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과 언약!!

[스크랩] 바울, 루터, 웨슬리의 율법이해

하나님아들 2012. 9. 18. 23:56

바울, 루터, 웨슬리의 율법이해

   한국의 치명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윤리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미 기존윤리는 붕괴되었으나 아직 새로운 윤리는 형성되지 않고 있다. 한국은 바야흐로 윤리의 진공상태가 되었다. 그 결과가 사회 전반에 걸쳐 도덕성의 상실로 나타났다. 도덕성의 상실에 있어서는 교회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교회가 그렇게 된 것은 기독인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항 중의 하나인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그래서 복음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율법을 완전히 폐기처분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독교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신앙과 신학의 본을 삼고 있는 사도 바울,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 20세기의 교부 칼 바르트 등은 모두 다 율법과 복음을 불가분리의 것으로 보며 율법을 존중하고 있다. 바로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에 관한, 그 중에서도 율법에 관한 바른 이해가 우리의 구원론 정립에 중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심의 대상인 윤리 문제의 해결에 관건이 된다.
   이제 교계와 사회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기 위하여 우리 성결교인들은 율법이해에 관하여 성경에 나타난 사도들의 신앙 전통을 이어 받으며,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요한 웨슬리의 주장을 수렴하여 우리의 신학적 입장을 세워야 한다. 이에 따라 이 소논문에서는 먼저 사도들의 신앙전통 가운데 사도 바울의 율법이해, 그 중에서도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이해와 다음으로 종교개혁자 가운데 마틴 루터의 율법이해와 마지막으로 요한 웨슬리의 율법이해를 다루려고 한다.
1. 바울의 율법이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율법을 잘 알고 있는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썼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그의 율법개념의 상당부분을 전제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개념을 여러 군데 흩어서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바울의 율법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서 안에 흩어져있는 율법에 관한 말씀들을 정돈하고 통전적으로 조망하여 통일성있는 체계를 형성해야 한다. 통전적인 조망과 통일성 있는 체계를 형성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의 십자가가 바울이 율법을 보는 결정적인 관점이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바울의 전체 사상과 그가 율법에 대하여 말한 것의 중심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부터만 비로소 바울의 율법에 대한 긍정적인 말씀과 부정적인 말씀 사이의 내적인 관계가 이해된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씀은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복음과 밀접한 관계에 서 있게 된다. 먼저 이 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본 다음 바울의 율법관을 다루겠다.
우선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구원의 사실성이 되는 능력"이다. 그것의 선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믿음에 이르게 한다(롬1:17). 이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3:22.30). 이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케리그마이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의 내용을 로마서에서 자유롭게 풀어 사용했는데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 그는 육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롬1:3) 경건치 않은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롬5:6).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어(롬5:12) 주가 되게 하셨다. 그 안에서 구속이 발생했다(롬3:24). 우리는 그를 통하여 은혜를 받고(롬1:5)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런데 "율법 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이 복음은 율법과 선지자에 의하여 증거되었고(롬3:21), 하나님께서 미리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것이다(롬1:2). 그러므로 이 복음은 구약에 있는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약속의 성취이다.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인 "구약이 복음 안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다. 새로운 것은 복음을 통해서 발생한 것이고 발생할 것이다." 복음을 통하여 발생한 것은 율법의 요약인 그리스도의 법을 성령 안에서 수행할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은 인간이 바로 이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롬8:3-4). 여기서 바울의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다음처럼 요약할 수 있다: 율법은 복음을 증거하고, 복음은 율법을 성취한다. 이러한 관계는 바울의 율법이해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것이다. 율법이 하나님의 좋은 뜻이라는 것은 그것이 소극적으로는 죄를 금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적극적으로는 사랑을 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고 요구이기에 거룩하다. 율법에서 요구된 것과 선한 것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이 율법은 선하고(롬7,16), 올바르고, 거룩하다(롬7,12).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롬7,14). 그리고 하나님 편에 서있다."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율법에는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대면하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요구가 담겨져 있다. 율법 안에 담겨진 요구는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인간이 찬양하고 감사하고 순종하고 섬겨야 할 유일한 주님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존중하고 존경하고 사랑해야만 하는 동료 인간에 대한 긍정이다. 율법은 이 양자를 하나님의 요구로 증거함으로써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좋은 삶인지 묘사한다. 하나님의 율법에 담겨있는 요구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규정과 분리할 수 없게끔 결합되어 있다. 하나님의 법규정에 따르면 순종은 인간에게 구원과 생명을 가져오고, 그 반면에 불순종은 저주와 죽음을 가져온다. 법 규정에 의하여 율법은 하나님의 심판하는 판단의 척도로서 인간의 행동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완전한 준수가 중요하고, 하나님의 법요구와 법규정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즉 모든 인간에게 통용된다.
