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능력
(고전 15:12-19)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석가모니는 45년 동안 설법을 하다가, 80세가 되었을 때에 ‘쿠시나가라’에서 음식을 잘못 먹고 식중독을 일으켜 기진하였습니다. “나는 피로하구나. 이 두 사라수나무 사이에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게 자리를 깔도록 하라.”고 말하자, 제자들은 석가의 운명이 가까웠음을 알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자 ‘아난다’가 "이제 스승께서 저희들 곁을 떠나시면 저희들은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석가는 “아난다야. 그 어느 누구도 의지하지 마라.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나에게도 의지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 하고 나무 밑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때가 기원전 543년 2월 15일이며 석가 80세 때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석가모니를 다비(화장)하고 나니 송곳니 4개가 남았다고 합니다. 오른쪽 송곳니는 범천(힌두교의 신)들이 가지고 올라갔고, 위 왼쪽 송곳니는 스리랑카의 왕이 가지고 갔습니다. 이들은 이것을 왕궁의 ‘담마차카’라는 곳에 안치하고, 매년 8월이면 이 ‘불치’를 주제로 스리랑카 최대의 축제 ‘페라헤라(Perahera·佛齒祭)’가 열립니다. 불치를 가져 나와 거리 축제를 벌이는 것이지요. 지금도 100여 마리의 코끼리가 축제에 참여하고, 각종 민속공연도 함께 펼쳐집니다. 이것을 위해서 불치 보호 장관도 임영 되어있습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서 몇 개의 모조품을 만들어 외국의 침입과 약탈 속에서도 진품만은 지켜올 수 있었다고 지금도 자랑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불자들이 부처의 송곳니를 모셔둔 그 스리랑카 성지에 불공을 드리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고 합니다. 이 스리랑카는 불교를 숭상하는 ‘싱할라족’의 왕조가 2,000년 이상 이어왔습니다.
부처님은 송곳이 4개를 남겼습니다. 공자님은 후손들과 무덤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선각자요. 위인들이나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없는 신성(神性)이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증거는 바로 지금도 비어 있는 무덤입니다. 공자는 제자의 질문에 살아서 일도 다 모르는데 죽음 이후를 어떻게 알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석가는 생로병사(生老病死)에 고통 하는 중생을 구출하려고 출가했으나 그 역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수 있는 증거는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하고 분명한 증거는 부활입니다. 완전히 죽으시고, 6시간 십자가에 달려서 물과 피를 다 솥 드시고, 운명하신 가운데 삼일 만에 살아 나셨습니다. 주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남기시지 않으시고 살아 나셨습니다. 그를 믿는 우리도 그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1. 부활과 죽음
우리나라에서 세상을 떠나고 부고를 쓸 때 서거, 타계, 별세, 영면, 작고, 같은 말을 씁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망'이나 '죽음이라고 합니다. '서거'라는 말은 높임말로 대통령 같은 정치 지도자나, 종교 지도자 같은 사람에게 사용됩니다. '별세'는 '세상을 하직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에게 많이 쓰고, '타계'는 귀인의 죽음으로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는 인물에 쓰이는 점에서 별세와 차이가 있습니다. '영면'은 영원이 잠들다 는 뜻으로 주로 유명한 사람의 죽음을 뜻하고 '작고'는 고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선종', 개신교에서는 '소천'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입적'이라고 표현합니다. 관용구로는 '숨지다' '돌아가시다' '하늘나라로 가다' '밥 숟가락 놓다' 또 ‘땅보탬’이라는 말도 있는데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힌다,'는 뜻인데 순 우리말로 사전에도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전도서에 있습니다.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12:6-7절).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해도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자아(自我)의 분리를 가져오고, 가족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과, 자신이 쌓아 놓은 부(富)나, 지식을 한 순간 무효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원호목사-금요철야.-2일 후 사고사. 온 누리-김장환목사-초기암-위 전체)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를 뿐입니다. 그래서 킬케골 같은 철학자는 인간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와 같다, 고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장례식에서 영결식(永訣式)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사람과 영영히 이별을 하고 끝이 난다, 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죽음과 함께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시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까, 영결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만난다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나듯이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나중 가고 먼저 가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나라에서 모두 만난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 한 병사가 크게 다처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수술을 하기 전에 나는 수많은 수술을 하였지만 이것은 정말 어렵다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병사가 눈치를 챘습니다. 그리고 의사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걱정 말고 수술하세요, 수술이 잘되면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수술이 잘못되면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No problem! 걱정 없다, 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도 저렇게 되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재상인 비스마르크는 19년 동안 재상으로 있었는데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옷을 입을 만한 가치도 없는 인생이다’ 영생을 모르고 그것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마을에 꽃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가난하셨습니다. 그래서 입고 계신 옷도 늘 허름했습니다. 또 고생을 많이 하셨는지 손마디도 굵고 거칠었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늘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할머니를 보고서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하루는 행복한 할머니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무슨 좋은 일이 그렇게 많으시기에 늘 싱글벙글하십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 이 나이에 어찌 늘 좋은 일만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내게는 한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나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늘 마음속으로 이렇게 속삭인답니다. '사흘만 기다리자! 