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이사야 53장
마태복음27장, 마가복음15장, 누가복음23장, 요한복음19장
이사야 53장을 묵상하는 가운데 다시한번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이 제게 마음으로 깊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에 기록된 그 현장안으로 제 마음이 빠져들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더럽고 추악한 나의 모습은 빌라도 광장으로 저를 인도합니다.
(마27:1, 막15:1, 눅23:1-2)
로마의총독 빌라도에 의해 누군가가 사형이 선고 되는 모습부터 비춰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과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뒤섞여 아수라장이 되고맙니다.
그 사형수는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택하심을 입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사형이 선고되자 로마군인은 곧바로 주님을 관정안으로 끌고 데려가 어두컴컴한 그곳에서 주먹으로 치며 몸의 옷을 벗깁니다.
그리고는 홍포를 입히고 침뱉고 갈대로 주님의 머리를 치고 희롱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홍포를 벗기고 주님의 옷을 입혔습니다.
여러분 모든 인간의 부끄러움과 수치는 언제 가장 느낍니까?
그것은 바로 누군가에 의해 자기의 옷이 힘없이 무력하게 벗김을 당하여 알몸으로 있을때 입니다.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짓고난 뒤 제일먼저 느낀것은 육신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 몸이 벗었다는것을 알았을때 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껴 얼른 무화과 나무숲으로 가서 무화과 잎으로 자기의 몸을 가려 숨었습니다.
이처럼 부끄러움과 수치는 자신을 남들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가운데로 가두어 놓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죄를 짓되 더욱더 은밀한 가운데 보이지 않는 어두운곳에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어도 하나님은 속마음중심을 보고 계시기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죄로인해 본능적으로 하나님앞에서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옷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리는 방패와 같습니다.
그리고 옷은 그사람의 인격이며 권위이기도 하는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주님께서는 로마군인에게 옷을 벗김 당하며 홍포를 걸친채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으신후에 다시 홍포를 벗김당하고 주님의 옷으로 입혀졌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옷이 벗김을 당할때 우리가 바로 하나님앞에 이런 부끄러움과 수치로 가득찬 존재임을 알려주시면서 죄의 더러움과 무서움과 심각성을 깨달으라고 알려줍니다.
주님의 옷이 벗겨진 수치는 이처럼 하나님없이 살아온 발가벗겨진 우리인간의 연약한 모습이었음을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사53:3)
그리고는 로마군병이 "네가 왕이라면서 왕이면 왕관이 있어야 되지않나!...."
하며 가시가 박힌 나무줄기를 둥글게 말아서 예수님의 머리에 힘껏 푹 씌워 눌렀습니다.
날카로운 수많은 가시는 예수님 이마의 살을 찔러 피가 흘러내립니다.
예수님은 말할수 없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께서 고난당하시는 그 모습은 지금껏 모든 인간의 생각과 지식으로 저질러진 온갖 더러운 죄악들이 예수님의 이마에 박힌 가시로 묶임을 당하는 순간입니다. (사53:5)
예수님은 자신의 이마에 가시관으로 찔림당하시는 그 고난으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 나오는 모든 생각이나 지식등이 세상가시처럼 아무런 쓸모가 없고 의미없음을 보여주며 더이상 활개치지 못하도록 가시관으로 박아놓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죄를 가지고 십자가를 지신채 골고다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야유와 울부짖음이 뒤섞이면서 빨리가지 않는다고 군병들의 채찍과 발길질은 가시면류관 쓰시고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주님의 걸음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제사장편에 선 대다수의 사람들은 주님을 조롱하며 심지어 돌이 주님께로 향하여 날아가기도 합니다.
야수와 같은 그들 무리속에는 주님과 3년동안 함께 했던 몇몇 제자들과 은혜를 입은 여자들이 어찌할바를 모른채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뒤따라 갑니다.
