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갈매기의 죽음
영국을 여행하던 한 사람이 해안 지방을 지나는 중에 많은 갈매기들이 모래사장에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치우고 있는 사람들 곁으로 가서 한 인부에게 갈매기들이 왜 죽었는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인부가 대답해주었다.
“이곳에는 여행객들이 많이 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갈매기가 많은 것을 보고 먹이를 던져주게 됩니다. 갈매기들은 과자. 사탕 등 여러 가지를 맛있게 받아먹게 되지요. 실은 그런 음식은 갈매기들에게는 해로운 음식들이며. 좋은 자연 음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갈매기들이 그렇게 과자나 캔디나 받아먹다 보면. 좋은 자연 음식에 대한 식욕을 전혀 잃어버리게 됩니다. 철이 지나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갈매기들은 그들에게 좋은 자연음식 먹이가 바다 속에 그렇게 많지만. 결국 갈매기들은 이처럼 굶어 죽는답니다.”
하늘 백성이 세상의 것을 너무 좋아하거나 집착하면. 신령한 것에 대한 미각을 상실해버리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그 길은. 갈매기의 예가 가르쳐주듯. 사망에 가까이 가는 길일뿐이다.
결코와 거의의 삶
어떤 사람이 생의 마지막 길목에 서게 되어 이제 한 발만 내딛으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될 그러한 때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힘껏 그를 도와야 한다. 이전에는 우리를 경멸하였던 완고한 죄인들도 임종 시에는 우리의 말을 들을 것이다. 이전에는 마치 사자처럼 다루기 어려웠던 사람들도 임종이 가까워 올 때에는 분을 누그러뜨리고 마치 양처럼 유순해질 것이다.
내 교구민들 중에는 열에 하나 정도로 가장 완고하고 조소적인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 역시 죽음을 눈앞에 두고는 겸손해져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만일 다시 병석에서 일어날 수만 있다면 자기의 삶을 바꾸겠노라고 약속할 것이다.
키프리안은 건강한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날마다 자기가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을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사람은 현재를 무시하고 다가올 때를 대비한다. 그런데 이제 막 임종하기 직전에 있는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자기가 이제 곧 죽게 될 것임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었다 할지라도 결연히 자기의 죄를 던져버리고 변화를 약속하며 자신의 어리석음과 세상의 허무함을 한탄할 것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임종을 앞에 둔 사람의 변화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희망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할는지도 모르다. 확실히 죄인들이 임종 시에 그리스도께로 회심하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하였다. “착하게 살던 사람은 결코 좋지 않은 죽음을 맞을 수 없고, 좋지 않게 살던 사람이 훌륭하게 죽음을 맞는 일은 거의 없다.” '결코'와 '거의'는 같은 말이 아니다. 우리는 건강할 때에 '거의'라는 말을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치료책을 찾아 노력해야 한다.
구세주 없이 죽게 된 병사
전쟁터에서 고참 병사가 총탄에 쓰러지자 군목이 달려와서 “병사, 죽는 것이 두렵지 않는가?”라고 묻자 병사는 눈을 크게 치켜뜨고 불쾌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수없이 싸우면서 죽음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두렵다니요, 저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필 죽어가는 시간에 나의 감정을 건드리십니까?” “하지만 병사, 죽음 후의 일은 준비되었나?” 병사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목사님, 바로 그것이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병사는 죽음 후에 올 일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이 세상의 위험에는 용감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심판을 주관하시는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기력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셨습니까?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지금 당신의 손을 하나님께서 붙잡으시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에게 구원이 있고 용서가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밖에는 남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그리스도께로 나오시면 당신은 결코 심판대 앞에 서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긴장된 신앙을 잃지 말자
현대인의 물질주의는 많은 것을 만들어 내고 많은 것을 가지게 하지만 결국 그 물질에 밝혀 사라진다. 알렉산더 대왕의 소년 시절의 가정교사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에게 물었다. "왕자님께서는 임금이 되시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소아시아를 정복하겠습니다." "그 뒤에는 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팔레스틴과 이집트를 점령할 것입니다." "그 뒤에는요?"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손에 넣겠습니다." "인도 점령이 끝나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 때즘 저도 죽겠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신중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멀리를 돌아다니다 죽나, 지금 죽어버리나 별로 큰 차이가 없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정말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다니면서 어려서 들었던 선생님의 교훈을 얼마나 기억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는 귀중한 교훈이다.
종말과 삼판은 반드시 갑자기 온다. 그 예도 "노아 때에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였으나, 갑자기 홍수가 쏟아져 모든 것을 앗아갔다"고(마24:38-39), 소돔과 고모라 성은 물질적인 번영으로 흥청거리며 죄악을 즐기고 재미있는 세상 같았으나, 갑자기 불세례를 받아 하루 밤 사이에 멸망하였다. 종말을 산다는 긴장된 신앙이 없을 때, 그 멸망은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다.
