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도서목록들

[스크랩] 고전 시리즈 (3) 리처드 포스터가 묵상한 신앙고전 52선 (Devotion Classics)

하나님아들 2019. 1. 13. 22:51

고전 시리즈 (3)

           리처드 포스터가 묵상한

    신앙고전 52선 (Devotion Classics)


-리차드 포스터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 공동편집-



<이 책의 다섯 가지 주요 흐름>

1.”영적인 생활 준비”

2.”기도로 충만한 생활”

3.”덕이 있는 생활’

4.”성령 충만한 생활”

5.”사랑이 넘치는 생활”

6.””말씀 중심의 생활”


제 3부  덕이 있는 생활


경건의 전통(덕이 있는 생활)은 개인적인 도덕적 변화와 관계되는 것인데, 이것은 옛 작가들이 ‘거룩한 습관들’이라고 불렀던 것을 계발시킴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예: 원수를 사랑하는 것등..) 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로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수Viewer 있는 것들(예:영적인 훈련에 참여 하는 것)을 하고 있다. 여기 실린 모든 글을 꿰는 한 가지 실은 성결을 위한 동기로서의 사랑의 중심성이다.


영적인 훈련들을 통해 우리가 좀 더 나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 훈련들은 그야말로 무가치하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지혜로운 성결의 길을 터득한 사람들이다. 마음을 꿰뚫는 그들의 글을 시간을 들여 묵상해 본다면 큰 유익이 있을 것이다.


  1. 마틴 루터 _ 영적인 훈련을 위한 최고의 힘으로서의 사랑을 강조.

  2. 닛사의 그레고리 _ 부정을 통한 자기 부인과 긍정을 통한 활력

    있는 영적 훈련.

  3. 리처드 롤 _ ‘사랑의 광대함과 달콤함’을 강조.

  4. 존 칼빈 _ 인생의 경주를 훈련하고 있는 하나님의 운동 선수의

    관점에서 성결의 문제에 집중.

  5. 블레즈 파스칼_우리 인간 존재를 뒤쫓는 위대함과 비참함이라는

     두 가지 이중적인 본성을 상기시켜줌.

  6.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_ 겸손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이 덕을 진보시킬 수 있는 간단하고 실제적인 단계를 제시.

  7. 토마스 아 켐피스 _ 유혹의 문제와 죄를 극복하는 과정.

  8. 윌리엄 로 _ 우리의 믿음이 반드시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줌.

  9. 아빌라의 테레사 _ 유혹의 문제와 죄를 극복하는 과정.


1 .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마틴 루터는 1516년의 Theologia Germanica(테올로기아 게르마니카) 서문에서 이 책의 저자는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했다. 또한 이 책은 “하나님의 친구들”이라고 알려져 있는 14세기 독일 부흥 운동의 산물이라고 한다. “(내가)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15:15)에서 그 이름을 따온 이 역동적인 운동은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삶의 경건과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강요했다.  「테올로기아 게르마니카」가 겨냥한 주된 목표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겉 사람’ 에게서 ‘속 사람’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 책은 삶의 모든 문제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15:19)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고 있다.


22주 『테올로기아 게르마니카(Theologia Germanica)』 에서 발췌


“겉 사람에서 속사람으로” (관련 성경 구절: 요3:1-8)


1) 하나님께서는 질서 있는 삶을 원하신다.

하나님 자신께서는 규율이나 척도나 질서를 초월해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것들이 없어도 되지만, 만물에게는 규율과 척도와 도덕적인 고결함을 주신다. 만일 피조물이 없다면 하나님 자신 속에 그것을 가지고 계실리가 없다. 왜냐하면 피조물과의 관계가 없다면, 하나님 안에서는 우리 인간이 하듯 이 질서와 질서의 부재를, 삶의 규율과 규율의 부재를 구분 질 수 없기Viewer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정하셔서 이 구조들이 존재할 수 있게 하셨다. 말과 일과 행동거지에 관한 한, 우리는 언제나 한편으로는 규율과 의, 다른 한편으로는 무질서, 이 둘 중에 선택을 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질서 정연함과 의로움이 그 반대 경우보다 더 낫고 고상하다.

2) 못 마땅하고 귀찮은 일

네 부류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질서와 명령과 규율을 다룬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질서 있는 삶을 살되, 하나님을 위해서도 아니요, 특별히 개인적인 욕구가 있어서도 아니다. 다만 그들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일만을 하기 때문에 결국 그 일이 못마땅하고 귀찮은 일이 된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보상을 받기 위해 법과 규율을 지킨다(보상파). 그들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규율들을 지킴에 있어서 진지함과 근면함으로 임하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면 그 모든 것이 변하여 못마땅하고 귀찮은 일이 된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악하고 거짓된 사람들로서(자유파), 자신들을 완전한 존재들로 생각하면서 자기들이 얼마나 완전한 사람들인지 자랑하기에 빠른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는 어떤 율법이나 규율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질서’라는 말만 들어도 비웃는 사람들이다.


3)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삶

네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조명을 받아 참 빛에 의해 인도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보상을 기대하여 질서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전히 사랑에서 우러나와서 그렇게 질서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들은 결과에 연연해 한다든지, 특별히 행위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라든지. 얼마나 빨리 보상이 주어질 것 이라든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평안과 내적인 안정 속에서 일이 잘 이루어지기 만을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어떤 덜 중요한 규율을 소홀히 해야 할 피치 못할 경우가 생겨도 낙망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질서와 곧음이 그것이 없는 것보다 더 낫고 고상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규율들을 지키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의 구원과 행복이 규율을 지키는데 있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염려Viewer하지 않는다.


4) 중용을 지키다

하나님의 ‘조명을 받은’ 네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최선의 상태인 중용을 지킨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한 사람이 보상을 바라는 삯 군 수십 만 명보다 더 낫고 더 큰 기쁨이 되신다. 이것은 또한 그들의 외적인 행위에도 적용이 된다.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말씀과 그의 모든 교훈을 받는 것은 속사람임을 주목하라. 이것들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연합되는 방법을 보여준다. 이 일이 일어나면, 속사람에 의해 겉 사람의 틀이 짜이고 가르침을 받게 되어 외부의 법이나 교훈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의 법이나 명령들은 겉 사람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보다 더 나은 것들을 모를 때 필요한 것들이다. 그것마저 없다면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결국 개나 소처럼 될 것이다.


