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시리즈 (2)
리처드 포스터가 묵상한
신앙고전 52선 (Devotion Classics)
-리차드 포스터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 공동편집-
<이 책의 다섯 가지 주요 흐름>
1.”영적인 생활 준비”
2.”기도로 충만한 생활”
3.”덕이 있는 생활’
4.”성령 충만한 생활”
5.”사랑이 넘치는 생활”
6.””말씀 중심의 생활”
제 2부 기도로 충만한 생활
1. 토마스 머튼(20 세기)
2. 노르위치의 줄리안 _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한 기도
3. 랜슬롯 앤드류스 _ 기록된 기도문
4. 로렌스 형제 _ “하나님의 임재를 습관적으로 느끼는 것”에 대한
깊은 체험
5. 더글라스 스티어 _ “작은 격려”와 “부드러운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기도
6. 헨리 나우웬 _ “고독으로의 초대’(우리 마음 속에 열린 공간과
빈 공간을 창조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게 함)
7. 조지 버트릭 _ “개인 기도의 원리”
8. 쇠렌 키에르케고르 _ 기록된 기도문
9. 이블린 언더힐 _ “제한된 시간의 허영에서 나와 부요하고 영원한
세계로 올라갈 것”을 권면
10. 프랭크 로바흐 _ “하나님의 임Viewer재를 습관적으로 느끼는 것”에
대한 깊은 체험
11. 존 베일리 _ 기록된 기도문
12. 마틴 루터 (16세기)
13. 장니콜라스 그라우(18 세기)
마틴 루터(16세기), 장 니콜라스 그라우(18세기), 토마스 머튼(20세기)은 각각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우리의 태도를 우려했다. 즉 우리는 때때로 율법주의를 통해서 ‘우파의 죄’도 지을 수 있고(루터), ‘일련의 구절을 암송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못 할 수도 있으며(그라우), ‘영적 생활의 기교’를 통해 하나님을 다스리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머튼).
1.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
프랑스의 쁘라데에서 태어난 머튼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십대와 이십 대 초반에 나름대로 성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방황하고 육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이십 대 중반에 콜럼비아 대학에 다니면서 깊은 영적 회심을 경험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 가입하고, 26세 때에 켄터키의 겟세마네 수도원에 들어가 거기서 트라피스트(Trappist) 수사로 남은여생을 살았다. 그는 경건 일지와 명상집과 사회 비평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1948년 발표한 The Seven Storey Mountain(칠층산)은 그 당시의 영적 생활을 잘 반영해주는 일종의 자서전이다. 그가 20세기 후반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내적인 생활과 외적인 생활, 즉 묵상과 행동의 절묘한 균형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실린 글은, 깊이 있는 영적 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값진 지혜가 들어 있다.
9주 『묵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에서 발췌
“묵상의 방법들”(관련 성경 구절: 시39편)
1) 마술적인 방법들
묵상을 할 때 우리는 ‘방법’이나 ‘체계’를 찾는 것이 아니라, ‘태도’와 ‘조망(outlook)’을 계발해야 한다. 믿음, 열린 마음, 주의 집중, 경외심, 기대감, 간구, 신뢰, 기쁨을 계발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 살며, 하나님의 영 안에서 ‘눈으로 보지 않고서도’ 하나님이 ‘보인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의 살아 있는 신앙으로 고백할 수만 있다면 위의 모든 것들이 결국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존재를 가득 채우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안다. 믿음은 빛과 사랑을 주시는 성령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매어주는 띠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묵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어려움과 난관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해주는 마술적인 방법이나 체계들Viewer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2) 기도의 난관
우리가 기도하기 어려운 난관을 참고 은혜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면, 당연히 묵상과 기도가 매우 즐거운 체험임을 발견하게 된다. 묵상에는 운동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통로인 묵상은 ‘부활절’ 리듬을 표현한다. 그리고 기도와 묵상과 명상이,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으로 내려가는 것이며, 무기력과 좌절과 불신앙과 혼란과 무지함을 인정하는 것일 때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시39편, 시56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과 희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지속되어야 한다.
3) 단순한 선한 뜻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우리의 노력이 언제 교화되고 제대로 방향 지워져야 하는 것과, 또 언제 그것이 우리의 변덕스럽고 혼란한 마음과 성숙하지 못한 욕망에서 나오는가를 아는 문제이다. 단지 선한 뜻만 있다면, 그 자체가 결국에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선한 결과에 이르도록 충분히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아무리 선한 뜻이 있다 해도 심각한 실수를 저지를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일정한 유혹과 망상은 기도 생활의 정상적인 일부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정도의 묵상 기술을 습득했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온갖 종류의 이상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심지어 그 생각들이 우리의 노력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증표요, 초자연적인 은혜라고 확신하고서 엄청난 헌신으로 거기에 집착할 수도 있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올바른 궤도를 벗어나 Viewer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4) 초보자를 위한 지침
이러한 이유 때문에 건전한 충고를 온유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와 겸손은 기도 생활에 필수적이다. 영적인 지도자는 초보자에게 기도의 방법들을 가르칠 수 있고, 그에게서 잘못된 열심이나 그릇된 방향으로 노력하는 기미가 보이면 그것을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지도자의 말은 경청해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
5) 하나님을 거스름
노력의 올바른 사용은 하나님의 뜻과 은혜의 척도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만 하면 작은 노력으로도 먼 길을 간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더욱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완고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영적 위험에 처해 있다는 표시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잘못을 보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영적인 지도자가 정말로 필요한 것이다.
영적인 지도자의 일은 우리에게 신비한 체험을 얻기 위한 비밀스럽고 확실한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그 뜻을 분별하는 방법과, 겸손하고 인내하는 방법과, 우리 자신의 역경에 대한 통찰력을 기르는 방법과,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하는 주된 방해물을 제거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6) 영적인 생활의 ‘기교’
영적 생활에는 기교도 없고 지름길도 없다. 영적인 수법을 발견해서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다. 그들은 자기 확신과 자기만족에 있으므로, 묵상 생활에서 이것저것을 얻으려 하고 그들 나름대로 장래의 방침을 세우려고 작정한다. 그들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초보라는 사실에 만족하고,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체득하고, 진짜 기초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될 절박한 필요성을 갖고 있지 않으면 기도와 기도 생활에 진정한 어려움을 맛보기 시작할 수가 없다. 처음부터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7) 스스로에게 갇힘
‘높은 기도의 단계’(자기의 적절한 단계보다 높게 기도하고 묵상하고자 하는 것)라고 믿고 있는 것에 이르고자 힘쓰는 사람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고 그들의 현실과도 괴리가 있다. 스스로를 관찰하는 과정이나, 진보를 확신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스스로 올무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서 은혜가 떠난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스스로의 공허함과 무익함에 사로잡혀 무기력하게 되고 만다. 지나친 교만과 영적인 허영에는 나태함(게으름 혹은 영적인 무관심)이 뒤따른다. 그것을 치료하는 길은 겸손과 회개의 오랜 과정을 거치는 것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초보자 외에는 어떤 것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8) 현실을 기피하려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시도
영적인 무력감(내적인 혼란, 냉담함, 확신의 결여)은 또 다른 형태의 방해물이다. 이것은 시작은 만족스럽게 했으나 묵상 생활이 심각해질 때에 찾아오는 불가피한 침체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경우이다. 처음에는 쉽고 가치 있게 보이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우리의 지성도 작용하지 않아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상상력과 감정 따위도 산만해져Viewer 버린다. 때때로 사나워지기 까지 한다. 아마 바로 이 순간, 기도가 메마르고, 고독하고, 혐오스러울 때, 무의식적인 공상이 찾아올 수 있다. 그것은 불쾌하고 심지어 놀랍고 불안한 것일 수도 있다. 더욱 빈번한 것은 우리의 내적 생활이 사막과 같이 변해서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게 되는 경우다. 그것은 분명히 지나가는 시련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종 그 이상으로 심각할 때가 많이 있음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시작이 잘못되어 방해물이 나타난 결과일 수도 있다. ‘내적인 생활’과 그 외의 실재가 나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추정되는 ‘내적인 생활’은 실제로 현실을 기피하려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시도 밖에Viewer는 안 될 것이다.