담대한 믿음
스위스의 한 순교자가 장작더미위에 맨발로 올라섰다. 이제 막 불을 질러 화형을 집행하려는 순간 자기의 화형집행 형리를 감독하던 치안판사를 가까이 오라고 했다.
“죄송하오나 판사님의 손을 내 가슴에 얹어 보십시오. 저는 이제 곧 화형을 당하는 몸이옵니다. 만약 저의 심장이 평상시보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뛴다면 저의 종교를 믿지 마시고 저의 하나님을 부인하셔도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순교자의 표정이 너무 담담하여 의아했던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순교자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순교자의 가슴은 화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침대에 잠자러 가는 사람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치안판사는 너무나 놀랐다. 이 비범한 힘이 어디서 왔단 말인가. 죽음이 불신자들에게는 불안한 것이요. 두려운 것이며 고통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으나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요. 주님이 예비하신 아름다운 영원한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니 어찌 불안하며 두려우랴.
무디 선생은 “세상이 점점 멀어지니 천국 문이 열린 것이 보이는구나”라고 하며 기쁘게 세상을 마쳤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천국 문이 보이지 않는다면 기쁘게 죽어갈 수 없을 것이요.
기쁘게 죽어가지 않을 자가 어찌 천국에 가겠는가. 마지막 모습이 그의 행방을 말해 줄 것이다.
뒤에 남기는 추억
인생에서의 최대의 의문의 하나는 "사람은 죽은 뒤에 무엇에 의해 추억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사람이 죽고 나서 남은 사람들이 그에 관한 추억을 말하게 될 때, 누군가가 그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두 무언가 특징 있는 인상을 뒤에 남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뒤, 사람들이 기꺼이 우리 일을 회상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노력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뒤에 남기는 추억이 언제까지나 여러 사람의 마음에 향기가 되어 남을 수 있도록 지금부터 살아갔으면 한다.
무디의 죽음
무디선생은 말하기를 "후일 신문에 동부 노스필드 출생인 D.L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가 날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 말을 믿지 말라. 그 때에 나는 지금보다 더 생생하게 살 것이다. 그 때는 늙고 병든 육체를 떠나서 영원한 높은 집으로 올라가 있을 것이다. 그 때에 나의 몸은 사망이 침범하지 못하고 죄가 더럽히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이다. 나의 육신은 1837년 출생하였고 영혼으로 1856년에 출생하였다. 육신으로 출생한 나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으로 난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이와 같이 명확한 미래 관과 죽음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선생은 땅에서 마지막 날 1899년 12월 22일 임종 시를 당하여 침대에 누운 채로 말하기를
"땅이 물러가고 내 앞에는 하늘 문이 열리는구나. 만일 이것이 죽음이라면 내 어찌 이것을 싫어할까. 저 나라에는 음침한 골짜기가 없고 아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 어서 가보아야 하겠다. 오늘은 내가 면류관을 쓰는 날이다"하고 기쁨으로 숨을 거두었다.
사나 죽으나
청소년 시절 그의 아버지가 마음대로 아들의 진로를 바꾸어 법학을 시켰을 때도 불평 없이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열심을 내던 칼빈의 성품은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도 여전히 나타났다. 이처럼 철두철미한 책임감을 가지고 주어진 일이라면 무엇이나 관철시키고야마는 칼빈을 종교 개혁의 마무리 정비사로 택하신 하나님의 선택은 너무나도 합당한 일 이었다.
그는 루터와 같이 돌연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다. 유언장을 작성하는 등 모든 일을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후임자까지 선정해놓은 다음 파렐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형이 나보다 오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 같소. 부디 우리의 우정을 기억해 주길 바라오.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하고, 그 열매가 하늘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소. 나는 형이 나 때문에 지치는 것을 원하지 않소. 나는 매우 힘들게 숨을 쉬고 있소. 매순간이 나의 마지막 호흡인 양 생각되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또 죽으니 그것으로 족하오.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모든 자에게 살아서나 죽어서나 유익한 것이오.”
1564년 5월 27일, 죽는 순간까지 의식을 잃지 않은 채 그는 54년이라는 생애를 이 땅에서 유감없이 주님께 헌신하다가 피곤에 병든 육신을 땅에 눕히고 영은 영광스러운 주님 곁으로 갔다.
삶의 올바른 자세
하이데거는 자기가 반드시 가야 될 세계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의 철학의 주제가 항상 죽음인데, '나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입니다. 현실 도피의 철학자가 아닙니다. 현실을 본질보다 훨씬 중하게 여기는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적인 사람이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살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죽고 있다. 죽음에로의 존재이다. 내가 죽을 때도 홀로 죽는다. 그리고 삶이 나의 것이듯 죽음은 절대적으로 나에게 속한 것이다. 그런 고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삶을 바로 알아야 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해 주체적으로 대면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 삶을 긍정해야 되는 것처럼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삶이 자기의 것인 것처럼 죽음처럼 확실하게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삶의 현실에 올바른 자세를 가진 사람은 죽음의 현실에 대해서도 올바른 견해와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성프란시스의 장례식
이태리의 아씨씨의 성자 프란시스는 사치스러운 방탕과 향락에 빠졌던 청년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후에는 놀라운 성자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한 프란시스는 드디어 수도승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때 프란시스에게는 진정 깊이 사랑하던 청순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한 사람 있었다. 그러나 수도승이 되는 엄격한 독신생활이었기 때문에 프란시스는 큰 고통 중에 여자를 단념하고 하나님을 따르기로 나섰던 것이다.