5) 영원한 것을 바라봄

피조된 인간의 영혼은 두 눈을 갖고 있다. 한 눈은 영원한 것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있고, 다른 한 눈은 시간과 피조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눈은 우리 영혼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들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지는 못한다. 만일 영혼이 그 오른 쪽 눈을 통해 영원을 바라보게 되면, 왼쪽 눈은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마치 죽은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만일 왼쪽 눈이 외부 세계의 것들에 집중하게 되면, 즉 시간과 피조된 존재들에 빠져들게 되면, 그것은 오른쪽 눈의 시야를 방해하게 된다.


우리는 단순한 진리가 무엇인지 주목해보고 알아야 한다. 즉 어떤 덕행이나 선행도, 심지어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시는 것까지도, 만일 그것이 그 사람의 영혼 밖에서 일어난다면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영혼을 고결하게 하거나 선하게 하거나 복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으로 죄와 사악함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내면적으로 삶의 내용과 방법을 깊이 인식하고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시는지 혹은 사용하지 않기를 원하시는지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6) 하나님만을 기다림

영원한 복락은 하나님께만 뿌리를 두고 있고 다른 어떤 것에도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주목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유일하신 하나님을 영혼 속에 모셔야 할 뿐만 아니라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거나 그 선하심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명명하고 알고 명시하는 이런 저런 특정한 선이 아니라, 모든 것은 좋은 것이며 모든 것보다 뛰어난 것이다. 행복이나 축복은 물질의 부요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즉 그것은 어떤 피조된 물질이나 피조물Viewer의 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만 달려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하심만을 기다려야 하며,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모든 일, 무엇보다 나 자신부터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신 위대한 역사들과 놀라운 일들, 또는 앞으로 피조 세계를 통해서나 그 안에서 행하신 그 모든 행사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 속에서 자신을 직접 계시하시는 일까지도 그것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밖에서 맴돈다면, 절대로 나를 복되게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축복이란 하나의 사건으로, 내면의 지식으로, 그리고 느낌과 맛으로 내 안에 존재하는 만큼만 내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7) 거짓 빛과 참 빛

참 빛과 반대되는 모든 것은 거짓 빛에 속한다. 참 빛의 본질적인 특성은 속임수를 모른다는 것과, 속이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과, 스스로 속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 참 빛은 바로 하나님의 신성이시고, 거짓 빛은 자연 혹은 자연적인 것이라는 사신을 주목하라. 자연의 피조물과 자연의 거짓 빛은 자아라는 이기심과 사욕과 그 파생물들의 욕망을 한껏 채워준다.


참 빛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이 소원하거나 선택하는 모든 것들이 모든 피조물이 존재의 깊이 속에서 늘 소원하고 선택해 온 것에 비교해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이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모든 욕망과 의지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며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게 해준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테올로기아 게르마니카’라는 이름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친구들”이란 운동은 당시에 유행했던 “자유로운 성령의 형제자매들”이란 다른 운동과 확연하게 대조되었다. 후자의 그룹은 어떤 도덕적인 제한이나 윤리적인 책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오직 성령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친구들”은 규율과 질서를 도덕적인 삶을 계발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치명적인 율법주의는 배격하였다. 분명한 도덕적인 한계라는 맥락 속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한 그들의 사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절실히 요망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모든 도덕적인 제한들을 폐지하기를 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문구에 우리를 얽어매고 싶어한다. 「테올로기아 게르마니카」는 우리에게 보다 탁월한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그것은 바로 Viewer분명한 도덕적 관점에 의해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길이다.

2.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1~396)

닛사의 그레고리는 위대한 교부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교회사를 통해서 일찍이 알려진 사상가들 중에서 가장 능력 있고 독창적인 사상가”라고 일컬어져 왔다. 그의 저작들은 동방교회의 영성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쳐 왔다. 그는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과 스토아 철학에 정통했으나 그의 사상의 기초는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레고리는 성경의 주된 용도가 역사적인 반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덕의 함양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영적인 생활을 경주로 보았다(빌3:13). 본문의 내용은 The Life of Moses(모세의 생애)에서 발췌한 것으로, 덕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지침을 주기 위해 쓰여졌다. 그레고리는 온전함이 계속적인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고,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 속에 뿌리를 둔 영속적인 성장이라는 것이다.


23주 『모세의 생애(The Life Moses)』에서 발췌


“경주에 참여함”(관련 성경 구절: 빌3:12-21)


1) 신성한 경주

당신은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신성한 경주에 참여하여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며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덕 있는 삶의 경로를 훌륭하게 경주해 나가고 있다. 이제 나는 당신이 활기차게 점점 속도를 증가해 나가기를 권고하고 격려하고 권면하고 재촉한다. 덕의 경우에, 사도 바울에게서 우리가 배운 것처럼, 온전함의 유일한 한계는 그것의 한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탁월하고 뛰어난 지각을 소유한 사도 바울조차 덕스런 삶의 경로를 좇아 달리면서도,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경주에서 멈춘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안전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선한 것은 그 본질상 한계가 없고, 다만 그 반대되Viewer는 것에 의해서만 제한되기 때문이다. 생명이 죽음에 의해서 제한되고 빛이 어둠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모든 선한 것은 일반적으로 선과 반대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끝이 난다. 거룩하신 하나님 한 분 만이 기초적이고 본질적인 의미에서 선하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이 바로 선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선하신 바로 그 성품에 의해서 불려지고 식별된다. 그리고 악 외에는 덕을 제한 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은 어떠한 반대도 인정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신의 성품을 무제한적이고 무한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누구든지 참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 참여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절대적인 선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상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그 선에 참여하기를 갈망하고 그 선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으므로, 참여자의 소망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멈추지 아니하고 아무런 제한도 없이 뻗어 나가게 된다.


2) 도달할 수 있는 온전함

온전함이란 제한선으로 구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전함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덕의 한 가지 한계는 바로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경계선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지점에 도달할 것인가? 우리는 도달할 수 있는 온전함에서 멀어지지 않고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의 영역 안에서 최대한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 힘쓰자. 인간 본성의 온전함은 아마 선에 있어서의 성장 그 자체에 놓여 있는 것 같다. “네 아비 아브라함과 너를 낳아 준 사라를 상고해 보라”. 위의 이사야의 예언은 덕 있는 삶을 살지 않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아브라함과 사라의 본을 통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도록 권면하며 인도한다.


