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나는 거듭난 사람인가? 자가 진단법

하나님아들 2019. 1. 19. 16:07


거듭남에 대한 자가 진단법

 

근세기에 만큼 거듭남에 대한 용어를 남발하는 시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거듭남에 설파하거나 자신이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해서 전 동의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유는, ‘거듭남이 주관적인 체험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모두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거듭난 분들과 행실에 있어서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1.거듭남의 자가진단, 첫째는 생명의 본질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거듭남새로운 출생입니다. 새 생명으로 두 번째 태어났다는 실재적 상황입니다.

 

첫 번째 생명은 아담으로부터 출생입니다. 두 번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받았으며 본질을 가진 생명으로 탄생했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3)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라는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마치 니고데모와 같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은 사람에게 질문을 해보면 동문서답합니다. 방언 받았다. 불같이 뜨거운 성령 받았다..성령세례 받았다. 간증하기도 합니다. 이런 체험은 거듭난 현상이 아니랍니다.

신약성경은 간증합니다.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18)

요한사도는 하나님이 낳고 싶은 자녀를 낳는다고 서술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낳고 싶을 때 ...즉 자기 의지(WILL)가 발동할 때 자기 자식이 잉태 하게 합니다. 생명은 모두 자기 아버지의 자식입니다. 우리 인간들도 누구 자식이다. 누구 피를 이어받았다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하나님 자신이 생명의 씨를 나눠주셔야 합니다. 마치 남자가 정액을 여자의 자궁에 넣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하려면 씨(seed)가 마음 안에 심겨집니다. 즉 말씀으로 거듭납니다. 그래서 자기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신약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를 낳으셨느니라”(1:8) 착각은 하지 마십시오. ‘우리라고 하니깐 지금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인줄 착각합니다. 성경기록자가 우리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기 주변의 신앙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에겐 분명하게 그 전과 후의 달라진 모습이 나타납니다. 루터는 로마서1:17절의 진리를 깨우침으로 거듭났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가 거듭났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성경기록의 본래 의미를 정확하게 깨우쳐 주십니다. 그래서 그 자신 스스로가 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났구나!“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전 고후 4:6을 통해 내 속에 일어난 변화가 바로 이것이구나..라고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욥33장을 통해 내가 구원받도록 주님께서 배후에서 이렇게 역사하셨구나!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5311절에서 이 지식(진리)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 받았구나알게 하셨습니다.

내가 구원에 확신을 가지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성령으로 내 속에 일어난 현상으로 성경구절을 해석해가며 알게 하신 것입니다. 내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지? 계속 공급해 하는데 주께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이 성경구절, 저 성경구절을 해석해 보이시면서 확정에 확증을 더하셨습니다.

진실로 인간은 내가 구원의 확신을 가집니다...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받은 구원을 주께서 성경을 펴서 가르치시며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증거한 말씀으로 낳으셨느니라라는 의미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아더핑크의 거듭나는 길,,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수단으로 거듭나게 하시는지를 주목하여 보십시오. 그수단은 말씀입니다. 성경을 본래의 진의로 깨우치사 진리를 아는데 이르게 하십니다.거듭남에 대한 명확한 논리를 제시한 차녹의 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말씀에 성령이 개입하셔서 깨우치시사 내 영혼 속에 생명이 탄생되게 하십니다. 루터.웨슬레, 스펄존, 죠지뮬러, 앤드류머레이.무디..모두 같은 간증을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런 인간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역에 대해서 이사야서엔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지식으로 의롭게 하리라..”(53:11)입니다.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낳습니다.” 예수가 자신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 효험이 자기가 구원할 영혼에게 미치게 하십니다. 구원은 주님이 하십니다. 직접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설교자가 아닙니다. 목사도. 신부도. 성직자도 아닙니다., 주님이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시고 버려두실 영혼을 버려두십니다. 주님이 맘대로 하십니다. 아무리 설교자가 천국에 데려가려고 할지라도 한 생명도 못 건집니다. “이는 사람의 의지로 나지 아니하고 하셨기 때문”(1:13)입니다.

 

잃었던 생명을 얻었습니까? 구원받았습니까? 거듭났습니까? 증거를 내 놓아 보십시오.

