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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빛과 어두움 중 선택하라 [2018.04.08]

하나님아들 2019. 1. 12. 12:31

201848(주일) 낮 설교 - 부활절 제2-

 

빛과 어두움 중 선택하라

( 요한일서 1 : 510 )

 

. 반값 스티커

 

어느 동네에 그리 크지는 않지만, 온갖 생필품을 거의 다 팔고 있는 마트가 하나 있습니다. 아기에게 먹일 분유 판매대에서 갓난아기를 등에 업은 젊은 엄마가 분유를 찾고 있었습니다. 행색이 남루하게 보이는 엄마는 만 원짜리 한 장을 꼭 쥐고 있었는데, 진열된 분유들은 너무 비싸서 그녀가 가진 만 원으로 구매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마트 사장이 분유 판매대를 지나다가 우연히 그 엄마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뭔가 수상하게 보여서 아기 엄마를 주시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아무래도 분유를 사려는데, 돈이 모자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딱한 사정이라 해도 정찰제로 물건을 파는 마트에서 그냥 상품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혹시나 아기 엄마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고민하던 마트 사장은 분유의 유통기한을 체크하는 척하다가 슬그머니 분유통 하나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했습니다. “아이고. 이를 어째? 통이 찌그러졌네. 파손된 상품을 그냥 판매할 수도 없으니 이를 어쩐다?”

그래, 반값 스티커라도 붙여서 팔아야겠다.” 찌그러진 분유통에 반값 스티커를 붙인 사장은 황급하게 자리를 떠났고, 지켜보던 엄마는 그 분유통을 들고 계산대로 빠르게 걸어갔습니다. 그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마트 사장은 훈훈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부자는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나누면서 느꼈던 행복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아기 엄마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작은 마트 사장은 진정 마음이 부요한 사람입니다.

아기 엄마도 고민했지만, 마트 사장도 순간 고민했을 것입니다. 만약 마트 사장이 냉정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아기 엄마는 어쩔 도리 없이 빈손으로 마트를 나가야 했을 것입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카피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삶 속에서 날마다 순간순간 선택해야합니다. 그 선택이 나와 이웃들을 이롭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해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잘 선택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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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부활절은 지났지만, 당분간 부활절기가 계속됩니다. 부활절기는 모두 7주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삶의 목표와 방향성이 달라졌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에 대한 악명 높은 핍박 자()였습니다. 그는 매우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바울은 예수쟁이들은 모두 잡아 가두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다메섹까지 예수쟁이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예루살렘이나 유대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다메섹은 이스라엘 땅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예수쟁이들을 잡아오겠다고 출발했습니다. 바로 그 길에서 바울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후 바울의 삶은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쟁이들에 대하여 살기등등했던 바울이 예수님에 대한 복음증거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부활의 목격자들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자신에 대해 고백합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8) 그는 부활의 목격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목격자요 증인으로 살아야합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입으로 증거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입으로 증거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변화된 삶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변화가 우리 속에서 일어나야 할까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고 했는데, 그리스도 밖에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 안으로 이주하여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것이 됩니다. 여기서 새것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한마디로 주님과 함께 사는 존재입니다. 임마누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전에는 선택권조차 없이 죄가 이끄는 대로 살았다면, 이제는 선택하며 사는 것입니다. 죄가 아니라 의를 선택하고, 어두움이 아니라 빛을 선택하며 사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Α.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사실입니다(5).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21:23)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22:5) 촛불을 켜놓았습니다. 그런데 날이 밝았습니다. 햇빛이 비춥니다. 그러면 촛불은 더 이상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촛불과 햇빛은 비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해와 달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고, 그 영광이 천국을 모두 비칩니다. 어린양 예수님이 등불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생명을 가지고 계신데,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1:4). 그리고 세례요한은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6-8). 예수님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1:9)이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5:14-16).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둠이 있습니다. 왜 이 세상에는 어둠이 더 깊어진 것일까요? 사람들이 원래 빛의 자녀이기에 빛 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빛의 자녀로서의 본분(本分)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빛의 자녀인 인간들은 각각 세상을 비추는 빛인데, 그 빛이 꺼져버린 것입니다. 죄악 가운데 행하므로 빛을 잃었고, 그 결과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그 빛을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십니다(1:9). 그래서 그 빛을 믿는 사람들은 다시 세상을 비추는 빛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빛의 사명자입니다.