인성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선과 악의 자유로운 선택이 남성과 여성 앞에 동등하게 놓여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각 성(性)에 상응하는 덕의 본보기가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예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각 사람은 자기와 유사한 사람(남자들은 아브라함, 여자들은 사라)을 지켜봄으로써 적절한 본보기를 통해 덕 있는 삶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다.


3) 선의 피난처Viewer

삶의 모범이 되는 어떤 사람을 기억해보면, 우리의 영혼을 선의 피난처로 나오게 하는 방법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일찍이 그들이 행했던 바른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선하게 영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그들을 본받는다는 말인가?’ 나는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상응할 만한 점이 하나도 없는데 그들을 어떻게 본받는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러하다. 우리는 갈대아인 이라는 것을 선이나 악으로 보지 않고, 어떤 사람이 애굽에서 살았거나 바빌론에서 생애를 보냈다고 해서 그가 선한 생활에서 추방된 것이라고 보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오직 유대에 있는 존경 받는 개개인들에게만 알려져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갈대아인 들과 애굽인 들에게서 자신을 분리시키고,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탈출함으로써 어떻게 복된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를 역사로부터 간파해 낼 수 있는 지각의 섬세함과 환상에 대한 예민함이다.


4) 하나님의 친구가 됨

참된 온전은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들과 약속에 의해 예비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무시하고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는 것만을 두려운 것으로 알며, 오직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만을 영예롭고 바람직한 일로 여기는 것이다. 당신의 지각이 숭고하고 신성한 것을 향해 올리워질 때, 당신이 발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틀림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공동의 유익이 위한 것이 될 것이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그레고리의 주된 관심은 우리의 덕이 자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덕이란 시련과 갈등과 경주를 통해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덕의 최종 목표는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헌신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 아니겠는가?


3. 리처드 롤(Richard Rolle, 1290~1349)

영국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리차드 롤은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떤 은인의 도움으로 옥스포드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그는 탁월한 학생이었으나, 학문 세계의 허영심에 빠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석사 학위를 마치기 전에 학교를 그만두고, 은둔자가 되기 위해 가정을 떠났다. 그리고는 기도로 준비하기 위해 가까운 교회에 가서 밤을 지새웠다. 거기서 그는 아주 놀라운 기도의 깊은 체험을 하게 되었고, 후에 그는 그 교회에서 설교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의 능력 있는 목회의 시작이 되었다.  그는 일생 동안 도시와 여러 마을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는 여러 저작들로도 유명해졌으며, 그의 대표작은 The Fire of Love(사랑의 불)이다. 그는 열정과 정력을 가지고 글을 썼다. 그의 사후 이백 년 동안 그는 ‘은둔자 성 리처드(St.Richard the Hemmit)로써 크게 존경을 받았다. 그의 저작들은 신앙인이나 비 신앙인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다.Viewer


24주 『사랑의 불(The Fire of Love)』에서 발췌


“영적인 불꽃”(관련 성경 구절: 눅11:33-36)


내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것은 상상의 뜨거움이 아니라 정말로 뜨거움 그 자체였다. 내 가슴이 정말로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뜨거운 열기가 어떻게 솟구쳐 올라 왔는지, 그리고 그 새로운 체험이 내게 얼마니 크고 놀라운 평안을 가져다주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혹시라도 어떤 물리적인 이유로 진짜 불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가슴을 계속해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며, 이 사랑의 불꽃이 물질적인 요인이나 죄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일단 깨닫고 나자 나는 너무도 기뻤고 내 사랑이 더욱더 강렬해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 영적인 불꽃이 나의 영혼 속에 가져다 준 놀라운 기쁨과 내적인 평안함으로 인해 그러한 소망은 더욱더 간절하게 되었다. 이러한 평안의 불꽃이 붙기 전에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우리가 감히 그런 뜨거움을 체험할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며, 그로 인해 불붙게 된 헌신이 그토록 행복한 것인 줄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은 마치 진짜 불이 붙고 있는 것처럼 내 영혼을 뜨겁게 불태웠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은 깨끗게 할 뿐만 아니라 불태우기도 한다. 이러한 사랑을 묘사하는 데에는 ‘불’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한 것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우리를 인도하며, 우리를 먹인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불타게 한다. 나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 사랑에 점점 더 이끌리어 이 사랑에 의해 인도함을 받고, 이 사랑에 의해 더욱 사로잡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Viewer


4. 존 칼빈(John Calvin,1509~1564)

존 칼빈은 프랑스 노용(Noyon)에서 태어나 파리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부유한 귀족 계층에서 성장했다. 신학자로서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목사의 심정을 소유했던 칼빈은 성직을 임명 받지는 않았지만, 1527년 성 마르땡 드 마르뜨빌(St.Martin de Marteville)의 사제보가 되었다. 1534년 그는 개신교로 전향했으며, 그 결과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536년에, 그의 나이 26세 때에 그의 유명한 저작인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을 썼다. 1541년 까지 스위스의 제네바에 있었으며, 그 곳에 큰 영향을 끼쳤고, 제네바는 칼빈의 지도하에서 높은 도덕적 수준과 경제적 번영, 그리고 우수한 교육제도 등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아버지요, 창시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마틴 루터와 성 어거스틴의 저작들을 통해 깊은 감화를 받았으며, 특히 어거스틴의 예정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칼빈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더 깊고 분명하게 이해한 신학자는 없을 것이다. 그는 엄격한 절제와 검소한 생활로 유명했다. 여기에 실린 글은 칼빈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자기 부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칼빈의 말은 대체로 부정적인 말뿐인 환경 속에서 속박당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정신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25주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The True Christian Life)』에서 발췌


“자기 부인의 기쁨”(관련 성경 구절: 빌2:1-11)


