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스크랩] 찬송의 의미와 실질

하나님아들 2018. 9. 16. 22:31

 찬송의 의미와 실질


 

(엡 1:3-14, 시 69:26-36, 벧전 2:9) 

1. 찬송의 의미

* 신행과 의미와 문제

어떤 신행을 행할 때에는 그 신행을 통해서 하나님께 표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알고서 해야 합니다. 제 의미를 담아서 해야 하는 것이지 아무런 의미 없이 하거나, 다른 의미로 대체해서 한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신행으로서 마땅한 의미와 가치가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행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은혜들을 누리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해악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찬송할 때에도 그저 많이만 하거나 열광적으로 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찬송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명확히 알고서 의미있게 해야 의의가 있습니다.

□ 찬송이란, 하나님의 영광스런 성품과 기이한 행적을 선포하고 자랑하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찬송이 무엇인지, 그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른 의미를 담아서 찬송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선 대표적인 몇 구절을 찾아 보겠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 할지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시 96:1-7)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시 34:1-3).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벧전 2:9).

이상의 말씀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찬송이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품성과 기이한 행적을 송축하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영광과 권능과 능력과 지혜를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과 능력과 아름다움과 영광을 “자랑”하는 것이요 그분이 하신 광대한 일들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송축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2. 찬송의 실질

⑴ 찬송이라는 의식(儀式) 속에 실질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입을 벌려 ‘찬송가’를 부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런 품성과 기이한 행적을 송축하고 자랑합니다. 이렇게 일정한 가사와 곡에 표시된 사상과 정서를 따라서 입술로 찬송을 부르는 것은 일종의 의식, 틀을 통해서 실질을 표시하는 신행입니다. 따라서 찬송을 부르는 신행 속에는 항상 그 실질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입술로 찬송을 부를 때에 그 찬송의 가사와 곡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스런 품성과 기이한 행적을 높이는 사상과 정서를 품고서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사상과 정서가 살아나지 아니하고 입술로만 부른다면 거시에 찬송의 실질이 없게 됩니다.

찬송을 습관적으로 부르거나,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 부를 때에 찬송의 실질은 없이 부르게 됩니다. 찬송가의 가사와 곡에 담긴 사상과 정서를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품성과 기이한 행적을 음미하면서 송축하고 높이는 심정으로 불러야 찬송으로서 실질이 있게 됩니다. 의미있고, 실질이 있게 불러야 하나님께서 반드시는 찬송이 되고, 본인에게도 하나님을 높이는 정서가 더욱 함양되어지는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⑵ 인격과 행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스런 품성을 드러내고 높이는 찬송의 실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자랑하고 높이는 입으로 외친다고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격과 삶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덕을 선전하는 사상과 정서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인격과 행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스런 품성을 드러내어 선전하는 실질이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이나 거룩한 나라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 수 있겠습니까? 입으로 외친다고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인격과 행실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성도 각자가 제사장과 같이 거룩한 인격과 행실이 있고, 교회적으로도 거룩한 나라로서의 거룩한 문화와 풍습과 정신과 교회안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선양되는 것입니다.

① 우리의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성품을 드러내며 살아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실질이 있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대제사장으로서 하셨던 기도 가운데서 그 점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시면서, 주님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혀 주시고, 제자들에게도 덧입혀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요 17:2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성부 하나님께서 갖으신 영광을 아들 주님께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아들 주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중생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씨와 같은 형태로 수여 받았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니라!”(요일 3:9).

그러나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감으로써 점점 더 충만히 그 영광을 더욱더 충만히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인품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품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품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품성, 즉 그리스도적인 덕성이 발휘되기에 적응하게 자꾸 우리의 인품이 개조되어 가야 합니다. 더욱 신령한 인품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발휘되기에 적응한 그릇으로 닦여져 가야 합니다.

“.....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下-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

“이로서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② 우리의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을 드러내며 살아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실질이 있는 삶입니다.

