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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교와 불교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하나님아들 2019. 2. 27. 15:02

유교와 불교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1. 머리말 
한국교회에 샤머니즘과 불교와 유교적인 요소가 개입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 왜 한국의 기독교가 순수하지 못하고 전통 종교와 혼합될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는 한국 사회만이 갖고 있는 한국인의 정서, 교회 자체의 문제, 외래적 신학의 충격 등 몇 가지의 근원적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무속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창간호에서 피력했으므로 이 글에서는 '유교와 불교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2. 전통 종교가 개입된 요인 
1) 한국인의 종교성 
한국교회에 전통종교가 개입된 원인의 하나는 한국인의 종교성에 있다. 
아마 세계에서 한국인만큼 종교성을 지닌 민족도 드물다고 본다. 한국인은 옛부터 다종교(多宗敎) 속에서 살아왔다. 무속 종교, 유교, 불교, 도교, 심지어는 천도교, 대종교, 캐돌릭, 개신교 등, 요 근래로 와서는 이름도 없는 종교까지 합하면 수백 가지가 넘는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다. 한 마디로 종교의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면서도 이 종교들이 서로 비슷한 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것이든 요즈음 새로 생겨난 것이든 윤리적인 면에나 그 형태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따라서 어떤 종교는 이것이 불교의 한 종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이 사상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비슷한 것들이 많다. 
한국인에게는 아무런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종교가 혼합되어 내려오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는 두드러지게 나는 무슨 종교를 믿는다라는 것은 없어도 그들에게 면면이 흐르고 있는 한국 전통의 종교성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인에게 유교를 믿는 사람을 물어보면 2%도 안 되나 최준식 「한국 종교이야기」(서울 : 한울,1995) p.92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유교의 중요한 사상의 하나인 효(孝)나 권위주의 등 한 두개의 유교적 사상이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유교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절에 가면 합장을 하고 부처를 경건하게 여기며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에는 나무이마타불을 암송한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점도 치고 굿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뿌리박힌 한국 전통의 종교성의 바탕 위에 기독교가 들어오자 처음에는 이질적인 것을 느끼고 거부 반응을 이루다가 차츰 동화되어 현재 한국의 기독교를 이루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한국 전통의 신앙 위에 기독교라는 당의정(糖衣錠)을 씌워 놓은 느낌을 주고 있다. 그래서 당의정을 벗겨내면 다시 순수한 전통 종교를 지닌 한국인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일부는 절에 가면 부처 앞에서 합장을 하고, 점 집에 가서는 점을 치고, 사람이 죽으면 유교식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굿하는 것을 볼 때는 거부감을 그다지 느끼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모두가 내 것, 우리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무속 신앙의 기복 사상은 창간호 샤머니즘의 신관에서 언급한 것처럼 철저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특징이다. 무속 신앙에는 정신적인 복의 개념이 없다. 철저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뒤로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무속 신앙이 그대로 유입되었다는 지적이다. 복을 받기 위해 신을 믿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기도하고, 물질적인 응답을 바라는 마음으로 헌금을 하는 것 등 무속신앙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2) 한국 교회의 구조적 요인 
둘째는 한국교회가 그 동안 성도를 늘리기 위해 힘써만 왔지 성서적으로 성도들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데도 원인이 있다. 성서적으로 바른 기독교 이론 위에 튼튼한 토대를 닦아 놓은 것이 아니라 부흥에만 힘써 하나님을 믿으면 병이 낫고 물질의 축복과 만사 형통하는 이생의 모든 축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이 강조 된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그러다 보니까 성령의 은사를 흠모하게 되고, 물량주의와 신비적인 신앙이 팽배하게 된 것이다. 