이 율법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단 하나의 기능을 갖는다. 여기에서 율법은 약속으로서의 복음과 하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생명에로 주셨다면 그것은 이미 은혜이기 때문이다. 이 양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생명에로의 말씀이다. "신적인 의지의 통일성은 분명하다. 그는 지금 저것과는 아무것도 다르지 않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의 (율법), (신령한 율법)(롬 7,14)이 (그리스도의 법)(갈 6,2)으로서 유효하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율법의 작용은 그렇지 못하다. 율법은 인간이 죄에 의하여 기만되었기 때문에 생명을 주는 능력을 상실했다. 인간이 살아나는 대신에 죄가 살아난다. 인간은 몸으로서 살아난 죄의 권세 하에 들어간다. 그는 죄에 팔렸고(롬 7,14), 죄의 몸이다(롬 6,6). 죄의 권세 하에서 죄의 몸인 인간에게 율법은 죄의 율법으로 만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신령하고 올바르기 때문에 죄의 율법으로서도 하나님의 율법으로 머문다. 하나님의 율법으로서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하여(롬3:20), 죄를 죄로 관철시킨다. 그리하여 인간은 죄의 포로일 뿐만 아니라, 율법의 포로가 된다. 죄를 관철시키는 율법은 인간에게 그의 행위에 해당하게끔 죄의 삯으로서 죽음을 가져온다. 율법은 죽음을 관철시키는 율법으로서 죽음의 율법이다. 그리고 몸을 죽음의 몸으로 폭로한다(롬 7,24)." 이와 같이 율법 하에 있는 죄의 몸의 죄된 행위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율법의 고유한 기능을 정반대의 죽음으로 바꾼다. 그러므로 "율법 하에서 인간은 의의 율법을 이룰 수 없다. ...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작용케 하고 모든 것을 죄 아래로 가둔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에서 온 어떠한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한다(롬 3,20)."
이와 같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율법의 계명이 죽음으로 바뀌었기(롬 7,10) 때문에 죄와 죽음을 죽이고 그것을 통한 의와 생명이 발생하는 사건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일어났다.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율법의 자리에 그리스도가 대신 등장한 것이다. 이 그리스도는 분명히 구원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율법을 대신하나, 십자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율법을 성취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완성이고(빌2:5ff), 동시에 인간에 대한 완성된 사랑(롬8:34ff)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율법의 고유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율법에 대한 "예"로서 율법의 성취이다. 그 안에서 율법의 중심적인 의도가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난 "이 역사적인 사건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지는 성령 안에서 새로운 역사적인 현존영역을 세운다. 그리스도는 역사의 끝으로서 역사적 인격 안에 있는 종말이다. 그와 함께 영의 시대가 시작한다. 이 시대는 의로워진 죄인들을 위하여 육신의 시대 안으로 불가사의하게 비집고 들어와서 죄의 몸을 멸한다(롬 6,6). 이 새로운 시대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의 선물을 통하여 이룩되었다. 그 안에서 몸은 율법 아래 내지는 율법 안에 거하지 않고 은혜 아래 내지는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그리하여 죄의 몸이 신령한 몸이 된다.
