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스크랩] 출애굽시대의 성경지리와 역사

하나님아들 2018. 10. 21. 00:40
출애굽시대의 성경지리와 역사

 

 

 

1. 출애굽의 연대에 대한 논쟁

 

 

먼저 출애굽은 언제 일어났는지가 오랜 세월 결론이 나지 않는 논란입니다. 출애굽의 시기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왕상6:1)”

 

솔로몬왕은 주전 970년 왕위에 올랐고 주전 966년 성전건축을 시작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이 계산에 의하면 출애굽은 주전 1,446년경에 일어났던 것입니다.(주전 15세기설의 근거)

 

 

그런데 고센 땅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벽돌을 굽는 노예로서 혹독하게 처우 받으며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였던(출1:11~14)시기를 살펴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라암셋(Rameses)은 람세스2세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그는 BC 1,304~1,237년에 재위하였으며 라암셋은 그의 재위기간 중 건축되었으므로 출애굽은 람세스 2세 때 주전 1,250년경에 이루어졌다라는 의견이 주전 13세기설입니다.

 

 

 주전 13세기설은 지지하는 성서비평학자들은 480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의미라고 주장합니다.즉 480년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관례적으로 사용하는 40년의 세대가 12회 반복되는 횟수라고 주장합니다.

 

열왕기서의 자료에 따르면 성전 건축 시작부터 바벨로 포로기의 종결까지도 480년이 걸렸다는 것인데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분하는 기준을 성전건축으로 삼은 것입니다. 

 

노예 생활을 하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은 택함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민족적 자부심이었습니다.그들은 성전을 역사의 중심사건으로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역사의 중심이신 주권자 예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를 깨뜨리고자 하셨기에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미워하셨습니다.

 

“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 (막 14:58)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마 27: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도안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을 사십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2:19~21)

 

출애굽 연대와 관련해 고고학적 근거, 당시 역사적 정황등의 이유를 가지고 주전 15세기설과 주전 13세기설의 주장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데, 앞서서 언급한 성경에서 출애굽연대를

추적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마을들과 아르논 강 가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주한 지 삼백 년이거늘 그 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 (삿 11:26)

 

이 구절은 입다가 사사로 추대 받으면서 헤스본을 비롯한 요단 동쪽 길르앗 영토를 요구하는 암몬에 대해 그 땅의 영유권에 대한 역사적 근거를 대는 대목입니다.

 

 입다의 활동시기인 주전 1,085년에서 모세의 광야 40년, 여호수아의 16년과 위에서 언급한 300년을 더하면 BC 1,441년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6장1절과는 5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출애굽의 연대에 대해 주전 15세기설과 주전 13세기 설을 둘러싼 논쟁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전체적인 연대와도 관련이 있는 중요한 포인트 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성경적 근거외에 15세기설과 13세기설의 근거로 제시되는 내용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다음에 기회가 되면 좀 더 다양한 내용들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 고대 이집트의 역사

 

 

출애굽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집트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합니다. 이집트 역사는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 신전의 대사제이며 역사가인 마네토가 분류한 크게 고,중,신왕국, 세분하여 1~30왕조의 구분법을 따릅니다.

 

그의 기록을 인용한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이 남아있을 뿐 그의 저술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그런데 마네토의 분류에 의한 이집트 역사와 성경의 연대표를 그대로 비교하는 데는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반유대적 성향으로 이집트역사에서 수치스런 부분을 축소하거나 삭제하였으며 또한 그의 연대기에도 오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 출애굽과 이집트 역사 비교

 

 

3. 나일강의 풍요와 우상숭배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불리니다. 나일강은 적도 부근 우간다와 에디오피아의 고원과 빅토리아호수에서 발원하여 수단과 이집트를 남북으로 가로 지르며 지중해로 들어가는 약 6,700KM의 세계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봄,여름의 우기에 내린 비가 9월이면 나일강이 범람하게 됩니다. 나일강의 범람은 나일강 삼각주지역 (대부분 하이집트 지역)을 비옥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붉은색의 사막과 다른 범람지역을 ‘검은 땅’이라 불렸습니다.

 

비옥한 땅은 이집트에서 농업이 발달할 수 환경을 제공하였고 사람들은 관개농업, 측량술등 기술을 발전시키며 농경을 발달시켰고 당대 최고의 부국이며 문명국으로 주변국가 및 부족들에게 선망의 땅이었을 것입니다.

 

 

나일강이 가져다 주는 풍요는 이집트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이집트인들만의 독특한 종교와 정치구조등을 만들었습다. 나일강이 범람하여 주변지역을 모두 싹 쓸어버리는 것은 파괴적 사건인 동시에 또한 비옥한 농토를 만들어 풍요를 가져다 주는 사건입니다.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한 파괴와 비옥한 땅으로의 변화를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아들 호루스가 태양신 라(Ra, Re)의 도움을 받아 이 땅을 다스리는데 바로 파라오라 믿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사람이 신이 되어 숭배를 받는 인본주의 우상숭배의 대표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 존재인데 하나님을 대신해서 스스로 숭배를 받으려고 한 행위는 참으로 패역한 행위입니다. 

 

이집트인의 우상숭배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하여 이집트 신화를 간단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태초에 빛도 없는 검은 바다인 <눈>에게서 태양신<라>가 탄생합니다. <라>는 자기생식을 통해서 <슈(공기)>와 <테프누트(습기)>를 낳습니다. 슈와 테프누트가 결혼하여 <누트Nut(하늘)>와 <게브Geb(땅)>를 낳습니다.

 

하늘과 땅의 사이가 너무 좋아 항상 붙어 있음으로 천지가 창조되지 못하자 <라>는 둘 사이에 <공기의 신>이 끼어들게 하여서 천지창조 일어났다고 합니다.루트(대지)와 게브(하늘) 사이에 네명의 자식이 생기는데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트티스입니다.