믿음으로 삼일만 참고 견디자!' 그러면 내 마음이 평안해 진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긴 것 같아도 삼일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잠간이면 다 지나 갑니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이 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열 두 번이나, 직접 나타나셨음을 기록했습니다. 세 번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돌에 맞아 순교하는 스데반에게, 그리고 '밧모' 섬에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아홉 번은 복음서에 기록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시몬 베드로'에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제자들이 모여 있는 다락방에,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갈릴리' 바다에 제자들에게, 산 위에서 열 한 명의 제자들에게, 형제 '야고보'에게, 그리고 최후 승천하실 때 부활의 주는 나타나셨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위에 말한 문서상의 증언 뿐 아니라, 그보다 더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실망과 낙담 속에서 두려워하던 그들이 생명과 기쁨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한 이유는 단하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이 한 가지 사실이 그 제자들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의 체험이나, 증언만으로 알려진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날 지상에 수많은 교회가 부활을 믿고 전한 초대교회의 교회 탄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그 이름으로 서 있는 이교회는 오래 전에 이 땅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을 것입니다.
과거 2천년 동안 교회는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맹렬한 공격과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에 이르게 한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음이라."(행 2:24)고 했으며, '베드로'는 예수를 "생명의 주"(행 3:15)라고 외쳤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에게는,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 살아서 역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부활의 증언은 제자들의 선교의 주제였고, 저들을 받쳐주는 반석이요. 지주였습니다.
2. 부활과 삶
1939년부터 1945년 6년 동안 전사자는 약 2,500만 명, 민간인 약 3천만 명이 사망한 전쟁으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을 중심으로 벌어진 세계의 전쟁으로, 역사에서 가장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았습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 시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사실상 끝이 났습니다. 이것이 세계 제2차 대전입니다.
이 전쟁 때 군목으로 나갔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던 맥도날드 목사는 적군에 잡혀서 포로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가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포로 중 한사람이 라디오를 조립해서 수용소 안에서 몰래 영국 B. B. C 방송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에 그 사람이 맥도날드 목사를 깨워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하늘에 수송기2,316대에 공수부대를 독일군 배후에 투하시켜 거점을 확보하고, 그 엄호 아래 항공기 총 1만 3000대와 함선 6000척을 동원하여 7개 사단이 상륙하는 여, 병사 100만 명, 물자 약 57만 톤, 차량 17만대가 상륙한 작전인데 아이젠하워가 지휘한 사상최대의 작전이었습니다. 1년 후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납니다.)이 기쁜 소식은 삽시간에 전 수용소 포로들에게 전해졌고 포로들은 너무 기뻐서 마당으로 나가 얼싸안고 춤을 추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던 독일군들은 포로들의 이상한 행동에 긴장되어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이후에 수용소 안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을 시켜도, 조금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고 얼굴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곧 풀려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주님에게 일어났고, 우리의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이 부활을 믿는 사람의 오늘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삼일 후에 결혼 하는 한 사람이 있고, 감옥에 가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가슴이 설래 이지만, 한 사람은 가슴이 답답하고, 밥맛이 없을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아직 오지 않았고, 부활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오늘 그것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생활이 같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활신앙은 지금 현실에 대한 만족과 행복일 뿐 아니라, 장차 다가올 영광에 대한 신앙이며, 상속자로서 고난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비록 신앙인들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언제나 얼굴과 눈은 하늘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땅에 서서 어디를 바라보는가가 중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점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날은 곧 우리 주 예수님의 다시 오시는 재림 날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미래의 어느 한 때가 되면 순식간에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며, 살아있는 자들이 홀연히 변화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며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15:51-52)고 했고, 베드로 역시 그의 두 번 째 서신에서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10).고 했습니다. 우리의 실존과 미래는 이 부활 신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기대와 희망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 여러분들의 미래는 어떤 것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복음서나 바울 서신의 증언은 예수가 부활하셔서 지금도 활동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자들의 기억 속의 생각이 아니라, 현실 속에 실재적인 체험을 한 증언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선교의 지상명령을 내리시고(막16:15 마28:19-20) 지금도 이 예수님의 선교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선교를 교회가 인계 받거나, 혹은 교회 지도자에게 전수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선교의 주체는 그리스도이며, 오늘의 세계교회를 영도하시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여 생명을 약속하고, 사명을 감당케 하며, 영원한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3. 부활의 주님
