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도서목록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 마이클 호튼 시리즈

하나님아들 2019. 4. 9. 11:18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 마이클 호튼 시리즈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 마이클 호튼 시리즈 05 (2009 올해의 신앙도서)  
(Christless Christianity)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 대해..
설교와 설교자가 있다. 교회도 있고, 많은 프로그램도 있다. 교회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기독교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곳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거기에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시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복음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만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진리/복음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 책은 왜 오늘날 기독교가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지다 못해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되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의 모습은 얼마나 허망하며 끔찍한지를 거침없이 보여주면서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펠라기우스주의, 조엘 오스틴의 형통 복음, 이머징 교회 운동, 영지주의 영성이 가져온(또 가져올) 끔찍한 폐해에 우리가 정직하게 직면한다면 우리는 저자가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실제적인 대안 또한 거침없이 제시하고 있는 후반부를 읽으면서 크게 기뻐하며 용기를 낼 것이다. 이 책은 온갖 인본주의가치관과 자아중심적 세계관에 빠져 병들어 있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 가장 탁월한 치료약이 될 것이다.


포로 된 교회를 해방하라
윌리엄 윌몬 (연합감리교회 감독)

 
우리는 북미주에 있는 교회들이다. 보수적이든 자유주의적이든, 복음주의든 주류교단이든,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교회 갱신을 주장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 우리는 아무튼 간에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다. 다운사이징을 하느라 분주하고, 문화적으로 좀 더 적응력을 갖기 위해서 바쁘다. 이뿐이랴. 선교를 떠나고, 새신자들을 끌어들이고, 제자훈련을 하고, 예배에 동원되는 기계들을 관리하고, 성경적인 원리들을 극대화하고, 회복을 축하하고, 새가족이 편안하게 정착하도록 하고, 첨단 프레젠테이션 기술에 뒤떨어지지 않고, 목적이 이끄는 삶을 발견하고, 정의구현을 위해 평화 운동을 하고, 영적인 제자도를 만들고, 자아상을 높이고, 우리 자신을 좀 더 효율적인 기업형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아니 무엇보다 우리가 이룬 일들에 대해 좀 더 뿌듯해하는 시간을 갖고자 필사적이다.

이 멋진 그림에서 빠진 게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다.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가 지은 거칠고, 섬뜩할 정도로 재미있는 소설, 『현명한 피』(Wise Blood)에서, 작가가 만들어 낸 인물인 목회자 헤이절 마티스(Hazel Motes)는 다른 목회자들을 경멸하는 사람인데 이런 설교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에서는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교회에는 구속이 없습니다. 왜냐고요? 구속할 죄가 없기 때문이죠. 이런 식으로 죽은 상태가 지속되는 것입니다.”1) 나는 오코너의 작품이 극단적이고, 설마 그럴 리가 하고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풍자를 담고 있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이클 호튼이 나와서 지금 우리의 교회 현실을 “그리스도 없는 교회”라고 하는 게 아닌가! 호튼은 우리가 기독교 역사 전체를 들여다봐도 결코 떠오르지 않는 괴물을 만들었노라고 일갈한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우물쩍거리며 설교를 하지만, 찔림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 때 화염과 연기를 발하시던 하나님은 갑자기 상냥해지셨다. 복음에는 거치는 요소가 하나도 없다. 아마 우리가 거칠 것이 없는 사람으로 길든 탓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만만하지 않은 조건을 꿈쩍도 않고 부과하시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무릎 꿇을 수 없으니까, 우리 입맛에 맞는 신을 하나 고안해 냈다. 현란하고, 현대적인 기독교가 바로 그 결과물이다.