나도 어느순간 그들과 함께 주님뒤를 따르는 자 중의 하나가 되어진것 같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그길 이지만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게는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제 마음은 주님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저의 겉모습은 주위의 성난 무리들의 멸시로 가득한 모습을 감당할수 없어 그냥 주님을 바라보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마음은 그들의 포악한 힘에 아무 도움도 없이 무기력하게 볼수밖에없는 몇몇제자들과 눈물흘리는 여인들처럼 기죽은 모습으로 걷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더이상 움직일수 없어 주님이 십자가만 움켜잡고 있을때 로마군병은 주위의 사람들중 건장하다고 생각되어진 시골에서 올라온 구레네 시몬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구레네 시몬..... 그는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무슨일인가 하여 구경하다가 갑자기 주님의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갈보리 죽음의 현장까지 지고 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듣고 보았을때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것처럼 지금까지 구경꾼의 자세였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바로 내 문제였고 나의 죄때문에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자신은 깨끗한 사람마냥 쯔쯔쯔 혀를차고 주님의 고난에 구경만 하고 서있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주님은 이러한 우리를 알게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는 나 홀로 만 지고 가는게 아니라 함께 지고 가야할 것인가를 구레네 시몬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이는 마치 아브람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리려고 할때에 번제에 쓸나무는 함께온 종에게 지웠다가 마지막에는 종을 남겨두고 이삭에게 지워 모리아산까지 올라간것과 너무도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영적으로 오늘날 예수님의 고난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바로 우리자신들입니다.
주님은 종으로서 우리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면 십자가를 지시고 못박혀야 할 당사자는 바로 우리이기에 마지막은 우리를 향해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6:24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것이니라"라는 말씀을 마지막 십자가의길에서 우리각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때에 구원의 은혜를 입게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가는 삶은 내가 받은 구원을 나누어 주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갈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이삶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할 삶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원하시고 알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각자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극심한 고통가운데서도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자신의 무덤을 향하여 천천히 비틀거리며 올라갑니다......
태양도 두꺼운 먹구름에 가려 빛을 잃었습니다.
어느듯 십자가나무위에 누우신 예수님...........
마치 구약의 속죄제사에서 번제단위에 흠없는 짐승이 인간의 죄로인해 불로 태움을 당할 그순간처럼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위에 누워 마지막 인간의 속죄를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군병들은 십자가에 누우신 주님께 가까이 다가와 대못과 망치를 들고 십자가위에 놓여진 예수님의 손에 사정없이 내리칩니다.
주님은 너무나도 큰 아픔과 고통에 비명과 신음내며 주님의 모습을 지켜보는 주님의 제자들과 모친과 여인들은 비명을 지릅니다.그러나 사람들은 잘되었다는듯이 비웃고 함성을 지릅니다.
망치로 내려칠때마다 대못은 주님의 손의 살을 뜷고 뜷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의살과 못사이에 피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또다시 망치로 내려칠때 그피가 사방으로 튀어 내려치는 군병의 손에 옷에 얼굴에 뿌려집니다.
여러분 죄의 탐닉을 위해 지은 손이 주님의 손에 박힌 대못에 의해 묶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은 때로는 유익한 일도 좋은일도 많이 합니다.
아픈사람을 수발하는손, 넘어진자를 일으켜주는 손, 사회의 유익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손.....
그러나 막상 죄를 지을때의 손은 유익한 일이나 좋은일을 할때의 손하고는 비교할수도 없이 흉악한 도구로 바뀌고 맙니다.
우리는 이손을 가지고 내 유익을 위해 내 즐거움을 위해 내 쾌락을 위해 어두운가운데 죄를 짓는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발에 못을 댑니다.
그리고 망치로 내려칩니다.
내려칠때 마다 주님의 그피가 사방으로 튀어 군병의 몸에 뿌려집니다.
여러분 죄를 짓고자 나아가는 발이 주님의 발에 박힌 대못에 의해 묶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발은 때로는 유익한 좋은일도 많이 합니다.
하지만 막상 죄를 지을때의 발은 유익한일이나 좋은일을 할때의 발하고는 비교할수도 없이 흉악한 도구로 바뀌고 맙니다.
우리는 이 발을 가지고 내유익을 위해 내 즐거움을 위해 내 쾌락을 위해 어둡고 은밀한 곳으로 죄를짓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그런다음 살이 찢어져 떨어지지 않도록 십자가에 박힌 양손에 굵은 줄로 칭칭 동여 맵니다.....
