간론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철학으로부터의 영향에서 기인한다.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와 리츨(Ritschl) 등은 칸트로부터 영향을 받아 인간의 가능성을 믿으며 낙관적이고 내재적인 인간학을 수립했다. 즉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를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감정으로 해석했고, 리츨은 그리스도의 구주성을 간과하고 단순한 윤리 도덕적인 모범성만을 부각시키려 했다. 또한 내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하나님의 초월적인 주권을 강조하는 바르트와 불트만은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아 존재의 유비를 부정하고 유한은 무한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관계성과 양상을 강조함으로써 관계의 유비만을 주장했다. 그리고 몰트만과 펜넨베르그 등은 마르크스주의와 신마르크스 주의의 영향을 받아 진화론적, 유물론적, 보편사적인 인간론을 견지했다.

이러한 인간 이해는 성경적 인간학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철학적 전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 인간학은 철학이 아닌 성경 자체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론뿐 아니라 우리가 신학을 함에 있어 항상 철학으로부터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철학은 개념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배와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결코 개념화, 추상화할 수 없고 또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전인격적 경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우리를 만나주실 것을 날마다 간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겸손의 덕을 가지지 못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아무리 명쾌하게 학문적으로 정의를 내린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것이다.


6. 신학적 인간학에 대한 진화론의 도전을 설명하고 이를 비판해보라.

찰스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을 통해 진화론을 주장했다. 진화론은 모든 존재의 세계는 진화의 결과로서 이 세계는 기계적, 화학적 법칙이 적용되므로 필연적인 기계적 인과론의 지배 아래 있다는 세계관을 전제한다. 이러한 진화론은 17세기 데카르트 철학의 영향중의 하나인 18세기 영국의 이신론(Deism)과 연결되어 있다. 이신론은 신의 창조를 인정하지만 섭리를 부정한다. 즉 신은 세계를 창조하면서 세계가 자연법칙에 의해 운행되도록 그것을 세계 내에 내재적 법칙으로 부과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와 역사 속에 하나님의 절대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부정된다. 이러한 이신론에 따른 기계적 인과론이 진화론의 이론적 배경이 된 것이다.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은 정립된 이론(these)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설(hypothese), 즉 증거 없는 설명일 뿐이다. 그는 진화론의 기초로서 “삶을 위한 투쟁”(Strugle for life), 자연선택(Natural election) 또는 적자생존, 격세유전(Atavism) 세 가지를 주장했다.

이러한 진화론의 원시적 형태는 이방 종교의 다신론적 사고에서도 발견되며, 특히 고대 헬라 철학자들의 유물론적 사고에서도 발견된다. 실제로 아낙시만드로스는 비록 유치한 형태의 이론이었지만 물 속 생물의 육지 생물로의 진화를 주장했으며,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흙, 물, 불, 공기), 아낙사고라스의 스페르마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 등은 모두 그러한 철학적 경향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유물론적인 사고들은 진화론의 근본이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을 논증은 여러 형태가 있다. 신체 구조의 유사성에 의한 논증, 발생학적(태생학적) 유사성에 의한 논증, 퇴화기관이나 흔적기관에 의한 논증, 화석에 근거한 고생물학적 논증, 보호색과 같은 의태에 의한 논증, 혈액의 유사성에 의한 논증들이 그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논증이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학은 개연성과 잠정성을 그 본질적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과학적 이론의 출발점인 가설의 정립은 말 그대로 가정성에 기반하여 필연성이 아니라 개연성을 전제로 한다. 포퍼(Popper)의 말처럼 과학 이론은 사실에 의해 부정될 때까지는 여전히 유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은 경험 가능한 현상세계의 일부분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과학으로 세계를 통전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그 출발부터가 잘못이다.