9) 삶에 굳은 뿌리를 내림
우리는 ‘내부에’ 있는 것이 사실은 실제적이고, 영적이고, 초자연적이라는 것을 구실 삼아 ‘외부의 것’을 세속적이고, 육감적이고, 물질적이고, 은혜에 배제된다고 하여 소홀히 하거나 경멸하려고 한다. 이것은 그릇된 신학이요, 잘못된 금욕주의자이다. 이것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실제로는 전혀 현실성이 없는 추상적인 이상을 찾아 그 완전한 영역을 탐구하기 위해 현실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소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생활’을 특징짓는 무력감과 반감은 아마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영역들, 즉 몸, 일, 친구, 주변 환경들에 대한 단순한 존중으로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묵상은 삶에 굳게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나는 우리 대부분이 살고 있는 비수도원적인 세상에 머튼의 글들이 얼마나 잘 적용되는지, 정말 끊임없이 기쁘다. 묵상 기도에 대해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지침은 실제적이며 실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암시하는 어려움들은 우리가 처해 있는 위치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나는 기도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다 필요로 하는 영역 중 하나이기 때문에 특히 이 글을 좋아한다. 기도로 우리가 성소에 들어 갈 것이므로, 우리는 그저 우리의 영적 가난함을 자백해야만 한다. 어떤 교파나 교회나 단체든,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 유대 관계를 갖지 않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리 많은 진리를 갖고 있다 해도 결코 성공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부요한 경험과 어렵게 얻은 통찰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2. 노르위치의 줄리안(Jullian of Norwich, 1343~1413)
영국의 신비주의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서, 그녀는 노르위치에서 베네딕트 교단의 수녀로 생활했다. 줄리안의 신학은 신비적인 경험에 근거하고 있으며, ‘기쁨’은 그녀의 글을 이해하는데 핵심 단어이다. 저서로 Revealations of Divine Love(하나님의 사랑의 계시)가 있고, 그녀의 글들은 “후기 중세 시대 영국 신비주의의 가장 완전한 열매”라고 일컬어져 왔다. 여기 실린 글은 그녀의 강한 열망과 분별 있는 추론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녀의 ‘계시’개념을 오늘날 우리가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렵지만, 거기에는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중요한 통찰력이 들어 있다.
10주.『하나님의 사랑의 계시(Revealations of Divine Love)에서 발췌
“기도의 최고 형태”(관련 성경 구절 : 시8편)
1) 기도의 최고 형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고 기도하면 하나님께는 더 큰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더 큰 기쁨을 가져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충만하고 완전하여 그 속에는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우리보다 앞 서 살았던 모든 성인들의 도움을 힘입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선하심 에서 나오는 것들이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다. 기도의 최고 형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비천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내려온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주고 살아 있게 하며, 은혜와 덕행이 자라게 한다. 그것은 본성에 가깝고 은혜에 민첩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영혼이 찾고 또 언제나 구할 은혜이기 때문이다.
2) 측량할 수 없는 사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전력을 다해 하나님을,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 선하심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높고 크고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에 무한히 감격하여 영적인 묵상 생활을 인내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할 수 Viewer있다. 그분을 갈망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고, 우리를 갈망하는 것은 그분의 본성이다. 이런 삶 속에서 우리는 그분에 대한 사랑을 결코 멈출 수 없다. 나는 창조주를 사랑하고 묵상함으로써 내 영혼이 너무나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진정한 겸손과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넘치는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줄리안의 체험의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이해하게 된 것임을 주목해 보았는가? 줄리안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체험을 ‘기도의 최고 형태’라고 했다. 그것은 우리 현대인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실재이다. 우리는 ‘선한 생활’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에 존재한다고 가르침 받아 왔다. 제자도와 십자가와 순종,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선과 거의 연결시킬 수 없는 말들이다. 우리는 공의(rightness)의 선(goodness)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줄리안에게서 그리고 시편 기자에게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단서를 발견하게 될 줄로 믿는다.
3. 랜슬롯 앤드류스(Lancelot Andrews, 1555~1626)
랜슬롯 앤드류스는 젊은 시절 청교도의 일원이었지만, 지금은 영국 국교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추앙된다. 그는 뛰어난 말 재주와 유머 감각 덕분에 달변의 설교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작가이자 시인인 엘리어트(T.S. Eliot)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앤드류스의 뛰어난 천재성은 ‘마음을 하나님께로 올리는’기도를 작성하는 능력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발췌된 글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건 생활’을 위해 쓴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책은 앤드류스가 매일 매일의 경건 생활에 보조 자료로 사용하던 기도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11주.『개인적인 경건 생활(Private Devotions)』에서 발췌
(이 책은 성경책에 나와 있는 많은 기도문들과 함께 좋은 출발점이 된다)
“결코 지지 않는 빛”(관련 성경 구절 : 상하:7:18-19)
1) 결코 지지 않는 빛
하나님의 따사로운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아침이 하늘에서 찾아왔습니다. 오 주님,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빛을 지으신 창조 주시요, 세상을 밝히신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에게 빛을 주신 분은 바로 주 하나님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빛을 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또한 보이지 아니하고 지성적인 빛, 즉 하나님께 대해 알 수 있는 지식, 율법에 기록된 것, 시편의 멜로디, 잠언의 교훈, 역사의 경험 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는 결코 지지 않는 빛 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올려 주었고, 우리에게 회개의 틀을 주셨습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사 주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신 주님, 우리에게 그 은사를 거두어 가지 마소서. 주님의 은사를 구하는 우리에게 날마다 그것을 새롭게 하소서.
2) 주님은 생명의 샘입니다
오 하나님,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에 대해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림이 마땅하고 선한 것임을 믿습니다. 주님을 경배합니다. 주님께 고백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을 노래하며,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를 기르시는 분이시고, 보호자시고, 치료자시고, 우리의 주님이시고, 만유의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은 생명의 샘이시며, 영원한 것들의 보고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신성과 신비로움과 주권과 전능하심과 영원하심과 섭리로 인하여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주님은 저의 힘이시고, 저의 튼튼한 반석이시고, 저의 방패시고, 저의 구원자시며, 저의 구원의 뿔이시고 저의 피난처이십니다.
4.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1611~1691)
프랑스 로렌 지방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니콜라스 헤르만(나중에 로렌스 형제로 알려짐)은 아무런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경건 생활의 고전적 회고록 가운데 하나를 남겼다. 그는 1666년에 파리에 있는 ‘맨발의 카르멜회(the Discalced Carmelite)’라는 교단의 수도사가 되었고, 그 수도원 주방에서 일을 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의 생애가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가는 하나의 실험이 되기를 소원했다. 그는 하나님과의 습관적인 교제 상태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영적 상태에 도달했다. 다음 글은 그의 사후에 편집된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아미 기독교 역사상 그 어떤 글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는 기쁨을 그토록 아름답고, 그토록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12주.『하나님의 임재 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에서 발췌
“하나님의 임재를 습관적으로 느낌”(관련 성경 구절:시108편)
1) 하나님의 모든 것을 위한 나의 모든 것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 뿐…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가져가실 수 있도Viewer록 나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린 후에, 나는 하나님께 사랑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과 나 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 마음 속에서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신 그분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가능한 한 자주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나의 마음을 모아 그분을 경배하곤 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려고 할 때마다 더욱 열심히 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했습니다.