 

 오시리스는 여동생인 이시스와 결혼을 하고 <라>의 후계자가 되어 나일강변을 다스립니다. 오시리스는 세트에 의해 죽임을 당해 시신이 14조각으로 찢겨져 나일강을 따라 이집트 각지 에 흩어졌으나 이시스의 도움으로 부활됩니다.

 

그의 아들<호루스>가 <라>의 도움을 받아 세트를 죽임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오시리스>는 지하세계를 다스리고 <호루스>는 지상세계를 다스리는 파라오가 된다는 것이 이집트 신화의 핵심입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출 32:4)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으로 섬긴

유명한 사건입니다.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하찮은 동물로 표현했는지 오랫동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고대 사람들의 황소숭배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질렀던 이 패역한 행위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메르사람들은 그들의 주신인 안(An, 또는 아누 Anu)을 황소의 뿔을 쓰고 있는 모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수도였던 멤피스에서는 아피스(Apis)라는 신성한 소를 숭배하였는데 그 소는 창조의 신인 프타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인들의 아피스 우상숭배의 영향을 받아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으로 숭배한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섬긴 바알 역시 황소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의 크레타 문명 및 미케네 문명에서도 신들이 소의 모양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고대 근동지역 사람들이 신의 형상으로 소를 생각한 것은 황소가 주는 강인한 이미지와 암소의 큰 젖이 주는 다산과 풍요의 이미지 때문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오랜 의견입니다.

 

이런 단순해 보이는 이유 외에 아마도 천문학적 관찰에 의한 황소자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들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해서 기회될 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피스

 

3. 이방인들의 왕조 - 힉소스

 

나일강이라는 천혜의 조건을 지닌 이집트와는 달리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주변의 물 부족 지역 사람들이 가뭄으로 인해 기근이 들게 되면 식량을 구하러 가야할 곳은 당연히 이집트입니다.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 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창12:9,10)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적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창42:2,3)

 

기원전 1750년경 부터 이집트 델타지역에는 계속되는 기근으로 가나안 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셈족 계통의 유목민들이 대거 들어옵니다. 이집트 인들은 이들 무리의 족장들을 ‘히카우 카슈트’ (Hikaw khasut) 즉 '외국 땅의 우두머리들‘란 의미로 불렀는데 이 용어가 전체 이민족의 개념으로 쓰여졌습니다.

 

후대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가 힉소스를’목자들의 우두머리들‘ 이란 뜻으로 오역하였는데 요세푸스가 이를 토대로 힉소스를 히브리민족의 원류로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하는 학설입니다.

 

힉소스는 어떤 단일 민족이라기 보다는 아시아에서 이집트 델타지역으로 유입된 셈족계열의 이방 부족들을 총칭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일 것입니다. 학자들의 대다수 의견도 그렇습니다.

 

            <나일 델타의 고센 지역 -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거주지>

 

12왕조를 이집트 역사의 황금기라 불리우는데 그 때에 아시아계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펴게 됩니다. 힉소스라 불리는 아시아계 이방인들은 숫자가 많아 지면서 이집트 뿐 아니라 상이집트까지 퍼져나갔고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들 중 능력을 인정받아 중요한 위치에서 일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또한 용병으로 활약하여 용병대장으로 활동한 자들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그들은 이집트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이집트인들이 잘 모르는 말,전차,강궁등을 사용하였습니다.

 

 13,14왕조는 국력이 약해지고 왕권이 약화되어 통일 국가였던 상.하이집트로 분열됩니다. 이 시기에 군사적 힘을 비롯한 세력화 되어 있던 이방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하이집트를 정복합니다.

 

BC1,680년 용병대장 살리티스가 아바리스(고센 지역내)에 요새를 건립하여 새 도읍을 정하고 하이집트,시나이반도, 팔레스타인 지역을 100년 이상 지배하는데 이 시기를 힉소스시대(제 15,16)라 불리웁니다. 이 시기에 상이집트는 힉소스 파라오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반독립상태의 국가를 유지 하였습니다.

 

상이집트의 수도였던 테베(현재의 룩소르)는 반힉소스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그리고 이집트 남부 국경 아래 누비아(현재의 수단)지역은 힉소스와 동맹 관계를 맺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이 시기를 수치스럽게 여겨 왔습니다.

 

                룩소 (테베)의 카르낙 신전 : 출처 -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왕가의 계곡 - 왕들의 무덤(테베, 룩소르)

                                 

 

이집트를 통치하게된 힉소스인들은 이집트식의 칭호, 복장을 사용하고 이집트 전통,문화,종교를 존중하고 계승하였습니다.그들은 아시아의 문물을 이집트에 이식하여 새로운 축성술, 무기(전차등),악기(오보에,탬버린등)등을 이집트에 전달하였고 직조술,올리브나무, 석류나무등도 전파하였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출 1:8)

 

15세기설과 13세기설에 따라서 요셉이 총리로 있던 시기에 대해서도 당연히 의견이 나누어집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누군인가에 대해서도 주장이 팽팽합니다. 문자 그대로 요셉에 대해 잘 모르는 후대의 왕이라는 설과 힉소스를 축출한 이집트인 왕조의 파라오라는 설이 출애굽 연대 15세기설과 13세기설과 관련하여 맞서고 있습니다.

 

13세기 출애굽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노예 출신 이방인인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셈족 이방인 왕조인 힉소스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15세기 설을 따라서 야곱의 가족이 요셉의 나이 39세되는 BC 1,876년 (BC 1,446년 출애굽 + 이집트 거주 430년)에 이집트로 내려갔다고 가정해 볼 때도 요셉의 총리 선출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이집트의 12왕조 때로 아시아계 민족들의 이주에 대하여 개방적인 시기였고, 특출한 이방인들이 고위관리로 등용되었던 시대였습니다.

 

요셉이 힉소스 왕조에 총리를 하였는지 또는 그 전에 총리를 하였는지 와는 별개로 힉소스 왕조 시대에 이스라엘인들은 우대를 받으며 살았고 이스라엘을 포함한 이방인들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상실감과 적대감은 더욱 커져 나갔을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 70인(창 46:27)이 이집트로 이주하면서 히브리민족 형성의 기반을 만들게 되는데 그들은 파라오의 보호아래 고센땅에 정착하게 됩니다. 고센 땅에 정착하게 된 배경을 창세기 46:33~47:6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요셉은 고센 땅을 택하라고 조언했을까? 궁금해집니다.