 

3. 불교가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 
1) 100일 기도 
한국 교회만큼 기도를 열심히 드리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새벽기도, 금요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식기도, 합심기도 등 기도의 종류도 많고 또 열심히들 한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요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이기적인 면이 다분이 들어 있는데 문제가 있다. 특히 입학 철에 공부도 못하는데 합격시켜 달라는 기도를 하거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고 그런 사업인데 그 사업이 잘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 등은 모두가 자기 위주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기도가 형식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상 해야 하는 것이 기도인 것이다. 길을 갈 때나 차를 탈 때나 무슨 일을 할 때든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면 그것이 기도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기도에 샤머니즘적인 것과 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개입돼 있다는데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100일 기도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주로 입시철 등 100일을 남겨 놓고 온 교인이 합심하여 하는 작정 기도이다. 문제는 100일이라는 숫자 의식이다. 이는 불교에서 부처에게 드리는 기도를 보통 49일 기도 혹은 100일 기도 등의 명칭을 붙이고 기도한다. 또 한국에서는 보통 100일이라는 숫자를 좋아해서 아기가 100일이 되면 축하하고 잔치를 벌인다. 무당들도 자기를 찾아온 사람이 큰 병에 걸렸을 때에나 사안(事案)이 클 때에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바치게 하고 100일 기도를 드리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 100일이라는 것은 혼합사상에서 들어온 듯하다. 이 사상이 기독교에 들어와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7일기도나 40일 기도라면 모르되, 100일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2) 현실도피 사상 
기독교는 현실을 긍정하고 현실에 도전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선한 싸움을 싸우는 생활을 해야 한다.(딤후4:7) 바울은 그리스도인 생활을 씨름에 비유하기도 했고(엡6:12) 경주하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 (마10:38, 16:24, 막8:34, 눅9:23, 14:27). 불교의 현실 세계를 부정하는 태도는 도피적인 인생관을 갖게 하였는데 기독교인들 중에서 상당수가 이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 현실에 도전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고 변혁을 일으키고자 노력하고 애쓰는 대신 오히려 현실을 도피하는 생활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국 수많은 기도원 중 일부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으리라고 본다. 이훈구 : 「한국 전통 종교와 한국 교회」(서울 연합선교회,199). p.147 
물론 기도원 운동이 한국 교회의 영적 부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다. 영적으로 잠자고 있던 한국 교회를 기도원 운동이 잠에서 깨어나게 해 주었으며, 기도원 운동의 결과로 한국 교회가 세계에서 기도를 제일 많이 하는 교회로 손꼽히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성도들로 하여금 열심 있고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기도록 가르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일부 기도원은 한국 교회 신자들을 병들게 하는 장본인이 되기도 했다. 신학이 정립되지 못한 자들이 기도원을 설립하여 기도원을 운영하다 보니 한국 교회를 은사주의, 신비주의, 체험주의에 빠지게 만들었고, 성도들에게는 기복 신앙, 도피주의 신앙에 빠지게 하였으며 문제들을 일으켜 신문에 오르내리게 하기도 하였다. 이훈구 : 전게서, p.148 
그래서 어떤 조그만 문제가 있어도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현실을 외면, 가족과 일터를 팽개치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기도원으로 도피하는 사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은 기독교가 기도원의 영향을 받아 불교의 현실 도피주의를 수용한 결과라 하겠다. 
또 하나, 현실을 도피하여 살아가는 교인이 되게 한 원인을 보면 잘못된 전도에 있다. 한국 교회의 전도는 첫번째 말도 마지막 말도 복 받고 천국 간다는 말이다. 물론 기독교는 구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 천국 가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만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한다든가 그들의 괴로움에 동참하여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기복신앙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마는 종교가 되고 있는 것이다. 

