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바울 신학의 차이
이현수
Ⅰ. 서론
우리는 누구나 신약성경을 보면서 예수와 바울의 신학에는 아주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바울은 의를 특히 강조하며 바울의 신학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중요하고 예수가 선재하는 우주의 주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우선시한 예수와는 달리 바울은 이방인을 특히 강조한다. 성령은 예수의 가르침에서보다 바울의 사상에서 더 명시적으로 등장하고 율법은 더 부정적으로 다루어진다. 바울의 신학이 좀 더 교회 중심적인데 반하여 예수는 치유와 같은 육체적인 문제, 재물과 같은 물질적인 문제와 사회관계 일반을 더 강조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선포한 복음은 서로 다른 것이었을까? 복음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인가? 예수와 바울 이 두 인물은 많은 점에서 서로 상당히 달랐다. 예수는 갈릴리 출신의 카리스마적인 예언자적 인물이었고, 바울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지성적인 저술가였다.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충직한 유대교의 영향력있는 신봉자였던 바울은 그의 당시 유대교의 경직적인 사고로 인해 극히 이단시 되었던 예수를 따르는 예수의 추종자들을 격렬히 반대하여 핍박하였으나 극적으로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를 만나 개종한 후 예수의 추종자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수 생전에는 예수와 바울이 서로 만난 적이 없었으며 예수의 제자들과도 관계를 갖지 않았고 성경의 그의 말에 의하면 극적인 회심 후에 그들과 합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롬1:1)이 되었다. 다메섹에서의 예수를 만나 회심한 사건 이후로 바울의 예수에 대한 관계는 신실한 추종자의 관계라는 것이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관계이지만 최근에 와서 이러한 관계가 도전을 받아오고 있으며 실제로 이러한 도전들이 또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도 하다. 즉, 바울은 예수를 순수하게 추종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온갖 개념들(ideas)과 강조점들(emphases)을 도입함으로써 원래의 단순했던 예수의 종교를 복잡하고 혼탁하게 만든 혁명가이며 새로운 기독교의 창시자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바울을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주장하는 주요한 견해들을 살펴보면, 카렌 암스트롱(Karen Amstrong)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소급해서 연구해 보면 바울은 단지 기독교에 심대한 영향력을 끼친 정도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의 창시자였던 것 같다. 바울은 최초의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다.”고 평한다. 저명한 유대인 학자인 매코비(Hyam Maccoby)는 그의 저서 『신화 창조자: 바울과 기독교의 창시』(The Mythmaker: Paul and the Invention of Christianity)에서 바울을 “모험가”이자 “가장 위대한 공상가”라 부르며 그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고 실제로 신약성경 대부분에서 입증해 주듯이, ‘기독교를 창시한 자는 바울이었다’고 직접적으로 주장한다. 또한 독일의 저명한 학자인 브레데는 바울을 ‘기독교 제2의 창시자’라 불렀다. 이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바울은 유대인 예언자를 이방인의 하나님으로 바꾸어 놓았고 기독교를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주장해 왔다. 정말 바울은 우리 모두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예수의 충실한 추종자였는가, 아니면 위의 상당히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는 바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크게 변모된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였는가? 또는 진실은 이 두 위치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인가? 본 연구는 예수와 바울의 연구를 통해 이러한 물음에 답해 보고자하는 것이다. Ⅱ. 쟁점이 되는 두 가지 문제
예수와 바울의 관계 연구에 있어 쟁점이 되는 두 가지 문제는 (1)바울은 예수의 사역(그의 가르침을 포함한)을 얼마나 많이 알았고 관심을 가졌는가? 즉 예수이야기 및 예수의 말씀들(자료들)을 바울이 사용했는지의 여부와 (2)바울은 신학적으로 예수와 어느 정도로 일치하거나 불일치하였는가(두 개의 복음인가 또는 하나의 복음인가)? 즉 메시지에 관한 문제들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쟁점들에 관해 바울과 예수가 그들의 신학의 주된 내용들 및 그들이 말한 내용의 전체적인 취지에서 서로 동일한지 그리고 예수와 바울 간에는 주요한 방향전환이 존재했는지를 알아봄으로써 다시 말해서 두 사람간의 신학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검토해 봄으로써 ‘예수의 추종자냐 기독교의 창시자냐?’라는 물음에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A. 바울 서신들에 있는 예수 전승