이 책은 거칠다. 그러나 역작이다. 거리낄 것 없이 치고 나가고, 정통한 개혁 기독교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의 처량하리만큼 낡고, 절충적이며, 오냐오냐하는 교회는 이 책에서 도마 위에 올라 날카로운 신학적인 비판을 당한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현재 앓고 있는 신학적 질병의 근원이 노출되고,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애지중지하기 시작할 때 어떤 전복이 일어났는지 보게 된다. 현대 교회에 만연한 따분함과 판에 박힌 모습들이 거칠게 공격당한다. 마이클 호튼은 우리가 빠져 있는 곤경을 충격적이고, 피할 수 없는 솔직함으로 진단한다. 심리요법적이고 공리적인 이신론을 들춰내서 못 박아 버린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막강한 무기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물리쳐 버린다. 으레 말하는 복음주의란 바람 빠지고, 문화적으로 절충된 자유주의의 최신판에 지나지 않는다. 책을 읽다가 나도 찔림을 받았다. 로버트 슐러의 내용 없는 교회론이 우리 모두에게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내 설교도 조엘 오스틴의 설교에 비해 약간 덜 우스꽝스럽고 약간 덜 물 탄 것에 불과하다. 내 탓입니다. 내 탓입니다. 내 큰 탓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비판 일변도만은 아니다. 호튼은 놀랍도록 희망적인 주장도 적극 펼친다. 그의 외침은 직설적이지만 힘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예수로 귀납되는 이 시비 거는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되새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복음, 이 위대한 지적 유산을 팔아 치우고, 겨우 심리학으로 물들고 실용주의적이며, 공리주의적인데다가 자기계발이라는 잡동사니를 사들인 우리를 용서하신다.

호튼은 기쁜 마음으로 상기시킨다. 신학적인 사색이, 우리를 늘 바쁘게 만들지만 영양가는 하나도 없는 온갖 잡무들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복음이 윌리엄 제임스, 혹은 찰스 피니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수많은 후계자들이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 죄인들을 사랑하고 침노해 오는 하나님 왕국 안으로 그들을 들어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굳은 결심은 인간의 진정한 조건을 놓고 볼 때, 자기도취적인 북미의 소비자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 주려는 우리의 급한 마음보다도 훨씬 더 적합하고 적실하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기막힌 모험으로 떠나보길 바란다. 호튼이 펼치는 복음 구출 작전을 통해서 부르르 떨쳐 일어나는 기독교, 이 낯설고 새로운 세계로 흠뻑 빠져들기 바란다. 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문화적인 억압에서 해방될 것이고,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말과 행함으로 자유롭게 예배하게 될 것이다.

자, 이제 그리스도가 기독교 안에 계시도록 하자.


그리스도없는 기독교를 고치는 특효약
복음을 복음답게, 율법을 율법답게
-백금산 목사(예수가족교회)

현대 교회의 그리스도없는 기독교 증상

문: 사탄이 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면 어떤 모습일까?
답: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사탄이 만들려고 하는 교회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없는 교회'인가? 호튼은 이 물음에 대해 오늘날 미국 기독교의 현실을 한 마디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고 진단한다. 이것은 자유주의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를 막론하고 미국 교회 전반에 대한 진단이다. 참으로 충격적인 선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어떠할까? 우리는 미국 교회와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미국 교회에서 만든 제품을 가장 빠른 시간에 직수입해서 쓰고 있는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쌍둥이라 해도 좋을 터인데, 호튼이 말하는 미국 교회의 현실이 한국 교회에서도 그대로 복사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바짝 긴장하고 호튼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 볼 필요가 있다. 호튼은 현재 미국 교회의 메시지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막론하고 "더 열심히 하세요. 더 노력하세요" 일색이며, 보수 진영에서 자유주의 진영에 이르기까지, 로마 가톨릭에서 재세례파에 이르기까지, 뉴에이지에서 남침례교에 이르기까지, 미국 교회의 '영성 탐구'에 대한 열광적 분위기에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증상을 발견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그리스도 없는 중세 교회를 '바벨론의 포로 된 교회'라 불렀듯이 호튼은 '그리스도 없는 미국 기독교'를 '미국 문화의 포로 된 교회'로 생각한다.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
호튼은 미국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증상을 질병명을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스가 말한 '도덕적이 심리적인 이신론'이라고 규정한다. 스미스가 말하는 '도덕적이고 심리적인 이신론'의 핵심 내용은 첫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들이 착하고, 멋지고, 서로 공평하기를 원하신다. 세째, 인생의 중심 되는 목표는 행복이고, 자신에 대해 뿌듯하게 느끼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할 때 외에는 사람의 삶에 굳이 간섭하지 않는다. 다섯째, 착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람을 착하게 만들었으며, 그러므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이고 심리적인 이신론'의 신학적인 명칭은 펠라기우스주의다. 호튼은 미국 교회가 펠라기우스주의로 심하게 기울기 시작한 것은 2차 대각성 이후 즉 찰스 피니의 등장이라고 말한다. 찰스 피니는 미국 교회에 펠라기우스를 유행시킨 전도사였다. 오늘날 미국 기독교의 심각성은 찰스 피니의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이 미국 교회에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명목적으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까지도 일부 침투했다는 점이다.

