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말씀!! 한번 더 !!!

[스크랩] 장로교 개혁신학의 특성들

하나님아들 2018. 6. 8. 23:07

장로교 개혁신학의 특성들 

                            “장로교인들은 무엇을 알고 믿어야 하는가?”


들어가는 말

한국 기독교 안에서 여러 종류의 교단(교파)들이 있습니다. '가족 은유'(family metaphor)로 말하자면 한 부모아래 있는 형제자매들과 같습니다. 한 부모 아래 여러 자녀가 있는 것 처럼 기독교 교파들은 하나님의 여러 자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에 있어서 공통분모를 갖고 있으면서도 나이와 생김새와 억양과 기질과 성품에 있어서 서로 다른 형제자매들이라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잘났다고 으스대거나 다투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서운해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장자교단이니, 내가 너보다 크니, 우리가 정통이니 하며 다툴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좌우간 한국의 기독교 안에는 다양한 교회와 교파가 있습니다. 편의상, 역사와 전통과 외형적 크기에 따라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 계통의 순복음 교회 순이 될 것입니다. 

본 글은 여러 교파 중에서 특별히 장로교 신학적 전통에 서있는 교인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장로교인들은 역사적으로 어디에서 유래하였으며, 어떤 신앙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신앙을 표현하며, 어떤 신앙의 문법과 억양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차분하게 따져보려 합니다. 이렇게 하려는 목적은 앞으로 우리의 뒤를 따를 신앙의 후배들을 위하여 신학적 이정표를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상당수의 장로교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내용이나 본질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거나 혹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좀 과하게 말해서, 기껏해야 교회의 직제 가운데 장로가 있고, 장로들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사람들이며, 지역 교회의 상급 기관으로는 노회와 총회라는 기관이 있다는 정도의 지식이 그들이 장로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전부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가운데 안수집사나 장로 직분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교회 정치와 운영에는 관심이 많지만 신앙과 신학의 내용에 대해서는 실상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서글픈 현실입니다. 그분들이 교회의 기둥과 같이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흔들림 없이 서있을 수만 있다면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현재보다 훨씬 건강하고 뼈대 있는 성경적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추측하건데, 이 글을 기꺼이 정독하시려는 읽는 분들은 아마 교회와 신앙과 신학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구도자의 마음으로 하나님 알기를 소원하며, 겸손하게 교회를 사랑하고, 자기가 자라온 전통을 기억하고 존중하며, 이 전통을 발전시켜 후대들에게 선물로 남겨주려는 분들을 위해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1. "네 부모를 공경하라" - 기억 공동체

신학적 입장에 관한한, 장로교인들은 처음부터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을 전수받았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현재 한국의 장로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신앙과 신학은 어느 날 갑자지 태동한 새로운 신앙과 신학이 아니라, 신앙과 신학의 성실한 전승자들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온 역사적 기독교신학을 신학적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았다는 것을 말하며, 여러 가지 역사적 기독교신학 전통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전통'(Reformed Theological Tradition)을 신학적 정체성으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주의’가 아닌 ‘전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잘 말했듯이 “전통은 죽은 자들의 살아있는 신앙이지만 전통주의는 살아있는 자들의 죽은 신앙입니다.” 만일 장로교인들이 비난을 받고 있다면, 그들의 신앙의 내용인 신학적 전통이 아니라 전통을 형식적으로 보수하고 있는 전통주의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형태의 ‘주의’(主義, -ism)든지 ‘주의’는 언제나 이데올로기화 되어 독선적이 되거나 독단에 빠져 마침내 자기우상화나 자기연민 혹은 자만 속으로 함몰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세상에 혼자 태어나지 않습니다. 부모를 통해 가족 공동체 속으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먼저 우리는 우리를 낳아준 부모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전통’에 대한 ‘기억’입니다. 오래 전부터 시작된 커다란 이야기(전통) 가운데로 들어온 우리는 이 커다란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를 살펴보고 기억함으로서 현재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주어진 것이며 만들어져온 것이며 형성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서있는 전통에 대해 사려 깊은 이해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장로교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이해하려면 단순히 몇 가지 원리로 환원되는 추상적 신학적 개념들을 파악하는 것으로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전통을 이해해야합니다.
                                      