바울을 예수의 추종자로 보는 사람들을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사실들 중의 하나는 복음서들에서 바울 서신들로 옮겨갈 때, 바울 서신들에 예수의 생애나 말씀들의 인용이 사실상 결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하지만 예수의 출생, 세례, 기적, 비유, 변화산 사건 등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며 예수의 말씀들에 대해서도 바울은 몇 번의 예외 외에는 적어도 명시적으로 인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바울의 수난 이전의 예수의 가르침과 생애에 관한 침묵에 대해 2개의 상반된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첫 번째 견해는 불트만과 윌슨 같은 학자들의 주장으로써 바울이 예수의 수난 이전의 사역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고 사실 그것에 관하여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만일 바울이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런 것들이 그에게 중요했다면 바울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설교자들처럼) 분명히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언급하였을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그가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신앙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을 통한 교회 속에서의 주님의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바울이 경배하고 섬겼던 분은 바로 이러한 예수였고, 지상의 예수가 말하고 행하였던 것은 그에게 거의 중요하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견해는 그 와는 반대되는 견해로서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명시적으로 인요하는 일이 드문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관하여 사람들이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은 자기와 자신의 독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가르쳐 왔고 따라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인용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며 자신의 서신들에서의 바울의 글의 목적은 누구나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논란이 되고 불분명한 것들을 다루어서 명확히 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 서신들에서의 소수의 직접적인 인용문들은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들에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제한 듯한 수많은 간접인용들(allusions)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예수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거나 사실 그것에 관해 거의 몰라서 예수에 관하여 별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바울은 예수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지식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였던 것일까? 진실은 아마도 위에서 서술한 두 가지 입장 사이의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에 대한 바울의 관심이 볼트만이나 윌슨이 주장한 것만큼 그렇게 미미하지 ?았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사역은 바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단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바울에게 신학적으로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에 관한 팔레스타인 전승들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자신의 교회들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B. 두 개의 복음인가 또는 하나의 복음인가? ( 바울은 신학적으로 예수와 어 느 정도로 일치하거나 불일치하였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예수와 바울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복음을 전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예수와 바울 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함을 쉽게 알 수 있다. 표현방식에 있어서 예수는 간결하면서도 생생한 단문들로 말하는 반면 바울은 흔히 길고 복잡한 논증들을 통해서 말하고, 예수의 메시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이지만, 바울 서신들에서 하나님 나라는 거의 언급되지도 않을뿐더러 중심 개념도 아니다. 바울의 메시지의 중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고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라고 말하지 않고 ‘의롭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밖의 다른 많은 점들에서도 바울은 예수와 구별된다.; 성령, 이방선교에 대한 지대한 관심, 구약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교회를 ‘몸’이라고 가르친 것 등은 모두 바울을 예수(적어도 공관 복음서에 묘사된 대로의 예수)와 구별짓게 만드는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 및 이와 비슷한 자료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나의 분명한 가능성을 가진 견해는 바울이 역사적 예수의 사상들과 가르침을 따르거나 적어도 꼼꼼하게 재현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의 신학적 비전은 자신의 삶과 교회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그의 체험으로부터 생겨났고 바울은 성령의 인도 하에 그 비전을 발전시켜 새로운 사상들을 도입하고 기독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재형성함으로써 예수의 종교로부터 상당 정도 벗어났다는 것이며 즉, 바울은 예수의 유대적 종교를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변화시켰고, 이후의 기독교 사상과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정반대의 견해는 예수와 바울의 상당한 표면적인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으로 인하여 그들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 방식에는 분명히 차이들이 존재한다. 