미국 기독교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은 종교개혁에 역사적 뿌리를 둔 교회들에서조차 드러나고 있다. 크리스천 스미스와 제임스 헌터와 같은 종교사회학자들은, 루터파 교회와 개혁 교회의 평신도들이 이와 똑같은 전제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기억시킨다. 로버트 슐러도 그렇지만, 노만 빈센트 필이 미국 개혁 교회에서 안수받은 목사였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서 좀 더 보수적인 장로교와 개혁교회들에서도 스미스가 지적한 도덕론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에 딱 맞아떨어지는 설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주류 교단의 신학자인 브라이언 게리쉬는 위기의 본질을 이렇게 진술한다. "은혜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증언이 16세기보다 현재 더 절박하게 필요하다. 지금은 개혁교회들에서도 펠라기우스주의가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조엘 오스틴 비판
오늘날 미국 교회에서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를 가장 강력하게 전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조엘 오스틴이다. 조엘 오스틴은 베스트셀러가 된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라는 책과 레이크우드 교회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미국과 전 세계에 이러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호튼은 '개신교 자유주의에서 나온 일종의 부드러운 도덕주의가 슐러를 통해 복음주의의 주 메뉴가 되었고' 오스틴은 "입으로 시인하고 믿음으로 얻어라"라는 형통주의 철학을 주류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라 말하면서 오스틴의 신학은 ' 펠라기우스주의의 자기 계발과 영지주의의 자기 신성화가 접목된 형태' 라고 진단한다. 조엘 오스틴의 책은 미국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에서도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 교회에도 조엘 오스틴의 긍정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병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한 사람도 별로 없고 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책을 제시한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 심각한 병은 점점 더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염되고 있다. 물론 왜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에서 가르치는 자기 계발식 메시지가 문제가 되는가?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하고 항변을 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긍정적으로 살면 된다는 조엘 오스틴의 메시지는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호튼은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오스틴과 요즘 활동하는 다른 많은 설교자들이 약속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리스도가 없어도 된다. 유명한 자기계발 강사 토니 로빈스처럼 성경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복음서들에 약속된 구속과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삶을 좀 더 긍정적으로 전망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하나님이 필요할 데가 어디 있을지 분명하지 않다... 미국인들에게는 더 나은 가정, 재정, 건강 혹은 나아가서 도덕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예수가 필요 없다.


맥클라렌의 이머징 교회 운동 비판
최근 미국 복음주의에서는 맥클라렌 같은 인물이 주도하는 다소 자유주의신학적 성향과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이머징 교회 운동이 떠오르고 있다. 호튼은 '조엘 오스틴의 형통복음에 나타나는 자기도취와 개인주의와는 동떨어져 있기는 하나 맥클라렌의 메시지는 중요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오스틴이 말하는 죄와 구원은 하나님에서 도덕적 개선을 통한 자아의 행복과 향상으로 옮겨갔다면, 맥클라렌에게서는 지구온난화, 가난, 에이즈 그리고 자본주의적인 탐심으로 옮겨간 정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스틴은 구원을 전적으로 지금 여기에서의 형통이라 말하는 반면 맥클라렌은 주로 지금 여기에서의 평화와 정의라고 말한다.' 이 두 경우 모두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형동 복음을 주장하는 조엘 오스틴 류의 <믿음의 말씀 운동>이나 맥클라렌 류의 <이머징 교회 운동>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호튼은 이들은 복음과 율법을 혼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복음을 "지금의 길에서 돌이켜서 새로운 길을 따르라"고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초대(맥클라렌)라고 규정하든, 혹은 "더 나은 자신이 되기"(오스틴)라고 하든, 우리는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가 죽음, 정죄 그리고 죄의 폭정을 종식시켰고, 장차 영광과 권세 가운데 다시 오셔서 먼저 심판하신 후 이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하늘의 선언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영지주의와 닮은꼴인 미국 기독교 영성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와 더불어 최근 미국 기독교에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영지주의적 영성이다. 영지주의는 오늘날 '뉴에이지' 혹은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종교 시장의 가장 인기있는 품목이 되고 있다. '영성에 대한 탐구'가 미국의 시사 잡지 커버스토리에 자주 등장하고, 역사학자, 사회학자, 소설가 등이 '영성'이라 부르는 영지주의적 탐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호튼은 복음주의자들이 자주 진리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실은 복음주의자들의 예배, 전도, 영성은 역사적인 기독교라기 보다 여러 면에서 몰몬교나 뉴에이지 그리고 자유주의자를 닮았다고 말한다. 미국 영지주의 전문가 브룸에 따르면 고대 영지주의는 즉 브룸은 유대교와 기독교 신비주의, 피오레의 요아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재세례파, 천년왕국 열광주의자, 내면의 빛 분파주의자, 미국의 모든 초월주의(위트만, 소로 그리고 에머슨), 몰몬주의,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역사를 통해 계속적으로 다양한 변종의 모습으로 지속되어왔다. 그렇다면 최근 미국의 영성이 고대 영지주의자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요소란 무엇일까? 호튼은 고대 영지주의와 최근 미국의 영성을 이렇게 비교한다.