진화론이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공통적인 중요한 원리는 엄격한 계속성이다. 즉 인과적 필연성의 토대 위에 예측불가능한 새로운 것의 등장을 허용치 않는 자연주의적 진화론이 그 기본 원리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유신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을 전개하는 Henry, James Orr, A. H. Strong, Drummonel과 같은 사람들은 진화론과 성경을 접목하여 하나님이 창조할 때 진화의 방식을 동원했다고 말한다. 특히 스트롱(A. H. Strong)은 창1:1, 21, 27의 창조의 틀 속에 사이사이에 진화적 방법을 삽입했다. 즉 우주, 큰 물고기, 인간만이 창조이고 나머지는 진화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무기체, 비이성적 존재, 이성적 존재의 간격을 위해서 하나님을 요청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는 성경의 히브리어 ‘바라’(א������������)는 무에서 유의 창조, 즉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한다.

이제 이러한 진화론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그것을 반박해자.

첫째, 무엇보다 진화론은 성경의 교훈과 충돌하고 모순된다.

창세기 1:11-12절에는 레미노(וֹני������������), 즉 ‘각기 종류대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 고전 15:39에서는 육체의 상이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특히 창2:7에서 영혼의 기원이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음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진화론의 낙관적인 진보사관은 성경의 타락사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둘째, 진화론은 증명되지 않은 가설이다.

에너지 보존법칙인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우주 에너지가 있으려면 더 큰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고 존재하고 있는 우주가 자생적 존재가 아닌 이상 그보다 더 커다란 원인자가 있어야 한다. 또한 우주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열역학 제2법칙은 질적 쇠퇴 현상을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시간이 증가함에 따라서 발전적인 존재로 진화한다는 진화론은 서로 모순된다.

셋째,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지 못한다. 진화론자들은 우연한 결합에 의한 발생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불합리하다. 파스퇴르의 실험에 의해 자연발생설의 오류가 밝혀진 것은 너무도 유명하다.

넷째, 진화론은 유기체의 계속적 발전을 설명하지 못한다.

진화론자들은 종에서 종으로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드 프리스가 유전자에 변이에 의한 돌연변이를 발견하여 그 가능성을 발견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돌연변이가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일어난다 해도 악화의 경향성을 띤다는 것이 밝혀져 종으로의 진화 가능성에 찬 물을 끼얹었다. 또 바이스만(Weisman)에 의해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음이 밝혀졌다. 멘델도 개체변이는 종 밖으로는 이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진화론 내의 발견들은 종에서 종으로의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발견되는 화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즉 화석은 변종의 형태가 아니라 생물 사이에는 직접적 상승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만약 종 사이에 변종이 일어난다면 현재에도 변종이 발견되고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화석이나 현재의 생물중에도 종 사이의 변종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각기 종류대로 창조되었음을 설명해준다. 성경은 종 내의 발전을 인정한다. 따라서 창조시의 종류와 지금의 동식물이 일치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종에서 종으로의 변화나 진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본질적인 근본적 차이와 불일치는 창조 사역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것은 각기 종류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윈의 제자인 헥켈(E. H. Haeckel)의 말대로 ‘다윈의 이론은 독창적으로 창출한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이전의 철학을 자기 방법으로 재구성하여 진술한 것’인데, 현재도 마치 진리처럼 신봉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니겔 리(Nigel Lee)가 그의 책에서 다윈이 죽음에 가까워서 “나는 미숙한 개념을 알고 있었소. 스스로 질문을 하고 대답하려 했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종교로 만들고 말았소. 사람들을 모으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해주시오.”라고 말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그가 임종시 믿으으로 회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아직도 그가 포기한 진화론을 종교처럼 신앙하는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7.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역사적 개념들을 설명하고 이를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하라.

과연 무엇이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가? 그것은 인간 존재에 관한 근본적 질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계시이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취요 흔적이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 창조의 면류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어떤 의미이며 무엇을 가리키는가?


