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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생명의말씀사) -존 오웬

하나님아들 2012. 9. 19. 00:04

Apostasy from the Gospel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생명의말씀사)

 

이 책의 배경

존 오웬은 격동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청교도혁명의 성공과 실패, 카톨릭주의와 카톨릭의 득세를 목격하였고, 때로는 강단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당시 찰스 2세는 왕정복고 이후에 통일령을 발표하여 청교도들을 국교회 밖으로 몰아내었고 임종 시에는 카톨릭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의 동생 제임스 2세는 카톨릭 신자들을 정부 요직에 등용하였다. 이제 영국은 카톨릭화 하기 시작하였다. 오웬은 카톨릭과 카톨릭주의를 배교라고 규정하고 복음의 진리와 복음적인 삶과 예배를 수호하기 위하여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1. 배교란 무엇인가?

배교란 한 신앙공동체의 교리로부터 탈퇴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웬은 배교를 복음적인 진리와 거룩한 삶, 복음적인 예배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오웬은 히브리서 6:4-6을 가지고 배교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오웬은 본문을 배교자들에 대한 진술로 보고 있다. 다만 본문의 말씀은 참 신자들에게 이런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 되고 있다고 본다. 즉 믿음의 지식과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있어서 자라가는 대신 그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퇴보한다면 결국 믿기 이전의 불신과 무지의 상태로 되돌아가서 복음을 부인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오웬은 본문을 근거로 해서 구원을 수반하지 않는 복음의 특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 영적 비췸(또는 영적 조명)

(2) 하늘의 은사를 맛봄

(3) 성령에 참여한 바 됨

(4)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맛봄

(5) 내세의 능력을 맛봄

이렇게 보는 근거로 오웬은 먼저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은혜, 성령의 특별사역과 일반사역등 성령의 다양한 역사를 제시한다. 성령의 체험이 모두 구원의 체험이 아니며, 모든 체험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웬은 성령의 조명도 구원의 역사로 보지 않는다. “영적 조명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여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구원의 빛과 지식이 아니다. 그러나 영혼이 그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첫걸음이라고는 할 수 있다. 영적 조명을 받게 되면 인간의 마음은 아마 영적인 일들의 아름다움과 그 영광 및 탁월함을 어렴풋이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꾸준히 깨닫게 되지는 못한다.” “이 영적 조명은 또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인간의 가슴에 심어주고 그 의지를 변화시킴으로 영혼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화하게 해주는 일도 하지 못한다.”

오웬은 히브리서 6:4-6의 사람들은 특별한 영적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진지한 참 신자가 아니었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복음의 규례 및 그에 대한 순종을 자진하여 버림으로써 그리스도께 최대의 비난과 모욕을 돌렸다고 결론을 내린다.

 

2. 전적인 배교와 부분적인 배교

오웬은 배교를 전적인 배교와 부분적인 배교로 구별하고 있다. 전적인 배교는 이미 언급한 것들이며, 부분적인 배교는 “중요한 복음적 진리 중 어느 것을 저버리고 거부할 때, 복음에 대한 순종을 계속 등한히 할 때, 복음이 가르치고 요구하는 대로 살지 않고 다른 것들을 믿기 시작할 때” 일어난다고 한다. 오웬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부분적인 배교의 대표라고 지적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안에 참 복음의 기미라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할 만큼 그렇게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3. 부분적인 배교(1) - 복음 진리의 배반

참 거룩과 진정한 기독교 예배의 기초는 복음의 가르침, 즉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교리가 무시되거나 버려지거나 혹은 부패할 때 참 거룩과 진정한 예배 또한 무시되고 버려지며 부패하기 마련이다. 사도들의 서신을 보면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경고로 가득 차 있다.

(1) 어그러진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목사와 교사들 중에서 일어날 것

(2) 양떼를 아끼지 않는 흉악한 이리들이 교회에 들어올 것

(3) 사람들이 진정한 교훈 듣는 일을 싫어하여 진리로부터 신화로 돌아설 것

(4) 배도 현상이 가견 교회 전체에서 전반적으로 일어나되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

오웬은 이 모든 경고가 역사적으로 다 이루어졌다고 한다.

(1) 초대 교회 교부들, 사도 시대 이후 초기 교회에서 일하던 주요 교사들, 특히 그 저서가 후대에 전해진 교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복음과 복음의 단순성을 무시하고 그 대신 그들에게 맡겨진 복음과 상반되는 어그러진 일들을 많이 수용하고 가르쳤다.

(2) 그러더니 온갖 종류의 이단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다. 영지주의자들, 마르키온주의자들, 마니교도들, 아리우스주의, 펠라기우스주의 등.

(3) 그러자 이번에는 사람들이 복음의 건전한 교리나 가르침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3세기 쯤 해서 수도사들이 꿈과 환상의 이야기나, 스스로 고안해낸 헌신을 주장하고, 고행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등 수 많은 미신들을 설파했다.

