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갈내고향하늘나라/(히 11:13-16
다시 한 번 설의 의미를 말씀드리면,한글학자들은 ‘개시하는 선날’의 뜻이 연음화 돼서 설날이 됐다고 하구요.
다르게는 ‘낯설다’ 는 의미도 있고 ‘섧다’ 라는 뜻도 있는데, ‘섧다’ 는 게 뭐냐 하면,‘삼간다,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조용히 가만히 있는다’ 이런 뜻이랍니다.
그러니까 새해 첫 날, 설날은 경거망동하지 않고 한 해 동안 이뤄질 일들을 신중히 살펴보는 그런 특별한 날이라는 것이며 ...........
설날에 조선시대 대신들은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가 임금님께 새해 문안을 드렸고, 윷놀이와 ‘청참’ 이라는 걸 했다고 하는데,.......‘청참’ 이란 게 뭐냐면, 설날 꼭두새벽에 거리에 나가서 맨 처음 들려오는 소리로 1년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것이었읍니다
그래서 첫날 새벽에 까치 소리를 제일 처음 들으면 그해에는 풍년이 들고 행운이 온다고 좋아했고 첫 새벽에 참새 소리나 까마귀 소리를 들었다? 그러면 흉년이 들거나 불행이 올 조짐이라고 실망하기도 했답니다.
명절은 고향이 생각이 나는 날입니다. 고향을 찾아가지는 않아도 고향이 그리운 날이 이 명절입니다. 이처럼 고향을 생각하고 찾기도 하는 것은 고향이라는 곳이 단순히 지명이 아닙니다.
고향이라는 곳은 역사고 숨결이 있습니다. 꿈이 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향을 찾는 것은 사람의 본능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신앙인의 고향은 어떠해야 되겠는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의 고향은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찾아가는 고향입니다.
오늘 같이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자기 고향을 찾아 가는 ‘귀성전쟁’ ‘민족대이동’이 있는데... 올해도 1,400만 명이 고향을 찾아 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향을 가고 싶어도 못가는 북한실향민들도 있고 개발 때문에 고향이 없어진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박용철시인의 ‘고향’이라는 시에 보면 ...고향은 찾아 무얼 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데 ...마을 앞 시내도 예 자리 바뀌었을라 ...고향은 이제 찾아 무엇 하리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 생각 ... 옛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찾아감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이 고향을 찾는 이유는 3가지가 있습니다. 1. 귀소본능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들에게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귀소본능은 연어나 진돗개, 비둘기 같은 짐승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예전에 같이 학교를 다니던 동창들이 그리워지고....... 어릴 때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들이 먹고 싶어지는 것이 다 귀소본능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향수병(home-sick)이 됩니다.
이런 육체적인 향수병이 있는 가하면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영적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2. 나그네 본능입니다. 어디론가 가고 싶은 욕망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떠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설과 같은 명절같이 쉬는 때에는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3. 안식본능입니다. 쉬고 싶은 욕망입니다.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사는 삶의 고달픔을 고향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4. 영접본능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고향에 가면 내 부모나 형제가 반겨줄 것을 기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4가지 본능, 귀소본능, 나그네본능, 안식본능, 영접본능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찾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란 고향은 나의 본능을 온전히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대로는 사고로 얼룩지고 아품과 슬품으로 ............갈등과 고민속에.....
예수님의 경우도 구원사역을 시작하면서 고향을 찾아 갔습니다.
고향에 대한 본능도 있으셨겠지만 내 고향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도 전하고 병도 고쳐 주려고 가셨다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네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면서 오늘의 주님의모습을 보지 않고........ 과거의 것, 나쁜 것을 기억해서 쫒아 내지 않습니까? 우리 삶속에서도 악습이 있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모르는 곳에는 진정한 의미의 고향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모하는 고향입니다. 하늘에 있는 고향으로 죽어야만 갈 수 있는 고향입니다. 16절을 큰 목소리로 같이 보겠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유치원에 있는 아이가 목사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하늘나라가 있어요?”
“그럼. 있지” “그럼 하늘나라가 좋은 곳이에요? 나쁜 곳이에요?”
“좋은 곳이란다” “그럼 목사님이 하늘나라에 가보셨어요?”
“아니 안 가봤는데“ “그럼 어떻게 아세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어요?