1. 자연주의적 견해

헬라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에 그가 받은 철학적 영향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들은 창1:26과 1:27을 면밀히 관찰한 후에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인간을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창1:26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실행은 창1:27을 보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에서 보듯이 형상대로만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형상을 플라톤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이성적 존재가 되게 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본래 계획 중에 있었던 모양은 창조시에 주어진 형상으로서의 이성 능력을 잘 활용하여 순종한 결과 그 순종의 대가와 보상으로 획득하게 된다고 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 공로주의적 입장을 견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레니우스와 아타나시우스는 이를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형상뿐 아니라 모양도 은사로 덧붙여주셨다고 했다. 형상에 대한 클레멘트와 오리겐의 설명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자유의지는 항상 죄의 문제와 함께 거론되게 되는데, 이들에 따르면 죄는 인간의 책임이며 거룩하게 되는 것도 역시 노력에 의한 인간의 자의적 산물이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의 원래 상태는 도덕적 중립의 상태로 지음받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펠라기우스인데, 그도 역시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인간의 원래 상태를 도덕적 중립에 두었다. 그는 창조시의 인간에게는 선택 능력으로서의 자유의지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가치중립적인 것이라고 했다. 즉 거룩하지도 불결하지도 않은 중립적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완전에의 가능성(naturalis posbilitas perfectionis)이라고 한다. 이 같은 견해는 16세기의 소시니안파와 제세례파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소시니안파는 자의적 노력과 공로를 통해서 초자연적 은총을 받게 된다고 하였고, 재세례파는 세례를 통해서 초자연적인 은총을 받는다고 했다.

이러한 자연주의적인 견해는 몇 가지 점에서 비판된다.

첫째, 성경은 첫 사람 아담이 어린아이가 아니라 이미 성숙한 성인으로 지음받아 의식이 있고 본성도 선했으며 비록 유한하지만 참된 지식을 가졌고 의로운 본성을 생래적으로 지니고 있었다고 증언은 중립적 본성을 주장하는 자연주의적 견해에 배치된다.

둘째, 자연주의적 견해는 철학적 추상에 불과하다. 아담은 철학적 추상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구체적, 실재적 인물이며 성향과 의지에 있어서 특징을 지닌 존재이다. 따라서 아담의 특징적인 성향과 의지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사람 아담이 도덕 중립의 상태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셋째, 자연주의 견해로는 부패 상태와 원래 상태와의 구분이 모호하다.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이 부패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자연주의자들은 인간은 타락했지만 이성 능력은항구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실질적 신앙 윤리적인 삶이 부패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성이 부패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양립불가능한 주장이다.


2. 로마 카톨릭의 초자연주의적 견해

로마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다양한 이론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창조시 인간은 두 가지 은사, 자연적 은사(dona naturalia)와 초자연적 은사(dons supernaturalia)를 받았다고 한다. 이는 보통 자연과 은총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자연적 은사란 이성, 양심, 판단력, 도덕성, 의지, 자유 등을 가리키는데, 이들이 서로 충돌되지 않고 조화를 이룬 상태로 창조되었고 한다. 그러나 타락 이전의 이러한 조화로운 자연적 의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저급한 욕구가 있어서 이성이나 양심에 대항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의지가 여기에 굴복하여 행동으로 나타나면 죄가 되는데, 이러한 경향을 인간이 스스로 제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연적인 은사 위에 추가적인 초자연적인 은사를 덧붙여주셨다고 한다. 이런 초자연적인 은사가 필요한 것은 인간의 저급한 욕구를 통제하기 위함이요, 자연적 은사만으로는 초월적 세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적인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 삼위일체에 대한 신 지식, 초월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 등과 같은 초자연적 은사가 덧붙여진 것이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아담이 타락했을 때 파괴되고 상실된 것은 덧붙여진 초자연적 은사라고 한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지식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적 은사들은 타락과 상관없이 건재하다고 한다. 이성도, 양심도, 도덕성, 의지도 타락 전이나 후나 역시 죄의 영향을 받지 않고 건재하게 창조된 그래도 유지된다고 한다. 따라서 로마교회에 의하면 타락한 원죄상태는 초자연적 은총의 내용들만 상실했을 뿐 자연적 은총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타락 이전의 상태와 동일하다. 그러니까 아담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초자연적 은사의 결핍 상태에서 태어나는 셈인데, 이러한 결핍 상태가 바로 원죄의 상태이다. 따라서 로마교회는 자연적 은사와 초자연적 은사를 나누는 이원론적 사고 속에 자연과 은총이 연결되지 않는, 즉 기계적 병립 관계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비록 인간이 타락했지만 자연적 은사는 창조 때의 상태 그대로 여전히 건재하다는 낙관적 인간관은 공적 사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인간은 자연적 은사를 통해서 충분히 선행 공적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노력은 세속적인 선행에 불과하며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 수 없다.

