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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7장 부흥주의의 출현

하나님아들 2019. 1. 26. 19:37

7 장 부흥주의의 출현

 

켄터키 부흥에 동반된 감정주의와 육체적 이상 현상에 대한 상반된 반응

 

주지하다시피 모든 영적 각성은 심오하게 죄를 깨닫게 될 때 시작된다. 무관심과 차가운 종교적 형식주의의 태도에서 많은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경청함으로 심지어 종종 육체적 쇠약까지 동반하는 고통과 걱정에 갑자기 휩싸이는 것이다. 부흥이 임하는 초기에 청중이 예배 도중에 마루에 엎드리고 쓰러지는 현상 또는 고통 가운데서 울부짖는 현상들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부흥이 진행되던 시기에 신앙 지도자들은 이런 종교적 현상들을 잘 통제했고 지도자들은 종교적 흥분의 순수성과 그것이 맺어야 하는 열매를 요구했다.

 

때때로 이런 감정적 현상들이 부흥 때마다 정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팽배해지자 일각에서는 감정의 강도로 성령의 역사를 측정할 수 있으며, 어떤 육체적 현상과 영향은 하나님이 역사하신 증거들이라고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다른 이들은 이것을 순전히 종교적 광신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견해를 견지하는 사람들은 감정이나 육체적 현상들은 모두 성령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장로교 안에서 발생했다. 또한 이 점에 대해서는 장로교 목사들이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장로교 목사들은 1801년 여름, 부흥 시기에 드려졌던 예배 도중에 발생한 육체적 현상들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냈다. 무절제한 현상이 잘 통제되어야 한다는 자들이 있었던 반면, 이런 현상들을 전혀 비판하거나 문제삼지 않았던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종교적 흥분이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아니라는 이들의 주장을 믿으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부흥을 반대하는 인물들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결국 장로교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분열과 함께 교세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1846, 아키발드 알렉산더는 그의 친구인 조지 백스터가 1802년에 그에게 썼던 본 주제에 대한 결론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하면 부흥이 끝나갈 무렵에 발생한 많은 사건과 그것들을 수행한 사람들의 방식이 매우 잘못되었으며, 매우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산만하고 광신적인 영이 도처에 만연되어 있었다는 것을 잘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정말 광대하게 부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특별히 부흥 초기에 진정한 회심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내 격렬한 공상과 상상의 탐닉에 빠졌으며, 육체적인 현상과 성향에 너무 큰 강조점을 두기 시작했다. 이런 육체적 흥분이 더욱 장려될수록 육체적 현상들은 더욱 증가했으며, 그들은 마침내 매우 전염성이 강한 이런 혐오할 만한 흥분상태의 질병조차도 많은 말씀들이 증거하고 인정하는 것들이 나타난 것이라고 가정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 종교적 흥분의 비극적인 결과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오류의 영이다. 이 같은 오류의 영은 이전에 건전한 신앙을 유지했던 많은 사람을 정도에서 벗어나 일탈하게 만들었으며, 이 가운데는 장로교 목사들이 많이 있었다.

 

둘째로, 분리의 영이다. 적지 않은 부흥의 인도자들과 조력자들이 장로교를 떠나 분열했으며, 매우 빈약하고 오류가 많은 신학체계를 설교하고 선포하는 새로운 교회와 교단을 형성햇다. 이런 분리주의자들 가운데 일부는 육체적 흥분이 가라앉자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들이 교육을 받아 왔고 오랫동안 고백하고 설교해 왔던 정통 교리에서 멀리 떨어져 나갔다.

 

셋째로, 거친 종교적 광신주의다. 이는 적어도 퀘이커 교도로 가입한 켄터키에 있던 장로교회 소속의 세 명의 목사들과 오하이오에 있는 어떤 이들의 영향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전에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부부들이 서로 별거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들의 자녀들은 가장 광신적인 사회 속에서 교육을 받도록 내버려졌다. 나는 이 파멸된 가정들의 친구들을 위해 그들의 이름들을 언급하는 일을 절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엄청난 흥분의 총체적인 결과는 켄터키의 모든 장로교회와 일부 테네시의 장로교회들을 완전히 황폐화했다. 이것은 결코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다른 장로교 저술가 켄터키 사람이었던 토머스 클리랜드 박사는 1834년 다음과 같이 기록하면서 그 유익을 강조하기도 했다. ‘초기에 이 부흥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역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많은 사람이 경건하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대부분은 지금까지 계속 경건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예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찾았다. 배교자들의 숫자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다.’