수도원에서 몇 해가 지났다. 그 동안에도 사랑하던 여자를 잊으려고 애를 많이 썼으나 아름다운 여인의 그 모습은 계속 프란시스를 괴롭혀 온 것이었다.
어느 날 밤, 흰 눈이 소복이 쌓였다. 다른 수도승들이 보자니, 프란시스가 밤에 혼자 밖에 나가서 눈사람을 만들더라는 것이었다. 여자 눈사람을 하나 만들더니 그 옆에다가 어린아이 눈사람을 몇 개 만들었다. 그리고서는 그 눈사람들을 행복한 모습으로 바라보며 약 한 시간 동안을 거기에서 있었다.
이윽고 프란시스는 눈사람들로 부터 발을 돌이켜서 수도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서는 자기 자신의 장례식을 실제로 자신이 주례하더라는 것이었다. 즉 자기가 이제 세상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임을 하나님 앞에서 의식으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죽음
설교자로 유명한 오 할레스비는 이런 실화를 소개했습니다.
그의 고향에 신앙 좋은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가족이 없어서 노후를 의탁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그녀의 먼 친척을 찾아가 자신을 맡아달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맡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잘 믿는 성도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맡아달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내 비록 나이는 많지만 결코 부담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죽음이 아름답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드렸고 주님께서는 나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은 아름다울 것입니다.”
누가 그의 말을 믿겠어요. 아무도 받아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혼부부가 이 할머니의 간증을 듣고 맘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그 할머니를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이 할머니는 여생을 평온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날도 다른 날처럼 찬송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한 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기척이 없어서 젊은 부부가 방에 들어가 보니 주무시듯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편지한 장을 발견하였는데 유서였습니다. 거기에
“아무도 나를 맞아주지 않았는데 당신들은 나를 믿어주었고 내가 믿는 예수를 믿어주었으며. 나의 신앙과 기도를 믿어주어서 나와 함께 살아주고 베풀어준 은혜에 참으로 감사하오”라고 말한 뒤에 그가 가졌던 깜짝 놀랄 만한 막대한 재산을 유산으로 남기면서
“당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재산을 가장 잘 관리할 사람들로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에 이 재물을 써주십시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자를 가장 원하십니다.
아우로라의 로맨스
로마 신화에 여명의 여신 아우로라의 로맨스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우로라는 불멸의 신의 몸으로 젊고 아름다운 인간 청년 티토루스와의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인 제우스 신에게 결혼 선물로 티토루스도 자기처럼 불멸의 몸으로 만들어 주기를 구했습니다. 제우스는 사랑하는 딸의 소청을 들어주었고 그들은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루로라는 남편이 죽지 않기를 구했으나 늙지 않기를 구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우로라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으나 티토루스는 늙고 힘이 없어 거동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늙고 병든 남편의 신음하는 모양을 본 아우로라는 그를 죽지 않게 구한 것을 후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티토루스가 죽지 않고 또 늙지 않는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 후에 보다 큰 문제가 또 일어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의 육체가 70년 혹 80년의 생명밖에 지탱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의 힘도 그 이상을 지탱하지 못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여튼 현세는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흩어져 사는 동안 주어진 믿음과 사명에 충실하고는 떠나온 본향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죽고 산다는 도리를 깨닫기까지 너 아무리 득의했다 할지라도 너는 처량한 나그네"라고 위대한 시인 괴테는 말하였습니다.
에반스목사의 4개 조항
나의 미국인 친구인 에반스라는 분은 내가 1953년에 처음으로 도미했을 때부터 사귀어 온 오랜 친구였습니다. 내가 뉴욕에서 공부한 시절에는 브루클린에 있던 그분의 교회에 나갔고, 달라스에서 공부를 할 때는 그분의 교회가 나의 학비를 부담하여 주었습니다. 그분은 목사가 된 후 결혼했는데, 그때 주례목사는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나는 그 결혼에 참석하여 아버지 목사가 아들과 자부를 두고 진행하는 결혼식을 인상 깊게 지켜보았습니다. 성탄휴가 때는 그분의 집에 가서 성탄을 즐겼고, 그분들의 첫아들이 나서 말을 배울 때 나를 보면 "아쟈, 아쟈"(한국말로 '삼촌'이라는 뜻)라고 불렀습니다.