자식들은 인품만 아니라 행실로도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욕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행실이 의의 열매로 가득하게 될 때에 거기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되고, 본인은 물론 이거니와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의를 찬송하도록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11).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실질적인 삶의 내용은, “의의 열매”가 가득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가운데 가득하게 맺어지는 “의의 열매”를 보고, 거기서 ‘하나님의 의’를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아는 우리들에게서 맺어지는 품성을 보고서 하나님의 품성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어 하나님의 이름을 선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의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노래해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의 의가 선양되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노래하지만, 행실에서는 불의로 가득하다면 하나님의 의를 짓밟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의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의를 선양하고 의를 선양하고 살아가는 찬양의 실질이 있으면서 그 실질을 담아서 입으로 노래할 때에 그 노래가 찬양으로서 가치가 있게 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이로서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2, 17).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세상 사람들은 주의 어떠하심을 우리의 어떠함 속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믿는 성도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때에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역시 주믿는 사람은 다르다!”고 감탄하며, 결국 주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높이게 됩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함이라!”(벧전 2:9, 12).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갖을 때에, 그 선한 행실로 인하여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찬양입니다.

○ 삶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실질이 없이 하는 찬송이라면 찬송으로서의 의의를 상실한 것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아름다운 찬양을 부른다고 해도 인격과 행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실질이 없다면, 그러한 찬양의 껍데기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선전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인격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여야 하나님께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고 하지만 인격과 삶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멸시를 받게 한다면 결코 찬양으로서의 실질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격과 삶의 실질이 있으면서 하는 찬송만이 찬송으로서의 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요사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고 찬양 집회들이 여기 저기서 성행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찬송을 하면서 실지 인격과 삶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실질이 없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입으로는 찬송을 열심히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행실을 드러낸다면, 어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선양(宣揚) 되겠습니까? 인격과 삶속에서 찬양의 실질을 회복하여야 우리가 입으로 드리는 찬양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인격과 삶으로 드리는 찬양의 실질을 담아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입으로는 천지가 떠나갈 듯 찬송하면서도, 행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그가 하는 찬송은 ‘하나님의 찬양하는 실질’이 없이 외형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큰 소리로 목청을 돋우어 하나님을 찬양한다 해도, 행실로는 흑암에 머물러 있거나, 불의의 열매를 맺고, 악한 행실을 드러내며, 빛과 소금의 맛을 잃어 버릴 때,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찬양중에 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실질이 담겨져 있는지 자신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목청을 높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해도 삶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삶의 실질이 없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3

구약의 제사로부터

찬송의 정신을 배워야 함

(히 13:15-16, 레 6-7장)

첫 시간에는 찬송해야 할 정당한 이유와 목적, 그리고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고, 두 번째 시간에는 찬송의 실질에 대해서 생각하였습니다. 오늘은 찬송이 가지고 있는 성격과 정신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히13:15-16에 보면 찬송에는 제사로서의 성격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5-16)

여기서 ‘찬미의 제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에는 제사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찬송을 찬송을 할 때에 구약 제사에 담겨있는 정신을 담아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제사들 속에 담긴 정신들을 잘 터득하여 그러한 정신들을 담아서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1. 문맥 이해(9-14)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마라는 경고 !

⑴ 식물인가 은혜인가 ?(8-12).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서한을 보내는 교회안에는 아마도 그릇된 가르침이 퍼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9절). 저자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독자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던 문제였으며, 모든 사람이 그것에 영향받을 위험성이 있었으며 어떤 이는 이미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이 있는지는 우리들로서는 상상하는 것 이외에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우선 근본적인 사실로서 저자가 참다운 영적 힘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그것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한 것에 유의 해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이 서한을 쓰고 있는 교회 안에는 식물에 관한 규범을 너무 지나치게 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음식은 주의 몸과 무슨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 그 교회 안에 있는 일부 사람들은 성찬식이나 일반 회중의 회식같은 것이 있을 때에 주님을 위해서 성별된 식물을 먹으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성별된 식물을 먹으면, 그리스도의 몸이 자기 안에 들어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희랍인들의 종교에 있던 생각입니다. 희랍 사람은 신에게 제물을 드리면 그 고기의 일부를 되돌려 받아 신전에서 벗들을 초청해서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제사 드린 음식을 먹으면 신이 그 고기 안에 있어서 사람의 체내에 들어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고기와 더불어 신의 생명이 인간의 몸과 마음에 들어 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희랍인들이 이러한 생각을 그리스도교에 가지고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식물이 그리스도를 사람의 체내로 인도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안에 들어오신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쓰여 있는 것은 성례를 지나치게 강조한 것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성례에 대해서는 아무런 것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성례에 관한 것은 이 서한의 제작 계획 속에는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도 퍽이나 이른 시기인 이 서한이 쓰여진 때에는 이미 성례 자체가 자동적으로 변화를 초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성례라는 것은 그것 자체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성례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신앙과 만나게 될 때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었을 는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히브리 기자는, 중요한 것은 ‘식물’이 아니라 ‘신앙과 은혜’라는 사실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⑵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13-14).

