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과 언약!!

[스크랩] 천국복음

하나님아들 2012. 9. 19. 00:02

천국복음   

 

                                 *들어가는 말*

"천국 복음"(마 4:23)은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리라."(마 4;17)는 "천국 복음" 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교훈하시는 산상 수훈의 내용도 전부가 "천국 복음"이었다(마5:1-12). 마가 복음에서는 "천국 복음"을 비유로만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가 땅 끝까지 전해야 할 복음도 바로 "천국 복음" 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이 말씀은 역사의 완성이 천국 복음을 통한 세계 복음화로 성취될 것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천국 복음" 선교를 위임받은 종말론적인 신앙 공동체이며, 이 "천국 복음" 선교의 사명속에 존재 이유와 인간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여 참다운 역사 의식을 가져 세계 역사의 주체로써 사명을 다 할 수 있다.

이처럼 "천국 복음"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필자는 신학대학 시절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죠지 래드(G.E.Ladd)교수의 "천국 복음"(THE GOSPEL OF THE KINGDOM)을 편역하여 독자 여러분과 함께 미력하나마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편의상 저자의 목차에 따라 연재함을 밝혀둔다.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라는 표어 아래 세계 선교를 지상목표로 선교의 기치를 높이 든 평강 교회 성도들에게 삼가 이 책을 바친다.

1996년 오순절에

이 동 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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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천국복음이란?

2.천국의 미래성

3.천국의 현재성

4.천국의 비밀

5.천국의 생명

6.천국의 의

7.천국의 요구

8.천국, 이스라엘 그리고 교회

9.천국은 언제 올 것인가?


1.천국 복음이란?

현대 과학과 의학 그리고 물질 문명이 놀라우리 만치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복과 안전은 그에 비례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더 두려운 시대를 맞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 역사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고대의 시인들과 철학자들은 이상적인 사회와 국가를 꿈 꾸어왔지만 현실과 너무 거리가 먼 꿈에 그치고 말았다.

유대 민족은 언제나 장차 임할 황금 시대 곧 하나님 나라(천국)를 기대하였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밭가는 자가 곡식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저희가 포도원들을 심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암 9:13,14)

그 땅이 너무 비옥하고 기름졌기 때문에 거두는 자들은 씨 뿌리는 자들의 바로 뒤에서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렘 31:12)

아무도 주리지 않으며, 아무도 목마르지 않으며, 그리고 아무도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풍요로운 천국을 꿈꾸고 있다.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호 2:18, 참조 사 11:6-9, 65:25)

위 성구(聖句)들은 인류 사회의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참된 평화와 안전의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약속하고 있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사65:20, 참조 22절, 25:8)

다시는 고통과 늙는 것과 약함과 쇠퇴가 없는 하나님 나라(천국)를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위대한 시인 로버트 번즈가 쟁기로 조그마한 들쥐의 집을 엎어 버렸을 때, 들쥐가 공포에 질려서 뛰쳐 나왔다. 번즈는 자기 때문에 작은 들쥐가 무서워 떠는 것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자연의 유대를 깨치는

인간의 횡포여 !

오! 미안하이."

스티븐슨(R.L.Stevenson)이 개를 학대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옆에 있던 친구에게 말했다.

"저 사람을 좀 말려야 되겠네."

스티븐슨이 그런 공연한 일에 말려들기를 바라지 않던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걱정이야 ! 네 개도 아니지 않아? "

"그래"

스티븐슨은 말했다.

"내 개가 아니야. 하지만 하나님의 개야. 나는 저처럼 학대받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있을 수 없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약속되어 왔던 하나님 나라(천국)가 도래했다고 예수께서 선포하신 것이다. 천국의 도래가 예수님의 선교의 핵심이었다.

마태 복음 5, 6, 7장의 말씀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의 권능있는 사역들도 "천국이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들이었다(마 12:28).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들도 천국에 대한 진리를 제자들에게 깨우치기 위함이었다(마 13:11).

주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핵심도 "나라이(천국)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에서 보듯이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이다.

그러면 천국은 무엇인가?

그리고 천국은 언제 어떻게 올 것인가?

이에 대해 성경은 다양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의와 평강과 희락"은 성령의 열매들로써 성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지금' 누리는 영적 실체들이다.

우리 나라의 기독교 역사상 초창기의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님이 6.25동란 무렵에 목포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공산당에 붙잡혔다. 끌려가서 심한 고문과 조롱을 당하며 나날을 보내었는데 어느 날 한 공산당원이 이 목사님을 끌고 가서 또 고문을 하다가 아주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물었다.

"영감, 내한테 천국 좀 보여 줄 수 있어? "

하고는 발길로 걷어찼다. 이목사님은 발길에 채이면서도

"예, 보여드리지요."

하고 말했다.

"야, 죽어서 가는 천당 말고 지금 당장 보여주란 말야."

하고는 또 발길로 걷어찼다.

"예, 지금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라는 이 목사님의 말에 공산당원은,

"어떻게 보여주냐?"

고 하며 또 발길로 걷어찼다. 그 때 이목사님은

"예, 천국 본점이야 내 소관이 아니니까 보여 드릴 수 없지만 지점이야 내가 보여 드릴 수 있지요. 그 천국 지점이 바로 제 마음입니다. 내 마음에 천국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미 "아들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는 말씀이다(참조 엡 5:5, 계 11:15).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즉 천국 복음을 받아 들이고 믿는 사람들은 '지금' 천국에 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 21)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요한 복음 18장 36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벧후 1:11, 마 8:11, 마 13:41,43 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 재림시에 들어 갈 미래의 영역으로 말씀하고 있다.

"(벧후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마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들도 다양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실마리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에 대한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천국은 마가복음 10:15에 보면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야만"하는 것이다.

"(막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anyone who wi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무엇을 받아야(receive) 하는가?

받아야(receive) 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rule of God)이다.

미래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완전한 믿음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해야 한다. 또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야"만 한다(마 6:33).

"그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생활 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receive)을 말한다. 하나님의 통치없이 천국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 가운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기도문은 오직 하나님만이 전 세계의 왕이 되시기를 바라는 하나님 통치에 대한 기원이다.

천국이란 결코 어떤 땅이나 영토가 아니라 오직 인간의 마음과 심령, 그리고 인간의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왕권, 하나님의 지배를 말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그는 어떤 일로 친구와 크게 다투었다. 마침 그때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때였다. 그는 여러번 시도했으나 예수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림이 진척되지 않았다. 그는 그림 제작을 중단하고 며칠 동안 명상에 잠겼다가 실패의 원인을 알아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다.

"사람이 재주있는 손을 가졌다고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가졌다고 가치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을 때 나는 예술가도 될 수 없고 사람다운 사람도 될 수 없다."

다 빈치는 즉시 친구를 만나 화해하였다. 그리고 금전에 얽혔던 분한 생각을 잊도록 기도했다. 그런 뒤 며칠이 지나 다시 작업실에 들어가 붓을 들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얼굴을 아주 만족스럽게 화폭 위에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찾는 것이 성한 눈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뜻한다. 내 성격이나 내 욕심이 다스리는 세계가 아니다. 걱정과 불안과 나의 좁은 생각을 몽땅 묶어 하나님이 관리하시도록 맡기는 믿음의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천국은 정치적인 왕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랑의 왕국인 것이다.

마드리드(Madrid)에서 1958년에 개최된 세계 마라톤 대회에서 감격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결승점을 불과 1마일 앞두고 1등으로 달리고 있던 선수의 다리에 심한 쥐가 일어났다. 2등으로 달리다가 이것을 본 선수는 1등으로 달리던 선수를 부축하여 일으켜 함께 천천히 달렸던 것이다. 물론 이들은 둘 다 등수에 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경기장에 입장하여 마지막으로 운동장을 돌 때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1 등을 하느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이다.

천국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 통치의 축복을 부분적이나마 지금 경험할 수 있는 현재 영역이며, 또한 예수님 재림시에 완전히 경험하게 될 미래 영역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성도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참조> 천국,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아들의 나라, 하늘 나라 등의 여러가지 표현을 그 의미가 다 같은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천국'으로 통일하여 쓰기로 한다(죠지 래드의 "CRUCIAL QUESTIONS ABOUT THE KINGDOM OF GOD" PP.121-132를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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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국의 미래성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다. 하나님의 통치는 현재와 동시에 미래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은 현재와 더불어 미래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며 그에 따른 축복의 향유이다. 그러나 신약 성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이 시대에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마태 복음 12:32, 에베소서 1:21, 마가 복음10:29, 30 등을 보면 세상을 "이 세상(금세)" 과 "오는 세상(내세)" 둘로 나누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세상"은 종말을 고하고 "오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엡1: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막1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추후 게재 함><도표 1>

"이 세상"은 창조로 시작되나 "오는 세상"은 화살표가 보여 주듯이 끝없이 영원함을 나타낸다.

이 두 세상의 특성을 보면,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시대이며, "오는 세상"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 시대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갈1:4)

이 세상을 "악한 세대", 죄와 불의의 세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필요한 세대로 표현하고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엡2:1-2)

어떤 일간지에 실린 이야기다. "어부가 굴조개 하나를 채취하여 껍질을 열어 보니 그 속에 약 9cm짜리 물고기가 들어 있었다. 그 고기는 아직 살아 있었고 약하게나마 퍼덕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굴조개의 속 살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물고기는 입이 열린 굴조개 속으로 들어갔고 껍질이 닫히는 바람에 굴조개 안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일단 속으로 들어간 물고기는 굴조개의 살을 먹어치우긴 했으나 껍질을 열고 나올 수가 없어서 그 안에서 죽을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죄는 부주의라는 문을 통해서 우리 속으로 들어온다. 일단 안으로 스며든 죄를 몰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죄는 재빠르게 자기가 차지한 곳의 주인이 되어버리며, 결국에는 우리의 삶 전체를 파괴하기에 이른다(Moody Monthly).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 즉 사탄을 따라가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5:19-21까지의 말씀에 "육체의 일"들은 모두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불가피한 세상이 바로 "이 세상"이다.

"(갈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마태 복음 13:7, 22의 비유 말씀을 보면 "이 세상"의 특징은 부귀, 번영, 성공, 권세, 생활에 대한 염려로 나타나고 있다.

"(마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마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결실치 못하게 하는 각종 염려들로 가득찬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세상"은 복음에 대해 적대적이어서 예수님을 기꺼이 따르는데 댓가를 치르고자 하지 않는다.

농부가 호박밭을 경작하고 있었다. 호박이 달리기 시작하자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 밭 사이를 걷다가 밭고랑에서 유리병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밭 옆에 있는 도로를 지나가던 자동차에서 누군가가 내던진 것이리라. 농부는 시험삼아 아직 어린 호박을 줄기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병 속에다 집어넣었다.

그 후 여러 달이 지나 호박이 완전히 익어 추수할 때가 가까워졌다. 밭을 살피던 농부가 다시 그 유리병을 발견하였다. 유리병은 전에 그가 집어넣었던 호박이 자라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같은 줄기의 다른 호박들은 크게 자라서 잘 익어 있었는데 병 속의 호박은 병의 크기 정도밖에 자라지 못했고 모양도 병처럼 되어 있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게 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천국 복음" 사이에는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

여기 "이 세상 신"은 사탄을 가리킨다. 사탄은 이 세상에서 상당한 정도의 권세를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 섭리가운데 허용되어 왔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운 통치의 수단으로서 사탄에게 이 세상에 영향력을 가지게 한 것이다.

에베소서 2:1-2, 갈라디아서 5:19-21 등에 나타난 일들은 바로 사탄에게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신의 악행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후서 4:4에 보면 악의 뿌리는 불신과 어두움, 그리고 혼미 등이다.

"(고후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종류의 악행들은 불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롬1:18참조).

앗시리아의 포로가 된 토비트는 어려운 이스라엘 동족들을 위하여 많은 자선을 베풀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담 옆에서 자다가 뜨거운 참새 똥이 눈에 떨어져 눈이 멀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 안나가 품을 팔아 가계를 꾸려 나갔다. 안나는 물건을 만들어 그 삯을 받곤 하였는데, 하루는 베를 짜서 주인에게 가져다 주었더니 삯과 함께 염소 새끼 한 마리를 덤으로 주었다. 안나가 염소 새끼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자 토비트는 "이 새끼 염소는 어디서 난 것이오? 혹시 훔친 것은 아니오? 어서 그 놈을 주인에게 돌려 주시오"라고 나무랐다. 이에 안나는 "이것은 품삯에다 덤으로 받은 것이예요"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토비트는 끝내 아내를 믿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염소 새끼를 돌려 주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안나는 그 동안 베푼 자선과 덕행으로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하며 토비트를 원망했다. 결국 불신으로 인해 가정불화가 초래된 것이다.

어두움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스스로 독립을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혼미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눈이 먼 상태를 말한다. 사탄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빛과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특징은 바로 불신과 어두움 그리고 혼미함 등이다.

천국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은 분명히 아니지만, 그리고 사탄이 "이 세상 신"으로 불리우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을 포기하신 것은 절대로 아니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103:19)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공격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만국의 왕"(계15:3)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계17:14)이시다.

이 세상은 악하다. 그리고 천국은 "오는 세상"에 속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오는 세상"의 "영생"을 지금 여기서 소유할 수가 있다.

마태 복음 19:16-30 을 보면 "영생"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구원"이 다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마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19: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마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영생, 하나님 나라, 구원은 모두 천국에 속한 것이다. 부자 청년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를 좇으면 "오는 세상"에 속한 영생을 지금 여기서 부분적이지만 소유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재물에 대한 염려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가로 막았다.