이 에반스 목사가 지난 5월에 오랜 병고 끝에 소천 했다는 소식을 얼마 전 그의 부인으로부터 받았을 때 나는 큰 슬픔과 충격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에서 에반스 목사가 20개월간 결장암과의 투병에서 지켰다는 4개조의 항목이 나의 슬픔을 멈추고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4개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나는 결코 불평하지 않겠다. 둘째, 나는 집안을 우울하게 하지 않겠다. 셋째, 내가 받은 복을 헤아려 보겠다. 넷째, 내 병을 유익한 것으로 만들겠다.
과연 그는 운명하기 얼마 전에 "나는 주님께 갈 준비가 다 되었소"라는 말을 남기고 아주 성스럽게 소천했다고 합니다. 에반스 목사의 4개조는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영광스러운 종말
세상에 비그리스도인의 인생관처럼 허망하고 절망적인 것은 없다. 챨스 다아윈은 그의 삶을 마치면서 솔직히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는 인생의 한 국면에만 관심을 집중시킨 나머지 시를 즐기고 음악을 즐기는 힘을 상실하였다. 심지어 자연 자체를 감상하는 힘을 대부분 상실하였다.”
가련한 다아윈.. 웰스의 종말도 그와 매우 유사하였다. 그처럼 인간의 이지와 인간의 이해력을 강조하고. 기독교의 죄의 교리와 구원의 교리를 조롱하던 사람이 삶을 마치면서 그가 물거품의 인생을 살았다는 고백을 한 것이다. 그의 마지막 저서였던 『극한점에 이른 이성』에서는 불경건한 사람들의 마지막 비참함이 무엇인가 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또는 옥스퍼드 대학의 한 단과대학 학장이었던 마렛 박사 같은 합리론자는 그의 자서전에서 ‘내게 있어서 전쟁은 내 인생의 긴 여름을 갑작스레 끝내버렸다. 그 이후부터 나는 쓸쓸한 가을과 더 나아가 차가운 겨울밖에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어찌하든지 마음을 상실당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만 한다.’ 라고 고백했다.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죽음은 무서운 일이다. 그들의 전기를 읽어보라. 그들의 찬란하던 날들이 마지막을 고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 것도 기대할 만한 것이 없다. 그들은 전에 성공하였던 일과 승리하였던 일들을 회상함으로써 자신들을 위로해 보았자 결국은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성경은 어디서나 그 뒤의 끝을 생각하라고 강권하고 있다.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하나님을 의뢰하라. 그 하나님의 능력을 의뢰하라. 그리하면 종말이 영광스러울 것이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집
하나님과 화평을 맺은 우리는 복음전도자 디 엘 무디의 임종을 본받아야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달았을 때. “이 땅은 물러나고 하늘이 내 앞에 열리노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다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꿈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황홀한 경지입니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음은 달콤합니다. 여기에는 골짜기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나는 가야만 합니다.”
거의 죽은 상태에 있던 무디는 다시 원기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허락으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분하는 얇은 망의 저쪽을 보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입구로 큰 대문 사이에」 있었으며 「오랫동안 사랑해왔으나 잠시 헤어져 있던」 낯익은 얼굴들을 얼핏 보고 온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자기가 전도하던 시절에 큰소리로 주장하던 말들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여러분들이 신문에서 노드필드의 디 엘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를 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그때에 나는 지금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을 것입니다. 나는 좀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이 낡고 흙으로 된 육체로부터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집으로 갈 것인데. 그곳은 죽음이 범하지 못하며 죄에 물들지 않으며 육체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단장될 것입니다. 육체로 난 것은 죽을 것이나 영으로 난 것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당신은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죽을 준비도 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굳게 믿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정된 시간
"이제 갈 시간이야!" 아주 오래 전 캄캄한 암흑 속에서 들려 왔던 감미로운 사랑의 목소리. 그 때 나는 맨발로 개똥벌레 전등을 들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귀뚜라미가 알리는 귀가 종소리를 듣곤 했었다.
별로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어머니의 깊은 사랑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 때, 어머니는 우리가 얼마나 놀고 싶어 하는 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갈 시간이야!" 나는 해가 지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 같다. 하나님은 내가 얼마나 머물고 싶어 하는 지를 잘 알고 계신다. 나는 가끔씩 죽어가고 있는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얘기를 하고 싶지가 않다. 죽음은 우리의 적이다. 우리가 반드시 만나야 할 우리의 최후의 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죽음의 대적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유치한 일이며 잘못 얘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이란 선물을 가치 있게 쓰며, 계속해서 도움을 구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절망에 빠지지 않고 두려움과 고통으로 우리 자신을 낭비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죽음에 대해 얘기해 주는 것들이 많이 있다. 특별히 사계절을 바라보면 그런 것을 더욱 많이 느끼게 된다. 변하는 색깔들 그리고 떨어지는 낙엽 등을 보면 우리도 "갈 시간이 되었구나"하는 것을 잘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젊든 나이 많든,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롭게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밤 죽는다면
수년 전에 영국 선원 한 명이 뉴욕 시의 한 선교회를 찾았었다. 그가 마음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못한 채 선교회를 나서려 할 때 한 사역자가 현관문에서 작은 카드 하나를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카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인쇄되어 있었다.