 

4. 유교가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 
1) 외형적 신앙 
한국인의 인격 또는 성격 형성에 있어서 유교의 윤리는 형식주의의 방향으로 흘러버렸는데 이런 유교의 형식주의는 기독교 신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기도할 때 통곡의 눈물은 있으나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가혹한 냉대가 따르는 이중적 생활이 한국 교인들에게 있다. 
자신의 부실을 은폐하거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름을 팔고 성직을 파는 경우가 많으며, 교회에서는 중직을 가졌으나 직장에서는 그 직분과 전혀 관계없는 이중의 생활을 살고 있는 것이 허다하다. 주일날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월요일의 하나님은 등한시하는 경향은 신앙을 다만 천국입장권으로만 생각하는 한국 교회의 그릇된 신앙 때문이라 하겠다. 교회도 대형교회만을 찾게 되고 목사들도 대형교회 목사는 성공했고 출세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교회마다 큰 교회를 지으려고 야단들이다. 오로지 자기 소속된 교회만 성장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이러한 외형주의는 삶을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낼 수가 없다. 

2) 제사의식 
유교에서 하늘과 조상은 제사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고 유교사상의 두 가지 커다란 근원을 이루고 있다. 유교의 근본 사상 가운데 하나가 효(孝)이며 효는 덕(德)과 인(仁)의 근본이기도 하다. 
공자는 사람은 두 가지로 성립된 것으로서 만인(萬人)은 반드시 죽는 법인데 죽으면 귀(鬼)는 땅으로 돌아가고 신(神)은 위로 올라가 서로 갈라지나니 제사로서 귀와 신을 다시 합하려고 하는 것이 곧 제사라고 했다. 따라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맹자는 죽은 자에게 제사하는 것이 산 자를 기르는 것보다 더 중대한 일임을 말하고 나서 그 이유를 사자가 그 여생을 당분간 더 연장시키기 위해서는 제 스스로가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로지 생자(生者)에게 의존되어 있는 까닭이라 하였다. 주세용 : 「선유의 천주사상과 유교사상」(경향잡지, 1978), p.21 이런 의식이 기독교인들에게도 남아 있어 많은 기독교인들이 제상에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형식만 다를 뿐이지 추도식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변명하기도 한다. 

3) 권위주의 
유교의 장유유서(長幼有序)로 대표되는 상하 질서 의식은 한국인의 예(禮)의 표본으로서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장유유서는 한 마디로 나이로 구분되는 서열의식을 뜻하는데 서열을 구분하다 보니까 자연 나이로 구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이 많은 사람도 높은 서열에 있게 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 근엄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 보니까 권위 의식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상하를 구분하는 것은 같은 조건에서는 나이로 가르나 그렇지 않을 때는 지위로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학년 학생들은 2학년이나 3학년 학생이, 회사에서는 과장보다는 상무나 전무를 더 높게 여기게 된 것이다. 
이 서열의식이 나타난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존대법(尊待法)이다. 학년이 한 학년이라도 높으면 형이라고 부르며, 형들은 형의 위치를 누리기 위해 동생보다는 근엄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관직의 서열에서는 더하여 지위가 높은 사람은 그 권위로서 위엄을 떨쳤던 것이다. 이것은 유교의 관료주의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입신 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의 이름을 드날리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라고 할만큼 유교에서는 관직에 나가는 것을 최고의 출세로 여겼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같은 식사를 하는데도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높은 사람들끼리 모여 식사를 하며, 식판을 나르는 데도 모두 자기 먹을 것을 자기가 가져오는데 기관장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그 부하 직원이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것을 먹는다. 이러한 종적인 관계는 상하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게 했고, 나아가서는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위선적인 일까지 자행하게 되었다. 사실 권위와 권위적인 것은 다르다. 어느 사회이나 권위는 있어야 하나 권위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한국사회의 권위는 필요한 권위가 아니라 권위적인 것에 더 가깝다. 
이런 현상은 교회 내에도 들어와 모든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수평적인 관계로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고 집사보다는 장로가 높고 장로보다 목사가 높다고 여기고 있는 서열의식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물론 목사로서 장로로서의 권위는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권위적인데 문제가 있다. 집사나 장로나 목사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직분일 뿐이지 서열을 나타내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유교의 이 서열의식이 교회에까지 침투하여 권위의식을 갖게 만든 것이다. 