고린도 전서 15:42-50 을 보면 "혈과 육"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신령한 몸" 즉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고 나서 들어갈 수 있다는 알 수 있다.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이는 예수님 재림시에 있을 첫째 부활에 참여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13:49-50)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는 분리와 심판으로 세상은 종말을 고하고 천국의 아들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알곡과 가라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여 사탄이 "이 세대의 신"으로 보이지만 예수 재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사탄을 파멸시키고 의가 모든 악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안티오쿠스 왕은 페르샤에 침입하여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하려고 하였으나, 그곳 주민들의 맹렬한 방어전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져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안티오쿠스 왕은 화가 치밀어 올라 유다인들에게 앙갚음할 결심을 했다. 그래서 그는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쉬지 말고 병거를 몰아가라고 마부들에게 명령하며, "예루살렘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곳을 유대인들의 공동묘지로 만들겠다"라고 큰소리 쳤다. 그러나 그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내장이 뒤틀리고 격심한 복통이 일어났다. 그래도 그는 유대인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폭언을 퍼부으면서 행군을 독촉했다. 그러다가 질주하는 병거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들것에 실려 가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의 몸은 썩어 들어가 구더기가 들끓었다. 그는 제 몸에서 나는 악취를 견딜 수 없어하며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죽어야 할 인간이 하늘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치않다"라고 신음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루살렘에 자유를 주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은 거두어지지 않아, 그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이국의 산골짜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므로 죄와 불신, 죽음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 악한 "이 세상"과 생명과 축복의 "오는 세상"과는 동일한 수준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도표 1 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한다. 천국을 이 세상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에 두어야 한다.

<도표 2> <추후 게재 함>

그리스도의 재림(계19:11-16)후 천국(계21:1 이하)이전에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천년이라는 간격(계20:1-6)이 있다. 이를 흔히 천년 통치 기간이라 부른다. 이 천년 통치 기간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기간일 것이다(고전 5:24-28).

구약의 예언자들은(암 5:18-27, 9:11 이하, 욜 1:1-20, 30-32) 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시대를 보지 못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이 감추어진 교회 시대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천국이 시작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메시야의 재림으로 "이 세상"은 심판받아 멸망하고 천국이 막 바로 도래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15:20-28에서 천국은 종말론적인 두 단계를 통해 성취됨을 볼 수 있다. 천국은 죽은 자의 부활과 사탄의 멸망으로 시작된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고전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15: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15:27)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고전15: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요한 계시록 20장을 보면 죽은 자의 부활에 두 단계가 있고 사탄의 멸망에도 두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천년 통치는 첫째 부활로 시작되어 둘째 부활로 끝이 난다(계 20:4-5, 12-13).

"(계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 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계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계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천년 통치 시작과 더불어 사탄은 결박되어 천년 동안 무저갱에 던져 진다(계 20:2, 3). 그리고 천년 통치 말에 "반드시 잠간 놓이게 된다."(계 20:7-10)

"(계20: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계20: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계20:7)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계20: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계20: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계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도표 2를 다시 수정해야 한다.

<도표3><추후 게재 함>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 하나는 천년 통치는 완전하고 최종적인 천국의 실현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탄은 이 기간 동안 결박되어 있으나 그 후에 잠깐 다시 놓이게 되어 여전히 중생치 못한 죄의 경향성이 남아 있는 심령들을 찾아다니게 된다. '사망과 음부(무덤)'가 천년 통치말에 최후의 심판 때까지는 파괴되지 않는다(계20:14).

"(계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중요한 결론은 "이 세상"에서 천국의 축복들을 완전히 경험치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완전한 천국은 "오는 세상"에 속한 것이다. 이 악한 시대가 계속되는 한 천국의 축복들을 완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떠나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인간은 결코 천국을 건설할 수 없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는 것이다.

사탄과 악의 세력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권능으로서만 물리칠 수 있다. 그래서 '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므로 성경은 마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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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국의 현재성

천국은 분명 '오는 세상'에 속한 것이지만 히브리서 6장 5절, " ----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라는 말씀을 보면 '이 세상'에서 천국의 능력을 맛 볼 수 있다고 했다.즉, 내세의 능력이 금세에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사탄이 지배하는 악한 세대에 살고 있으나 내세의 능력을 맛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맛(Taste) 이란 실제적이다. 그것은 약속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경험이다.

"(시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어떻게 우리를 건지실 수 있는가? 이 구원의 능력은 '오는 세상'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대로 우리가 어떻게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내세의 능력으로 내적 변화의 경험을 해야 한다. 악한 세대는 계속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내세의 능력을 통한 경험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도록 하셨다. 지금까지 2장, 3장을 간단히 도표를 통해 종합해보면 우리는 두 세대를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며, 또 하나는 부분적이나마 '오는 세상'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도표를 다시 수정하면 다음과 같다.(점선 표시는 천국을 부분적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도표 4>
<추후 게재 함>

천국(오는 세상)은 미래에 속한 것이다. 그런데 일부 점선으로 표시한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부분적으로 내세(천국)의 능력을 맛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롬12:2) '오는 세상'(천국)의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이다.

악한 세대가 계속되고 있을지라도 사람들이 천국의 축복들을 어느 정도 맛볼 수 있도록 천국이 이 악한 세상에 침입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은 천국의 근본적인 특성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속목적(救贖目的)을 성취하는 여러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구속(救贖)의 궁극적인 목적은 천국의 실현이다. 천국의 실현은 사탄을 정복하므로 성취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신다.'(25절) 이 원수들이 마지막으로 정복되고(26절)나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그 나라를 바치게 될 것이다(24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통치의 원수를 멸망시킴으로서 천국은 완전히 실현된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지만 천국의 능력은 '부활'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서 26절을 보면 부활에는 3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단계, 예수님의 부활로 이는 첫째 부활의 첫 열매이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된다.

둘째 단계,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 즉,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부활로서 첫째 부활이 있다.

셋째 단계, 둘째 부활로 이는 불신자의 최후심판을 위한 부활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이 세상'가운데 생명의 부활이 시작되었다.

요한복음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빌립보서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이상의 말씀들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역사속에 실제 일어나고 있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신자는 이미 '부활의 첫 열매'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의미에서 천국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6)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망 권세를 깨트리셨기 때문에 내세에 완전히 누릴 영생의 축복을 '이 세상'에서 누리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는 누구냐? 악한 자? 적그리스도? 무신론자?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는 바로 사망이다. 이 사망은 어디서 오는가? 로마서 6:23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라고 했다. 사망은 죄 때문에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역시 원수이며 마찬가지로 멸망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 물론 사탄이다. 그래서 지옥의 삼총사는 사탄과 죄와 그리고 사망이다.

"저가 모든 원수들(사탄, 죄, 사망)을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라."(고전15:26)

이로써 천국의 완전한 승리가 성취된다.

천국이 사탄의 영역인 이 악한 세상에 어떻게 침입했는가를 살펴보자.

히브리서 2:14을 보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사탄의 권세가 영광스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만 패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미 사탄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패배에는 3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초기 패배한 것이다.

둘째, 천년 통치 초에 무저갱에 결박되어 갇히게 된다.

셋째, 천년 통치 말에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

복음서에는 이 시대에 악에 대한 정복 기사를 담고 있다.

마태복음 4:23-24,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를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천국 복음과 주님의 치유 사역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

마가복음 1:23-27을 보자,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 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여기서 보면 천국 복음과 주님의 사역은 '치유'와 그리고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귀신을 추방하는'으로 특징지워진다.

해외선교회(Overseas Crusades)의 부총재이며 미국 비올라 대학에서 수 년동안 교수 생활을 했던 에드워드 머피(Edward Murphy)는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를 갖고 있었고 마귀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사역에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는 종이다. 그의 영적 전쟁이라는 강의는 아주 탁월했었다. 어느 날 그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떠나가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굉장히 지적인 귀신과 생생한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에드워드 머피는 "우리 주께서 너의 주인을 패배시킨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 귀신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는 그 귀신을 조금은 희롱하는 자세로(그는 절대로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인정했다) "우리 주께서 네 주인을 패배시킨 곳이 어디냐?"하고 물었다. 그는 이 질문을 하면서 대답은 갈보리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귀신은 '광야의 시험'이라고 대답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심으로 천국 복음을 증거하셨다.예수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몰아내시는 천국의 능력을 행하셨으며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마12:24)

고 했다.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5-28)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 그 일은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눅11:20)....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므로 하나님의 손에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천국 복음은 무엇인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지금 여기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The Exorcism of demons)이 바로 천국이 사람들 가운데 임했으며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축귀 능력(逐鬼能力)은 천국의 권능이 이 악한 세상에 침입했다는 선포였다. 사탄이 아직 무저갱속에 결박되지 않았으나 천국은 이미 이 세상에 역사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절)

축귀(逐鬼)는 천국의 현재성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0여 년 전에 중국에서 어떤 여자가 귀신을 부리어 당시 사람들을 미혹시킨 일이 있었다. 그녀는 주문을 외워 귀신을 불러서 갖은 재간을 다 부리고 있었다. 하루는 예수를 진실히 믿는 어떤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구경삼아 그 집에 가 보았다. 그런데 귀신 부리는 여자가 귀신을 아무리 불러도 웬일인지 아무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여자가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는데 한 아이가 와서 예수 믿는 부인에게 집에 손님이 왔다고 전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집으로 돌아가자 당장에 귀신이 나와서 그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귀신 부리는 여자가 "조금 전에는 왜 나오지를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귀신은 "오기는 벌써 왔는데 예수 믿는 여자와 같이 있는 성령이 무서워서 못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29절)

이 구절은 천국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약 성구중 하나이다. "강한 자"는 사탄을, "그 강한 자의 집"은 이 세상을 뜻한다. 그리고 "그 강한 자의 세간"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뜻한다. 문제는 누가 사탄의 영역에 들어가 먼저 "그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 세간"을 늑탈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사탄이 지금 결박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사탄은 지금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자", 사탄을 결박한다는 말의 뜻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혈과육의 피조물이 아니다. 영적 세계의 존재이다. 어떤 종류의 쇠사슬로 천사나 영물(靈物)들을 결박할 수 있는가?

이 말씀은 비유이다. 사탄의 결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권능의 역사(役事)로 사탄의 세력이 꺾여 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0: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여기에서 의미하는 "결박"과는 전혀 다른 사건이다. 이제 사탄은 패배당한 원수이다. 누가 복음 10:9-14의 말씀을 보자,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천국 복음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도시들에 대해 왜 이처럼 두려운 심판을 선포하셨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천국이 그들에게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천국이 현재 임하고 있다는 증거가 곧 병든자의 고침이었다. 천국 도래의 징조가 드러난 것이었다. 천국의 권능이 고라와 벳새다같은 도시들 가운데 역사(役事)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탄이 패배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곧 천국을 거절하는 것이었고, 이는 두려운 심판을 초래할 뿐이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누가 복음 10:17, 18의 이 말씀은 사탄이 그 권세의 절정에서 떨어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마태 복음 12:28의 말씀도 위와 동일한 의미로서 사탄이 결박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지금 현존(現存)하며, 그 권능의 역사(役事)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축복들을 완전히 누린다는 뜻은 아니다.

완전한 천국은 앞서 살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구속 역사(救贖役事)의 완성을 통해 성취된다. 하나님은 이미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첫 단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하셨다.

사탄이 이 세상의 신(神)이지만 그의 세력은 이미 꺾여졌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맛 볼 수 있게 되었다.

'악한 시대'는 계속되고 있지만 '오는 세상'의 권능이 지금 사람들 가운데 역사(役事)하고 있다.

인간의 눈에 세상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어 보이나 사탄의 왕국이 붕괴되고 있다. 천국은 이렇게 사람들 가운데 임하고 있다.

천국 복음을 영접하는 자들은 이미 시작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신 구속 사역이 마쳐지는 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천국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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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국의 비밀

마가복음 4장과 마태복음 13장은 '천국의 비밀'(막4:11)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다. 비유란 주님의 말씀의 핵심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고안된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뽑아낸 이야기이다. 이 핵심 진리가 천국의 '비밀'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로마서 16:25-26을 보면 '비밀'에 대한 성서적 개념을 알 수 있다.

"(롬16: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롬16: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롬16: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즉 영원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구원의 섭리가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에게 알려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비밀'이다. 다시 말해 구약성서에 나타나지 않았던 천국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地上使役) 가운데 마침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 '비밀'이 무엇인가? 다니엘서는 천국 도래(天國到來)에 대한 전형적인 예언서이다.

"(단2: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단2:32)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단2:33)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단2:34) 또 왕이 보신 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단2: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이 성구에 대한 해석은 다니엘서 2장 44, 45절에 있다.

"(단2:44)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단2:45)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이 구절들을 보면 예언자들은 장차 영광스런 천국의 도래할 한 날을 고대(苦待)하고 있었으며 그 때에 하나님은 지상에 그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구약적인 관점에서 천국 도래는 위대한 단 한 사건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役事)로 인간 세계의 사악한 모든 통치를 일거(一擧)에 쓸어버리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의(義)로 충만하게 하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바로 구약적 개념에서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였다.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리고 '오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는 두가지 세례를 베풀게 되는데, 하나는 성령세례로서 천국의 메시야적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 세례로서 최후 심판의 불(마3:11)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다.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이 말씀은 다음 구절, 12절을 보면 더욱 분명하다.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여기 "꺼지지 않는 불"은 종말론적인 심판을 뜻한다. 요한이 감옥에 있을때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내어 "오실 그 이"가 정말 예수님이신지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할지를 물었다. 이는 요한이 감옥에 있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야됨을 의심해서 한 말이 아니다.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확실하다.

"(마11: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요한이 품었던 문제는 자신이 선포했던 예수께서 메시야같이 역사(役事)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성령 세례와 악한 자에 대한 불 세례가 어디에 나타나고 있었는가?

"(마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요한은 왜 이같은 질문을 했을까? 그 이유는 다니엘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은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를 지배했고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에 진주했으며, 권력이 이방인 로마 사람 빌라도의 손아귀에 있었다. 우상숭배와 다신 주의(多神主義), 그리고 부도덕의 로마가 철권(鐵權)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바로 여기에 요한의 문제가 있었다. 이는 모든 신실한 유대인,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인간됨과 그의 사역을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였다. 죄와 죄인들이 여전히 심판과 형벌을 받지 않고 생존하고 있는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을 가져올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길, "(마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천국이 여기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비밀이 있다. 천국에 관한 새 계시가 있다. 천국이 여기 있으나 인간 통치를 파멸시키는 대신에 천국은 사탄의 통치를 공격한 것이다.