예수님과 만난 사람은 많습니다. 빌라도도 예수님 만났습니다. 헤롯왕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제사장 가야바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아예 3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입니다. 빌라도나 헤롯과 똑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그렇게 달라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육신으로 계실 때 만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 하신 후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의 명단이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15:5-8절)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상에 40일 동안 계셨습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무조건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주로 12사도들과 같이 계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도들은 다 순교를 합니다. 예수님은 삼년 반 동안 갈렐리에서 여리고로 예루살렘으로, 고침을 받고, 가르침을 받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고, 따랐지만 그들이 주님과 함께 겟세마네로, 빌라도의 재판자리로 골고다의 십자가로 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사도들은 그 주님을 증거 하다가 다 순교를 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은 달라집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요 11:25-26절)
여러분 만남이 무조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만남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안 만났다면 좋았을 그런 만남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분이지만 어떤 예수님으로 만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을 고처 주시는 예수님을 찾고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교훈을 주는 선생 예수를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로 만들어 주는 능력의 주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실제로 주님 만나고 돈을 벌고 성공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본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 생명의 주님, 영원하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마16:16)
교육에서는 인물이 되려면 인물을 만나야 한다. 이게 통계적으로 나온 원리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만남은 혈연, 지연, 학연을 위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만남이나, 우연한 만남은 자기가 스스로 만들 수 없습니다. 조정할 수 어려운 것입니다. 어느 집에 태어나서 혈연관계가 되고, 어느 지역에 살다 보니 지연이 되어 사람들을 만나게 되며, 학연도 그 학교에 들어가니까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본질적 문제는 그런 인간적인 만남으로 해결이 결코 안 됩니다. 절대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생명의 만남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여러분 좋은 교훈과 가르침은 다른 곳에도 많이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은 병원이 교회보다 더 많이 고칩니다. 여러분 열심히 살면 부자 됩니다.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요, 구원이요, 죄 용서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 하나님의 아들 예수,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대학의 입학식 때 총장님이 신입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대학에 들어 온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간절한 부탁 세 가지를 하고 싶습니다. 첫째 4년 동안 100권의 책을 읽으십시오. 둘째 10명의 진정한 친구를 사귀십시오, 그리고 셋째 한명의 스승을 만나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수십 명의 교수들이 있고 매일 마다 그들의 강의를 듣고 학문을 접하는데 어째 한명의 스승입니까. 그렇습니다. 만난다고, 배운다고 다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한명의 스승을 만나기는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만난 것입니다. 메시아요 나의 구세주로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나오는 것은 이분을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설교 듣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도 그분을 만나기 위한 방법이요 수단입니다. 찬양 중에, 설교 중에, 기도 중에 예수님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자기만족을 위한 감정의 표현밖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적인 것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징검다리요. 주님께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에 대답이 있습니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인해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가말리엘이라는 대 스승에게 학문을 사사를 받은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식을 주었지만 바울에게 생명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로부터 배운 지식은 자신을 교만하게 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것을 쓰레기처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세미한 음성이 들리십니까. 부활의 그분이 느껴집니까. 넘어 질 때 잡아주시나요, 잘못될 때 깨우쳐 주십니까. 오주님 나는 당신을 소망합니다. 분 초 마다 나를 만나 주소서, 잠자는 나를 깨워주소서, 주님은 나의 소망이시오, 나의 왕이요, 나의 길, 나의 생명이 십니다.
결론
어느 날 한 임금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신하들은 임금의 시신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과연 임금님이 천국에 가셨을까? 못 가셨을까?” 그러자 평소에 임금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던 신하는 “천국에 가셨을 거야”라고 말했고, 임금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신하는 “천국에 못 가셨을 거야”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다른 한 신하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마 임금님은 천국에 못 갔을 거야.”의아하게 생각한 다른 종들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천국은 아주 먼 곳인데, 임금님은 생전에 단 한 번도 천국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거든. 임금님은 준비 없이는 절대로 여행을 떠나지 않는 분이잖아, 아무 준비도 없었는데 가셨겠어." 여러분 언제 올지 모르지만 반드시 오고 마는 죽음의 완전한 준비는 딱 한 가지에서 결판이 납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으면 살 것입니다. 그러나 거부하면 멸망이요. 심판입니다. 캄캄한 흑암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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