4) 생활의 이원화 
앞서 유교적 권위 의식은 남에게 보이려는 하나의 위선적인 것이 되기 쉽다. 그리스도인은 빛의 자녀들로 그 빛의 열매는 진실이다.(엡5장 8-9)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한 청지기가 될 것을 권했고, (눅12장 42절) 바울도 종들에게 권면하기를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했다. (골3장22절)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의식을 꾸짖은 것도 (마23장15-36절)그들에게 진실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이 진실이 부족하다. 기도할 때 통곡의 눈물은 있으나 거지를 향한 가혹한 냉대가 따르는 이중 생활이 한국 교회의 신도들에게 있고, 생계를 위해 교회의 이름을 팔고 성직을 파는 경우가 많으며, 교회에서는 중직을 가졌으나 사회에서는 그 직분과는 전혀 관계없이 사는 이중성이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노아의 식구가 방주로 인하여 살았듯이 교회 건물에 들어서야 거룩해지고 구원받는다는 생리가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 들어서면 모두 천사같이 부드럽고 진실하며 거룩하지만 교회 건물을 벗어나면 될 대로 되라는 식이고, 신앙도 헌금도 사랑도 전매 특허품처럼 되었으며, 교회 출석의 개근이 곧 천당행의 방주 티켓이나 되는 양 생각하는 층도 부지기수다. 크리스찬타임즈사가 한국 갤럽조사 연구소에 의뢰하여 기독교에 대한 반응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조사 대상자 중 34%가 교인들이 진실성이 없다고 지적하였다. 또 교인들이 이기적이다가 11.8%이고,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다가 10.7%이고, 기독교가 타락했다가 9.5%나 된다. 이렇게 기독교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받게 된 것은 교인들이 진실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의견이다. 기독신보 773호 
이는 한국 교인들이 일반 국민들 앞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교인의 일부는 신앙 따로 생활 따로라는 이중적 생활 또는 위선적 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 교회 일부 신도들은 사랑도 말로만의 사랑이요 사랑의 행동에는 허식만이 있을 뿐이다. 신앙 생활이 예배당 건물 안에서만 행해진다고 생각한다면 생활과는 유리된 위선을 낳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것은 오로지 한국인의 의식 속에 뿌리 박고 있는 유교적 권위의식이 나아가 위선적인 이중생활로 바뀌게된 동기라고 본다. 

5) 분파주의의 신앙 