천국이 여기 있으나 천국은 겉으로 드러난 모든 정치적 질서를 변화시키는 대신에 영적 질서와 인간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비밀이며 하나님께서 맨 먼저 그의 구원의 역사에 드러내신 진리다.

천국은 두 단계로 역사할 것이다. 천국은 다니엘이 예언한 형태로 도래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인간 통치를 대신할 것이다. 세상은 권능으로 임하는 천국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밀', '새 계시'는 바로 그 천국이 지금 여기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으나 전혀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임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국은 지금 인간 통치를 파괴시키지는 않고 있다. 천국이 지금 세상에서 죄를 없애지 않고 있다. 천국이 지금 요한이 선포한 불 세례를 주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조용히 그리고 비밀히 임하고 있다.

천국은 영적인 영역에서 지금 하나님의 통치의 축복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사탄과 죄의 세력에서 사람들을 구원시키고 있다. 천국은 받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는 선물이다. 천국은 권능보다는 오히려 설득(說得)으로 '지금 여기에' 임하고 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은, 이 천국의 비밀, 즉 권능과 영광 가운데 임할 천국이 이 악한 세대에 천국의 축복들을 전혀 기대하지 않은 형태로, 실제 사람들 가운데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마태복음 13장의 처음 비유는 네 종류의 토양에 대한 비유이다.

"(마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마13:4) 뿌릴 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마13: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마13: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마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마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에 대한 해석은 18절-23절에 있다.

"(마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마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마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요컨대 천국이 사람들 가운데 임하였으나 그것을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천국은 똑같은 경우로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구약 성서만을 알았던 사람들을 당혹하게 하는 것이다.

천국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능 가운데 죄와 사탄과 사망 권세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임할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국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꺼운 마음과 복종하는 뜻을 가지고 천국의 부름에 응답하여야만 한다. 하나님은 억지로 사람들을 그의 나라로 몰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천국복음 선포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대사(大使)로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는 것이지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는다. 천국 복음이 생활 속에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열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거절할 수 있다. 천국 복음을 박차 버리고 그 복음 선포자를 비난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구제 불능일 뿐이다. 다음 비유는 가라지 비유로서 천국복음의 또 다른 일면을 설명하고 있다.

"(마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마13: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13: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마13: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이에 대한 해석은 37절-42절에 있다.

"(마13: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마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마 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13:42)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기서 분명 예수께서 "밭은 세상"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밭을 교회라고 해석하여 교회 안에 좋은 씨와 가라지, 중생한 자와 중생치 못한 자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교회의 혼합된 특성이 아니라, 세상의 혼합된 특성이다.

"(마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마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천국이 이 세상 가운데 이미 역사하고 있으나 죄와 악한 세상을 없애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천국복음을 받아들인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세상 끝날 까지 세상에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 끝날에 가서야 오직 분리하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구약 성서만을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것이 놀라운 비밀이었으며 선포였다.

천국에 대한 비유 가운데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천국의 임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겨자씨는 극히 작고 하찮은 것에 대한 상징이다.

"(마13: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이 비유는 천국이 사람들 가운데 임하고 있으나 가시적(可視的)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겨자씨만큼 아주 작고 하찮으며 적은 모습이지만 현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천국이다. 겨자씨와 같이 아무리 작고 하찮아 보여도 여전히 천국임이 중요한 사실이다. 때문에 "천국이 하찮아 보인다고 해서 네 자신이 속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실망하지 마라. 때가 되면 나물보다 커서 큰 나무가 되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게 되느리라." (마13:32) 이 겨자씨 비유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의 점진적인 성장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비유에 담긴 진리는 성장이 아니다. 이 비유에는 천국이 장차 어떻게 올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 이 비유의 유일한 진리는 천국이 지금 여기 사람들 가운데 임했으나 전혀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작고 하찮은 겨자씨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적고 하찮아 보여도 천국이기 때문에 경멸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똑같은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누룩의 비유를 보자.

"(마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이 비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이 누룩이 지닌 특성처럼 점진적 영향력을 가지고 온 세상을 점령할 것으로 해석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누룩을 악의 상징으로 해석하여 교회에 대한 배교(背敎)로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들은 그릇된 것이다. 겨자씨 비유와 마찬가지로 천국은 한줌의 누룩과 같다는 것이다. 천국은 가루 서말을 전부 부풀게 하는데 거의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누룩과 같다는 것이다. 세상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영광 대신에 천국은 지극히 작고 천한 모습으로, 그리고 오직 12명의 제자만을 두고, 결국 십자가에 죽어야만 하는 그런 모습으로 임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 역사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경력을 거의 언급치 않았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세계적 관점에서 예수의 인격과 경력 그리고 그의 선교는 얼마든지 무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속지 않도록 하라. 언젠가는 가루 서말을 전부 부풀게 한 누룩처럼 온 세상이 천국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누룩을 악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성경 거의 대부분에서 누룩을 악의 상징으로 쓰여진 것이 사실이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구절인 출애굽기 12장 39절을 보자.

"(출12:39) 그들이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남으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발교되지 않은 무교병을 구운 것은 단지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남으로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23:15)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레23:16)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레23:17)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레23:18)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 수양 둘을 드리되 이들을 그 소제와 그 전제와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

오순절에 유교병 떡 두 개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도록 했다. 오순절은 추수감사절기로 즐거워하는 절기이다. 이때 감사 제물로는 보통 집에서 쓰던 유교병 두 개를 곡식 추수의 첫 열매로 바쳤다. 이 절기에서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쁨과 감사의 상징으로 누룩 사용이 명령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누룩의 비유에서 누룩은 악의 상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천국은 누룩과 같이 적고 하찮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천국을 경멸하고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갈릴리 목수와 12명의 제자들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놀라지 말라! 때가 이르면 누룩이 가루 서말 전부를 부풀게 한 것처럼 천국이 온 세상을 충만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좌절될 수 없는 것이다.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값진 진주의 비유(마 13:44-46)가 논리적으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 이어 나오고 있다. 천국이 겨자씨와 누룩과 같이 비록 작고 적으며 하찮은 모습일지라도 바로 천국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것은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가치를 아는 자만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감추인 보화", "값진 진주"인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그 밭"을 샀고, "그 진주"를 샀다고 해서 구원을 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믿음의 선물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20장 1절-16절에서 천국은 노력의 보상이 아니라 선물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은 은혜스런 선물일지라도 아주 값비싼 것이어서 땅에 있는 자기 소유를 다 팔아야하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

"(막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라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때로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도 포기해야만 한다.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그러나 천국은 어떤 댓가와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소유할만한 "감추인 보화"요, "값비싼 진주"와 같은 것이다.

이제 마가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천국의 비밀에 대한 중요한 비유를 살펴보자.

"(막4: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막4: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막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4: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이 비유는 겨자씨 비유와 마찬가지로 성장 요소에 이야기의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는 단 한가지 근본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다. 즉,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천국은 이 한 가지 점에서 "씨"와 같다. "씨"는 그 자체에 생명을 지니고 있다. 농부에게는 그 "씨"가 지닌 생명에 도움을 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농부는 씨를 자라게 할 수 없으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씨를 뿌리는 것뿐이다. 농부가 씨를 뿌린 후 다른 여러 가지 일에 바쁘고 잠자고 있을 동안일지라도 씨 속에 있는 생명과 땅에 있는 지력(地力)은 스스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천국은 하나의 기적이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이다. 인간은 결코 천국을 건설할 수 없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통치다. 하나님께서는 천국복음을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천국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그러나 천국의 실재적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 열매는 인간의 노력이나 기술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국 그 자체에 지닌 생명력으로 열매를 맺는다. 즉 열매는 생명이신 하나님의 행위이다.

천국의 비밀은 바로 이렇다! 추수 때, 세상 끝 이전에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기 위해, 그리고 천국의 생명과 축복들을 베풀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역사(歷史) 가운데 오셨다(incarnation). 그런데 보이지 않게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며 갈릴리 목수로 오셨다.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여전히 전 세계에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천국은 천지를 진동시키는 역사(役事) 없이 들내지 않으며 겸손히 하찮은 모습으로 임하고 있다. 마치 땅에 뿌려진 씨처럼 소리없이 임하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강팍하게 천국이 거절될 수도 있고 질식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그 생명이 시들어 죽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천국은 현존하여 사람들 가운데 신적(神的) 생명의 기적을 가져오고 있다. 천국은 하나님 통치의 축복들을 가져다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초자연적인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그 마음 속에 "부활의 씨"가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볼 때 불신자와 다 같아 보여도 그리고 하찮아 보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승리 가운데 재림하실 때 믿는 자들은 그 "부활의 씨"로 말미암아 생명(영생)으로, 믿지 않은 자들은 사망과 영벌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감추어진 천국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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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국의 생명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구절은 천국과 영생과의 관계를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히 살고자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이 누리는 육체적인 생명보다 더 높은 수준의 생명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의 생명이다. 제3장 천국의 현재성에서 살폈듯이, 천국이 현재임하고 있으며 영생은 그 천국, '오는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 영생 또한 이 악한 세대에 소유하고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태복음 19장 16절-25절을 보자.

"(마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마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 대 (마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여기서 영생, 생명, 천국, 하나님 나라, 구원등 이 모든 용어가 다 같은 의미로 쓰여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미래에 속한 것들이다. 생명은 본래 미래에 속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 5장 1절-4절에서 언급한 그의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몸과 영혼의 전인적(全人的)인 부활로 바로 영생을 말하는 것이다. 영생은 몸과 영혼의 구원을 말한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다(고전15:50)는 것은 혈과 육의 변화를 의미한다. 우리 모두 생명의 선물을 받았을지라도 누구를 막론하고 죽어가고 있으며 죽음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죽을 것이 생명에서 삼킨바 되면"(고후5:4) 다시는 병과 고통과 죽음이 전혀 없게 되며 의사도 병원도 모두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영생은 구원을, 몸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 영생의 미래성이 요한 계시록 22장 1절-2절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계22: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 말씀은 완전한 생명의 실현에 대한 아름다운 약속이다. 생명수의 강물을 마시고 다시는 죽지 않는다.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으므로 다시는 병들고 썩고 고통 당하며 비참하게 죽지 않게 된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완전한 의미의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계속해서 3절을 살펴보자.

"(계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다시 저주가 없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 계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계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육과 죄의 장벽이 모두 깨끗이 사라질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완전한 친교, 하나님 사랑의 충만한 기쁨이 있는 것이다.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께 속할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 안에 완전히 성취되어질 것이다. 바로 이것이 생명, 영생이며 천국의 생명이다. 생명은 미래에 속한 것이다. 그런데 요한 복음서를 보자.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세상 끝, 미래에 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 주시고자 오셨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들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의미의 영생은 아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 병과 고통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영생을 어떻게 미래와 동시에 현재에 누릴 수 있는가? 이는 중생함으로(요3:5), 거듭남으로서 미래의 생명을 '지금 여기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에 속하였지만 '지금 여기서' 경험할 수 있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첫째,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 '아는 것'(knowledge)은 경험을 뜻한다. '아는 것'은 인격적 관계, 친분 관계를 뜻한다. 어느 누구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서로 친분을 나누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사도신경, 주기도문 등을 외우고 성구 몇절을 암송하며 하나님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외운다고 해서 그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될 수 없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친교, 하나님과의 친분 관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 바로 영생인 것이다.

"(계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계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이 구절은 천국에서의 완전한 하나님과의 친분관계, 완전히 하나님을 아는 것, 즉 영광스러운 천국의 생명을 의미한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나는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 바로 영생이다.

"(렘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렘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렘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성구는 천국에서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될 것이라는 미래의 약속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17장 3절의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약속이 아니다. 부분적이나마 영생(하나님을 아는 것)을 '지금 여기서'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러가지 교리와 학설, 교파가 생기는 것도 하나님에 대해 '희미하게', '부분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매우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랑의 은사를 사용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은 모든 은사보다 월등한 성령의 은사이다. 우리는 천국에서 완전한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다. 천국은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이 완전한 사랑을 성령의 은사를 통해 부분적이나마 어느정도 '지금 여기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시대에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불완전하나 오는 세상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다고 해서 말씀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주여, 당신의 말씀을 공부했으나 저는 단지 부분적으로 알뿐이며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영생의 둘째 의미는 성령의 내주(內住)이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천국의 생명은 성령의 역사이다.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여기 '신령한 몸'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령한 몸'이란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생명과 힘을 공급받는 몸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몸이지만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 그리고 성령의 힘으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우리의 기업'은 완전한 생명, 몸의 완전한 구원, 죽을 몸이 권능과 영광스러운, 그야말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 이 기업을 약속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고전15:42-50, 고후5:1-10, 엡1:14).

그러면 '보증'이란 무엇인가? 먼저 보증은 계약금을 의미한다. 계약금을 치르게 되면 부분적이지만 실제적인 소유권을 가지게 된다. 잔액 전부를 치루지 않았지만 이전 소유권자와 함께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성령의 소유는 계약금과 같은 효력을 지니는 것이다. 그래서 때가 되면 '나는 완전히 하나님의 백성(소유)이 되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소유)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약금으로 즉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다. 성령의 내주는 영생에 대한 계약금, 보증인 것이다. 중생은 천국 생명의 시작이고 부분적이지만 실제적인 것이다. 중생은 이미 우리 안에 천국의 생명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똑같은 진리를 다른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로마서 8장 22절-23절을 보자.