"내가 오늘 밤 죽는다면 나는 ○○○로 갈 것이다." 공란 밑에는 "여기에 써넣으시고 당신의 이름을 기록하시오"라고 되어 있었다. 그 선원은 카드를 읽어보지도 않고 호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배를 타러갔다. 영국으로 돌아가는 항해 도중 그는 갑판 위의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사람들이 그를 선실로 데려다주어 여러 날을 누워 있는 동안 그 카드가 눈에서 떠나지 않고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오늘 밤 죽는다면 나는 ○○○로 갈 것이다." "그래. 내가 정직하게 이 공란에 채워 넣는다면 지옥이라고 써야 할 거야. 내가 오늘 밤 죽는다면 지옥에 가게 되는 거야. 그러나 그렇게 써넣을 수는 없어"라고 그는 생각했다. 침대에 누운 채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고는 카드에 "내가 오늘 밤 죽는다면 나는 천국으로 갈 것이다"라고 써넣었다.
어느 날 그는 다시 뉴욕에 왔다. 그 는 그 선교회에 들어가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 카드를 제출했다. 당신이 그런 카드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내가 오른 밤 죽는다면 나는 ○○○로 갈 것이다." 공란에 무엇이라고 써넣겠는가.
우리 인생
어떤 중년의 사나이가 한적한 해변 길을 혼자 거닐고 있을 때 파도가 쓸고 간 모래사장에 뭔가 삐쭉이 솟아있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아라비안나이트에서 나오는 마법의 주전자였다. 뚜껑을 열자마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그 속에 갇혀있던 종이 연기와 함께 나타났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소원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제는 제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 한 가지 밖에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잘 생각하셔서 말씀해 주십시오.
" 잠시 생각하던 사나이는 종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꼭 1년 뒤의 석간신문을 나에게 갖다 주게!" 이 사나이는 1년 뒤의 주식 시세를 미리 알아서 그곳에 몽땅 투자를 하여 큰 갑부가 되리라는 기대를 가졌었다.
한참 기분 좋게 신문을 보고 있던 그는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것은 주식의 시세를 알리는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이름 세 글자와 함께 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이 게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것이 꿈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육신의 일에만 집착하여 마지막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자책감이 그에게 몰려왔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면서 살아야 하리라.
우주선에서의 마지막 대화
1986년 1월, 6천만 미국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첼린저 호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그 우주선의 비행사들이 남겼던 마지막 대사가 공개 되었다. 그 대사는 비행 레코더에 잡혀 대서양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그들의 마지막 순간 그들에게 가장 관심이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주목해 보라.
남자 : 남자 목소리, 여자 : 여자 목소리
남자 : 무슨 일이지? 오, 맙소사. 안 돼. 오 안 돼.
여자 : 오! 이런. (비명소리) 너무 뜨거워(신음 소리)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말하지 마. 오. 지금 하세요.
여자 :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은 안돼요. 여기서 죽을 순 없어요.
남자 : 당신의 팔이.....안 돼.
여자 : 전 의식을 잃어가고 있어요.
남자 : 우리는 아직은 죽지 않아.
남자 : 할 수만 있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만 있다면....(신음소리)
남자: 그녀가 ... 그녀가... 죽
남자 : 공기가 없어
남/여자 : (신음소리) 오 안 돼.
남자 : 그녀가 의식을 잃었어.
남자 : 그녀에게 행운이 있기를
남자 : 오 하나님! 우리가 죽어가고 있어요. (비명소리) 여자 : 안녕(신음하면서) 사랑해요....
남자 : 마음을 편하게 가져봐! 긴장을 풀라고!
남자 : 어딘가에 비상 착륙을 할 수 있을 거야!
남자: 그래. 맞아 .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남자 : 비상 착륙을 시도해봐.
남자 : 오, 그건 불가능해.
남자 : 손을 내밀어봐.
남자 : 거기에 있어? 깨어 있느냐고? 난...난...
남자 : 하늘에 계신 아버지
남자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남자 : 괜찮아?
남자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하심이니이다. ...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침묵)
임종
죤 칼빈은 임종 시에 "주님! 당신께서 저를 묻어 주시는군요. 이것이 당신의 섭리로 된 것이기에 저는 더 할 수 없이 만족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고백
수년 전에 장모님께서 겨우 회갑을 지내시고 불치의 병환으로 하나님 앞에 가시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 수요일 밤 예배를 끝마치고 집에 가서 잠자리에 누웠다가 불현듯 일어나서 새벽 1시에 시골에서 치료하시던 장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장모님은 다발성 폐암으로 병환이 극심하셨다. 그런데 내 음성을 들으신 장모님께서 숨차하시면서 “하 목사! 난 지금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일세. 내가 숨을 모아 쉬고 있는 참일세. 목사일 잘하다가 천국에서 만나자고.”하고 숨 가쁘게 말씀하셨다. 나는 장모님의 말씀을 중단시키고 “어머니. 수화기를 귀에 꼭 대십시오. 제가 기도합니다”하고 부탁드린 후 “아버지 하나님 저의 어머니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앞에 서실 때까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굳게 의지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20분 후에 장모님은 하나님 앞으로 가셨다. 지금도 목사 일을 하고 있는 내 귓전에는 전화의 수화기를 통하여 뚜렷하게 남기고 가신 장모님의 최후의 신앙고백과 부탁의 음성을 잊을 수가 없다. 60세가 넘으셨던 한 할머니의 내세에 대한 신앙고백이 어리석은 독백일까?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존재를 그는 분명히 믿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기독교의 메시지의 중요한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준 뚜렷한 약속 중의 하나가 내세에 관한 확신이다. 비록 땅에 살아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신앙이 오늘 우리들의 삶을 지탱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것이 곧 신앙의 힘이 아닐까?