여러 가지 신학적 전통들이 있지만 내가 말하려고 하는 전통은 ‘개혁주의 신학적 전통’입니다. 다시금 강조해서 말하거니와, 각각의 신앙과 신학의 전통들은 단순히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의 동반자 관계나 연대감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은 죽은 자와 산자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자들 사이의 동반자 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통은 넓게 말해서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신앙 공동체가 전수해준 신학적 전통 안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이 개혁주의 신앙공동체의 신학적 전통은 앞으로 올 세대에게도 전수되고 이어져 나갈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적 전통은 여러 기독교 신앙 전통들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다양한 신학적 전통들로는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통교회, 루터교회, 재세례파 교회 등이 있습니다. 개혁교회 역시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여러 신학적 전통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 안에 있는 각 전통들은 자기들만의 독특한 해석학적 틀을 지닙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세상과 역사와 인간의 상황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각자만의 독특한 ‘해석학적 안경’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주제들을 인식하는 원리를 성경에서 가져옵니다. 물론 실체와 경험에 대한 사람의 인식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체들을 이해하려는 해석학적 틀의 중심에는 언제나 성경을 해석하는 일정한 방식이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모든 것을 성경의 빛 아래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신학적 전통입니다.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전체 성경으로‘(tota scriptura)라는 모토가 이것을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 문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뒤에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전통은 그 해석의 양태를 표현하는 특정한 스타일들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활하는 양식, 사고하는 방식, 제도와 기관들을 구성하고 조직하는 방식, 예술을 표현하는 스타일, 예배하는 형식, 휴식하는 방식, 여가를 사용하는 스타일, 감정을 표출하는 형태, 상호간의 이견이 있을 때 풀어가는 스타일 등이 그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의 방식과 그 방식을 표현하는 스타일은 구체적인 이야기 형태를 띠고 전수되어옵니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이해하려면 수많은 세월동안 그 정체성을 만들어온 역사적 이야기들을 떠나서는 불가능합니다. 구체적인 사건들 속에서 개혁주의 신학 전통은 태동하고 양육되고 형성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전통-내러티브’는 신앙 공동체로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 공동체의 수많은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 신앙의 영웅들과 비열한 자들에 대해서, 겪었던 기쁨과 슬픔들에 대해서 ‘전통-네러티브’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종합하자면, “개혁주의 신학전통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공동체가 어떻게 실체와 성경을 자기들 나름대로 독특하게 해석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 해석을 자기들 나름대로 개성 있게 표현하는지를 이해해야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를 통하여 자신의 모험적 여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각주1) 사회학자들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일관성의 문화’(culture of coherence)(각주2),  다른 말로 하자면, 공동체에 속한 일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문화가 한 공동체와 사회를 공동체답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기억'(remember)이라는 마음의 기관을 통해서 공동체에 속한 일원들을 하나로 묵어주는 거대 담론(이야기)속으로 참여하여 그 내용을 전수받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세워가며 후대에 그것을 전수합니다. 신앙공동체는 본질적으로 ‘기억 공동체’(community of memory)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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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Nicholas P. Wolterstorff, Keeping Faith: Talks for New Faculty at calvin College, Occasional Papers From Calvin College (Grand Rapids: Calvin College, 1997), p. 2.

2)  참조, Robert N. Bellah, Habits of the Heart: Individualism and Commitment in American Lif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5), pp. 152-155, 281.


2. 개혁신학과 개혁교회의 족보

개혁신학의 전통을 부각시켜 설명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된 포괄적인 기독교회의 가계(家系)에서 개혁(장로) 교회의 계보를 찾아보는 일입니다. 아래의 간단한 족보는 어떻게 기독교회가 여러 세기 동안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해왔는가를 보여줍니다. 가계표는 도로 표지판과 같습니다. 운전하다가 표지판을 보고 그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여기에 무미건조하게 나열되어있는 각종 도로표지판을 보고 그리로 들어가 한 곳 한 곳을 차근차근 둘러보면 그 지역에 대해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행하는 즐거움입니다. 이처럼 기독교회의 계보는 표면적으로는 건조하게 보이겠지만, 족보 안에 담겨진 수많은 사연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교회 역사가들의 도움을 받아 읽어내어 보십시오.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즐거운 여행인지요! 각 가정마다 한 권의 좋은 기독교회사 책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족보를 읽을 수만 있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성공과 실패, 다툼과 분열, 아픔과 회복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라 불리는 인간의 이야기들 가운데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운행하시면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에 관해서도 듣게 될 것입니다.

a. 주요 기독교 교회의 계보

1-11세기                            그리스도(기독) 교회 
11세기               서유럽 로마 가톨릭   ↔        동유럽 정교회 
16세기         개신교      ↔      로마 가톨릭   ↔      동방 정교회 

b. 개신교 교회들의 역사적 계보

16세기                재세례파   ←   개혁교회   ←   루터교회   ←   성공회        
* 왼쪽에 가까울수록 로마 가톨릭으로부터의 보다 철저한 분리를 보여준다. *

17세기                퀘이커          청교도
18세기                감리교회 (요한 웨슬레와 관련을 맺는 교회의 시작)
19세기                자유교회
20세기                순복음교회(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의 출현) 

교회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교회’라 부르지 않고 ‘그리스도 교회’ 혹은 한자어로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기독’(基督)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기독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분의 몸이요, 그분은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몸을 대표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대표합니다. ‘교회’를 게르만어족에 속한 언어로 표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Church(‘쳐치’, 영어), Kirche(‘키르케’, 독어), Kerk(‘께르끄’, 네덜란드어), Kyrke('케르키‘, 스웨덴어). 모두 비잔틴 그리스어 κυρικἠ (큐리케)에서 유래한 용어들입니다. 이 용어는, “주(主)님께 속함,” “황제의 것”이란 뜻입니다. 번역 언어로만 봐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하며, 그분에게 충성을 서약한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교회를 상상할 수도, 달리 표현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출생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의 메시지(케리그마),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씨앗 위에 성령을 물 붓듯이 부으심으로(성령 강림) 창조된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출생한 신(神)적 생명체입니다. 마치 예수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고 출생하셨듯이 말입니다. 교회는 천상에 계신 세분 한 하나님(삼위일체)께서 지상으로 내려주신 최상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갓 태어난 교회의 출발은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마치 갓난아기 모세가 탄 자그만 방주처럼(출 2장) 교회라는 배 역시 연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약한 바람과 물결에도 뒤집힐 수 있는 연약하고 초라한 일엽편주(一葉片舟)였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면서 ‘죽음의 세례’를 받은 후 새롭게 태어난 갓난아기 이스라엘이 망망한 광야에 놓이게 된 형편과 같습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회는 수많은 난관과 핍박의 물살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기독교회는 11세기에 서방 교회(로마 가톨릭)가 동방 교회(정교회)로부터 분리될 때까지 하나의 교회로 존속하고 있었습니다. 