"(롬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 몸과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함께 고통 당하지만 언젠가는, 즉 영광스런 예수 그리스도 재림 시에는 완전한 몸으로 피조물로 변화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 이 '처음 익은 열매'란 무엇인가? 첫 열매는 열매들이 익어가기 시작할 때 맨 먼저 맺는 것으로 이때는 추수기가 아니라 추수기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생명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미래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천국이 '너희 가운데 있다.' 미래에 속한 영생이 '지금 여기에' 실재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과의 친교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어 정규적으로 예배드리며 성찬식을 통해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가지며, 하나님의 백성,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며 봉사하고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친분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이런 것이 천국생명의 생활이요, '신령한 몸'으로 사는 것이다. 천국생명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으니 성령으로 항상 충만한 생활을 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의 삶을 역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몰트만의 표현대로 "삶의 영"이다(Der Geist des Leb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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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천국의 의(義)


천국의 의에 대한 중요성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찾을 수 있다.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산상수훈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과 자격을 밝혀 주며 미래의 완전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義)는 어떤 종류의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행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지배,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이다.

먼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에 대해 살펴보자.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사람들이다.서기관들은 종교에 대한 전문 연구가들이었다. 마치 신학대학 교수와 같이 성경 연구에 전념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주된 연구 주제는 의에 대한 정의(定義)였다. 바리새인들은 이 서기관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로서 그 연구된 의를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유일한 관심은 의의 성취였다.

그런데 주께서는 이들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서기관들은 선악에 대한 대단히 광범위한 율법체제를 개발했고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과 연구를 쏟아 부었다. 예를 들면 미쉬나(Mishnah)와 탈무드(Talmud)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태 복음 5장 21절 이하를 보면 그들의 법보다 더 나은 법들을 주께서 말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하나 하나 살펴보자.

먼저 화의 법이 있다(the Law of Anger).

"(마5: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씀은 구약의 법으로서 현재에도 유효한 법이다. 다음 구절을 보자.

"(마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를 개역(R.S.V.) 성경에서는 "노(怒)는 죄이다."(Anger is sin)라고 번역하고 있다. 우리 가운데 화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 즉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했다. "라가"는 히브리인의 욕설로 "골빈 녀석"(empty head)이라는 뜻이다. "라가", 미련한 놈이라는 욕설은 일종의 강한 화의 표현이다. 이 세상에 욕 한번 안해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화는 과연 살인만큼 나쁜 것이어서 "심판받게 되고" "지옥 불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뜻하시는 바는 "살인은 정말 죄이다." 그러나 "화도 역시 죄다."라는 것이다. 화가 치밀면 살인치는 않았을지라도 처음에는 욕을 퍼붓다가, 참지 못하면 주먹이 날아가고 그래서 성이 풀리지 않으면 닥치는 대로 후려치고, 마침내 그 화가 폭발하게 되면 더 험악한 짓을 얼마든지 저지르게 된다. 바로 여기에 죄가 있는 것이다. 화가 성숙하게 되면 살인이 되는 것이다(Murder is anger full-grown).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도 있지않은가! 그래서 성경은 지혜자는 이렇게 말한다.

"(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서기관은 외적 행동을 강조하여 마음 속에 아무리 화를 품고 욕설을 퍼부어도 살인치만 않으면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이것은 참된 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외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인 것이다. 마음에 화를 끓이고 있으면서 욕하며 죽이고 싶은 생각을 지니고 있으면 하나님이 보실 때 이미 그는 죄인이며 "지옥 불에 들어갈" 만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은 단지 죄의 드러난 결과만을 보시지 않는다. 천국의 의는 "너희가 무엇을 행하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고 말한다(What you are is more than what you do).

천국의 의는 형제들에 대하여 마음 속에 악의를 전혀 품지말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사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우리에게 주셔야만 우리는 그 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천국의 의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성취되는 것이다. 천국에 장차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셔야만 한다.

다음으로, 순결의 법(the Law of Purity)이 있다.

"(마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서기관의 율법은 불법적인 성관계를 금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보다 더 높은 수준을 말씀하고 있다. 즉, 천국의 수준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율법에 간음은 분명히 죄다. 예수님은 마음에 육욕을 품는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마태 복음 5장 28절 앞에 감히 정직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아마도 이 말씀의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간음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제 간음죄 뿐만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목적, 중심 사상을 꿰뚫어 보고 계신다. 우리 존재의 깊은 곳을 살피고 계신다.

폴 레프(Paul Rep)의 저서 <선과 살과 뼈(Zer Flesh, Zen Bones)>에 이런 우화가 나온다. 선을 공부하는 두 중이 아름다운 여자를 만난다. 물이 많아 시내를 못 건너가고 있었다. 한 중이 성큼 그 여자를 안아 물을 건넜다. 다른 중이 비난했다. "수도승으로서 여자를 가까이 해서 되겠는가! 위험하네. 특히 저런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안다니."

상대 중이 말했다.

"나는 안았다가 곧 내려놓았지만 자네는 마음 속으로 저 여자를 안고 아직 안 내려놓고 있지 않은가?"

천국의 의, 성적 순결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계속하여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마5: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산상수훈의 요구하는 의를 이루고자 한다면 남아 있을 눈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설사 눈을 빼버렸다고 하여 근본적으로 의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간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질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죄는 마음에 머무는 것이지 눈에 있는 것이 아니다.같은 내용의 30절 말씀을 보자.

"(마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문제의 손을 찍어 버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문제는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문제의 근본 해결책을 찾아 필요하다면 어떤 댓가를 치루고서라도 그대로 행하라는 것이다.만약 문제 해결을 위해 눈을 빼고, 손을 찍어 버려서 될 것 같으면 그렇게 하라. 그래서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멸망당하지 말라는 것이다.

천국이 요구하는 이 높은 수준의 의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겠는가? 순결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천국의 능력,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생활이다. "삶의 영"이 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능히 천국의 의를 이룰 수 있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보자.

"(마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오늘날 결혼과 이혼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들 편리한대로(casual matters)이루어지고 있다.이같은 비성서적인 결혼 표준이 거의 전 문화에 파고 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혼에 대한 단 한 가지 근거만을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남편이든 아내이든 어느 한 편이 '음행한 연고 없이는' 결코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레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구약 시대에 간음죄는 사형이다. 그래서 신약은 간음한 자를 죽은 자로 간주하여 이혼하고 다시 결혼할 수가 있다고 말한다.그러나 다른 사람과 결혼할 목적으로 이혼하는 것은 분명 죄다.왜냐하면 그 경우는 음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정직의 법(the Law of Honesty)이 있다.

"(마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유대인들은 맹세에 사용되는 대상물이 어느 정도 거룩하느냐에 따라서만 맹세는 구속력을 지닐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기관 전통에 따르면 그 대상물이 별로 거룩치 못하면 그 맹세를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정직의 윤리를 모욕하는 처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아시고 위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신뢰받을 수 없을 만큼 꼭 맹세해야 한다면 그 사실 자체가 벌써 죄라는 것이다. 천국의 의를 아는 사람은 전혀 맹세할 필요가 없다. 그의 말 그대로가 진실되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나의 말 그대로 나의 맹세가 되게 하자' 말이나 마음, 그리고 글이나 약속들을 우리 이웃들이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도록 생활하자. 이것이 바로 정직의 법이다. 오늘날 불신 사회에서 천국의 의가 되는 정직의 법을 가정과 사회,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삶의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사랑의 법(the Law of Love)이 있다.

"(마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사악한 시대에 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사업이나 국제 정치 사회에 적용한다면 스스로 엄청난 파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주께서 살피시는 것은 인간의 마음 상태와 중심인 것이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마음의 의인 것이다.

영감받은 사도 바울은 법과 질서의 윤리를 주장하고 있다.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롬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롬13: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롬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롬13: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요한 복음 18장 19절-23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때 다른 쪽 뺨을 돌려대지 않고 오히려 23절과 같이 책망했다.

"(요18: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요18: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요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요18: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요18: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주께서 원하시는 바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지라도 전혀 복수할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에 대해 사랑에 동기된 마음을 지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을 원수에게까지 넓혀가라는 말씀이다.

"(마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원수에 대한 사랑이 기독교인이 거쳐야 할 최고의 시험이다.

그러나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는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란 뜻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부지수불여공여천(父之?弗與共戴天)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지수불반병(兄弟之?不反兵)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리>

교유지수부동국(交遊之?不同國)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된다>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든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은 무엇인가?

교회 안팎에서 자신에 대해 호의나 적의 등 어떤 태도를 취하든 항상 사랑의 동기를 지니고 상대방을 대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참 기독교인의 정신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천국의 의이다. 이 사랑은 단순히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실제 관심이다. 사랑은 관심 대상의 최고 번영을 구하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이 어떻게 역사(役事)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이처럼 실제 호의를 베풀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한 청년이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상대가 된 처녀는 아름답기는 해도 아주 표독스럽고 잔인한 취미가 있는 여자였다. 처녀는 청년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당신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은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어머니에게서 심장을 빼앗았다. 그는 심장을 가지고 자기가 사랑하는 처녀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다. 달려가다가 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심장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와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렇게 굴러가면서 어머니의 심장은 말했다.

"얘야,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

사랑의 다른 일면을 살펴보자.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여기서 보면 사랑은 정의와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한 '거룩한 진노'임을 알 수 있다. 그저 감상적인 호의를 베푸는 것은 참 사랑이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은 원수까지일지라도 그의 최고의 번영을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원수에게 구했던 축복이 저주로, 온유함이 폭력으로, 친절이 나쁜 것으로 원수에게 응답될 수 있다.복수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관심 속에서 그렇게 했을 경우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의이다.

이 사랑의 법의 최고 표현이 용서이다.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사랑으로 행할 때만이 진정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용서는 완전한 용서이다 인간의 본성은 그같은 용서가 어려운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God's Perfect Forgiveness)가 필요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다음 구절을 보자.

"(마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마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

"일흔번씩 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이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처럼 완전한 용서를 베풀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이 요구하는 용서의 내용을 계속해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마18: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18: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마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마18: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

여기 일만 달란트란 금액은 당시 종들이 평생 벌어서 갚아도,처자식을 다 팔아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돈인데 거저 탕감받았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런데 다음 구절을 보자.

"(마18: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18: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그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자기에게 겨우 하루 품삯밖에 되지 않는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기 동관을 용서치 않았다. 그러자

"(마18: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마18: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마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마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그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요한 결론의 말씀을 하셨다.

"(마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상의 비유에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용서가 형제에 대한 용서에 선행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형제를 용서했을 경우에 한해서만 하나님의 용서가 결정되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에 근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한다.

천국의 의는 완전한 순결성, 완전한 정직, 완전한 사랑, 완전한 용서 등이다. 누가 이런 수준의 의로운 생활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는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알 때만이 진정 천국이 요구하는 수준의 용서를 베풀 수 있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를 우리 생활 속에서 경험할 때 천국의 의는 가능한 것이다. 이 하나님 통치 경험의 시작이 중생이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할 때 중생의 기적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성령은 새 삶을 창조한다. 새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이 악한 세대에서 부분적이나마 확실한 천국의 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천국의 의는 천국 생명에 대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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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천국의 요구(要求)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상의 성구들을 살펴보면 미래 천국의 축복과 생명을 '지금 여기서' 누리게 된다는 것이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부활과 그의 신성(神性)을 믿고 입술로 시인하며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과연 그 모든 천국의 축복들을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천국의 요구"에서 찾아보자.

천국은 단 한 가지의 근본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즉, 결단에 대한 요구이다. 천국이 이미 가까이 왔고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역사 속에 오셨으며 심판의 영이 지금 역사(役事)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에게 단 한 가지 요구되는 것은 바로 결단이다. 불트만은 "예수께서 요구자(The Demander)로서 하나님의 가까움을 선포하셨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예수께서는 바로 회개를 요구하신 것이다. 회개의 근본 뜻은 '돌아오는 것',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 '삶의 방식을 아주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결단을 내려 천국을 영접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결단으로 이루어진다. 인생의 진로는 자신의 결단에 의해 결정된다.

도둑이 무디 선생의 전도강연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를 찾아와 자기 죄를 고백하였다.

"저는 이제부터 도둑질 해온 물건을 팔아 그것으로 장사하여 돈을 벌어 훔쳐온 주인들에게 모두 갚아 주겠습니다."

그러나 무디 선생은 이렇게 훈계하였다.

"다음에 벌어서 갚을 생각 말고 지금 있는 것으로 갚고 모자라는 것은 다음에 갚도록 하시오. 다음에 갚겠다고 했다가 만일 갚지 못하고 죽는 날에는 회개할 수 없게 될터이니 이제 곧 참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도둑은 모든 재산을 팔아서 주인들에게 돌려 주고 모자라는 것은 자기가 종이 되어 섬기겠다고 눈물로써 고백하였다. 이 때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어 장사를 하게하여 마침내 큰 사업가로 만들었다.

<고민과 황홀>이라는 소설을 쓴 어빙스턴은 "미켈란젤로가 다윗을 조각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거인 골리앗에게 도전한 씩씩하고 용감한 목자상을 성서의 기록에서 모형을 땄다."라고 했다. 미켈란젤로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언제 다윗이 거인이 되었는가? 골리앗을 죽인 다음엔가? 혹은 자기가 반드시 해보겠다고 결심한 순간인가?" 그가 결론을 내린 것은 다윗이 거인이 된 것은 살육이 아니라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의연한 결단은 가장 약한 인간을 거인으로 만든다. 사울이 바울된 것은 안디옥이나 로마에서가 아니라 다메섹에 가까운 사막의 모래 위에서 결단내렸던 순간이었다.

회개는 현세의 삶의 내용과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결단인 것이다.