(4) 성령의 마지막 경고는 “불법의 비밀”이 은밀히 활동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허망한 마음 및 정욕들과 함께 거짓 교사, 흉악한 이리, 건전한 교리를 듣기 싫어하는 것, 그리고 수없이 많은 사탄의 속임수들에 의해 발생한 치명적인 배교였다. 이 끔찍한 배도는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 그 극에 달했다.

이 기간 동안 참 교회는 광야로 쫓겨났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자비하게도 그의 기업에 남아있는 자들을 방문하시고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들을 많이 일으키셨다. 그들에 의해 종교개혁이 성공적으로 시작되었고 그 개혁이 여러 나라와 교회에서 진행되었다. 그 동안 많은 교회들이 오랫동안 죽을 병의 권세 아래 짓눌려 있었는데 그 병으로부터 회복되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그 모든 배도를 다 쓸어내기 전에 그만 그 세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자유케 된 교회들이 다시 한 번 더 배도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우리는 여기서 또다시 복음의 진리를 배우고 난 후 그 진리에 금방 싫증을 내고 여러 가지 이유를 갖다 대며 배도의 길로 떨어지는 인간의 타락성을 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로 되돌아갔다. 그런가 하면 알미니안주의와 소시누스주의 같은 종교개혁 이후 복음으로부터 이탈한 다른 주의들이 일어났다.



오웬은 복음 진리를 배반하는 이유와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원인 1. 영적인 모든 것을 대적하는 마음이 인간의 심령에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는 죄인의 타락한 마음, 의지 및 소욕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가 인간의 양심을 파고 들어가 실천을 강요하게 되면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적대감이 일어나 그것을 대적하게 만든다. 인간은 설득이나 자연적 이유 및 동기들에 의해 복음을 진리로 영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리가 그들 양심에 적용되고 그 의지와 욕망이 자신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 안에서 걷도록 회개할 것을 촉구받을 때면 그 옛 원수가 일어나 진리를 대적한다.



원인 2. 인간의 마음은 본질상 영적으로 어둡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적 진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영적 분별력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도하게 되었다. 그들은 육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을 택한 것이다.



원인 3. 무지

또 다른 배도의 원인은 무지이다. 오웬은 무지의 이유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1) 게으름 -  성경의 교훈을 알려고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2) 잘못된 가르침 -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3) 복음의 지식을 스스로 거부

오웬은 진리를 가르치고 영적 조명으로 그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백성을 배도로부터 지켜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방편이므로, 복음에 충실하며 영적 비췸을 주는 설교, 그리고 복음 교리들을 정기적으로 신실하게 가르쳐주는 일만이 배도를 막을 수 있는 확실한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언제 어디서고 설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복음의 말씀과 가르침에서 수고하는 일에는 휴식이 있을 수 없다. 신실한 기독교 사역자에게는 오직 끝없이 계속되는 수고와 땀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오웬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설교가 복음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래서 거기에 인간적 생각이나 미신이 덜 가미되면 될수록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게 하는 일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비영적이고 육적인 인간의 마음은 복음의 진리보다 허탄한 이야기나 오류 및 미신을 훨씬 더 잘 이해하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와 비밀에서 자라가는 일은 그 속도가 느리므로 복음의 영적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에는 계속해서 부지런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배도의 밥이 될 가능성이 크다.



원인 4. 교만

타락 이후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높아진 것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패한 마음은 자기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라고 스스로를 높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가 갖고 있는 권위에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결정한다. 이렇게 해서 어리석은 인간은 배도의 길로 인도되는 것이다.



원인 5. 태만

배도하는 일이 크게 일어날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거짓 안정감 속에서 잠자게 될 것이라고 하신 성령의 경고를 무시하면 정말 거짓 안정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참 종교가 부패되는 이유는 바로 이 등한시하는 태도 때문이다.



원인 6. 세상 및 세상이 주는 쾌락에 대한 사랑



원인 7. 사탄





4. 부분적인 배교(2) - 복음의 거룩한 명령으로부터 돌아섬



오웬은 복음의 거룩한 명령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복음의 진리를 부분적으로 배도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며 주의해야 할 배도라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안에 거하시며 죄를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사역도 받지 않은 채, 혹은 회개하고자 하는 소원도 전혀 갖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계속 죄악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를 부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가르침은 거룩할 것을 요구하며 거룩할 것을 명한다. 복음의 가르침에 의하면 “거룩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다.” 참 거룩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수 있다. 진리를 증거하고 복음적 예배를 준수하는 일들로도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 그러나 거룩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일들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혀 증진시키지 못할 것이다. 성도의 거룩한 삶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은혜의 능력, 그 순결함 및 효능을 증명하며 결국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오웬은 거룩에 대한 잘못된 관점 세 가지를 제시한다.