문제는 상실한 초자연적인 은사를 어떻게 회복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로마교회는 영세를 통해서 초자연적 은사를 회복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초자연적 은사를 회복한 사람은 영광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 영광의 상태란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하여 신자의 신분이 승귀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승귀, 양자의 신분이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영광의 상태란 신을 보는 것을 말하는 데 신(神)을 본다는 것은 신과의 합일을 말한다. 즉 영광의 상태란 영과 육을 초월하여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제 영세를 통하여 초자연적 은사가 회복되면 ‘영광의 상태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선행’을 할 능력을 부여받게 되며, 그 행함의 댓가로 영광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자연적 은사로서의 선행으로는 영광의 상태에 들어가기가 어렵고 덧붙여진 은사를 통해서야 구원에 이르는 선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로마교회의 견해는 ①원죄가 초자연적 은사의 결핍이라고 하는 측면에서는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이 말하는 선의 결핍으로서의 죄라는 견해를, ②인간의 공로로 영광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하는 견해는 펠라기안의 견해를, ③초자연적 은사와 자연적 은사의 기계론적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견해를, ④영광의 상태로의 회귀는 신플라톤주의가 말하는 일자로의 회귀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러한 로마교회의 신형상론은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첫째, 타락 이후 초자연적 은총은 상실되었지만, 자연적 은총은 건재하다고 하는데, 이는 양자를 기계적 병립의 관계로 보는 것으로서 죄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원죄의 개념을 피상적으로 만든다.

둘째, 은혜의 상태에서 영광의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에 인간의 공로를 개입시킨 것은 펠레기안적이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참가했다는 점에서 세미 펠라기안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 주어지는 것은 언약의 원리이지 노력의 대가가 아니다.

셋째, 인생의 궁극 목적인 영광의 상태에 대해 심각한 곡해를 하고 있다. 즉 신플라톤주의가 말하는 신과의 합일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성경적인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받은 자들은 현재 영광의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지 피안의 세계에서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넷째, 초자연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 사이에 무수한 계급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인정하여 계급 사상에로의 길을 열어주고 있는데, 이는 매우 비성경적이다.


3. 루터파

루터파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제한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즉 원의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한다. 원의란 영적인 특질, 도덕적 자질로서 엡4:24, 골3:10에서 말하는 참된 지식, 의, 거룩이 그 중요 덕목이다.

루터파는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되, 전적으로 상실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인생을 죄악 덩어리라고 묘사한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상실되었다면, 그에게 남아있는 인간의 자연적인 것도 함께 부패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루터파가 로마교와 달리 자연과 은총의 관계를 유기적 관계 속에서 보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루터파의 견해는 로마 교회의 선행 공로주의 반동으로 나온 것으로 원의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본 결과 타락 이후 인간의 상태를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편협성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루터파의 이러한 단조롭고 비연속적이고 단절된 주장들은 개혁파가 일반은총의 교리에 의해 완화되었다.


5. 개혁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개혁파는 매우 포괄적인 견해를 취한다. 인간의 본질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모든 탁월성 가운데 존재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형상은 전인적이라는 말이다.