영국의 시인인 토마스 무어(Thomas Moore)의 작품에 <낙원>이 있는데 그 내용을 각색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앞에 책벌을 받고 세상으로 쫓겨난 한 천사가 다시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가 풀어야 할 한 가지 과제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것을 찾는 것이었다. 세상의 시장 바닥과 골목들을 누비며 이것을 찾아 헤매다가 어느 따스한 봄날의 아침, 한 마을에 들어서게 되었다. 동네 입구에 세워진 지계표 위에서 한 아낙네가 칭얼대는 아이를 가슴에 품고 젖을 먹이고 있었다. 천사는 생각했다. "아가페 사랑의 그림자로 일컬어지는 모성애가 듬뿍 깃든 저 젖 한 방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 젖 한 방울을 얻어 낙원 문에 다달았으나 문지기에게 거절을 당했다.

낙심 속에 또 다시 방랑 길에 오른 그가 어느 무더운 여름 한낮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한 전쟁터를 지나게 되었다. 천사는 생각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초개같이 사르는 애국지사, 그가 흘린 마지막 피 한 방울이야말로 가장 존귀할게야!" 식어가는 피 한 방울을 조심스럽게 찍어 낙원 문에 도달했으나 대답은 "아니오!" 였다.

실망을 안고 또 한 번 여행길에 오른 그가 어느 겨울날 저녁 산등성이에 서 있는 조그만 시골 교회를 들르게 되었다. 주일도 수요일도 아닌 평일 저녁, 약한 불빛 사이로 새어 나오는 사람의 말소리가 있었다. 한 노인이 제단 앞에 엎드려 통한과 함께 회개의 눈물을 쏟고 있었다. 천사는 깨달았다.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어머니의 젖과 애국지사가 흘린 피는 이 세상에서 더 없이 귀한 것이지만 노인의 참회하는 눈물 한 방울이야말로 낙원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 참회하는 노인의 눈물 한 방울을 들고가 비로소 낙원으로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다.

스펄젼도 "메마른 눈으로 천국에 올 자는 아무도 없다"(No coming to Heaven with dry eyes)라고 갈파했듯이 한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는 데는 그리스도의 보혈(寶血)과 인간의 회개하는 눈물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찾으시는 것은 죄인의 상태를 용납해서가 아니라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며 회개 후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 보시기에 부지런히 찾고 또 찾으시는 것이다. 회개하는 영혼이 이 지상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회개하는 역사야말로 천국에서는 가장 귀한 것이다.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여기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회개하는 자들을 말한다. 오직 어린양의 피로 회개하는 자들만이 그 "성", 천국에 들어갈 권세를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70명의 제자들을 각처로 보내시면서 다음과 같이 분부하셨다.

"(눅10: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천국이 예수님의 전권대사인 제자들을 통해 그들 각 마을에 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제자들은 그저 평범한 갈릴리 어부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이었다. 그 동네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들을 영접하므로서 천국 자체를 받을 수도 있었고 아예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절하는 것은 두려운 것이었다.

"(눅10: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눅10: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눅10: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천국이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바는 인간 의지의 응답이다. 인간은 천국을 받아 들이고 그리고 그에 복종해야만 한다. 인간은 스스로 천국의 의를 이룰 수가 없다. 천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므로서 천국의 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 단 한 가지 요구는 바로 "회개하라, 돌아서라, 그리고 결단하라, 천국을 영접하라."는 것이다. 천국을 영접하므로 생명을 얻고 축복을 받고 영생을 누리게 된다.

먼저 예수께서는 단호한 결단(Resolute decision)을 요구하셨다.

"(눅9: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눅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집도 권세도 특권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따를 수 있겠는가?

"(눅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눅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여기서 보면, 천국은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이며 긴급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생명", "천국의 생명"을 확보하는 것이다.

"(눅9: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보면, 천국의 요구는 주저하거나 뒤돌아보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않는다. 천국은 단호하고, 돌이킬 수 없는, 그리고 명확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혹한을 피해 남쪽으로 떠나려고 준비하는 오리떼들은 늦은 가을 밤에 모든 준비를 갖추고 파티를 마련했다. 큰 농장에 모여 곡식을 잔뜩 주워 배불리 먹으며 내일부터 펼쳐질 고통의 장도를 위해 힘을 축적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출발의 순간이 왔다. 그러나 이 때 큰 오리 한 마리가 주저하며 말했다.

"이 곡식 알들은 참 먹기가 좋으니 나는 좀 더 남아 이것을 충분히 먹고 떠나기로 했어."

다른 동료들이 떠나고 난 뒤 맛있는 곡식을 마음껏 먹은 그 오리는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다가 며칠이 지났다. 오리는 매일 습관처럼 "내일 나는 남쪽을 향해 날아야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결행은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세찬 겨울 바람이 천지를 뒤덮고 더 이상 거기에 머무를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오리는 그제서야 비로소 날개를 펴고 농장 마당을 가로질러 날으려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리는 날 수가 없었다. 살이 너무 쪄서 하늘로 날아 오를 수가 없었다.

결단의 순간을 상실한 오리는 남쪽으로 향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것이다. 후회하는 오리에게 매서운 북풍만이 불어닥칠 뿐이었다.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다음으로, 천국은 극단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마11:12)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말씀에 대한 누가 복음의 해석을 보자.

"(눅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여기서 보면, 천국은 폭력과 힘이라는 용어("침입")로 표현될 정도로 극단적인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마가 복음에서도 볼 수 있다.

"(막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4) (없음) (막9: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6) (없 음) (막9: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눈을 빼고 손 발을 찍어버리는 것도 불사하라는 것이다. 육신의 일부를 잘라내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죄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빼어버려야 한다는, 다시 말하면 철저한 영적 수술이 필요하다는 단호한 의지를 종말적 심판과 연관지어 설명한 것이다. 만약 범죄한 원인을 그대로 두고 있으면 지옥의 길로 간다는 자명한 확언을 통해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며 자신이 저지른 범죄적 행동에 대해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함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판단 기준이 인간의 윤리적 노력이나 윤리적 행동이 아니라 신앙에 의한 철저한 회개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음 성구를 보자.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여기 검은 분명 폭력의 도구이다. 때로는 천국에 대한 결단이 물질이나 인간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고통과 아픔을 주는 검이 되어질 수도 있다.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자기 가족,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폭력'인 것이다.

다음, 천국은 값비싼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마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는 천국(생명, 영생, 구원)에 대한 상당히 깊은 관심과 열망을 지니고 있는 어느 부자 청년의 질문이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그 부자 청년의 중심을 보시고 중대한 결단에 방해가 되는 모든 소유물을 처분하고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부자 청년이 가지고 있는 부(富)를 문제삼은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있어 '장벽'을 제거하라는 뜻이다. 그 장벽이 돈, 명예, 가족, 지식 등 무엇이든지간에 천국의 요구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과감히 벗어던지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이 가난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거짓된 안전'에서 구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마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사람들은 부의 축적이 생명을 안전 보장하고 근심 걱정을 없애주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축적된 부를 잃을까 하는 염려만 더 할 뿐이다. 가난 그 자체가 덕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천국에 복종하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면 가난도 불사하라는 것이다. 부가 그러한 결단을 내리는데 있어 장애물이 된다면 그 부는 악한 것이다. 그 부자 청년은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했다. 천국은 정말 값비싼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부귀, 영화, 명예, 지위 등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통치에 부속되는 것으로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참된 축복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 성구를 보자.

"(골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천국을 위해 살았던 사도 바울은,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고 했다. 사도 바울은 천국을 경험하고 살았기 때문에 세상적인 지위나 소유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체득했다.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의 만족은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에 있지 않고 바로 주님께 있었다. 천국의 축복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같은 경험들을 반드시 해야 한다. 앞선 그 부자 청년의 삶은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되어있지 않았다. 그는 천국에 대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저 그의 삶은 소유한 돈으로 살 수 있었던 '먹고 마시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제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소유'였다. 그러나 만족이 없었고 또 만족을 몰랐다. 하나님께서 문제삼는 것은 부가 아니라 그 부에 대한 '사랑'이다.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사람의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맡기면,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천국(그의 나라)을 구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더하여지리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결단은 때때로 애정의 단절이라는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삶에 있어 가족간의 애정보다 우선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분명히 가족 관계를 혹독하게 단절시키기를 원하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한 거룩한 사랑으로 이룩한 부부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 관계가 천국의 요구에 장애가 될 경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인간 관계, 가족 관계가 깨어진다하더라도 천국의 요구가 가장 우선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 관계가, 가족 관계가 인간의 생명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또한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 청년들은 결혼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는 것이 자신들과 후손들을 위해 축복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후에 하나님이냐, 가족이냐를 선택해야하는 값비싼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경우가 있게 된다.

다시 천국은 사람의 목숨까지도 요구하신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여기에 결단의 궁극적인 댓가가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질병, 사업의 문제, 남편 아내의 문제, 자녀 문제 등 이런 것이 십자가인가? 이러한 것들은 십자가가 아니라 "짐"들이다. 때때로 짐은 벗어 던져 버릴 수 있으나 십자가는 짐이 아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다른 경우를 보자.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을 부인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자기의 것(my-self things)을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my-self)을 부인하라는 말이다. 자기의 것을 부인하는 것(self-denial)은 자기 중심적인 것이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denial of self)은 그리스도 중심인 것이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죽음 외에는 다른 뜻이 없다. 십자가는 사형의 도구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육체적인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천국의 요구에 순응하고자 하는 사람은 목숨을 바쳐 피흘릴 각오를 가지고 이 악한 시대에 살지 않으면 안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예수를 위해 죽을 준비됨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헌신, 일사각오의 헌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남김없는 철저한 복종을 뜻한다. 자신의 생명, 의지, 욕망, 꿈, 소망 등 모든 것을 주님께 두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내 안에 살아 통치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으로서 근본적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 관계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가 있다면 이제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나의 생명은 나의 모든 것과 더불어 모두 주님에게 속한 것이다. 내가 나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까지는 예수께서 나의 삶에 통치자가 될 수 없다. 나의 삶에는 오직 하나의 통치자 밖에 있을 수 없다. 즉, 자신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냐 이다.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수 있다.

버뱅크(Luther Burbank)란 식물학자는 가축용 선인장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16년간 그의 손가락에서 뽑아낸 선인장 가시는 무려 1,000,000개가 넘었다고 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울어야 하고,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산모는 열 달 전부터 준비해야 하듯"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태초부터 희생양을 잡아야 했다.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사자의 밀도는 20평방 킬로미터에 연간 평균 40마리의 초식동물을 잡아 먹는데, 이들은 보통 10마리 전후가 집단생활을 하므로 약 400마리의 먹이가 필요하다. 이들의 먹이인 얼룩말 10마리는 연평균 3.5마리의 새끼를 생산하므로 연간 400마리의 사자에 의한 소비를 보충키 위해서는 1,200마리의 얼룩말이 필요하며, 사고와 질병에 의한 죽음까지 포함한다면 1,500마리의 초식동물이 없으면 10마리의 사자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1마리의 얼룩말은 연간 10톤의 풀을 먹음으로 약 1헥타르 면적의 초원이 필요하다.

동식물을 막론하고 생존이나 보다 나은 삶의 유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희생이 있기 마련이다. 값비싼 삶은 값비싼 희생을 요구한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값비싼 삶은 영원한 삶이다. 영원한 죽음에 처한 인간을 영원한 삶으로 이끌기 위해 그래서 하나님은 값비싼 희생을 치루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결코 값싼 죽음이 아니었다. 값비싼 희생의 죽음이었다. 그것은 실로 <값없이 받는 값비싼 은혜요, 대가(代價)없이 받은 고가(高價)의 선물이었다.>

마지막으로, 천국은 영원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눅12: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눅12: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막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위의 말씀들은 천국의 요구에 대해 '지금' 내린 결단이 인간의 미래 운명을 결정하는 영원한 결단이 된다는 것이다. 은총의 하나님께서는 권능과 영광의 천국이 이 땅에 이르기 전에, 심판과 분리가 임하기 전에, 천국의 축복과 천국의 요구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우리 가운데 오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영광과 심판으로 임하시기 전에 천국의 생명과 축복들을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여기서' 영접하는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이 결단은 영원한 생명과 축복들을 '지금 여기서' 결단하는 영원한 결단이다. 천국이 이 세상에 도래했다. 내일의 생명이 오늘 지금 여기 우리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그리고 천국 복음을 영접하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 이것이 천국의 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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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천국, 이스라엘 그리고 교회

천국에 대한 성서적 교훈 가운데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이스라엘에게 천국을 제공했음은 분명하다.

"(마10: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계속해서 마태 복음 8장 12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비록 메시야와 천국을 거절했을지라도 그들은 "나라의 본 자손들(천국의 본 자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천국의 축복들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천국의 자손 즉, "나라의 본 자손들"이었다. 그래서 주께서 약속된 그들에게 먼저 선교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천국을 거절하므로 이 축복들은 천국을 영접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다음 성구에서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마11:12)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11: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유대인들은 회개하라는 세례 요한의 요구를 거절했으며, 예수를 통해 제공된 천국의 권능과 생명을 계속해서 거절했다.

"(마11: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마11:17)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러므로,

"(마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11:21)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11: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마11: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개별적 근거에서 천국의 축복을 받아들이도록 초청하신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기본적으로 한 가족과 민족으로 여기시고 영육간에 축복들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할례를 통해서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의 축복을 주셨다.

"(창17: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창17: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창17:24)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구세이었고 (창17:25)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십삼세이었더라 (창17:26) 당일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창17:27)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생장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이는 한 개인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지만 그것은 한 민족 단위로서 맺으신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그 민족의 일원이 됨으로서만 그 언약의 축복들을 같이 누릴 수 있었다. 예수께서 제공하신 천국은 정치적, 국가적, 물질적 축복의 왕국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들의 원수들을 멸망시키는 정치적 왕을 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의 면류관을 거절하시고 대신에 신령한 떡을 제공하셨다.