인간은 이 사건을 통하여 죽음의 몸에서 생명에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죄의 몸과 함께 죽음과 죄의 율법이 끝났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그것의 출발로 되돌림으로써 일어났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의는 그것이 구원의 길로서 율법을 파괴시킴으로써 율법을 세운다. 이 율법은 죄를 생산해내지 않듯이 영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죄를 죄가 되게 하듯이 영을 영이 되게 한다. 그것으로 율법의 인간에 대한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한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 위에 군림하지 않고 인간 곁에 서있다. 또한 율법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롬 8,2). 그것은 신령한 율법으로서 거기서 그리스도의 법이 된다(갈 6,2).
이와 같이 율법은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으로 복음의 빛에서 그것의 정체성을 들어낸다. 은혜를 통하여 죄의 몸이 신령한 몸이 되고 육의 시대에서 영의 시대로 옮겨진 기독인에게는 죄와 죽음의 율법에서 해방된 바로 그곳에서 죄와 죽음의 율법은 의와 생명의 율법, 신령한 하나님의 율법이 되고, 율법의 요구는 그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된다. 그들에게 요구된 그리스도의 법으로서의 사랑은 율법의 요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요구, 그리스도의 요구로서 신자들에 의하여 사랑 안에서 수행된다. 바로 이 율법의 요구를 수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육신에 죄를 지시고 죽으신 목적이다(롬 8,3-4).
이상에서 살펴 본 바울의 율법이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율법과 복음은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율법은 복음을 증거하고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율법에 대한 "예"이며 율법의 성취이다. 복음의 빛에서 율법은 하나님의 계시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죄의 세력 때문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할 수 있게 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율법의 행위 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이 복음의 사건은 인간을 믿음으로 인도한다. 이 믿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굳게 세운다. 신앙인은 성령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랑하라"로 요약되는 율법의 요구를 수행해야 한다.
이 바울의 사상을 구원과의 관련성에서 다음과 같이 도표로 그릴 수 있다.
둘째 단계) 율법의 요구를 행함:
영생: 몸의 구원; 하나님의 아들됨; 영광의 자유
○ ○ ○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 ∧ ∧ ∧
율법의 요구 --------------------++-------------+---+--+--+---------
× × × || × × × | | | |
∧ ∧ ∧ || ∧ ∧ ∧ | | | |
| |육| || |육| | | |영| |
-----+---+--+-------++--+--+--+----+---+--+--+--------
자연인 || 기독인 기독인

↑↑
첫째 단계) 복음의 내용 : ↑↑
+-------- 죄 <-------------------> 하나님의 의 ----+
| |
| 그리스도2 우리2 |
| |
| 십자가: 그리스도: 부활 |
| |
|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의 의를 위하여) |
| 우리1 그리스도1 |
+------> 죽음 <---------------------> 생명 <----+
2. 마틴 루터의 율법이해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둘 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율법은 최후 바로 직전의 말씀이고, 복음은 최후의 말씀이다. 율법은 인간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고, 복음은 죄인에게 그리고 그에게만 자유 하다고 말한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alienum opus(낯선, 비고유한 행위)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proprium opus(자신의, 고유한 행위)가 나타난다. 루터는 이렇게 율법과 복음을 구별(discrimen legis et evangelii)한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 서문에서 복음에 대해서보다도 훨씬 더 많이 율법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에 따라 우리도 복음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본 다음에 율법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루터에 의하면 "복음은 다윗의 씨에서 태어났고, 그리고 이제는 죽은 자를 살리신 성령을 통해서 만물을 주관하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나신 그의 아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은 그가 먼저 겸비하셨고 그 후에 성령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며 또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인간이시며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고 한다.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이 복음을 통하여 신앙이 주어지며 동시에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만 온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주장에는 율법의 행위로는 아니다는 전제가 놓여 있다. 루터는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율법이 얼마나 깊은 것을 요구하는 지를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율법의 행위까지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신중하고도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루터는 율법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는 사람은 눈먼 자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율법은 죄를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그 자체는 선한 것이며 신령한 것이다. 하나님의 신령한 율법은 겉으로 이루어진 행위에 따라 판단하는 일반법과는 달리 속마음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따라서 마음속에서부터 행해지지 않은 행위를 위선과 거짓으로 징벌하며 가장 깊은 속마음에서부터의 실천을 요구한다. 이 율법은 즐거움과 사랑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을 행하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의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자도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마 5,18)". 그런데 이 율법이 육을 위한 것이라면 이 율법은 행위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지만,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행위를 내심으로부터 행하지 않고는 아무도 수행할 수 없다.
