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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설교자로서 꼭 읽어야 할 성령과 설교자[강추]

하나님아들 2019. 1. 2. 14:26

성령과 설교자

1. 전도자로서의 설교자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이 내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기쁨 때문에 밤잠을 설치면서 말씀을 읽어 내려갔던 적이 있다. 그리하여 말씀을 읽고 배우고, 그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최대의 특권이요 의무라고 생각되어 신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렇게 신학을 시작하면서 마음에 가장 소원했던 것 중의 하나는 전도자,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신학자가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의 삶 전체를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전도자야가 되는 것이 내 평생에 가야할 길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복음을 받고 말씀의 능력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언제나, 어디서나 복음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이 마땅한 본분이라고 생각됐다. 이러한 나의 결심은 곧 설교에 대한 열망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하면 주의 복음을 바르고 깊게 증거하는 설교를 할 것인가였다. 그러나 한두 번이 아니라 평생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경본문에 대한 깊고 폭넓은 앎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택한 전공분야가 성경학이었다. 그것도 구약학보다 신약학을 택한 것은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더 깊이 알고 전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의 삶 전체를 걸었던 바울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보다 친밀히 접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신약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말씀의 실체인 예수님의 인격과 삶의 자리에 언어적, 역사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내게 신학함의 기쁨을 더 갖게 했고, 그것은 이어 설교의 원동력이 되곤 했다. 그러나 계속 말씀을 연구해 나가면서 몇 가지 문제가 내게 걸림돌로 다가왔다.

그것은 세 가지 측면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역사비평이라는 학문적 기초위에 세워진 신약학 자체로부터 오는 것이었고,

둘째는 성경본문 속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설적인 특성을 어떻게 바르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며,

셋째는 성령과 그 역할에 대한 이해를 어디까지 확대해야 할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역사비평방법론이라는 자리에 공개되는 신약학을 배우게 되면서 처음에는 그동안 지녀왔던 전통적인 성경관이 심하게 흔들리는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성경해석의 방법론으로 채택된 역사비평학의 결과가 성경의 신학적이고 계시적인 의미를 지닌 메시지와 충돌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것을 파괴하기까지 하고 있다는 것을 지켜보는 고통이었다. 역사비평이 역사적 사고에 젖어든 현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역사적 자리를 벗어나 가현적인 신화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제시된 해석학적 방법론(E. K semann)이라는 것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히려 복음적 설교를 가현설의 자리로 추락시키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역사비평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종말론적이고 실존적인 증언이 위협을 받고, 말씀이 사건화되는 능력을 위협하고 있다고 느끼게 했다.

 

더욱이 역사비평 방법은 설교하는 일을 쉽고 간편하게 하기보다는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늘 부담으로 내게 다가왔다. 더욱이 그것은 누구나 성경을 해석하고 증언할 수 있도록 허락한 종교개혁의 위대한 전통을 오히려 위배하는 결과를 낳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도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서 설교자중의 일부는 역사비평 방법을 아주 배제함으로 신학교의 신학교육과 목회의 현장을 분리시키는 위험성을 야기시키고 있든지, 그 반대로 역사비평방법을 과감하게 도입하면서 설교를 역사비평적인 주석책처럼 건조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의 설교현장이 아닌가 생각된다.

 

역사비평방법은 신앙을 환상이나 신화적인 언설만으로 멈추는 것을 방지해주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함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포착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하나님은 역사 속에 자기를 계시하시면서 동시에 역사를 초월함으로써 역사를 인도하시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성경의 고유한 신학성과 종말론적인 하나님 말씀임을 파괴하는 역사비평일 때에는 그 역사비평 자체가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은 신약학을 공부하는 나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의 큰 소득이었다. 결국 본문의 진정한 역사성이란 단순한 사실성을 넘어서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불러내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의 현장에서 얼마나 보여지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본문의 진정성은 하나님께서 사용해 주실 때에 확인받게 된다. 그렇다면 본문의 과거의 유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본문의 현재이며, 또한 장래라 할 수 있다. 이것을 가능케 해 주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설교자는 오늘도 말씀을 증거하는 능력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민중성과 예수의 영광됨,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urcis)과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라는 신학적인 틀이 성경 깊은 곳에서부터 변증법적인 역동성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신학함의 설레임을 늘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설교자로 부딪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설적인 모습을 어떻게 설교로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어떻게 영광의 하나님과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이 한 인격으로 만나고 있는가에 대한 인식론적이고 경험적인 어려움이었다. 바울과 같은 종교적 지성에게 걸림돌이 되고, 철학적 지성에게 미련함으로 부딪쳤던 십자가(고전 1,23-25)가 오늘도 성경의 신학적 중심부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나를 매우 놀라게 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나 자신의 신학적인 실존의 신체화(Incarnation)의 부족으로 말미암은 고통이었다.