1)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요원리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롬12:1)은 우리 신자들의 의무이자 진정한 예배이다. 성결의 원리에 따라 살려면 다음과 같은 권면을 따라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봉헌된다는 것은, 우리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묵상하며 행해야 한다는 뜻이므로 매우 중요한 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생각이나 이성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뜻이Viewer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다스리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의 모든 부분이 우리의 참된 유일한 목표이신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가장 무서운 독약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지혜와 의지력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멸에서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따르는 것이다. 즉 먼저 우리 자신을 버리고, 우리의 죄와 욕망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굴복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힘을 하나님을 섬기는데 드려야 한다. 우리의 생활이 성령으로 변화되는 것을 사도 바울은 심령의 새로운 변화인 중생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참된 생명의 시작이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게 해야 한다(엡4:23, 갈2:20).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이기적인 욕심을 모두 내어 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전심으로 향할 수 있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순간순간을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고 판단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자기 부인의 원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행위를 하나님의 법에 맞추어야 하고, 모든 생각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면 교만, 오만, 허영, 탐욕, 방탕, 사치, 방종 및 자기 사랑에서 생겨나는 모든 죄악에 대한 여지를 남기지 않게 된다. 자기 부인의 원리에 영향을 받지 않고서도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칭찬을 듣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하는 사람들이나 교만과 무례로 가득 찬 사람들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회개한 세리와 창기가 오히려 그 사람들보다 더 천국에 가깝다고 하셨다(마6:5).


3) 근신함, 의로움, 경건함(딛2:11-14)

바울은 새로운 삶의 모든 양식을 근신함, 의로움, 경건함의 세 부류로 나누었다. 근신함이란 현세의 축복을 순수하고 검소하게 사용하고 가난한 중에도 참고 인내하는 것뿐만 아니라 순결함과 절제를 의미한다. 의로움은 모든 사람이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정의를 수행하는 것이다. 경건함은 우리를 이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분리시켜주며 참된 성결에 의해서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킨다.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 이 세 가지 선이 굳게 결합될 때 비로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루어진다.


4) 우리의 정복자

성경은 우리가 평안하고 고요한 삶을 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동시에 우리의 기질까지도 우리의 정복자이신 하나님께 굴복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우Viewer리에게 주지시킨다. 부와 명예를 갈망하고 권력을 추구하며 재물을 쌓는 곳과, 겉보기에 허영심과 자만심을 충족시켜 주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허망한 것들을 모으는 것은 우리의 맹렬한 열정이요 끝없는 욕망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가난을 두려워하거나 혐오하며 비천함을 싫어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피하려고 애쓴다.


우리는 마음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한지, 또한 그들이 얼마나 많은 속임수를 행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야망과 탐욕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며 애쓰는지, 그리고 가난과 비천을 피하기 위해서 다시금 얼마나 힘을 쓰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른 경로를 택해야만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 없이 번영하는 것은 소망하지도 말고, 심지어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칼빈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면서 자기 부인의 문제가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는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자기 부인은 육체를 증오한다든지, 처벌을 위한 처벌을 한다든지, 의지력과 절제를 통해 공덕 쌓는 일을 배척한다든지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고대의 신앙인들의 글을 보면 그들 자신을 하나님을 위한 운동선수라고 묘사해 놓았다. 우리도 알다시피 자기부인은 운동선수의 훈련 방법 가운데 지극히 정상적인 부분이다. 우리도 운동선수처럼 자기 부인을 우리의 훈련체계 속에 정상적인 부분으로 체험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빌3:14)갈 수 있다.


5.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0

1623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파스칼은 수학의 천재요, 철학자요 신학자이었다. 1654년 31세 때에 그의 누이를 만나려고 포트 로얄에 있는 어느 종교 단체를 방문했다가 거기서 한 설교를 듣고 깊은 신앙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은 그의 생애의 분기점이 되었다. 그는 언제나 그의 외투 안감 속에 “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철학자들이나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닌 분, 확신, 확신, 마음 속의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기쁨, 기쁨, 바다 같은 기쁨!” 이라는 쪽지를 넣고 다녔다.

서른일곱 살 때 그는 기독교 변증서를 쓰기 시작했으나 그것을 끝마치지 못하고 그 해에 죽게 된다. 파스칼이 죽은 후 이러한 그의 단상들과 ‘생각들’을 여기저기서 모아 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서인 『팡세』가 되었다.Viewer


26주 『팡세』에서 발췌


“교만에 빠짐”(관련 성경 구절: 요20:24-31)


1) 놀라운 모순

우리에게는 위대함과 비참함이 동시에 있다. 참 종교란 우리에게 이 두 가지의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그것은 또한 그러한 놀라운 모순도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를 복되게 하기 위해서 참 종교는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인 되는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만 하고, 또 우리의 진정한 복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뿐이며, 우리의 유일한 아픔은 그분에게서 단절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어두움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고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게 하는 죄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의가 가득하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반역했으며, 그 결과 우리 자신에게도 어떠한 해악이 있었는지를 설명해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신의 무기력함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과 또 그 치유법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을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2) 교만에 빠짐

“다른 사람에게서 진리나 위로를 기대하지 말라. 너를 만든 자가 바로 나 하나님이며, 네가 누구인지 가르칠 수 있는 자도 바로 나 뿐이다. 하지만 너는 이제 더 이상 내가 창조한 그대로의 상태가 아니다. 나는 너를 거룩하고 순결하며 온전하게 창조했고, 빛과 지각을 채웠으며, 나의 영광과 기사를 보여 주었다. 그때 너의 눈은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고, 지금 너의 눈을 멀게 하는 흑암 속에 있지도 않았으며, 죽음과 너를 괴롭히는 재난에도 종속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너는 그러한 영광을 대하고 교만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스스로를 자신의 중심에 놓기를 원했고, 내 도움을 받지 않고 행하고자 하였다. 너는 내 율법을 떠났고, 나와 같이 높아지기를 원했으며, 스스로에게서 행복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내버려두었다. 이전에는 너에게 종속되어 있었던 피조물들을 내가 선동하여 대적이 되게 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 너는 짐승과 같이 되고 말았다. 네가 나에게서 너무나 멀리 떠났으므로 너의 창조자에 대한 생각이 네 모든 꺼져 가는 죽은 지식 중에 희미할 정도밖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감각이 이성이나 그Viewer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 너로 하여금 쾌락을 추구하게 하였다. 모든 피조물이 너를 괴롭히고 유혹하며, 강제로 너를 정복하여 다스리거나 때로는 훨씬 더 지독하고 해로운 멍에인 달콤함을 가지고 매혹시킴으로써 너를 지배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처해 있는 상태가 바로 이러하다. 그들은 내가 지어준 처음의 본성이 희미해짐으로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고, 이제는 그들의 제2의 천성이 되어 버린 우매함과 정욕에 빠져 들어 비참하게 되어 버렸다”. 모든 인류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또 그들을 수많은 학파로 분리시켜 놓은 많은 모순들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대함과 영광에 대한 마음속의 모든 충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리 많은 불행을 겪는다 해도 억누를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겪는 모든 불행에 대한 치유책을 당신 안에서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당신의 모든 지식은 당신 안에서는 진리도 선도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 당신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병폐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교만과, 이 땅에 당신을 묶어두는 정욕이다.


