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정체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이런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복 많이 받고, 또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부러움을 받으며 어디를 가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기대를 전
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기대를 가지게끔 하시는 말씀도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8장 2절 이하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 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것이니라." 그저 읽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그런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사도행전 2장 47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처음으로 교회가 탄생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변화되고, 성령을 받아 은혜가 충만해지자 모든 성도들이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로 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예수를 잘 믿고 잘 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서 존경도 받고 사랑도 받고 어디를 가나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기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이러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말씀들을 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만찬 석상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고별설교는 어떻게 보면 매우 소름끼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 16절부터 17장으로 넘어 가기까지 '미워한다'는 말이 일곱 번이나 반복되는 것을 보면 이 말씀이 단순히 예수님께서 한 마디 하고 지나가시는 그런 것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그 표현을 보면, '미워한다'는 말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그 강도가 높아지는 것을 봅니다. '출회한다'는 말씀도 나오고, 조금 더 뒤로 가면 '환난을 당한다'는 말씀도 나오고, '죽인다'는 말씀도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에서 칭찬 받고 대접받을 줄 알았는데, 세상은 도리어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영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세상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돌아가는 사회가 곧 세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 곧 사람과 조직, 계획, 활동, 철학, 문화, 가치관 등을 총망라한 영적실체가 바로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은 하나님 없이 돌아가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를 간단하게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그것입니다. 자랑이라는 것은 세상 것을 가지고 떠벌리며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이 사회의 모든 구성 요소는 바로 이 세 가지 지배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세상이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신문을 통해서 보셨을 줄 압니다만 어느 대학의 교수가 인터넷을 통해서 지난 2천 년 서구 문명에서 인류 발전에 가장 크게 공헌한 발명품이 뭐냐를 공모한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컴퓨터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가 들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저의 눈길을 끈 것은 세속주의의 등장이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인류 역사에 공헌한 가장 큰 발명품으로 세속주의를 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세속주의야말로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자유케 한 사상이니 이것만큼 큰 공헌을 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밀어내고, 하나님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왜 우리를 미워하는가?
이 세상의 배후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사탄의 계획대로 움직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은 예수 믿는 우리를 미워합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까요? 주님께서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세상은 결국 우리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로 알라."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고자 이 땅에 와 계실때 세상은 예수님을 지독하게 미워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부터 17장까지의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분위기가 살벌하기 그지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 3장 넘어갈 때부터 벌써 예수님을 놓고 죽인다는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이는 사람들이 자주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10번 이상 그런 내용들이 나옵니다. 세상은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신 아주 초기부터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면 왜 세상이 예수님을 그토록 미워했을까요? 요한복음 7장 7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 함이라." 예수님이 이 세상의 모든 행사를 보고 악하다고 책망하셨기 때문에 세상이 그토록 예수님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볼 때도 역겹고 속에서 욕이 나오는 판인데 아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세상을 볼 때 어떻게 화가 안 나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행사를 악하다고 책망하셨는데, 이 세상은 이와 같은 책망을 듣기 싫어해서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과 공동 운명을 나누고 있는 제자들 역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예수님은 우리의 스승이십니다. 스승이 핍박을 당하는데 제자들이 무사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를 미워하는 세상인데 어떻게 그의 제자 된 우리를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발견할수 있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끌려갔을 때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며, 신분이 어떠하고, 무슨 일을 하는 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순교를 당하게 된 죄목은 단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열 한 명 전부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다가, 예수님 때문에 끌려가서, 예수님 때문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지난 2천여 년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고, 미움을 받고, 순교를 한 덕분에 오늘 이 작은 한반도에까지 복음의 씨앗이 날라 와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은 기가 막힌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의 선조들 역시 세상의 미움과 핍박에서 자유하지못했습니다. 구한말 시대에 예수를 믿다가 희생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일제 시대에 예수를 믿다가 끌려가서 소리 없이 사라진 사람도 많았습니다. 6.25때 예수 믿는다는 한 가지 죄목 때문에 공산당에게 끌려 들어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들판에서 썩어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움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미움을받으니까 그의 제자 된 우리도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97년 10월 호에 아주 충격적인 글이 실린 일이 있습니다. 20세기 들어 2억 내지 2억5천만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끔찍한 핍박과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노예 취급을 당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투옥을 당하고, 가족과 격리되어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또 어떤 여성들은 강간을 당합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한 20세기에도 예수 이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2억 내지 2억 5천만 명이나 된다는 말입니다. 