서도들과 전 말씀으로 낳으셨습니다. 당신은 어떤 말씀이 당신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증명하시던가요? 확정하시며. 확신에 확신을 더하시던가요? 어떤 성경구절이 구원받기 전에는 몰랐었는데...그릇되게 이해했었는데 이제는 바로 이해하고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게 되었나요? 분명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엔 두 개의 자격증을 요구할 겁니다.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피묻은 속죄의 옷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의해서 이룬 성과입니다., 거룩한 열매입니다.

주님의 혼인잔치에 유구무언이거늘,,,하였습니다., 무엇을 요청하시는지..무엇을 제시하라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니고데모가 거듭나기 전처럼 어찌 그런 일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사도들의 선교하던 시절엔 형제를 분별하는 테크닉이 있었습니다.

거듭난 형제. 즉 하나님 아버지가 너희 형제니라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2.즉 두 번째 자신이 거듭났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실재는

형제를 알아보는 눈입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아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바 된 것을 아느니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25장에서 형제를 알아보는 눈이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로부터 생명이 주어진 사람은 형제를 알아 볼 줄 압니다. 목숨바쳐 사랑해야할 형제가 눈에 띕니다. 육신의 형제 자매까리도 동기애라는 것이 자연히 일어납니다. 이 형제사랑은 본성에 의해서 자동발생적으로 일어납니다. 한 아버지의 피를 받았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초기 교회 시절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 믿는 신자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그가 숙식할 집이 없을까요? 그의 가족은 누구입니까? 당연히 같은 예수를 믿는 집입니다.

다른 도시에 방문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도시에 방문을 하든지 주님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반기며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옵니다.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머무니라.”(28:14) 의 표현이 나옵니다.

그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28:15)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고후2:13)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12:10) 합니다.

도대체 이 형제가 누구란 말입니까? 사랑해야 하고 사랑받게 되는 그 형제가 누구란 말입니까? 전 거듭나기 전엔 형제 사랑을 맛보지 못하였습니다. 종교적인 교회 안 생활은 서로 교우간에 사랑한다고 말하나 기껏해야 세상친구 정도일겁니다. 아니 세상친구보다 못한 교우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게 주님의 형제들입니까? 그 속에 아버지의 생명의 본성이 있습니까? 거짓입니다. 가식입니다. 종교적 신앙인은 배고파도 밥 한 그릇 대접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 서로 말합니다. 주님 앞에서 말합니다. “언제 주여 배고팠나이까? 감옥에 갇혔나이까? 어려움에 처해 계셨습니까? ”대꾸합니다. 주님이 이 내 형제...”라고 칭하는 신자가 어둠에 있는 영혼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속에 계시던 그 성령이 내 속에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는 눈이 없습니다.

거듭나면..하늘 생명을 받으면...예수의 형제들을 위하여 삽니다. 육신의 연맹과는 인연을 서서히 끝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네 육신의 형제와 부모.처자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천성가는 길에 서 있을 때...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선택하였다...라고 기록합니다.

예수께서는 내 형제...너희 형제...를 돌보라”(20:17, 22:32)하셨습니다.

누가 내(예수)의 형제들입니까?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들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피와 생명을 받은 하늘에 속한 자녀들입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1:16)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줄 알거니와...하였기 때문에 형제사랑이 체감되지 않는 교회는 거듭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인들은 교회당에 돈갖다 바치는 사람들 정도이고..교우들끼리는 친목회 회원끼리 정도인 교회들은 타락한 교회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가장 확실한 표식이 이것입니다. ‘형제사랑이 결여된 교회. 그 공동체는 세상적 교회요. 종교화된 기독교인 뿐입니다.

거듭나면 예수의 형제가 보입니다. 사랑해야 하고 사랑을 주는 형제를 주께서 연결시켜 주십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거듭난 증거는 없습니다.

거짓 하늘 생명을 가진 신자들이 온갖 거듭남에 대한 체험, 이론 등을 늘어놓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체험한 거듭남은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그 속에 없고,,,하나님의 성령이 그 속에 없어서 형제를 알아보는 시야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 사랑을 경험해 보지 않아서 하나님의 본성에 의한 사랑을 모릅니다.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거듭난 후 타종교를 믿는 우리 모친이 한 찬사를 아직까지 기억합니다. “얘 너가 요즘 어울리는 사람들..참 예수쟁인가보다..왜냐하면 너희 동기들보다 너 낫다. 네 형보다.부모보다 낫구나..넌 이제 외롭지 않겠다. 저렇게 아낌없이 서로 주는 예수 형제들을 만났으니깐하며 부러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교회생활하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전도활동. 교회 내에 봉사를 함께 하였지만. 막상 어려울 때엔 남과 같은 사람들..그들이 오늘날 거듭나지 못한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형제보다 못한 사랑,,서로 기대조차 안하는 관계..그러다보니 예수 믿어도 믿을건 자식, 혈육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세습을 하기도 하고요.

