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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께서 죄의 역사를 지체시키시는 이유 - 5부: 사랑은 믿음을 낳고 ,믿음은 순종을 낳는다.

하나님아들 2012. 9. 18. 15:03


하나님께서 죄의 역사를 지체시키시는 이유 - 5부 


 사랑은 믿음을 낳고 , 믿음은 순종을 낳는다.


마지막까지 주시는 선택의 자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돌아가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과 의향에 관계없이 무조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신 것도 완전한 사랑, 즉 자유의지가 선택한 “사랑의 순종”을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더욱 완전하여졌을 뿐이며, 강제적인 구원은 하늘의 법칙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향과 관계없이 하늘에 간다면, 하늘은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여 그 사랑의 믿음을 행할 수 있는 자들이 거함으로, 또 다른 반역이 없는 영원한 안전과 행복이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하늘에 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재창조 하셔서 지금의 나와 완전히 다른 나로서 하늘에 가게될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적인 추측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단순히 재창조하실 계획이었으면, 이렇게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택의 자유는 죄짓기 전이나, 십자가 후에도 변할 수 없는 하늘의 근본 법칙이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후 인간은 그가 누렸던 자유의지를 잃어버렸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의의 줄은 끊기고 인간 안에 온전히 자리잡았었던 하나님의 의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인간은 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다. 

하얀색만 있었던 인간의 마음은 모두 까만 색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마음은 더 이상 의를 명상하거나 선택할 힘이 없었다. 

인간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롬 6:16)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경륜의 첫 번째 단계로서 인간에게 잃어버렸던 그 선택권을 다시 주시려 하셨다. 

선택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는 것이 하늘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암흑만이 존재하였던 인간의 마음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성과 연결이 되어, 끊어졌던 전기선이 연결되면서 불이 다시 밝혀지듯, 우리 마음에 의의 불이 다시 켜지게 되었다. 

사단의 본부인 “죄의 법”과 싸울 수 있는 하나님의 본부인 “마음의 법”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세워지게 되어,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으로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신 것이다. (롬 8:4 참고)

예수님께서, 선과 악을 알게된, 타락한 인성을 취하여 이 땅에 오셔서 사단의 모든 유혹에서 승리하심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셨다. (창3장, 롬 8:1 참고)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용서함을 받고, 사랑으로 사단의 모든 유혹을 물리침으로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가야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5-16)


사단도 믿음은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갖는 가장 큰 의는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발견이다. 

고행과 자학, 선한 행실로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구교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방황하던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는 귀중한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많은 개혁자들이 나타나 죽음을 불사하고 이 귀중한 진리의 터전을 쌓아 오늘날“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가장 근본적인 신앙의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이 기별은 시대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점차 바뀌어지게 되었고, 사회의 구조와 문화가 변화함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도 변화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단순히 하나의 지식적 동의로서 생각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귀중한 말씀들이 하나의 위인전처럼 느껴지게 되고, 이러한 선구자들의 삶의 방식은 실제로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려 하심”을 하나의 사실로서 인정하는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러한 인본주의적이고 철학적인 추측은 한번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완전히 신비 속에 묻어 버리게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서 2장 14절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고, 이 양심으로 사는 것은 행함의 부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2장 19절은 이 문제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가 하나님을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사단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이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주”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실을 지식적으로 알거나, 인정만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그 나름대로의 믿음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구원은 우리 마음속에 십자가를 통하여 은혜로서 주신 믿음과 양심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마음에 들어와 사랑을 만들고, 

그 사랑이 온전한 믿음을 만들게 되어, 

이 믿음이 우리의 양심이 됨으로, 

우리가 이 믿음의 양심대로 행할 때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은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의 결과를 예수님께서 대신 이루셨다고 자동적으로 우리가 하늘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과 공의를 이해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그분을 믿게 만들며, 

그 믿음으로 우리는 속죄함을 얻고, 

속죄함의 경험은 우리의 사랑을 온전케 하여 

그분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구원을 주장할 것이지만, 

사랑이 충만한 믿음은, 

그것이 구원과 관계없다 하여도, 

사랑의 행위를 기쁨으로 행할 것이다.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합하는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선한 행동이 하나의 벼슬이나 나타내 보이고 싶은 자랑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자연의 법칙, 즉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위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행해지는 업적이 아니고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당연한 행동인 것이다. 

흰색만 있는 곳에서 흰색이 “흰색”으로 불리지 않는 것처럼 

구원받은 무리들에게 선한 행위는 “행위”로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요 14: 23)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자하여 보여주는 사랑이 아니라, 

이미 사랑하여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11 T.W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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