그리고는 갈보리 언덕에 그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결박당하여 묶인채 꼼짝할수 없습니다.
구경하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고,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도 이에 합세하여 저사람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수 없구나....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하면서 조롱하며 욕을 합니다.
원래 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인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둘러선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등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허물과 수치는 바라보지 못한채 예수님께 조롱합니다.
여러분 이천년전 예수님께서 우리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믿음의 세계는 이사실을 듣고 보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할것없이 십자가로 나아오라고 합니다.
무슨말입니까?
십자가로 나아오라고 하는 것은 우리도 주님과 함께 나의 옛 육신은 장사 지내는 경험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라고 고백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더 놀랍게도 로마서6:4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지냈나니 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사실을 받아들일때 우리가 믿음으로 거듭났다라고 담대히 말할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거듭났습니까?
갑자기 당황되십니까?
아닙니다. 너무도 간단합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이사실을 발견하는 그때가 바로 거듭난때인것입니다.
무슨 큰능력을 받고 은사를 받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것은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내가 반드시 일생에 한번은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진 죽음의 경험을 갖게 될때 믿음안에서 거듭났다라고 즉 새로 태어났다라고 말할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때 그 십자가에는 주님이 달리신것만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그 십자가에 주를 믿는 나도 주와함께 못박혀 있음을 영적으로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갈2:20)
이사실을 믿고 받아들일때 우리는 비로서 주의 새 생명을 소유한 믿음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인간이 받아야할 죄로인한 정죄와 심판을 예수님이 다 받으심으로 인간을 향한 그 정죄와 심판의 선언이 묶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느듯 오후 3시경쯔음에 목말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군병이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마시우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 이루었다 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다이루었다......
무엇을 다이루었을까요?
죽음은 인생의 실패인데 무엇이 다 이루어졌을까요?.....
이 말씀은 너무도 신비롭고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치에 맞지않는 말씀같습니다.
잘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내어주심으로 왕으로서가 아니라 사형수로서 죽게하셨습니다.
비정한 아버지같고 피도눈물도 인정도 없는 아버지인것 같은데 주님은 오히려 다이루었다 하시면서 돌아가셨습니다.
도대체 여기에 무슨 비밀이 있을까요?.......................
우리 주님은 하나님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처음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에 천사들의 타락으로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 이후 죄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거스려 늘 반역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죄는 물질계가 아니라 영적세계였기 때문에 육신으로서는 알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이죄를 해결하기위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가지셨습니다.(엡1;3)
죄의 처리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계획이 죽음을 대신한 피값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우선 각사람마다 자기가 지은 죄값으로 짐승을 칼로 죽여 흘러나온 피를 대신하였습니다.(창4:4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번제)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땅에 충만한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을 아시고 신앙의 행위에 의한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믿음의 의의 법으로 바꾸기 위해서 우상장사꾼의 아들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이가 없는 그 아브라함 집안에 100세때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아들로 부터 인류구속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먼저 아브라함을 통하여 시험하셨습니다.
이시험은 넘어뜨리기위한 시험 tempt가 아니라 세우기위한 시험 즉 Test 인것입니다.
마치 지하철을 완공하고 나서 사람들이 타기전에 운전수만 타서 안전운행시험을 하듯이 하나님은 먼저 자기의 구속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이 이와같이 자기의 가장귀한 것을 믿음안에서 희생과 드릴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오랜세월을 살아오는동안 실수와 허물을 가진 믿음의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지금껏 하나님의 은혜와 그사랑을 힘 입었기에 칼을 들어 자기아들을 내어 번제로 드릴려는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모습이 자신을 향한 믿음의 의의 완성을 봤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때 부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지만 그러나 그 삶은 순간순간 하나님의 뜻하고 맞지않는 삶으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셨지만 그의 실수와 허물투성이의 모습을 아셨기에 자그마치 40년이나 걸려 훈련과 연단으로 이끄시다가 요셉의 나이 20세 전후에 그를 번제로 바치게 함으로써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하는 그의 온전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나이 115세때에 외아들 이삭을 자신에게 주고자 했던 행한 그 믿음만이 하나님은 믿음의 의로 삼으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셨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주기까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내 마음(하나님의 마음)이라 여겨 하나님은 오랫동안 기억하셨습니다.