특히 북한과 구 소련 체제, 동구권, 수단이나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과 같은 회교권 등지에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끌려 들어가서 고통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신문을 통해 이미 보셨을 줄 압니다만 얼마 전에 인도에서 선교하던 호주 선교사 한 분이 자기 아들하고 차안에 갇혀서 폭군들에 의해 타 죽었지 않습니까? 그만큼 예수님을 미워하는 세상은 그의 제자들 역시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까? 교회를 다니는 우리 모두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둘째는,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제 새끼는 사랑하고 남의 새끼는 미워합니다. 이것은 인간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경향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역시 동물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우리는 세상의 것으로 세상에 속해 있었습니다. 사탄의 소유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죄와 사망에서 자유 함을 얻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자녀,곧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이제 세상이 볼 때 우리는 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미워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흑백논리를 잘 적용합니다. 생명과 죽음,빛과 어둠, 교회와 세상,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이런 식으로 흑백 논리를 잘 전개를 하는데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면 세상은 사탄에게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국에 소속된 자들이라면 하나님의 자녀 아닌 자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을 마치 흑백으로 비교하듯이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둘 사이는 실질적으로 어떤 타협이나 동화가 불가능합니다. 양자택일만 있지 어떤 중간 지점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가 없는 자들이 되어있습니다. 세상은 흔히 자기하고 같이 놀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자기하고 다르게 별나게 놀면 미워합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요즈음 '왕따'라는 말이 많이 유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왕따'가 무엇입니까? 자기편에 들지 아니하면 미워하고, 외톨이로 만드는 것이 왕따입니다. 일본의 이지메가 바로 그런 것인데, 이 세상은 원래부터가 그런 기질이 있습니다.
처음에 우산을 만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나가고, 뙤약볕이 비쳐도 부인들은 우산을 즐겨 씁니다. 그러다가 혹시 보기 싫은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슬그머니 얼굴을 가리기도 하면서 너무나 유용한 일상용품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산을 처음 발명할 때만해도 상황은 무척 달랐습니다. 우산을 처음으로 발명한 존스 핸웨이(Jones Hanway)는 어떻게 우산을 사람들에게 보급할 까를 놓고 고민하다가 비가 오는 날 동네에서 자기가 만든 우산을 쓰고 일종의 쇼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비오는 날 드디어 그 우산을 쓰고 동네 가운데 있는 길을 걸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모습을 참고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돌멩이질을 하는가 하면 쓰레기를 집어던지며 놀려댔다는 것입니다. 자기와 조금 다르면 다들 미워하는가 봅니다.
이제 연휴가 되어 많은 분들이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명절 때만 되면 제사 문제 때문에 홍역을 치르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우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살았을 때 효도할 일이지 죽은 시체를 놓고 무슨 장난들이냐?'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살았을때 불효하던 사람이 제사는 더 극성맞은 것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그렇게 모순된 짓들을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대단한 그 무엇이나 되는 것 처럼 생각합니다. 또 우리는 죽은 혼이 와서 차례 음식을 먹는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제사의 배후에 있는 조상신에 대한 종교적인 신앙을 부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는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제사를 안 지낸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얼마나 핍박합니까? 아내를 핍박하고, 아들을 핍박하고, 형제를 핍박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들하고 한 통속이 되지 아니하는 데서 오는 증오감이지요.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비록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한이 있어도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우리의 신분을 내팽개칠 수도 없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을 보십시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또 로마서 12장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왜 하나님
께서 이런 말씀들을 우리에게 주십니까?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절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소속이 달라서, 혹은 세상과 동일하지 않아서 우리가 미움을 받는 것은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무지하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세상은 하나님이 누구 시며, 예수님이 누구 신지 잘 모릅니다. 하물며 그들이 구원받은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알 턱이 없습니다. 모르니까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상의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이고, 근본적인 이질감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다지 실감이 나지를 않습니다. 아예 우리 조상들처럼 핍박을 당하는 시대에 살았다면 실감이 나겠지만 지난 50년 동안 우리는 팔자 좋게도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여건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멱살 잡고 뺨을 때린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신분 때문에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한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교회를 세워도 국가의 제재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지금까지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이런 우리에게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말씀이 다소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서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우리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경험을 당한 일이 있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저도 없고, 여러분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가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현실하고는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가서 예수 안 믿는 옆집 사람이 문을 열고 나올 때마다 쳐다보면서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구나.'하고 생각하면 나중에 우리는 완전히 정신병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 미워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우리를 미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우리가 무슨 미움을 받고 있지도 않은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실 까?'하는 점에 대해 좀더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미움이라는 것은 영적이고도 본질적인 것입니다.