예수는 농촌인 갈릴리에서 주로 메시지를 전하였고, 바울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로마 세계의 여러 도시들에서 메시지를 전하였다. 또한 특히 부활에 비추어서 개념들을 발전시킨 측면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예수와 바울 간에는 진정한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 내재해 있던 것들을 드러내 주었고, 그의 가르침의본지 (本旨)는 예수의 가르침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개의 복음인가 아니면 하나의 복음인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 역시 위에서 서술한 두 입장 사이의 그 어딘가가 될 것이다. 바울은 예수와 공통되는 면들을 갖고 있지만 차이들도 만만치 않다. 그러므로 ‘예수의 추종자냐 기독교의 창시자냐?’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유사점과 차이점들을 달아보아서, 바울과 예수가 그들의 신학적 주된 내용들 및 그들이 말한 내용의 전체적인 취지에서 서로 동일한지, 그리고 예수와 바울 간에는 주요한 방향 전환이 존재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발제의 이후 과정에서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1) 바울은 예수의 사역(그의 가르침을 포함한)을 얼마나 많이 알았고 관심을 가졌는가? (2) 바울은 신학적으로 예수와 어느 정도로 일치하거나 불일치하였는가? 라는 서로 무관하지는 않지만 뚜렷하게 구별되는 이 두 가지 문제를 알아봄으로 바울이 ‘예수의 추종자냐 기독교의 창시자냐?’의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Ⅲ. 예수와 바울 신학의 비교 및 연관성 검토
이제부터의 연구는 (1) 바울 서신들에 나타난 예수전승들에 대한 비평 (2)복음서들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을 역사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예수에 대한 해석된 기사들이라는 인식에 의한 새로운 접근 (3) 마가 우선설이나 마태, 누가 특수자료설 등 공관복음서 문제에 대한 특정 해법을 전제하지 않으며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의 부차적인 자료로서만의 사용(복음서기자의 예수역사 유형 불명확한 점 고려) (4)로마서, 고린도전서 데살로니가 전서 만을 서신서중 연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서신으로 사용하고 데살로니가 후서, 골로세서, 에베소서를 보충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 (5) 예수에 대한 바울의 간접인용 들을 식별해 내는 방법으로는 바울이 직접 예수의 말씀들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경우(고전 7:10) 예수 전승과 바울의 본문간의 어휘 및 양식의 유사성, (고전7:9-11; 마19:3-9; 막10:2-12) 그리고 사상의 유사성(고전 9:14; 눅10:7)등을 단서로 볼 것 (6)복음서들이 통상적으로 바울 서신 이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바울과 복음서에 제시된 전승 간에 연관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 의존의 방향이 예수로부터 바울에게 로가 아니라 바울로부터 복음서 기자에게로의 방향일 수도 있음을 연구를 위한 기본전제로 하여 주요한 6가지 신학적 주제 (하나님나라, 예수(기독론), 십자가 사건, 예수와 공동체, 사랑안에서의 삶, 재림, 예수의 생애 및 사역)에 대하여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을 검토하면서 둘을 비교해 보고 이러한 비교 후에는 바울이 예수전승들을 알았고 또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어떤 증거가 있는지, 즉, 예수와 바울의 연관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A. 하나님 나라
1. 예수의 관점과 바울관점의 비교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살펴보면:예수는 성취의 날,(막1:15; 마5:17, 눅:4:16-21; 요5:39)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의 축출을 선포하였다.(눅10:18, 요12:31) 예수는 병든 자들을 치유하였고, 죄인과 외인들을 환영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막7:20-21, 마5:21-30, 마23:13-32, 눅11:39-48) 그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권하였다(마9:22,막5:34,눅8:48,17:19). 하나님 나라는 임하였으나,(막1:15) 그 완성은 장래에 이루어질 것이라고(마6:10, 눅11:2, 마18:3, 막10:15, 눅18:17) 그는 이해하였다. 한편 바울의 메시지는 예수자신, 특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롬1:1-4) 그러나 예수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성취의 때 - 하나님의 새날 - 가 도래하였다고 믿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와 화해가 드러나서 믿음과 세례를 통하여 그 의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롬10:9, 롬6:3-4, 고전12:13)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 외에도 기적들보다는 선포된 ‘말씀’을 더 강조하였다는 점에서도 예수의 가르침과 달랐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보다는 ‘의’와 ‘화목’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는 등 예수와는 다른 용어들을 사용하였지만, 그근저에 깔려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새 날이 도래하였다는 개념은 두 사람 모두에게 존재하였다.