16세기에는 새로운 성령의 바람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 불어 교회의 새로운 거듭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일명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이 그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중심적인 메시지, 즉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신학과 신앙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이란 문구들 속에 잘 담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개신교의 종교개혁 운동은 네 명의 자녀를 출생하게 되었는데, 재세례파 교회, 개혁파 교회, 루터파 교회, 그리고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배열한 순서는 신학적 성향과 예전 형식, 성례의 위치와 교회 정치 형태 등을 고려하여 정해놓은 순서입니다. 먼저 왼편으로 갈수록 신학적으로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이 보다 철저하게 이루어진 것을 보여줍니다. 예배의 형식과 관련하여, 가톨릭의 형식을 덜 따르는 데서 그룹에서 시작하여 보다 가톨릭 형식을 따르는 순으로 되어있으며, 성례에 대해서는 성례가 예배에서 덜 중심적인 교회로부터 보다 더 중심적인 교회의 순이며, 교회 정치와 관련해서는 보다 덜 계급적인 교회로부터 보다 더 계급적인 교회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사적 자리에서 개혁 신학적 관점은 좀더 폭 넓은 중간 지대에 위치합니다. 

기독교 교회 역사에서 ‘개혁 신학 전통’(Reformed Theological Tradition)이란 용어는 일명 ‘칼빈주의’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지고 있으며, 위에서 대략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개혁(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16세기의 초엽에 발생하였던 종교개혁운동의 일부분으로서, 당시 로마 천주교가 신앙의 근본적인 원리에서 벗어나자 ‘원리로 돌아가자,’ ‘기초로 돌아가자’는 시대적 운동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원리와 기초는 모두 성경을 가리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이처럼 사도들에 의해 전수된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인 동시에 부득불 당시의 ㅇㅠ일한 제도적 교회였던 로마 천주교에서 떨어져 나온 개신교의 한 가지이기도 합니다. 

루터교회를 가장 가까운 신앙적 형제로 삼는 개혁교회는 16세기 스위스에서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와 요한 칼빈(John Calvin)의 탁월한 지도력 아래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히 칼빈의 성경적 가르침과 신학체계는 빠른 속도로 라인 강 계곡을 따라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갔으며, 특별히 프랑스와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의 개혁(장로)교회들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후에 영국과 그 연방과 오대양 육대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에는 미국 대륙과 아프리카, 헝가리, 인도네시아,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장로교의 형태로 한국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개혁신학의 계보에 들어있는 한국의 교파로서는 장로교회들을 들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혁(장로)교회는 기독교회의 여러 가족 구성원들(루터교회, 침례교회, 성공회, 오순절교회, 복음주의자, 로마가톨릭, 동방 정교회, 구세군, 감리교 등) 중에 숫자적으로는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자랑스럽게도 한국은 예외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신앙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개혁(장로교)신학은 유럽대륙과 남아공에서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로, 영미 계통과 한국에서는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물론 교회 정치에 있어서 양자간의 차이점이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 예, 교회정치의 중심부는 노회인가 아니면 지역교회의 당회인가 하는 점 — 신학적 강조점에 있어서는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미 계통의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 교리문답서(1648)를 받아들이며 한국의 장로교 역시 이 전통에 서있습니다. 한편 유럽과 남아공의 개혁교회들, 미국의 개혁교회들은 자신들의 개혁주의 신학적 정체성을 천명하는 표준문서로 벨기에 고백서(1561), 하이델베르그 신앙교육문답서(1563), 돌트 신경(1619-19)을 받아들입니다. 이에 대한 신학적 계보는 차후에 말하기로 하고 먼저 개혁주의 신학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요한 칼빈에 관해 말해보려 합니다. 

3. 요한 칼빈과 그 후예들                                     

요한 칼빈은 1509년 프랑스의 노용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에 인문학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24세에는 학문적 정상에 이르게 된다. 마르틴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영감을 받은 그는 성경을 심도 깊게 연구하였다. 철저하게 준비된 인문학 공부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 대한 탁월한 이해는 칼빈으로 하여금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숨겨진 책이었던 성경의 내실에 들어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에 가장 탁월한 학자로 만들었다. 성경연구로 시작된 그의 성경 사랑은 한평생 성경의 모든 부분을 연구하고 주석하는 작업에 불길을 당기었고, 그가 남긴 방대한 성경 주석은 아직도 기독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주석서로 남아있다. 물론 그가 요한 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집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 당시 요한 계시록은 어두움을 밝히는 빛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사변적 논쟁의 열기를 발산하였기 때문에 칼빈의 생각에는 계시록 주석을 집필하지 않는 것이 여러모로 더 유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성경주석뿐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절묘하게 요약해놓은『기독교강요』라는 책을 썼다. 교회에서 교인들의 신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교육하기 위해서 집필된 이 저서는 처음부터 상아탑에서 읽혀지고 논의되는 조직신학 저술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일상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길에 대해 가르치기 위하여 의도된 목회적이며 교육적인 산물이었다.