개혁파는 하나님의 형상을 협의와 광의로 나누고, 타락으로 말미암아 협의의 신 형상은 파괴되었으나 광의의 신 형상은 타락 이후에도 잔존한다고 한다. 타락 이후에도 광의의 신 형상이 잔존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이 타락한 이후의 인간에 대해서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전적 부패를 말하는 것은 죄의 영향 아래 광의의 신형상도 들어갔기 때문이다. 즉 개혁파는 전적 부패를 말할 때는 질적 타락뿐 아니라 범위에 있어서도 죄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 범위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영적인 목적으로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개혁파는 자연과 은총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협의 형상이 파괴되고 상실되었다고 해서 인간의 실질이 상실되어 인간이 아닌 인간 존재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인간이기는 하지만 비정상적인 인간이다. 성경의 용어로 말하자면 죄인이요,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이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정도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소유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 개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이 인간의 원형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전인에게 나타나며 또 전인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과 육체 속에 나타날 뿐 아니라 재능과 능력 속에, 또 모든 관계와 상태 속에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이 형상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하나님이 형상이다. 인간이 모형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닮되 전 삼위적 하나님의 본질을 원형으로 하고 닮았으며, 하나님의 본질이 인간에게 모형의 형상으로 나타나되 한 부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인 속에 형상이 나타난다.


6. 칼 바르트

바르트는 하나님 형상에 대한 해석의 원리를 창1:27에서 찾는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 속에 나타난다고 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했을 때의 ‘우리’는 나와 너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하나님 속에 있는 나와 너의 관계를 원형으로 해서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속에 있는 우리라는 개념 속의 나와 너의 관계의 유사체를 통해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인격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피조적 유사체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인간이 나와 너의 관계의 사회적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닮은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 속에 있는 나와 너의 관계라는 인간의 삶의 양상이 바로 신적 양상과 유사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결국 바르트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유비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창1:27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하게 정의한다는 배타적 해석을 하고 있는데, 이는 해석학적인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성 속에서만 찾으려는 전제의 오류도 범하고 있다. 그는 초절주의 신학을 말하면서 하나님과 인간은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이 닮았다는 관점에 단지 윤리적 해석만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초절주의 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결론을 도출해보자.

첫째, 인간은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거나 소유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은 구조적인 면과 기능적인 면, 즉 광의의 형상과 협의의 형상의 상보적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윤리적이고 존재적인 두 측면이 모두 이해되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죄와 관련하여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구속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측면, 곧 본래의 상태, 부패의 상태, 은혜의 상태, 영광의 상태 등을 함께 조망해야 한다.

넷째, 그리스도는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다. 따라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알기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에게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고, 전적으로 이웃을 사랑하셨으며, 자연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셨다. 이 3중 관계 속에서 인간의 본래적 위치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취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전적 부패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갱신될 수 있다.

둘째, 인간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모든 인본주의적 사상, 즉 비성경적 인간화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은사요, 동시에 과제이다.

넷째, 형상 회복의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외에는 불가능하다.

다섯째, 인간은 피조적 인격체로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를 가지고 있기에 인격자이다. 이렇게 양립될 수 없는 두 면이 인간 안에 공존하고 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여섯째, 기독교 문화관의 정립을 해야한다. 왜냐하면 모든 영역에서 이원론은 부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8. 인간의 구조적 본성에 대한 개혁신학적 입장에 대해 설명하라.

