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안질이 있어서 편지를 쓸 때 자기가 직접 쓰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필 하도록 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관례대로 친히 마지막 부탁의 말을 덧붙 이기 위해서 비서의 손에서 붓을 받아 쥐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말하자면 편지 마지막 부분에다 본인의 서명 날인을 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바울이 마지막 권 면이나 축도까지도 친필로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비교적 여러 마디의 말씀을 친필로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1절에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합니다만, 대개 공통되는 의견은 바울의 시력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글자를 크게 썼다는 것입니다. 혹은 우리가 책에 인쇄를 할 때 중요한 부분은 특별히 대문자로 쓰든지 그렇지 않으면 밑에 줄을 긋는 것처럼, 이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울이 큰 글자로 쓴 것이 아닌가 하기도 합니다. 필립스의 사역에는 고대 동방 세계에서는 이 글씨를 쓰면서 내 가 펜을 얼마나 세게 눌렀는지 주의해보라 는 뜻이 된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말을 얼마나 힘있게 강조하고 있는가 를 주의해서 보십시오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독교 복음의 원리입니 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쓰는 편지를 결론지으면서 다시 한번 바울 자신과 유대주의자 들, 다시 말하면 기독교와 유대교의 종교적인 체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예리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글을 읽다 보면 우리는 1세기에 있었던 바울과 유대주 의자들 사이의 논쟁이 바로 우리가 사는 20세기의 상황을 너무나도 환히 비쳐주고 있음을 직감 하게 됩니다. 더구나 여기서 우리는 세기를 잇는 교회사의 흐름마저도 단편적으로 전망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기독교의 복음이 외면적인가 내면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십시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 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할 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 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외면적이고 형식적인 종교가 아니라, 오히 려 그와는 반대로 내면적이고 영적인 종교라고 자신 있게 확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은 외면적인 것을 강조하고 거기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주의자들 은 할례를 종교의 전부인 것처럼 강조하며 거기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12절과 13절에서 바울은 그들을 자신들이 할례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억지로 할례 받게 하려는, 또는 할례를 강요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흔히 할례당 이라고 부르는 것은 온당한 일입니다. 이미 우리가 생각한 데서도 언급되었습니다만, 사도행전 15장 1절에 보면 그들은 할례당의 구호라고도 말할 수 있는 너희가 할례를 받지 아니 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복음의 진수인 오직 믿음 으로만 구원받는다 는 진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유대주의자들은 왜 이런 일을 했을까 요?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12절에 그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였다 고 말입니 다. 다시 말하면 겉모양과 몸매만을 번듯하게 꾸미려는 자 들이었다는 말입니다. 13절에도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육체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을 조심스럽게 보십 시오. 할례는 육체에 행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징표로 할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그 할례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 대주의자들은 할례를 가장 중요한 차원으로 끌어올려 종교의 핵심적인 문제로 만들어 놓았습니 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성경적이 아닙니다. 할례는 성별 된 백성에게 행하는 하나의 징표이었습 니다. 말하자면 조그마한 외면적 수술에 불과한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영혼의 구원을 확보해 주는 구원의 필수 조건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이와 비슷한 오류들이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세례의 중요성을 너무 지나치 게 강조하다가 거기에 집착되어 버리고 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례를 받음으 로 중생한다는 교리를 주장합니다. 물론 세례는 중요한 것입니다. 할례가 중요했던 것처럼, 예 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교회에 세례를 명하셨습니다. 우리 신교에 서는 성례는 두 가지인데 세례식과 성찬식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주님 오시기까지 계속되어야 할 중요한 예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례는, 할례가 그랬던 것처럼 계약민의 징표입니다. 그러나 할례나 세례가 아무리 큰 영적인 진리를 상징한다고 하여도 그것 자체는 하나의 육체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할례 받는 일이 나 세례 받는 일을 마치 구원의 필수적인 수단처럼 생각해서 이 의미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그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할례나 세례는 그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그 행동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밝히 말씀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 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합하여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 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무슨 말입니까?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상징적인 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 스도가 죽은 것처럼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 리가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핵심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본문 15절이 그 답을 제시합니다. 