그는 로마 천주교에 의해 심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프랑스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그가 걸어가는 길은 외로운 길만은 아니었다. 스위스의 제네바에서는 파렐(Guillaume Farel)과 같은 또 다른 개혁자들을 만나 개혁운동을 힘 있게 전개해 나갔다.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설교자로서, 성경교사로서, 신학 선생으로서, 개혁주의 가르침의 열정적 전파자로서 칼빈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임을 충실하게 감당하였다. 여러 면에서 칼빈은 그 시대의 사람이었지만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하게 만든 하나님의 나팔수였다. 우리가 서있는 개혁주의 신학은 이러한 칼빈의 성경적 신학적 가르침들에 상당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고귀한 역사적 유산이다.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들은 요한 낙스(John Knox)와 같은 인물에 의해 스코틀랜드에 소개되었는데 그는 본래 종교개혁운동의 한 주류인 루터파의 신학적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의 선생이었던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은 신앙을 지키려다가 화형을 당하였는데, 낙스 역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중노동을 하기도 하였다. 석방된 후에 낙스는 제네바에서 칼빈의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559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당시의 교회와 국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마침내 후에 ‘장로교회’로 불리는 개혁주의 전통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성공하였다. 


4.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그렇다면 개혁신학 전통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할 것인가? 우스꽝스럽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개혁주의적 신학적 행보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신학적 중도를 걷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우리가 서 있다고 믿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서 있어야한다고 믿는 개혁주의의 위치는 일차적으로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중간 지점 어디일 것이며 그곳에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중심을 잡고 서 있어야한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은 초자연주의에 관해서는 과감하게 근본주의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하지만, 기독교 신앙이 문화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자유주의와 보조를 같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쪽저쪽을 넘나들며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는 것이 개혁주의는 아니다. 오히려 개혁주의는 처음부터 신학적 대안들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제시하고 실행에 옮기는 신학적 운동이다. 양쪽 진영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서 개혁주의 신학은 자신의 정체성을 흐릿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발전 시켜나아 가야할 개혁주의 전통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변혁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부적절한 견해를 피력하는 자유주의, 초자연주의를 반대하는 이성주의, 개인적인 죄와 구원을 얻기 위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해 언급을 꺼려하는 현대적 감성주의와는 한 배를 타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개혁주의 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은 신앙의 반지성적 경향, 과학과 학문에 대한 일방적 의심, 기독교 문화 창달에 대한 이해와 참여의 부족, 현실 도피적 신앙관,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보다는 개인의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는 경향 등을 가진 근본주의적 신앙 체계로부터 자신들을 분명하게 구별 짓는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의 관점은 자유주의 및 근본주의로부터 완전히 구분되어야하며, 이러한 구별은 특별히 양극화로 치달아온 한국의 신학적 전통에 대안으로 자리매김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입장을 ‘제 3의 입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톨프(Nicholas P. Wolterstorff)가 미국에서의 기독개혁교회(CRCNA: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의 입장을 “제 3자의 사고방식”(The third-party mentality)이라 부른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미국의 진보주의 장로교회와 보수적인 장로교회들 사이에 있는 신학적 긴장과 대치 국면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쳐다보았던 네덜란드 계통의 개혁교회들이 보여주었던 태도와 정신을 그런 용어로 표현했었다. 개혁주의는 자유주의자나 근본주의자와는 달리 어떤 특정한 논쟁에서 취했던 입장에 따라서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천명하고 자신들의 역사적 신앙 유산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개혁주의는 요한 칼빈과 종교개혁자들 및 어거스틴에 기초한 신학전통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규정된다.

미국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그렇듯이, 신학적 계보에서 개혁주의의 줄기를 찾는데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복음주의자들과의 관계에서 찾는 일이다. 물론 “복음주의자”(evangelical)라는 용어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한국에서 복음주의적 감리교인이나 성결교인들이나 오순절 교인들이, 심지어 복음주의적 기장 교회의 교인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복음주의자라고 말할 때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그들은 정통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역사적 개신교의 일원된 교인들로서 복음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럴 경우 개혁주의자들은 복음주의 자들과 상당부분 중복되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아무런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풀러 신학교, 트리니티 신학교, 고든 콘웰 신학교, 혹은 시카고의 위튼 대학교, 로스앤젤레스의 바이올라 대학교, 캐나다 밴쿠버의 리전트 대학, 대중적 기독교 잡지인 Christianity Today나,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과 같은 기관들, 존 스토트(John Stott), 제임스 패커(J. I. Packer), 존 파이퍼(John Piper), 챨스 콜슨(Chuck Colson),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찰스 스탠리(Charles Stanley), 제임스 돕슨(James Dobson) 같은 인물들은 모두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로 규정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이나 교단의 신학적 입장이 개혁주의는 아니지만, 자신들이 가르치는 내용의 상당 부분에 있어서 자신들은 신학적으로 개혁주의라고 간주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한세대학교, 안양대학교, 평택대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성결대학교, 나사렛대학교, 침례신학대학과 같은 교육기관들이나 [목회와 신학]지와 같은 기독교 잡지, 조용기, 이동원, 하용조와 같은 목사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라고 부를 것이고 그런 명칭에 대해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개혁주의적 장로교 전통에 서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개혁주의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복음주의자라고 해서 개혁주의자는 아니다. 개혁주의는 복음주의보다 범주가 좁지만, 신학적 정체성이 강하고 그들 나름대로 독특한 신학적 성격을 갖고 있다.
5. 개혁신학 전통 안에 공존하는 세 가지 유형의 신앙 형태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사람들이 말하는 어투와 억양이 다르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헌신을 고백하면서도 각자의 신학적 전통에 따라 서로 다른 어투와 억양을 갖는다. 그가 태어나고 전수받고 배워온 신학적 배경에 따라 신앙의 표현방법도 다르고 억양도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상 신학적 억양과 어투가 없는 그리스도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감리교인은 감리교인처럼 말하고, 침례교인인 침례교인처럼 말하고, 오순절 교인은 오순절 교인처럼 말한다. 개혁교회 교인들도 개혁교회 교인들처럼 말한다. 개혁교회 교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신앙적 신학적 문법체계에 따라 말하는 어투와 어투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경에 대한 견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식, 믿음을 표현하는 방법,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정치와 사회와 문화와 교육에 대한 이해 등에 있어서 개혁주의 교회는 그들만의 독특한 특성이 있다. 물론 이러한 특성이나 차별성이 다른 전통의 신학이나 교회들을 정죄하거나 무시하는 도구가 된다면 하나님의 거룩하고 보편적 교회를 분열하는 죄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오히려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추구하는 성경적 교회론의 입장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신학적 특징들을 정교하고 세련되게 발전시킨다면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에 종사하게 되며 또한 다양한 교회적 전통 안에서 우리가 그들과 서로 연합되어간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마치 한 몸 안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교회의 단일성과 다양성은 몸으로서의 교회의 이미지 안에 잘 반영되어 있다(참조, 고전 12장). 그리고 이러한 ‘하나와 여럿’의 진리는 삼위일체 교리 안에 뿌리를 박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 그 자신도 하나이면서 셋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혁교회가 자신의 신학적 특성을 이해하고 자신의 어투와 억양을 좋은 방향으로 개선시키려는 것은 죄스런 일이거나 분파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더욱이 개혁신학 전통의 교회는 여러 종류의 교회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한다. 개혁교회는 신약시대의 교회에 근거를 둔 보다 폭 넓은 정통적 기독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교회 교인들은 다른 신학적 전통의 신자들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중 제 2위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성육신하였음과 제 3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교회에 내재하심을 믿는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개혁주의 교회는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경륜과, 이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사명과, 영광 중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게 될 것을 고백한다. 보편적이고 전 세계적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개혁주의 교인들은 사도신경으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한다.

