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지식없는 신앙

하나님아들 2012. 9. 18. 14:32

지식없는 신앙

 

사사기 11:29-40

 

29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37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38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9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40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주로 체험중심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신앙체험 중에는 믿음을 갖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있지만, 체험 그 자체는 믿음의 대상도 아니며 신앙 생활의 핵심도 아닙니다.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를 도를 믿는 믿음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계속 신앙 체험을 믿음의 대상으로 둔다면 그의 신앙은 마침내 곁길로 빠지게 되어 사탄에게 속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지식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깁니다. 로마서 11장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들의 실패는 지식의 부족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기적 체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른 지식을 소유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영생을 얻지 못하는 저주 받은 민족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에 바울은 로마서 10 2-3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라.” 쉬운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에 관해 나는 이렇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습니다만, 그 열심이 지식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9장 끝부분과 10장 앞부분을 함께 보면,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세우느라 복음의 의를 대적하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로 보건대, 구원은 바른 지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아무 것이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비체험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지식을 알고 그 지식을 믿을 때 구원을 얻으며 또한 그 구원이 온전하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참된 기독교는 성경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깨닫는 자들만이 참된 기독교의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에 로마서 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증거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오지 않은 믿음은 다 거짓 믿음이요, 오직 참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즉 복음을 들어야만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거짓 복음 및 헛된 성경 해석에 속지 않도록 성도들에게 바른 지식에서 자라나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7-18).

 

그러므로 믿음이란 신앙의 내용을 알아야 믿을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우리의 신앙은 믿는 내용에 따라 신앙의 옳고 그름이 정하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내용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른 지식이 없는 믿음은 맹신이며 살아계신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과는 무관한 믿음들인 것입니다.

 

최근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생각하며 진리를 탐구하고 공부하는 대신에 점점 더 자극적이고 감성적이고 흥분하는 체험 신앙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 교회 중에는 많은 교회들이 쓰러뜨림의 집회를 허락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쓰러뜨림의 현상을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쓰러뜨리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과 운동이 대형 교회에서도 행하여지고 있고 그들이 쓴 책들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찬양과 율동은 점점 더 길어지는데 기독교 역사 및 교리 공부는 계속 밀려나더니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과 하이델베르그 등의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는 거의 극소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이제 과거 교회의 유산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많은 목사들이 성도들의 반지성주의에 동조하여 복음을 값싸고 단순한 공식으로 만들어 마치 예수님만 영접하고 나면 모든 신앙 생활이 저절로 되는 줄 착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복음의 풍성함과 깊이와 넓이를 아는 자가 드물며 대부분의 성도들은 반지성주의로 획일화 되어 예수님을 믿되 갓난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한국 교회의 특징은 다양한 종교 행사로 바쁜 교회 생활을 하는 것과 또한 군중 심리 및 허영심을 동원한 쉴 새 없는 헛된 열심입니다. 목회자들은 연예인이나 정치자가 되어 버렸고 성도들은 텔레비젼을 즐기듯 목회자들의 쇼와 정치 이슈, 그리고 흥미로운 예배 쇼를 즐기고 있습니다. 실로 가장 무서운 현실은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여 마술과 도닦기를 가르치면서 군중들로 하여금 악령들을 접신하게 하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악한 접신 현상에 대해 바르게 분별하여 분노하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현대 교회는 말씀과 복음에서 떠나 감정과 흥미와 교회 팽창과 군중 심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평생 배워도 신기하고 놀랍고 신비하고 대단한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그 진리의 깊이가 너무 어마어마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성경과 복음을 깨닫는 기쁨입니다. 사실 이 기쁨은 성도들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으로써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인의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 주님과 깊은 영적 교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만일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또한 가장 좋은 것을 잃고 단지 껍질만 맛보는 가련하고 비참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충성이 대단하지만 진리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없는 사사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입다라는 사사입니다.

 