 

 이집트 땅에서 영원히 안주하는게 목적이 아니고 언제가 고향 땅으로 가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나안 땅과 가까운 그 곳을 택한 것이라 생각되며 하나님의 계획이 그 가운데에 있었다고 믿습니다.

 

 

                                           고센 땅의 모습

 

 

 

4. 힉소스의 축출과 이방인 박해정책

 

 

이집트 17왕조를 힉소스와 신왕조 사이의 중간기라 합니다. 이 시기를 거쳐 신왕조시대를 여는 18왕조 아모세(또는 아흐모세 1세 불리움)때 힉소스를 축출합니다(BC 1,539). 힉소스는 쫒겨나고 남은 무리들은 노예로 전락합니다.

 

이집트의 이민족 박해 정책이 가혹하게 시행된 시기입니다. 출애굽기는 (1:8~14) 요셉을 모르는 새 왕 이후 노예 상태로 전락한 히브리 사람들이 혹독하게 건축일과 농사일을 감당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혹독한 박해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아마도 물질적으로 풍요한 이집트 문화에 동화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혹독한 박해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거룩한 계보를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행하여진 역사적 사건이라 믿습니다.

 

            출처 : 두란노 성서 지도 (이집트에서쫓겨나는 힉소즈 족)

 

출애굽기에 기록된 히브리 노예들의 혹독한 처우와 대조적으로 피라미드 건축 노동자들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매우 좋은 근무 환경을 가지고 있었음이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 피라미드 근처에서 건설노동자들의 집단거주지가 발견되었는데, 이 유적 발굴 결과 피라미드 건설에 참여한 인부들은 급여를 받았으며 다치거나 병이 났을 때 치료를 받았던 거로 밝혀졌습니다.

 

일종의 출근명부라 할 수 있는 파피루스에는 숙취, 친인척의 경조사등을 이유로 결근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피라미드 건설 인부들은 노예가 아닌 정당한 댓가를 받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이었다고 보여집니다.

 

 2010년 1월 10일 피라미드 주변지역을 발굴한 고고학자 자히 와히스는 그러한 근거로 쿠푸왕 피라미드 주변에서 발견된 노동자들의 묘지를 들었습니다. 노예였다면 왕의 무덤 옆에 자신들의 무덤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며, 무덤 벽에 자신들을 ‘쿠푸왕의 친구’라 낙서를 쓴 것도 있는데 노예라면 감히 왕을 친구라고 못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와 벽돌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다 엄하였더라” (출 1:13,14)

 

“너희는 짚을 얻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 너희 일은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배것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니”(출 5:11,12)

 

바벨탑 건설 기사에 나오는 바와 같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흙으로 벽돌을 만드는 기술이 일찍 발달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흙으로 벽돌 만드는 기술을 보유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비돔과 라암셋 건설에서 벽돌 만드는 노역에 쓰여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집트에서 주로 발견되는 벽돌은 말린 벽돌인데,나일강 주변에서 채취한 진흙에 미리 썰어놓은 짚을 잘 반죽하여 이를 거푸집을 통해 모양을 만든 후 말렸습니다.

 

고센 지방의 비돔이라 여겨지는 텔 엘 마스쿠타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는 성경구절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노예 감독관의 문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장비도 부족하다. 벽돌 만들 인원도 없고 짚도 없다”

 

그리고 텔 엘 마스쿠타의 유적에서 제일 아래층은 짚을 섞어서 만든 벽돌층이, 그 위층은 짚 대신 갈대 부스러기를 섞어서 만든 벽돌 층이, 맨 꼭대기의 것은 아무것도 섞지 않는 진흙 벽돌층이 발견됨으로써 성경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뒤 받침하고 있습니다.

 

                            라암셋 유적

 

5. 하비루와 히브리

 

 

히브리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하비루를 연관시킵니다. 하비루란 단어가 등장한 배경부터 설명하겠습니다.

 

고대 이집트 중왕조의 18왕조 시대의 왕이었던 아크나톤(재위 BC 1379∼BC 1362)은 아몬-라를 중심으로 한 다신 숭배에서 유일신 아톤(태양신)숭배로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수도를 테베(룩소)에서 아마르나로 올깁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 그의 종교정책은 폐기되고 수도도 다시 테베로 환원됩니다. 1887년에 이집트 시골 아줌마에 의해 우연히 알려진 아마르나의 유적의 발굴을 통해 당시 주변국가와의 외교문서였던 점토판이 발견되었습니다.

 

아마르나문서로 불리우는 이 점토판은 당시 근동의 국제어였던 아카드어로 쓰여있는데 여기서 하비루(Habiru, Apiru)라는 무리가 등장함으로써 하비루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마리, 우가리트, 히타이트등의 문서에 하비루는 빈번하게 250회 이상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근동지방을 떠도는 “떠돌이“, 또는 하층민을 의미하는 사회 계층적 용어로 폭 넓게 쓰여졌습니다.

 

히브리인들의 기원을 여기서 찾기도 하는데 종족적인 개념의 히브리인(Hebrews)은 ’강을 건너온 자”라는 뜻으로 ‘하비루’와는 동일시 할 수는 없습니다.단, 사회 계층적인 측면에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도 하비루에 속하였고, 출애굽 당시 하비루의 범주에 포함된 허다한 잡족들도 이스라엘 자손들을 따랐습니다.

 

 

6. 출애굽 시대의 파라오는 누구일까?

 

 

주전 15세기설에 입각하면 출애굽 때의 파라오는 투트모세 3세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BC1,479~BC1,426입니다. 투트모세 3세가 9세에 왕위에 오르자 그의 고모 또는 모친(이집트 왕조는 우상화 정책의 수단으로 근친혼이 유지되어옴)으로 알려진 합셋수트에 의해 섭정이 이루졌습니다.