이처럼 아무도 자신이 스스로 행할 수 없는 신령한 율법을 타락한 우리가 본성대로 은총 없이 율법의 행위에 종사할 때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게 된다. 이 때에는 죄가 율법을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게 되며 율법은 다음처럼 죄를 더하게 하는 역할과 죄를 알게 하는 과제를 수행하게 된다: 율법은 죄를 더하게 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인간들에게 행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더 율법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마지못해 행하는 것은 큰 죄가 된다. 또한 율법은 "원죄를 그의 모든 결과들과 함께 드러내서 사람들에게 자기의 본성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으며 바닥을 모를 정도로 깊이 부패했는지 보여준다". 이처럼 복음의 덧붙임이 없이 율법만이 이 과제를 이행하는 곳, 거기에는 죽음과 지옥이 있고 사람들은 마치 성 바울이 "율법이 죄로 말미암아 (나를) 죽였도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사울과 유다처럼 절망해야만 한다.
그 반면에 은총은 율법을 우리에게 사랑스럽게 만들어 준다. 율법에 대한 즐거움과 사랑은 성령에 의하여 마음속에 주어진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을 율법에 맞도록 하신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의 마음 가운데 율법에 대한 욕망을 가지게 되며, 따라서 두려움과 강제에 못 이겨 행하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행하게 된다. 그렇다면 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거스르지 않고 우리와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것이 죄와 율법에서의 참 자유이다. 바울은 바로 이 자유에 대하여 기술한다. 기쁜 마음으로 선을 행하고 율법의 강제 없이 선하게 사는 것만이 자유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영적인 자유이다. 이것은 율법을 타파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준다. 곧 (율법에 대한) 기쁨과 (율법에 대한) 사랑을 표시한다.
"이와 같이 율법은 이러한 영적인 마음으로 애호 받고 성취될 신령한 것이며, 또한 그러한 정신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루터는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마음과 정신을 갖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처럼 언급한다: "타락한 우리 본성에 필요한 것은 율법이 아닌 다른 종류의 약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 본성이 다시 건강해지는 그 때에야 우리가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약은 신앙이다. "신앙만이 사람을 의롭게 하며 율법을 성취하게 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성령을 임하게 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신앙으로 율법을 떠받든다. 곧 신앙으로 율법을 성취한다".
3. 웨슬리의 율법이해
웨슬리도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존 웨슬리 총서, 표준설교집 상하권에 실린 54편의 설교 중에서 4편[믿음으로 세워진 율법(I), 믿음으로 세워진 율법(II), 율법의 기원과 본성, 산상설교 (V)]이 율법에 관한 설교라는 사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이 율법에 관한 설교들을 중심으로 그의 율법관을 살펴보면, 우선 놀라운 것은 웨슬리도 마틴 루터와 비슷하게 율법과 복음을 서로 분리된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산상설교(V)에서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깊이 다룬다. 그는 거기에서 복음은 약속의 형식으로 표시된 율법의 명령이어서 율법과 복음 중에 어느 하나라도 폐기되어서는 안되며 이 양자 사이에는 서로 모순도 없고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에 있다고 한다.