3) 두 가지 가능성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면, 그것은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겸손하다면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회개에 의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와 연합시킨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더럽고 추함을 깨닫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것을 끝까지 추구하라. 우리는 사실상 너무나 더럽고 추해서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자신의 힘만으로는 깨달을 수가 없다.


4) 보고자 하는 자들에게 빛으로 나타나심

하나님께서는 오직 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는 온전히 나타내 보이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는 공공연히 자신을 드러내시고, 또 마음을 다해 자기를 피하는 자들에게는 자신을 숨기시려고 하시면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는 표적을 보여주시고, 또 자기를 찾지 않는 자들에게는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음으로써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제한하셨다. 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충분한 빛으로 나타나시지만, 그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에 상응한 어두움이 있을 뿐이다.Viewer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과 타락하게 되었다는 사실, 이 두 가지를 묵상하면서 파스칼은 우리 인간에게 있는 ‘위대함’과 ‘비참함’이라는 상호 모순되는 원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한, 모든 피조물 중에서 선과 악에 대해서 우리 인간보다 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마이크로칩을 발명하는 한편 핵무기도 발명했다. 고아원을 세우기도 했지만 아우슈비츠도 세웠다. 우리 가운데는 테레사 수녀도 태어났지만 폴 포트 같은 사람도 태어났다. 그리고 파스칼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듯이, 기독교만이 그 모순을 적절히 설명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교만과 정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신다.


6.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543)

베네딕트는 누르시아의 움브리안이라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사악한 도시(4세기 초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교회는 세속화되기 시작, 기독교 신앙이 로마세계와 혼합되어 그리스도인들이 세속화됨)생활에 염Viewer증을 느끼고 수비아코라는 산으로 도피해 거기서 은둔자로 살았다. 그는 경건과 지혜와 겸손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529년에 나폴리와 로마의 중간쯤에 있는 카시노(Cassino)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세우고 거기서 남은여생을 보냈다. 그 수도원에서 그는 그의 유명한 책인 The Rule(규율)을 썼는데, 그것은 당시 방황하는 많은 예언자들과 은둔자들에게 필요한 책무를 일깨워주는 내용이었다. 베네딕트는 이 책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분명하고 직접적이면서도 효과적인 훈련지침들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실린 글은 The Rule(규율)에서 발췌한 것으로써 ‘겸손’에 대해 다루고 있다. 베네딕트는 ‘야곱의 사다리’비유를 사용하여 겸손의 열두 단계를 설명해준다.


27주 『규율(The Rule)』에서 발췌


“겸손의 사다리”( 관련 성경 구절:눅18:9-14)


우리가 현재의 생활에서 겸손의 절정에 오르려면 천사가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던 야곱의 사다리에 올라가야만 한다. 올라가는 길은 겸손이요, 내려가는 길은 교만이다. 우리의 마음이 겸손하면 천국으로 들림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과 영혼이 이 사다리의 양쪽 기둥이요, 각각의 디딤대는 겸손으로 이루어진 받침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겸손의 단계들을 이해해야 하고, 그 다음에 구체적인 훈련들을 실행해야 한다.


1) 겸손의 1단계: 하나님을 경외함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늘 마음에 두어야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묵상해보라. 하나님의 눈이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라.


2) 겸손의 2단계: 하나님의 뜻을 행함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자기 뜻대로 행하는 자는 징벌을 받을 것이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라”


3) 겸손의 3단계: 다른 사람들에게 순종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바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을 본받는 것이 된다.


4) 겸손의 4단계: 고난을 참고 견딤

이 단계는 계명을 지키다가 당하는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겪는 고통과 상처들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우리가 부름 받은 것은 인내하라는 것이며,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믿음 위에 굳게 서라는 것이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5) 겸손의 5단계: 자백

하나님께 우리의 허물을 숨김없이 자백하는 것이다. 우리의 악한 생각들과 악한 행동들을 남김없이 다 겸손하게 자백해야 한다.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여호와께 자백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 겸손의 6단계: 만족

이 단계는 범사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이다. 아무리 악한 일이 생기고 나쁜 일이 생겨도 우리는 그것을 만족하게 여겨야 한다. 법사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비천함을 기억해야 Viewer한다. 그리고 늘 낮은데 처할 줄 알고 온유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7) 겸손의 7단계: 자기 부인

우리는 가장 비천하고 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입으로 시인하고 영혼 깊은 곳에서 그렇게 믿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겸손하여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나는 벌레요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의 율례를 배우기 위하여 비천하게 되는 것이 오히려 유익하다”고 말했다.


8) 겸손의 8단계: 공동 규율을 지킴


9) 겸손의 9단계: 침묵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하기를 “말이 많은 곳에 죄가 들어온다”고 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이 많은 사람은 이 땅에 기업이 없다”고 했다.


10) 겸손의 10단계: 진지함


11) 겸손의 11단계: 말을 적게 함

이 단계는 적은 말로 지혜롭게 말하는 것이며, 부드럽고 온화하게 말하는 것이다.

Viewer

12) 겸손의 12단계: 겸비한 모습

이 단계는 마음만 겸비한 것이 아니라 외모까지도 겸비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일을 하든지, 마당에 있든지, 여행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잊어서는 안 된다.


13) 생활 방식으로서의 겸손

만일 우리가 이 모든 겸손의 단계에 올라가게 되면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겸손의 단계들을 끊임없이 실천하다 보면 결국에는 아주 수월하게 그러한 단계에 이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점차 선한 습관들을 개발시켜 나가고 겸손의 미덕을 즐기며 생활 습관으로 굳어지게 될 것이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베네딕트는 겸손에 대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점을 잘 지적해 주었다. 겸손이란 우리가 거기에 집중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덕목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머리 위에 겸손을 쏟아 부어 주시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교회 상황이다. 베네딕트는 이러한 영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적인 일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위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리는 겸손의 생활로 전진하게 해주는 마음과 몸과 영의 실제적인 활동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삶의 기쁨을 점차적으로 누릴 수 있다고 믿는다.