 

합셋수트는 섭정에 만족하지 않고 이집트 최초의 여자 파라오가 됩니다. 여자는 파라오가 될 수 없는 이집트 전통을 깨고 파라오가 된 그녀는 수염을 붙이고 남성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섰습니다. 일각에서는 합셋수트가 모세를 키워준 애굽의 공주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합셋수트 여왕이 죽은 후 투트모세3세는 그녀의 이름을 모든 건물에서 지우고 그 일파를 추방하였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대외 원정을 감행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변방을 안정시켰습니다. 그의 치세 때에 이집트는 번영을 구가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는 고대 이집트의 나폴레옹으로 불리웁니다.

 

                                 셋수트 대장전

 

주전 13세기설을 따르자면 출애굽 때의 파라오는 람세스 2세라는 의견이 유력합니다.라메세스 2세라고도 표기되는데 람세스란 이름은 태양신 라에 의해 태어 났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아버지 세티 1세를 계승한 그는 전쟁과 건축을 많이 한 파라오였습니다.

 

그는 누비아(지금의 수단지역)를 정복하였으며 오리엔트 패권을 놓고 메소포타미아의 히타이트와 오랜 전쟁을 하였습니다. 지금의 시리아 지역인 카데시에서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무와타리시가 직접 부딪힌 전투는 유명한 세계사의 한 장면입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 끝에 양국은BC 1258년 평화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BC 1245년에는 히타이트의 왕녀가 람세스2세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그의 업적을 들어내기 위하여 이집트 영토 곳곳에 많은 기념비와 자신의 석상 및 신전건축물들을 세웠습니다.

 

대표적인 건축물이 아부심벨 건축물입니다. 람세스 2세가 호루스를 계승하는 신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뽐내기 위하여 지은 이 신전은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파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스완댐으로 인해 수몰될 운명에 쳐해져 이 유산의 보존을 위해 국제간 협력을 하였는데 그것이 유네스코세계유산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부심벨 신전 - 출처 :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라암셋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고역을 통해 국고성 비돔과 함께 지어진 성읍으로 고센 땅에 위치해 있습니다. 당시 상이집트의 테베가 수도였는데 하이집트 지역에 시나인 반도로 연결되는 요충진인 이 곳에 큰 도시를 세운 것은 전략적인 요새 목적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현재의 유적 중에 아몬 대신전, 람세스의 석상, 부러진 오벨리스크등이 남아있는데 유적의 규모로 당시 이 곳의 규모가 대단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는 왕성한 정복욕, 건축, 재산에 걸맞게 많은 처첩을 두어 79명의 아들과 59명의 딸을 낳았다고 전해집니다.

 

 

7. 출애굽 시대의 메소포타미아 - 히타이트(Hettites)

 

 

출애굽 시기 BC 15~13세기 당시 이집트 주변 국가들 중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막벨라굴을 매입하는 사건과 에서의 결혼등에서 볼 수 있듯이 헷(Hettites) 족속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그곳에 살았고 아브라함의 가나안 정착 후에는 그들 가족들의 이웃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철기문명을 만든 민족으로 잘 알려진 히타이트 (Hettites)민족이 바로 헷 족속입니다. 성경은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기원전 2,000년경 현재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이동하여 몇 개의 도시국가들을 만들었고 BC19세기 쿠사라의 왕 아니타시가 도시국가들을 병합하며 세력을 확장하여 나갔습니다. 그리고 BC 17세기 후반에는 하투실리스가 시리아 지역까지 군대를 진격시켜, 통일왕국을 만들었고 그 수도를 하투샤(현 터키의 보가즈쾨이)에 두었습니다.

 

그를 이은 무르실리스 1세는 그 여세를 몰아 기원전 1595년 최강국 바빌론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들은 세계 최초의 철기를 개발한 민족으로 앞선 기술의 무기를 통해 바빌론을 멸망시킬 수 있었습니다.

 

남쪽으로 세력확장을 펼친 히타이트와 북쪽으로 세력 확장을 펼친 이집트가 맞서 싸우게 되었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양국은 화친을 하고 그 증표로 이집트의 왕과 히타이트의 왕녀가 결혼을 하였습니다.

 

           하투사(히타이트의 수도) 유적, 터키 - 출처 : 유네스코세계유산센터

 

 

 

 

8. 출애굽 시대의 지중해 문명과 블레셋의 기원

 

 

유럽인들의 정신적 뿌리는 그리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도 그리스에서 시작됩니다.

 

신화 이야기로만 알려졌던 그리스 역사는 고고학의 업적으로 인해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최초의 문명이라 알려진 크레타 문명 역시 신화로만 치부되었는데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에반스가 ‘크노소스’궁전의 유적을 발견하면서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리스 남부에 있는 큰 섬인 크레타(성경에서는 ‘그레데’로 기록) 섬에는 BC 3,000년 이전에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정주하며 살았던 흔적이 있습니다. 이 섬에 살던 사람들은 바다와 함께 살며 해상을 항해하는 기술을 발달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과 근접한 인류 최초의 선진국들인 메소포타미아 및 이집트와 접촉을 하며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발전해 나갔습니다.문화 전달의 매개 역할을 한 사람들이 페니키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이 사실에 대한 단초를 주고 있습니다.

 

 

제우스는 해변에서 놀고 있는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Europe)의 귀엽고 예쁜 모습에 반합니다. 아름다운 하얀 황소로 변신해 에우로페에게 다가가 에우로페가 등에 타자 크레타 섬으로 날라가 강제로 성관계를 맺습니다.

 

둘 사이에서 미노스와 라다만티스,사르페돈 3형제가 탄생합니다. 에우로페는 나중에 크레타섬의 왕 아스테리오스의 아내가 되었고 아들이 없었던 아스테리오스의 뒤를 이어 미노스가 왕이 되는데 형제 간의 왕위 계승 다툼 때 미노스는 포세이돈의 도움을 받습니다.