2. 예수와 바울의 연관성
바울이 예수 전승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사항들을 살펴보면, 바울의 ‘하나님 나라’ 말씀들은 수적으로는 소수이지만 전승에 의한 것인 것 같다; 바울은 독자들이 그러한 말씀들을 ‘알고’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사회적 상황 때문에 ‘의’라는 표현(이 용어도 예수 전승에 뿌리를 둔 것일 수 있지만)을 더 선호한다. 바울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알고 있었고,(고전 13:2,3,13) 고린도전서 13:1-3에 나오는 “모든 비밀을 알고”(마 13:11, 눅 8:10)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마 19:21)라는 바울의 표현들도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그의 특징적인 강조와 아울러 예수의 말씀들의 반영일 수 있다. 구원하는 “말씀”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골 1:6, 마 13:1-23, 막 4:1-20, 눅 8:4-15) 연유하였을 것이다. 바울과 그의 교회들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이 마음의 은밀한 것들을 본다는 것에 관한 가르침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B. 예수(기독론)
1. 예수와 바울의 비교
예수는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비록 예수는 “인자”라는 신비한 표현을 선호하긴 했지만(다니엘서 7장을 특히 염두에 두고), 예수가 스스로를 기름 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보았다는 것이 분명하다.(눅4:18-21) 예수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아들 관계를 인식하고 있었다.(막14:36) 바울은 예수를 선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고(갈4:4)(이 점에서는 공관복음서를 뛰어넘는다), 동시에 진정한 인간(롬1:3), 새로운 아담으로 보았다.(롬5장)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그리스도요 “주”로 보기도 했다.(롬1:4, 9:5, 롬1:1, 빌1:1, 고전4:1, 롬10:9 고전12:3). 이 점에서도 바울은 공관복음서들에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는 내용을 뛰어 넘는다. - 물론 예수가 주시라는 개념은 여러 복음서 말씀들에서 확인되지만.
2. 예수와 바울의 연관성
바울과 예수 전승의 접촉점들을 살펴보면, 바울이 “아바”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막14:36/갈4:6, 롬8:15) 예수 전승이 바울에게 전해졌음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예들 중의 하나이다. 바울의 새 아담 개념은 예수의 “인자” 용어와 연관성을 가질 수 있다.(히2:5-8, 빌2:7) 또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기독론에서 비중 있는 Q 말씀인 마태 11:25-27/누가 10:21,22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몇몇 증거들이 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파당에 대하여 반응한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1:12). 여기서 바울은 사람의 지혜와 영적 ‘지혜’라는 문제를 끄집어낸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교인들, 아마도 달변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의 추종자들은 지혜를 내세웠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에 대응하여 바울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강조한다. 바울의 이러한 반응과 마태 11장/누가 10장에 나오는 “아버지여 --- 감사하나이다”말씀 간에는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지해 주는 몇 가지 논거들이 있다. 첫째 두 구절 간에는 상당수의 어휘 및 개념상의 병행들이 존재한다: 마태 11장/누가 10장 고린도전서 당신은 숨기셨다(11:25/10:21) 감춰져 있었다(2:7) 지혜로운 자들(11:25/10:21)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1:19) 슬기로운 자들(11:25/10:21) 슬기로운 자들의 슬기(1:19) (당신은)나타내셨다(11:25/10:21) 하나님께서 나타내셨다(2:10) 어린 아이들에게(11:25/10:21) 장성한 자들에게(2:6), 어린 아이들에게(3:1) 기뻐하셨다(11:26/10:21) 하나님이 기뻐하셨다(1:21)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무도 모른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1:21) (11:27/cf. 10:22) 하나님의 영 아니고는 하나님의 일을 아무도 모른다(2:11) 이 병행들의 의미는 그 자체로 과장되게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이 병행들은 고린도전서의 여러 장에 걸쳐서 퍼져 있고, 모두가 밀접하거나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아무도 모른다” 말씀들은 몇 가지 점에서 판이하게 다르고, 1:19에서 바울이 언급한 “슬기로운 자들”은 구약 성경(사29:14)에서 가져온 인용문의 일부이다. 어휘상의 병행들은 공통의 주제(이 경우에는 ‘지혜’)를 다루는 기독교 본문들에서는 예상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서로 간에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어휘상의 병행들과 마찬가지로 개념상의 병행들도 존재한다. 바울이 ‘지혜’를 헬라인들과 결부시키지만(고전1:22)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지혜에 관한 바울의 논의는 헬라 철학적인 배경이 아니라 유대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바울은 “이 세대의 지혜,” “이 세대의 관원들,” “하나님 나라”라는 말들을 사용한다(1:20;2:6, 8; 8:18; 4:20). 바울은 “아버지여, 감사하나이다” 말씀 같은 공관복음서 말씀들의 사상 세계 속에 있다. 바울이 Q 전승의 사상 세계 속에 있다고 여러 명의 학자들이 주장해 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이 강하고 능력 있는 자들이 아니라 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택하셨다는 것과 복음이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겨졌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바울의 강조는 “아버지여, 감사하나이다” 말씀의 강조점과 매우 유사하다. 바울은 아마도 예수의 포도원 비유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마21:33-44, 막12:1-12, 눅20:9-19 / 갈4:4, 롬8:3)