2) 참기 힘든 어려운 순간들
나는 이 일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참기 힘든 어려운 순간에도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것은 본의 아니게 내 마음이 방황할 때에도 고민하거나 화내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매일, 매시, 매분, 심지어 가장 바쁜 시간에도 하나님께 대한 나의 생각은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 마음에서 몰아내려고 힘썼습니다. 그것은 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나의 습관입니다. 비록 완전하게 해오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습관에서 큰 유익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유익이 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 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가 그렇습니다.
3) 하나님과의 친밀함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안에 자신을 신실하게 지키고 또 그분이 우리 앞에 계시다는 것을 늘 기억한다면, 적어도 의도적으로 그분께 죄를 짓거나 그분을 거스르게 되는 일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거룩한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즉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통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은혜를 구하고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 일을 자주 반복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됩니다. 나에게 베푸Viewer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나와 함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그의 큰 인자와 나 같은 비천한 죄인에게 베푸신 그의 무한한 자비는 아무리 찬양을 드려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4) 믿음만으로 충분하다
첫해 동안 나는 죽음과 심판과 지옥과 천국과 죄에 대하여 생각하며 경건 생활을 하고자 많은 시간을 따로 할애했습니다. 나는 그 일을 수년 동안 지속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그 생각에 전념하고, 심지어 일을 하는 중에도 온종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며, 내 안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 나는 우연히 정해진 경건의 시간에도 나머지 시간에 했던 것과 똑 같은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마음에 큰 기쁨과 위로가 생겼습니다. 이러한 습관은 내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고양시켜 주었습니다. 믿음만으로도 나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5) 나의 고난의 원천과 실재
처음 십 년 동안 나는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하나님께 헌신적이지 못하다는 사실, 내 과거의 죄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아무 공로 없는 내게 주신 그 큰 은혜, 이런 것들을 알게 된 것이 나의 고난의 원천이요, 실재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모든 이성과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나를 대적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 편이 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었습니다. 때때로 나는, 내가 이런 노력을 통해 얻은 모든 복이 단순히 내가 그렇게 가상하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매우 어렵게 도달하는데 내가 너무 쉽게 이 상태에 도달한 체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이것이 모두 의도적인 기만에 불과하고, 이 일을 하다가 나의 구원의 소망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6) 습관적이고 은밀한 침묵의 대화
마침내 나는 포기하고 싶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나는 나 자신이 홀연히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절망 중에 있던 내 영혼 속에서 나는 갑자기 깊은 내적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내 영혼이 마치 진정한 안식의 자리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 앞에서 단순한 믿음과 겸손과 사랑으로 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저의 유일한 바램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뜻을 제게 온전히 다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날들 동안 내게 일어난 일들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내게는 하나님의 뜻을 제외하고는 아무 뜻도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나는 오로지 범사에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고자 힘썼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나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일에 적합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형태의 경건 생활과 정해진 기도들을 다 포기했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속에서 인내하는 것만을 나의 일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만 나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하나님께만 애정 Viewer어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을 나는 ‘하나님의 실재적인 임재’(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이 나누는 습관적이고 은밀한 침묵의 대화)라고 일컬었습니다. 그것은 종종 내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줍니다.
7) 인자와 선으로 충만함
나는 내 영혼이 거의 삼십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해 왔음을 전혀 의심치 않고 확신합니다. 나는 내가 상처와 죄악 투성이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요, 왕이신 하나님께 온갖 죄를 다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깊은 슬픔에 잠겨 하나님께 나의 모든 죄를 자백하고, 그분의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을 나와 함께 행할 수 있도록 그분의 손에 나를 위탁합니다. 인자와 선으로 충만한 왕이신 하나님께서 결코 나를 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사랑으로 나를 품어주시고, 그분의 잔치에 나를 초대해 주시며, 그분의 손으로 나를 섬겨 주시고, 그분의 보고의 열쇠를 내게 주십니다. 또한 그분은 나와 대화해 주시고, 나를 기뻐하시며, 나를 그분의 총애 받는 자처럼 대접해주십니다. 나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속에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리차드 포스터의 묵상>
로렌스 형제와 같이 평범한 사람이 이렇게 놀라운 책을 썼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로렌스는 자신을 가리켜 ‘그릇과 냄비의 주인’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가 주방에서 했던 정규적인 일을 고상하게 일컬은 것이다. 그는 그 일을 하면서 그것을 ‘지금 이 순간의 성례’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그의 경험이 우리에게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들 대부분은 매력도 없고, 지위도 없고, 특권도 없는 그런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결정들로 인해 세계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습관적으로 연습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그러한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다.
5. 더글라스 스티어(Douglas V. Steere, 1901~)
20세기 초반에 미시간 주립대학과 하버드 및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로즈 학자요(Rhodes Scholar:로즈 장학금 수령자), 탁월한 사상가요, 많은 훌륭한 경건 서적을 저술한 숙련Viewer된 작가이다. 그는 대부분의 생애를 해버포드(Haverford)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친우회(the Society of Friends –퀘이커 교도의 공식 명칭)의 일원이었다. 그는 지난 세기의 몇 안 되는 미국 작가 중 한 사람으로서 학문적인 완전성을 영적인 확실성과 결합시켰다. 또한 그는 묵상(내적인 삶)과 행위(외적인 삶)의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였다. 그와 그의 아내인 도로시는 미국 친우회 봉사 위원회(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의 일원으로서 많은 임무를 띠고 아프리카와 유럽과 아시아를 여행하였다. 여기에 실린 글은 1938년에 Prayer and Worship(기도와 예배)이라는 그의 책에서 발췌한 것으로, ‘중보기도’를 다루고 있다.
13주.『기도와 예배(Prayer and Worship)』에서 발췌
“마음 속에 있는 기도의 샘”(관련 성경 구절 : 신9:12-21)
1) 마음 속에 있는 기도의 샘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는 간구하는 기도의 한 형태로서, 오늘날과 같이 대대수가 공동체 의식을 잃어버리고 개인주의적으로 살아가는 세대의 신앙에 절실히 요구되는 기도이다. 마음속에 있는 기도의 샘을 이것보다 더 절실하게 건드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의 삶을 올려 드리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 그것을 드러내 놓을 때, 그리고 그 영혼이 졸음에서 깨어나기를 위해 기도하고, 내적인 건강의 활력을 위해 기도하며, 파괴적인 습관을 떨쳐 버릴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동료들과의 자유롭고 생명력 있는 관계를 회복하도록 기도하며,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위해서 기도하고, 신랄한 반대에 저항 할 수 있는 용기를 위해 기도할 때, 그때야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분의 관심을 서로 나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때서야 비로서 다른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놓였던 담들이 무너지고, 우리가 친밀한 대가족으로 서로 짜여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기도로 상대방을 하나님께 올릴 때 형성되는 것보다 더 큰 친밀감은 없다.
2) 우리의 삶의 기슭에서 찰싹거림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거나 다른 사람들의 삶에 어떤 마술적인 힘이나 주문을 불어 넣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기 전부터 우리는 각 사람의 삶이 그 참된 중심을 깨닫도록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이미 그 사람의 삶의 기슭에서 찰싹거리고 계심을 알 수 있Viewer다. 각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절대로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다.