 

 

페니키아의 영향을 받아 크레타에서 미노스 문명이 발생하였음을 신화적 표현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유럽(Europe)의 어원은 바로 에우로페(Europe)에서 나왔습니다.

 

BC 2000년경에 크노소스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왕국이 등장합니다. 이 왕이 전설적인 ‘미노스’왕입니다. 크레타는 지중해 교역을 독점하며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 주변 여러 섬들과 도시에 영향을 미치는 에게해의 중심국가로서 자리매김합니다.

 

여기에는 크레타 섬의 지리적 위치가 큰 기여를 합니다. 동(東)지중해의 중앙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오리엔트세계, 특히 이집트와의 교류가 있었고 ,다른 섬들보다 훨씬 면적이 넓은 데다 평야가 많은 점 등 조직적인 문명 성립에 필요한 조건을 구비하였습니다.

 

 주민은 지중해인종에다 소아시아인이 혼혈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제적인 풍요를 바탕으로 크노소스를 비롯하여 말리아 ·파이스토스 ·자크로스 등에 궁전이 건립되고, 도기(陶器), 청동기의 제작, 조각, 그림등 예술도 발달하였습니다.

 

BC 1700년경에 대지진으로 궁전이 파괴되었으나 곧 보다 큰 대규모의 새 궁전이 재건되어, BC1,700~BC 1,500 약 약 2세기 동안 크레타문화는 절정기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수도 크노소스는 인구 8만을 헤아렸으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번영하였다고 합니다. 크노소스궁전은 경사진 곳에 가운데 마당을 사이에 끼고 수백의 작은 방을 배치한 복잡한 계획에 의하여 건립된 대건축으로, 소위 미궁(迷宮:라비린토스)로서 유명합니다.

 

중요한 방은 대부분 선명한 벽화로 장식되고 채광과 배수시설도 세심하게 배려되었습니다. 다른 지역의 궁전도 대소의 차이는 있으나, 계획 ·장식방법 등에서 크노소스와 공통된 성격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스 본토는 크레타보다 문명의 성립이 늦습니다. 그리스 본토 쪽에서 남하한 사람들에 의해서 BC 2,000~BC 1,600년 경에 펠레폰네스 반도를 중심으로 미케네,아테네,테베,필로스등 작은 도시국가들이 세워집니다. 그 중에 미케네가 가장 세력이 융성하였습니다.

 

그들은 BC 1,500년경에 크레타 섬을 침략을 하여 BC 1,400년경에 크노소스궁전이 파괴되고 크레타는 멸망합니다. 크레타를 대신하여 지중해 해상교역의 중심세력이 된 미케네 도시국가들은 BC 1,400~BC 1,200년간이 전성기입니다. 이를 미케네문명이라고 합니다.

 

 

미케네와 블레셋의 연관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블레셋의 기원과 관련하여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가장 지지를 받고 있는 학설이 ‘갑돌기원설’이며 성경도 블레셋 사람들은 갑돌(Caphtor)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갑돌에서 나온 갑돌 사람이 가사까지 각 촌에 거주하는 야위 사람을 멸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거기에 거주하였느니라” (신 2:23)

 

“이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며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는 바 도와 줄 자를 다 끊어 버리시는 날이 올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갑돌 섬에 남아 있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리라”

(렘 47:4)

 

BC 1,400년경 미케네에 의해 멸망한 후 크레타 주민들의 일부가 이스라엘의 서쪽 해안지대인 가사등으로 이동을 시작하여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들이 살았던 땅을 히브리어 성서는 ‘Peleshet(펠레쉐트)’라 불렀고 우리말 성서는 ‘블레셋 사람들’ 혹은 ‘블레셋’으로 번역했습니다. 앗수르 문헌에서는 이 땅을 ‘Palashtu(팔라쉬투)’ 혹은 ‘Pilistu(필리스투)’라 불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가나안 서쪽에 완전히 정착한 것은 BC 1,200년 전후로 보여집니다.

 

 미케네세력의 확대로 시발된 BC 1,400~ 1,200년 시기의 소위 “바다민족의 침입‘으로 불리는 해양민족의 이동은 이집트,메소포타미아, 레반트지역등 지중해 주변의 세력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룩소에 있는 람세스 3세의 카르낙 신전 벽화에는 테커, 데니엔, 세르덴, 베쉐시, 그리고 블레셋이라 불리는 바다 사람들과의 전쟁 장면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람세스 3세는 그들을 나일강에서 몰아냈다고 합니다.

  

 

9. 출애굽의 경로

 

 

 

              출애굽 경로 - 출처 : 두란노성서지도

 

                                내산

 

 

 

                            모세 기념교회

 

 

 

 

10. 출애굽의 지명이 주는 메시지

 

 

 

히브리어 언어학자인 김진산박사는 출애굽 지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 상황을 그들의 언어로 기록한 흔적이기에 히브리어 이름을 통하여 사건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김진산 박사의 설명을 옮깁니다.

 

 

1) 히브리 말로 이해하는 출애굽 경로

 

 

 

a. 민 33: 16 “시내광야에서 발행하여 기브롯핫다와에 진쳤고”

 

 

‘기브롯핫다와’에서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 해답은 민 11:34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여기서 ‘기브롯’은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고 ‘핫다와’는 ‘욕심’ 혹은 ‘탐욕’을 의미하는 히브리 말입니다.

 

성서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언어유희(word play)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요로운 땅에서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갑작스레 만난 광야는 분명 고통의 시간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출애굽을 했을 때 부랴부랴 챙겨온 갖가지 좋은 것들은 광야의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졌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것들을 탐내는 아귀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로 아귀다툼이 일어난 사건 때문에 그 곳 이름을 ‘기브롯핫다와’ 즉 ‘탐욕의 무덤’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b. 민 33:17 “기브롯핫다아와에서 발행하여 하세롯에 진 쳤고”

 

 

 

‘하세롯’(Hazeroth)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민 12장에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난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문둥병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간절한 요청으로 하나님은 문둥병 대신 미리암을 ‘진 밖에 칠일을’ 가두게 하셨습니다.