히브리 기자는 이어서 13-14에서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심과 같이 그리스도인도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인간이 사는 세계에서 추방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도 역시 범죄인으로서 비난당하고 위법자 속에 넣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이 세상의 생활과 떨어져서 이 세상의 문 밖으로 나아가서 그리스도가 받으신 비난을 달갑게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합니다. 여기 지상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도성을 찾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분리와 고립과 치욕을 경험하지 안으면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이 세상이 주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은 취급을 당한다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⑶ 어떠한 제사를 드려야 하는가?(15-16).

이어서 히브리 기자는, 그리스도인이 성례로써 그리스도의 제사를 다시금 드릴 수 없다고 하면 도대체 어떠한 제사를 드려야 하는가에 대해서 15-16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제사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15에는 “항상 드리는 찬미의 제사”라고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로서 찬양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16에서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는 제사”라고 합니다. 선한 행실이라는 삶의 열매로 드리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례를 통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입술로 찬양하거나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미를 바로 이해하려면 제사가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찬미하는 사람들이 담아서 드려야 할 정신은, 구약 시대에 제사드리던 정신 속에서 배워야 합니다. 찬송의 내용으로서 어떠한 것들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지를 여러 제사 속에서 배워야 합니다.

2. 구약 제사의 종류와 각 제사에 담긴 정신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그 속에 다양한 정신들을 담아서 표하였습니다. 제사에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각 제사에 담긴 정신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⑴ 속죄제와 속건제(레 6:24-7:10).

첫째는 죄에 대한 제사인데, 주로 죄를 짓고 죄에 대해서 속량해 주시기를 바래서 그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혹은 남에게 잘못했으면 그 일에 대해서 그 허물을 자시가 보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속죄에와 속건제가 있습니다. 이 둘 다 속죄를 구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⑵ 번제(레 6:6-13).

그 다음은 속죄의 큰 의미를 거기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자기를 전부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정신을 겸하여 확실히 발휘해서 터럭 끝 하나라도 남김 없이 다 태워서 드리겠다 해서 ‘태울 번(燔)’자를 사용하여 번제하고 하는 제사를 드립니다. 이 번제에는 헌상의 정신이 있습니다. 자기의 전부를 헌신하는 고백을 담아서 표하는 것입니다.

⑶ 소제(레 6:14-18).

그 다음에는 소제라고 해서 평소에 매일 매일 자기가 먹는 떡을 빚는 고운 가루를 드려서 제단에다가 놓는 제사가 있습니다. 곡식을 완전히 빻아서 드리는데는 큰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과 매일 매일의 자기의 행진, 행보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한 부분도 자기가 살아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입니다.

⑷ 화목제(레 7:11-21).

그리고 그 단계를 넘어가서 마지막에는 화목제 혹은 평안제라는 제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제물을 받으신 것으로 확인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드린 자에게 주시면 드린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와 자기 식구들과 함께 앉아서 그것을 먹게 하시는 제사입니다. “네가 나에게 주었는데 나는 이것이 내 응식(應食), 나의 먹어야 할 식물이니까 내가 참 잘 받았다! 너도 나하고 함께 먹자!”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화해, 교통, 그 화기 애애한 가운데 거룩한 교통을 하는 이것이 제사에 있어서 정점입니다.

3. 찬미가 제사라는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

⑴ 찬송할 때에 제사의 정신을 담아서 드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찬송은 제사에 담긴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속죄의 의미, 자신을 전적으로 드린다는 헌상의 의미, 자신의 매일 매일의 삶을 온통 드린다는 성별의 의미, 하나님과 기쁨을 나누고 교통한다는 의미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할 때, 거기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① 사죄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죄를 자복하고 사죄를 구하는 심정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②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겠다는 헌신의 고백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받아 주십사 하는 간절한 심정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③ 자신의 모든 삶과 인생의 행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심정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④ 하나님과 화목하는 기쁨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지금 예배시에 찬송 중에 이러한 정신들이 잘 들어 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정신들이 잘 담겨 있다면, 그 찬송은 예배시에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으로서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의 정신들이 결여되어 있다면 찬송으로서 적합지 않은 것입니다.

