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해서 그들이 믿음으로 바라보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 대한 말씀을 보면서 과연 이삭이 어떤 인생으로 삶을 살았는지 자세하게 알 수 없습니다. 창세기26장, 27장에 나오는 이삭과 리브가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이삭은 다른 믿음의 선진들과 비교하여 특별하게 더 나은 모습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삭은 하나님의 계획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신들의 자녀들 가운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는 약속의 말씀을 들었지만 이삭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이후 분명 에서를 자신의 장자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삭의 모습은 사리분별을 잘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27장은 이삭이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삭이 단지 육신적인 어두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조상들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실 때 모세는 죽을 때 나이가 120세가 되었지만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나이가 많아서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한다고 하는 이 말씀은 육체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말씀이지만 영적으로 상황판단을 잘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육신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이삭만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그리고 기독교 역사 가운데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땅에 매여 사는 것 때문에 영적인 눈이 어두워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두움 속에서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의 한계는 언제나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사는 삶은 육신적이고 육체의 정욕에 사로잡혀 사는 삶입니다. 참되고 바른 신앙의 삶은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데서 시작됩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알고 있었다면 아무리 자신의 아들 에서가 먼저 태어났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 이루실 그 뜻을 찾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고 에서를 사랑했다고 성경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에 그리고 영적인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하는 육체의 소욕을 따른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다가 이제 이삭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에서에게 장자의 복을 물려주려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이삭은 여전히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삭이 신앙적으로 바른 모습을 가졌다면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하였거나, 어떤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삭은 에서를 불러서 자신이 좋아하는 고기를 먹고 에서를 축복해 주려고 에서에게 사냥하여 고기를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죽기 전에 마음껏 축복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는 복중에 있는 자식들이 어떻게 될지를 리브가에게 말씀하였던 것을 리브가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리브가의 태중에 있는 자식들이 큰 민족을 이루고 작은 자는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자신의 남편 이삭이 에서를 종교적으로 이제 축복하여 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하는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리브가는 결국 이삭을 속이고 둘째 아들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모두 다 받을 수 있도록 야곱을 에서인척 만들어 복을 받게 하였습니다. 보통 우리는 이 부분에서 리브가와 야곱의 거짓된 행동을 책망합니다. 물론 리브가와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하지만 에서가 자신의 동생에게 속아 넘어간 것은 진실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에서는 자신의 장자의 복을 기껏 보잘 것 없는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렸습니다.
에서에게는 장자의 복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에서는 육신적인 삶을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몸에 익혀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행한 속임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을 발로 차버리는 이러한 에서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아주 주의 깊게 여겨야 합니다. 리브가와 야곱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을 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와 야곱은 연약한 인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은 이러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점점 변화시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계속 변화시킨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삭이 여전히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 야곱이 에서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끝까지 알지 못했습니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 같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이 정말 어두운 것은 사실이지만 영적인 눈도 함께 어두웠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목소리를 듣고 그 사람을 압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야곱의 목소리인 것을 알았지만 결국 고기를 사냥하여 가지고 왔다는 그 말에 에서로 믿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삭을 계속 잘못된 신앙인으로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삭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의 일을 망쳐놓으려고 했습니다.
이삭의 실패는 그가 어느 정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알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존 오웬은 이삭의 이러한 경솔한 행동을 기도하지 않은 것에서 시작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삭을 변호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삭은 당연히 자신의 장자에게 하나님의 복을 축복하여 주는 것이 마땅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가 나중에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겠지만 야곱의 12 아들 가운데 육신적 장자는 르우벤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에 장자의 권리를 상실하였습니다. 오히려 요셉의 아들들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고 그 가운데 작은 아들 에브라임이 장자의 반열에 오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입니다.