이러한 기도는 단지 다른 사람의 삶이나 그의 새로운 삶의 영역이나 어떤 상황을 포위하는 일에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과 우리가 협력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 그런 협력 관계에서 하고 있는 일 이외의 것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다. 당신이 계속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민감해 있으면, 곧 그 사실을 깨닫고 기도를 바꾸게 될 것이다. 모든 간구 기도에서처럼,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굴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당신이 한 친구의 삶의 어떤 부분이 해결되기를 위해 기도하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삶에서 그 친구에게 막힘이 되었던 것을 바로잡기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또 당신이 곤경을 당하고 있는 친구를 위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다 보면, 당신이 직접 필요한 짐을 꾸려 그 친구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고통을 나누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또는 다음 달에 쓸 생활비 등을 그 친구에게 주어야 할 수도 있다. 중보기도는 기도를 시작했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3) 조그만 격려, 부드러운 속삭임
침묵 가운데 적극적인 활동을 하면서 죄를 회개하고, 더러운 것을 정결하게 하고, 복잡한 마음을 단순하게 하고, 지친 심령을 새롭게 하며, 간구와 중보로 조용히 주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귀를 기울이면, 종종 해야 할 일등에 대한 분명한 통찰력이 생긴다. 종종 그 통찰력은, 우리가 마음 문을 열어 우리의 필요를 아뢰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들이려는 태도로 인내할 때 생긴다. 또한 그 통찰력은 대낮에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을 통해 갑자기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감동을 받은 것에 응하여 살려고 한다면, 이러한 통찰력을 귀히 여겨야 하며 또한 주목해야만 한다. 이러한 통찰력이 그것을 시행하기 위해 값비싼 희생이 따르는 어떤 실제적인 조정을 내포하게 될 때, 퀘이커 교도들은 그것을 ‘관심’이라고 불렀다. 그들에게는 조그만 격려, 부드러운 속삭임을 표현할 만한 어휘가 없었다. 그 두 가지는 똑같이 중요하고 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대한 관심을 대변한다.
“당신은 과연 믿음으로 행동했는가? 당신은 과연 순종했는가?”
이런 변함없는 충성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기도를 통해 얻은 통찰력과, 그 뒤에 생겨서 없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과 조화롭게 협력하는 타인에 대한 관심은 기도의 적극적인 면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기도를 위한 유일하고 적절한 준비이기도 하다.
4) 돌려주는 사랑
기도의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않는 완전한 기도 생활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도란 모든 영혼을 감싸주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관심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그런 반응이 가장 직접적일 때 그것을 가리켜 ‘찬양(adoration)’이라고 부른다. 찬양은 ‘돌려주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찬양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바로 그 존재를 위해서, 하나님의 눈부신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인간의 활동 가운데 다른 어떤 것도 기도보다 더 깊이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인도해 가지 못한다. 그리고 다른 어떤 기도 방법도 중보 기도보다 더 견고하게 인간의 삶의 문제 속으로 파고 들어가지 못한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된다. 그 둘은 두 개의 계명이 아니라 하나의 계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되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우리의 힘으로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그들을 위해 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훨씬 더 깊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 반대의 경우도 사실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면 할수록 그들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
6.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 1932~1996)
헨리 나우웬은 네덜란드 출생으로, 로마 카톨릭 사도요, 심리학자로서 예일, 하버드, 노트르담 등에서 가르쳤으며 수십 권이 넘는 책들을 저술했다. 나우웬의 영적인 순례 길은 그로 하여금 국제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인 라르쉬(L’Arche)에서 정신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했다. 그의 영적인 민감성은 참신할 뿐만 아니라 예언자적이다. 여기에 실린 글은 우리를 친밀함으로 초대하며, 우리를 영적인 생활로 안내한다.
14주.『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고(Making All Things New)』에서 발췌
“우리의 삶 속에 고독을 받아들임”(관련 성경 구절:왕상19:9-13)
1) 노력
영적인 생활은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로 들어 올리는 성령의 은사이다. 그러나 그 은사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마음을 어딘가에 고정시킨다는 것은 진지한 열망을 내포할 뿐만 아니라 강한 결심도 포함한다. 영적인 생활은 인간의 노력도 요구한다. 우리를 세상 염려가 가득 찬 생활로 계속해서 잡아당기는 힘은 결코 쉽게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막10:23)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노력에 대한 필요성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의 훈련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훈련 없는 영적 생활은 불가능하다. 훈련은 제자도의 다른 면이다. 영적 훈련의 연습은 우리로 하여금 작고 부드러운 하나님의 음성에 더욱 민감하게 만든다. 영적 훈련의 연습을 통해 우리는 그 세미한 음성에 주의하게 되고 그 음성이 들릴 때 기꺼이 응답하게 된다(왕상19:9-13).
2) 불합리한 삶에서 순종적인 삶으로
염려 많고 할 일이 너무 많은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바깥의 소음이 너무 커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기가 매우 Viewer어렵다. 종종 우리는 귀가 멀어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부르시는지 알지 못하고, 어떤 방향으로 우리를 부르시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불합리하게 되었다. 영적 생활이 훈련을 요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좀처럼 듣지 못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면 우리의 삶이 순종하는 삶으로 변한다. 영적인 훈련은 불합리한 삶에서 순종하는 삶으로 천천히 옮겨가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리고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찬 시끄러운 삶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자유로운 내적 공간이 있는 삶으로 옮겨가기 위해서 필요하다.
예수님의 삶은 순종의 삶이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고, 언제나 아버지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였다.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기도이다. 모든 기도의 핵은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훈련은 우리의 삶에 내적인 공간과 외적인 공간을 창조해 내려는 집중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만 그 공간에서 이런 순종을 연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의 것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만한 여지가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삶을 차지하는 것을 영적인 훈련을 통해서 막을 수 있다. 영적 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로이 기도할 수 있게 한다. 즉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기도할 수 있게 한다.
3) 시간과 공간
고독이 없으면 사실상 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고독은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과 더불어 시작된다.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우리의 삶 속에 적극적으로 임재 하셔서 고치시고 가르치시고 안내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시간과 공간을 따로 떼어서 우리의 온전한 관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6:6)
4) 내적인 혼돈
우리의 삶 속에 어느 정도의 고독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장 필요하면서도 매우 어려운 훈련 중 하나이다. 비록 우리가 진정한 고독에 대한 마음 속 깊은 소원을 가자고 있다 하더라도 막상 고독한 장소와 시간에 부딪히면 일말의 두려움이 생긴다. 우리에게 대화할 상대도 없고, 읽을 책도 없고, 시청할 텔레비전도 없고, 전화를 걸 곳도 없으면 우리의 마음에 혼돈이 일어난다. 이 혼돈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어지럽히고 혼란하게 해서 다시 바빠지기를 거의 기다릴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인의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는 것이 우리 내면의 모든 의심과 염려와 두려움과 기분 나쁜 기억과 해결되지 않은 갈등과 화난 감정과 충동적인 욕구 등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복잡다단한 외부의 문제들을 제거할 때, 내적인 갈등들이 더욱더 선명히 드러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우리는 내적인 소음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종종 이런 외적인 소동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혼자 있기 위해 애를 먹는 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내적인 갈등과 싸운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워서 우리가 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독의 훈련이 더욱 중요하다. 고독은 이미 몰두하고 있는 생활에 대한 자발적인 반응이 아니다. 고독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주의 깊게 계획을 세워 고독을 위한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
5) 달아나고 싶은 유혹
우리가 훈련에 얼마나 충실하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처음에는 혼자 있는다는 것이 우리의 욕구와 반대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달아나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공상에 잠기거나 잠자는 Viewer것 등…).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갖고 계속해서 훈련을 하면, 하나님과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서서히 발견하게 된다. 비록 우리가 홀로 있는 시간을 통해 그다지 만족할 만한 일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도, 그 시간을 갖지 못하고 보낸 하루가 그 시간을 갖고 보낸 하루에 비해서 덜 ‘영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6) 소망으로 가는 길
고독 속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을 알게 된다. 따라서 고독 속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고통과 갈등은 소망으로 가는 길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고난이 끝난 후에 생기는 어떤 것에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영의 실재적인 임재 위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고독의 훈련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이런 소망스런 임재를 점진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한 기쁨과 평화의 시작을 지금부터 맛볼 수 있게 한다. 고독의 훈련은 기도 생활을 발전시키는 매우 강력한 훈련 중 하나이다. 이는 우리를 일상적인 일들이나 특별히 열중하는 일의 속박에서 풀어주며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도록 하는, 비록 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간단한 길이다.