이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늘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간 사람 중에 한사람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단다.”
여러분 우리가 사모하는 고향, 죽어서 가는 고향 하늘나라가있음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엔 눙물이나 애통하는것이나 .............
세 번째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인데요, 만들어 가는 고향입니다.
김상진의 노래가운데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다”라는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을 주고 고향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창12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도 이 땅에 진짜 고향을 만들어 가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갔던 것도 새로운 고향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금의환향은 없습니다.
나이 들면 고향에 돌아가 집짓고 편히 살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꿈은 하나님의 약속.....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빌립보다 3장 20절을 보게 되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다면, 아니 하늘의 본향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나라,..... 내 가정이 하나님 나라...., 그리고 우리교회가...., 이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 진짜 고향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 중에서도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이 돈 떨어지고 친구들 다 떨어지고 흉년에 몸에 병까지 들자.. 아버지 생각하고 고향으로 가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묻지 않고 사랑으로 맞이합니다.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나를 품꾼으로 써 주시옵소서.” 그때 이 아버지는 이 아들을 일으켜 세워 끌어안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죄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너는 잃어 버렸다가 다시 찾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더러운 옷을 다 벗기고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새 신발을 주고 새 가락지를 끼우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면서 동네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이 아들은 잃어 버렸다고 다시 찾은 내 아들입니다.” 라고 이렇게 하는 그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은 차별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항상 얼마나 가졌는지, 못 가졌는지에 대해서 우리를 평가를 합니다.
성공이냐? 실패냐에 따라서 우리들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따라서 대우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교회마저도 성공한 교회, 실패한 교회에 대해서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르신 분이십니다.
세상이 다 나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여도 하나님은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지 않으시고 내 사랑하는 내 딸아, 내 아들아라고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를 죄인이라고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무나도 사랑해서 만드신 그 하나님의 창조된, 피조물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우리 가정 속에서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말을 하다가도 말이 안되면 “옛날에 네가 그랬잖아, 이랬잖아” 이래서 상처에 또 상처를 주는 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가정입니다. 과거의 상처만 들춰내는..... 여러분 그 상처를 들춰내지 않아도 그 상처를 받은 사람은 아픈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눈이........,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의 입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뀌어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을 사랑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딸로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 사랑이 회복이 되는 곳이..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세상은 뭐라 해도... 남편을 남편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라.
아내를 아내로 인정하고 사랑하라.....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고 효도하라.... 자식을 인정하고 노엽게 하지말라...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 어찌 아내뿐입니까?
강한 것 같은 남편들도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아내들도 친정에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먹을 것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딸로 보니까... 아내라는 짐도, 어머니라는 짐도 다 벗어던지고.... 오직 딸로 보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딸로 사랑 받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거기에서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교회와 가정을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으로 만들어 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예수님의 사랑은 나누어 주는 사랑입니다.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몸을 내 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의 가정속에 이런 예수님의 사랑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말만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있는 곳이 우리가 만들어 갈 고향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에게 3년 동안 배웠지만 그들은 항상 예수님이 십자기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까지 무엇했습니까?
네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이 안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이 안됩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실천은 더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다 도망갔습니다. 언제 가능했습니까?
성령을 받으니까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성령을 달라고 기도를 한때 성령 하나님을 간구하게 되고 그 성령이 충만할 때 이 사람은 비로소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에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실현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세상적인 정치적인 논리로, 이념을 가지고 생각을 하게 되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다고 무시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섷날에는 일가친척들을 만나시기도 하실 것이잖아요?
여러분 좋은 말만 하시기 바랍니다.
세배하면 덕담 많이 하시잖아요. 칭찬들 많이 해주세요.
“여태 넌 그러구 사냐?”이런 말하시지 마시구요. 만남이 있다는 말은 나눔이 있고 서로가 힘이 된다는 말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자매가 만나는 순간은 아이덴티티(Identity).. 동질성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으로.. ‘너와 나는 한 혈육이다!’ ‘하나의 뿌리다!’
‘한 가족’ 이라는 동질성을 발견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힘이 생깁니다.
그렇죠?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고향사람이라면... 동지를 얻은 기분이 들잖아요! 하물며 형제자매는 더 하지요 만나면 힘이 될 수 있는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의 고향입니다. 반대로 만나면 싸우고 원수지고.... 힘을 빼는 공동체는 문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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