 

켄터키 부흥에 동반된 영적 병폐들: 각종 이단과 대중주의가 출현함

 

켄터키 각성에서는 병적 흥분 현상이 드러났는데 이는 모든 이어지는 논의와 논쟁들의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영적이며 악한 병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가지는 자신들의 신앙이 정통 종교라고 주장하는 새로운 교단들이 갑작스럽게 출현해서 성장한 일이다. 마셜파와 컴벌랜드 장로회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회 등과 같은 단체들이 정통 교단들의 교인들을 유혹했고, 몰몬교와 셰이커교와 같은 종파들은 정통 기독교와의 연속성을 포기하며, 자신들이 하늘에서부터 이적적으로 진리를 직접 수여받은 진리의 후견인이라고 자처하고 나섰다. 상황은 무질서와 혼동으로 더욱 혼란스러워져 갔다. 이에 대해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는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모든 신학적 방랑자들과 말쟁이들이 이 곳에서 서투른 솜씨로 신학을 거래하고 있었다.’

 

새로운 교파들과 이단 종파들은 일반적으로 초자연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들이 설립하였다. 그들은 신학자들이 해석한말씀들은 거부하고 오직 성경 말씀만 인정했다. 그들은 계시와 병 고침과 같은 이적적인 일들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병고침과 이적적인 일과 같은 사역들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전통적인 장로교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시기의 또다른 영적 병폐는 대중의 생각과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대중주의로 대변되는 자유는 네마 같은 사람이 완전한 자유의 물결을 주장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역자들이 잘 준비되고 훈련되었지만, 이제 미국의 모든 사람이 설교자가 될 수 있다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자는 더 이상 특별하게 준비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학교도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제 모든 인간의 신조들과 신앙고백들이 폐지되고 현대의 성직자들의 능력과 권위는 완전히 폐기된 것이다. 켄터키에서 발생한 이런 분열과 혼동의 조짐은 1800년 이전에 이미 존재했었다. 그것은 성경적 가르침의 부재와 교훈의 부족으로 인한 혼란과 혼동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감리교의 알미니안주의 신학의 득세로 부흥주의가 조장되고 옹호됨

 

감리교 역사가인 윌리엄 워런 스위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부흥운동들은 거의가 장로교를 통해 발생한 것들이다.’ 스위트가 말한 장로교는 단지 장로교회 조직을 의미했을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적 신앙을 고백하는 침례교와 회중교회들을 포함하는 여러 교파들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감리교의 복음 이해가 그 당시의 복음의 이해와 어떻게 다른지 확실히 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복음적 알미니안주의는 주로 존 웨슬리가 조직했고 종교개혁과 청교도 시대의 신조와 신앙고백들에서 일탈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학파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못박히심을 통한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구원의 메시지를 견지하고 있었고, 양자 모두 중생의 필요성과 믿음 그리고 생활의 순결과 거룩을 교훈하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 성경적 진리를 해석하는 데서 의견이 대립했다.

 

복음적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베풀어지는 것이므로 그 은혜를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사람의 결정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만일 은혜가 인간을 새롭게 하기 전에 회개와 믿음이 반드시 선행해야 할 조건이라고 한다면, 인간본성의 상태가 너무나 부패하고 타락해서 그 누구라도 복음에 반응해서 이 조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없다는 진리를 믿었다. 그들은 오히려 회개와 믿음을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구원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양자 모두 웨슬리와 휫필드의 사역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님이 모든 이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명령하고 권고하고 계심을 믿었다. 양자 모두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주었다. 양자 모두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가르쳤으며, 죄가 인간의 타락과 파멸의 원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또한 양자 모두 하나님이 사람을 향해 인내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며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실제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구원을 계획하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미치는 효력이 한정적이며 특별해서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실 자만을 위해 돌아가셨으며,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믿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칼빈주의자들이 이렇게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복음 전도 사역을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설교자로 하여금 그의 회중에게 언제나 믿음을 사용하라고 즉, 믿으라고 말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칼빈주의적인 복음 이해에 따르면 설교자는 결코 믿으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죄인을 향해 구원을 선포하는 자들이 얼마나 설교를 잘 하고 못 하는가의 문제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로 사람의 능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대응했다.