⑵ 엄밀한 의미에서 찬송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

모든 찬송이 전주 다 하나님 앞에 직접 드리는 것이 반드시 되는 것은 아니나, 제사라는 의미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직접 드리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예배시에 드리는 찬송은 하나님께 직접드리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찬송이어야 합니다. 그 시가 하나님을 직접 기쁘시게 하려는데 집중하는 정신으로 모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걸하고,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개탄하고 하나님 앞에 무엇을 조르고 하는 것으로 쓰지 않아야 합니다.

시 가운데는 형제를 부르는 시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시도 있고, 또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간구하는 시도 있고, 감사하는 시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적당한 찬송은 그 가사나 시가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을 기리고 모시는 글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찬양하는 것으로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여러 가지 은혜를 생각하고 주는 어째서 나에게 이렇게 평안한 마음을 주셨는가 감사하다고 그런 찬송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하나님 당신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과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또 하나님의 기이하신 지혜와 능력과 거룩함을 찬송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그 도덕적인 속성 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또 하나님의 그 무소부재와 무소불능하심과 같은 독특한 속성들에 대하여 언급해서 찬송을 하는 것이 예배시에 적당한 찬송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해주신 내용을 가지고 그분의 그분 되심을 찬양하는 것이지. 주관적인 체험에 의해서 갖게된 하나님의 대한 지식에 의해서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객관성이 결여되고 자꾸 자기의 주관적인 사건이나 체험에 근거한 내용들을 공동체가 한께 공유하여서 드릴 예배찬송으로는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 드릴 때는 공동으로 발하는 소리이기에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모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 되심을 찬양하여야 합니다. 설교에 적당한 말을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공동으로 하나님께 직접 돌려야 할 내용을 담아서 드려야 합당합니다.




○ 그러나 신령한 노래도 있습니다! (엡 5:19).

이렇게 사람에게 무엇을 호소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개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 직접 부르는 찬송은 주로 예배시에 사용하기 때문에, 소위 ‘예배찬송’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꼭 직접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꼭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찬송이 아니더라도,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하고 감격해서 노래로써 그것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령한 노래’라고 합니다. 주로 주관적인 체험의 내용이 담긴 노래요, 복음을 전하기 위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몇 사람이 모일 때까지도 꼭 예배찬송만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신령한 노래도 자꾸 부를 대 신령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으로 흠이 없어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이 흠이 있든지 비리 먹었든지 못쓰게 된 것은 절대로 안 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것이라야 합니다. 또 제사를 드리러 가는 제사장도 흠이 있는 사람은 제사 드리는 권리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레21:16-24). 흠이 없고 온전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따라서 예배시에 찬송을 드릴 때도 하나님께 드리기에 흠이 없이 적합한 가사와 곡으로 된 찬송을 선별하여 최상의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시에 주관적인 체험이나 개탄하는 내용이나 다른 사람에게 호소하는 식의 신령한 노래나 복음송을 불러서는 안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직접 드리기에 적합한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찬송하는 사람에게도 찬송하기에 흠이 없도록 마음가짐이나, 행실을 잘 갖춰서 드려야 합니다. 찬송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행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실질이 없다면 찬송하는 사람으로서 흠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지난 시간에 드린 말씀과 관련된 얘기입니다. 삶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의 실질이 없이 입으로만 찬양한다고 하나님께 찬양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4

찬송어의 의미 ①

- 할랄 : 칭송과 자랑 -




지난 시간에는 찬송이 제사로서 갖는 성경에서 찬송이 어떠해야 하는지 몇 가지의 교훈을 얻었습니다. 찬송에는 제사의 정신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찬송하는 자는 제사 드림에서 찬송하는 정신을 터득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죄를 구하고, 자신을 헌신하고, 삶의 구체적인 영역을 성별되게 헌상하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는 정신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내용으로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독백하듯이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식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께 올리는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나 및 사람이 모여서 신령한 노래들을 자꾸 부르는 것도 신앙에 아주 이익하다는 사실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드리는 자나 찬송 자체에 흠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찬송을 드리는 사람이 찬송하는 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정당하게 갖춰야 하고, 찬송하는 극이나 가사 자체도 하나님께 찬양하는데 적합한 것을 선별해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찬송할 때마다 제사 드림의 정신을 잘 담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신, 구약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여러 찬송어(讚頌語)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살피면서 찬송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성경 원어는 한양에 대해 아주 다양하고 풍부한 어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찬양, 찬미, 감사, 송축, 찬송, 존영 등으로 번역되어 있는 이들 찬양어들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과 하신 일들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높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상황과 동기, 과정 및 결과에 있어서는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 이 다양성을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부딪히는 여러 상황이나 환경을 극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찬양어들 중 중요한 것 몇 가지를 통해 하나님 나라 안에서 찬양이 가지는 구체적인 의미들을 확인하고, 우리가 구체적인 삶의 어떤 상황에서 그것을 누릴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할랄’의 찬양에 대해서 생각하겠습니다.