삼분설은 영, 혼, 육을 구별하여 이해하는 개념이다. 헬라철학에서 기원한 개념으로 하나님은 선하고 물질은 악한데, 이 둘을 중재하는 것이 로고스라고 하는 개념에서 유래하였다. 영과 육은 대립관계인데, 이 둘을 중재하는 것이 혼이라 보았다. 삼분설주의자들은 영과 혼의 차이는 둘 다 생명의 원리인데, 혼은 동물적 생명의 원리이고, 영은 신과 관련된 이성적이고 더 가치 있는 비물질적인 요소로 달리 해석하고 있다. 고대 이전의 삼분설은 플라톤과 루크레티우스에게서 나타난다. 교대 교회에서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오리겐과 영지주의자들이 삼분설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서방 교회의 어거스틴과 터툴리안 등은 이분설을 지지하였다. 한편 델리취는 영,혼,육을 기능적인 면으로 구분하여 삼분설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분설은 인간의 구조를 영과 육으로 나눈다. 삼분설은 프뉴마(영), 프쉬케(혼)을 구별하지만, 이분설은 영과 혼을 같은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성경에 따르면 프뉴마와 프쉬케를 같은 의미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마6:25, 10:28은 인간의 구조를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프뉴마와 프쉬케가 같은 뜻과 의미를 가진 단어인 이유는 첫째 죽음과 관련하여, 둘째 죽은 자와 관련하여 교호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행7:59절의 스데반은 ’내 프뉴마를 받으소서‘라고 하였고, 창35:18절에는 라헬의 혼이 떠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데카르트 이후 보다 성경적인 입장에서 성경과 조화되기 위해 제시된 것이 실재적 이분설이다. 결국 이분설이란 전인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분설이란 단어 역시 두 부분을 구별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에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단일론과는 구별되지만 영과 육을 유기적 연결, 즉 전인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살전5:23에서 세 구성 요소인 ‘영, 혼, 육’ 이 2개의 ‘그리고’라는 접속사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별개의 독립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막12:30은 4분설을 말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살전5:23은 삼분설을 지지하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이 아니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존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문법적으로 보면 영, 혼, 육을 수식하는 ‘보전되기 원하노라’의 표현은 복수가 아닌 단수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리델보스의 말대로 전인적, 즉 통전적인 인간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히4:12 역시 영과 혼, 골수를 구별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의 능력이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있게 하는 말씀을 나타내는 것이다.

영육 이원론 대립적 이해를 야기시키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하는 개념을 용납하지 않는다. 삼분설론자들이 주장하는 살전5:23과 히4:12도 이원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성경 해석의 원리는 성경의 유비(Analogia Scriputra)인데 이는 전체와 부분이 순환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희미한 부분인 살전5:23절은 인간의 구조를 두 부분으로 증거하고 있는 보다 더 많은 말씀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벌코프는 ‘인간은 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혼이다’라고 하였고, 래드는 ‘이 둘은 동일한 실제를 가진 다른 이름이다’라고 하였으며, 리델보스는 굳이 이 둘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인간이란 창2:7에서와 같이 생령, 즉 살아 있는 존재로서 전인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인간 본성의 구성 요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인간의 논의는 명백히 이분법적이다. 성경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하나의 통일체로 볼 것을 가르치면서 독립된 두 요소로 구성된 이원론 존재로 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각 요소는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상관없는 실재가 아니라 연하여 하나의 단일한 유기체를 형성하는 실재이다. 성경은 인간의 복합성을 인정하지만 인간 본성을 두 부분으로 나누지 않는다. 즉 모든 인간의 행위는 전인(全人)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격적 단일성을 지지하고 있는 전인적 인간을 말하고 있으며, 구조적 이중성을 전제하고 있다. 이중성이란 두 측면이 있다는 것으로 조화와 통일성 속에서 ‘두 면’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모든 개념을 인간의 구조 안에 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창2:7에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에서 볼 수 있다. 한편 삼분설을 지지하는 듯한 영, 혼의 다른 단어의 사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영, 혼의 의미는 서로 교호적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 둘이 결국 같은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눅1:46-47절을 이 둘을 병행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말씀이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여기서도 교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분법적 사고인 삼분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① 성경의 예외적인 언명은 성경의 통상적인 표현법에 비추어 해석하여야 바른 주석인 바, 삼분설을 옹호하는 일부학자들은 살전5:23, 히4:12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② 영과 혼이 나란히 언급되었다고 해서 성경이 두 개의 실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③ 살전5:23절은 영, 혼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여기서 우리는 전인적 개념을 보아야 한다.

④ 히4:12는 영, 혼을 나누는 말씀이 아니고, 단지 마음의 사유와 의도를 나누고 있을 따름이다.


9.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문화적 측면에서의 하나님 형상의 회복에 대해 설명하라.

창세기 1:28이 문화명령이라면, 마28:18-20은 복음명령이다. 이 두 종류의 명령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다. 양자는 병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명령에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에서 “모든 것”은 세상과 영적 세상을 구분한 이원론적 개념이 아니라 통전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문화명령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복음명령과 문화명령은 같은 하나의 명령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복음이 바로 전파될 때 문화 명령이 그 근본 정신을 바로 살려서 실현될 수 있다. 타락으로 문화 명령이 취소된 것이 아니라 더욱 강화되었음이 창9:1-13절에 나온다. 이 문화 명령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을 때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복음의 빛 가운데서 문화명령이 이해되어야 한다.

