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1-8)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 시간에 우리 함께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계적인 부흥사 무디가 임종할 때 그는 감격에 찬 음성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영광이로다. 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임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 그러면서 그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여러분, 내일 아침 조간신문에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가 났다 할지라도 믿지 마십시오! 무디는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앞에서 이렇게 하늘로 올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무디는 환희와 확신에 찬 모습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얼마나 부러운 모습입니까? 우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날도 그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어떤 날일까요? 말세에 신앙생활하기 좋을까요? 나쁠까요?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부정적입니다.
눅17:28-29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했습니다.
말세에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어떻게 그렇게들 바쁘고 죄악이 발달하여 죄를 죄로 여겨지지 않고 보편화되고 성도들마저 세속에 물들어 신앙생활 등한히 하고 세속에 빠져 보통 각오로는 참된 신앙생활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그것입니다. 주님의 교훈 중에 충격적인 말씀이 8절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말세에 살 방법은 믿음밖엔 없는데, 그 믿음마저 세상에서 보기조차 어렵다 하시니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그런데 감사한 것은 보기 어렵다 했지 없다 하시지 않았고, 또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살아갈 답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말세에 원수에 대한 원한 맺힌 과부와 같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그런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한 맺힌 믿음입니다. 한을 품듯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럼 한을 품듯 신앙생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그렇지 않고는 말세에 믿음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타락한데다 우리 속에 죄의 원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롬7:20-24에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속의 죄악의 원수입니다. 이 죄악의 원수를 처리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할 수 없고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부도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내가 주인 되고 나를 넘어뜨리고 시험 들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내 속의 죄를 놔두고 어떻게 예수님을 섬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몰아내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데 문제는 믿는 법을 모르거나 알아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5:6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여기에 귀한 의미가 있어요. 그런 갈급한 마음으로 의를 사모하지 않으면 의가 내 것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의 의일지라도 믿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못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을 품듯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믿음이 문제에요. 초대교인들의 믿음이 위대한 것이 그것입니다. 교리적 차이는 없고 다만 신앙에 목숨 걸었느냐 그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원수를 물리쳐 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한 맺히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복음을 믿음으로 적용하여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2. 한을 품지 않으면 말세에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사명에 대한 한이 많은 사람입니다. 특히 동족들의 구원을 향한 한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롬9:1-3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습니다.
내가 지옥 가도 좋으니 내 동족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런 기도 아무나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동족을 사랑하는 한 맺힌 마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모세가 위대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출32:31-32에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그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고자 할 때 마음을 실망시키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 감상으로 알고 접근했다가는 큰 실망합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교인들이 더 상처를 줍니다. 많은 일군들이 일하다가 상처 받고 고통당하거나 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란 좋을 때는 한 없이 좋지만 야비할 때는 한없이 야비합니다. 일이 없을 때는 평안하지만 큰일을 하게 될 때 사탄이 얼마나 역사하든지 기도 많이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일에 한 맺힌 사람이 아니고는 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슴에 불타는 사명감으로 한이 맺혀 굶어도 좋고, 억울해도 좋고, 맞아도 좋고, 죽어도 좋으니 십자가 지겠노라는 그런 사명에 대한 한 맺혀야 합니다. 그래야 골1:24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한 바울의 고백과 같이 기쁨으로 십자가 지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3. 한을 품지 않으면 말세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5:13-15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세상에서 성도의 역할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제정 러시아가 왜 멸망했을까요? 니콜라이 황제와 괴승 라스푸틴의 잘못도 요인이겠지만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였습니다.
기독교가 사회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끼치던 사회였지만 그 시대의 정신이 되어주지 못했고 사제들이 너무나 쓸모없는 논쟁에 에너지를 소비한 결과 세상에 대한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아무 쓸모도 없는 일에 관심을 갖고 논쟁하고 당 짓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망하려면 사람들이 쓸모없는 일에 소비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시대에 사명을 다하기 위해 말씀과 성령의 부흥을 일으킬까에 고민하지 않고 모이면 살리자 죽이자 기분 나쁘다 좋다 쓸데없는 말만하고 모임 가져봐야 겨우 친교행사 말고는 없고 이러기 위해 우리가 직분 가졌냐는 말입니다. 집에서만 똑똑하지 말고 사회 나가서도 똑똑해야 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은혜 받지 못해서입니다. (따라서 합니다.) "은혜 받지 못해서~~" 거룩한 한도 은혜 받으면 품어집니다. "인자가 올 때에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부어 주리니", 이 두 말씀은 내용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입니다. 황량한 말세이지만 성령 충만 받고 신앙생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 않으면 믿음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한은 다름 아닌 성령이 임하실 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12세기 이탈리아의 성자 프란시스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깊은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청년시절 깊은 은혜를 체험하고 진정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겠다고 헌신했습니다. 그 소원이 얼마나 강렬했든지 아버지도 누구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내 집을 보수하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 타락한 기독교를 개혁하는데 최선을 다했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또 손수 일을 하면서 평화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크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세에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은혜를 받으면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 사명감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위해 죽겠다는데 누가 막습니까? 날마다 하나님께 써달라고 보내달라고 부르짖는 걸 누가 막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은혜 받으십시다.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프란시스처럼 은혜를 깊이 체험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억울한 일 만난 과부와 같이 거룩한 한 품고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믿음생활 잘하고 사명 잘 감당하여 말세에 주님께 우리 믿음을 보여드릴 수 있는 가장 복되고 귀한 일군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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