7.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

토마스 아 켐피스는 1399년 그가 19세 되던 해에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으며, 거기에서 그의 남은 생애를 보냈다. 그의 외적인 삶은 그리 괄목할 만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의 내적인 삶은 깊고 부요 했으며, 그리스도께 대한 순수한 헌신으로 충만했다. 1441년 그는 게르하르트 구르테(Gehard Groote’s)의 일기를 편집했는데, 그것은 그의 생애의 불멸의 업적이 되었다. 여기에 실린 글은 고전적인 작품 The Imitation of Christ(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요약한 것인데, 내용의 명료성과 인간의 영혼에 대한 통찰력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이 복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글은 우리 모두에게 시험(temptation)과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이 글이 여러분이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갖가지 시험을 당할 때 통찰력을 제공하고 큰 격려가 되길 바란다.


28주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에서 발췌


“시험에 대처하기”(관련 성경 구절: 고전 10:12-13)


1) 깨어 있으라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시험과 환난을 피할 수 없다. 욥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이 땅에서의 우리의 인생은 전쟁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시험에 주의해야 하고 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사탄에게 우리를 속일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탄은 결코 Viewer자지 않고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시험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거룩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우리는 결코 시험에서 자유 할 수가 없다.


2) 시험의 유익함

시험으로 인해 우리는 겸손해지고 깨끗해지며 교훈을 받을 수 있는 유익함이 있다. 앞서 간 모든 신앙의 선배들도 수 없이 많은 시험과 환난을 겪었다. 그들은 시험을 받으면서 오히려 그 시험을 이용하여 그들의 영적인 성장을 도모했다.


3) 시험의 근원: 시험을 피할 수 없는 이유

시험의 근원은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죄의 욕망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시험에서 완전히 자유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우리의(原義, original innocence)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늘 시험이 닥쳐온다. 많은 사람이 시험을 피해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해 보았으나 결국 실패한다. 시험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승리의 비결은 진정한 겸손과 인내뿐이다. 그것만이 원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다. 만일 우리가 겉으로만 시험에서 멀어지고 그 근본을 치유하지 않는다면 나아질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 시험이 전보다 더 빠르고 더 강력하게 되돌아와서 상태가 더 악화되는 경우가 더 많다. 조금씩 조금씩 영혼의 끈질긴 인내를 통해서(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더 나은 승리를 얻을 수 있다. 이 승리가 우리 자신의 결심에 의한 것보다 낫다. 모든 악한 시험은 불안정한 마음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 데서 시작된다. 마치 키 없는 배가 물결에 이리저리 요동하는 것처럼, 정한 마음과 확신이 없는 사람은 시험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시험을 통해 우리의 불안정한 마음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부족이 드러나게 되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 준다.


4) 시험의 발단과 우리가 그 시험에 넘어지는 이유

시험의 시작 단계에서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시험에 더욱 잘 대처할 수 있다. 우리가 시험에 빠지는 과정은Viewer 다음과 같다. 먼저 잘못된 생각이 마음에 들어오도록 허용한다. 그 다음에는 그 생각 때문에 상상력이 발동된다. 그 다음에는 상상 속에서 더 큰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충동에 못 이겨 악한 행동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시작 단계에서부터 유혹을 막지 아니하면 이런 식으로 조금씩 시험에 빠지게 되고 결국 시험에 넘어지게 된다. 시험에 굴복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우리는 점점 더 약해지고, 우리의 대적은 점점 더 강해진다.


5) 낙망하지 말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시험을 당할 때 낙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환난의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더욱 열심히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사도 바울의 확신에 찬 말을 기억하자.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그의 손아래를 피난처로 삼자.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를 들어올리사 모든 시련과 환난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다.


우리의 삶은 온통 역경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애를 쓴다 하여도 투쟁과 슬픔이 없는 삶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시험이 없는 평화를 갈구하거나 역경을 느끼지 못하는 삶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평화는 유혹과 시험을 피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겪음으로써 얻어진다. 우리가 직접 시련을 당해보고 시험과 환난을 겪어볼 때 비로서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참된 기쁨을 얻는 길은 세상적인 것들을 사랑하는 데서 돌아서는 것과 비례하여 하나님의 위로가 그만큼 더 달콤하고 강력하게 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자들을 기꺼이 도우시고, 우리에게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환경을 주시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영적인 진보가 외적인 의식에만 의존한다면 우리의 헌신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종종 우리는 수년 동안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그때가 더 선하고 순수했다고 생각한다. 열심과 성장은 날마다 증가해야만 한다. 우리가 처음 시작 단계에서 조그마한 자기 훈련을 시행한다면, 나중에는 모든 일을 즐겁고 쉽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옛Viewer 습관을 버리기는 참 어렵다. 그러나 충동이 시작될 때 그것과 싸우라. 그리고 나쁜 습관을 끊어버려라. 그것을 내버려두면 조금씩 더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선한 노력이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평안을 가져다 주는지 우리가 알 수만 있다면, 정말 우리는 영적인 성장을 더욱 더 갈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6) 고난의 유익

우리는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 세상이 주는 것은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때로는 우리에게 욕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참는 것도 유익하며, 때로는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도 남에게 나쁜 사람으로, 또 잘못된 사람으로 오해 받는 것도 유익하다. 그러한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나쁜 것만을 말할 때, 그리고 우리가 행한 선한 일에 대해 인정하려 들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훨씬 더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뿌리를 하나님께 깊이 박아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7) 없어서는 안 될 하나님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악한 생각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거나 시험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할 때, 그는 하나님이 정말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이는 선한 일을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자기가 겪는 불행 때문에 슬퍼하고 탄식하며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사는 일이 곤고해져서 죽고 싶어지게 되며, 결국 그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어한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날 때, 그는 완전한 안전과 충분한 평안이 이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다.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기 위해서 꼭 해야 할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우리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뜻대로 하려고 노력하라. 둘째, 늘 더 가지려고 하지 말고 덜 가지려고 노력하라. 셋째, 필요하다고 인정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을 희생하고 더 낮은 위치에 처하기를 힘쓰라. 넷째, 매사에 언제든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라. 이러한 방법들을 실천하는 사람은 평안과 안식을 누릴 것이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성경의 말씀은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 대처하게 되어 있지 않다고 약속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위대하신 하나님, 모세와 다윗과 마리아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마다 늘 도와주신다. 그리고 영원히 살아계신 우리의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힘을 주시며 사랑해 주신다. 또한 은혜의 성령께서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지도하시고 강건케 하시며 격려해 주신다. 성경은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체험으로 확증할 수 있다.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질 때에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