자신의 묘비명을 어떻게 쓸 것..
지난 세기 말 쯤에, 스웨덴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은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을 읽다가 자신의 부고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이 어제 사망. 그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전쟁에서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자가 되어 죽은 것입니다."
사실 그 신문 기사는 잘못 보도된 것이었다. 죽은 사람은 노벨이 아니고 그의 형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노벨은 자기의 지나온 생을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자기가 사람을 효과적으로 죽이는 무기를 만들고 그러한 과정에서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로 알려지기를 원치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노벨상을 만들어 평화를 위해 애쓴 과학자나 작가들에게 상을 주기로 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누구나 생의 한가운데서 자기의 묘비명을 고쳐 새로운 것으로 고쳐 쓸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
잠깐의 이별
유명한 피터 마샬 목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샬 목사님의 임종 시간이 가까워 오자 부인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납시다” 라고 말씀하시며 돌아가셨다 합니다. 부인은 여기서 믿음의 용기를 얻어 “나의 남편은 목사였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녀는 계속 글을 써서 여러 권의 책을 내어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에 하늘나라를 알게 되었고 거기서 받은 영감과 감격이 그녀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피터 마샬 같은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도 그저 “갑니다. 또 만납시다”하며 잠깐의 이별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장례식이라고 말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히 끝났다고 생각하여 영결식(永訣式)이라고 말합니다.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남은 옷가지를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유해를 안장하는 예식일 뿐 영결식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갔다가 다시 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요 주께서 하신 약속입니다.
장막집
미국의 6대 대통령이었던 죤 퀸시 아담스가 80세가 되었을 때 오래된 친구를 한 분 만났다. 그 친구는 떨리는 손을 잡고 "죤퀸시 아담스씨,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물었다. 은퇴한 노 대통령은 그를 잠시 쳐다보더니
"저는 아주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현재 거하고 있는 집은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그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했지요. 지붕은 거의 다 걷혀졌고 담장은 대부분 허물어졌고, 바람이 불 때마다 집이 조금씩 허물어져 내리고 있습니다. 낡은 셋집은 이제 거의 아무도 살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저는 곧 그 곳에서 이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아주 좋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는 세상을 떠났다. 고린도후서5:1에서 바울은 현재의 몸을 거할 처소 혹은 '장막 집'으로 비유하고 있다. 아담스 대통령이 웅변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이 장막 집은 일시적이며 영원히 계속되지 않고 결과적으로는 변화와 쇠퇴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기다리는 새로운 집은 놀라우며 튼튼한 집으로 그려져 있다. 그것은 너무나 영광스럽기 때문에 현재의 불완전한 질그릇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다. 죽는 순간 이 불멸의 장막 집은 영혼을 맞아들이게 될 것이며 그 후 부활의 몸과 연합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축복된 장래에 온전히 실현될 것이지만 이 사실은 이미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옛 '장막 집'이 걷힐 때 우리가 하나님의 지으신 집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
몇 달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베일러 병원에 들르게 되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우리 교회의 자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젊은 자매가 그곳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그 병원에서 어떤 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검사가 끝나자. 의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루 게리그 신경질환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치명적입니다. 치료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제 곧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저는 목사님께서 저와 기도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곳에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다른 가능성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시지. 의사나 병원이 수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자매님보다 앞서서 내가 먼저 그 문을 지나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매님보다 먼저 내가 주님의 보좌에 서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시간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 시간은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그 시간이 오느냐 오지 않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단지 언제 오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늘로 가는 그 문이 열렸을 때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의 못 박힌 손이 우리를 참으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이 진정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 영광 속으로 환영을 받으면서 들어갈 때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하시는 그 얼굴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최고의 친구이며. 가장 가까운 친구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영원하신 구세주이십니다.
죽을 때 주께 맡길 가족
순교자 워츠(Watts, Thomas)는 마지막으로 가족과 헤어지는 때 그 가족을 주께 맡겼다. 즉 그는 사형장에 나가는 때, 그를 쳐다보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너희들을 나에게 주셨던 것인 만큼, 이제 나는 너희를 주님께 도로 드린다"라고.