 

자기를 미련하게 생각하는 것이 지혜의 길에 이르는 첩경이며, 죽어야 산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 머리로서는 이해되지만 마음과 몸으로서는 실체화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통이었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하나의 내 인격 속에 붙잡아야 하는 신학적인 실존에 관한 문제였고 이를 설교로 증언하는 데 뒤따르는 실존적인 한계성 때문이었다.

 

낮은 자로 오셔서 민중의 자리에 들었던 예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나는 새도 둥지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던 예수, 세리와 죄인들과 한통속이라는 야유를 받으면서도 그 길을 묵묵히 가던 예수, 세상에서 육체 때문에 한맺힌 질병들린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복을 서슴없이 선언하는 모습, 곧 고난당하는 메시야의 모습은 곧 예수의 민중성이었다. 그는 어린아이에게만 열려진 하나님의 역설적인 계시를 성령 안에서 기뻐하며 몸으로 감당했다(10,21).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나의 삶과 설교 속에서 체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뇌였다. 예수의 민중성을 잊으면 그리스도인(교회)은 타락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능력을 상실하면 그리스도인(교회)은 무기력한 종교성만으로 자족할 수 밖에 없는 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길을 예수께서는 성령의 기쁨으로 걸어나갔다. 그렇다면 예수의 길을 가기 위해 나와 같은 사람에게 성령을 기다리며 의존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하나님의 영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은 신학도인 나 자신에게 어떻게 구체적인 실체로 다가올 수 있는가의 질문이었다. 예수나, 사도들에게 실체화되었던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이 나의 삶과 사역에서 사건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소원도 거기에 곁들여져 있었다. 말씀을 통해서 주신 예수의 약속이 성령을 통하여 내 삶에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였다. 이와 더불어 성령에 대한 또 하나의 질문이 있었다. 성령의 역사는 성경과 교회 안에 제한되는 것인가? 아니면 교회외적인 세속 사회와 역사 속에서도 활동하고 계시는 분이 아닌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에 대한 답을 이스라엘의 지혜전통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과 지혜를 통해서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시간과 공간 속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의 하나님은 구원의 주님만이 아니라, 피조물의 공간에 지금도 창조와 보존을 감당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시간과 역사를 움직이시고 인도하시는 역사의 주님임을 더욱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도 창조의 영, 역사의 영, 구원의 영으로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확인할 때에 설교자는 그가 보고 듣고 깨닫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으로 삼고 선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II. 설교의 위기와 설교자

1. 설교의 가현설

설교 단에 올라갈 때 마다 하는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설교를 통해서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건을 만드소서"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저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로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늘 살아계신 말씀으로 내가 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분은 그것을 이 역사 속에서 이루신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언급된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는 창조신학의 틀은 말씀이 사건이 되는 전형적인 선언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예언자들은 그렇게도 기뻐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으로 시대 앞에 섰던 것이다. 이 말씀은 거대한 자연피조물과 공동체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에서도 사건으로 나타난다. 성령으로 인한 마리아의 잉태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1,37)라는 믿음의 고백 때문에 생긴 말씀의 사건인 것이며, 예수를 놀라게 했던 백부장의 믿음이란 "다만 말씀만 하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8,9)라는 말씀이 사건이 될 것을 기다렸던 그 모습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이 생명을 걸고 말씀을 선포하는 땅끝 선교여행에 뛰어든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선포 속에서 사건화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설교는 어떠한가?

설교가 오늘날 공중에서 헛돌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씀이 본래 하늘에서부터 온 것이지만 철저하게 그리스도인, 교회, 그리고 사회와 역사적 삶에서 뿌리 박히고 줄기를 내고 열매를 맺혀야 하나,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마치 사 55 장에서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안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10-11 )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의 설교에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탄식이다. 설교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수 없는 소리로 전락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