이제 우리가 서있는 개혁교회의 신학적 특성에 대해 알아보자. 기독교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톨프는 미국 기독개혁교단의 신학적 특색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분류한 일이 있는데, 나도 그의 유형 구별이 한국의 개혁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전통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생각하여 그의 분류법을 차용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개혁주의 전통 안에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데, ‘교리’를 강조하는 사람들, 개인적 ‘경건’을 강조하는 사람들,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하여 ‘변혁’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물론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종류의 신학적 강조점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서로를 강화하기도 한다.

첫째로, ‘교리를 강조하는 전통’이 있다. 
이 전통에 따르면 ‘개혁주의’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교회의 고백에 반영된 기독교의 교리들을 중시한다. 여기서 교리라고 하는 것은 신앙 교육을 위한 ‘가르침’을 의미하며, 전수되어온 신앙의 내용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숙지를 요구한다. 교리를 강조하는 전통에서는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라고 질문하기를 좋아하며 성경을 체계적으로 읽고 연구하며 개혁주의 교리에 대한 관심이 높다. 신앙의 지성적인 측면이 강조되며, 교회 내에서 지성적인 교인들이 이 전통에 다수를 차지한다. 이 전통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로서는 ‘성경’, ‘창조-타락-구속-완성으로 표현되는 세계관‘, ‘은혜교리’, ‘언약 교리’, ‘일반은총론’ 등이 있다.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개혁주의 교리를 자세히 요약한『조직신학』의 저자인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나 안토니 후크마(Anthony Hoekema)와 같은 인물을 높이 평가한다. 

아래에서 진술될 경건 지향의 개혁신학이나 여기서 묘사하는 교리 지향의 개혁신학 모두 성경을 교회의 유일무오한 절대 규준으로 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교리 지향의 개혁신학은 신조 혹은 신앙고백의 정통성 유지에 역점을 둔다는 점에서 경건 지향의 개혁신학보다 조금 더 보수적인 입장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리 지향의 개혁신학은 교회의 성경적 교리가 오랜 기간 동안 다소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단 사설을 배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실을 주목한다. 교회는 바른 성경적 교리를 통해 역사적 교회가 지켜온 신조의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칼케돈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세계 교회 회의를 통해 논쟁을 거듭하면서 역사적 교회의 신앙고백은 교회의 교리로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성경의 비판학적 연구가 시작됨으로 오늘날에는 성경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성경에 의한 신학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런 신학적 상황에서 역사적 교회의 신앙고백을 좇아 백석학원의 신학적 입장을 재천명하고자 함이 교리 지향의 개혁신학의 입장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적 전통에는 앞서 언급한 초대교회의 세계 공동 신조들 외에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와 17세기 개혁신학자들의 시대에 작성된 개혁신학의 여러 신조와 19세기 이후 찰스 하지, B. B. 워필드,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등에 의해 형성된 신학적 체계가 포함된다. 이러한 입장을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역사적 개혁주의’라고 부른다.
        
