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자 누가복음 7:36-50 2009.6.28(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제가 어릴 때 형제들과 장난을 치다가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부모에게 야단을 맞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당연히 부모에게 야단맞을 줄 알고 불안해하는데 부모가 야단하지 않고 용서해줄 때 부모의 사랑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허물을 용서받을 때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느낍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허물을 용서받고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느낀다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서 사랑을 깊게 느끼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께 그 사랑을 나타내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1. 누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자인가?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 어느 날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함께 식사하기를 청합니다(36절). 이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40절)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던 터에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일은 용기있는 태도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안식일 규례와 같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세리나 창기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죄인으로 정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초대는 하였으나 냉랭한 자세로 손님을 맞이하였습니다(44-46절). 이로 보아 아마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한 이유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나 존경에서 나온 것은 아닌듯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선지자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39절)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기도하며 또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 몰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을 수도 있고 또 그에게 ‘큰 선지자’적인(17절) 능력이 있는가 알아보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군중들에게 추앙받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함으로 자신도 추앙받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죄 많은 여인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 그 동네의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계심을 알고 향유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로 옵니다(37절).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적선을 구하는 거지들은 초청을 받지 않고도 잔치에 들어가 음식 부스러기들을 얻어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여인도 그러한 비천한 무리들 틈에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죄인인 한 여자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그녀가 어떤 종류의 죄를 범하여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는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한 때 나쁜 길에 빠졌었고 그녀의 타락이 공공연히 알려지게 되어 그 이후로 그녀는 죄인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비록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었지만 이전부터 들어온 예수님의 소문에 희망을 갖고 그분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들었던 소문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하시며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죄인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반드시 죄를 용서해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매우 귀중한 향유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향유담은 옥합은 향유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둥근 그릇으로 손잡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릇 속에 든 기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목부분을 깨뜨려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옥합은 매우 값진 품목이었다고 하며 그 속에 든 향유도 값진 것이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급 향류나 값비싼 화장수는 보통 로마의 부유한 여인들이 주로 사용했으며 구하기도 어렵고 매우 귀했기 때문에 매우 가치있는 재산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향유는 그 여인이 특별한 목적으로 구입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귀한 옥합을 예수님을 위하여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사랑을 나타낸 여인 여인은 예수님 발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38절). 그녀는 예수님의 발 곁에 서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는 그녀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자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고 아울러 예수님의 인격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자신으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예수님께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머리를 풀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머리를 풀어 발을 닦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머리를 풀어 내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수치를 무릅쓰고 감격과 경의를 표했던 것입니다. 여인의 왕관이라고 할 머리털로써 예수님의 먼지 묻은 발을 닦는 모습에서 그녀의 철저한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서 발 씻을 물조차 제대로 준비해 주지 않은 바리새인의 뻔뻔함과 대조됩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춘 것은 가장 헌신적인 복종과 존경을 표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존경의 표시로 향유를 부을 때는 머리에 붓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 여인은 이례적으로 발에 부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접근하는 것조차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바로 눈물의 회개와 벅찬 감격의 봉헌(奉獻)이었습니다. 엎드려 발에 입을 맞추고는 눈물을 흘려 머리털로 발을 씻는 행위의 헌신과 향유를 붓는 재물의 헌신은 성도가 지녀야 할 신앙 자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판단하는 바리새인 그때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은 이것을 보고 마음에 말합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39절) 시몬은 여인의 향유를 붓는 행동을 보고서 한편으로는 몹시 기분이 상했고 또 한편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흘렸던 것 같습니다. 그가 못마땅한 투로 혼자 중얼거린 것은 죄인인 한 여인이 식탁으로 접근한 사실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은근히 기뻐한 것은 예수님께 대한 그의 의혹을 정당화할 만한 단서를 찾아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당연히 발 앞에 무릎 꿇은 여인이 죄인임을 알았을 것이고 또한 그녀를 물리쳤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죄인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몸에 손대는 것을 허용하신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눈에 똑같이 천박한 사람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그 바리새인은 과연 예수님이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선지자인가 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시라는 점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지하였던 것입니다(5:32). 예수님의 비유와 질문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40절) 바리새인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심중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생각을 알고 계셨습니다. 바리새인은 마음속에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도 아니며 그 여인이 어떠한 여인인지도 모르는 형편없은 사람이라 생각하였으나, 예수님은 이미 그 여인의 영적 상태를 간파하여 그녀에게 구원을 베푸시고(50절),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조차 알아차리시고 그에게 논박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신적 전지성(全知性)은 그의 메시야되심에 대한 증거의 일례가 됩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의 이름이 '시몬'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교만하고 사악함을 실책하시는 투로 말씀하시지만 그를 적대시하거나 미워하기보다는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잘못됨을 바로 잡아주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빚 주는 자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41-42절) 예수님께서는 종종 하나님께 빚진 자들에 관해서 언급하셨습니다(17:10;마 6:12;18:23-35).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빚의 예화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 인간의 빚은 너무 많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한다할지라도 그 빚을 갚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탕감은 하나님께서 우리게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은화로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오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명이 오백 일을 벌어야 하는 돈이었습니다. ‘탕감하여’는 말은 '무효로 주다', '취소하다'는 뜻의 '카리조마이'의 부정 과거형입니다. 