"(요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6: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6: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같은 사실을 마태 복음 3장 7절-10절에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마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새 시대의 영적 축복은 한 가족 단위보다 오히려 개별적으로 회개하고 영접하여 좋은 열매를 맺는 누구든지에게 부여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옛 언약의 본 자손들"이라도 개인적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이같은 내용을 마태 복음 10장 35절-36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제 더 이상 하나님과 인간과의 기본적인 관계를 가족 단위를 맺지 않는다. 가족 계보와 혈과 육의 밀접한 관계일지라도 때에 따라서는 단절할 수 있는 개인적인 믿음이 천국에 대한 근본적인 관계의 초석이 된다. 유대인은 대체로 이러한 새 관계를 거절했다. 그러나 극히 일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어 천국의 자손들이 되었다. 바로 이들이 교회를 탄생시키는 핵(核)을 이루게 된 것이다.

마태 복음 16장은 주님의 목적을 하나님의 새 백성의 형성 즉, 교회와 관련시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참으로 메시야(그리스도)로 깨닫기 까지는 이 하나님의 새 백성 즉, 교회를 통해 자신의 구속(救贖) 목적을 성취하리라는 말씀을 일체 하시지 않았다. 바로 이 사실이 아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수의 메시야(그리스도)되심을 고백하는 것은 동시에 현재 천국이 임재하고 있다는 고백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을 사람들 가운데 가져오는 것이 메시야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주님의 메시야됨을 인식하는데 문제가 있었고 아울러 천국의 임재를 인식하는데도 문제가 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같이 천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전혀 기대하지 않은 새로운 형태로 이 세상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그 주님의 사역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목적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광과 권능 가운데 초자연적인 존재로, 그리고 심판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비천하고 나약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비록 그가 오셔서 놀라운 역사를 행하셨을지라도 사람들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신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점에서 사람들은 예수를 정말 메시야로 생각했었다. 그것은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이다. 이 때 그들은 예수를 "(요6:15)....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의 사명은 세상의 임금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메시야됨과 마찬가지로 그의 사명은 "비밀"이었다.이 악한 세상을 끝장내고 천국을 가져오는 것이 그의 사명이 아니고 오히려 이 악한 세상 가운데 천국의 권능을 가져오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이 사명 가운데는 십자가의 죽음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했을 때 예수님은 그 자리를 떠나셨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전환점이었다. 이 후에 "(요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했다. 예수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그런 메시야가 아니었다.

"(요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사람들은 이 말씀과 더불어 51절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또한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에서 예언하신 '고난받으시는 예수(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단지 정복자로서의 왕이나 하늘의 인자(人子)를 기다렸지 '고난의 종'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등을 돌리고 제자되기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제자들 가운데 일부가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야(그리스도)이신 것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다.

"(마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러한 예수의 메시야됨을 깨닫게 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였다.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목적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새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여기 "반석"의 의미가 주의 메시야(그리스도)됨과 신성(하나님의 아들)을 고백한 베드로의 '믿음'이든(칼빈), 그리스도 자신의 몸이든(루터) 상관없다. 궁극적으로 결과는 동일한 것이다. 교회는 사실상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

"(엡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어쨌던 주님의 목적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헬라어의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중요한 단어가 있다. 이 말은 헬라어 구약 성서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된 단어로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 이 말이 예수의 메시야됨과 그가 제공한 천국을 거절했던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새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성취되어 역사적인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제 천국과 교회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예수께서 사도와 교회의 대표로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약속하셨다. 다시말해 미래 천국의 축복들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있는 열쇠를 주께서 세우신 교회의 사도들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천국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상에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복음 11장 52절에서 분명해진다.

"(눅11: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 지식의 열쇠가 유대인들 지도자들에게 위임되었었다. 이 열쇠는 구약 성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해석의 열쇠로 주님의 몸과 사역을 통한 천국의 임재와 구약 성서 언약의 성취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었다.

"(롬3: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그러나 서기관들이 이 지식의 열쇠를 가져갔으나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 그리스도를 잘못 해석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해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천국의 축복들을 거절했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 축복(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였다.

다른 경우를 보자. 예수께서는 이들 종교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마21:28)...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마21: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마21: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마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이 지식의 열쇠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위임되었었으나 이제는 주님에 의해 사도들과 교회에 위임되었다. 이 사실을 마태 복음 21장 33절-42절에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마21: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21: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마21: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마21: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마21: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마21: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마21: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마21: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마21: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새 백성'은 교회를 가리킨다.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에서 교회는 오순절 이후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새 백성'을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천국은 이제 더 이상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택하신 족속"에게 속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갈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기"때문이다.

"(계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은 이제 성육신 이후 한 민족 단위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족속 즉,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개인적인 믿음에 근거한 교회를 통해 역사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교회와 천국과의 관계가 명확하게 세워졌다. 천국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와 구속적 목적을 위해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서 세상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 교회는 천국의 생명을 영접하고 세상에 이 천국 복음 전파 사명에 헌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모임(Fellowship)이다.

"(행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행28: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행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오늘날 전 세계에 전파되는 천국 복음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은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받아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어졌다."(골1:13) 그러나 천국 복음을 거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누구든 그에게 천국의 문이 현재에도 닫혀 있을 뿐아니라 미래에도 닫혀 있게 된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의 열쇠를 교회에, 그의 제자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전파하는 천국 복음을 통해 하늘의 문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있게 되었다. 교회라는 말은 실제 의미에서 열쇠를 가지고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기능을 수행하는 주님의 제자들이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에서 교회는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천국의 역사(役事)인 것이다. 천국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구속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한다. 천국과 교회를 동일시한 극히 드문 신약 성구 하나를 보자.

"(계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계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이 성구는 24장로들의 새 노래로서 구속받은 자들과 천국을 동일하게 여기고 있다.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미래형)는 말씀을 봐서 구속받은 자들은 천국을 나타낸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교회 성도들이기 때문에 천국이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할 것이기 때문에 바로 천국인 것이다. 이 성구는 계시록 1장 6절에 비추어 해석되어져야 한다.

"(계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여기서 교회는 제사장인 동시에 나라이다. 구속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권리를 가진다. 그들은 '나라'요, '왕 같은 족속'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천국이 아니다. 천국은 교회를 창조하고 교회를 통해서 세상 가운데 역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천국을 세울 수가 없으나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선포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믿고 영접하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한다.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를 말할 때는 하나님의 단 한 백성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이는 로마서 11장의 감람나무 비유에서 아주 생생하게 나타난다. 감람나무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구약시대에 그 나무 가지는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불신앙 때문에 그 본래 가지 얼마는 꺾여져 더 이상 나무에 붙어 있지 못하게 되었다.

"(롬11: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롬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로마서 11장 5절을 보면 그 나무가지 모두가 꺾여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롬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유대인 얼마는 메시야와 천국 복음을 영접했었다. 기억해야 될 것은 초대 교회는 유대인 신자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그것은 그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교회가 된 것이었다.

"(롬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롬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이 말씀들은 천국 복음을 영접한 이방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들이다. 마태 복음 21장 43절의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은 바로 천국 복음을 영접한 이방인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본 가지가 꺾이는 것은 불신앙때문이고 돌감람나무 가지(이방인)는 믿었기 때문에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

"(롬11: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구약 성서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대다수 유대 민족이 꺾여지고 대부분 이방인으로 구성되리라는 것을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 교회의 혼합된 특성(신앙을 가진 유대인과 이방인)은 참으로 또 다른 비밀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구약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구속 목적의 또 다른 폭로였다.

"(엡3: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요컨대 나무는 참감람나무 하나인데, 불신앙의 가지는 꺾여지고 신앙의 가지는 그대로 붙어 있으며, 그 꺾여진 가지 자리에는 신앙의 돌감람나무로 접붙여졌다는 것이다. 이 현재의 참감람나무의 상태가 하나님의 마지막 역사는 아니다.

"(롬11: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롬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롬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마지막 형태는 그 나무 가지 대부분이 돌감람나무 즉, 이방인들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때가 되면 그 불신앙의 가지들이 신앙을 가지게 되어 접붙여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도 구약 예언자들이 몰랐던 또 다른 "비밀"로서 사도들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백성으로부터 이탈하여 천국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이방인의 수가 충만할 때가지 계속될 것이다.

"(고후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유대인들은 언젠가는 분명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백성으로 다시 세워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이스라엘(영적 이스라엘을 포함)은 구원받게 될 것이다.'

"(마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23: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마23: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여기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 예언의 말씀은 A.D.70년에 로마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시말해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깨닫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39절)라는 찬송을 하게 되는 그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최종적인 방문이 있을 것이다. 그 때 가서야 이스라엘은 구원받게 될 것이다.

천국도 하나이며 하나님의 백성도 하나이다. 그리고 교회도 하나이다.

"(엡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천국은 세상 가운데 교회를 통해 역사하며 악의 세력과 불가피한 싸움을 하고 있다. 교회는 이 악한 영에 대한 싸움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이 악한 세상이 계속되는 한 교회 생활에는 필연적으로 갈등의 소지가 항상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자손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복음 5:13-16)이기 때문에 인간 역사에 영향력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된다. 빛이 비추이는 한 밝아지는 것은 자명하며, 소금이 그 짠 맛으로 역할을 다하는 한 그 만큼 부패하지 않고 보존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교회의 사명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천국의 선물인 영생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들어가도록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나타나는 모든 형태의 악과 사탄의 세력을 대항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 기구인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모르게 되면 우리는 교회로서의 우리의 특성을 배반하는 것이 된다.

우리들은 천국과 사탄과의 사이에 갈등의 초점 대상이다. 이것은 필수적으로 영적 영역에서의 갈등이다. 그러나 이 사탄의 영적 세력과 하나님의 권능은 인간의 행위와의 관계 영역에서 스스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식의 빛과 여명의 그 날이 세상에 충만하기까지 드러난 어두움의 세력을 대항하여 싸워 승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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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천국은 언제 오는가?

마지막으로 교회와 천국에 대한 연구에 가장 중요한 성구(聖句)하나가 있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나님 통치로서의 천국은 사탄의 세력을 패배시키면서 이미 우리가 지금 여기서 그 축복들을 향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왔다. 천국이 세 단계로 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 역시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세 번째 단계인 최후의 승리는 사망과 사탄, 그리고 죄(지옥의 삼총사)가 궁극적으로 멸당당하는 천년통치 말에 일어날 것이며 그 후에 천국은 완전히 실현된다. 두 번째 승리는 사탄이 무저갱에 갇히게 되는 천년통치 초에 일어난다. 그러나 분명히 죄와 사망의 세력이 그 천년통치 기간에 걸쳐 계속될 것이다. 왜냐면 사망이 천년통치 말까지는 불못에 던져지지 않기 때문이다.

"(계20: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계20: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계20: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계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천국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통해 부분적이지만 임하고 있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천년통치 이전에 이 악한 시대에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통해 '지금 여기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의 권능을 '지금 여기서'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천국의 생명을 알게 되었고 그의 축복들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천국의 축복들을 '지금 여기서'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마냥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수동적으로 천국의 생명을 즐기고만 있어도 되는가?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앉아서 기다려서는 안된다.

그 이유가 본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구인 마태 복음 24:14에 기록되어 있다. 이 본문은 본장의 제목인 "천국은 언제 올 것인가?" 에 대한 해답을 던져 주고 있다. 성도들은 예수의 재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곧 다시 올 것인가? 아니면 늦을 것인가? 많은 예언서 주석가들은 종말의 임박함을 알리기 위해 이 시대에 나타난 예언의 여러 징조들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중 가장 명쾌한 것이다. 이 구절만큼 천국의 도래 시기에 대한 간단 명료한 구절은 없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셨을 때, 제자들의 "어느 때에 그런 일이 있겠으며....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것이다.

"(마24: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마24: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마24: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 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으로 이 시대가 끝이 날 것으로 기대했다. 천국은 '오는 시대'의 서막이다. 바로 여기에 제자들의 의문점이 생긴 것이다. "이 시대가 언제 종말을 고할까?" "주님은 언제 다시 오며 천국은 언제 시작될 것인가?"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의 질문에 상세하게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우선 이 시대가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셨다. 이 사악한 시대가 주의 재림시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다.

"(마2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마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마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마24: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마24: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마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마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이 시대는 복음과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 여전히 적대적이며 악이 우세할 것이다. 교활(狡猾)과 기만(欺瞞)의 세력이 사람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거짓 종교, 거짓 선지자들이 도처에서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며 기근과 지진이 일어날 것이다. 교회는 박해와 핍박으로 인해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이 시대가 계속되는 한 미움을 당하게 되며 사람들은 서로를 넘어뜨리며 넘겨 줄 것이다. 죄악이 관영하며 점차 사랑이 식어질 것이다. 이 시대는 한 마디로 '어둠'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의 지배 아래 있는 이 시대에 예상되어지는 것들이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나 이 어두움과 악으로부터 이 시대가 구제 불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를 어두움 가운데 버리시지 않으셨다. 신약시대의 유대 묵시록은 이 시대가 완전히 악의 지배하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사(人間事)에 실제적인 참여를 완전히 철회하셨고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가 영광 가운데 이루어지는 미래에만 얻을 수 있으며 현재는 단지 슬픔과 고통만을 증거 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일부 기독교인도 이와 유사한 염세주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사탄이 '이 시대의 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이 시대에 악과 패배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회는 철저히 배교당할 것이고 문화와 문명은 극도로 부패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시까지는 승산없는 전쟁을 치루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시대가 그 종말이 가까울수록 악이 성행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사탄은 여전히 이 시대의 신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사탄에게 완전히 포기하지않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실상 천국은 이 악한 시대에 침투해 들어왔다. 그래서 사탄은 패배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천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 이 세상 가운에 천국을 확장해 나가며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해 가고 있다. 우리는 두 시대, 즉 사탄이 지배하나 패배하기 시작하여 최후의 발악을 하는 '이 악한 시대'와 사탄을 패배시켜 이 시대에 천국을 확장해나가는 '오는 시대' 사이에 존재하여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복음의 능력을 통해 이 세상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본문에서 세 가지것을 찾을 수 있다. 즉 메시지, 선교, 동기 등이다. 메시지는 천국 복음, 천국에 대한 복된 소식(Good News)이다. 몇몇 성경교사들은 천국 복음은 구원의 복음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교회 시대 이후에 유대의 "남은 자들"에 의해 선포되어질 것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복음이다. 이 문제를 여기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천국 복음이 초대 교회 사도들에 의해 선포된 복음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이 본문과 마태 복음 28:19-20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 위임, the Great Commission>과의 밀접한 관계를 주목해야 한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세상 끝날"의 징조는 무엇이며 재림의 징조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두 구절은 모두 동일한 사명을 언급하고 있다. 즉 "세상 끝날까지" 세계를 복음화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은 결합할 수 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이미 이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시작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빌립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사마리아에 내려 가서 복음을 선포했다.