"복음의 수립을 위해 율법이 폐기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음이 존립하기 위하여 율법이 폐기되어야 한다던가 율법이 존립하기 위하여 복음이 폐기되어야할 이유는 없고 이 둘은 잘 조화됩니다. 같은 어구가 이면에서 보면 율법이요, 다른 면에서 보면 복음이 됩니다. 실례로 '네 마음을 다하고 ...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말씀은 계명으로 본다면 율법에 속하나, 약속으로 본다면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이란 약속의 형식으로 표시된 율법의 명령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구원을 위한 말씀의 도구로서 동전의 양면과 같은 율법과 복음의 상호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율법은 복음의 선구가 되며 복음을 지향하는 동시에 다른 일면으로는 복음은 율법을 더 잘 지키도록 도와줍니다. 예컨대 율법은 우리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온유 겸손하고 거룩한 자가 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요구를 완전히 부응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사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고 온유 겸손하고 거룩하게 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로 약속하시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이 약속의 복음을 받아 이를 완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율법의 의를 완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웨슬리는 복음은 약속의 형식으로 표현된 율법이며 복음은 율법의 의를 수행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 있어서 루터보다도 더 바울의 사상에 가깝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있어서 율법은 단순히 모세의 율법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율법을 세분화하여 제의법과 도덕법으로 구분한다. 제의법은 모세에 의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된 제사와 예배에 관한 여러 가지 의식 절차에 관한 법이다. 이 법은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폐기되었다. 그 반면에 도덕법은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고집스런 인간들을 일시적으로 제지하기 위하여 만든 의식과 제도에 관한 법과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법"으로 폐기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이 도덕법의 일부라도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법의 전모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이 도덕법은 웨슬리에 의하여 거의 '율법'과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형식은 명령이나 내용은 약속의 성격을 가진 성경에 기록된 모든 명령이며 모세에 의하여 전달된 십계명에도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영원을 사시는 지존하시고 높으신 분에 대한 불멸의 그림자"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의 본체의 완전한 표현"이며 "영원한 정신을 베껴놓은 것이고 거룩한 성품을 옮겨 적은 것"이며 "영원하신 아버지의 가장 귀한 소산이고 하나님의 근원적인 지혜의 발산이며 지존하신 분의 현격한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하늘의 원리로서 영원히 파기 할 수 없는 법칙"이다. 이것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최고의 불변하는 이성(理性)이며 변할 수 없는 공정성(公正性)이며 과거와 현재에 창조된 모든 사물의 영원한 적합성"이다.
율법이라고 하는 도덕법의 기원은 모세를 거슬러 올라가고 창조를 거슬러 올라가 영원에서 시작한다. 이 도덕법은 "하늘의 원리"이며 "모든 진리의 완전한 모범"이며 "모든 선의 완전한 모범"으로서 첫 자녀인 천사들에게 주셨고 그와 꼭 같이 자유롭고 지각이 있는 인간에게 주셨다. 그런데 이 법은 사실상 돌 판이나 어떤 썩은 물체 위에 쓴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마음에 새겨놓으신 것이다. 즉, 인간과 천사의 가장 깊은 영의 중심에 쓰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도덕법, 곧 율법의 기원이다. 이 법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많이 훼손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속에 악에 대한 관념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폐기 될 수 없는 법이며, 어느 시대, 어떤 장소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에 자리잡고 있는 것인 만큼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다"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은 세 가지 속성을 갖고 있다. 첫 번째 속성은 거룩한 것이다. 사실상 율법은 위에서부터 오는 지혜인데 본질적으로 영원히 거룩한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하여 웨슬리는 다음처럼 전개한다.