 

 

최홍석 교수 설교 말씀에서 (2008. 10. 9 오전 채플)


 

어렸을 때에 가정 예배를 드리게 될 때에 저의 부친께서 자주 택하시던 본문이 있었는데 전도서, 야고보서, 잠언, 이런 본문들만 자꾸 택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마음속에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와 복음에 대한 본문을 택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부친의 신앙수준이 훨씬 높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땅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자들에게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가 없다면 심각하게 자신에 대해 돌아봐야 합니다. 전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자들이 다시 보아야 하는 삶의 교훈에 해당합니다. 모두 함께 주님의 마음에 집중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7장 중에 몇 절만 보았습니다. 우리는 일단 구속사의 지평 속에 이 본문이 어디에 속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문학의 장르나, 단락의 흐름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원사의 지평 중 어디에 속합니까? 그리스도가 강림하기 이전입니다. 그리고 시내산 언약의 이후입니다. 그 지점에 전도자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오늘과 같은 긴장감을 가지고 있던 인물을 생각해봅시다. 모세....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나니...모세는 그리스도 이전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은 수모가 있다고 기자는 얘기합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요8:16. 아브라함은 시내산 언약 이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때 볼 것을 미리보고 기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애를 썼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기뻐하고 갈망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신약의 우리와 같이 동일하게 여인의 후손, 약속의 씨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고 깨어진 형상이 회복되고 동일하게 구원받았음을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요... 구약의 성도들도 신약의 우리들도...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도 그들의 신앙고백도 다 같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런 전망 속에 오늘의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들을 보면 대구법을 쓰고 있습니다. 죽는다..출생한다...초상집..잔치집...슬픔...기쁨...오늘 본문의 메시지가 깔고 있는 강한 기조가 무엇입니까? 얼른 보면 죽음의 때를 기억하라..현재에서 종말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종말의 시간에서 현재를 바라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종말의 시간에서 오늘 현재의 순간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얼마나 분주합니까? 경제 환난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데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들은 현재의 삶에 메여있습니다. 마르쿠제의 말을 빌리자면 생산과 소비에 메여 일차원적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 땅만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고 따르는 사람들은 현재를 살면서도 종말론적인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과 여유가 생겨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미래를 바라볼 뿐 아니라 현재로 끌어와서 현재의 전제로 삼을 수 있는 치유와 능력이 주님의 능력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그 은혜가 오늘 이 시간 여러분에게 저에게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기도하고 기다리고 모든 일을 주께 하듯이 성실하게 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 근거하여 종말을 당겨와서 우리의 삶의 전제로 삼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삶의 질서가 달리 보입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났습니다. 명예가 많은 재물보다 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재물보다 명예를 명예보다 은총을 택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택하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께서 모일 때마다 재물보다 명예를 명예보다 은총을 택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도 늘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신학도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총입니다 사모하고 이 시간 주님의 은총 아니면 우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은혜 베풀어 주소서..여기까지 오게 하셨고, 여기 머물러 있는 것도 주님 은총의 결과입니다. 앞으로의 일들을 저희는 잘 모르지만 주님께서 은총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덤벙덤벙 살아왔다면 삶을 정리하고 우리의 실존을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우리의 결정의 결과가 아닌 줄 압니다. 당신의 사역을 위하여 기다리고 기다리고 은혜 베풀어 주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셔야 합니다. 촛대를 옮기시면 우리에겐 항변할 여지도 없습니다. 오직 기뻐하심으로 인하여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 교단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이때까지 연약한 자들을 세워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그 경륜으로 연약한 우리를 들어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하셨다. 내가 아니다...주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을 학교를 통해 우리 자신을 통해 교회를 통해 이뤄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났다는 인식이 생겨납니다. 공허한 웃음보다 마음의 진실을 추구합니다. 무의미한 웃음...유흥적인 삶...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진실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내 실존을 바라보는 삶을 주목하게 됩니다. 전 오늘 수업을 마치고 미리 예배당에 와서 준비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모이더니 요란해지기 시작합니다. 제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이 요란함은 은총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요, 이런 저런 잡담들에 따른 요란함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을 경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 발을 삼갈 지어다...함부로 말을 내지 말지어다...라는 교훈을 생각하며, 한 자리 한 자리 채워가며 주님 은혜베푸십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간구할 때 이런 요란함은 없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작은 일로부터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교단의 예배 모범과도 다릅니다. 내일 우리 채플 시간부터 조용히 한 사람이 앉는 것과 같은 신중함과 준비된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일 예배 시간을 기대해 봅시다.