먼저 입다가 등장하는 배경을 봅시다. 사사기 106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악이란 다름 아닌 바알들과 아스다롯,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 자손의 신들,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우상 신들을 섬기게 될 때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면서 망각합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그 대신 온갖 종류의 세상 일들과 쾌락에 관심을 갖고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일과 섬기는 일에 관심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무식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지식이 사라질 때 나타나는 현상은 제 멋대로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본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 소견에 따라 행할 뿐입니다. 그들은 제 멋대로 하나님께 충성하면서 그 충성을 주께서 받든 말든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제 멋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대해 무식한 이스라엘 족속이 세상의 온갖 신들을 섬기는 모습이 오늘 입다 사건의 배경입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시사 이스라엘 족속으로 하여금 18년 동안 암몬과 블레셋의 학대를 받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학대와 고난을 당하면서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자신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사기 10 13-14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이때 하나님의 꾸지람을 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과감히 이방신들을 제거하였습니다. 놀라운 삶의 결단입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회개란 우상을 과감히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 후 그들은 여호와를 진심으로 섬겼습니다.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16). 주께서는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사사기 11장으로 넘어가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암몬 족속의 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사사 입다를 등장시킵니다. 입다는 길르앗이란 동네에서 길르앗이란 사람이 창녀에게서 나은 아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입다는 사생아였으며 자기 엄마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라난 아이였습니다. 입다는 외롭고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내었습니다. 길르앗의 본처에게서 난 아들들이 입다를 심하게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입다는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가정에서 버림을 받고 갈 곳 없는 입다! 세상에서 제일 멸시받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바로 입다였을 것입니다. 그는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인생이 서러웠습니다. 가족도, 집도, 사회적인 지위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없는 거지로 살던 사람이 입다였습니다. 게다가 사생아였기에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에게 버림과 천시를 받았습니다. 그 어린 마음 속에 상처가 얼마나 컸겠으며 또한 자신을 쫓아낸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증오와 미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거지가 된 비참한 입다가 돕이라는 땅에 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잡류, 즉 깡패들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그는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멸시를 받으며 자라난 어렸을 적의 상처를 갖고 있었습니다. 외적으로 비치는 그의 강한 모습 뒤에는 숨겨진 어두운 그늘이 늘 있었습니다. 그는 서러움과 외로움으로 어두웠던 사나이였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용맹하였고 신의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충성심도 대단하였습니다. 어떠한 은혜인지 입다는 잡류의 우두머리로 지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어디서 얻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사기 11장을 보면 입다와 암몬 왕이 대화를 할 때 입다에게 어느정도 성경 지식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명석하였고 품위를 갖추고 있었으며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통찰력도 있었습니다. 입다가 암몬 왕과 전쟁을 치르기 전에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11:27)라고 선포한 사실은 그가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고 심판주 하나님께 전쟁을 의탁하는 장면입니다. 입다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순수한 믿음을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모인 사람들이 한결같이 사회에서 버림 받은 잡류들이었지만 그들을 바르게 인도하였습니다. 단지 입다에게 흠이 있다면 그의 신앙 지식이 온전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믿음의 지식이 온전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11 4절을 보니,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초조해진 이스라엘 자손들이 입다를 찾아옵니다.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8).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고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를 자기들의 지도자와 군대 장관으로 삼습니다. 이때 입다는 과거의 모든 모독과 악감을 버리고 용서와 화해의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입다를 쓰레기처럼 멸시하여 왔던 고향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입다는 믿음으로 악감을 이기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싸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는 믿음에서 나오는 위대한 결단입니다. 개인의 감정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입다의 믿음의 행위를 보셨습니다.

 

길르앗 장로들의 요청에 따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입다는 먼저 암몬 왕에게 전쟁을 피하자고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거하는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암몬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 땅을 지켜 주실 것이니 암몬이 패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몬 왕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 공격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이에 29절을 보니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합니다. 이때 입다는 자신이 암몬 왕에게 선포한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전쟁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쟁터에 서니 그의 믿음은 흔들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고 행하실 때 우리가 할 일은 믿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때도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믿음 밖에 없습니다. 입다는 자기 입으로 암몬 왕에서 선포한 것처럼 하나님이 친히 전쟁에서 싸우실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을 치르기 직전에 흔들리는 믿음 가운데 조건을 붙입니다. “제가 암몬 사람들을 물리치도록 해 주시면, 저는 여호와께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을 바치겠습니다. 제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때, 제 집에서 저를 맞으러 나오는 첫 번째 사람을 여호와께 바치겠습니다. 번제로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입다의 지식없는 서원 장면입니다. 입다는 서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서원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거래하고 있습니다. 입다는 하나님의 승리의 약속을 은혜로 받지 않고 자신이 뭔가를 지불해서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가장 큰 무지입니다.

 

입다는 책임감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승리에 대한 지나친 부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확인해 두고 싶은 강한 욕구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보장 받기 위해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무지에서 나온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얻기 위해 내가 뭔가를 행한 후에 그 행위를 의지하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이 댓가를 지불하여 보장받겠다는 무지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신의 약속을 보장 받으려는 이방 종교적 발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가 서원을 한다면 이는 하나님과의 거래 차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향한 감사 차원에서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입다는 거래 차원에서 서원을 하였습니다. 더 큰 문제는 서원 내용 역시 입다의 무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 서원 내용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암몬에게 이기게 하시면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그를 영접하는 사람을 무조건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지금 입다의 의도는 정확히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고 금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의 뜻과 자명하게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18:21; 20:2). 사람을 번제로 바치는 것은 그 당시 전쟁 승리를 보장받기 위해 이방인들이 그들 신에게 행하던 종교 관습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지금 입다가 전쟁하는 암몬 족속이 자신들의 신 몰렉에게 사람을 불로 태워 드리는 악한 이방 풍습이었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히브리서가 입다를 믿음의 영웅으로 부르고 또한 암몬과의 대화에서 입다의 성경 지식이 나타난 것을 참조하여 이 구절을 무리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평범하게 읽으면 그 의미 전달에 있어서 앞뒤로 전혀 하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입다의 서원은 사람을 불로 태워 번제로 드리는 것이 확실합니다.