거짓입니다. 가짜입니다. 형제사랑이 서로간에 없는 교회는 거듭남의 진리를 모릅니다. 예수님이 역사하셔서 그들에게 구원. 거듭남, 등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헌신을 아무리 많이 해도 하나님의 생명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저 종교행위만 지속할 뿐입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런 세계가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내가 본성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형제가 있습니다. 사랑해야할 형제가 있고 사랑을 주는 형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거듭났다는 증거 중 하나입니다.

바울의 예를 보십시오. 몰랐습니다. 종교생활에 미쳐 버린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엔 예수님이 자기 형제...아나니아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제는 참 형제가 누구인지...누구와 함께 동거동락하며 동류로 여기며...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알게 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구원받고 거듭나십시오..그리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사랑하는 주님의 형제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거듭났다고 상상하며 기타 교인들을 향해 거듭나라고 설파하기에 열정적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거듭남의 체험이란 너무도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가 체험한 것이 참 거듭남인지...가짜 거듭남인지...잘 알아체지 못합니다.

그래서 초기교회.즉 신약성경 기록시대에 벌써 교회 안에 가짜 형제들이 생겨납니다. “그 형제(주님께 속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곳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았기 때문입니다.”(요일3:16)

오늘날 거듭남에 대해서 많이 설교하는 단체가 구원파인데 그들이 영생이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공동체이니까요. 목사가 교회 돈을 맘대로 사용합니다. 교우들을 자기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노예가 합니다. 목사는 배 터져서 얼굴에 기름이 줄줄 흐르나 배고픈 교우들이 많습니다. 그러고서도 형제님, 자매님부르며 우린 같은 생명으로 거듭났어요..”외쳐 댑니다. 구원파와 비슷한 거듭남을 설교하는 기성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은 자기 밥그릇정도로 여깁니다. 교우끼리는 형제사랑이 느껴지기보다 서로 이용하기에 바쁩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면 뭐합니까? 그 교회를 위해 충성할 때엔 형제처럼 여기다 더 좋은 교회라도 신앙생활을 하러 떠나면 남보다 더 악하게 대우합니다. 이런 이해관계가 얽히고 얽힌 곳이 과연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영혼들의 회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신차리십시오.

제발 성경에 나타난 주님의 거듭난 형제들의 삶과 자신들의 삶을 비교해 보십시오.

 

 

3.세 번째는 거듭난 자의 표식은 무엇을 위해 사는냐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친 자녀인지 우리는 압니다. 바울도 알고. 베드로도 압니다. 루터도 알고 웨슬레도 압니다. 우리는 서로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적이냐? 신약적이냐로 거듭났는 것과 거듭나지 않았음을 분별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거듭남을 계획하셨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왜 거듭나야 하며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거듭날 것을 촉구하셨습니까?

거듭나기 전의 행동은 무엇이고 거듭난 후에 행동은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하나님이 기대하신 행동은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무엇을 기대하고 거듭나게 하셨습니까?

구약적 종교생활의 지도자인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3:7) 하셨습니다.

“you must born again"입니다.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즉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룩하지 못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모세로부터 예수까지 약 1500년동안 답습하였던 행실. 즉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약속을 따라 자녀가 되지 못한 에서는 하는 짓마다 부모님께 근심거리만 제공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본성이 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 수 없습니다.

하늘 생명의 고유능력이 없는 자가 하늘 사람처럼 살려고 한다면 엄청 고통스러울 겁니다. 결과에 미치지도 못하면서 공통만 따르는 신앙생활입니다.