원시기독교 공동체에 나타난 적그리스도의 이단이 육체로 오신 예수를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이었다고 한다면, 오늘의 교회에서의 이단적 요소가 있다면, 바로 설교의 가현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옛 가현설이 예수의 역사적 실체를 거부함으로 하나님을 역사와 창조의 주님이라는 자리에서 저 하늘에 갇혀진 분으로 변질시켰다고 한다면, 지금 나타나는 설교의 가현설이란 저 소리쳐 외치는 설교가 이 지상의 회중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되지 않은 메아리로만 머물게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성장에는 말씀이 말씀되게 했던 설교의 능력에 있었다. 그러나 과학적 사고와 경제적 풍요, 그리고 사회적 타락에 의한 도덕가치관의 변화가 동시에 설교의 위기를 야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설교자체에서 생기는 문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설교자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신앙의 선배들의 설교와 우리의 설교가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설교학의 다양한 이론들을 배우지 못했지만, 목숨걸고 설교하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 헌신과 열정에서 훨씬 못미치고 있다. 다만 우리는 설교를 미학적으로 멋있게 하려는 데 보다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설교자가 설교자체와 씨름하기 보다는 설교학적 방법론에 의해 완성된 원고 설교에 스스로 더 매료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많은 설교자들이 자기 설교에 대해 기대하지 않고 강단에 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부심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습관적이고 의무적인 설교를 메꾸기에 급급하다는 현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주일이 되었기에, 그리고 예배 속에 설교가 포함되어 있기에 설교할 수 밖에 없다고 숙명처럼 여기고 있는데서 설교의 가현적 틀이 더욱 고정화되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위기를 경험할 때,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설교자는 우선 자기 침묵을 배우기 시작해야 한다. 이 침묵이란 설교자가 먼저 설교를 가능케 하는 말씀 앞에 서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처음 신앙 생활을 시작했던, 아니면 신학교의 문을 들어섰던 그 때 감격만을 갖고 한평생을 우려먹으려는 사고를 회개하며, 지금도 살아계신 분으로 다가오는 말씀 앞에 무릅꿇는 일로부터 이 위기를 탈출해야 한다. 설교자에게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지도 않으면서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 자신이 말씀의 기쁨과 감사가 없기에 기쁨과 감사가 없는 설교가 되고 있다. 설교자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말씀으로 회중들이 변화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일종의 거룩을 가장한 사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가장 민감한 사람들이 누구일까? 그것은 바로 설교를 듣는 회중들이다. 회중들마져 설교를 기대하지 않게 되고, 그 말씀으로 자기 자신이 바뀔 것이로 기대하지 않는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설교는 무의미하게 될 뿐이다. 회중들이 수 없는 설교를 듣고 있지만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시대에 비극이 있겠는가? 도대체 이 책임을 누가 져야 할 것인가?

 

2. 설교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성령의 언어를!

본문을 통해 원고를 만들기 전에 드리는 기도는 "나의 언어를 침묵케 하시고, 당신의 언어를 내게 주셔서 나로 하여금 당신의 언어가 되게 하옵소서"이다. 설교자가 성령 앞에서 자기 침묵을 배우는 이유는 성령께서 이 세상의 말을 침묵케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자 안에서 만드시는 분임을 알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절대 침묵이 성령의 절대 언어를 생산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마다 침묵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도 이것으로부터 시작하셨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음 증거의 사역은 성령의 능력과 역사만으로 가능함을 아셨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이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회당에서 공식취임 설교를 하기 전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셔야 했고, 성령에 의해 광야로 내쫒김을 당해야 했다(1,9-13).

그 분은 버려진 광야에서 금식하며 인간의 침묵을 체득하며 성령의 언어로만 사는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우리는 그의 취임설교의 첫 시작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4,18).

 

설교자가 자기 침묵을 배우지 않고 설교를 하게 되면, 그는 본문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말씀하심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인간의 언어를 개발하는 데만 주력하게 된다. 설교자가 듣는 일도 없이 선포를 시도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설교자는 절망, 아니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말씀을 선언해야 하는 데 실상은 설교자의 내면 깊은 곳에서 말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설교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 부재의 경험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 설교자의 문제는 진정으로 듣는 일 없이 너무 많은 말을 지껄이고 있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설교는 말하는 데서부터가 아니라 들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확인함으로 변화될 수 있다.


바울의 말처럼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러나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으면서 단지 그것을 문자/언어로만 나열하고 있기에 그 말은 공허한 메아리로 끝나고 있다.

성령이 나타나는 설교의 기적을 우리는 울리는 꽹과리로 만든 것은 아닌가?