이는 탕감의 행위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행해졌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은 ‘은혜’를 나타내는 '카리스'입니다. 따라서 본 비유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값없이 주어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믿음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떠한 노력과 선행으로써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역시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의 선행은 거저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이른바 성령의 열매이지(엡 2:8,9) 구원의 조건인 것은 아닙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합니다.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43절) 예수님의 질문은 평범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답할 수 있는 상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매우 주의깊게 대답했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었던 터라 자신이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며 더구나 목전에 일어난 상황으로 말미암은 불쾌감과 흉한 속마음을 표출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몬의 대답에 대하여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악한 마음을 정면으로 꾸짖지 않으시고 그의 판단을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시몬으로 하여금 자신이 범한 무지를 스스로 깨닫고 부끄러운 상황을 직시하게끔 하시기 위함입니다. 2. 예수님을 더 사랑한 여인 예수님을 더 사랑한 여인 예수님은 시몬이 대답은 올바르게 하였으나 그가 행한 일은 잘못되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책망하고자 여자를 돌아보시며 세 가지를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4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손님이 방문하면 주인은 먼저 그를 상석에 앉게 하고 손님의 손과 발을 씻기 위해 물을 준비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창 18:4;19:2;24:32;삿 19:21 참조).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해 놓고 그러한 통례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으로부터 아무런 대접도 받지 못하셨으나 여인으로부터는 전폭적인 헌신의 예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45절) 입맞춤은 자연스러운 영접 인사였습니다(창 29:13;45:15;삼하 1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예수님께 대해 이런 예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주인으로부터 당연히 받게되어 있던 환영의 입맞춤도 받지 못한 반면 여인으로부터 발에 입맞춤을 받으셨습니다. '그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이 여인이 과거의 어두운 세월을 예수님께 무언으로 토로하는 중에 복받치는 감격과 희열을 경험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6절)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존경하는 손님에게만 특별히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태양 밑에서 걸어다닌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당연한 예의였습니다. '감람유'는 다량 생산되고 값도 싸기 때문에 누구나 손님에게는 머리에 이 기름을 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이 일조차도 행치 않았습니다. 반면에 그 여인은 가장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절) 여기서 '많은 죄'란 말은 그녀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해도 모두 사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사하여졌다'는 말은 완료형 동사로 모든 죄를 사함받아 지금은 온전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여인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행위는 이미 그녀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결과에 따른 행동임으로 예수님은 그녀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카톨릭 학자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여인이 행한 사랑의 행위 때문에 용서를 얻게 된 것이 아니고, 은혜로 죄 사함을 받은 것을 감사하여 그녀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그녀의 사랑이 용서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용서의 원인이 아니라 사랑을 보여줌으로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입증'할 뿐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행위나 공로로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죄사함은 오직 은혜로 내려진 것입니다(엡 2:8,9). 여인의 죄를 사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이제 여인에게 죄가 사하여졌음을 선포합니다.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48절)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직접 말씀하시면서 처음에 말씀(47절)하셨던 것처럼 ‘저의 많은 죄’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 죄'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시몬이나 그녀가 모두 죄를 용서받아야 할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으며 또한 그 여인이 사함받은 죄란 어떤 특별한 범죄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와 근원적인 죄까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죄사함에 대한 공적인 선언을 하신 이유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죄사함의 확신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었음과 아울러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서 가진 선입견을 바꾸어 놓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녀를 소문난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그곳에 함께 앉아있던 자들은 속으로 “이가 누구기에 죄도 사하는가” 말합니다(49절). 앞서 중풍병자를 고칠 때에도 이와 같은 반발이 있었습니다(5:21). 그때 바리새인들은 죄 사하는 권세로 사함을 선언하신 예수님을 신성 모독자로 정죄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이들은 눈물로 회개하며 죄사함을 얻은 여인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사하는 것을 보면서 '참람'하다는 생각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판단과는 상관없이 여자에게 이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50절) 이는 47절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에 쐐기를 박는 구절로서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원하였다'는 완료형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구원받은 상태로 남은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여인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이미 구원에 이른 상태였던 것을 보여 줍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확보된 구원을 공공연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8:48).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작별의 인사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작별인사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대의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통적인 표현이나(삿 18:6;삼상 1:17;삼하 15:9;왕상 22:17) 이 구절에서는 더욱 깊은 뜻을 나타냅니다. 왜냐 하면 지금은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확증받은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멸시받던 죄인인 그녀에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되었으니 평안한 마음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이 허물어짐으로써 누리게 되는 영속적인 평안을 의미합니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사 9:6)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 다 이러한 영속적이고도 참된 하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행 2:28; 엡 6:23;몬 1:20 ; 히 9:22).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향유를 그 발에 부으며 입 맞추는 사건을 통하여 여인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인의 행동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신앙의 행동을 몇 가지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을 듣고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복음을 듣고 배워야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둘째는 예수님께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회복은 우리의 죄를 회개할 때입니다. 예수님 발에 눈물을 흘린 여인처럼 눈물로 우리의 죄를 회개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셋째는 전폭적으로 헌신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귀한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여인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리며 헌신하는 것이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타나내는 것입니다. 넷째는 철저하게 순종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발에 입맞춘 여인처럼 끊임없이 겸손하게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최선의 봉사를 해야 합니다.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여인처럼 우리의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으로 예수님께 드리며 봉사하는 것이 예수님께 향한 우리의 사랑의 극치일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행동이 있을 때 우리는 늘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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