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과 언약!!

[스크랩] 폐하여진 율법

하나님아들 2012. 9. 18. 23:49

<에베소서 강해>

 

폐하여진 율법

 

2007/03/07 (수요예배)   엡 2:10-22     정진국 목사

 

할례의 벽을 허무신 십자가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5)

여기서 말하는 “이 둘”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인간 취급도 안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인 우리를 유대인이 무시한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에 이방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표식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할례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에게 선민의식을 주는 또 다른 하나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새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행한 것은 예수님을 위한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모든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6)

한 새사람이 되는데 방해되는 것을 십자가로 해결했다고 합니다. 할례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표식을 난지 8일 만에 몸에다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표징을 두었습니다. 그것을 할례라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이 할례를 십자가에서 폐하셨습니다.

할례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 마음 안에 이뤄지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할례가 우리 마음 안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할례를 더 이상 육체에 행할 의미가 없습니다. 육체에 행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할례를 행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할례를 받은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구분이 없고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새 민족이 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구분이 없게 된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십자가를 말미암아서 사람이 한 몸으로 세워지는 일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십자가로 전부 제거하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할례의 벽을 허무신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이 새롭게 한 몸을 형성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피조물이지만, 단체적으로도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새 민족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유대인의 특권의식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5)

그 다음 두 번째로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가지는 특권의식이 율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향해서 너희들은 법도 없고 무자비하고 부도덕한 존재라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명을 받은 존재들이라는 것으로 남다른 특권의식을 가졌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형성하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돌비에다가 율법을 새겨서 율법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히 보호를 받고 있고 하나님과 같은 탁월한 수준의 삶을 사는 거룩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언약에서 벗어난 것만이 아니라, 율법이 없는 민족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방종하고 더럽고 폐륜적인 민족 취급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특별히 하나님이 계명을 주었고 그 계명에 의해서 탁월한 삶을 살고 이방인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사는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과 우리는 가치관도 틀리고 도덕적인 수준과 윤리적인 수준이 다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가 되는데 늘 장애가 되는 것이 율법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한 새사람으로 연합해서 연합체를 구성하기 원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사실이지만 실행적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초대교회 안에서 늘 어려움을 겪는 것이 율법의 문제였습니다. 할례의 문제도 늘 율법의 안에 있는 문제의 하나로 취급이 됩니다. 할례도 율법적으로 행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할례도 율법의 문제라고 볼 만큼 율법의 문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는데 장애요소가 됩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해서 교회의 일원이 되도록 했다니까 예배는 드리지만 이들의 마음속에는 특권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왔어도 너와 나는 다르다는 생각이 유대인의 생각에는 가득 차 있습니다.

 

율법의 벽을 허무신 그리스도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특권의식을 깨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것을 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각기 다른 계명적 원리에 의해서 살지 않고 새로운 룰을 하나님은 교회 안에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져서 새사람이 되어졌기 때문에 이 새사람들은 다른 룰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새로운 룰을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하는 새로운 룰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폐하여지고 사랑의 법 다른 말로는 생명의 성령의 법 다른 말로는 자유의 법을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하나님이 주셔서 이방인에게는 없었던 법이 생기고 이방인에게는 있었던 법이 생기면서 이제는 서로가 한 법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엮으시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한 몸을 이루시는 경륜적 사건 속에서 볼 때에도 이스라엘의 율법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전에는 이스라엘이 지켰지만 영적 이스라엘인 이방인도 함께 지켜야 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율법은 영적 이스라엘에게만 요구되어 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이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별한 민족으로 특별히 관리하는 기간동안 필요한 것 이었습니다. 이는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십자가로 깨Em렸습니다. 그래서 할례도 더 이상 우리가 교회 안에서는 행해지지 않습니다. 교회라는 새로운 몸인 교회 안에서는 할례도 의미가 없고 율법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제사를 안 지냅니다. 유대교와는 다릅니다. 유대교처럼 율법이 폐하여졌는데 여기서 우리가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끝났습니다.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엮어서 유대인도 없어지고 이방인도 없어지는 한 몸을 세워서 이제는 새로운 룰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법은 과거 유대인이 지켰던 율법이 아니라 새로운 법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전에 말을 많이 했고 차후에 말을 하기 때문에 오늘은 주된 관점이 율법을 왜 폐했는가 하는 둘로 폐했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기 때문에 이점을 통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폐해지는 것은 어떤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율법을 폐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없어지는 한 새사람 교회 안에는 율법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 그리스도의 몸이 된 것입니다. 그럼 오늘 우리가 교회에서 여전히 율법을 지켜라 라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지금 바로 그 예 가운데 하나를 에베소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폐하여 질 수밖에 없다는 기능자체뿐이지만 율법의 기능이 이렇게 폐하여 진다는 것은 로마서에서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 율법은 폐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을 했지만 에베소서에서는 율법은 왜 폐해 질수 있느냐 라는 것을 주장을 했지만 그것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이 이 두 사람을 한 새사람으로 새롭게 지으셨기 때문에 교회는 새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이 교회 안에는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미 신약의 예수님이 굉장히 성숙한 영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데 여전히 구약적인 관점에 예수님을 섞어서 이건 구약인지 신약인지 짬봉이 되어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율법이 유효한 것처럼 예수 믿으려면 이 계명들을 율법을 잘 지켜라 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지키려고 하는 계명이 교회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멸하셨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침은 율법이 아닙니다. 교회는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교회에 대해서 공동체다 특별한 연합체다 조직체라고 이야기 하는데 성경에서는 이 교회를 한 새사람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의 어떤 조직체나 살아 있는 몸입니다. 교회는 써클도 조직체도 정치적인 단체도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살아 있는 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한 존재입니다.