이보다 더한 믿음과 사랑이 없다고 여겼기에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친 모리아산의 바로 그 장소에서 아브라함이 했던 그 방법 그대로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응답과 완성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본체인 자기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실제로 죽이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후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늘의 별과같이 많아져서 이스라엘의 한나라를 이루게 되었고 그 백성들은 택한 백성이 되어 온인류를 구원할 세계열방의 제사장나라가 되게 하였습니다.(벧전2:9)
이게 무슨말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죄의 사함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이 오기전까지 시대시대마다 부분적으로 죄의 사함을 위해 짐승을 번제로 드리는데 자신이 죽었음을 알리는 뜻으로 짐승을 대신 죽여 제단에 피를 강같이 흘러내리게 했습니다.
아벨의 제사가 그런제사였으며 노아의 홍수후 번제가 그러했으며 아브라함의 할례역시 그런뜻이었으며 모리아산의 이삭을 바칠때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번제로 하여금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하실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계속 믿음의 족장으로 하여금 신앙전승으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400 여년후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위해 모세에게 임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 시키고 그들의 새로운 삶을 위해 신정정치를 펴게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이 이스라엘백성을 이끌어 나갈 새로운 법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법은 오랜 세월동안 애굽의 문화와 종교 사상에 길들인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는 날마다 죄를 경험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을때 속죄법이 필요했는데 속죄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죄를 처리할수 있는 길은 오직 죄를 지은 당사자와 흠없는 짐승과 제사장만 이어야 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의 속죄를 위해 자기 대신 희생할 흠없는 짐승(소,양,염소..)을 끌고 성막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사람은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고는 죄를 넘겨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칼로 짐승을 죽입니다.
그때 제사장은 흘러나오는 피를 여호와앞 곧 회막안 번제단의 향단뿔4곳에 바르고 나머지피는 번제단밑에 다 쏟습니다.
또한 속죄물이 된 짐승의 기름을 떼어 불사릅니다.
나머지 가죽과 고기와 내장등 그 짐승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깨끗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위에서 사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개인이 지은 죄는 사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전체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는 일년에 단 한번 드리는 대 속죄일이 있습니다.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론에게 성소의 휘장안 법궤 위 속죄소앞에 아무때나 들어오지말라고 합니다.
그이유는 하나님이 구름가운데에서 속죄소위에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약 들어가다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보게되면 죽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레16:2)
그래서 백성들을 위한 대 속죄를 하기위해 먼저 대제사장을 위한 속죄제물로 수송아지를 잡게 합니다.
그리고 양을 번제물로 하여 번제단 위에서 태웁니다.
그리고 아론은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번)제단위에서 피운불을 향로안에 채우고 곱게간 향기로운 향을 두손에 담아가지고 휘장안으로 들어가서 여호와앞에서 분향하여(분향단을 말함 이곳도 향단 4뿔이 있음) 향연으로(향기의 연기로) 증거궤위=법궤위 곧 속죄소를 향내나는 연기로 가리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육신의 옷을 입은 부정한 아론이 지성소안으로 들어갔어도 이미 짐승을 죽여 태운 연기와 향으로 자신이 죽었음을 알리는 표가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레16:13)
그리고 난뒤 수송아지의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번 뿌립니다.
이와같이 하여 대제사장인 자기와 자기가족을 위한 속죄를 드립니다.
그 다음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속죄제물로 숫염소 두마리와 번제물로 숫양 한마리가 제물로 드려집니다.
먼저 앞의 숫송아지 잡고 피를 뿌리는 방법과 같이 속죄제 염소를 잡아 성소안에서그 숫염소의 피로 속죄소위와 속죄소앞에 같은 방법으로 피를 뿌립니다.