'영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현상이기 때문이고, '본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옛사람과 중생 받은 새사람 사이에서 빚어지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여기서의 미움이란 바로 존재 적인 문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비슷한 예를 하나 들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흑백간의 갈등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이것은 영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혈통과 역사에 뿌리를 둔 본질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우리게 참고가 될 수는 있습니다. 미국에는 백인과 흑인이 함께 섞여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공부할 때도 제 숙소는 흑인 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학교는 백인 촌에 있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흑인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백인 세계에서 살지만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흑인들 세계에서 같이 삽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흑인과 백인의 밑바닥 감정이 어떤 것인가를 여러 가지 면에서 체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백인이나 흑인은 미국에서 서로 섞여 삽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사랑하고 교제합니다. 회사에서도 같이 일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나라를 위해 필요하면 함께 전투에 나가서 싸웁니다. 흑인 같은 경우 특히 스포츠 같은 영역에서 백인들이 따라갈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국가를 위해 굉장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서로가 함께 협력하여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돌아가면 흑인은 흑인끼리, 백인은 백인끼리입니다. 서로가 잘 섞이지를 않습니다. 억지로 섞지 않는 이상은 전부 흑은 흑이고, 백은 백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흑인은 백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 백인 역시 흑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노골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조금 사소한 일이든, 아니면 큰 일이든 간에 충동을 받으면 이 징후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엊그제 신문을 통해 여러분은 뉴욕시의 백인 경찰관 4명이 무장도 하지않고 있는 22살의 흑인 디알로에게 41발의 총을 난사한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갑자기 발작을 하는 것이지요. 맨해튼 거리에서 양말이나 장갑을 팔고 있는 그 젊은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이 난사를 했다는 말입니다. 한번씩 감정이 폭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그들의 정서 밑바닥에는 도무지 합할 수 없는 어떤 이질감이 상존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 세상과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교회, 곧 예수 믿는 사람들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서로가 조화를 이루려고 해도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 이질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소유 된 우리와 사단의 소유 된 세상 사이에 흐르는 이와 같은 정서는 영적인 성격의 것이라서 다소 독특한 데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감정에 깊은 영향을 미치지만 평소 때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든지 안 믿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함께 우정을 나눌 수 있고, 사랑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메울 수 없는 골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통하지 않는 어떤 이질감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표가 안나도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우리가 이처럼 바탕이 통할 수가 없는 별개의 운명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서 예수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미움을 당한다든지 소외를 당한다든지 하는 어려움을 당하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속한 자요, 예수의 제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는 우리 교회 여 집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학적인 면에서 자기 영역을 탁월하게 개척하고 있는 교수입니다. 그리고 그 남편도 물리학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교수입니다. 남편과 아내 둘 다 교수이니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입니까? 이 부인은 10여 년 전에 예수를 믿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세상에 속해 있던 자기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놀라운, 황홀한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 뒤부터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 바쁜 교수 생활에서도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받았고 지금은 순장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남편과, 그가 모시고 사는 시어머니는 아침마다 일어나서 불경을 읽고, 참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때는 새벽 일찍 일어나서 물을 떠놓고 절을 합니다.
이런 부부가 한 지붕 밑에서 산다고 상상을 해 보십시오. 겉으로는 부부입니다. 서로 사랑합니다. 서로 존경합니다. 서로 위해줍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역, 곧 영적인 세계에서는 도무지 부부가 하나로 합할 수 없는 평행선을 긋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긴장이 심하겠습니까? 그래서 한번은 그 집사님이 저를 보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서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영적인 전투가 벌어지 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 집사님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러분 가운데 직장에서 거짓말하라는데도 안하고, 서류를 위조하라는데 도 동의하지 않고, 회사를 위해 뒷거래를 하라는데도 말을 듣지 않아서 미움을 받는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미움을 받는 것은 여러분이 의의 자녀 요, 예수의 제자라는 증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그러면 세상이 이렇게 예수를 미워하듯이 우리를 미워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16장 33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아멘. 너무 좋은 말씀이지요!
우리가 세상에서 살려고 하면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우리가 환난을 당한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두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빛의 자녀인데 어떻게 세상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평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바로 살려고 하면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긍정하고 들어가야 됩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마음에 평안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은 이 평안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지금까지 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기 위해서 미리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미리 알고 있으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모르는 일을 당할 때 우리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이지 앉아서 다 꿰뚫어 보는 일을 당할 때 왜 불안해합니까? 우리는 덤덤하게 또 어떤 면에서는 차분하게 모든 것을 다룰 수 있습니다.