그런데 교리 지향의 개혁신학이 신조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입장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신조지상주의를 신봉한다는 것을 우상숭배적 행태이지만, 교회는 신조적이어야한다는 말은 옳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신경을 비롯한 건전한 교회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건전한 전통에 대한 분별은 계시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해서 한다는 입장이다. 물론 이 입장은, 역으로, 주관적인 성경 이해를 피하기 위해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 자문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러한 입장은, 교회와 교회 전통을 절대시하여 성경 해석도 교회의 결정과 가르침에 종속된다고 보는 로마 가톨릭의 입장이나 성경을 주관적으로 이해하고 교리 없는 기독교를 주장하는 신령파적 교회 이해와 달리, 계시의 말씀과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양자의 긴장 관계에서 이해하려는 종교 개혁자들의 올바른 교회관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둘째로, ‘경건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다. 
이 전통에서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중요시한다. 이들이 던지는 질문은 “믿음의 길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체험하는가?”이며, 한국적 개혁주의 교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색이었다. 기도생활과 성경읽기, 부흥회나 사경회와 같은 집회, 주일성수와 십일조 생활, 전도와 구제와 같은 것을 중요시 한다. 한국적 상황에서 요즈음 경건을 영성과 동일시하거나 혼용하지만 원래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경건은 ’실천적 경건‘을 의미한다. 이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를 중시하고, ’성령의 내주‘, ’감사하는 삶‘, ’교회생활의 즐거움‘ ’말씀과 성례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갖는다. 초기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들은 이런 전통을 중요시하였으나 지금에 와서 이런 전통이 빛을 바래고 있는 것 같아 크게 아쉬움이 있다. 세계 교회사적으로 미국 대 각성 운동의 조나단 에드워드의 지성적 경건은 교리적 강조와 경건에 대한 강조를 함께 묶어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의 강조점은 ‘변혁주의자’로서 개혁신학이다. 
이런 측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세계관과 인생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문화의 변혁자로서 그리스도 등과 같은 주제들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변혁주의자의 주된 관심사와 질문은 “어떻게 복음을 세상에 연결시킬 것인가?”이다. 여기서 다루는 주제들 중에는 ‘주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나라’, ‘말씀봉사와 행위봉사의 관계’, ‘문화적 사명’, ‘기독교 학교’, ‘신자의 소명과 직업의식’, ‘영역 주권설’ 등과 같은 것들이 있다. 변혁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전통의 선봉장으로는 정치가며 신학자며 교육가로서 네덜란드 수상을 지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가 있다. 그는 네덜란드 자유대학교를 세우고 하나님 주권사상과 일반은총론, 영역 주권설 등을 통해 신앙과 학문을 접목시키는데 큰 공헌을 남겼다. 그의 영향력은 사후에도 계속되어 미국과 남아공 등에 이르게 되었고, 미국의 경우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츠 시에 있는 칼빈 대학(Calvin College)을 중심으로한 카이퍼 추종자(Kuyperian)들을 통해 학문적 주류에 진입하게 되었다. 칼빈 대학이 배출한 두 명의 저명한 철학자들인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와 니콜라스 월터스톨프(Nicholas Wolterstorff)는 현재 수 천 명의 회원을 가진 미국 기독교 철학회(Christian Philosophical Association)를 발족시켰으며, 학문과 신앙을 접목시키는 획기적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었다. 지금은 노틀담 대학 철학과에 있는 앨빈 플랜팅가, 동 대학 역사학과의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 예일 대학교의 니콜라스 월터스톨프, 풀러 신학교의 총장 리처드 마우(Richard Mouw) 등은 대표적인 개혁주의 지성인들로서 자신들의 교단적, 인종적 배경을 넘어 개혁주의 학문의 탁월성을 전 세계에 드러낸 인물들로 평가받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프린스턴 대학교 스톤 강좌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린스턴 신학교에 “아브라함 카이퍼 대중 신학 연구소“(The Abraham Kuyper Center for Public Theology)가 만들어지면서 ”아브라함 카이퍼 기념 연례 강연”(The Abraham Kuyper Prize and Lecture)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고, 최근에는 시카고의 위튼 대학에도 아브라함 카이퍼를 전공한 흑인교수(Vince Bacote)가 아브라함 카이퍼적 개혁신학의 전도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변혁적 사고는 창조세계에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인식하고,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Lordship)을 구현하는 일에 앞장서게 한다.

이상에서 말한 세 가지 종류의 강조는 일종의 흐름을 형성하면서 개혁신학의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해왔다. 보다시피 세 가지 유형은 서로 중복되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교리 중심적이고, 경건 지향적이고, 문화 변혁적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그 역사 및 관념상 서로 분명하게 다른 세 가지 접근방법을 대표하고 있다. 


A. 교리 지향적 개혁신학 전통 -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교리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전통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특정한 기독교 교리들, 교회의 신앙고백문서에 반영되고 있는 특정한 기독교 교리들을 강하게 붙잡는 전통을 말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다음의 5가지 것들에 대한 독특한 이해와 깊이 있는 이해를 갖는 사람들이다. (1) 성경, (2) 은혜, (3) 창조-타락-구원-완성, (4) 언약, (5) 일반은총.
  
1. 성경 (딤후 3:16)

개혁신학은 성경에 대한 높은 견해를 가진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입 기운이 들어간, 오류가 없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다음 두 구절은 성경의 본질과 권위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27)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젓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0-21) 

