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는 복이 있나니
브레넌 메닝
들어가는 말
‘백악관 초대장 하나가 신기하게도 비판 능력을 무디게 한다’(라인홀드 니버)는 말이 있다. 저자는 ‘예수의 작은 형제들’과 2년을 살았던 시간을 이 책의 주제모델로 하였다.
오늘날 혼란과 삼류연극과 변절로 점철된 시대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더 뛰어난 언변이 아니라 개인의 소생, 복음에 대한 정절, 창의적 행위이다. ‘이제 입으로 말할 때는 끝났다.’(추기경 에밀 레거)
1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1장. 우리 삶의 진실
복음서의 예수님의 성전청결 사건은 그분의 온유와 겸손의 이미지와 다르다. 더욱이 진실을 향한 예수님의 단호한 열정이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돈과 권력과 쾌락이 중요한 세상에서 진실의 몸은 숱한 생채기로 피 흘린다. 합리화와 착각들이 진실의 자리를 대체한다. ‘전체 구성에 꼭 필요하며 세련되게 처리되었다.’ ‘이래야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값싸게 팔아 넘긴다.
진실추구의 삶의 첫걸음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자기 기만은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최고의 적이다. 자기 기만은 진실하신 성령 안에서 자라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은폐해주고 우리의 참 성품과 화해하지 못하게 한다.
맥스는 결혼하여 5 자녀를 두었고, 부자에다, 자기 기업을 경영하는 붙임성도 있다. 침착성까지 타고난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다. 알콜중독에 대해, 자녀를 장애자로 만든 것에 대해 실토하게 함으로 엄한 재활은 시작되었다. ‘이봐요 고주망태, 저기 정문이 있고 저기 창문이 있소. 아무 쪽으로나 쵀대한 빨리 나가시오. 나는 거짓말쟁이들의 호텔이나 운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자신이 술 앞에 무기력하며 자기 삶이 통제 불능의 지경에 이르렀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한. 효과적인 회복은 결코 시작될 수 없다. 이는 오랜 경험에서 나온 소신이다. 자기 상황의 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대안은 언제나 모종의 자기 기만이다.’ 터무니 없는 자기 기만의 탈부터 벗겨 내야만 한다. 이것은 동료들과의 냉혹하고 고통스러운 상호작용을 통해 적을 파악해 내야만 한다. ‘방금 내가 난생 처음 기도를 했습니다.’ 재활을 마친 맥스의 고백이었다.
어거스틴이 자서전을 통해 ‘진리에의 추구와 심령의 회심간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 것처럼 알코올 중독이라는 자신의 실체를 직시하기까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리로 만날 수 없었다. 성경에서 진리의 반대는 거짓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다.(요8:44) 마귀는 미혹의 대가다.(요일1:8) 그는 우리를 부추겨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한다. 알맹이 아닌 것에 광택을 입힌다. 환상과 비현실과 망령의 세계에 살게 만든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거짓말과 자기기만과 부정직을 능히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하게 하시며 영원한 실체를 맛보도록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은 거짓말이 당연시되고 믿음은 장식품이다.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힘있는 사람, 최고의 조건을 과시하는 사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사람이다. 모두가 가난하고 깨어진 심령이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는 실세가 되기 원한다.
순간의 기분파들이며 최고의 도덕원칙은 성공한 이미지를 풍기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변덕쟁이 그리스도인 투성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똑똑함이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1)잃어버린 경이
저자는 사라고사 사막의 고독한 동굴 속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알게 되고 경이외 사랑과 찬양에 파묻힌 어린아이로 돌아왔다. 우리는 경이와 외경을 모르는 야박한 존재가 되었다. 균형상실의 증거다.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고백이 경이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탐색하는 상황에서는 무기력에 빠질 정도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는 사랑이시다. 여전히 율법적 요구 자체가 100m를 5초에 주파하라고 요구당한 선수처럼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우리의 모범으로 제시하신다. 참된 경건은 상호조건과 교환 훨씬 그 이상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전심의 반응을 요구한다.(마5:29-30) 가족의 인연까지도 완전히 버려야 한다.(눅14:25-26)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갑옷을 입히신다.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썩어질 행위로도 하나님의 창조의 숨결을 들이마신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우리의 결론을 주님은 반박하신다. 복음이 말하는 거룩함의 기준 또한 불평에 가까운 혼란과 외경이다. 우리는 무난한 삶에 만족한다. 예수님의 계시를 진지하게 대하다가는 바깥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없기 때문이다.
교회 자체가 비전을 품고 명쾌하게 복음을 전할 수 없을만큼 확신과 소신을 잃었다. 그리스도는 거창한 아이디어만 많은 공상적 개혁가일 뿐이다. 복음의 윤리는 삶을 어지럽히고 문제를 일으킨다. 그대로 살기는 어렵다. 복음을 도덕 교육의 구심점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나 거룩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소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의 극단적 요구들이 뜻하는 근본 의미를 이해하는 동시에 우리로서는 절대 그것을 다 지킬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배신한 친구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며 다가오셨다. 이는 용서이상이다. 복음의 요구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절실히 느낀다. 그것이 영성의 독소인 교만과 자기만족과 내 힘으로 된다는 태도에서 보호해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깨워 자신의 필요를 보게 한다. 자신의 죄인이며 긍휼이 필요하다는 깊은 의식과 초라하고 연약한 죄인이라는 진리를 맛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구속의 신비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의존을 경험할 수 있다.
예수님의 극단적인 요구들은 우리의 결점을 날마다 상기시킨다.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임을 깨닫게 한다.(벧전2:9-10)
2)축복
산상수훈의 팔복의 첫째가 메시아 시대가 역사 속에 뚫고 들어왔다는 기쁜소식이다. 기다리던 구원의 날이 마침내 도래했다.‘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니나 천국이 저희것임이요’(마5:3)
가난한자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돌아온 탕자이다. 그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구원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잇는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당시 유대사회는 어린아이를 하찮은 존재로 보았다. 어린아이같이라는 뜻은 시시하고 하찮은 존재로 자신을 본다는 의미이다. 주님의 자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분에 넘치는 은혜에서 흘러나온다. 하나님의 복이 그들에게 임하는 것은 그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에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다.’예수님은 우리의 행위에 보상이 따라야 한다는 율법적 개념을 철저히 배격하신다. 자신의 부족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에 선뜻 마음을 여는 사람은 복이 있다.
‘내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그것만으로도 나는 모든 것이 변했다. 그것이 은혜이다.’(폴 틸리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순간부터 나는 오직 그분만을 위해서 사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다. 내 성직의 소명은 내 믿음과 같은 시각에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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