"그렇지가 않다면 율법이 근원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소산이라고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과 꼭 닮은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죄와는 상관없이 순결한 것이고 어떤 악도 근접할 수 없이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두 번째 속성은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 율법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하는 것은 땅과 하늘에서 꼭같이 최고의 우주적인 율법"이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을 뿐만 아니라 사물의 적합성에도 일치하는 일이고 또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관계에도 맞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기인한 그리고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불변의 법칙"인 "율법은 모든 사물에 관하여 정당하고 옳은 것"이다.
율법의 세 번째 속성은 선한 것이다. 이것은 율법이 나온 근원으로부터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 근원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어두움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웠을 때에' 모세에게 기록된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그 율법을 주신 것은 홀로 하나님의 선하심 뿐"이다. 하나님의 선이 주셨고 또 모든 시대를 거쳐서 보존하여 주신 이 율법은 마치 샘물의 근원과 같이 선과 자비로 가득차 있어 꿀 송이보다도 더 달다. 웨슬리는 이 율법은 본성뿐만이 아니라 그 효력에 있어서도 선하다고 한다.
"그리고 율법은 본성에 있어서는 물론 그 효력에 있어서도 선합니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가 좋은 것과도 같습니다.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의 열매는 '의와 평화와 영원한 확신'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율법 그 자체가 의로서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 평화로 영혼을 가득히 채워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을 증거하는 가운데 더욱 기뻐하게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이 율법은 세 가지 사용 내지는 기능을 갖고 있다. 율법의 첫 번째 기능은 세상의 죄를 확인하는 일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웨슬리가 율법의 첫 번째 기능을 성령의 한 기능과 동일시한다는 사실이다. 그에 의하면 이 기능은 "사실상 성령의 독특한 일"로서 하나님의 성령이 율법을 통하여 죄인들을 깨우치신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양쪽에 날선 것보다 더 예리한' 부분이 곧 율법이다. 웨슬리는 율법의 이 기능에 대하여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이 율법은 속임수로 가득한 마음을 꿰뚫을 뿐 아니라 '영혼과 심령까지도 갈라놓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심령 골수' 까지도 가릅니다. 이렇게 되어 죄인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 율법은 사방에 비치어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느낍니다. ... 그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섭니다.'"
죄를 확인하는 이 기능은 그에게 있어서 죄인을 죽이는 기능과 동일하다. 율법의 이 기능은 그가 의지하는 생명과 힘을 파괴하는 것이며, 그가 사는 동안 그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이다. 죄인이 죽는 것은 그가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실제로 죽은 것으로서 '모든 잘못과 죄 안에서 죽어' 모든 영적인 삶을 잃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은 죄인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아나게 이끄는 것"이다. 율법은 몽학선생, 곧 엄격한 교사로서 이 일을 수행한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으로 이끄는 것보다는 힘으로 몰고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이 엄격함의 근원이다. 죄인이 영혼의 쓰디쓴 고뇌 속에서 부르짖으며 마음의 깊은 곳에서 신음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통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사랑의 영이다.
율법의 세 번째 기능은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 기능을 설명하기에 앞서서 이 중요한 진리가 '율법의 마지막'에 관한 잘못된 견해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서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다음처럼 강력하게 지적한다.
"이와 같이 위대하고 중요한 진리가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에서 택하신 수많은 사람들 곧 믿음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된 사람들에 의해서조차 별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오면 율법과의 관계는 끝나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마지막이 된다'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그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로 굳힙니다. '율법의 마지막':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의를 위하여' 즉, 의롭다하심을 이하여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마지막이 되십니다. 여기서만 율법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무도 의롭게 만들지는 못하고 다만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지적한 후에 웨슬리는 이 마지막 기능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나서도 해야 할 더 큰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있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계속적으로 모든 믿는 이들을 자극시키기 때문에 그들이 율법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폭을 알면 더 알수록 그들은 더욱 더 서로 권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능을 통하여, 웨슬리에 의하면, 믿는 이는 하나님의 생명과 더 크게 교통할 수 있게 되는데 성령이 율법을 통하여 이 일을 행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를 깨닫게 하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하는 율법은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만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불손한 말과 생각도 금한다. 이러한 율법의 기능과 필요성에 대하여 웨슬리는 다음처럼 부연 설명한다.