 

'하세롯’는 출애굽 27장에서 40장에 이르기까지 성막의 ‘뜰’이란 의미로 나타납니다. 즉 ‘하세롯’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시는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그렇다면 미리암은 하나님의 ‘하세롯’ 에서 쫓겨난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하세롯’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인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c. 18절 “하세롯에서 발행하여 릿마에 진 쳤고”

 

 

‘릿마’ (Ritma)는 앞의 ‘하세롯’(Hazeroth)과 ‘기브롯핫다아와’(Kibrot Taavah)는 달리 다른 성경본문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지명입니다. 아마도 지역적인 특징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릿마’는 광야의 식물인 ‘로뎀’(Rotem, 왕상 19:5) 과 ‘대싸리’(Retamim, 욥 30:4)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자라지만 흔한 식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로뎀 나무는 이스라엘 땅 가운데 광야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세가지 관목들 (shrubs) 가운데 하나입니다. 광야의 척박한 땅에서 드물게 자라나는 식물이기 때문에 광야에 머물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존의 수단이 되었던 것은 분명했습니다. 로뎀 나무는 광야의 사람들에게 그늘, 음식, 그리고 땔감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d. 19절 “릿마에서 발행하여 림몬베레스에 진 쳤고”

 

 

림몬베레스에서 림몬(Rimmon)은 바로 석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레스(Peretz)는 ‘터지다/ 뚫고 나오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8절 ‘릿마’와 같이 지역적인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뎀 나무와 달리 ‘석류’는 척박한 광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식물이다: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민 20:5). ‘석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기대하고 있었던 ‘아름다운 땅’ (신 8:7),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만날 볼 수 있는 식물이었던 것입니다: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신 8:8). 그렇다면 ‘림몬베레스’는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아름다운 땅, 즉 가나안 땅에서나 맛볼 수 있는 ‘석류’ 혹은 열매를 허락하신 사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e. 20절 “림몬베레스에서 립나에 진 쳤고”

 

 

‘립나’(Libnah) 는 모음을 달리하여 ‘레보나’(Lebonah, 유향) 와 ‘레바나’(Lebanah, 희다) 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우선 ‘립나’는 가나안 정복 이후 레위 사람 가운데 아론 자손에게 분배된 땅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역대기상 6:57에서 아론 자손에게 주어졌던 도피성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아론 자손에게 도피성을 주었으니 헤브론과 립나와 그 들과 얏딜과 에스드모아와 그들과.” 그리고 ‘레보나’(유향)는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된 값비싼 방향제였습니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레 2:1).

 

마지막으로 ‘레바나’ (희다)는 레위기에서 문둥병자에게 생기는 흰 반점을 가리킵니다: “제사장은 진찰할 찌니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거니 난육이 생겼으면” (레 13:10).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의미가운데 가장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레보나’(유향)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유향을 가지고 정성을 다한 제사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f. 21절 “립나에서 발행하여 릿사에 진 쳤고”

 

 

‘릿사’(Rissah)는 ‘적시다’ 혹은 ‘축축하게 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 5:2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에서 ‘이슬’의 히브리 표현이 바로 ‘릿사’입니다.

 

광야에서 비가 내리는 경우는 아주 드물지만 광야의 이슬은 매일 밤마다 내리는 하늘의 축복이죠: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출 16:13-14).

 

본문의 ‘릿사’에서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마른 광에서 하늘의 축복인 이슬에 흠뻑 젖었을 것입니다.

 

 

 

2) 히브리어 의미론 본 출애굽 경로

 

 

 

출애굽 경로를 추적하는 독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히브리 지명 때문에 대충 읽으며 넘어가려 한다. 하지만 히브리어 지명 가운데 숨겨진 의미를 발견할 때 어려운 히브리어 조차도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들리게 됩니다.

 

지난 호에 실렸던 ‘출애굽 경로 (1)’과 함께 이번에 살펴보려는 경로 역시 ‘바란 광야’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네겝 (남방)의 중부에 넓게 펼쳐져 있는 바란 광야는 가나안 땅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다. 아직도 “식물도 없고 물도 없는” 광야이지만 얼마 남지 않은 광야 생활인 것은 분명합니다.

 

 

a. 22절 “릿사에서 발행하여 그헬라다에 진 쳤고”

 

 

‘Qehelathah’는 ‘Qahal’과 ‘Qehilah’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히브리말입니다: “그들의 삼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Qahal)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신 23:9)/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Qehilah)의 기업이로다”(신 33:4).

 

두 용어의 차이점은 ‘Qehilah’는 ‘Qahal’보다 더 조직적인 모임을 가리킬 때 쓰여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목회하는 동안 ‘교회’의 히브리말인 ‘Kenesiah’보다 회중’의 의미를 가진 ‘Qehilah’를 주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십자가’’와 ‘교회’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은 이미 역사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과 더불어 살아온 저는 유대인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Qehilah’를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헬라다'는 바로 여호와의 총회 혹은 말씀집회가 있었던 곳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b. 23절 “그헬라다에서 발행하여 세벨산에 진 쳤고”

 

 

‘세벨산’(Mountain of Shepher)은 구약성서에서 단 한차례만 등장합니다. 물론 출애굽의 지역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갔기 때문에 그 지명이 다시 사용된다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그렇다면 단 한차례만 사용된 ‘세벨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하필이면 ‘세벨’이란 이름을 붙였을까요?

 

‘세벨’(Shepher)의 히브리어 어근인 ‘sh/ph/r’은 ‘세벨산’이란 지명 이외에 ‘Shiphra’ 혹은 ‘Shaphir’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Shiphra’는 욥기 26:13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에서 ‘맑은’ (fair) 의미를 갖고 있고, ‘Shaphir’는 다니엘서 4: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리고 창 49:21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에서 ‘아름다운’(beautiful)의 의미로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벨산'은 과연 광야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산이었나 봅니다.