1. 구약에 가장 많이 사용된 ‘할랄’이란 찬양어의 의미

⑴ ‘할랄’은 하나님을 칭송하고 자랑할 때 드리는 한양입니다.

성경의 찬양어 중 가장 자주 등장하면서도 핵심적인 단어는 “떠벌리다, 주책이 없이 굴다”와 같은 뜻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마음이 온통 빼앗겨 그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고 흥분된 마음이 일기도 사여 때로 좀 주책 없이 굴기도 하지 않습니까? “할랄”이 바로 그런 찬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로인한 벅찬 감격이 흘러 넘쳐 남 보기에 바보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열렬히 자랑하는 것입니다.




‘할랄’이란 한마디로 거품을 품고서 ‘자랑’하고 ‘칭찬’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본인 앞에서는 ‘칭찬’(칭송)을 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랑’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 대한 감격이 있어서 감격적으로 반응을 보이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칭송하게 되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랑하는 것으로 감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⑵ ‘할렐루야’란 “여호와를 칭송하고 자랑하자!”고 권면하는 말입니다.

할렐루야는 할랄의 한 형태인 ‘할렐루’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한 형태인 ‘야’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를 찬양하라!’ 입니다. 이것을 할랄이 가지고 있는 뉴앙스를 살려서 달리 표현한다면, ‘여호와를 칭송(자랑)하라!’가 됩니다. 너무나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감격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자랑하면서, 여러분도 ‘여호와를 칭송하고 자랑하십시오!’라고 외치는 감격적인 외침입니다.

따라서 할렐루야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가 강하게 느껴질 때 거의 저절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이며, 하나님의 현존과 그 능력 앞에서 솟구치는 놀라움과 기쁨과 감격의 외침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강렬히 의식되어 그 놀라움을 도저히 말로 표현할 우 없을 때 우리 안에서 분출되는 찬탄의 소리가 바로 할렐루야입니다. 그래서 헨델의 메시야 중에서 유명한 합창과 ‘할렐루야 코러스’가 처음 연주되었을 때에 그 자리에 입석했던 국왕이 너무나 장엄함에 자신도 모르게 기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이 “할렐루야 코러스”가 연주될 때에는 기립하여 듣는 습관이 있습니다. 요사이에는 그런 의미도 없이 그저 관례처럼 기립하여 듣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든 위대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식할 때 당연히 그리고 언제나, 영원히 일어나야 할 반응, 그것이 바로 ‘할렐루야’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어느 나라에서나 번역하지 않고 ‘음역’을 하고 있습니다. 만국의 공통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나 ‘할렐루야!’하면 서로 통하는 감정이 같기 때문에 구태여 번역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그 의미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할렐루야’가 담고 있는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할렐루야!’라고 외치면 막연하게 “여호와를 찬양하라!” 뜻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좀더 구체적으로“여호와를 칭송하라!” “여호와를 자랑하라!”의미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2. 과연 하나님을 자랑합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더 자랑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할렐루야’를 외치고 부르기는 잘 하면서도 실지로는 하나님을 자랑하기 보다는 다른 것을 더 자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기서 “나는 과연 하나님을 자랑하는지, 아니면 다른 것들을 더 자랑하는지?” 자신을 살펴야 할 줄 압니다. 여러분이 거품을 품고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이 무엇이고, 누구입니까?

하나님 이나 하나님께서 하신 일보다는 자기가 가진 어떤 것을 더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아름다운 집이나, 재능이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며느리나,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나 그들의 작품을 더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지식이나, 명예나, 건강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자랑하는 것들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러한 것들을 자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거품을 품고서 주책없이 자랑할 것들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거품을 품고서 자랑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믿는 성도인 여러분은 그런 것들을 자랑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일을 자랑하기 보다는 자기의 교회의 건물이나, 시설이나, 자기 교단이나, 교회 이름이나, 자기 교회의 지도자나, 전통을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그런 것들을 더 자랑하면서, 입으로는 ‘할렐루야!’라고 습관적으로 외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할렐루야!’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자신이 하나님이나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자랑하기 보다는,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들이나 모임, 교회, 책을 더 자랑하였던 것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통회하면서 다음과 같이 간구하였습니다.