유교의 이기적 가족주의는 기독교의 들어와서 크게 작용하여 파벌을 조성하고 배타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편협성을 드러나게 이르렀다. 한국 종교 문제 연구소의 집계에 의하면 1981년 12월 현재로 우리 나라 개신교 교단을 81개로 발표했는데, 그 중에 장로교가 45개 교단으로 56%, 감리교가 6개 교단으로 7%, 성결교가 6개 교단으로 7%, 침례교가 7개 교단으로 8%, 그리스도교가 2개 교단으로 2%, 기타 15개 교단으로 20%이다. 기독교신보, 773호, (1989, 1, 4,) p.11 그러나 지금은 이보다 훨씬 더 많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교단의 분열은 개교회에 파급되어 교회 분규의 현상을 빚고 있다. 그 분열의 원인은 교파가 분열할 때마다 총회(總會) 안에서 주도권에 대한 싸움을 전개한 후에 딴 총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교권을 장학하기 위해서는 반대 세력들을 견제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매수라든지 정치적 조치를 행한다. 개교회 안에서도 분열이 있어 단합이 잘 되지 않고 파당이 생겨 원목파, 부목파, 장로파, 전도부인파 등 여러 파들이 나누어지기도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한 주님을 고백하고 한 성령을 믿으면서도 실생활에서는 분열이 있어 교회의 공신력은 추락되고 주변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근거가 되고 있다. 조선 500년 동안 한국인의 심성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유교의 편협한 분파주의는 기독교 안에까지 파고 들어와서 파벌을 조성하고 배타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편협성이 교회 안에서까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예배 시간에는 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한 주님을 고백하고 한 성령을 믿으면서 실생활에서는 갈라져 있으니 진정한 예배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장로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던 1950년 대에 누구 편이냐 하는 말 대신 어느 진영이냐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몇 개의 진영으로 양립한 대립 감정 같은 반목은 결국 찬송가를 여러 개로 갈라놓고 예배의 혼란을 가져온 것이다. 
설문 조사에 의하면 한국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원인으로 사랑이 없고 파벌과 분열 때문이라는 사람이 460명 응답자 중 117 명으로 26%를 차지하고 있다. 김기현 : 「한국 교회의 예배와 생활」 (양서각, 1984), pp. 111-112 
이것을 보면 한국 교인들은 분열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계의 장기적인 분열의 과정에서 교회 지도력은 실패하고 영력이 결핍되고 교단의 불신 등이 생기게 되어서 그 결과 많은 이단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금도 많은 이단들이 기성 교회를 비판하고 약화시키고 분열을 모색하고 기성 교회의 교역자들과 신도들을 유인하여 잘못되게 만들고 있다. 
선교적인 면에서도 분파주의의 편협성은 교회를 비정상으로 늘어나게 만들었고 교회의 본래적인 본질과 이미지를 흐리게 하고 있다. 김정준 : 「한국교회 갱신론의 반성」 ( 기독교 사상, 1975, 10), p.45 