할례나 무 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로되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다시 말하면 누가 할례나 세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 사람 이 되었느냐, 된 경험이 없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28∼29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고 다만 하나님에 게서니라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내면 생활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행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칭찬이 중요한 것입니 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세례는 성령의 세례를 예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본뜻 을 바꾸어 생각해서 심령의 변화는 뒤로 제쳐놓고 육신적인 의식에만 치중한 나머지 세례를 구 원의 방편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할례나 세례는 육체에 속한 것으로서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외면적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의식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 서 새로워지는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행해지는 내면적이고 보이지 아니하는 이적인 것입니다. 이 말이 너무 구체적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세례 받고 성령으로거듭난 체험이 없는 사람 은 구원받지 못하나, 세례 받지 못했어도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이 사람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 다. 기독교는 언제나 외면보다는 내면을 강조하고 중요시합니다. 그러면 외면적인 것, 의식적 인 것은 필요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는 외면적인 것, 의식적인 것을 아주 무시하지 않을 뿐더러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형식이 없는 내용이란 있을 수가 없습 니다. 예를 들자면, 콩이 생기는 과정을 보면 꽃이 지고 꽃받침이 점점 자라납니다. 이것은 말하자 면 콩집입니다. 처음에 그 콩집을 까보면 눈에 보일까 말까 한 콩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한 동안은 콩집이 크게 자라납니다.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를 지내는 동안에 콩알이 점점 자라납니다. 이 콩알이 자라나 완전히 익게 되면 콩집은 소용이 없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고 싶은 마음은 있어서 시간 따라 예배당에 나옵니다. 찬송도 같이 따라 부릅니다. 기도도 같이 합니다. 헌금 도 다른 사람이 하니까 어떤 때는 조금은 아까워도 헌금합니다. 전도회에 가입해서 같이 일도 해봅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이 점점 자라납니다.처음에는 그저 예배당 건물이 나 둘러보고, 성가대 노래하는 것이나 듣고, 목사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나 듣고 하는 정도습 니다. 그런데 신앙이 자라나면 외면적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심령이 깊은 은혜를 받게 되고, 거기서 감격하고 내적인 기쁨을 느끼고, 힘을 얻고 봉사하게 됩니다. 제가 가끔 술과 담배 이야기를 합니다만, 술과 담배를 안해야 구원받는다는 말은 절대로 아 닙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교회 그리고 나아가서는 복음적인 노선을 걷는 세계 교회의 생활 풍 습에 불과합니다. 술이나 담배 하시는 분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 상관없습니다. 술, 담배 끊고 예수 믿으라면 믿을 사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술, 담배 하셔도 괜찮습니다.제가 이렇게 말씀하니까, 이 말씀을 들으면서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여러 분 계실 것입 니다. 아니, 저 목사가 어떻게 저렇게 말하나? 언제부터 우리 교회에서는 술, 담배 해도 상관 없다고 말하게 되었나? 여러분, 자세히 들어보세요. 술, 담배 하면서 교회에 나오시다가 정말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만나게 되면 술, 담배 하라고 해도 하지 않게 됩니다. 내면의 변 화가 중요합니다. 역사 이래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로 이러한 오류에 자주 빠지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종교, 내면적인 종교를 피상적이고 외면적인 겉치레의 종교로 전락시키곤 하였 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셔서 변질되어가곤 하는 기독교를 바로 잡곤 했습니다. 이러한 잘못을 주전 7, 8세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범했습니다. 그때 하 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책망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 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 29:13)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위선을 통박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구약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요 예수님 때에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종 교개혁 이전의 중세 교회나 웨슬레나 화이트 휠드의 복음화 운동이 있기 전의 구라파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모양만 있고 아무런 생명력도 없는 메말라 버 린 교회, 이것을 영어로 Churchianity 라고 합니다. 외면적 형식은, 내면적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을 때,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적이냐 영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13∼16절의 말씀입니다. 