"사람을 자랑하고,

책을 자랑하고,

전통을 자랑하던 구습을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만 자랑하는 새 습관을 갖게 하소서 !

주님의 위대하심을 보게 하소서 !

주께서 하시는 위대한 일들을 보게 하소서 !

그리고 자랑하게 하소서 !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게 하소서 !

정신없이 지껄이게(?) 하소서 !

오직 하나님을 자랑삼아 보게 하소서 !




선조들의 아름다운 신앙과

그들이 물려준 좋은 유산들을 귀하게 여기고,

자랑스러운 것으로 받아서 계승하게 하소서 !!

그러나 그분들에 대한 존경과 자랑에 가려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하신 일들을

칭송하고 자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




이렇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자랑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일을 자랑해야겠다는 소원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신앙의 선조들도 모두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자랑하였던 모습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 다윗 왕

다윗 왕은 수없이 많은 시와 찬미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자랑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15:2절을 보십시요 !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할랄’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할랄’할찌어다”

○ 바울 사도

사도 바울도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복음만을 자랑하였습니다. 바울이 실라와 함께 제2차 전도여행 시에 억울하게 매를 맞고 쇠고랑을 차고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주님을 찬양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가장 귀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과 그 분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상)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라 !...”(롬 1:16)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거나, 바둑이나 야구 또는 학문이나 예술에 종종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 것을 잘 용납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에는 질색을 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반하지 않고는 입에 거품을 품으면서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삶속에서 얼마나 하나님 자랑하고, 주님을 자랑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 후, 하나님께서 그것보다 얼마나 더 중요하고 귀한지를 묵상하십시오 ! 하나님 외에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집착하고 있는 사람이나 다른 대상 위에 하나님을 올려놓으십시오 !그 때에만 하나님 자랑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자랑하고 싶지만, 그저 막연히 “하나님 당신은 위대하십니다. ! 정말 위대하십니다. !”라고 말한다고 해봅시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칭송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위대하다고만 할게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구체적으로 들어서 칭송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내가 어떤 독창회에 갔다고 해 봅시다. 연주가 다 끝난 후 그에게로 가서 “나는 당신을 칭찬합니다. 정말 칭찬합니다”라고 말한다고 해봅시다. 이것은 칭찬이 아닙니다. 나는 그의 어떠한 점을 칭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은 훌륭한 성악가입니다. 당신이 노래 부르기 시작하자 내 마음은 온통 당신의 노래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도 쳐다보았는데 그들도 온통 당신의 노래에 취해 있었습니다. !”

자기의 아이와 함께 길을 가고 있는 한 부인을 보았다고 합시다. 내가 달려가서 난데없이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고 “오, 부인 저는 부인을 흠모(찬양)합니다. 흠모합니다. 진정 흠모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녀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마도 “미친 사람이군!”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실례합니다! 부인께서 이 아이의 어머니이십니까?”라고 한다면, 그 부인은 순순히 “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흠모라는 말을 한마디도 쓰지 않고서도 그 부인을 칭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귀여운 아이입니다 !

아이가 참으로 준수하게 생겼습니다 !

이런 아들을 두셔서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

한 미술가 다가가서 “오,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존경합니다 !존경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는 다른 길로 달아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때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여기서 선생님의 그림을 쭉 감상했습니다. 컵을 든 손을 묘사한 기법이 너무 훌륭합니다 ! 마치 액자 밖으로 손이 나와서 이리 앉아서 이 컵을 받으라고 권하는 것 같습니다 !”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얼마나 많이 그러나 아무 뜻도 없이 ‘찬양’이라는 말을 사용합니까? 우리가 쓰는 말들은 빈 상자처럼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왜 주님을 찬양하십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묻겠습니다. “왜 할렐루야 !”라고 합니까? “왜 주님을 찬양하자”고 합니까? 그렇게 물으면 별 까닭도 없고, 내용도 없이 “할렐루야!”라고 자랑했던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왜 칭송하고 자랑하라고 합니까? 오늘 본문 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찌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찬양하는지 반드시 알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말만 의미없이 되풀이하면서도 주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자기 기만에 빠져 있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랑하거나 칭송할 수 없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지런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배워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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