6) 인본주의의 신앙 
유교는 인본주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정치 철학 생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주의적 기독교 신앙은 생존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활이어야 하는데 인격적 신을 믿지 않는 유교사상이 기독교에 침투하여 기독교가 무시되는 경향이 높아지고 점점 하나님을 떠나 인본 중심의 삶으로 바꿔지고 있다. 그 바람에 새벽기도나 교회에 헌신하며 밤이 새도록 기도하며 부르짖는 일을 우습게 취급받았음을 물론 피흘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무모한 짓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훈구 : 「한국 전통 종교와 한국 교회」 (연합 선교 교회, 1991), p.131 
요즈음 기독교 학교들이 점차로 복음을 상실해 가고 있으며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눈치보며 교회 출석을 하고 있고 회의에서의 결의도 눈치로 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하나님 본위로 사는 사람은 진실하게 살지만 인간 본위로 사는 사람은 진실이 없다. 기독교는 하나님 중심의 삶이지 인간 중심의 삶이 아닌 것이다. 김정준 : 「한국 교회 갱신론의 반성」 (기독사상, 1975. 10), p.184 

 

5.혼합주의 신앙이 한국 기독교에 미친 영향 
한국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전통 요소가 배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예배 의식 속에까지 샤머니즘, 불교, 유교의 제사 요소가 혼합되어 변질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일찌기 Paul Crane은 한국의 크리스챤은 교회에 출석하는 유교인이라고 말하였다. 혼합주의 사상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장례의식 추모예배 의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1) 종교 다원주의 
일부 기독교인들은 불교나 도교에서 말하는 염라대왕이나 옥황상제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똑같은 절대자라고 보고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도교에서는 옥황상제로 불교에서는 염라대왕으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이 가지는 고유의 종교 혼합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사후에 가는 천당이나 극락세계도 결국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한국인에게는 뚜렷한 종교가 없으면서도 불교든 유교든 샤머니즘이든 다 믿고 있는 데서 생겨난 종교 혼합주의의 현상이다. 이 혼합주의 신앙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일부 교인들은 기독교 본래의 성서적인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각자 나름대로 생각하여 성부는 한국의 민족의식 속에 계속 전해져 내려 온 최고의 신 개념인 하느님으로 보고 ,성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해 주는 무당적 개념에서 이해하려고 하고, 성령은 입신하여 엑시타시를 경험하게 하는 샤머니즘적 신으로 오해하고 있다. 심지어는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말하는 하느님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결국은 같은 것이 아니냐는 말에 동조하는 기독교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사람들의 일부는 어쩌다가 기독교를 믿었기에 그렇지 사실은 불교나 기독교나 다 같은 종교요 결국 착한 사람이 되라는 종교요, 모두 복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은 같지 않느냐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를 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종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독선적이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퍼붓는 것이다. 일종의 종교 다원주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장례의식 
혼합주의의 사상은 장례(葬禮) 의식에도 나타나고 있다. 
장례의식은 죽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기억하고 남은 가족과 친지들이 스스로의 생활과 신앙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데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상례에 대한 의의는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기억케 하고, 남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신자들에게 신앙적 각성을 주는 동시에 불신자들에게 전도의 기회를 주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성겸 : 「새예식서」 (은성문화사, 1980), p. 63 
기독신자인데도 상을 당한 경우에 시신 앞에 상을 놓고 상위에 향로를 놓아 조문객으로 하여금 분향케 하며, 또 촛불을 켜서 양쪽에 밝게 하고 고인이 사용하던 성경 찬송을 상위에 놓는 것은 불교와 유교의 혼합된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심지어는 상위에 사과나 배 같은 과일을 놓아두는 상가들도 있다. 
절에서 부처 앞에 촛불을 켜서 밝히며 계속하여 참배객으로 하여금 분향케 하는 것이나, 유교의식으로 조상을 숭배케 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낼 때 혹은 촛불을 켜놓고 음식을 차려 놓고 조문객들로 하여금 분향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의식이라 하겠다. 음식을 차려 놓는 것 대신 성경 찬송가를 올려놓는 외에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가 혼합된 의식임을 잘 말하고 있다. 
또 상제들이 굴건제복(屈巾祭服)을 하고 갖가지 조기(弔旗)를 들고 장지까지 가는 것은 전형적인 유교의 의식인 것이다. 묘지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을 불러다가 명당을 찾아 묘를 쓰려고 한다든지 비록 지관은 부르지를 않는다 하드라도 명당이길 바라는 것은 유교 내지 도교의 사상이라고 아니 할 수가 없다. 시간을 따져 좋다는 시간에 하관하는 것도 불교와 유교의 혼합된 의식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다른 종교에서 행하는 의식을 어떤 사람들은 전통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기독교에서는 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잘못하면 우상 숭배가 될 수 있고, 기독교의 교리를 잘못 해석할 수가 있기 때문이며, 기독교 이외의 다른 교와 융통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철저히 기독교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도 인정하고 저것도 인정 할 때 기독교는 혼합종교가 되고 마는 것이다. 특히 사람이 죽은 뒤 3일만에 지내는 제사인 삼우제(三虞祭) 일례로 들 수 있는데 유교나 불교에서처럼 장례 후 꼭 삼일만에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탈피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한 마디로 말하면 모든 의식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또 우리에게는 은혜가 되도록 해야 한다. 