냉정한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 가장 사랑 있고, 좋은 맡김은 이길 이상 없는 것으로, 누구나 죽을 때면 가족을 주님께 맡기도록 할 것이다.
죽을 때 힘 못되는 무신론
한 무신론자가 죽게 되어, 매우 불안해지고 무서워졌다. 그때 곁에 있던 또 한 사람의 무신론자가 말하기를 "이 사람! 좀 사나이답게 죽어! 끝까지 사내답게 해야 해"하고 깨우쳐 주었다.
그러자 죽음에 처하여 있는 그는 "아이고 나도 그렇게는 생각하고는 있어! 그러나 이 마당에 붙어 잡을 것이 하나도 없지 않아. 이런 때 무엇에 의지하여야 할지를 좀 가르쳐 주게"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로 죽음에 처한 사람에게 무신론처럼 못쓰는 것도 없는 것이다.
죽음
한때 유명한 미국의 교수였던 아담스 박사가 학교를 은퇴하고 늙어서 쓸쓸한 인생의 여생을 지낼 때 이었습니다.
하루는 이른 아침에 그가 산책하려 길거리에 나왔을 때,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이 다정하게 인사하며 "아담스 박사님, 어떠하십니까?"하고 인사했을 때 "아담스는 안전하지만 아담스의 집이 말이 아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은 소스라쳐 놀라서 그와 같이 유명한 박사님이 만년에 집조차 하나 없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물을 때 아담스박사는 말하기를 "우리 집은 기둥이 흔들리고 기와가 떨어지고 벽이 파벽풍창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놀라서 자기들이 어떻게 하든지 기금을 모아서 박사님 집을 새로 지어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럴 때 박사님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박사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너희들이 보는바와 같이 박사님의 집의 기둥인 두 다리가 흔들리며, 박사의 지붕인 머리털이 다 빠져 나갔으며, 박사의 벽인 이 몸은 살점 없이 앙상하게 되고 말았으니 이제 박사의 집은 무너지게 되었다. 그런데 너희들이 나의 집을 지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럴 때 제자들은 박사님의 말을 듣고 웃고서 박사님께서 농담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스 박사는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을 떠나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담대한 신앙
스위스의 한 순교자가 맨발로 장작더미 위에 올랐다. 끔찍한 장면을 앞두고 모두 다 긴장되어 있는데 막상 순교할 당사자는 얼굴에 평화가 있고 여유가 있었다. “판사님 저의 가슴에 손을 한번 얹어 보세요.
만약 저의 심장의 맥박이 평상시보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뛴다면 제가 믿는 종교를 불신하시고 하나님을 저주하셔도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순교자의 표정이 너무 담담하여 의아했던 판사는 떨리는 손으로 순교자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순교자는 화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침대에 잠자러 가는 사람인양 평온하기만 했다. 죽음이 불신자들에게는 마지막이요 무섭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이지만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며 주님이 예비하신 아름다운 영원한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니 어찌 불안하며 두려우랴. 무디 선생은 임종을 앞두고 “세상이 점점 멀어지니 천국 문이 열리도다”라고 유언했으며 그는 평상시 말하기를 “그 어느 날 무디가 죽었다고 신문지상에 발표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디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의 시민이 된 것이다”라고 외쳤다.
육체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원한 죽음이다. 구원 받은 감격과 감사보다 현실적이고 시각적인 것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자.
“시련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구원 받은 죄인들은 감사할 이유를 언제나 발견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해 다시 깨닫자
죽음에 대해 다시 깨닫자
죽음에 진지하게 직면하는 것은 당신의 인생을 변화시킬 것이다.
나는 수년간 매우 비만했던 고등학교 선생님을 기억한다. 그는 심한심장 마비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 심장마비를 일으킨 후 그는 생활양식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먹는 습관도 바꾸었다. 그래서 과도한 체중을 줄였다. 그는 새 사람처럼 보였고 그렇게 행동했다.
죽음에 대한 진지한 생각은 당신의 인생을 변화시킬 것이다. 당신이 죽음의 심각성과 그 결말을 깨닫는다면 매일 당신이 마지막 날을 살듯이 살아갈 것이다.
지금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인생을 새롭게 이해하길 원한다면 우선 죽음에 대해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까닭
그리스도인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말한 대로 나그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런 고통이나 미련도 없이 제 고장을 떠나가는 나그네와도 같으니, 그들은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망명가는 사람처럼 슬픈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고국으로 돌아온 망명객이나 자기가 태어난 나라로 돌아오는 갈 곳 없던 사람들처럼 커다란 기쁨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나간다.
하늘나라에 대한 기대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이 한결같이 슬프게 느껴지느니, 그 기쁨 그 즐거움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 대한 기대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이지상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으니, 그들은 그 즐거움 속에서 자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앞날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나그네길이 곧 끝날 것을 기뻐하는 나그네들인 까닭이다. 곧 닥쳐올 앞날에 대한 기대 가운데 그들의 마음은 즐겁기 마련이다.