그리고는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가져다가 성소안 제단(분향단) 네 귀퉁이의 뿔들에 바릅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 피를 성소안의 제단(분향단) 위에 일곱번 뿌립니다.(레16:18-19)
그리고 난 뒤에 마당으로 나아가 살아있는 한 마리의 숫 염소에게 안수하여 모든 백성들의 불의와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넘겨서 미리 정한사람에 의해 그 염소를 광야로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거룩한 곳에서 남은 가죽과 고기와 배설물은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르게 합니다.........................
그러나 어느누구도 이 법으로는 인간의 죄를 완벽하게 처리할수 없었습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보면 죄는 하루에도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일어나니까요.....
자신이나 백성들의 죄로인해 짐승을 죽여 매일같이 혹은 1년에 한번씩 평생을 피를 내어 속죄하거나 태울수 없었습니다.
율법.......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지킬수 없는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은 죄를 깨닫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래서 이율법은 죄를 정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이 하나님의 아들을 신성모독죄로 정죄하여 죽이는데 일등공신을 한것입니다.
때가차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으로 맺은 언약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 그 방법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반대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위해 독생자 외아들을 인류를 구원할 위할 어린양으로 육체의 형상을 입고 이땅에 보내셔서 제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로 열방의 제사장 역할을 하여 속죄의 완성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뜻을 누가 알리요.....
이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그리스도께서 오실것을 예고하였고 고난받으실것을 이사야서를 통해 알려주었지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대로 인류구원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사장나라가 되게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율법의 기준에 적용하여 신성모독죄로 죽게하여 인류구원을 완성시킬 흠없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감당하게 했던것입니다.
그리고 로마군인은 멸망으로 죽을수 밖에 없는 죄인의 표상이었기에 그들을 직접 죄를 짓는 죄인으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직접 못박아 죽게 함으로써 온 인류구원의 완성을 이루어 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죄를 지은 당사자가 짐승을 칼로 죽여 제사장에게 넘기듯이 죄로 버림받은 이방인 로마군인은 그들 스스로 자신도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채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 온인류의 죄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앞에 다 전가 시켰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인간의 추악하고 완악한 죄악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죽음으로 주님을 몰고가서 완전히 드러난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용서받을수 없는 그 죄의 행동이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앞에 나아갈수 있는 화해의 장소가 용서받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후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택함받지 못한 죄많은 이방인들이 직접 주를 못박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은혜의 사랑을 알고 믿게 되어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방인의 때로 은혜를 입고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번제나 속죄법에 있어서는 자기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지은 당사자가(죄인이) 흠없는 소나양이나 염소를 안수하여 칼로 죽여 피를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제사장이 그 짐승의 시체를 가져다가 거룩한 곳에 가서 불로 태우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완성과 인간을 향한 그 크신 사랑을 위해 인간의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번제물로 바쳤던 그 방법으로 때가되어 자기의 독생자 외아들을 어린양으로 이땅에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창세전부터 인간의 구속을 위한 뜻이 있었습니다(엡1:3)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인간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이루셔야만 했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가 그 일을 감당해야만 햇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애굽의 문화와 사상종교등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율법이 내려줄수 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의 기준은 겉으로는 애굽에서 벗어나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 올바르게 살아갈수 있도록 하는 삶의 법입니다.
하지만 그법은 연약한 육신의 옷을 입고사는 인간들에게는 어느누구도 온전히 지킬수 없는 법이었습니다.
구원은 죄인임을 알아야 자기를 구원할 구세주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섞고 무능한 죄인인가를 알기위해서는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엄격한 법이 있어야 육신을 가지고서는 어느것 하나 온전히 지킬수 없는 자신의 죄인됨을 바라볼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뿐만 아니라 법을 어겨 죄를 지은 당사자가 어떻게 하나님앞에 다시 회복이 될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지었을때 속죄 제사법을 통해서 오직 피의 구속을 통해서만이 죄사함받을 수 있는길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와 피의 구속을 통한 무한한 사랑을 동시에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아들을 번제물로 내어주면서 까지 말씀에 순종한것이 믿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400년후 율법을 선포하시고 순종하지 못하고 죄를 지었을때의 속죄법으로 기록이 되어 시행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과 속죄법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살아가는 제사장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외아들을 이땅에 내어보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케 하고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율법의 기준에 적용하여 신성모독죄로 예수님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중의 죄인인 이방백성인 로마군병들은(이방인들은) 실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온인류의 구원이 완성이 된것입니다.