루프가 고대 이단에 관해 논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시대 미국 영성에 관한 기술은 영지주의의 주요 특성들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 특성들로는, "교리보다 경험을 우위에 둔다, 공적 제도가 아니라 사적이다, 인식의 문제를 피하고 신화적이고 몽환적이다, 공공의 종교가 아니라 대중의 종교를 지향한다, 부드럽고 마음 써 주는 신관을 가지고 있다" 등이다. ..고대 영지주의처럼 우리 시대 미국인들이 영성에 접근하는 방법은 전형적으로 개인적인 관계의 축으로서 내면의 영을 강조한다.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변형판들마다 표면적으로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호튼은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미국 기독교를 관찰했을 때, 오늘날 개신교 자유주의와 개신교 복음주의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그 기본적인 종교 형태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한다.


미국제 기독교의 특징: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의 결합
호튼은 현재 미국제 종교의 특징을 도덕주의와 신비주의의 결합으로 본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의 결합이다. 현대 미국 기독교는 바로 이 두 가지 이단이 결합한 절묘하게 결합한 형태라는 것이 호튼의 주장이다.

펠라기우스주의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로 귀착된다. 구세주가 아니라 좋은 모범이 필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 이르는 영지주의의 길은 선한 창조주, 죄를 부른 타락,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처참한 죽음 그리고 육체의 부활 이야기를, 한 악신, 물질을 악하게 한 타락, 내면적인 계몽으로 인한 구속이라는 신화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위해서 우리 밖을 보도록 하는 반면,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는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안을 들여다보도록 한다. 이 둘은 합쳐서 미국제 종교라는 완벽한 기습작전을 성공시켰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다시 회복하는 길
펠라기우스주의건 영지주의건 이 모든 그리스도없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복음이 없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결국 각기 독특한 복음없는 율법을 주장한다. 호튼은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은 타락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기독교라고 전혀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는 어떤 형태의 자력구원을 가정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호튼은 교회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복음과 율법이란 무엇인가? 호튼은 복음과 율법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말한다. 율법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말한다. 이 둘은 아주 다른 말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지쳐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호튼의 진단에 따르면 복음이 강조되지 않고 복음없는 율법만 강조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복음의 이야기를 강조하기 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 우리가 이웃을 위해서 해야 할 요구사항만 자꾸만 늘어놓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없는 기독교'를 벗어나 다시금 그리스도 충만한 기독교로 변화될 수 있을까? 질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바른 치료를 할 수 있다. 호튼에 따르면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증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채 율법과 복음을 혼동한 것이며, 결국 교회가 복음을 복음답게, 율법을 율법답게 선포하지 못하고 복음없는 율법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튼의 해결책은 명확하다.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바로 알고, 복음과 율법을 바르게 선포하며 복음을 복음답게 율법을 율법답게하는 길이다. 호튼의 책을 읽고 나면 호튼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율법은 복음이 아니다. 이 차이를 자각하고 나면, 복음은 복음, 율법은 율법으로 대접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은 율법, 복음은 복음이 되게 하자.