지혜자의 책망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랫소리보다 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충고합니다. 그 충고가 우매자의 노래보다 났습니다. 그 충고를 귀하게 여기고 실천해야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됩니다. 어렵지만....


2절. 우리 개인이나 공동체가 향한 영성의 방향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도대체 영성의 방향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어제 박건택 교수님이 영성의 방향에 대해서 설교하셨는데...여러분 깊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슬픔보다 웃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참된 마음의 평정과는 무관합니다. 도를 진지하게 배우는 것보다 유흥을 더 좋아합니다. 진지한 삶의 태도를 기피합니다. 무책임한 현실지상주의에 실려 살아가요. 인자한 자를 약자로 생각하고 교만한 자를 강자라고 생각합니다. 잔칫집을 더 좋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여러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 사람들과 인식 원리가 달라요 세계관이 달라요...그렇다면 추구하는 원리가 마땅히 달라야 해요. 방향성이 달라야 해요. 거기서 생기는 내면의 질적인 면이 달라져요. 그점이 우리에게 문제입니다.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다르지 못한 게 너무 많아요. 우리는 이점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앞에 나아가 통회할 뿐 아니라 이 땅의 교회를 위하여 대도해야하는 현실 속에 우리가 있지 않나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가 거꾸로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요. 그러나 그것이 바른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정직하게 사람을 만들었지만 사람들이 꾀를 냈습니다. 많은 사악한 꾀들을 내서 다 거꾸로 되었습니다. 비정상성이 정상성이 되버린 세상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한 자이고 회복되는 자입니다. 나 중심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자입니다. 세상을 향해 똑똑해지려 않고 세상을 향해 바보가 되려는 자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이 일이 현실로 경험될 수 있는 일이 주어집니다. 이와 같은 일이 여러분 안에 주어진 줄 압니다. 앞으로도 그리되길 바랍니다. 이것은 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삶이었고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갔던 삶이었고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예수의 제자로 사는 것은 자신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요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나를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요 고통을 취하는 일이요 아무 방향으로나 가는 것이 아니고 그만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어려움이 많지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삶의 주체와 방향이 나에게서 그에게로 옮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써 옮기기를 바랍니다. 나에게서 그에게 옮기기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곧 제자의 길이요 한낱 이론이 아니요 엄연한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은 사람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합니다. 야고보의 표현을 빌리면 기뻐하는 자는 찬송하고 고난당하는 자는 기도합니다. 삶을 끊어 사는 지혜가 있습니다. 오늘의 괴로움은 오늘 일로 내일의 괴로움은 내일에게 맡깁니다. 아무리 복잡해도 삶을 단순하게 만듭니다. 밝은 날과 어두운 날로 단순화시킵니다. 어떤 때는 찬송이요 어떤 때는 기도로...우리의 삶 자체가 찬송과 기도가 되기를 바라기 바랍니다. 찬송의 시간..기도의 시간..찬송의 시간...이러한 순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뤄지길 바랍니다. 우리의 목회 사역 가운데 삶의 가운데 삶을 단순화하여 끊어 사는 사람이 됨으로써 오늘의 삶으로써 족하다고 고백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오! 주여 오늘 주님께로 가오니 영접해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종말론적인 삶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있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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