3) 추도 예배 
제사는 공자시대 이미 유행하고 있던 중국 종교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조상 숭배 의식의 하나이다. 조상 숭배란 살아 있는 후손들이 이미 죽은 선조들의 영혼을 섬기는 것인데, 살아 있는 후손들은 죽은 조상이 죽어서도 혼의 모습으로 계속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그 조상들에게 부단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조상들이 자신들의 가계의 행과 불행을 좌지우지한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조상들에게 잘못하면 큰 불행이 올 것을 생각하고 살아 생전에 불효를 했다 하더라도 죽은 뒤만은 정성껏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한국인의 조상 제사는 고대부터 지내온 풍습인데 고대에는 샤머니즘과 결부되어 죽은 사람의 영을 위로하기 위한 제사로 드리다가 신라와 고려의 불교가 이를 이어받아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것으로 수정되었고, 이조에 이르러서는 유교의 효사상과 결부되어 4대까지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제사 의식은 종교의 혼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사 의식은 엄격하게 말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일 수 없다. 그 이유는 제사는 후손들이 복을 받겠다는 기복 사상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제사는 기독교의 십계명에서 말하는 부모 공경일 수도 없고 효도일 수도 없다. 김병화 : 제사문제와 기독교의 효도, ( 보문출판사, 1985 ), p.119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죽은 혼이 제삿날 찾아온다 믿는 사상이다. 이는 샤머니즘적인 귀신 사상이 아닐 수 없다. 앞 샤머니즘의 신관에서 언급한 것처럼 귀신을 불러내는 것과 같은 것으로 제사를 지내는 한국인들은 제삿날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를 내는 것은 조상 혼이 와서 먹고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샤머니즘과 유교와 불교의 혼합사상이다. 
문제는 한국교회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단순히 부모를 생각하는 행위에서 나온 것이고 또 추도 예배나 제사나 사실 형식만 다를 뿐이지 결국 같은 것이 아니냐 하는 일반인들의 주장을 묵인한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게는 제사를 지낸다면 추도 예배로 드리는 것이 제일 좋다고 본다. 추도 예배 역시 돌아가신 날을 기억하며 부모님의 크신 은덕을 기념하고 위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래로는 부모님이 남기신 업적과 신앙을 되돌아보고 본을 받기 위함이어야지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드려서는 안 된다. 
그런데 추도 예배 때에도 음식을 차려 놓고 추도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 추도예배를 드릴 때 
① 사진을 걸어놓고 촛불을 켜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전체의 16% 
② 사진 앞에 촛불을 켜고 음식을 차려 놓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전체의 11% 
③ 사진만 걸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전체의 8% 
④ 음식만 차려 놓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전체의 21% 
⑤ 예배만 드리는 사람이 전체의 36% 
⑥ 무응답자가 전체의 8%로로 나타났다고 한다. 
류하순 : 「기독교 예배와 유교제사」 ( 양서각, 1987), p.200 
이렇게 볼 때 혼합주의적으로 추도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전체의 64%나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음식을 차려놓고 추도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일단은 죽은 혼이 와서 음식을 먹고 갈 것이라는 일반 가정의 제사의식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전통사고를 지닌 가정에서 기독교적인 생활 방식을 고집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주만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취할 태도라고 믿는다. 

 

6. 결론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우선적인 과제는 교회 내에 있는 전통 종교의 요소들을 제해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한국교회가 바르게 성장할 수가 없다. 그리고 전통 종교의 요소들을 제거하는 길이 바로 한국교회의 갱신이라고 본다. 기독교의 부흥을 가로막는 저해 요인들을 제거 할 수 있어야 진정한 갱신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팽배하고 있는 기복 신앙과, 체험 위주의 신앙과, 신비주의 신앙은 한국교회를 샤머니즘적 기독교로 변질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신앙은 예배의식과 교인들의 생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또 한국인에게는 유별난 종교성은 유교든 불교든 샤머니즘이든 모두 잘 받아들이게 하여 기독교를 혼합된 다원주의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를 치유하고 더 이상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경의 바른 이해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각 교회마다. 올바른 성경공부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제는 심령부흥회니 전도니 할 때가 아니라 철저한 성경공부로 성도들을 무장시킬 때라고 본다. 신론, 기독론, 성령론, 인간관, 구원관, 예배관, 바른 기도와 은사론, 축복론, 교회론 등을 바르게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믿음의 반석 위에 서게 하고 성도로서의 바른 생활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로 하여금 주의 빛을 드러내게 하는 길이요. 전도의 길이라고 본다. 
한국 기독교는 선교 초기 한국의 전통 신앙인 무속과 끊임없는 싸움을 벌이면서 복음의 씨앗을 뿌려왔다. 그런데 어느덧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옥토에는 하나 둘씩 자신도 모르게 가라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가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고 이 땅에서 공신력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루 빨리 한국 교회에 뿌리 깊게 내리고 있는 무속적이고 기복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일이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양적인 성장에만 매달리지 말고 이제는 질적인 성장을 위해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바른 기독관을 정립시키고 교육을 함으로써 한국교회 깊숙히 뿌리 박고 있는 외래적인 요소를 뿌리 뽑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는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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