이삭은 좋은 의도로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였지만 그것은 잘못된 경우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은 항상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불신앙이 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웃사가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붙잡은 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법궤는 제사장들 외에 만지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좋은 제물로 번제를 드리려고 아말렉의 진에서 죽이지 않고 가져온 소와 양들은 좋게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어리석은 판단은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만연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나온다면, 교회에 나와 한 번이라도 예배를 드리고 식사도 하면서 교제를 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방식도 물질을 가지고 전도합니다. 교회에 나오고 등록하면 대형교회에서는 금을 주고 상품권도 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들의 어리석은 판단은 결국 주님의 몸인 교회를 무너뜨리는 죄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생각으로 좋은 것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원하시는 방식을 우리가 순종하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는 제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다면 그것은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은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식이 대립되는 그런 싸움입니다. 불신자들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의 싸움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좋은 방법과 의도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성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과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을 때 이삭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심히 떨었습니다. 이삭은 야곱이 에서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 그 놀라운 사건을 알았을 때 이삭은 심히 떨었습니다. 이삭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 때문에 떤 것이 아닙니다. 이삭은 에서가 자신의 장자권을 팔고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을 다시 반복할 수 없다고 에서에게 말해줍니다. 이러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가 그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자신이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는데 결국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을 알고 심히 크게 떤 것입니다. 결국 이삭은 자신이 하려고 했던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하려고 한 것임을 알고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히 떨었던 것입니다. 에서가 자신에게도 복을 달라고 마지막까지 요구하지만 결국 이삭의 축복은 에서가 칼을 믿고 작은 자를 섬기는 삶을 살 것이며, 에서의 후손들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 밖에 축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삭의 이러한 언약적 축복은 야곱을 통해 이루시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아무리 자신의 아들이지만 에서에게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가 이것을 믿음으로 행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결국 믿음으로 축복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야곱이 속였기 때문에 무효라고 할 수 있으며 오히려 야곱을 다시 저주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마지막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믿음으로 큰 아들 에서에게 하나님이 이루실 계획대로 축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이 가진 믿음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지만 이삭은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조정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축복한 이삭은 결국 장차 올 일에 대한 축복을 하였습니다. 결국 야곱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을 축복한 것입니다. 그 계획이란 바로 이삭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야곱이 가진 믿음에 대하여 계속 살펴보면 야곱은 자신의 임종 앞에서 요셉의 아들에게 축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야곱에 대한 인생을 말하려고 한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야곱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우리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그가 자신의 아들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계획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인생의 삶이란 그렇게 순탄하지만 않았습니다. 참으로 굴곡진 인생이었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죽임을 당할 까봐 부모를 떠나 타지로 도망갔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종처럼 일하면서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라헬을 얻어 도망자처럼 또한 나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에서를 만나 지난날 자신의 삶을 용서 받았지만 자식들의 문제로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고 말았습니다. 요셉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을 만나기 전까지 야곱은 요셉을 잃은 슬픔 속에서 살았습니다. 야곱의 믿음이 가장 밝게 빛났을 때 그는 이제 마지막 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였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여전히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장자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손에 그리고 작은 아들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손에 맡겼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에 올려놓고 축복하고 말았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한 것은 우연하게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팔을 엇바꾸어 얹었다는 것은 히브리 원어로 보면 ‘알고 팔을 그리하였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에브라임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임을 알았습니다. 참된 믿음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마지막 인생의 삶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일생을 보면서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붙잡고 살았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고 하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와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증거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다시 말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또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알고 있었습니다. 므낫세이 장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브라임에게 축복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자의 모습이고, 행동인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요셉은 자신이 애굽을 떠날 것을 알고 자신의 뼈를 가나안에 매장하여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요셉은 애굽에서 파라오 다음으로 가장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셔서 요셉은 그야말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로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부모와 형제를 만나 자신의 억울함을 다 해결 받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인도하신 것을 알고 원수 갚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후 요셉은 자신의 자식들이 야곱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더 많은 복을 누릴 것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요셉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계획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을 이룰 만큼 큰 백성들이 될 것이며 결국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을 떠날 것을 알고 자신의 임종 시에 유언으로 남기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죽으면 장사를 지내지만 너희들이 애굽을 떠날 때 자신의 유골을 파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묻힌 곳에 같이 묻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의 유언은 단순한 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예언을 이루는 성취의 유언입니다. 즉, 요셉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단 하나라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유언을 남긴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뼈를 위하여 유언을 남겼는데 여기에서도 요셉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부활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다시 생명의 부활로 일으킬 것을 믿었습니다. 자신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다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유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분명한 곳을 바라보게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적어도 자신의 자녀들만이라도 애굽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고 최고의 위치에서 계속 번성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요셉이 마음만 먹었다면 요셉은 그의 모든 형제와 조카들을 가장 좋은 곳에서 살 수 있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 형제들이 고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곳에서 사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자신들이 가야 할 곳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그들이 영원히 살 곳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뼈를 찾아 출애굽 할 때 가져가라고 한 것입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오직 믿음으로 볼 수 있는 저 너머의 곳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믿음에 대한 말씀을 각각 듣고 있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지만 때론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으로 결정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이 과정 속에서 단 한 번도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살아가도록 나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의 뜻이 변함없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시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환난 속에서도 눈물을 흘리지만 하나님은 결코 성도를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거룩한 백성들로 세워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게 하십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예수를 믿는 믿음을 마지막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지에 대하여 의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이 주는 의심이고 불신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면 성령께서는 믿음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마지막에 믿음위에서 생을 마감하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늘 의심하고, 우리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성도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믿음을 끝까지 주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죽음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과 이별하지만 이미 하늘에 있는 믿음의 조상들을 다 만날 것이며, 잠시 후에 헤어진 가족들과도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고백이어야 할 것입니다.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출처 자기부인../바퀴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성령과 기도 (0) | 2018.10.16 |
---|---|
[스크랩]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은 자기자신이다. (0) | 2018.10.16 |
[스크랩] "예수그리스도" - 진짜 복음 (0) | 2018.10.14 |
마지막 시대의 일곱가지 특징 (0) | 2018.10.09 |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용조 목사 설교 하박국 3 (0) | 2018.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