"(행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표준개역성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된 소식을 전했다."(he preached good news about the kingdom of God)

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했다."(Gospeling concerning the kingdom of God) 가 된다. 헬라어 신약성서에서 "복음"(gospel)이란 명사와 "복음을 전하다."(to gospel) 혹은 "복음을 선포하다."(to preach the gospel) 란 동사는 동일한 어근을 가지고 있다. 마태 복음 24:14은 "천국 복음", 사도행전 8:12은 "천국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각각 언급하고 있다. 이 천국 복음은 전 세계에 전파되어져야만 한다.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천국에 관한 복음을 선포했다. 즉 천국 복음을 선포했다. 이 두 구절을 통해 보면 "천국 복음"과 "천국에 관한 복음"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그는 먼저 유대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했다.

"(롬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항상 유대인을 우선해서 전했던 것이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행28: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바울이 로마에 가서 유대인들에게 전한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을 전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인류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최초로 전파했던 천국을 바울도 전했던 것이다.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그러나 그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예수 당시와 마찬가지였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의 메시지, 천국을 거절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 직면해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선포했다.

"(행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바울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해졌으나 그들이 거절하므로 이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여기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하나님의 구원"은 동일한 메시지임을 다음 구절에서 확실히 입증된다.

"(행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천국이 먼저 유대인들에게 선포되었으나 그들이 거절하므로 동일한 천국이 이제 이방인들에게 선포된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동일한 천국 복음이었다. 천국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는 3장에서 살펴보았지만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 성구에서 바울은 주님의 구속(救贖) 사역의 단계를 간단히 개괄하며,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통치의 승리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전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15: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서 그의 왕국을 통치하신다. 그리고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천년 왕국의 목적을 달성하기 까지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신다. 천년 왕국의 목적은 원수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사망의 폐지가 천국의 사명(mission)이다. 천국은 또한 다른 모든 원수들, 즉 죄와 사탄을 포함한 모든 원수들을 멸망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며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가 사탄이기 때문이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히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오직 사망과 죄, 그리고 사탄이 멸망되어질 때만이 구속받은 인류가 하나님 통치의 완전한 축복들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천국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정복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사망이 궁극적으로 불못에 던져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로서 미래에 속한 것이다.

"(계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사망을 패배시켰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사망의 폐배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딤후1:9).....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 내신지라."

"사망을 폐하시고"에서 "폐하다"(abolish)는 "없애다"는 뜻이 아니라 "패배시키다", "그 힘을 약화시키다", "부상을 입혀 활동하지 못하게 하다"는 뜻이다. 동일한 헬라어가 고린도 전서 15;24, 26에서 각각 사용되고 있다.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to be destroyed)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destroying)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러므로 사망의 멸망, 즉 사망의 패배, 혹은 폐지에는 두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망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이미 패배했다. 그리스도는 사망의 세력을 꺾어 놓은 것이다. 사망이 여전히 원수이지만 패배당한 원수이다. 우리는 미래의 승리가 이미 성취되고 있음을 확신한다. 우리가 선포해야 하는 것은 이 성취되고 있는 사망에 대한 승리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 대한 복된 소식이다. 인류에게 이 복음이 얼마나 필요한가! 가는 곳곳마다 무덤이 열리고 사망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는 분리, 분별이 있을 것이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는" 최후의 영원한 생이별로 말미암아 눈물 바다를 이루게 될 것이다.

"(마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하여 (마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24: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24:41)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멀지않아 모든 식탁과 의자가 비어있게 되고 모든 화롯가가 텅 비게 될 것이다. 사망은 위대한 평등주의자이다. 빈부와 유무명, 권세의 유무, 성공과 실패, 인종, 신조, 문화 등등 이 모든 것들은 모든 것을 베어 넘어 뜨리는 사망의 궁극적이며 불가항력적인 큰 낫 앞에 무의미한 것들이다. 장려한 무덤이 전설적인 타지마할이든, 거대한 피라밋이든, 거친 풀로 무성한 무명의 잊혀진 무덤이든, 좌표에도 없는 심연(深淵)의 바다이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망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천국 복음이 아니면 사망은 아주 강력한 정복자로서 우리는 그 앞에 전혀 무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불러도 대답없는 굳어버린 무덤에 대해 주먹을 불끈 쥐어본들 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the Good News)이 있다. 사망이 패배되었다는 것이다. 사망이란 정복자가 정복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의 권능 앞에서 사망은 무력한 것이다. 사망이 그리스도를 붙들 수없었던 것이다. 사망은 그리스도에 의해 패배되었다. 영생의 빛이 임하였다. 예루살렘의 빈 무덤이 그를 증거한다. 이것이 천국 복음이다.

천국의 적은 사탄이다.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그의 발아래에 둘 때까지 통치하신다. 이같은 승리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진다. 천년 통치 기간 중 사탄은 무저갱에 갇히게 될 것이다. 천년 통치말에 가서야 사탄은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이미 패배시켰다는 사실을 알았다. 천국의 승리는 단지 미래만이 아니다. 사탄을 패배시키는 위대한 초기 승리가 이미 일어났다. 그리스도께서는 혈과 육을 지니셨다. 즉 그는 성육신하셨다.

"(히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destroy) (히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없이 하시며(destroy)"라는 단어가 다음 성구에서 똑같이 쓰여지고 있다.

"(딤후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destroy)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 내신지라."

"(고전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destroy)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15: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destroy) 원수는 사망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무력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사탄의 권세도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사탄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며 우는 사자처럼 포효하고 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사탄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교묘하게 종교적 단체에서 빛으로 행세한다.

"(고후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나 사탄은 이미 패배된 적이다. 그의 권능, 그의 세력은 이미 파괴되었다. 그의 운명은 이제 결정적이다. 중대하고 결정적인 사실은 사탄은 이미 패배했고 우리는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심으로 사탄의 속박에서 사람들을 건져내셨다. 이로써 천국은 사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천국은 이제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며 치유하시는 복음의 빛으로 인도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인 것이다. 사탄은 패배하였고 우리는 귀신의 공포와 사탄의 악에서 해방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을 알게 되었다.

죄는 천국의 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처리하셨는가? 혹은 단지 영광스러운 천국이 도래할 때 주어지는 미래 구원만을 약속하셨는가? 우리는 사망과 마찬가지로 죄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모든 신문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 대해 풍부한 증거를 싣고 있다. 그러나 이미 사망과 사탄과 마찬가지로 죄도 패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제물로 드려 죄를 없애기 위해 이미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히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죄의 세력이 깨어졌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destroy)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여기 거듭해서 "멸하여(destroy)"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목적은 모든 원수를 "멸하시는(destroy)"데 있다. 이 죄를 멸하시는 역사(役事)는 참으로 미래이지만 역시 과거사이기도 한 것이다. 주의 재림시에 완수하실 것을 이미 그의 죽음과 부활로 시작하신 것이다. 사망이 이미 "폐하여졌다."

"(딤후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 내신지라."

사탄이 이미 패배하였다.

"(히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그리고 로마서 6:6의 "죄의 몸"이 이미 "멸하여졌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destroy)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리스도의 원수에 대한 승리와 원수의 패배가 세 번씩이나 거듭 사용되고 있다. 즉 사탄에 대한 승리, 사망에 대한 승리, 죄에 대한 승리 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속박되지 않는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죄의 종노릇하는 시절은 지나갔다. 죄가 세상에 관영하나 그의 세력은 이전과 같지가 않은 것이다. 인간이 죄 앞에 더 이상 무력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세력이 폐하여졌기 때문이다. 천국의 권능이 이 시대에 침투해왔다. 천국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죄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될 수가 있다.

천국 복음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앞으로 행하실 일에 대한 선포이다. 천국 복음은 그의 원수들에 대한 승리이다. 천국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수들을 멸하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복된 소식이다. 천국 복음은 희망의 복음이다. 천국 복음은 또한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에 대한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사망의 권세를 멸하였으며, 사탄을 패배시켰으며, 죄의 지배를 타도하셨다. 천국 복음은 약속만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이며, 약속은 그 경험에 근거한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그가 행하실 일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할 복음인 것이다.

마태 복음 24:14 본문의 두 번째 장면에서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사명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천국 복음, 하나님의 원수들에 대한 그리스도 승리의 복음은 모든 민족들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전 세계에 전파되어져야만 한다. 이 구절은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확인하는 하나님 말씀 중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역사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은 사려깊은 사람들의 마음을 혼동케하는 문제이다.

우리 시대가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가공할 잠재적 파멸에 직면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한 위협적인 대파멸에 직면하여 인간은 전에 결코 물어본 적이 없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역사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왜 지구상에 존재하는가? 인간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류를 어떤 목적에 이르게 하는 한 가닥의 의미나 목적, 운명이 있는가? 혹은 은유법을 말하자면, 우리는 역사 무대에서 꿈틀거리다가 무대에서 무대와 더불어 파멸되어 한 줌의 재와 연기만을 남기고 사라지고 마는 일련의 꼭두각시들에 불과하지는 않은가? 이것이 인류 역사의 운명인가?

전 시대에는 진보 철학이 광범위하게 수용되었었다. 몇몇 사상가들은 미개한 원시로부터 시작하여 고도의 문화와 문명으로 점진적이고 꾸준히 상향되어가는 일직선으로 역사의 의미를 묘사했다. 진보 철학은 인류의 특성상 언젠가 모는 악과 전쟁, 빈곤 그리고 갈등에서 아주 벗어난 완전한 사회를 이룰 때까지 인류는 진보되어질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 견해는 역사의 모루(철침,鐵砧)에 의해 파쇄되었다. 작금의 사태들은 이 필연적인 진보 개념을 견딜 수 없는 비실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또 다른 견해로는 역사를 커다란 나선형과 같이 일련의 순환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있다. 나선의 낮은 지점에서 높은 지점으로 진행하는 데는 상하의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각각의 상승은 약간의 상승에 불과하며 각각의 하락도 앞서의 하락보다 낮지는 않다. 상하의 동작이 반복될지라도 전체로 봐서는 상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주의의 수정론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극도의 염세주의가 있다. 이 견해는 역사의 의미를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술취한 한 마리의 파리가 다리에 잉크를 적시고 백지 위에서 비틀거리면서 그려지는 그림과 같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역사는 그 방향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신약 신학자 중의 하나인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역사의 종말과 목표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역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한 것이다."(역사와 종말론, p.120)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대부분의 지성들이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맑스주의 계통의 경제적 결정론은 유물론에 근거한 역사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 철학 자체로 어떤 운명을 고집스럽게 약속할 뿐이다. 스펭글러(Spengler)는 진보는 불가능한 것이며 역사는 불가피하게 기울어지고 퇴보하게 되어있다고 믿었다. 토인비는 문명사에서 역사 의미의 패턴과 주기를 찾고자 하는 방대한 저술을 펴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니버, 러스트, 그리고 파이퍼같은 학자들은 성서적 계시에서 역사 의미의 단서를 찾는 학문적인 연구서들을 저술했다. 이것은 참으로 심오한 문제이며, 우리는 문제의 복잡성을 한 손으로 털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는 영감받은 성서에서 기록되고 해석되어지는 하나님의 행위에서 찾아야 한다고 저자는 확신한다. 여기 기독교 신앙은 말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역사의 의미에 대한 어떤 단서를 찾지 못하고 당황케되는 경험의 미궁에 빠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행하심이 없다면, 시대의 밀물과 썰물 조류가 목적없이 영원의 모래틈을 앞뒤로 씻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기본적인 사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구속사적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 행위는 신이 정하신 목표로 역사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키를 장악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염세주의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역사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 분의 말씀 안에서 자신의 목적을 계시하신다고 믿는다. 그 목적은 무엇인가? 역사 목적의 개요를 어디서 추적할 수 있는가?

근동 지역을 두루 여행하다보면 한 때 창궐했던 문명을 묵묵히 말하고 있는 폐허더미들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거대한 기둥들이 여전히 하늘로 치솟아 있고, 그 밖의 어느 곳에서든지 거대한 흙무덤만이, 메마른 황야에 죽은 문명의 축적된 잔해들만이 흔적을 남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스핑크스와 가자의 피라밋, 페르세폴리스(페르시아 수도의 유적)의 석주들, 데베의 탑들, 이와같은 것들이 여전히 과거 이집트와 페르시아의 영광을 풍부히 입증하고 있다. 그리스 아덴의 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가보거나 로마의 재판소(Forum) 자리를 밟아보면 어느 점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1세기 문명의 그 웅장하고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 그것들은 폐허, 쓰러진 석주들, 엎드러진 상(像)들, 죽은 문명들에 불과하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나라는 흥망성쇠하는가? 거기에 어떤 목적이 있는가? 혹은 이 지구가 언젠가는 죽은 별, 달과 같이 생명이 없는 별이 되고 말것인가?