즉 구약의 사람중 죄를 지은 죄인의 당사자가 되어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어린양을 칼로 죽게하듯이 로마군병들도 이방인의 대표가 되어 그들이 제사장이 보는앞에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함으로서 온 인류의 구원이 완성이 된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놀랍고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요3:16)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아셨지만 그들은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의 역할로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의 생각에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이땅에 어린양의 제물로 오신 예수님을 그 당시 제사장은 모세의 율법을 내세워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는 예수님을 오히려 참람죄로 적용하여 온 인류의 죄가 아닌 모세의 율법을 변개시킨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라는 죄를 뒤집어 씌어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값을 처리하게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준것은 제사장의 나라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도 전혀몰랐었고 몰라야되는 하나님의 놀라운비밀이었습니다.
아니 이러한 하나님의 비밀한 뜻은 저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게 하여 죽으시기 까지는 그 어느 누구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인류가 죄사함받을수 있는데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이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로마군인들이 인류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알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붙잡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수 없는것입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고전2:8-10, 12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도 제물로 죽일수가 있습니까?
나중에 다 이루고 난뒤 주님 만날때 후환이 두려워서 어떻게요(이부분은 농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비밀한 사실을 알고는 아무도 하나님의 아들을 못죽입니다.
눅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 누구도 몰라야 하나님의 뜻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로마군병들이 예수님의 온세상죄를 위한 십자가의 번제를 드리는 집행자가 되어 모든 사람을 대속하는 십자가의 은혜의 법이 설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맺은 언약이 완성을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성립되는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기기준으로 예수를 율법의 기준으로 죽음에 넘겨주었지만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뜻안에서 계획된 모든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의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을 이용했다는것입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알면 안되기에 사람이 모르게 하도록 한것입니다.
그럼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 살인죄를 저지른 저사람들의 심정은 그럼 어떻게 되겠냐구요?
세상아래 난자들은 다 똑같은 입장입니다.
아니 오히려 저들은 제일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수있는 자들입니다.
믿지않는 세상 불신자들도 자신의 죄인됨을 알아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믿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데 하나님의 계획아래서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들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버리시겠습니까?
그들이 몰라서 행한 그 일은 예레미야가 말한대로(렘31:31-34)하나님의 새언약을 완성시켰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수행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장본인들과 나라들은 어느사람보다도 빨리 마음을 꺾을수 있는 죄의 심각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꺾고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은 다 받아주시는것입니다.
눅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표면적으로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마침표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단과 죄의 결박입니다.
즉 천상의 반역을 일으킨 사단이(옛뱀,용) 땅으로 내려와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죄로오염 시켰을때 주님은 더이상 이땅에 죄가 활개치지 못하도록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그 죄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사망의 세력은 묶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우리 예수님은 육신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사단의 모든 악한것들을 활개치지 못하도록 십자가에서 머리 손발 옆구리(가슴)다 못박아 매달렸던 것입니다.
더이상 사단과 죄의 결박으로 이들이 활개치지 못하도록 육신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모든 것들을 움직이지 못하게끔 못박아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믿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었다는것이 실현되는 것입니다.(갈2;20, 갈5:24)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같은 사실을 비밀에 붙여서 그당시 사람들이 전혀 모르게 십자가로 온 세상의 번제를 이루어 죄를 속하기 위해 예수님은 어린양 제물로..... 이스라엘은 제사장의 역활로...... 로마군인은(이방인대표) 죄를 지은자가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 어린양제물을 죽이는 역할로...... 나온것입니다.(레위기 1:4-6, 레위기4:28-29)
그 사이에 일어난 모든 것들은 과정일뿐입니다.
(가롯유다며, 빌라도며 십자가며, 못이며,....이모든것들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 위한 주변장식에 불과하는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죄사함을 이룰려면 죄지은 당사자와 그죄를 넘겨받을 제물인 짐승과(소,염소,양) 그일을 주관하는 제사장이 있어야 하듯이 영원한 속죄도 바로 그와같은 맥락입니다.