Viewer

8. 윌리엄 로(William Law, 1686~1761)

윌리엄 로는 경건한 영국 교회의 목사였다. 그의 실제 사역은 영적 지도자로써,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고 더욱 깊은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일이었다. 여기 실린 글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A Serie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경건한 삶을 위하여) 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책은 영국 복음주의의 부흥에 크게 기여한 책으로 내용이 단순하고 솔직해서 기독교 경건주의 문학의 고전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특별히 신앙생활과 실제적인 일상생활을 구분하려는 태도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부분을 발췌하였다. 윌리엄 로 목사는 사도 야고보의 정신으로, 우리의 행위와 신앙이 마치 활과 화살처럼 하나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증해 준다.


29주 『경건한 삶을 위하여』에서 발췌


“척도요, 기준이신 하나님”(관련 성경 구절: 약2:14-26)


1) 척도요 기준이신 하나님

경건생활이란 하나님께 드려지거나 헌신된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며,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되는 방법으로 함으로써 삶의 모든 영역을 거룩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도의 척도요, 기준이 되어야 함을 기꺼이 인정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전적으로 그분을 신뢰해야만 하고 또 전적으로 그분을 위해서만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목적을 위해서도 기도해야만 한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하는 기도만큼이나 거룩해야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엄격한 의무는 이성에 따라 사는 것이요, 삶의 모든 활동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요, 지혜와 거룩함과 모든 거룩한 대화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요, 그리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Viewer 기도가 우리를 이러한 자리까지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면 그 기도는 아무리 지혜롭고 거룩하다 할지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된다. 오히려 그러한 기도는 어리석은 기도가 되고 만다. 그러한 기도는 날아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으면서 날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구하기 위해 기도하려면 먼저 그 하나님의 영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듯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나 만일 일상적인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지 못한다면, 즉 하나님이 모든 삶의 척도와 기준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 갈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기도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으며,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2) 우스꽝스러운 일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에서 경건한 시간을 가질 때에는 엄격하지만, 예배가 끝나거나 교회에서의 집회가 끝나면 좀처럼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살아가는 방식, 시간과 돈을 소비하는 태도,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모습, 쾌락과 방종을 좋아하는 것, 일을 하거나 오락을 즐기는 것 등에서 그들은 세상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바로 이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믿는 자들을 멸시하게 된다. 헌신된 자들의 삶이 자신의 기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조롱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3) 일상 생활을 위한 규범

“세상을 버리고 삶의 태도와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이익을 버리고, 세상의 사악한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며, 세상의 기쁨을 거절하고, 세상의 행복에 가치를 두지 말라. 새로운 세계에 태어난 갓난 아이처럼 되어라. 영적으로 깨어서 거룩한 두려움과 또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거룩한 열망을 가지고 순례자로 살아가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고백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을 추구하라. 교Viewer만을 버리고 재물에 대한 허영심을 버려라.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고 가장 겸손한 위치에서 살아가며,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기뻐하라.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리라. 수욕을 참으며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해주며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라.


4) 실천적인 삶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구원받고 싶은 사람은 모두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겸손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면 그리스도인의 매일 매일의 삶은 겸손을 나타내 보여야만 한다. 만일 병든 자와 헐벗은 자와 감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면 이러한 사랑이 삶에서 표현되도록 끊임없이 힘써야 한다. 만일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이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만일 감사해야 하고 지혜로워야 하며 거룩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면 감사와 지혜와 거룩함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 우리의 새로운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 보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한다면 매일 매일을 그런 식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나는 윌리엄 로 목사의 글에 무한한 감동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기도에 너무나도 분명한 확신이 있었고, 또 일상생활에서 그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며 살아가는 데에 전적으로 헌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참된 기도란 절대로 제단 앞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 기도는 내적인 인격을 변화시켜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신을 확신했다. 일상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기도는 전혀 기도가 아니며, 로 목사의 표현을 빌자면 ‘입술 운동’에 불과하다.


기도와 삶의 연결은 너무나도 매력 있는 결합이지만 나는 쉽게 그것을 망각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양 극단에 서도록 늘 유혹을 받는다. 기도만 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구경만 하는 것과 내가 직접 나가서 나 혼자 다해버리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기도와 행함이라고 불렀던 그 두 가지가 아름답게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 나는 좀처럼 들어가지를 못한다. 나에게 이 귀중한 교훈을 다시 한 번 가르쳐준 윌리엄 로 목사에게 감사를 드린다.


9.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

1515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난 테레사는 스무 살 때 카르멜회의 성육신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녀는 수녀원에서 많은 중병에 걸려 투병 생활을 했다. 그녀는 그 수녀원에서 매우 경건한 삶을 살았으며, 가끔씩 초자연적인 체험을 하기로 유명했다. 1555년 테레사는 소위 ‘두 번째 회심’을 경험했는데 그것이 결정적으로 그녀의 영적 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환상을 더 자주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적 상담자의 인도 하에 묵상 생활에 온전히 헌신하는 새로운 카르멜회 수도원을 설립하는 계획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이 그녀의 이 계획에 동Viewer참하였다.


기도에 관한 그녀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Interior Castle(영혼의 성)이란 책인데, 이 책은 그녀가 환상을 보며 기록한 책이다. 그 책에서 테레사는 한 성의 바깥에서부터 시작하여 많은 방을 거치면서 영혼이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할 수 있는 장소인 그 성 한가운데 있는 방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영혼의 순례 길을 묘사하고 있다. 번연의 「천로역정」과 마찬가지로 풍유를 사용하여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영적인 여로를 묘사하고 있다. 그 길에는 방해도 많고 기쁨도 많다.