 

 

c. 24절 “세벨산에서 발행하여 하라다에 진 쳤고”

 

 

‘Harada’(하라다)는 ‘떨림, 두려움, 근심’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삼상 14:15에서 ‘Harada’의 히브리어 어근인 ‘h/r/d’가 무려 세 차례나 등장합니다: “들에 있는 진과 모든 백성 중에 떨림이 일어났고 부대와 노략군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사실 “큰 떨림이었더라”를 히브리어 번역을 달리 시도하면 “하나님께서 떨게 하셨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자, 과연 “하라다”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우리는 예레미야에 임했던 하나님의 예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30:5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우리가 떨리는 소리를 들으니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로다”(예레미야 30:5).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에게 해방의 때를 알리는 징조(sign)로 하나님께서 떨게 하시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방인의 우상으로 그 멍에를 말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라는 명령인 셈이죠. 그렇다면 '하라다'는 분명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할만한 영적 체험을 했던 곳이지 않았을까요?

 

 

d. 25절 “하라다에서 발행하여 막헬롯에 진 쳤고”

 

 

‘막헬롯’(Maqheloth)’은 ‘여호와의 총회’ 혹은 ‘회중’라는 의미를 가진 본문 22절 '그헬라다'(Qehelathah)의 히브리어 어근인 'q/h/l' 혹은 'q/h/l/th'와 동일합니다. 결국 '막헬롯'과 '그헬라다'의 기본적인 의미가 같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본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서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찌어다"(시편 68:26).

 

히브리어 구문론의 이해로 다시 번역하면 "대회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근원이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막헬롯'이란 이름을 가진 특별한 '성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막헬롯'은 24절 "하라다" 즉 하나님 앞에서 '떨림'의 체험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영적 집회가 열린 곳이란 믿음을 가져봅니다.

 

 

e. 26절 "막헬롯에서 발행하여 다핫에 진 쳤고"

 

 

'다핫'(Tahath)은 원래 방향을 가리키는 전치사입니다. 독립적으로 혹은 명사와 함께 사용되어 '아래로' 혹은 '~아래'의 의미를 갖습니다. 예를 들면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창 7:19)에서 "천하" 즉 하늘 '아래'가 바로 '다핫' 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아래"는 하늘아래 있는 '온 세상'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또한 창 22:13 "아브라함…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에서 "대신하여" 역시 '다핫'으로 사용되었습니다(창 30:15 "합환채 대신에"/ 창 44:33 "아이를 대신하여").

 

그리고 '다핫(Tahath)'은 '그늘'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창 18: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에서 "나무 아래서" 의 "아래서"는 의미상 '그늘'(tzel)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핫" 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핫'은 성서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렀던 곳이 광야였음을 상기시킬 때 '다핫' 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늘'이 되어주셨던 곳이 아니었을까요?

 

 

f. 27절 "다핫에서 발행하여 데라에 진 쳤고"

 

 

'데라'(Terah)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원문에서는 'Tarah'로 쓰여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함께 쓰여진 전치사 'be'(in)의 영향으로 'Te'가 'Ta'가 된 것입니다. 복잡한 모음변화까지 동원하여 설명하는 이유는 '데라'(Terah)의 이름 때문입니다.

 

 '데라'는 지명이나 인명으로 사용된 경우는 단 하나의 이름, 즉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의 아버지 데라(Terah)뿐입니다(창 1124-28).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 세겜 집회에서 행한 마지막 연설에서 '데라'를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던"(수 24:2) 인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대조적으로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라는 여호수아의 마지막 명령에서 다시는 "강 저편 데라"의 우상으로 돌아가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본문 27절의 '데라'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데라의 바란광야'는 비록 버려진 광야였지만 여전히 애굽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스러운 광야를 견뎌내기 보다 '과거'의 애굽으로 돌아가고픈 백성의 원초적 욕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차라리 "강 저편"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았던 '데라'와 같이, 견디기 힘든 광야보다 "홍해 저편" 애굽의 우상을 섬기며 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데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또 한번의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우상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25절 '막헬롯'(성회)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영적 침체기 빠진 것을 아닐까요?

 

 

g. 28절 "데라에서 발행하여 밋가에 진 쳤고"

 

 

'밋가'(Mitqah)의 히브리어 어근 'Mataq'는 '달콤하다'(sweet)입니다. 동사형태로 주로 등장하지만 명사나 형용사로도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맛있는 음식을 표현할 때 'Matoq!!'를 연발하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낼 때도 즐겨 쓰기도 합니다. 우리말 표현에도 진솔한 사람을 가리켜 '진국'같은 사람이라고 부르듯 'Matoq'라고 말합니다.

 

출애굽 여정에서 모세는 히브리 민족을 이끌면서 많은 기적을 보여줍니다. 가장 대표적인 기적은 광야에서 물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출 15:25).

 

그렇다면 '밋가'와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장소를 광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쓰다'라는 의미를 가진 바로 '마라'(Marah)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마라'만이 아니라 '밋가'와 같은 축복의 장소를 만났던 것입니다.

 

결국 27절 "데라"에서 영적 침체기에 빠졌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밋가'에서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는 광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3) 히브리 말로 이해하는 출애굽 경로

 

 

 

이번에는 바란 광야의 경로 (민 33:21-28)에 이어 아라바 광야로 들어선 경로 (민 33:30-36)를 찾아갑니다. 아라바 광야는 염해/사해 (해저 400 m)에서 남쪽으로 약 180 km 떨어진 엘랏 혹은 에시온게벨 (해발 10 m)까지의 지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라바 광야는 지역적인 특성상 신 광야와 바란 광야, 그리고 에돔 산지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아라바 계곡이라고도 부른다. 아라바 광야는 다른 광야와 달리 샘들이 많아 비교적 물이 풍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변의 다른 광야와 산지들이 지역적으로 아라바 광야 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우기 때면 산지에서 밀려오는 빗물로 홍수를 발생시킬 정도로 아라바 광야로 내려 보냅니다.