즉 죄를 지은 당사자(로마군병=이방인), 예수님(어린양), 이스라엘 백성(제사장)의 역할로 나오게 된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아니 몰라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할 어린양으로 구세주로 왔지만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율법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서 받아들일수 없는 예수였기에 오히려 참람죄로 적용하여 그와같은 죄인들만이 집행을 당하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일을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 방법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알고서는 아브라함의 택한 후손들이 이일을 못할줄 알기에 이들의 눈과귀를 완전히 막아놓아서 이전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을 도구로 사용하여 죽이도록 해서 결국에서는 그들을 제사장일을 감당하도록 했습니다.
*고전2:8-9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보여준 그 믿음의 기준을 가지고 이렇게 비밀스러우면서도 완벽하게 인류구원을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인류구원의 계획을 바라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 사람으로서는 전혀 이해가 안되는 부분입니다.
*고전2:10.12
오직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그 어느누구도 몰라야만이 주님앞에 나올수 있는 긍휼함을 입게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백성으로 삼게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너무도 우리인간의 생각과는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물론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겠지마는요...........
그래서 멸망으로 갈수 밖에 없는 죄를 지은 이방인들은(로마군인: 이방인의 대표자) 이스라엘백성들의 예수님에 대한 정죄에 역시 아무 영문도 모르고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린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완벽한 것입니다.
이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후에 죄사함이 이루어집니다.
양심은 고통을 가져오게 하고 그 고통은 자신을 주님앞으로 이끌고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든든한 첫번째 언약인 율법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도 양심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메시아가 오실날만을 기다리고 있는것입니다.
그처럼 알고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수 없으며 만약 이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죽였다면 이것은 온인류의 구원을 억지로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간의 벌인 일종의 쇼가 되고 맙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런 쇼를 하지않고도 얼마든지 인간을 구원하실수가 있는데 왜 굳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면서 까지 내사랑이 이렇다라고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사람을 구원하게 만드시느냐 이겁니다.
알고 죽이면 믿음의 의가 성립이 안됩니다.
믿음은 바랄수 없는 가운데 보이지않는가운데 믿고 확신하며 나아가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아브라함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리 서로 작전을 짜 놓아서 한다면 그것은 사기이고 연극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은 그어느누구도 알아서는안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계획을 알고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구속의 의미를 알고 예수님을 십자가가 아닌 다른방법으로 죽일수 있는 자는 오직 사단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예수님이 태어났을때 부터 계속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따라다녔습니다.
사단도 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온인류가 다시 죄에서 놓임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어떡하든지 이 십자가의 죽음을 막으려고 애를썼습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막아도 봤고(마16:22) 가롯유다의 배신으로도 막아봤고, 제사장이나 빌라도에 의해서 자신을 변호하며 변명할수 있는 기회를 주어 막아도 봤지만(마27:14) 주님은 오직 이삭처럼 아버지께 순종할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을 가진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르고 아담의 후손으로서 함께 동참하여 죽였기 때문에 그 당시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했던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이세상모든 사람들도 몰랐기 때문에 다시금 얼마든지 돌아올수 있는 기회가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죽였지만 이들은 율법을 알았기에 율법에 매여서 율법대로 처리하다보니 아직까지 예수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못하는저주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죽이면 하나님과의 모종의 계획에 의해서 쇼를 벌였거나
혹은 진정으로 그는 교활한 사단과도 같은 자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의 위치에서서 스스로 그러한일을 즐기는 용서받지 못할 죄의 편에 서있는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죄사함받을 은총의 길에 서있는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뜻은 그 어느 누구라도 예수님께로 나아오기만 하면 구원얻는 놀라운 은총얻게 됩니다.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은30에 팔아버린 가롯유다도 그이후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회복됩니다.
그는 이미 다른제자들과 함께 3년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죄사함의 은총을 입는 은혜를 먼저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으로 자살함으로 그분의 은혜를 스스로 막아버리고 기회를 박탈당하였습니다.