 

아무튼 지금 입다는 자신의 서원 내용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아닌지는 관심 없습니다. 단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약속했으니 의리있는 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든 말든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서원하였으니 전쟁의 승리를 분명하게 허락하시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승리를 주시는 이유는 전혀 서원과 무관합니다. 그가 서원을 하든 말든 하나님은 이미 암몬 족속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입다의 서원은 전쟁 승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쓸모없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입다의 이 지식없는 서원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입다는 암몬 군대와 전쟁을 치룬후 위대한 승리를 안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를 처음으로 맞이한 사람은 다름아닌 입다의 외동딸이었습니다 (34-35)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며 입다의 외로움과 상처를 잊게 하였던 귀한 딸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환난에서도 이쁜 외동딸을 보며 위로를 삼던 입다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난리입니까?

 

하나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기 멋대로 맹세한 서원 때문에 가장 즐거워야 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맘껏 찬양하고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순간이 도리어 가장 비참하고 가장 슬픈 고통의 순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두 달 후 그 아버지에 그 딸입니다. 강직하고 의리있고 내뱉은 말에 대하여 취소하지 않는 꿋꿋한 아버지와 그러한 아버지의 서원을 그대로 따르는 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11:38-40).

 

이제 사사기 12장으로 넘어오면 이 세상에 가장 귀한 외동딸을 잃고 슬픔과 외로움과 비참에 빠진 입다를 에브라임 족속이 찾아와서 야유하고 도전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에브라임 족속이 입다를 찾아와서 따집니다. "사생아 주제에 어떻게 그런 엄청난 승리의 영광을 혼자 누릴 수 있느냐? 왜 전쟁을 치를 때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에브라임 족속의 야유는 입다로서는 견딜수 없는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서러운데 그 동안 깊게 싸였던 원한과 분노가 서러움과 함께 폭발해 버리는 순간입니다. 입다는 곧바로 에브라임과 전쟁을 치릅니다. 입다는 에브라임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를 하지만 그 분노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간신히 살아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들마저 다 죽이게 됩니다.

 

입다는 부하들를 시켜 요단 나루턱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에브라임 족속에게는 오직 그 길 외에는 도망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루턱을 지키는 입다의 용사들이 강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십볼렛”이라고 말하게 합니다. 에브라함 사람은 십볼렛을 발음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투리 발음으로 “시볼레”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면 입다의 부하들은 그 자리에서 에브라임 사람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입다는 자신의 형제 에브라임 사람들을 악랄하게 죽였습니다. 이 전쟁은 형제간의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4 2천명이 죽었습니다.

 

4 2천이란 숫자는 엄청나게 큰 숫자로서 하나님의 큰 심판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민족이 간음하였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자가 2 3천이었습니다. 고라 사건으로 하나님을 향한 반란 및 반역 죄로 죽은 수가 1 4700명입니다. 그러나 지금 입다의 손에 죽은 수는 그보다 훨씬 많은 4 2천이나 됩니다. 이 후 입다는 겨우 6년을 더 다스리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신 것은 주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입다의 경우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무지한 주의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 입다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입다를 통해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조롱하는 암몬을 치셨지만, 동시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고 나아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거래하려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입다 사건을 정리해 보면 그는 진정으로 의리있고 충성스런 장군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나아가 무남 독녀까지 바쳤던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지식 없는 서원을 하였고, 그 결과로 인하여 참된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 슬픈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의 충성은 확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식은 불확실하였습니다.

 

오늘 입다 사건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음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부지런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여야 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여호와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6:3, 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중보자를 통해 알아야 합니다. 그 중보자는 우리의 죄값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주 예수님을 부활시키셔서 우리의 왕과 대제사장과 영원한 선지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며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갈 때 우리는 요동하는 이 세상에서 죄악과 이단에 물들지 않고 넉넉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이 세우신 말씀의 종에게 배우기 바랍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복음을 위해 쓰임받은 주의 종들의 작품들을 읽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성경을 읽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알아가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함께 자라나 반드시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목사

(인천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010-7732-5600

oswaldchamber@gmail.com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오스왈드 챔버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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