“하나님의 입 기운이 들어간”이란 말은 전통적인 용어인 ‘영감 되었다’는 문구를 헬라어 원어의 뜻을 풀어 쉽게 쓴 것이다. 이 말은 성경의 기원이 누구로부터 왔는지를 가르치는 말이다. 즉 성경은 성령에 의해 쓰인 책으로, 인간 저자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오류가 없다”는 것은 성경은 진실하고 신뢰할만하다는 또 다른 표현으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에 관계하여 전혀 틀림이 없으므로,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모든 것은 신뢰할 만하다는 뜻이다. “권위가 있다”는 것은 신자의 삶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요구를 가리킨다. 즉 신자들은 하나님 말씀의 ‘밑에’ 살아야하며,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해야 된다. 종교개혁의 후예들로서 우리는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는 문구가 어떻게 나왔는지 잘 알고 있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들 교회가 가르쳐 온 전통과 그들 교회가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내용이 모두 성경과 동일하게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그러한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기 위하여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문구를 주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성경만이 믿음과 삶에 있어서 우리에게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고 응답했던 것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오늘날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종교개혁시대처럼 교회의 가르침을 성경의 권위 수준으로 높이고자 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성경을 끌어내려 성경이 전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그것이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못하고, 부활 같은 것은 단지 신화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시대풍조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성주의, 자연주의, 역사실증주의와 같은 정신들이 대표적인 세력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의 삶에 유일한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신자들은 현대의 ‘계몽된’ 사람들에게 제아무리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자신들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입은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방편임을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성경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은 성경을 길들여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사용하는 경향이다. 성령의 음성을 빙자하여 성경에 대한 감성적이고 주관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하는 말이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내적으로, 그리고 독특하게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간증한다. 개인중심적인 감성주의나 주관주의가 그러한 경향을 나타낸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자들은 성령의 주권적 역사를 충분히 인정하지만, 또한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함께 일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누군가 잘 표현했듯이,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개의 선로 위로만 달린다.” 아니면 “성령은 언제나 성경의 등을 타고 다닌다.”

우리는 때때로 성경의 본질과 권위에 대한 학문적 논쟁에 너무 빠져들어 성경의 긍정적인 메시지를 지나칠 수가 있다. 성경은 풀어야 할 문제들을 모아 놓은 문제집이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극적인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 이야기의 절정은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은 “구원의 계시”에 있다고 교회가 말할 때 의미하는 바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며 세상을 살리는 말씀이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근본정신이 있다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을 성경 위에 놓거나 아니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으로 가르쳤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개혁의 나팔수들은 ― 예를 들어, 마르틴 루터, 요한 칼빈 ― 한 목소리로 성경만이 크리스천의 신앙과 삶에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고 외쳤다. 다시 말해 교회의 전통이나 교리가 아니라 성경만이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삶을 위한 유일한 규범이라는 것이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 체계와 인생관을 형성하고 구성하는 규범적 책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개혁주의 신학은 처음부터 성경에 의한 신앙이었다. 성경의 권위와 우위성을 강조하는 종교개혁 운동은 특별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구호를 통해 특징을 드러낸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전체 성경”(tota scriptura). 

16세기 종교개혁운동 전체를 놓고 볼 때 ‘오직 성경’이라는 주제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물론 이러한 성경에 대한 관심과 강조는 그 시대의 학문적인 흐름에 의해서도 설명되어질 수 있다. 소위 ad fonte ("원전으로 돌아가자!“)가 그것이다. 학문의 원천인 원어의 연구를 중요시 여겼던 당신의 인문주의는 신학에 있어서 믿음의 원천인 성경원문을 깊이 연구하도록 자극하였다. 개혁신학의 중심지였던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설교자들은 회중들의 삶을 위해서 성경으로부터 직접(‘오직 성경으로’),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서(‘성경 전체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설교하였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직접 설교를 이끌어 냄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왜곡되어졌던 교회의 가르침을 갱신하고 개혁할 수 있었다. 어느 학자가 잘 말하였듯이, 종교개혁의 ‘개혁’이라는 개념의 기본적인 출처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이었다. 이처럼 성경이 매우 특별한 조명과 대우를 받게 된 것은 특별히 개혁주의 신앙전통에서였다. 이 사실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비교해 보면 좀더 분명해진다. 루터교회가 종교개혁운동의 ‘내용적 원리’(material principle)라 할 수 있는 ‘이신칭의’(以信稱義,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개혁교회들은 종교개혁운동의 ‘형식적인 원리’(formal principle)인 ‘성경의 권위’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강조는 자연스럽게 ‘성경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추구하게 만들었다. 성경의 일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성경의 전체의 빛 아래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잘 말하고 있듯이, 성경의 진실성과 권위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동시에 성령의 신비로운 내적 증거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마음으로 그것을 존중하고, 그에 대한 모든 인간적 의심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신자들에게 온전한 권위는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그러한 권위를 갖게 되는가? 성경을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여길 때다. 다시 말해 마치 하늘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들을 듣고 있는 것처럼 성경을 그렇게 생각할 때, 성경은 신자들에게 온전한 권위를 갖는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설득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성경의 메시지를 믿게 된다. 이처럼 성경과 성령은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과 조명하심이 없이는 성경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하나님으로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경을 강론하고 선포할 때마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照明)을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 개혁주의 전통의 신앙고백문서들 역시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성경의 권위문제와 연관하여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벨기에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회가 성경을 거룩하고 정경(正經)적인 문헌으로 받아들이고 승인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특별히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이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제 5 조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역시 동일한 어조로 말한다. “성경의 무오(無誤)한 진리와 그 신적 권위에 대해 우리가 철저하게 수긍하고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성령의 내적(內的) 사역으로부터 기인한다. 다시 말해서 ‘말씀’(the Word)을 통하여,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속에 증거하고 계시는 성령의 사역 때문이다.”(I,5).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과 목적을 말씀하시는 권위 있고 구속력(拘束力)이 있는 방편이다. 성경은 우리의 철학이나 신학, 혹은 교리나 신조를 확인시켜주는 도구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생각과 사고, 철학과 신학이 구체적인 형태를 띠도록 하고, 우리의 윤리를 결정하고, 우리의 삶의 방식을 형성하게 하는 유일한 동인(動因)이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진정한 의미이다. 우리의 사역이나 삶의 형태를 성경의 치밀한 검사과정을 통과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성경의 메시지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성경이 스스로 이야기하기까지, 성경이 드러내고 있는 하나님이 분명하게 우리 앞에 서 계실 때까지, 그리고 우리가 경외(敬畏)와 경이(驚異)로 그분 앞에 엎드릴 때까지, 성경의 음성을 지속적으로 경청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 앞에서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히 4:12).