이 교회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형식과 틀을 살아 있는 유기체인 몸 안에 들어오니까 이 몸이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몸이 몸으로 유기적인 기능들을 하지 못하고 다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유기적으로 살아나려면 율법이 파기 되어져야 됩니다. 죽은 조직이 됩니다. 조직체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단체에 불과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의 모임에 불과한 것입니다. 교회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조직을 세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유기체입니다. 이것이 신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기체인 몸 안에 조직 이런 것들이 자리 잡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법이 오면 죽는 것입니다.

생명은 질서가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특징입니다. 생명은 질서가 있지만 법이 오면 질서가 죽습니다. 생명 안에 생명은 고유의 질서에 따라서 유기적으로 참 조직적으로 굉장히 질서적으로 나타나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미국에서 말씀이 전파되면서 흑인과 백인이 같은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함께 못 드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 종이나 자유자나 한 몸이라고 했는데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상사와 부하직원이지만 교회 안에서는 상사와 부하직원이 아니라 한 형제요 지체입니다. 세상적 질서를 교회 안에서 끌어오게 되어지면 그리스도의 몸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의 정신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교회들이 이 교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구원의 복음은 이해했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신기한 유기체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조직체도 아니고 연합체도 아니고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중심으로 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몸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들은 교회 안에 흑인과 백인의 구분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에도 초창기 예배당에는 가운데 천막을 쳤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서 예배를 들렸습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유교적인 문화권 때문에 예배당에서 함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교회 유기적인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옛날 유교적인 전통의 어른들이 그 버릇없는 것들 어떻게 교회 나가서 아버지도 아버지 하나님도 아버지 그럼 아버지와 자식관계가 무엇이냐 라고 몸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해서 족보적 관념을 가지고 예의범절을 모르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 안에서는 어머니와 딸이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 왔다 가면서 배웠으니까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자매네 라고 해서 직장을 가서 상사에게 형제님 하면 당장 쫓겨납니다. 뭐가 뭔지 모릅니다. 구분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양자 양면이 다 있습니다. 교회에서 배웠다고 해서 자녀가 어머니에게 자매님 하고 이야기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 몸은 유기체라는 말입니다. 법이 생기면 교회는 죽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법을 세우면 안됩니다. 여전도회 남전도회 하고 세우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법부터 세웁니다. 교회를 유기체로 이해하지 못하니까 자꾸 법을 세웁니다. 법을 세우면 교회는 죽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성령 안에서 유기체로 움직여야 합니다.

 

법이 생기면 생명은 죽는다

회장의 일과 총무의 일을 법적으로 구분을 해보세요. 회장이 회장으로서의 일을 보지 못하는데 총무는 총무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지체로서의 일이 보입니다. 그런데 법 때문에 막힙니다. 그 일은 회장의 일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죽습니다. 그러나 법을 세우면 그 법은 지켜야 됩니다. 법을 세우면 법은 지켜야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질서 안에서 진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역사는 가장 활발하게 유기적으로 법이 없으면 없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어떤 리더가 가장 위대한 리더냐면 법을 안 세우는 리더가 가장 위대한 리더입니다.