병이 들어도 그렇지 않습니까? 병원에 가서 무슨 병인지를 알고 '이것은 죽을병이 아니다.'하는 확신만 얻으면 몸이 아파도 마음은 평안하지 않습니까? 무슨 병인지 모를 때는 불안하지만 알고 나면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은 성경말씀 안에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을 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는 것도 수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세계의 종말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상세히 말씀하셨습니다. 자연이 파괴됨으로 인해서 그 다음에 오는 2천년 동안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지도 세세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마지막이 가까워올수록 세상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 가도 누누이 강조하며 설명해 주셨습니다. 세상이 악해질수록 하나님의 자녀와 교회를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라는 것도 미리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평안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이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조용히 묵상하십시오. 아침에 신문 몇 장 보는 그 시간에 차라리 성경을 보십시오. 신문은 우리가 신뢰할 만한 진리를 하나도 전해 주지 못합니다. 문제에 대한 진실한 해답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앞에 다가올 모든 문제에 대해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담담하게, 평안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 나중에 파괴되어서 엄청난 재난이 우리 앞에 올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벌써부터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일이 일어나서 한반도의 반을 집어 삼키는 최악의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인간적으로는 두려워하겠지만 영적으로는 '아,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이 돌아가는구나.' 하는 것을 알면 우리는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대범하게 그런 상황을 맞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평안을 가지고 세상을 사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악한 세상이 무슨 짓을 할 지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이미 내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 이 평안을 잃으면 안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담대하라는 말은 용기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기분을 좋게 해라. 얼굴을 펴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담대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 예수님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사탄이 보기에 주님은 패배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흘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자마자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을 짓누르고 승리하셨습니다. 그 시간부터 마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얼마 남지 않은 자기의 때를 최대한 활용해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기의 신분을 바꾸어 보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승리는 영원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었노라'는 헬라어로 '네니케카'(nenikeka)인데, 이것은 한번 이기고 끝나는 승리가 아니라 영속적으로 이기는 완료형의 승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하여 우리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마다, 그 주님을 의지할 때마다 마음에 담대함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핍박을 당하는 분이 계십니까?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직장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분이 계십니까?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악과 대결하다가 많은 손해를 보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우리가 이
깁니다. 결국 우리가 승리합니다.
승리하신 예수님은 교회에 능력을 주셨습니다. 복음으로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계12:11).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들고 나가면 결국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로 바뀔 줄을 믿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속해서 사탄의 지배 아래 끌려 다니면서 자기 정욕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할지라도 우리가 복음 들고 나가서 전하면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영광스러운 날이 올 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담대하십시오. 요한일서 5장 4절을 보십시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의 믿음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기게 만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면 결국은 우리가 승자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비록 별다른 핍박이 없는 평안한 때라도 마음을 평안하게 가지고 이 세상을 사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영적으로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마음에 평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고 담대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승리하신 주님의 제자입니다.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큰일까지 우리는 이와 같은 평안과 담대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면에서는 퍽 감동을 주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집안에 대학원을 졸업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작년에 IMF로 인해서 직장을 구하기가 어렵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한 때 모 기업에 입사 시험을 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겠습니까? 이제 면접 시험을 치르는데, 한 다섯 여섯 명이 한 그룹이 되어 들어갔나 봅니다. 들어가 보니 시험관이 여러 명 앉아 있었습니다. 그 시험관들이 돌아가며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해야 했습니다. 그가 입사 지원 서류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썼을 것은 뻔합니다. 그는 믿음이 참 좋은 젊은이였습니다.
어느 시험관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학생, 교회를 다니는 모양인데, 만약에 회사가 일이 많아 가지고 주일날 교회를 나가지 말고 회사에 출근하라고 하면 학생은 어떻게 할 작정인가?" 이 질문을 받자마자 그는 당돌하게 이렇
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교회로 가야지요." 그러니까 그 말을 들은 시험관들이 전부 고개를 들고 자기를 쳐다보더랍니다. 아무래도 말을 너무 심하게 했나 싶어 그는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오전에는 교회에 가고, 오후에는 회사에 나오겠습니다." 그때 그는 속으로 '야, 이거 삼천포로 갔구나. 떨어진 게 틀림없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대답을 그렇게 했으니 이제 틀렸어요. 할 수 없잖아요. 교회 와야지 어떻게 회사를 갑니까?" 그랬는데 놀랍게도 그가 몇 명 안 뽑는 그 시험에서 뽑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젊은이의 행동을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담대합니까? 얼마나 태연합니까? 웬만한 사람 같으면 '회사는 일단 붙고 봐야 되지않겠나?' 하는 생각에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예, 아무리 교회가 중요해도 회사가 나오라면 회사에 와서 일 해야지요."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저는 그 시험관들도 꽤 되어 먹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똑똑한 인재를 찾아내는 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고 태연한 자세를 가지고 세상을 상대하면 세상은 우리를 오히려 존경합니다. 그러나 비굴하게 굴면 세상은 우리를 멸시합니다. 맛잃은 소금처럼 발 밑에 놓고 밟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담대합시다.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삽시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결국은 승리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꿀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잠시 미움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승리만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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