<리차드 포스터의 묵상>
고독은 영적 생활에서 아주 깊이 있는 훈련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고독은 남보다 우월해지려고 하는 우리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우리 자신도 포함해서) 우리의 고독을 시간 낭비로 본다. 그 시간은 ‘행동이 있는 곳’과 단절이 Viewer되는 시간이다.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침묵과 고독 속에서 비록 더딜지라도 반드시 우리를 병적인 자아 집착증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다. 때가 되면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행동이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된다. 일단 우리가 우리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면, 세상의 모든 요란한 소리와 관심들이 멀리서 들려오는 단편적인 메아리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서 균형 있는 시각과 자유를 가지고 오늘날과 같은 기계 문명의 소란과 소동의 현장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7. 조지 버트릭(George A. Buttrick, 1892~1980)
1892년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랭카스터 인디펜던트(Lancaster Independent College)에서 공부했고,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15년에 회중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죽기까지 뉴욕 메디슨 에비뉴 장로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는 목회 기간 중에 전 세계의 많은 대학들을 다니면서 수많은 강연과 강의를 했고, 영적 생활에 대한 저술가로서의 은사도 있었다. 여기에 발췌된 글은 기도의 실제적인 연습을 다루고 있으며 ‘상세한 안내’를 제공해 준다.
15주.『기도(Prayer)』에서 발췌
“개인 기도의 원리”(관련 성경 구절 : 눅6:27-36)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교제는 형식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무형의 것도 아니다. 교제에는 그것을 키우는 배양 과정과, 행위와, 의무와 심지어 훈련도 있다. 격의 없는 마음이 때때로 그 관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속박으로서가 아니라 지침으로 개인 기도의 간단한 원리를 소개하려고 한다.
기도는 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한 마음의 준비에서 시작한다. ‘개인의 경건’이라는 교회에는 반드시 질서정연하게 정돈된 마음의 현관을 통해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초점을 맞추었을 때 얻어진다. 그 다음 단계는 ‘믿음의 행위’이다(“무엇이든지 너희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다 받은 줄로 믿으라”). 우리는 의심이나 두려움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1)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사실상 기도에는 정해진 순서가 없다. 그러나 일차적인 마음의 충동과 기도의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기도의 첫 단계는 “감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신중하게 회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일을 통해 우리는 ‘만족이라는 큰 보물’이 이미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감사기도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감사기도 또한 깊은 성찰을 통해 “인생의 ‘영원한’ 사랑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서 세속적이고 환경에 얽매인 감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인생 너머의 영원한 삶에 뿌리를 내Viewer려야 한다.
2) 구체적인 사실을 고백함
기도의 다음 단계는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죄는 ‘생명의 질서’를 버린 것이다. 따라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기까지는 내적인 평안도 능력도 없다. 고백의 기도도 감사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 지혜로운 고백의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용서를 수납하는데 까지 인도한다. ….. 고백의 기도를 드리고 나서 무릎을 펴고 일어서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인정하는 표시요, 그의 사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의 표시요, 그의 은혜 속에서 누리는 새로운 자유의 표시이며 진심으로 죄를 버리겠다는 각오이다. 그러한 결심이 없으면 고백은 불완전하다. 우리의 의지가 아무리 약하다 해도, 그 의지가 정정당당히 새로운 삶의 편에 서서 낮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참회를 한다 해도 그것은 자기기만이 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남용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참된 고백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3) 사랑은 얼굴을 본다.
그 다음에 뒤따르는 기도는 ‘중보기도’이다. 개인적인 중보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참된 사랑은 무리를 보지 않고 각각의 얼굴을 본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른다”. 중보는 구체적인 것 이상이다. 그것은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 대상자들의 짐을 우리의 마음에 짊어질 것을 요구한다.
4)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기도의 네 번째 순서는 ‘간구’이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우리의 세상적인 필요를 올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이 끼어드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의 간구 기도를 드리기에 앞서 감사를 드리고 우리 죄를 고백하고 이웃을 위해 기도하면 이기적인 간구를 막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나중에 간구를 드리면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러나 간구는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하기” 위해서 은혜 속에서 자라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의 시각이 희미하고, 우리의 목적과 동기가 혼동되기 쉽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간구하는 기도는 언제나 이렇게 결론이 나야 한다.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5) 존경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친교
이 네 가지 기도의 사이는 묵상으로 채워져야 한다.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선하심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들에 관한 말씀을 기다려야 한다. 고백의 기도를 드린 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찬양하면서 조용히 그의 인도하심을 바라야 한다. 중보의 기도를 드린 후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바라보셨던 것처럼 온 세상의 필요가Viewer 무엇인지 묵상하며 그것을 보려고 애써야 한다. 간구의 기도를 드린 후에는 다시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묵상하며 기다려야 한다. 기도는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받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의 가장 깊은 정서는 존경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매일매일의 기도는 시작과 똑같이 찬양으로 끝나야 한다. 기도의 가장 좋은 마무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이나 성품으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며, 서투른 우리의 기도를 바로잡는데 가장 좋기 때문이다. “아멘”이란 말은 “그대로 되어지이다”라는 뜻이다. 그것은 기도한 대로 신실하게 살겠다는 우리의 결단이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행위이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기도에 대한 버트릭의 말은 내게 도움이 된다. 나는 그의 글을 읽을 때 기도하고 싶어진다. 나의 경우는 기도를 분석하고 토론하는 데에 빠져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일’을 회피하기가 쉽다. 그러나 버트릭의 ‘암시’에 대해 분명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나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기도에 정진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8. 쇠렌 키에르케고르(S∅ren Kierkegaard, 1813~1855)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 초 덴마아크의 코펜하겐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1843년에 처녀작 Either / Or (양자택일)를 저술하였다. 그 책은 약화된 기독교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당시의 종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성이 신앙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인간의 잠재력이 인간의 연약함보다 우위를 차지하던 소위 계몽주의 시대에 그의 철학은 정체성을 잃어버린 세상과 교회에 바른 잣대 구실을 했다.
여기에 실린 기도문은 그의 사상뿐 아니라 그의 감성까지도 반영한다. 그의 날카로운 지성 뒤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감성 또한 자리잡고 있다.
16주.『키에르 케고르의 기도들(The Prayers of Kierkegaard)』에서 발췌
“한 가지 만을 원하게 하소서”(관련 성경 구절 : 삼상 5장)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가 무엇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모른다면, 우리가 아는 것이 제 아무리 많이 쌓여 있다 한들 무엇이 되겠습니까? 단지 잘게 부숴진 파편에 지난 것 아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제아무리 그것이 세상을 에워싼다 해도 하다가 중단한 일에 불과한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하나시며, 모든 것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에게는 그 한 가지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감성에게는 이 이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실함을 주시고, 의지에게는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하는 순수함을 주옵소서. 번영할 때는 한 가지만을 원하는 인내심을 주시고, 정신이 산만할 때에는 한 가지만을 원하는 집중력을 주시고, 고통스러울 때에는 한 가지만을 원하는 참을성을 주소서.