 

특히 해발 1500 m의 에돔 산지의 물줄기들은 곧바로 아라바 광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아라바 광야에는 수많은 키부츠 혹은 모샤브가 형성되어 각종 과일과 야채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라바 광야생활 (민 33:30-36)은 어찌 보면 출애굽 과정에서 광야 생활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라바 광야 이후에 등장하는 민 33:37-49까지는 에돔과 모압의 땅을 거쳐가는 경로들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선 에돔과 모압은 이미 부족국가 도시를 형성 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야 지역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라바 광야생활은 광야생활의 마지막에 이르렀는데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사건들을 경험했을까요?

 

 

a. 민 33:30 “하스모나에서 발행하여 모세롯에 진쳤고”

 

 

“하스모나”(Hasmonah)는 유다 지파의 헤스몬 (Hesmon - 수 15:27)과 동일한 지명으로 알려져 있고, 그 위치는 유다 광야, 아라바 광야 그리고 에돔의 경계 지역에 있습니다. 특별한 의미를 가진 지명은 아니지만 유다 지파의 헤스몬과 동일한 지명으로 사용된 것을 볼 때 가나안 땅과 매우 근접한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롯”(Moseroth) 역시 “모세라” (Moserah, 신 10:6)와 동일한 지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세라에서 아론이 죽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아버지를 이어 제사장에 임명된 사건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런데 “모세롯”과 “모세라”는 “결박” (렘 5:5; 사 28:22; 나 1:13)이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이 가까워 오면서 종살이의 결박을 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b. 민 33:31 “모세롯에서 발행하여 브네야아간에 진쳤고”

 

 

우선 “브네야아간”(Bene Yaakan/야아간의 아들들)은 신 10:6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발행하여 모세라에 이르러서는”에서 먼저 언급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빠져있지만 브네야아간은 분명 광야에서 간혹 만날 수 있는 샘(브에롯/Beerot)이 있었던 오아시스입니다.

 

실제 아라바 광야 지역가운데 엘랏 혹은 에시온 게벨(민 33:35, 왕상 9:26)의 북쪽 지역은 비록 광야(아라바)라고 하지만 에돔 산지에서 흘러 내려오는 지하수가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브네야아간”이란 이름을 붙였을까요? 대상 1:42 “에셀의 아들은 빌한과 사아완과 야아간 (Yaakan)”에서 알 수 있듯이 에서의 자손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브네야아간”은 에서의 자손들이 다스리는 땅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c. 민 33:33 “홀하깃갓에서 발행하여 욧바다에 진쳤고”

 

 

욧바다 (yatevata)의 히브리어 어근은 “yitav” (be good/ go well/ pleased)입니다. 언뜻 보기에 발견하기 쉽지는 않지만, ‘토브’(tov) 즉, ‘좋다’라는 말 역시 동일한 히브리어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대표적이지만 구약성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히브리 말입니다: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삼상 24:4)/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삼상 3:36). 욧바다는 아라바 광야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오아시스 지역입니다.

 

 오늘날 ‘요트바타’(yotvata)라는 키부츠가 있으며 그 키부츠에서 운영하는 24시간 휴게소가 있어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의 쉼터가 되기도 합니다.

 

 에일랏(엘랏/에시온 게벨)으로 가는 주요 도로가 있기 때문에 아라바 광야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쳐가는 곳입니다.

 

광야에서 가장 기쁜 일이 무엇일까요? 마실 물이 있고 쉬어 갈 수 있는 쉼터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d. 민 33:34 “욧바다에서 발행하여 아브로나에 진쳤고”

 

 

정확한 위치를 지금은 파악할 수 없지만 아브로나 (avrona)는 욧바다 (33절)와 에시온게벨 (etzyon-gever) 사이에 있어야 한다. 이동 경로에서 욧바다에서 에시온게벨까지 남쪽으로 약 30 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왕의 대로” (King’s way - 민 20:17) 남쪽 시작지점인 에시온게벨 (엘랏)은 아카바만(홍해)의 주요 항구로서 이용되던 곳이었습니다.

 

솔로몬 때에는 배를 만들어 아라비아 반도의 오빌까지 무역으로 했을 만큼 번성한 곳이었습니다.

 

아브로나 (avrona)의 어근인 “avar”는 “어느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다”는 의미로 성서에서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지역 특성상 욧바다와 마찬가지로 오아시스 지역임에 틀림없었고 에시온게벨에 도착하기 전에 거쳐가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e. 민 33:35 “아브로나에서 발행하여 에시온게벨에 진쳤고”

 

 

에시온게벨 (etzyon-gever)은 두 단어 “etzyon”와 “gaver/gever”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tzyon”은 “etza” (council/advice, tree)에서 파생된 낱말이고 “gaver” 혹은 “gever”는 “사람/ 남자”(man)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래서 에시온게벨을 직역해보면 “사람의 충고,” “사람들의 회합,” 그리고 “사람을 위한 나무” 등등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출애굽 경로의 대부분이 오아시스와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에시온게벨” 역시 사람을 위한 나무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바란 광야와 진 광야와는 달리 오아시스 지역이 유난히도 많은 아라바 광야의 지역적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f. 민 33:36 “에시온게벨에서 발행하여 신 광야 곧 가데스에 진쳤고”

 

 

가데스 (qadesh)와 관련된 지역 이름이 구약 성서에서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먼저 창세기 14:7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 (en mishpat - qadesh)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그리고 민수기 32:8 “너희 열조도 내가 가데스바네아 (qadesh barnea)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내었을 때에 그리 하였었나니.”

 

또한 유다 자손의 지파들이 정착한 도시들 가운데 “게데스” (수 15:23 - qedesh)가 있었다.

 

이후에 이방의 땅으로 멸시당한 스불론과 납달리를 “qedesh” (수 12:22)로 부르기도 했다. 실제 “qadesh'”는 가데스와 관련하여 지역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했지만 이방 신전 혹은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던 창기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신 23:17, 왕상 15:12)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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