이제부터 호튼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먼저 다음의 질문에 답해보라. 첫째,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둘째,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셋째, 복음과 율법의 차이는 무엇이며, 복음과 율법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면 우리 또한 그리스도없는 기독교의 일원으로 살아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복음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 곧 성경이 말하는 '다른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호튼의 여러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도움을 받은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복음과 율법'의 의미였다. 그동안 호튼의 <세상의 포로된 교회>, <언약의 하나님:언약신학 입문서>등을 통해서 복음과 율법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는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 <그리스도없는 기독교>를 통해서 교회사의 모든 이단들이 사실 이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혼동한데서 비롯되었으며,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를 막론하고 오늘 우리시대 '그리스도없는 기독교'를 만든 가장 중요한 뿌리요 원인이 '복음과 율법의 혼동'이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호튼의 기존의 책들을 통해 복음과 율법의 원리를 배웠다면, 이번 호튼의 <그리스도없는 기독교>를 통해 복음과 율법의 실전을 배운 느낌이다. 복음과 율법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요,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를 형성하는 데 기초다. 나는 앞으로 호튼의 <그리스도없는 기독교>가 우리 조국 교회가 다시금 복음과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달고 복음의 중심인 그리스도로 충만한 기독교가 되는 불씨가 되기를 소망한다.

추천의 글1 -윌리엄 윌몬
추천의 글2 -백금산 목사
한국어판 서문
헌정사

1장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미국의 포로 된 교회-
현대 미국 교회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증상┃이 책에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말이 의미하지 않는 것┃신학적 공백 상태에 빠진 복음주의

2장 찰스 피니의 펠라기우스주의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도덕적이고 심리치료적 이신론-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질병의 증상┃질병의 진단: 도덕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신학적 진단: 펠라기우스주의┃현대 교회 설교가 보여 주는 세속주의적인 경향┃자연적 본성적 이단

3장 조엘 오스틴의 형통복음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 분석과 비판-
가벼운 율법: 최선을 다함으로 불행에서 구원받는다┃<래리 킹 라이브>에 나온 오스틴┃『잘 되는 나』: 더 나은 당신이 되라┃영광과 십자가

4장 이머징 교회 운동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좋은 소식을 좋은 조언으로 변질시킴-
율법과 복음의 혼동: 편안하게 들리는 율법주의┃당연시할 때 실종되는 복음┃율법과 복음의 구분┃왜 율법에는 혹하고 복음에는 귀를 닫는가┃합당하게 율법을 공포함┃사랑의 복음┃율법은 제안이 아닌 명령┃부차적인 질문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 때┃성경은 처세서가 아니다┃성경은 도덕적 교훈이 아니다┃신조와 행위: 교리, 송영 그리고 의무

5장 영지주의 영성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당신만의 예수-
완벽한 기습 작전┃미국제 종교로서 영지주의?┃신약 성경과 영지주의┃고독한 영혼의 비상

6장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하는 방법
-복음의 메시지와 복음의 전달 매체-
대세 역전: 하나님의 일을 우리의 일로 변질시키다┃자급자족하는 사람들: 아이팟만 있으면 안 가도 되는 교회?┃복음이 이끄는 사명┃“영광, 영광, 할렐루야”: 문화 전쟁의 마스코트가 된 그리스도┃복음의 논리와 교회의 사명┃왜 많은 기독교인이 교회 일로 지치는가┃제자도의 부르심: 우리가 할 일이 있단 말인가

7장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 저항하라
-교회가 다시 복음을 회복하는 길-
저항의 담론┃저항의 방법┃퍼져가는 말씀: 선교적인 교회┃종교개혁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은 이유

부록. 더 깊은 생각과 연구를 위한 그룹 토론 문제
미주
마이클 호튼
마이클 호튼은 성경에 대한 건전한 주해, 신학 전반에 대한 통섭력, 문(文)·사(史)·철(哲)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눈부신 수사력으로 세속적 시대정신에 아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다. 그는 교계(敎界)가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상업적 실적주의에 경도되어 성경적·역사적 기독교 본연의 정조(貞操)를 버릴 때에는 이를 간과하지 않고 영적 전투의 검(劍)을 치켜들었다. 그는 신학교 교수, 저술가, 타협 없는 말씀 선포자로서 하나님 편에 서서 말씀의 전투를 수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이 시대의 바알과 아세라와 타협하고 절충한 변질된 기독교에 회개를 촉구하는 ‘남은 선지자의 음성’이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바이올라대학과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영국 캠브리지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복음주의출판연합회’(ECPA)가 수여하는 골드메달리언 저작상을 받은 바 있다. 현재 그는 ‘북미연합개혁교회’(URCNA)의 목사로서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교수로 봉직하면서 ‘미국 기독교 종교개혁 연합’(Christian United for Reformation)의 대표로도 정열적으로 사역하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나침반사), 「세상의 포로된 교회」(부흥과 개혁사), 「복음이란 무엇인가」(부흥과 개혁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