모든 일의 시작과 완성을 주시는 주님, 이른 아침에는 젊은이들에게는 한 가지만을 바라는 결단력을 주시고, 황혼녘에는 노인들에게 그들이 처음 결심한 것을 새롭게 기억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처음이 나중 같게, 나중이 처음 같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단 한 가지만을 바라는 생명을 소유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런 일은 참으로 드뭅니다. 중간에 다른 것이 끼여 들기 때문입니다. 죄가 그 사이에 끼여 듭니다. 매일같이, 끊임없이, 그 사이에 다른 것이 끼여 들어 옵니다. 지연과 방해와 중단과 속임과 부패가 그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이 시간에 회개하오니 다시 한번 한 가지만을 원하는 용기를 주옵소서.
참으로 회개는 우리의 일상적인 업무의 중단입니다. 참회하는 자가 홀로 자책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그날이 안식의 날인 것처럼, 우리는 회개할 때 우리의 업무를 내려놓습니다. 회개는 참으로 중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 시작할 때의 상태를 되찾아 죄가 분리시킨 것을 다시 새롭게 동여매고, 슬픔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하며, 걱정 속에서 그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왕성하기 위한 중단입니다.
시작과 완성을 주시는 주님, 필요한 날에 주님의 승리를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불타는 소원과 우리의 확고한 결심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회개의 슬픔 속에서 우리가 얻게 하소서. 그것은 바로 단 한 가지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일류 철학자의 기도를 접해본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냉철한 지성과 부드러운 경외심은 서로 원수가 아니라 친구이다. 우리는 지성과 감성을 너무 오랫동안 분리시켜 왔다. 그Viewer것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축소시켜 버렸다. 우리는 지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감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실제로 우리는 지성을 가지고 감성 속으로 내려가 거기서 끊임없는 경외와 계속적인 찬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지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어 역사할 때, 일종의 ‘사랑의 합리성’이 생겨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에 편만하게 된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통일성을 얻게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된다.
9.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 1875~1941)
20세기에 살았던 여성가운데 언더힐 만큼 경건생활에 대해 우리의 이해를 넓혀 준 사람은 별로 없다. 그녀는 학문 연구와 저술로서 종교와 영성학 분야에서 성도들과 비판자들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녀의 유명한 저서인 Mysticism: A Study in the Nature and Development of Man’s Spiritual Consciousness(신비주의: 인간의 영적 의식의 본질과 발달에 관한 연구)는 영성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인 교본으로서 계속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언더힐의 개인적인 영성 개발은 그녀의 지적인 능력과 결부되어, 진정한 영성과 학문적인 우수성을 결합시키려는 당시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여기에 실린, 기도의 내적인 구조를 묘사한 그녀의 글은 기도 생활에서 지, 정, 의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하여 밝혀주고 있다.
17.『신비주의의 본질(The Essentials of Mysticism)』에서 발췌
“기도란 무엇인가?”(관련 성경 구절: 행17:22-34)
1) 촉수를 내미는 것
기도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의도적으로 영적인 실재를 지향하고 오로지 거기에 응답하는 우리의 의식적인 생활의 일부이다. 그 영적인 실재란 바로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 속에 내재해 계심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결코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활동하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일상적인 현세의 이익추구에서 벗어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기도는 우리의 의식이 촉수를 내미는 것인데, 투쟁적이고 변하는 세상 만물 속에 간직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신적 존재를 향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그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되는 “영원한 진리, 참된 사랑, 그리고 사랑하는 영원한 분” 에게로 내미는 Viewer것이다.
한 사람의 전 생애는 이러한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인 실재에 대한 균형 잡힌 반응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두 개의 질서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영원의 시민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의 시민이다. 우리의 의식은 하나님과 이웃 사이,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서 영원히 움직인다. 우리의 존재의 온전함과 정신의 건전함, 그리고 균형 잡힌 생활은 이러한 이중적 상황에 우리가 어떻게 완벽하게 적응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2) 세 가지 기능
생각하는 기능, 느끼는 기능, 의지를 발동하거나 행동하는 이 세 가지 기능은 자아가 다른 자아나 개체들에 대하여 반응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실제적으로 다 포괄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자기표현의 모든 가능성이 이 세 가지 기능의 결합 속에 들어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그 세 가지 기능 모두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도 그것들이 필요할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독교의 하나님 안에서만 그것의 참된 목적을 발견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분만이 지⋅정⋅의를 가진 전 인격자이기 때문이다.
3) 일과 안식
기도는 우리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인 생활의 모든 힘을 영적인 질서 쪽으로 향하게 해야만 한다. 기도는 또한 이러한 힘들을 최고도로 발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 그 힘들이 생각과 사랑과 의욕의 적합한 대상에게로 향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기도는 우리를 최고의 상태로 끌어 올려야만 하며, 우리의 의식이 더할 나위 없이 꽃피워져 있음을 나타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초자연적인 질서의 향기를 맡게 되며, 우리가 얼마만큼 힘쓰Viewer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존재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자연의 질서 속에 살고 있는 생명체는 먹어야 하고 자라야 하며, 고통을 겪기도 하고 즐겁게 지내기도 하며, 세상에서 에너지를 공급받기도 하고 다시 그것을 세상에 되돌려 주기도 한다. 그래야만 온전하고 건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것들, 즉 주는 것과 받는 것, 일하는 것과 안식을 얻는 것, 이것은 마땅히 기도의 영역 속에서 우리가 누려야만 하는 것이다.
4) 무위에서 행위로의 변화
우리가 어떤 일을 의식적으로 할 때, 무위에서 행위로의 변화는 일정한 순서를 따라 일어난다. 제일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의 개념이 형성되고, 그 다음에 그것은 하고 싶다거나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며, 그리고 그것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이러한 단계는 연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각각의 의식적인 행위 뒤에 놓여 있는 과정을 분석해 보면 그것이 정상적인 일련의 발전 과정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제일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느끼고, 그 다음에 행동한다. 이러한 세 가지 주된 힘이 기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즉 어떻게 작용하고, 또 어떻게 작용해야만 하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5) 능동적이고 잘 훈련된 지성
일반적으로 기도는 소위 지적인 행동과 더불어 시작해야만 한다. 즉 기도할 때는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인간의 이성이 필요 적절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고 해서 내가 종교적인 지성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적인 기도에 꼭 필요한 것은 겸손과 사랑이다. 그러나 그 겸손과 사랑이 능동적이고 잘 훈련된 지성과 나란히 병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6) 마음의 생각을 준비함
기도는 지적인 조정으로 시작한다. 잡다한 다른 생각들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진지하고 겸손하게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마음을 영적인 것들에 복종시키며, 새로운 생명이 유입되도록 마음의 생각을 준비시킴으로써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다가 그 단계에서 멈추면, 우리의 자아가 그 이전이나 다름없이 하나님과 접촉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좋아하는 동안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그 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은 감정의 도움 없이는 그 생각의 대상과 여전히 거리를 두게 된다. 지성은 근본적으로 정적인 것이다. 그것만 가지고는 천국으로 인도하는 왕도를 따라갈 수는 없다.
7) 근면한 의지와 열정적인 마음
생각의 기능이 끝나는 곳에서 의지와 감정의 기능이 시작된다. 욕구와 의도는 우리에게 있는 가장 역동적인 기능으로써 그 역할은 참으로 크다. 그것들은 무한하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탐색자들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도구들이다. 이성은 우리를 산의 정상까지 인도한다. 그 다음에 경사진 비탈길을 인도하는 것은 열정적인 마음에 의해 촉구되는 근면한 의지인 것이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인격의 중심적인 일들로 의지와 욕구를 이처럼 강조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보증해 준다. 우리의 의지와 욕구를 영적인 실재이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일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이며, 우리의 열정과 힘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집중시키는 것이다.
