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를 찾아옵니다.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믿게 된 이유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다”(2절)고 니고데모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어떤 예수의 표적을 보았다는 것일까요? 이를 확인하려면 2장 23절을 읽어야 합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23절).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이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등의 일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이런 표적들을 행하는 이를 하나님의 구원자로 믿겠지요. 니고데모는 그 표적을 보고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인 줄 믿은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들의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밤에 혼자 예수를 찾아왔지만, 혼자의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 압니다”(2절)는 말에서 짐작되듯이, 그는 자신과 같은 의견을 지닌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다짜고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anothen,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필시 “어떻게 해야(무엇을 해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겠습니까?” 라는 니고데모의 질문이 먼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물음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지닌 최우선적인 관심사입니다. 예수께 왔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는지’를 반복적으로 묻는 것과 같은 맥락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위로부터”(anothen)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남(중생)으로 듣습니다(4절). 헬라어 anothen의 여러 뜻 중 “다시(거듭)”의 의미가 있긴 하지만, 이 말의 첫 번째 뜻은 “위로(up=ano)부터(from=then)”입니다. 대개의 성서학자들도 “위로부터”의 의미를 지지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의 말씀을 곡해한 것이지요.
예수의 말씀을 청중들이 잘못 알아듣는 경우는 성서에서 빈번하게 발견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의 말씀을 곡해하게 되는 이유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나라(영생)를 볼 수 있는가?”하는 전형적인 바리새인의 관점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주체가 나(인간)라고 할 때 그것은 인간의 일(땅의 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땅의 일이 아닌 까닭에, 이를 땅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거듭(다시) 태어난다”로 해석해버린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태어난다”는 것은 완전한 수동(受動)의 사건입니다. 내가 태어난 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낳는 분(어머니)이 생명을 주는 것이고, 태어나는 아이는 생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태어나는 자의 의도나 의지나 노력이 작용할 여지가 없습니다. 태어난 자는 일방적으로 태어남을 “당한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남”도 그렇지만, “거듭 태어남”에서도 “태어나는 나”가 해야 몫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사로잡힌 니고데모는 당황스러워 하면서 묻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4절)
예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절)고 말씀하십니다. “위로부터 태어남”은 “물과 성령으로 남”으로 부연 설명됩니다. “물과 성령”은 복음서에서 세례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물로 세례를 받으셨고, 세례와 더불어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였습니다(마3:13-17; 막1:9-11; 눅3:21-22). 여기서 끝나지 않고, 세례 받으신 예수를 지목하여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늘이 선언합니다. 따라서 물과 성령은 세례 사건이며, 세례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임이 확인되는 사건입니다. 곧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고, 이는 물과 성령의 사건인 세례를 통하여 주어지는 태어남(출생)입니다.
누군가의 아들(자녀)이 된다는 것은 출생과 함께 주어지는 지위입니다. 그것은 어떤 노력이나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누구의 자녀인지를 확정하는 것은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는 것은 아버지입니다(마1장의 족보).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분의 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를 아들이라고 선언하심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위(하나님)로부터 태어나는 것이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의 신분은 혈통에 따라 부여됩니다. 아니면 인간적인 노력과 성취로 자격과 신분을 취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라는 물음은, 아래로부터의 노력을 통하여 위로 상승하여 하나님나라의 신분을 얻겠다는 전제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의 신분(하나님의 자녀 됨)이, 땅에서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은혜로 주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이들입니다(1:13). 육(혈통, 육정, 사람의 뜻)이 아니라, 영(하나님)으로 난 이들입니다(6절).
그래서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위(하나님)의 일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역할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는 바람이 부는 것에 있어 내가 할 역할이 없음과 마찬가지입니다(8절). 바람은 임의대로 (은혜에 따라) 불지, 논리와 예상에 따라 불지 않습니다. 이처럼 “위로부터 태어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는 물음 자체도 성립이 안 됩니다. 니고데모의 오해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생명을 부여하시는 것이고 사람은 그냥 받습니다. 무엇을 해서 다시 받는 생명이 아니라, 선물로 받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복 받을 행동을 해야 복을 받는다는 세상(니고데모)의 지혜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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