회비에 대한 법을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늘 돈이 없어서 빌려야 되는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여전도 회비 3만원은 어쩌라는 말입니까?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 7:6)

오늘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성도 한 사람이 유기적으로 반응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영을 쫓아 사는 유기적인 삶을 사는 방법을 모르니까 교회 가서 성도들이 무엇을 해야 되냐고 묻습니다. 유기적인 영 이것 말하기 골치 아프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순종이 목사에게 순종하라는 상황이긴 하지만 모든 상황을 목사님에게 순종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님의 중요한 원리 때문에 어떤 일을 요구할 때 순종하라는 것이지 일상적 순종의 원리는 내 안에 있는 성령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것이 전체적으로 그래서 조화를 이루고 질서 있게 됩니다. 목사님 여전도회 회비 안 정하면 일이 진행이 안 됩니다. 여전도회 회비를 안 정해서 일이 진행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도회 회원들이 각기 유기적으로 성령을 좇아 사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진행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낮 예배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여전도 회원들만 하는 것이라고 법을 세우면 이 법 때문에 다른 영역 속에 성령이 역사하지 못합니다. 법이 오면 생명은 죽습니다. 그러니 이곳은 여전도 회원만 하는 것이라는 법을 세우지 말기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는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유기적인 역사 속에 틀을 세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대로 내버려 두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히려 가장 위대하게 흘러가는 방법입니다. 성령의 역사라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조직을 해서 법을 세워서 법에 의해서 이끌어 가는 룰에 의해서 살았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법칙을 세우지 않아도 성령이 역사하니까 사도들이 그로 인해서 많은 구제하는 일들과 교회를 세우는 일들을 위해서 얼마나 아름답게 사용되었습니까? 오늘 교회가 새 사람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룰에 의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그래서 예수님은 새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새 시대가 왔으면 새로운 시대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 새 시대는 영의 시대입니다. 영을 쫓아 사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유기적으로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을 여러분이 살면 신비한 체험들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예본교회 가운데 이런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헌금의 항목도 관리를 위해서 구분을 지어 놓은 것이지 여러분은 정말 자유롭게 하면 됩니다. 법이 없는데 누가 누구를 정죄합니까? 내 속에 법을 가지고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합니까? 교회 안에 법을 없앴는데 마음속에 스스로 법을 가지고 누구를 판단하고 다 합니까? 법을 세우는 동안 교회는 죽습니다. 생명은 죽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을 쫓아 사는 법 이것을 훈련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옛날부터 이렇게 했는데 이것이 법입니다. 그럼 지금은 그렇게 안하면 안 됩니까? 그래도 옛날부터 그렇게 해 온 것이 관행인데요. 라고 하지 마세요. 관행을 법으로 만드는 순간 생명은 죽습니다. 관행을 기존의 성도들이 만들기 쉽습니다. 기존의 성도들이 관행을 가지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 마음속에 성령의 역사가 있는데도 속에 있는 역사를 사장하고 죽입니다. 그것을 표출도 하기 전에 꺼버립니다. 그럼 교회는 벌써 잘못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좋은 전통일지라도 그 좋은 전통이 법이 될 때는 깨버려야 합니다. 왜냐면 법이 사람을 이끌어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법이 우리를 이끌면 우리는 죽습니다. 이해가 되시죠? 그래서 법을 세우면 안 됩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관행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할지라도 새 영을 세우는 때는 하나님이 그렇게 할 때 수용하고 함께 할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영이 함께 하는 것을 꺾어 버리고 놀라운 새 역사를 우리가 맛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당부 드립니다. 기존의 성도들은 관행으로 새 성도를 볶지 마시고 새 성도는 그 안에 역사하는 성령이 있는데도 내가 새로운 성도인데 너무 날뛰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 마세요. 성령이 역사하는 것은 앞장서서 일하라고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람 눈치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성도는 여러분 안에 성령이 역사하는 대로 행동하시고 기존의 성도는 기존의 문화를 가지고 새로운 성도를 조이려고 하거나 역사의 장을 자유롭게 열지 못하고 비판하려고 하거나 통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견제하지 못하도록 특권의식을 깨트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특권의식이 있으면 안 됩니다. 어떤 의식이라 할지라도 한 몸을 세우는 일에 방해되는 의식은 전부 우리가 타파를 해야 됩니다. 생명의 유기체는 성령을 쫓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 다음에 서로가 하나가 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출처 : 복음과 삶
글쓴이 : 코람데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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