"이제 우리가 이 완전한 법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는 내가 아직도 얼마나 부족한가를 느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더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는 주님의 피가 내 죄를 대속하시고 주의 성령이 내 마음을 정결케 하셔서 '완전하고 온전하며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주실 필요를 더욱 더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잠시도 떨어질 수 없듯이, 율법을 잠시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과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늘 이끌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믿음이 없는 악한 마음' 때문에 곧장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떠나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 둘은 우리를 서로에게로 보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그리스도는 율법에게로 우리를 보냅니다. 한편으로는 율법의 높이와 깊이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날아가게 만들며,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율법이 '금과 보석'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율법 하나 하나가 때가 되면 우리 주님께서 성취하실 은혜의 약속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의 기능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중요한 관계가 도출된다.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이끌고, 그리스도는 인간을 율법으로 이끈다. 율법의 기능에 대한 이러한 웨슬리의 견해는 정당하고 독특하며 율법에 대한 영향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본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독특한 이해를 가지고 웨슬리는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기 위하여 두 가지 질문, 즉 "어떻게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가?"와 "어떻게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는가?"를 물으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의 설교, 믿음으로 세워진 율법(I)에서 첫 번째 질문을 다루고 믿음으로 세워진 율법(II)에서 두 번째 질문을 다룬다.
웨슬리에 따르면,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이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길은 설교자의 경우 우선은 율법에 관하여 전혀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oracles)에서 율법을 지워버리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던가, 아니면 산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최소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젖먹이들로서 마치 '의의 말씀에 미숙한' 사람들과 같다".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두 번째 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치는 일"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1)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보다 이제는 성결이 덜 필요하다든지, (2) 성결의 필요성은 그 정도가 낮다든지, (3)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구실은 우리가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언약 아래에 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해야 할 필요성에 더는 묶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는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믿음에 즉각적으로 따라오는 열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행위가 믿음에 따라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가치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직은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사실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 믿음이 "결과적인 의"로 인정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믿음 "이전에" 의가 없지만 믿음 "후에"도 의가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침으로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는 구실(colour)을 주는 일은 결코 없다.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세 번째 길은 "우리가 성결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믿음이 핑계가 되는 양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을 잘 하지 않거나 안목의 정욕에 탐닉하거나 금식, 기도, 전도, 말씀 배우기에 대한 부작위(不作爲) 죄를 짓는다.
웨슬리는 이렇게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고하면서 다음처럼 경고한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끊어버리시고 여러분의 몫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돌리실까 염려하면서, 이제 열정을 다하여 처음 일들을 다시 찾아 행하십시오."
율법을 세우는 방법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도덕법을 따라 율법을 세운다.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전면적으로 율법을 가르치고, 그 모든 부분을 상세히 설명하며, 애써 강조함으로써, 즉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유보 없이 선포함으로써 율법을 세운다. 둘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이 성결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가져온다고 선포하게 될 때 율법을 세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 믿음도 사랑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계속 선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율법을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통하여 세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력한 확신보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소극적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과 적극적으로 율법을 세우는 방법을 통하여 율법을 굳게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 웨슬리는 마침내 반율법주의를 경계하라고 권면한다.
"반(反) 율법주의 (Antinomianism)를 경계하라. 이것은 '신앙을 통한 율법'이나 '그것의 일부분을 헛되게 만든다.' 열광주의는 자연적으로 이것에 귀착되며 사실상 그 둘은 불가분리적이다. 반율법주의는 수다한 형태로서 당신에게 스며들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아무리 경계하여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원리상으로나 또는 실제상으로나 그것에 대한 어떤 경향성을 지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조심하라.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라는 위대한 진리마저도, 그리스도께서 도덕법의 모든 초점을 채택하시어 그것을 사랑의 법과 결합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반율법주의로 몰아넣을지 모른다."