개혁교회를 표방하는 우리는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 가야한다. 성경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아집과 거짓, 교만과 위선의 늪에서 나와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며 만물의 유지자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로 알려진 조국 교회가 성경을 인질로 잡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집단의 이념이나 개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성경이 착취되거나 남용되거나 오용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의 교회는 더 이상 바리새주의적 ‘성경주의자’(biblicist)로 전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리기 때문이다(고후 3:6).

2. 은혜 (엡 2:8-10) 

개혁신학은 먼저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죄 아래 놓여있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부터 구출되고 구원을 얻는 것이 얼마나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처럼 은혜란 도무지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 호의를 말한다. 은혜는 그것을 얻을 만한 아무런 일을 할 수 없고 오직 선물로 받아들이기만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이며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은혜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이 마침내 어떤 것을 해서가 아니라 단지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 아버지를 움직여 잃어버린 아들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도록 했던 아버지의 사랑이다. 은혜는 우리가 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좀 더 사랑하도록 만들 수 없다는 놀라운 진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 개혁주의 신학은 은혜에 관하여 말할 때마다 그것이 인간의 업적이나 성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강조해왔다. 은혜에 관한 고전적 말씀이 에베소서에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8-10) 

일명 TULIP으로 널리 알려진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핵심적 교리’는 종종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을 만큼의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실패와 부자격조건과 죄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이 교리는 하나님 풍성한 은혜로우심과 철저한 은혜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교리의 금자탑이다. “오직 은혜로만!” 

최근에 미국의 기독개혁교단의 목사인 짐 오스터하우스(Jim Osterhouse)는 TULIP 대신에 FAITH라는 약칭으로 돌트 신경의 내용을 새롭게 표현하자고 제안한 일이 있다.

․Fallen Humanity (타락한 인류): 인간은 본질상 죄 안에서 죽은 자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와 그 결과들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Adopted by God (하나님에 의해 입양되다): 사랑으로 하나님은 얼마간의 사람들을  자신의 가족 일원으로 선택하셨다.
․Intentional Atonement (의도적인 속죄): 예수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 하시려고 죽으셨다.
․Transformed by the Holy Spirit(성령에 의해 변화를 받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사람들을 새사람으로 만들어(중생) 예수를 믿는 신앙을 그들에게 주신다. 
․Held by God(하나님의 보호): 신자들은 하나님의 손안에서 영원토록 안전하게 보살핌을 받는다.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사람은 자신의 죄된 성품에 의해 철저하게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죄로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제외하고는 무기력하고 소망 없이 자가 되었다. 바울은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이라고 말하고 있다. 타락한 상태에서의 인간은 단순히 약해지고, 병들고, 또는 불리한 입장에 처한 것만이 아니다. 인간은 죽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교리는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가르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열망하게 한다.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은 그의 긍휼 가운데 출생하기도 전에, 그리고 실로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신자들을 선택하여 사랑 가운데 그 자신에게로 부르셨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은 얼마간의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로 입양하기로 작정하셨다는 은혜의 교리이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하나님은 누가 믿을 것인가를 미리 아는 지식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그 기쁘신 뜻대로” 그의 자녀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예수님의 속죄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다 담당할 만큼 ‘충분’하지만 그 적용에 있어서는 오직 선택받은 자에게만 ‘유효’하다. 다시 말해 속죄는 성령으로 태어난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특수한 속죄’ 혹은 '목적 있는 속죄‘라 부를 수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인간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를 선택하신다.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고(요 3:5), 또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라고 말씀하셨다(요 6:44). 성령은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뜻을 간절히 사모하게 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에 항복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시인 엘리옷(T. S. Elliot)은 불가항력적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가리켜 '하늘의 사냥개'(hound of heaven)라 불렀다.도망하는 여우를 끝까지 추격하는 사냥개처럼 하나님도 그의 백성을 끝까지 쫓아가 붙잡으신다. 그래서 C. S. 루이스는 이 구절을 연상하면서 회심했을 때의 경험을 이렇게 표현한다. “잡혔을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추적'이란 주제를 시편 139편보다 더 잘 표현한 곳은 아무데도 없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
하나님은 그의 능력에 의하여 신자를 그의 손에 안전하게 붙들고 계시며, 어느 누구 또는 어느 것도 신자를 자신으로부터 분리하지 못하도록 하신다. 이 교리의 이름을 '성도의 견인'보다는 '하나님의 보존'이라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우리가 끝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영원하신 팔에 안겨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신자들은 하나님의 손에 안전하게 붙들려 있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들을 붙잡고 계신 것이다. 이 사실은 신자의 영원한 안전함, 즉 성도의 견인이라고 불려 왔다. 바울이 로마서 8장 마지막 부분에서 말했듯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5-39절) 

개혁교회의 신자들이 구원에 관하여 말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일인가를 깨닫고는 말을 잃는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혜로서, 찬송가의 가사처럼 우리는 그저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다.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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