 

Β.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6-7).

하나님께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이 세상에는 햇빛이 비춰도 그림자가 생깁니다. 그림자는 완전한 어둠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어두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비치는 빛은 그림자도 없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1:17)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치는 빛은 그림자도 없습니다. 완전한 빛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은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의 빛과는 비교불가입니다. 그런데 당시 영지주의 이단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교제를 나눈다는 뜻입니다. 요즘에도 이런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았다느니, 하나님께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다느니 하면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임을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일단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아야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아니라 삶을 살펴보아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6) 하나님과의 사귐, 즉 교제의 삶을 산다면 당연히 빛의 아버지처럼 어둠의 일이 아니라 빛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거룩한 척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말이 아니라 행위를 보아야합니다. 어떤 열매가 맺히는지 보고 판단해야합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이기에 빛 가운데 행해야합니다. 그것이 주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Γ. 날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8-10).

요한서신이 기록될 당시 가장 말썽을 부렸던 이단은 영지주의이단입니다. 그들은 한번 죄를 씻음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통일교에 피 가름 교리가 있습니다. 교주인 문선명이는 죄가 없기에 죄를 지은 사람은 문선명의 피를 받아야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 주장을 이어 받은 이단 중에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이단이 정명석이단입니다. 피를 어떻게 받을까요? 교주와 성교(性交)를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생각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단들이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8-9)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가 없을까요? 만약에 회개하고 믿고 바로 죽으면 더 이상 죄가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계속 살아야합니다. 목욕한 후에도 다시 더러워지면 손발을 씻듯이, 더 이상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하지는 않지만, 날마다 짓는 죄에 대하여 자백해야합니다. 회개와 자백은 다릅니다. 회개는 유일회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날마다 살아가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면 좋겠지만, 여전히 옛사람의 죄 성이나 쓴 뿌리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고 넘어가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더 친밀한 사귐이 가능합니다. 빛의 주님과 동행하노라면, 자신의 죄와 허물과 어두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합니다. 이것이 빛을 선택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죄와 허물을 그냥 둔다면, 점점 틈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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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는 느리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기로 소문난 동물입니다. 그런 낙타에게서 지혜를 찾는다는 것이 매우 생소하지만, 사실 낙타에게서 배울 수 있는 지혜가 참 많습니다. 낙타는 아주 오랜 옛날, 오랫동안 살아온 초원을 버리고 사막에 터를 잡습니다. 먹힐 염려도 없지만, 먹을 것도 없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사막에서 어떻게 낙타는 생존할 수 있었을까요? 무더위와 강추위의 무한 반복인 사막에서 초원이 고향인 낙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지혜 때문이었습니다. 태양을 직접 바라보면 당장 얼굴은 뜨겁지만 몸에 그늘을 만들어 오히려 시원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무같이 질긴 입으로 다른 동물이 먹기 힘든 가시덤불과 동물의 뼈까지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또한 41도까지는 땀도 흘리지 않고 오줌도 농축해서 누었으며, 하루 200의 물을 마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열 손실을 막기 위해 여분의 지방은 혹에 몰아넣었으며, 사막에서 함부로 달리지 않았고, 쓸데없이 헐떡이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달리는 능력이 있다는 걸 모른 척했습니다. 낙타는 달릴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지만, 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낙타의 선택은 낙타가 어떤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위하여 빛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부활의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승리를 맛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출처 : 덕교교회 사람들
글쓴이 : 아브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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