 

미국에서의 정통 신학과 복음 전도 방법은 오랫동안 종교개혁과 청교도 시대의 신조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1790년에 이르러서 감리교는 성경적인 진리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알미니안주의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1789년에 프랜시스 애즈베리와 토머스 쿡은 공동으로 최초의 미국 감리교 잡지의 창간을 착수하고 그것을 알미니안 잡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이 잡지는 웨슬리의 영국 잡지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이 일이 있기 전, 장로교회는 자비롭게도 그들의 교회 건물을 감리교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곤 했다. 그러나 장로교 관계자들은 감리교회 목사들이 설교한 이상한 교리들로 인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감리교의 독특한 신앙은 1790년대의 버지니아를 강타했고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초반의 몇 년 동안 여러 곳을 여행하며, 그의 책 미국에서의 침례교 역사 개관을 위해 자료를 수집했던 데이비드 베네딕트는 특별히 선택교리에 있어서 감리교도들이 정통 신학에 대항하는 자신들의 감정과 논평들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 시기의 몇몇 감리교 순회 전도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칼빈주의의 예정론을 대적하기 위한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기로 예정된 자들처럼 행동했음을 잘 인용하고 있다.

 

당시의 칼빈주의자들은 알미니안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그 기초와 지반을 형성할 수 있었던 주원인을 알미니안주의라는 사상이 인간의 타락한 자연적 성품과 이해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로버트 셈플의 말을 빌려서,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마음 즉 인간의 자의를 추구하려는 욕구와 매우 잘 부합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켄터키 부흥이 발생하기 이전에 많은 그리스도인을 올바르게 교훈하고 격려해 주었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논증은 그 이후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원론적으로 감리교가 책임을 져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감리교도들은 이내 세력을 확장했고, 당시 많은 장로교의 협력자들과 조력자들이었던 감리교도들이 오히려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부흥의 후기에 있었던 이런 감리교의 약진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내부적인 분열에 휩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리교는 상황이 광신적인 절정에 이르렀을 때도 흥분과 동요를 분별하거나 억제하지 않고 오히려 자진해서 의도적으로 이런 흥분에 순응해 버린 것이다. 감리교도는 지식보다는 감정적인 열심과 열정을 쉽게 칭찬하고 찬양하는 분위기 속에서 격정적인 감정과 고성을 지르는 것, 흐느껴 우는 것, 껑충껑충 날뛰는 것, 쓰러지는 것 그리고 기절하는 것들이 마치 진정한 신앙의 참된 특징이자 표준인 것처럼 간주해 버렸던 것이다.

 

특히 야외 집회를 통해 위원회를 창설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상설한 것은 명백한 믿음과 신학에 대한 문제였다. 1800년 이후에, 장로교와 침례교가 대중 집회 계획을 포기했던 반면, 감리교는 이런 대중 집회를 계속해서 미래 복음 전도의 열쇠로 간주해 버렸던 것이다. ‘야외 집회라는 용어는 1802년 애즈베리의 일기에서 최초로 발견된다. 그 이후에 이 용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1809,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우리는 반드시 야외 집회에 참석해야만 한다. 이 야외 집회는 그야말로 추수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야외 집회를 통해 생산되는 위대한 결과들을 듣고 보고 있다.’

 

감리교는 켄터키에서 발생한 이런 교훈과 현상을 정규적인 것으로 동력화했고 일상화했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대중 집회의 조직이 복음 전도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부분이라고 간주하고 그런 주장을 퍼뜨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수 일 동안 계속해서 반복되는 거대한 숫자와 군중의 찬양으로 격앙되고 고무된 감정이 어떤 특정한 결과를 이끌어 내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감리교는 미리 상상하고 예상된 회심자의 숫자를 기록하고 예배 때에 미리 선언하기도 했다.

 

옛 복음주의는 이런 인간적인 방법들을 단호하게 배격했다. 그것은 심지어 존 웨슬리도 사용하지 않던 방법이었다. 그 어떤 심리학적 지식보다도 더욱 성경을 강조했던 칼빈주의자들은 신약성경을 통해, 어떤 전문적 기술이나 방법이 회심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을 배격했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하심 외에는 죄인을 회개하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이나 방법은 전혀 없다고 믿은 것이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들은 특정한 기술이나 방법의 사용이 오히려 참된 성경적인 회심의 의미를 왜곡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야외 집회 심리에 대한 칼빈주의자들의 반대는 매우 신학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 예배 시간에 쓰러진사람들의 숫자를 세는 것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그리고 매우 경솔하게도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 회심자의 숫자를 파악하는 시금석으로 여길 정도로 그들은 참된 신앙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 결국 그들은 무언가 또다른 것을 필요로 했고 그것은 소위 강단 초청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가시화되었다. 1801년 감리교도는 델라웨어에서 벌어진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기도 후에 나는 비탄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앞으로 나아오게 했으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기도하라고 했다. 그러자 상당한 숫자가 앞으로 나아왔다.’