죽음의 이유
프랑스의 억만 장자인 자케풍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재계의 변동으로 막대한 재산의 피해를 입어서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그의 전 재산이 약 10만 달러 남아 있다는 통고를 은행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10만 달러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자케풍은 그 충격으로 죽었습니다.
한편, 자케풍의 가난한 조카 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아저씨 재산의 상속자라는 소식을 듣고서 갑자기 10만 달러라는 거액이 생겼다는 소식에 충격으로 죽었습니다.
같은 돈을 가지고 한 사람은 적다고 죽고, 한 사람은 너무 많아서 충격 받아서 죽었습니다.
죽음의 장벽을 넘어서
시인으로 잘 알려진 80살 된 테니스 경이 영국에 있는 피서지에서 겨울을 지내려고 섬에 있는 별장으로 배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배가 해협을 지나자 큰 물결이 항구 입구에 있는 방파제를 치는 우렁찬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는 폭풍이 오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항해를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며칠 뒤에 테니스경의 건강이 나빠져서 간호사 한 사람이 그 섬에 와서 같이 있게 되었습니다. 간호사는 그와 이야기를 하다가
“선생님, 시는 많이 지으셨는데 찬송가 가사는 별로 쓰지 않으셨더군요. 지금 이 병상에서 찬송가를 한 편 쓰시면 병으로 고통 받는 다른 사람들이 큰 도움과 위로를 받게 될 텐데요”하고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지난밤에 몇 구절을 적어보았지”하면서 종이 한 장을 간호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 시에는 죽음을 연상케 하는 울부짖는 바다가 풍부한 감정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방파제에서 들려오는 구슬픈 소리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적인 표현이 훌륭했다가 보다는 인생의 여로가 끝날 때에 예수님을 만나 뵈는 영광스런 소망을 잘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의 한 대목을 여기에 소개합니다.
“저녁노을, 밤하늘별들 속에, 나를 부르는 분명한 소리 들리네. 삶을 떠난 죽음의 소리일까? 암흑을 몰고 땅거미가 내리고 밤을 알리는 종소리 들리네. 폭풍이 나를 밀어 내어, 인생의 끝날 까지 밀려 났을지라도, 죽음의 장벽 넘었을 때에, 나의 안내자,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리.”
죽는다는 것은 불길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갈망하던 천국에 안전하게 인도될 것입니다.
죽음의 종국
한 어머니가 데이빗 B.영 목사를 찾아와서 제발 제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린 아이가 농장에서 사고로 죽었다는 전화를 받은 것은 새벽 4시 경이었습니다. 병원에 달려가자 그 아이의 어머니는 자기 아이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저는 그 아이가 심하게 다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죽은 아이를 안고 기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해답만 있다면 그녀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 소년을 다시 살아나게 해달라는 기도는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녀와 그 가족을 위한 기도는 했지만 이미 죽은 아이를 위한 기도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모두가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의 종국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대해 무기력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 가운데 살아나신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가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그가 자기와 함께 우리를 살리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기 전에 그에게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죽음의 준비
시골에 있는 어느 가난한 집 어린 아이가 중병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죽음은 이미 결정적이었으나 부모들은 좀처럼 단념하지 않았다. 어린 소녀는 슬퍼하는 부모를 쳐다보면서 "엄마, 나는 곧 하늘의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아"
부모들은 그래도 미련이 있어서 딸아이가 죽지 않는다고 격려하였다.
그런데 이 아이는 "엄마 너무 슬퍼하지 마.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영원한 곳에서 같이 살 텐데.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터인데요."
곧 내일을 믿고 사는 짤막한 이 소녀의 생애가 기독교의 기본적인 신앙을 잘 간증해 주고 있다.
평화스러운 죽음
해리 괴링과 낸시 괴링이 선교사로 방글라데시에 갔을 때 그들의 소원은 벵갈리 민족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해리를 32살의 나이로 죽게 하셔서 이 민족 가운데서 적어도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께 돌아오도록 하시고자 했음을 알지 못했다. 괴링 부부의 가족과 친구들이 낸시와 그 자녀들을 위로하고자 만났을 때에 기독교인이 된 세탁업자인 벵갈리인 데빈드라 다스는 해리의 죽음에 대해서 그의 아내 프로밀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그 복도에서 다림질을 하고 있었어. 나는 열려진 문을 통해서 괴링 사히브를 볼 수 있었어. 난 그의 얼굴을 봤어. 그가 죽는 것을 목격했어! 괴링 사히브는 평화롭게 죽었어. 그것은 기독교인이 죽는다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었어. 힌두교도가 죽을 때와는 달랐어. 당신도 우리나라 사람이 어떻게 죽는다는 것을 알잖아.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해.”
프로밀라는 감명을 받았다. 한 기독교인의 평화스러운 죽음에 대한 이 단순한 증언 때문에 그녀는 주님께 바로 그 밤에 자기를 구원해주실 것을 간구했다. 그 힌두교 여자는 대단히 시기적절하지 못해 보였던 한 죽음이 거둔 첫 번째 열매였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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