이어서 웨슬리는 반율법주의자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반율법주의자로서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치욕거리로 여기는 사람은 그 치욕이 마침내 자기 머리 위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를 경멸히 여기면 그를 보내신 자를 경멸히 여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보다도 최상급의 복음의 원수는 노골적으로 공개적으로 율법을 비판하고, 비방하고 그리고 한 두 가지 율법만이 아니라 크나 작으나 간에 율법 전체를 폐기하라고 가르치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심판하는 자가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 자리에 올라앉아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그 능력을 행하는 셈이 된다. 바로 사탄이 그들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교훈을 파괴하면서도 그것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이요, 그의 사업을 확장시키는 일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주님을 높인다는 일은 마치 유다가 예수님께 와서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춘 것과 같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입맞춤으로 주님을 파는 자들이며, 주님의 피를 내세워 그의 면류관을 벗기는 자들이며, 복음을 확장한다는 구실 아래 그리스도의 율법을 파괴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반율법주의자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웨슬리는 결론적으로 율법을 사랑하며 엄수할 것을 강력하게 권면한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허수아비 같이 나서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축복 받은 은혜의 도구를 결단코 가볍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마십시오. ... 율법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인 만큼 주를 위하여 그것을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기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다음 가는 것으로 여기고 그 율법이 여러분의 영광과 기쁨이 되게 하십시오."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다만 한 가지만이라도 어기면 그것은 안될 것입니다. 모든 계명을 엄수함과 동시에 불법을 철저히 배격하시오. 하나님의 모든 명을 전심전력 순행하시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능력을 주시는 이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단코 자비와 진리의 법,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법 그리고 낮아짐과 온유와 순결의 법이 당신을 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율법을 너의 목에 매고, 그것을 너의 마음 판에 새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려거든 율법을 굳게 잡고 절대로 놓치지 마십시오. '율법의 모든 의가 여러분 안에서 성취될' 때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가득찰' 때까지 율법이 여러분을 계속적으로 기대 속의 보혈로 인도하게 하시며 여러분의 희망을 계속적으로 확인하게 하십시오. ... '자유의 법'을 깊이 살피며 '그 속에서 계속 행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날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게 될 것입니다."
4. 요약과 나가는 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바울 사도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요한 웨슬리가 율법에 대하여 조금씩 다르게 이해하지만 모두 다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점에 있어서는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율법과 복음은 둘 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율법은 복음을 증거하고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율법에 대한 "예"이며 율법의 성취이다. 이 양자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통일체를 형성한다. 복음의 빛에서 율법은 그리스도의 법이 되고 율법의 요구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된 그리스도의 법으로서의 사랑은 율법의 요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인간이 바로 이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통한 믿음은 율법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하나님의 요구, 그리스도의 요구로서 "사랑하라"로 요약되는 율법의 요구를 기쁨과 사랑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수행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몸의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고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참조. 롬8:12-25).
이제 우리는 바울, 루터, 웨슬리의 사상을 이어받아 복음의 빛에서 율법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의 요구를 그리스도의 법인 사랑과의 관계에서 해석하여 그 요구를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은혜의 시대 이전에는 행할 수 없었던 이 율법의 요구를 인간이 수행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바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자유는 율법을 타파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에 대한 기쁨과 사랑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준다(루터).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지 말고 그것에 대한 사랑과 기쁨을 가지고 전심으로 그 요구를 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웨슬리).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은 사실로 그러한 자들의 것이 될 것이며 교회와 사회에 만연한 우리 시대의 도덕성 상실은 이들을 통하여 치유되어 갈 것이다.

출처 : 설교와 예화 모음
글쓴이 : 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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