 

원숭이가 사람 흉내를 잘 내는 동물원이 있습니다. 흉내를 잘내니 맛있는 것을 구경군들이 던져 줍니다 신이 나서 더 잘 흉내를 냅니다. 그러다 구경군들이 다 집에 돌아간 밤이 됩니다. 두발로 걷는 그가 네발로 조르르 자기 우리에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뒤로 넘어져 베개 베고 자야겠지요. 보는 사람이 없을 땐 원숭이처럼 구불며 지내는 것이 편합니다. 사람처럼 행동하며 사는 시간은 그에게 고통이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가장 즐겁습니다. 그런데 속에 하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 자체가 고행입니다. 의무감에 고취되어 고통스런 신앙생활을 지속할 뿐입니다. 희락이요. 기뻐서..큐티하고...찬송하고..기도하며...종일 주의 말씀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의무감입니다. 그렇게 해야 복받는다고 하니 열심히 해 보는 것입니다.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을 것이라..“이것이 안됩니다. 성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된 기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천적 본성 밖에 없습니다. 이 선천적 본성으로 종교적 관례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것이 구약시대의 신앙생활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구약시대의 관례에 묶여 있습니다. 그 굴레를 벗어 날수 없습니다.

제도적으로 제한을 가하는 신앙규례입니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이지 않습니다.

거듭남이 무엇인지 좀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처음 제자들도 모두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유대인이요. 바울도 유대인입니다. 구약적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 메시야예수가 자기 맘 속에 오신 후에 신약적 신앙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럼 사도들이 믿었고 신앙했던 구언약은 무엇입니까? 구언약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행하였으며 무엇에 열심이었습니까? 율법입니다. 토라입니다, 그람마입니다.

성경기록(그람마)입니다. 토라(하나님의 법,규정)입니다. 바울사도는 구약적 신앙생활과 신약적 신앙생활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보여 줍니다.

율법 조문 대 영(Spirit)입니다. “율법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영으로 함이니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3:6)

선지자들을 통해 복음의 시대를 예고하실 때에도 영의 시대가 열릴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러..새 언약을 맺으리라.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다 나를 앎이니라..“(8:8-11 요약)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요일2:27)

율법에서 벗어났으니...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6:6)

 

율법시대와 신약시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은 무엇으로 하나님께 신앙합니까? “영의 새로운 것입니다.

이미 요한복음 4장에 예수께서 아버지께 참(올바르게)으로 경배할 때가 오나니...”하시면 선언하셨습니다. 구약식 신앙방식에서 개혁될 것을 예고 하셨습니다. 메시야 이신 예수가 너희 안에 거하나니..”시대에 이르면 지금까지 답습하던 구약적 신앙방식이 아무 쓸모없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주 맘에 오신 날 그날이 거듭난 날이요. 새생명이 탄생한 날이요, 구약적 신앙이 종식을 고한 날입니다.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참으로 거듭났다면, 참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내 속에 생겨 났다면...내속에 예수와 같은 생명이 탄생했다면...구약시대에 답습하던 신앙생활 양식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리라..작은 자(인도를 받는 신자)나 큰 자 (지도층에 있는 신앙인)이나 모두에게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다 나를 앎이니라..”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가 이루어집니다.

평신도. 설교자 계급이 사라집니다. 놀라운 역사아닙니까? 스펄존은 17세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가 본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를 너무나 익히 알고 전파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듭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존 번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교 문 앞에도 안가본 사람입니다. 하지만 당대에 최고의 신학자인 존 오웬이 말하길 나보다 더 정확하게 주님과 관련된 진리를 더 많이 정확하게 깨달은 영혼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신학지식이란 학문은 전달하는 수단을 익히는 곳입니다. 신학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기술에 능한 사람입니다.

신학에 박식하다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신학박사라도. 스펄존보다. 존번연보다. 무디보다...무식한 언어로 설교하는 베드로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무식할 뿐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임하지 않았으므로 인간 설교자들을 추종하기에 열정입니다. 자기 속에 임재하신 주님 한분으로 충분한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성경해석자, 설교자의 필요성을 매주 느끼는 사람은 아직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주를 알리라..기름부음이 거하나니..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약 신앙의 특징입니다. 거듭난 사람의 특성입니다.

그러면 설교자. 성경해석자가 필요없느냐? 그건 아닙니다., 더 풍성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할 뿐입니다. 내가 아는 예수를 그가 더 적절하게 표현하는 은사를 받았을 뿐입니다. 설교자가 말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내게 가르친 것이 전부인 사람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대한 앎이 모두 속에 계신 성령에 의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아 내가 알게된 예수를 저렇게 명확하게 표현하는구먼.아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됩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들의 은혜스런 집회입니다.