성경에 그 해답이 있다. 성경 전체의 중심 주제는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속적 역사(役事)이다. 오래전에 하나님께서는 한 작고 형편없는 민족,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한 보잘것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것은 이들을 통해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이집트, 아시리아, 칼데아 그리고 다른 고대 근동의 국가들의 의미는 이 작은 민족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해 여타 국가들의 통치자들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 민족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보호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계획을 가지시고 역사 가운데 이를 수행해나가셨다. 우리는 이를 구속사라고 말한다. 모든 고대 문학들 가운데 오직 성경만이 역사 철학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의 구속 철학이다. "때가 차매"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유대인인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행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 목적 가운데 초기 목적은 달성되었다. 그 때에 이르러서야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의 의미를 아는 단서로서 이스라엘을 한 국가로 동일시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로 구속사역을 완수했을 때,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은 복음을 거절한 이스라엘로부터 교회---복음을 받아들인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친교--로 옮겨졌다. 이것은 이스라엘 나라에 설교된 마태 복음 21:43의 주의 말씀에 의해 입증되었다.

"(마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교회가 "(벧전2:9)...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구속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 교회의 당면한 사명이다.

주의 승천과 영광스러운 주의 재림 사이의 역사의 궁극적 의미는 세상에서 복음의 확장과 사역에서 발견된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주께서 이 땅에 계셨던 이래 1900년 동안 하나님의 목적은 천국 복음의 역사에서 발견된다. 역사 의미의 실타래는 교회의 선교 프로그램으로 엮어졌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인류 역사의 의미를 해석하는 한 책을 찾기 위해 하늘 문서 기록을 보게 된다면, "서양사"라든가 "문명사"라든가 "대영제국의 영광"이라든가 "미국의 성장과 확장" 등을 서술한 책은 볼 수 없을 것이다. 하늘 문서 기록에는 <민족 가운데 복음의 준비와 확장>이라는 제목이 주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구속 목적만이 진척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구속받은 죄인들에게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사명을 위임하셨다. 하나님은 왜 이런 방법으로 그 목적을 수행하시는가? 그 분의 목적 수행이 실패할 커다란 위험이 있지 않은가? 1900년이 지나 지금 그 목표는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왜 하나님은 스스로 그 일을 행하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단번에 그 일을 완수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천사의 무리들을 보내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그 일을 우리에게 위임하셨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는 것을 제외하고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지 않는다면 이루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두려운 사실이다. 기독교회가 오늘날 가끔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 2,3세기 전에 교회 목사는 사회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고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이같은 문화적인 상황 때문에 교회가 서구 사회생활 구조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때가 있었다. 그같은 시대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우리는 세상이 교회를 한 구석으로 밀어제치며 우리를 못본체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종종 가진다. 교회는 세상에서 크게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유엔이 세계 문제 해결을 위해 교회를 불러들이지 않는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도를 위해 교회의 지도자들을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 과학, 산업, 노동, 교육 등 이것들은 지혜와 지도력이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집단들이다. 교회는 무시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실제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는 영향력의 가장자리에 있다. 우리는 중앙에 당당히 서있는 대신에 주변으로 밀려난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연민에 빠져 세상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방어적 태도에 떨어져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시키려고 시도한다. 참으로 우리의 주된 관심은 자위적 본능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의 역할과 우리의 중요성을 해석하는데 있어 패배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본문 구절을 우리 마음에서 불태워보자. 하나님은 이것을 어떤 다른 사람들의 집단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은 당신이 기뻐한다면 모든 족속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교회를 통하여 전파되어져야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것이 현대 문명과 인류 역사의 운명의 궁극적인 의미를 위해서 당신과 내가 유엔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크레믈린이나 워싱톤의 결정보다 궁극적으로 훨씬 더 중요성을 지녔다.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교회의 선교는 군대의 행진이나 세계 수도의 행위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어지는 것은 이 선교의 성취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러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교인 것이다.

이제 이 열등의식을 다루어보자. 우리의 하찮음에 대한 자기 연민과 탄식하는 태도를 영원히 던져 버리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어떤 존재인가를 인식하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된 계획가운데 있도록 하자. 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은 모든 족속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 그제서야 끝이 오게 될 것이다. 나는 기쁘다, 참으로 자랑스럽다. 교회의 한 일원이 된 것이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의 제도의 일보다 더 가장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 우리에게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삶에 영원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의미와 운명은 내 손안에 달려 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강력한 동기를 포함하고 있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본 장의 주제는 '천국은 언제 오는가?' 이다. 나는 어떤 날자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종말이 언제 오는 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이것뿐이다. 즉 교회가 세계 복음화의 과업을 완수할 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는 이렇다. 왜 그리스도께서 서기 500년에 오시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교회가 세계를 복음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리스도께서 서기 1000년에 오시지 않았는가? 교회가 세계 복음화 과업을 완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곧 오십니까? 만약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복종한다면 그분은 곧 오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진지한 현실적인 말인가! 몇몇 사람들은 주저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믿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책임을 인간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믿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과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 완수할 것을 위임하였다. 우리는 지난 어느 세대보다도 이 선교의 완성에 보다 더 가까이에 있다. 우리는 과거 사도 시대이래 모든 세대에 비해 세계 복음화의 절반을 이 마지막 세대에 행했다. 현대 과학은 인쇄, 자동차, 항공기, 라디오, 그리고 수많은 세계 복음화의 과업을 촉진시키는 도구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전에 알려지지않은 언어까지도 문자화되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적어도 1,100개이상의 언어나 방언으로 번역되어졌고 그 숫자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 도전적인 사실이 있다. 만약 영어권의 성도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정말 진지하게 도전한다면, 우리 시대에 세계 복음화의 과업을 완수하여 주의 재림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지역이 복음에 대해 개방적이 아니다. 우리는 중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인도에 들어가는 문이 닫혀지고 있다. 만약 주의 재림이 교회에 의한 세계 복음화를 기다려야 한다면, 우리 시대에 주의 재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많은 지역들이 오늘날 복음에 대해 문을 닫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그 과업을 완수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간과(看過)한 것으로 잘못된 것이다. 많은 문들이 한 순간에 닫힌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룻밤 사이에 그 닫힌 문들을 열 수도 있고 그 닫힌 문들 배후에서 역사하실 수도 있다. 에티오피아를 기억하라! 나의 관심은 닫힌 문들이 아니다. 나의 관심은 들어가지 아니한 열린 문들이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교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하여 정말 신실하게 행한다면 하나님은 그 문들이 반드시 열려지도록 조치하실 것이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가 아직 들어가고 있지 아니한 넓게 열리진 많은 문들이다. 우리는 불순종의 사람이다. 우리는 세계 복음화의 정의에 대해 논쟁하며 종말론에 대하여 세세히 토론하는 반면에 세계를 복음화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은 소흘히 하고 있다.

그밖에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선교가 완수되어지는 때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과업의 성취에 우리가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가? 어느 나라들이 복음화되었으며, 어느 나라가 아직 복음화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종말에 얼마나 가까이서 살고 있는가? 이것이 날자 설정으로 가는 것은 아닌가? 한마디로 나는 모른다. 하나님만이 그 용어들(세계 복음화, 종말 등)에 대한 정의를 아신다. 나는 "모든 족속들에게" 라는 말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단지 하나님만이 "증거되기 위하여"(세계 복음화)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아신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만이 그 목적이 성취되어질 때를 아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알 필요가 없다. 나는 단지 한가지 사실만을 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다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과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과업이 성취되어질 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그 과업을 성취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이 성취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다. 바삐 가서 우리의 선교를 완수하자.

우리의 책임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변화시키도록 요구받지 않았다. 이 구절의 기사가 말하는 바결론은 종말의 때 까지 많은 전쟁과 분쟁, 그리고 박해와 순교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 기쁘다. 이 말씀들이야말로 안정감과 건전함을 주어 나로 하여금 비실재적인 낙천주의에 빠지지 않게 한다. 우리는 악한 시대가 임할 때 실망해서는 않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가져가야 할 권능있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천국 복음이다. 이 시대를 시종일관하여 두 세력이 역사하고 있다. 즉 악의 세력과 천국 복음의 권능이다. 세계는 두 세력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 악한 자의 세력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천국 복음은 사탄의 왕국을 공격하고 있다. 이 투쟁이 시대말까지 지속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는 단지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서만이 성취될 것이다. 무조건적인 낙천주의를 취할 여지는 없다. 주님의 감람산 산상수훈은 종말의 때까지 악이 이 시대를 특징지울 것을 가르치고 있다. 거짓 선지자와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불법과 악이 성행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시련에 대한 인내이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마찬가지로 환난에 인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실상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환난과 박해에 대해 끝까지 목숨을 걸고 견디는 자만이 멸망치않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눅21: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눅21:17)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눅21: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교회는 그의 본질적 특성상 항상 순교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우리가 모든 세상에 복음을 전하게 될 때 무조건적인 성공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반대와 저항, 심지어는 박해와 순교까지라도 대비해야만 한다. 이 시대는 여전히 악하고 천국 복음에 대해 적대적이다. 그러나 단조로운 염세주주의를 취할 필요는 없다. 몇몇 예언서 연구에서 우리는 시대말, 마지막 시대는 전체적인 악(total evil)으로 특징지워질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때때로 마지막 시대의 위험한 특성을 심하게 강조하기도 한다.

"(딤후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우리가 말하는 가시적인 교회는 악의 교리에 의해 완전히 변질되어질 것이다. 배교가 교회를 휩쓸게 되어 오직 극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시대가 마감하는 때가 이르면 전체 고백 교회는 영원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메시꺼울 정도로 무관심한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될 것이다. 그러한 마지막 시대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은 패배와 좌절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악이 여전히 지배할 것이다. 종종 이 마지막 시대의 악의 특성들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분명히, 고의적이 아니지만) 세상이 빨리 부패하면 할수록 더 빨리 주께서 재림하여 좋아질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성서가 마지막 때의 악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이미 이것을 강조해왔다. 이 시대를 특징지우는 악은 천국에 대해 반대하며 증오하는 가운데 두려울정도로 증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염세주의에 빠져 이 시대와 세상을 악과 사탄에게 포기해야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천국 복음은 전 세계에 걸쳐 선포되어질 것이다. 천국이 이 악한 시대에 침투해왔다. 오는 시대의 권능이 이 시대를 공격하고 있다. 마지막 시대는 참으로 악한 시대일 것이다. 그러나 "(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에 구원의 복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다. "(행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시기 위해 말세에 성령을 부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보았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명령은 가서 전하라(선교)는 것이다.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그 때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행했던 다락방에서 모여 전전긍긍하며 두려워 떨고 있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여 목적을 달성한 유대인들이 이제 자기들을 잡아 죽이려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의 한 가운데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요20:21)....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고 하셨다.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그 사명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죽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것이다.

"(요20:22)....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 모습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그들을 새롭게 사명으로 창조하시는 것은 아주 유사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음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피조된 만물에 대한 책임(cultural mandate)을 가졌다면,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제자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책임(선교)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복음 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력과 권능이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들(제자들)은 인간적인 지혜나 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증거되는 복음이 생명의 역사(役事)를 일으키는 것이다.

"(겔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37: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겔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겔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겔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겔37: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겔37: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겔37: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겔37: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여기 6,9절의 "생기"와 14절의 "내 신(神)"은 바로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골짜기의 가득한 "마른 뼈들"(dry bones)에게 "생기", 즉 성령이 들어감으로 "이 뼈 저 뼈가 맞아서 서로 연락하고, 힘줄이 생기며,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덮혀 살아났다." 이 "마른 뼈들"(dry bones)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10,11절) 나라 민족을 살리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인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성령은 죽은 것을 살리시는 생명의 영이시다.

"(고전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예수)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복음 증거의 사명을 지닌 교회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위에 임하실 때 그 사명을 위해 능력으로 덧입히울 것이며 재창조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선교이다.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의 각각 끝나는 부분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 한결같이 선교 명령을 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눅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어주신 성령은 선교의 거룩한 주체(主體)인 것이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선교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은 오직 성령인 것이다. 선교의 역사(役事)는 인간의 역사(役事)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진리의 성령의 역사인 것이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강한 선교의 힘은 항상 "(고전2:4)....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은 선교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부활을 체험한 교회는, 부활 신앙을 가진 교회는 선교를 사명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임하여서 증거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마지막 시대는 악할 것이나 구제불능은 아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를 위한 복음을 주셨다. 그리고 그는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다.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것이 이 악한 시대에 우리 선교의 영(靈)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복음이 세상을 정복하고 천국을 건설하는 것을 기대하는 장미빛 낙천주의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과업이 이 악한 시대에 직면해서 가망이 없다고 느끼는 절망적인 염세주의자들도 아니다. 우리는 현실주의자들, 성서적 현실주의자들이다. 우리는 악의 가공할 세력을 인정하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위대한 승리를 성취하는 영광가운데 재림하실 때까지 천국의 승리 쟁취를 위하여 세계 복음화의 선교를 펴나가고 있는 현실주의자들이다.

여기에 우리 선교의 동기가 있다. 최후의 승리가 우리의 과업완수를 기다리고 있다.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다른 구절이 없다. 언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가? 언제 교회는 그의 과업을 완수하는가? 이 시대는 언제 끝이 되는가? 세상은 언제 복음화되는가? "(마24:3)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 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 때는 언제인가? 그 때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선교 임무를 완수할 때이다.

당신은 정말 주의 나타나심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세계 복음화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바는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않될 선교의 대위임(大委任)(마 28:18-20)에 대한 우리의 사명이다.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천국의 복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으로부터 권세를 빼앗았다. 천국이 사탄의 나라를 공격했다. 이 악한 시대가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오는 시대에 의해 공격당했다. 모든 권세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권세를 다시 오실 때까지 최후의 영광스런 승리가운데 나타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 권세는 지금 그리스도의 것이다. 사탄은 지금 패배하고 있다. 사망은 정복되어지고 있다. 죄는 파괴되고 있다. 모든 권세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 무슨 이유로? 모든 권세, 모든 권능이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우리의 과업을 완수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을 통치하시며, 교회를 통해, 교회 안에서 땅을 통치하시고 있다. 우리가 선교의 과업을 완수했을 때, 그리스도는 다시 오셔서 영광가운데 천국을 건설하실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벧후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할 뿐만 아니라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 복음 선교이며 우리의 사명이다.

출처 : 설교와 예화 모음
글쓴이 : 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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