이 내용은 다른 말로 하면,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행동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 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어 놓은 것인가 하는 데 귀결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종교의 중심 문제로 만드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할례는 다만 외적이고 육신 적인 의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시행하는 인간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 한 상징인 할례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람들에게 율 법의 준행을 강요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 5절에 보면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복종을 강조하였는데, 인간의 구원이 율법에 의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가지고는 구원받는 데 미흡하다고 생각 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을 받을 만한 공로로 우리 자신의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믿었 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종교는 인위적인 종교였습니다. 할례도 인위적이고 율법을 복종하는 것도 인위적인 행위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잘못된 생각을 파헤치고 완전히 분쇄해 버렸습니다. 13절에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 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구원은 본질적으로 얻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 문에 그들은 아직까지 행위와 공로를 고집하고 있습니까? 바울의 대답은 12절에 있습니다. 그 들의 유일한 목적은 십자가로 말미암는 핍박을 모면하려는 것 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저주를 받으 사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는 가장 부끄러운 것이었습니 다. 우리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 아래 있으며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할 수 없습 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할례를 받 고 율법을 준행함으로 용서를 받는다면 우리는 십자가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너를 대신하여 여기 에 달렸다. 내가 짊어지고 있는 것은 네 죄이고, 내가 대신 당하고 있는 것은 네 저주이고, 내 가 기도하는 것은 네 빚을 속량하는 것이고,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은 네 죽음이다 라고 말 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처럼 인간의 본색을 철저하게 나타내는 것은 없습니다. 갈보리를 찾기 전에 는 우리 모두 자기 과대망상에,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자신의 본래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아니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 기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피하 려고 합니다. 십자가 없는 종교, 예수 아닌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을 생각합니다. 십자가 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굳이 기독교에 반대하려 하지 않습 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은 싫어합니다. 사도 바울의 태도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본문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오히 려 자랑거리였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세상과 짝했던 관계를 청산한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을 때는 세상과 짝하려고 무던히 애썼습 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스스로가 죄인임을 깨닫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 자이신 것을 알게 된 지금,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대하든 거기에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세상은 나를 대하여, 나는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것은 할례를 내 세우는 외면적이고 인위적인 종교, 형식적인 종교를 반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새로운 피조, 우리 심령을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 음의 원리입니다. 기독교는 내면적이고 영적인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말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흔적을 지녔는가 하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 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흔적 이란 말은 스틱마타 (Stigmata)입 니다. 중세 교회에서는 이것을 예수님의 손과 발, 옆구리의 상처로 생각했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는 그리스도의 흔적에 대해서 깊이 명상할 때에 그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핏물 이 밴 거무스름한 살이 돋아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하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기 몸에 지녔다고 하는 예수님의 흔적은 이런 종류의 것이라 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예수 때문에 당한 핍박을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 때문에 고난당한 흔적이었다고 여겨집니다. 통속적으로 헬라어에서 스틱마타 는 노예에게 찍는 낙인을 말했습니다. 바울이 이것을 염두 에 두고 말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낙인이 찍힌 노예였 습니다. 라이트훗은 그의 개인역에서 아무도 나의 권위를 의심하지 마시오 하였습니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말거리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유대주의자들이 역설하는 흔적을 자기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흔적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입증하는 흔적이었습 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흔적입니다. 우리의 얼굴에, 우리의 손에, 우리의 성품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까? 복음의 순수한 바탕 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복음 전도자의 표식이요,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바울은 그 마음속에 예수님의 흔적을, 그 영혼 속에 예수님의 은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을 향하여 여러분도 나와 똑같은 것을 소유하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에게 예수님의 흔적을 가질 수 있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