 

처음에는 그 누구도 이것을(강단초청) 회심의 수단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단 앞으로 나아오게 하는 초청이 회심과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명백한 일이었다. 감리교 순회 설교자였던 피터 카트라이트는 1806년의 한 야외 집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단은 몰려드는 애도자와 간증자들로 넘쳐났다. 젊은 아가씨들이 강단 가까이 앉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그들이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겠다고 약속한다면, 그 곳에 앉는 것을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야외 집회에서 원했던 만큼의 많은 사람이 쓰러지면 사람들을 강단으로 초청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쓰러지는 현상들을 마치 회심이 이미 일어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다른 교회에 속한 부모가 자기의 아이가 강단으로 나오는 것을 방해하면, 그 부모가 아이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들이 생명에 이르지 못할까 두렵다. 그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영혼을 결국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앞으로 나오는 것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 그 근거를 확보하게 되자 전례 없는 성공적인 결과들이 뒤따랐다. 이 때부터 회심은 강단초청과 연관되었고, 그래서 이렇게 숫자를 파악하였다.

 

1800년 이후에 들어서 이런 감리교회의 사상과 관습들이 더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게 된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옛 교단에 비해 감리교 사상은 매우 손쉽게 당시 미국 시대 분위기와 일치했다. 감리교는 단순한 성경을 주장했고, 이런 주장은 전통적인 교리 설교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특별히 사람에게는 회개하거나 복음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그들의 사상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매우 논리적이고 그럴 듯해 보이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감리교의 독특한 신앙을 대중화한 것은 바로 야외 전도 집회와 강단 초청이었다.

 

이제 복음 전도에 있어서 칼빈주의보다 알미니안주의가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켄터키 부흥이 일어난 후 좀더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반대하는 신학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복음 전도와 부흥에 적대적인 신학으로 낙인찍히는 것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이런 입장은 감리교가 드러나게 성장함으로써 더 확고해졌다. 대중적이며 공개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의 숫자가 반박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되었고, 당시 알미니안 신학을 따르지 않았던 많은 설교자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신앙을 버리고 알미니안의 관습을 따르게 되었다. 물론 이런 변화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옛 것과 새 것이 혼재했다.

 

한때 새뮤얼 데이비스의 학생이었던 데이비드 라이스는 1803년에 처음에는 칼빈주의로 시작하고 중간에는 율법폐기론으로 진행하다가 마지막에는 알미니안주의로 끝을 내는 설교를 비판한 적이 있다. 더 나아가 이 새 유형의 설교를 율법폐기론과 알미니안주의라는 잡종의 혼합물이라고 불렀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이것은 성화를 향해 그럴 듯하게 꾸며진 적당한 가식 그리고 믿음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을 부추기고 강조하는 혼합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령 하나님과 그분의 주된 사역에 대해 정말 세심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1809년에 잘 진술된 맥그리디의 견해에 따르면 그 당시 사람들이 수용하던 그릇되고 오류가 가득한 교훈으로 말미암아 참된 신앙이 계속해서 약화되고 있었다. 그는 이런 현상을 매우 한탄했다.

 

이 분리주의적인 설교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은 모든 교리 체계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따라서 이들은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리들을 전적으로 배격했다. 그들은 칼빈주의와 절대적 선택 교리에 강한 거부감과 적대감을 표시했지만, 자기 교사들이 가르친 교리들에도 전적으로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이 가운데 칼빈주의 신학과 완전하고 절대적인 예정 교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감리교주의는 대단한 성경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야외 집회와 강단 초청은 그릇된 신학에 기초해서 발생한 것들이며, 그 결과 그것들이 자신들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의 그릇된 신학과 행정 체계를 양산했던 것이다. 만일 야외 집회와 강단 초청이 부흥이 양산했던 것과 똑같은 숫자의 회심자들을 확보하고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이것과 부흥이 다른 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오래지 않아 기적같이 보이는 새로운 부흥의 기술이 남부의 여러 주에 사방팔방으로 퍼지게 되었다.’ 소위 부흥주의(Revivalism)가 탄생한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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