우리 자아로 말미암은 행동이 그만큼 중요한것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하며 때리고 침을밷고 하던 제사장들도 그후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을 못박게 하라고 외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이후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을 사형선고한 빌라도도 그이후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군병들도 그이후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히틀러도 김일성도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왜요?.....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눅23:34)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때 까지는 모든 사람들은 멸망에 이를수 밖에 없는 다 동등한 입장입니다.
그러나 죽음 그 이후...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때 회복이 되었습니다.
의심하던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때 회복이 되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았습니다.
죽음 그이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그 어느누구라도 이와같이 은혜를 입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을 만날때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모두 알게 되기 때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말한대로 아브라함과 맺은 그 언약의 모든 완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제는 오늘날 이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누구나 다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은혜를 입고 죄사함을 받아야할 이스라엘백성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의 역할을 맡아 주님을 십자가의 번제로 드리는것은 하나님의 뜻가운데 이루었지만 그들이 그이후 그사실을 알고 회개하여 그뜻을 받아들였다면 아브라함의 그 축복이 더욱 빛을 발하여 세계열방의 제사장의 나라로 온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을터인데 그들은 회개하지 아니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이 힘입어 그렇게 외쳐도(행2:14-40) 오히려 외국에서사는 제 2.3세대의 유대인들만이 오순절날 제사드리기 위하여 왔다가 그들이 베드로의 복음을 듣고 다시금 외국에 돌아감으로 그들로 하여금 오히려 이방인의 구원을 이루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마음을 이스라엘백성들이 알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주신 그 이유가 하나님의 뜻이되어 제일우선 완벽한 제사장의 나라가 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을 터이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렇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부인함으로 그 댓가로 2천년동안 나라없이 방황하며 예수님보다 더한 고통과 고난속에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신에 세계에 흩어진 이방 민족들은 자기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영적으로 죄의값을 치루는 죄인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사랑을 알아 회개하면 은혜를 입게되어서 2천년동안 지금껏 이방인의 때로 십자가의 은혜아래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사장나라는 제사장나라입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제사장이 될수 없습니니다.
때가 차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세계민족의 제사장나라로 다시금 회복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회심시킬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이겠습니까?
바로 왕권을 가지고 주님 이땅에 오시기 직전의때 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영광스러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던 그 섭리가 모든 열방가운데 제일 나중에 깨닫게 되어 다시금 그들은 영광가운데 오신 주님을 바라보고 기다리게 됨으로써 그들은 2천년전에 자기 조상들이 죽였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되어 그들은 비로소 회심을 하여 다시금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던 그모든 것이 완성을 이루어 제사장의 나라로 우뚝 서게 될것입니다.
(계7:4-8. 계14:1)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예수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신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마시우게 하신뒤에 주님은 다이루었다 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절망과 비통함에 울부짖고 있으며 비웃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중을 어지럽히던 자가 죽었다고 하며 돌아갑니다.
죽은지 확인하기 위해 로마군병들이 긴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로 부터 심장에 관통하기 이르까지 찌릅니다.
이로써 우리 마음의 죄된 생각까지도 예수님의 마음이 창에 박힘으로 묶임을 당하였습니다.
육신적으로도 이같이 더이상 움직일수 없는 모든 결박을 당하니 비로서 죄의 마침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창으로 찔린 그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물이 나왔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마음으로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하고 나를구원하실이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십자가앞에 나아와 이 피와 물을 받아드는 자에게는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은혜를 입게되는 놀라운 길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사단의 종노릇 하는 죄인이었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오늘 지금에 알기까지는 이때껏 모르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또 다른 가능성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내생각으로 죄를 수없이 지었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을 시험도 했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것은 다 죄였습니다.
거짓이었습니다.
나의 더러움과 추악함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 저와 이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니
이제는 십자가안에서 함께 죽어진 나의 더러운 옛모습도 봅니다.
우리예수님 보혈만을 의지합니다.
주님 (물과) 피만이 저를 살리시는것을 믿고 의지합니다.
이제 아버지 앞에 나아갈때 주님뒤에 저를 감추어 주시옵소서
사단이 끝까지 나를 쫓아서 하나님앞에 나의 죄를 고발하며 참소할때 주님품안에 저를 감추어 보호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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