8) 기도의 핵심과 기술
지성과 감정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날마다, 시간마다 변화되며, 조정하기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저 높은 수준의 감정이나 지각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데에 기도 생활의 가치를 둔다면, 우리는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감정이나 지각이 종종 제 할 일을 못하는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주도적인 의지는 남아 있게 되고, 기도하는Viewer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우리의 의지가 우리에게 있으니 그 의지를 주님의 것으로 만들어 주소서”라는 기도는 가능하다. 우리의 의지를 확고하게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꾸준하고 치우침 없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기도의 핵심이요, 기도의 기술이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언더힐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에 Viewer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녀는 우리에게 우리의 지,정, 의가 기도에 어떻게 동원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의 멋진 이성적 기능을 소홀히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를 좀 더 높아지고 좀 더 깊어지게 하기 위해 우리의 감정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또한 조금만 있으면 곧 지성소에 들어가게 될 텐데 참지 못하고 의지의 연약함을 드러낼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우리의 지, 정, 의의 모든 힘을 골고루 잘 이용한다면 얼마니 좋겠는가?
10. 프랑크 로바흐(Frank Laubach, 1884~1970)
1915년 프랑크 로바흐는 아내와 함께 필리핀에 선교사로 갔다. 그는 민다나오 섬에 여러 교회를 설립한 후에 마닐라에 유니온 칼리지를 세우고 그곳의 학장이 되었다. 1930년에 민다나오 섬에 돌아온 그는 이후 필리핀의 기독교인들을 원수처럼 여기는 회교도인 모로족(Moros)과 더불어 살았다. 그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매 순간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그들과 함께 살았다. 그의 교육적인 노력을 통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만 오천 명의 사람들에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가르치는 책임이 그에게 주어졌던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수천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풍성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8주.『한 현대 신비주의자의 편지(Letters by a Modern Mystic)』에서 발췌
(민다나오 섬에서 지내는 동안 쓴 편지)
“하나님께 창을 열기”(관련 성경구절:시139:1-10, 17-18, 23-24)
1) 창문을 열다
1930년 1월3일
돌이켜보면 지난 한 해는 내 생애 최고의 해였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럽고 기대감이 넘치는 한 해였습니다. 앞으로의 일 년은 더욱 영광스러운 한 해가 될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은 단지 창문을 연 것 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해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의 친밀하심을 계속해서 놀랍게 체험해 왔습니다. 올해에는 작년보다 더 매 순간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채우려는 나의 실험과 더불어 더욱 승리하리라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다짐해 보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어 놓은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필요에 대해서도 마음을 활짝 열어 놓겠다는 것입니다. 창문은 위로 열릴 뿐만 아니라 밖으로도 열립니다. 특별히, 창문은 사람들이 참으로 필요로 하는 것에서는 아래로도 열립니다.
2) 순간순간
내가 지금 전력을 다해 실천하려고 애쓰는 것은 내가 깨어 있는 그 ‘순간순간’마다 ‘주님의 사랑에 몰입하여’ 주님의 뜻에 굴복하고, 순응하여 복종하고, 민감하여 그분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두 가지 불타는 열정을 의미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고, 둘째는 마치 바이얼린이 연주자의 손놀림에 따라 아름다운 선율을 내듯이, 내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반응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창문을 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얼마 후 그 영광이 당신의 주변세계에 반영될 것이며, 당신의 머리 위에 있는 바로 그 구름 속에서 영광의 광채가 빛나게 될 것입니다.
3) 과연 가능할까?
내가 매 순간마다 의식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을 계속 떠올림으로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의 마음속에 잔상으로 남아 계시고, 모든 관념이나 교훈 속에 하나의 요소로 늘 자리 잡으실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나의 남은 생애가 과연 이런 생활을 해낼 수 있을지 한 번 시험해 보려고 합니다. ……..”어떤 날의 어떤 시간이Viewer 완전하게 되고 안 되는 것은 단지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시간 전체를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시간 내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기다리며,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똑같이 하려고 애쓴다면 그 시간은 완전하게 됩니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나는 프랑크 로바흐의 기도 체험들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문맹퇴치 방법을 계발해서 전 세계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위대한 사람이 바로 프랭크 로바흐이다. 또한 그는 그가 대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저는 어떤 사람을 만나면 곧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삶이 과연 어떤 삶인지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런 그의 삶의 자세는 내게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11. 존 베일리(John Ballie, 1886~1960)
존 베일리는 스코틀랜드의 개어로취에서 태어났다. 신학자, 교수, 그리고 저술가로 그는 매우 존경 받는 사람이었으며, 지성과 감성을 존 베일리보다 더 잘 조화시킨 신학자는 거의 없다. 그는 이블린 언더힐과 같이 신앙과 이성을 균형 있게 조화시킨 사람이었다. 그의 저작 『개인 기도 일기(A Diary of Private Prayer)』는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로 사용할 수 있는 기도 집이다.
19주.『개인 기도 일기(A Diary of Private Prayer)』에서 발췌
“아침 기도”(관련 성경 구절:눅12:22-31)
1) 첫째 날 아침 : “하루의 첫 생각”
영원하신 하나님, 오늘 저의 첫 생각이 주님께 대한 것이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의 첫 충동이 주님을 경배하는 것이 되게 하시며, 저의 첫 마디 말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되게 하시고, 저의 첫 행동이 기도로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되게 하소서. …….저의 경배가 끝나지 말게 하시며, 종일토록 주님을 잊지 말게 하Viewer소서. 이 고요한 경건의 시간으로부터 빛이 발산되게 하시며, 기쁨과 능력이 저와 함께 하여 하루 종일 계속되게 하소서!
2) 둘째 날 아침 :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신뢰”
창조주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 오늘도 주님께서 저와 동행하셔서 복을 내려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아침의 활력과 신선함이, 오늘의 건강의 광채나 지금의 사업의 번창이 저를 속이지 못하게 하소서. 이런 것들로 인해 제가 제 힘을 의지하지 말게 하소서. 이 모든 은사가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합니다.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요, 거두어 가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것은 제 것이 아니며 저는 단지 믿음으로 붙잡을 뿐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할 때 비로소 그 모든 것들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주님이 주신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들려 드리기를 원합니다. 제게 주신 모든 지식과 육신의 건강까지도, 그리고 제게 주신 세상의 물질과 다른 사람에 대한 영향력까지도 주님께 다시 바쳐 주님을 예배하고 싶습니다.
오, 그리스도 예수님, 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오늘 제 말 가운데 말씀하시고, 제 생각 가운데 생각하시고, 제 모든 행동 가운데 역사하소서. 세상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연약한 인간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주님의 은혜로운 뜻인 줄 믿사오니, 오늘 제 삶이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가까운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전달하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3) 셋째 날 아침: “노동의 기쁨과 유익”
생명의 주님, 주의 율법을 제가 기꺼이 지키겠으며, 주님과의 교제를 즐거워하며, 주님을 충성 되이 예배하겠습니다. 또 하루의 일을 맡겨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때가 차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켜 세우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우리를 깨우쳐 주신 하나님, 부족한 제게 은혜를 주셔서 그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4) 넷째 날 아침 : “기다리시는 주님의 모습”
오늘 제 앞에 있게 될 일을 홀로 아시는 주님, 오늘 매 순간마다 주님과 멀어지지 않게 해주소서………
오늘 하루도 저의 삶을 향한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일은 시작하지도 말게 해주시고, 주님의 뜻이라면 어떤 희생도 감내하게 해주소서. 제 마음의 모든 생각을 주장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며 다스려 주옵소서!