30주 『영혼의 성(Interior Castle)』발췌


“진보를 이루려는 노력”(관련 성결 구절 : 딛3:1-8)


1) 유해한 죄를 피하려고 노력함

이 장은 이미 기도 생활을 시작해서 첫 번째 단계, 혹은 첫째 방을 떠나기 원하는 사람들과 관계가 있다. 그들에게는 죄의 계기를 피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사람들이 시작 단계에서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만큼 더 진보한 것이어서 타락할 위험이 Viewer더 적고, ‘성’안에 더욱 깊이 들어 갈 수 있는 소망이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기를 무척 원하시기에 쉬지 않고 우리를 가까이 오라고 부르신다. 이 단계에 있는 많은 영혼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너무나 달콤하다는 것을 알지만, 즉시 그 음성에 응답할 수 없음을 슬퍼한다. 그래서 그들이 초보자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감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훌륭한 사람이나 설교나 좋은 서적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호소하신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이나 시련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도를 명하신다. 그러한 기도가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귀중히 보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감찰하셔서 우리의 소원을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사탄의 공격은 심각하다. 이것이 바로 이 단계에 있는 영혼이 초보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당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사탄은 이 세상의 세속적인 쾌락을 가지고 영혼을 공격하며, 영혼을 속여서 그런 쾌락들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하도록 미혹하며, 세상에서 인정되는 높은 지위를 그 영혼에게 상기시킨다. 그리고 지금 시작한 삶의 방식에 동조하지 않는 많은 친구들과 친척을 앞세워서 방해할 수도 있다.


3) 놀라운 포용력

그라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포용력으로 복을 주셔서 우리의 갈 길을 도와주셨다. ‘이성’을 통하여 세상적인 쾌락이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에 비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하고, ‘믿음’을 통하여 참다운 만족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우리 영혼에게 경고해 주고 있다. 또한 ‘기억’을 통해 우리의 영혼은 그 모든 쾌락의 종말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의지’를 통해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영혼은 사랑의 행위와 사랑의 증표를 수 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의지를 통해 우리의 영혼은 참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에게 생명과 존재 자체를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다음에 ‘지각’을 통해 우리의 영혼은 우리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하나님보다 더 나은 친구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세상에는 사탄이 그려 넣은 거짓과 쾌락이 가득 차 있으며, 그 거짓과 쾌락에는 시련과 염려와 괴로움이 수반된다. 우리의 영혼이 이 단계에서 뒤로 후퇴하면 다시는 안정과 평안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이 지각이 우리 영혼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이런 유의 묵상들은 사탄을 이길 수 있게 해준다.


우리의 영혼은 이 무렵 분명히 더 큰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 특히 우리 영혼의 성격과 습관이 더욱더 진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사탄이 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지옥의 모든 권세가 힘을 모아 영혼의 진보를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바른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과 연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기도의 여로에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추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미 앞서가고 있는 사람들과도 연합해야 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사람들에게는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우리를 그들과 함께 데려가기 때문이다.


4) 위로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점 한 가지를 반복하겠다. 그것은 시작 단계에서 우리가 초기에 받게 되는 위로에 절대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단계에 위로가 없다고 불평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분의 양 어깨에 짊어지신 십자가를 끌어안고, 이 십자가가 바로 당신이 져야 할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분량은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고통의 분량과 같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내적인 위로를 주셔야만 시련을 더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사실과,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Viewer다. 기도의 초보자들은 힘쓰고 애쓰며, 굳은 결의를 가지고 부지런히 스스로를 준비시켜서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일치시켜야 한다. 기도의 초보자들이 해야 할 일은 이것뿐이다. 이 능력은 영적 여로에서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다.

Viewer

5) 낙심하지 말라

때때로 실패한다 해도 낙심하지 말라. 더 나아가, 진보하려는 노력을 절대로 멈추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넘어짐을 통해서도 당신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성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그 죄의 결과로 어떤 해가 생기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로 타락하게 하신다. 우리의 죄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더욱 분투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6) 조용히 기도의 시간을 시작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자.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혼자 전투에 임하지 말자. 유혹이 시작되는 것을 느끼면 자신의 불타는 노력으로 반격하지 말고, 오히려 조용히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시작하라. 기도하기 위해서 하던 일을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가 기도의 영으로 계속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하는 모든 시간을 유익하게 바꾸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처음부터 기도하는 것밖에는 없다. 우리가 패배하는 오직 한 길은 돌아서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는 믿음과 연합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고, 또 우리의 믿음이 행위와 연합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의미가 없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게 했는지를 볼 수 있는 힘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기를 원한다면 믿음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계속해서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기도해야만 한다.


7)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 영혼의 눈에 덮인 비늘을 제거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연합이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영혼이 그 거처에 들어가게 되면, 지극히 복되신 성삼위 하나님께서 지적인 환상을 통해서 진리를 분명히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첫째로, 영광의 광채로 우리의 영혼이 불타오르고, 그 다음에는 삼위 하나님이 뚜렷이 구별되고, 또 놀라운 지식으로 우리의 영혼이 삼위 하나님이 한 본체시고 한 능력이시며, 한 지식이시고 한 하나님이시라는 매우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여기서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과 대화하고 말씀하시며, 복음서에 나와 있는 주님의 말씀들을 설명해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영혼에 찾아오셔서 거처를 함께 하신다.


8)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말라

당신의 노력이 아무리 위대하게 보여도, 그 노력을 통해서는 그 성의 아무 거처에도 들어갈 수 없다. 성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을 그곳으로 인도하셔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저항을 만난다 해도 절대로 자신의 힘을 써서는 안 된다는 점을 충고하고 싶다.


일단 이 성의 생활을 누리는데 익숙해지면 범사에 평안을 얻을 것이다, 심지어 많은 수고가 요구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그 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소망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다.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빌라의 테레사의 글은 내가 늘 읽기에 어려웠다. 아마 그것은 기도 생활을 여러 개의 방과 단계를 가진 성으로 비유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적인 결혼’을 경험할 때까지 그 각각의 단계는 우리를 더욱 깊이 있는 기도 생활로 이끈다. 우리는 테레사의 글을 통해서 우리도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 그와 같은 진보를 이룰 수 있다Viewer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의 습관을 발전시켜 나갈 때, 한때 우리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유혹들이 더 이상 전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놀라운 실재이다. 바로 테레사가 우리를 이 실재로 이끌어 준다.


출처 : 천성성결교회
글쓴이 : 천성교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