 

참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거듭난 후에 일어나는 신비한 세계의 현상을 모두 설명하기란 곤란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구약적 신앙방식에서 자유롭게 된 영혼이 거듭났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적 신앙의 특징은 첫째, 토라와 그람마입니다. 인간 문자로 된 글이라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해독하는 글을 중심으로 신앙한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신자는 마음으로 읽는 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마음으로 깨달아 의에 이른 사람들이요, 주께서 성령으로 마음에 이해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머리로 예수를 믿는 것이 나니라 마음으로 섬깁니다.

두 번째. 구약적 신앙의 특징은 건물성전입니다. 구약시대엔 하나님의 영이 건물성전에 임재했습니다. 신약시대엔 우리가 성전입니다. 구약시대 신앙인은 성전건물에 자주 들락거리는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 상태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는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처럼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완전히 그리스도화된 신자입니다. 신약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하러 여기저기 돌아 다닙니다. 성전건물이나 회당이 없는 곳에도 다닙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이 퇴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수고하노라하였습니다. 건물성전. 예배당.교회당,,그런 것이 있든지 없든지,,그의 영적 생활엔 전혀 영향이 미치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신약교회 신자들의 생활이요. 사도들의 지도를 받던 초기교회 신자들은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예배당에 자주 다니면 신앙이 좋아지고 멀어지면 신앙이 퇴락하는 이런 신앙은 아직 구약시대 신앙인과 같습니다. 만약 이런 신앙이라면, 어찌 세계선교가 가능했겠습니까? 성전건물,예배강.교회당이 없는 곳에서 10,20,30년이 지나도 전혀 신앙이 퇴락하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그날에는 너희 속에 거하겠음이라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영이 내 속에 거하시기 시작한 날이 거듭난 날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모든 청교도들이 증거하는 바입니다.

스테판을 통해 건물 중심 신앙을 주님은 질타합니다. 마귀를 섬기는 행태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건물을 성전화시키는 교인들은 모두 거듭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디 있으나 한결같이 주님과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세 번째. 안식일. 십일조. 제사장...참으로 구약적 신앙양상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런 신앙인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이 항상 내 속에서 함께 안식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십일조를 드려서 복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의 전 일생이 주님께 구속되었기에 당신의 자녀의 일생이 주님의 것입니다. 내것이 주님의 것이요, 주님 것이 내것입니다. 그런데 뭘 부분을 떼어 주님께 드리고 나머진 내 맘대로 사용한다는 겁니까? 다 주님 것입니다. 한 푼도 주님의 뜻대로가 아니면 지불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 거듭나서 부으신 그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내게 오기를 거절하는도다하셨습니다. 거듭나 설교자는 구약적 신앙가와 교류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의회(그당시 신앙공동체의 정통)와 교제를 했습니까?

바울이 유대교와 강단교류를 했습니까? “저희에게서 나오고 따로 있으라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설교자들을 보십시오. 구약적 교회당 사람들과 서로 사이좋게 지냅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박해를 당하고 그들의 그릇된 신앙방식을 질타하기를 지속하셨습니다.

모두가 너희를 칭찬하면 화있다 하셨습니다.

구약적 신앙양상을 가진 것이 거듭나지 않았다는 확실한 표식이건만...그들과 교류하며..동류로 여기는 설교자들,,,그리고 그런 종교계의 영광을 사랑하는 목사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형국이 오늘날 기독교계입니다.

그들이 가진  거듭남의 경험이란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기적적인 체험에 불과합니다. 메시야 예수가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만약 이것을 붙들어도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예수께서 구원하시는 메시아로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는 지각을 가지십시오.

구약시대에 역사하던 성령의 사역,,,그것은 바울이 말하길 종의 영의 사역”(8:15)입니다.

성령체험. 말씀에 은혜를 맛봄...이런 것들은 구약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저희가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고....다 우리와 같은 성령의 음식과 성령의 음료를 마셨으니....그러나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10:2-5)

성령체험? 세례? 말씀에 은혜받기도 하다? 뭐 그런 것에 신뢰하지 마십시오..그냥 체험이지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거듭났다면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첫째. 하나님의 본성이 내 속에 생성되었으며, 둘째. 형제사랑을 실천하게 되며 셋째. 구약적 신앙을 떠나게 된답니다.

적극적으로는 성령을 따라 메시야 예수님의 사역에 동역하게 된 답니다.,

사후에 속았다고 후회하지 마시고 심판대 앞에 서기전 자신의 내면을 고찰해 보십시오..

이 시대는 가짜로 거듭난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님이 날 형제라 부르실까에 주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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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남은 자들의 공동체 교회
글쓴이 : 이여호수아 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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