5) 다섯째 날 아침 : “생명을 주시는 주님”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인류의 모든 시대에 걸쳐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시요, 모든 지식의 근원이시며, 모든 선의 원천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지나간 세대에 행하신 주님의 능력을 꼭 힘입을 수 있게 해주시고, 주님께서 제게 예비하신 영광스러운 유업에 동참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6) 여섯째 날 :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
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신 주님, 그리스도의 임재의 광채로 우리들의 삶을 조명해 주신 주님, 주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로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7) 일곱째 날 : “만유를 지으신 주님”
만유를 지으신 주님, 주님의 창조로 최초의 빛이 나왔으며, 주님께서는 이 세상 최초의 아침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빛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지금 그 빛은 창문을 타고 들어와 나를 일깨워 또 하루의 삶을 시작하게 합니다.
제 속에 용솟음치는 생명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제가 속해 있는 밝고 아름다운 세계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Viewer니다. 땅과 바다와 하늘, 날아가는 구름과 지저귀는 새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제게 주신 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가 시간을 채우도록 주님께서 제게 주신 모든 것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제게 주신 친구들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음악과 책과 좋은 교제와 순수한 즐거움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리차드 포스터의 묵상>
기도하는 것보다 기도에 대해서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우리가 기도하기만 한다면, 심지어 잘못된 방법으로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미미한 노력을 기뻐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더욱 훌륭한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을 나는 체험해 왔다. 또한 우리가 확신 할 수 있는 것은 은혜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의 기도를 조정해 주시고 바로 잡아 주시며 해석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기도는 참으로 복된 것이다.
12.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다. 독일 아이스레빈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학자가 되어 출세하고자 했다. 그러나 스무 살 때에 자신의 구원에 대해 깊은 불안을 느낀 루터는 그의 신앙 양심을 달래기 위해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는 사제가 되어야겠다는 소명 의식을 느끼Viewer게 되었고, 1507년 드디어 성직에 임명되었다. 비텐베르크에서 성서문학 교수로 봉직하던 그는 1512년에 로마서에 대하여 강의했는데, 그것은 특히 구원 문제에 관한 그의 신학적 사고를 형성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그는 1517년에 그 유명한 ‘95개 조항’을 작성해서 비텐베르크의 교회 정문에 게시했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었으며, 개신교 종교 개혁의 자극제가 되었다. 루터는 훌륭한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다. 여기 실린 글은 루터의 Table Talk(담화집)에 실려 있는 “서신서 설교(Epistle Sermon)”, “강림절(Fourth Sunday in Advent)”, “선행에 대한 논문(Treatise on Good Works)”이라는 글에서 뽑아놓은 것이다. 그는 성 어거스틴과 끌레르보의 버나드의 글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 루터의 신앙은 생동감이 있고 진솔하며 실제적이었다. 그의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깊이가 있고 지속적이었다.
20주. 『탁상 담화문(Table Talk)』에서 발췌
“믿음의 기도”(관련 성경 구절 : 막11:22-25)
1) 기도와 간구/청원과 감사
“기도”하면 우리는 단순히 때때로 우리가 요구하는 것 이상을 표현하는 공식적인 말이나 문구인 것으로 이해한다(예 : 주기도문이나 시편). “간구(supplication)”는 기도를 강하게 하고 설득의 한 형태로서 기도를 효과 있게 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를 위해서 한 가지 요구를 들어 달라고 간청할 수 있으며, 때로는 매우 사랑하거나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 탄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성도들과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청할 수 있다.
“청원(petitioning)”은 마음속에 있는 것을 하나님께 내어 놓는 것이며, 기도와 간구로 표현되는 마음속의 소원을 연결하는 것이다. 주기도문 속에는 본 기도 외에 7가지 청원이 있다. ‘감사’는 우리가 받은 복을 하나하나 되새기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의 믿음이 더 확고해지고, 우리가 구하는 바를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된다.
3) 힘 있는 기도/믿음의 기도
기도는 청원에 힘을 얻고, 간구에 의해 끈기 있게 되며, 감사에 의해 기쁘고 즐거워진다. 주기도문은 찬양과 감사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또 자녀로서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아버지께 나아가도록 진지하게 격려한다. 간구는 비할 데 없이 힘 있는 기도이다.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 우리는 그 문제를 붙들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열심을 다해 열망해야 하고, 그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확신을 훈련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실 지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는 믿음의 특별한 훈련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Viewer도가 응답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더 나은 것을 주시든지 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가 된다. 믿음이 없는 자는 자기가 구하는 것을 못 받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나은 것도 받지 못한다(약1:6-7). 믿음과 확신이 들어 있지 않은 기도는 죽은 기도이다. 막11:24절과 눅11장은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4) 기도는 문제를 내려놓는 것이지 응답을 처방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은 설령 자기가 기도한 것이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 앞에 내려 놓아야지, 그 방법이나 태도나 시간이나 장소를 하나님께 처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문제를 하나님께 내려 놓아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응답의 정도와 방법과 시간과 장소를 하나님께 맡겨야만 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옳은 것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5)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죄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통해 좌로나 우로 치우쳐 범죄하는 것을 금하셨다. 즉 불신앙으로 범죄 하거나 하나님을 시험함으로 범죄하는 것을 금하신 것이다. 우리는 단순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의 자세로 나아가야만 한다. 기도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고난의 문제들이다(시32편, 시142편).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부족한 모든 것과 지나친 모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신실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마음껏 토해 놓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들어 주실 것이다.
6) 영혼의 거울인 십계명
십계명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보여주며, 또한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과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십계명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하며, 우리의 소망이 얼마나 미미하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알게 된다.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만큼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의 도우심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7) 기도 속에 담겨 있는 놀라운 은사
보잘것없는 인간이 하늘에 계신 전능Viewer하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기도할 때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마음과 양심까지도 하나님과 멀어져서는 안 된다. 또한 의심 가운데 있거나 무서워 겁을 먹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붙잡아야만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옛 사람들의 기도를 “마음이 하나님께로 올라 가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13. 장 니콜라스 그라우(Jean-Nicholas Grou, 1730-1803)
장 니콜라스 그라우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살았다. 그는 예수회의 신부였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영적 성장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강연하고 글을 쓰는 데 보냈으며, 특히 기도의 실천은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는 우리에게 마음으로 기도하게 함으로서 ‘신령과 진정으로’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21주. 『기도 하는 법(How to Pray)에서 발췌
“침묵 기도”(관련 성경 구절 : 마6:5-13)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매우 친밀하게 연합되어 있어서 외적인 행위가 없어도 내적인 마음의 기도에 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사람은 자기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의하지 않고서도 침묵과 평안의 순간에 매우 훌륭하게 기도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의 은혜로 하나님이 완전하게 이해할 만한 간결하고 직접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 마음은 아무런 분명한 표현이 없이도 하나님께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할 수 없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분명히 알고 계신다.
침묵 기도는 모든 관념과 지각이 결여되어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수동적이지만 사실은 능동적이다. 따라서 비록 한계는 있기는 하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순수한 기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충분히 가치 있는 기도이며, 그 기도 속에서 인간이 그 근거로서의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며, 피조된 지성이 피조되지 아니한 지성과 연합하게 된다. 이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께 단순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 뜻을 단순하게 적용시키는 것뿐이다. 이것이 소위 침묵 기도이며, 경건의 기도인 동시에 순수한 믿음의 기도이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Viewer
우리는 말이 없으면 못 사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앞에 마음과 뜻으로 달려 나가기보다는 말만 많이 하는 입술로 달려 나가는 경우가 너무나 빈번하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경건과 묵상과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더 좋은가? 니꼴라스 그라우는 우리에게 바로 그런 체험을 하도록 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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