신앙의 선배들의 설교를 많이 읽는 것은 좋은 설교자가 되는 비결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성경본문을 준비하면서 급박하게 읽는 타인의 설교문은 진정한 설교를 작성하는 데 도움이 되기 보다는 방해가 될 때가 더 많다. 왜냐하면 성경본문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말씀없이 이미 문자로 쓰여진 다른 사람의 설교와 그 사상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 나타날 성령의 풍요로운 자리를 거절하는 위험성이 있으며, 이로써 성령께서 침묵하도록 하는 비극적 결말을 내게 된다. 이것은 어쩌면 성령께서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성령을 침묵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모습일 수도 있다. 이러한 모습은 부정적인 파급효과를 나타낸다. 성령의 침묵은 설교의 부재로, 설교의 부재는 이 시대를 향한 교회의 언어를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 설교의 출발은 성령의 강림부터라 할 수 있다. 성령에 의해 바르게 듣지 못했던 예수의 제자들은 부활의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설교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성령 강림후에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을 향해서도, 그리고 무기력하게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거지에게도 "우리를 보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말씀하심에 기초한 것이다. 말씀이 상실된 설교를 보며 우리가 탄식하는 것은 성령께서 침묵하심으로 오늘도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성령이 침묵하는 설교에서 사람이 변화되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기적을 바란다는 것은 연목구어(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와 마찬가지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이 사건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령이 침묵하시는 데도 너무 많은 말을 지껄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반성해야 할 것이다.

 

3. 설교와 함께 가는 설교자

세 번째 기도는 회중들 앞에 섰을 때의 기도이다. "설교와 설교자가 일치되게 하옵소서. 이 설교를 통해 먼저 나 자신이 은혜받고 변화되게 하시고, 변화받은 설교자로 이 설교를 증언하게 하옵소서." 어쩌면 현실적으로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예수의 첫 선포를 들은 유대인들은 크게 놀랐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 가르치는 것이 권위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1,22). 서기관들은 율법교사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의 말과 행위가 분리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설교는 사건이 됨으로 설교자 속에서 설교자체를 보고 있는 놀라움이다. 사랑을 선언하면서 사랑하시는 분, 용서를 가르치면서 친히 용서하시는 분, 치유를 말하면서 치유하시는 분, 인내를 말씀하시면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기에 예수 앞에 서면 우리가 작아지고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리라.

 

어쩌면 우리가 지금 치명적으로 당하고 있는 위기는 실은 설교자의 인격적 위기이다. 이 설교를 듣고 회중이 놀라지 않고, 우리 설교자를 보면서 권위가 있다고 존경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설교와 설교자가 일치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가 설교자 안에 성육신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의 지정의가 설교를 통해 회중에게 까지 바르게 전달되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금 확인되는 것은 설교는 단순히 쓰여진 문자가 아니라 살아계신 영이기에 설교에 있어서 설교자의 인격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인격과 삶이 동반되지 않는 설교는 실은 일종의 사기와 거짓증거로 판명될 뿐이다. 따라서 설교에는 설교자의 고뇌와 정열이 표출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설교와 일치하지 못하고 있는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비결인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 선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기쁨과 감사로 늘 설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가 한국을 다스리고 있다"는 우스개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모두 민족적인 수치와 국가의 자존감의 상실을 뼈아프게 경험하고 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 나라의 위기가 도덕적이며 정신적인 타락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렇게도 외쳤던 도덕적인 선포들이 이 민족의 정신사를 바꾸지 못했다는 자성이 교회를 사로잡고 있다. 더구나 그 모든 것이 교회 지도자들의 부끄러운 타락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자괴감이 목회자, 그리고 성도들 전체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다가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린, 곧 교회의 언어상실 경험인 것이다.

 

이러한 언어상실 경험의 뒷면에는 설교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탄식이 들어 있다. 설교의 위기는 곧 하나님의 말씀의 위기라 할 수 있다. 수없이 반복되는 설교 속에 진정한 설교가 들리지 않고 있다는 절규이기도 하다. 설교는 선포되는 데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설교가 매주일 강단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한탄이기도 하다. 이것은 설교자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위기이며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의 위기이며 주일에 예배드리는 회중의 위기이기도 하다.

 

설교자는 이것을 지켜 보시는 성령의 탄식을 들어야 한다.

성령의 탄식 속에는 하나님의 탄식이 있으며, 사람들의 탄식이 있고, 모든 자연 피조물의 탄식이 들어있다. 바로 이 탄식소리가 들리는 순간 예언자와 설교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 설교자들은 이 탄식 소리가 들리기 전에는 설교단에 올라가지 않을 각오를 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출처 : 예수증인훈련원
글쓴이 : 차하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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