(1) 로마 카톨릭 교회

오웬은 로마 카톨릭 교회만큼 거룩을 자랑하는 교회도 없을 것이라고 하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거룩한 순종이라고 부르는 청빈, 순결, 순종의 서약이나, 수도원 생활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 등은 복음에서 요구하는 순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하는 거룩에 대한 서약은 복음적 거룩의 영적 자유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오류와 편견들로부터 자유케 하며, 또한 모든 거룩의 원리로서 마음과 영을 넓혀 준다. 그러나 “종교적 의무에 있어서 사람의 종이 된 자들은 하나님의 자유인이 아니다.” 공덕을 세우기 위한 종교적 훈련은 “거저 받은 선물인 칭의와 영생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고 기쁘게 기꺼이 행하는 그런 순종은 있을 수 없다.” “복음적 거룩의 핵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 거룩을 행하도록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다.”



(2) 도덕성을 가장한 배도

어떤 사람들은 복음이 요구하는 모든 순종은 고상하며 도덕적이요, 정직하고 고결한 생활이므로 사람들은 각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그 순종을 위해 복음적인 은혜와 도움이 필요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도덕성의 가면을 쓴 배도이다. 즉 도덕성은 복음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심의 빛에 의해 인도되고 지배당할 때 배도가 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도우심이나 하나님의 은혜없이 이성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확신으로부터 생긴 도덕성은 복음적 수종이 아니다. 중생을 통해 우리 영혼이 새롭게 되어 이루게 된 도덕성이 아니라면 그 도덕성은 복음적 거룩이 아니다. 즉 새롭게 변화된 영혼 안에 있는 은혜의 원리로부터 우러나오는 도덕성이 아니라면 복음적 거룩이 아니다. 초자연적 진리들 위에 세워진 도덕성이야말로 참 복음적 도덕성이다.



(3) 완전을 가장한 배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 행위가 완전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복음이 요구하는 참 거룩으로부터 멀어진다. 이런 주장은 은혜언약을 파기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중재사역 및 끊임없는 죄 씻음의 사역이 모두 필요없다고 보는 행위이다.



오웬은 우리에게 두 가지 큰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첫째, 사람들의 눈에 확 띄는 경건과 자선을 행하도록 격려함으로써 복음의 주된 은혜들을 등한히 만드는 것이다. 이는 큰 배도가 시작되고 교회들이 복음의 능력과 순결로부터 돌아설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둘째는 그러한 위선적 가면을 책망하며 속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된다고 고집하는 가운데 복음의 외적 의무들을 등한히 하는 일이다.





5. 부분적 배도(3) - 복음적 예배로부터 멀어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제정하시고, 이것이 조금도 변경되지 않고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보존하신 주된 이유는 바로 이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예배가 제데로 드려지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주된 존재 목적을 망각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복음적 예배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그것을 지키지 않거나 등한히 하는 데서 발생하거나,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고안해 낸 예배 방식을 첨부함으로 발생한다.

오웬은 첫째 경우로 성례를 거절하는 사람들을 예로 든다. 성례는 우리가 믿는 복음의 가르침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세례식은 중생을 나타내며, 성찬식은 그리그도의 고난과 그리스도인과의 연합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을 거절한다면 성례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 둘째 경우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이다. 그것은 꾸밈없는 복음적 예배의 간소함을 거절하고 그것이 제정된 순수성을 저버린 채 미신적이며 우상 숭배적인 예배를 따라가는 것이다.





6. 배도를 막기 위해서 목회자에게 드리는 권면



오웬은 배도에 대한 진정한 방어책은 가슴으로 진리를 사랑하며 진리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복음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이해하여 가슴으로 사랑하고 의지를 동원하여 기꺼이 즐겁게 순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오웬은 두 가지 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성령께서 복음의 진리를 인간의 가슴에 대고 효과적으로 알려주시는 일이며, 둘째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열심과 거룩의 본을 보이며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복음의 진리 안에 있는 그 기쁨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그리스도께 즐거이 순종하고자 하며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해주며, 본인들이 그의 거룩하신 뜻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정말 그들 심령 가운데 능력 있게 심겨져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웬은 어떤 교회가 복음의 순결을 지킬지 아니면 배도할지는 그 교회의 목사에게 많이 달려 있고,  교회는 그 교회의 임명받은 사역자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에 따라 흥하고 망한다고 하면서 몇 가지 사역자의 중요한 의무를 제시하고 있다.



(1) 임명된 사역자는 복음의 가르침, 특히 거룩에 관한 가르침을 순결하게 지킬 의무가 있다. 사람들이 일단 거룩에 대해 싫증을 내기 시작하면 그들은 성실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갈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늘날 복음의 모든 가르침이 반대에 직면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거룩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2)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가르쳐야 한다. 무엇이 유용하고 유익한지, 그리고 자기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현재의 영적 상태에 비추어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볼 줄 모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가 될 자격이 없다.



(3) 목사의 의무는 사역과 삶을 통해 자기가 설교하는 그 크고 거룩한 가르침의 능력과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4) 임명받은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의 순결과 거룩 및 순종을 보존하기 위해 지정해 주신 거룩한 훈련과 규유을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다.



능력있는 복음의 사역이 회복될 때에야 비로소 교회는 현재의 배도 상태로부터 영광스러운 상태로 변화되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출처 : 설교와 예화 모음
글쓴이 : 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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