C. 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인가?
1. 예수와 바울의 비교
예수가 자신의 다가올 죽음을 예감하였고(마16:21/막8:31/눅9:22) 그 죽음을 장차 하나님 나라를 도래하게 할 수단(마26:36-46, 막14:32-42, 눅22:39-46)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최후의 만찬 이야기는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해방을 가져다 줄 대속의 고난으로 보았음을 보여 준다(마26:26-30, 막14:22-26, 눅22:15-20).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의 구속을 죄악 된 인류에게 가져다주는 것으로(롬3:24), 속죄의 희생제사로 보았다(롬3:25): 또한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신자들이 참여하는 그 무엇으로도 보았다.(롬6:3-4, 갈2:19, 골2:8-12)
2. 예수와 바울의 연관성
바울과 예수의 연관성은 여기에서 특히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최후의 만찬을 알고 있었고(고전11:23), 이에 대하여 고린도 교인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울이 알고 있던 최후의 만찬은 누가 판본(눅22:15-20)의 성만찬 이야기에 가장 가깝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한 세례라는 바울의 사상도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잔을 마시며 자신의 세례를 받으라고 말한 예수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을 수 있다.(갈2:19-20/마16:24, 막8:34, 눅9:23)
D. 예수와 공동체
1. 예수와 바울의 비교
예수는 열두 제자(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을 대표하는)를 파송하였고(막6:6-13, 마10:1-42), 그의 선교를 이스라엘에 초점을 맞췄다(마10:5, 15:24).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공동체(또는 ‘교회’)를 이루기를 기대하였고, 베드로에게 특별한 지도자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에 대해 말하였고(마24:2, 막13:2, 눅21:6), 그의 추종자들의 공동체라는 형태로 된 새 성전이 세워질 것을 내다보았다(요4:21-24). 그는 이방 선교를 자신의 책무로 보지 않았으나(잃은양 비유) 죄인과 외인들에 대하여 혁명적으로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고, 이방인들이 모여올 것을 내다보았다(마24:14, 막13:10).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이방 선교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는 이것이 예수 및 사도들의 좀 더 제한적인 유대인 선교로부터의 새로운 발전이라고 인식하였다(갈3:28, 롬10:12, 골3:11). 바울에게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은 이제 교회이지만,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고전6:15, 10:17, 12:12-13, 롬12:4, 엡1:22, 23:4, 4:15, 5:23, 골1:18)이라고 말하기를 더 좋아한다 - 이는 그의 성찬과 관련된 사고의 발전인것 같다.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에 관한 바울의 이해는 한 몸 관계로서의 혼인에 대한 그의 이해에 비견될 수 있다(엡5:24-33).
2. 예수와 바울의 연관성
우리는 이 장에서 예수와 바울 간의 강력한 연관성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선교 강화(막6:6-13, 눅9:1-6, 마10:1-42, 눅10:1-16)에서 발견되는 가르침과 관련해서 바울은 단지 일꾼이 삯을 받아 마땅하다는 말씀만이 아니라 일부 누가(예를 들면, “너희 앞에 차려진 것을 먹어라”(눅10:8))와 마태(“거저 벋았으니 거저 주어라”(마10:8))에만 나오는 것들을 포함한 다양한 말씀들을 광범위하게 알고 있었다(고전9장). 바울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미련한 건축자에 관한 예수의 비유를 비롯해서(마7:24-27, 눅6:48-49) 열두 제자와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말한 예수의 말씀들을 알고 있었다(고전3:9-15). 바울은 성전의 파괴와 다시 세우는 것에 관한 예수의 예언(고전3:16-17/마26:61,막14:58, 요2:19), 교회 치리와 관련된 그의 가르침들을 알고 있었다(마18:15, 고전5:11/마18:17,고전6:4/마18:19,고전6:1/마18:20, 고전5:4).
E. 사랑안에서의 삶
1. 예수와 바울의 비교
이혼에 관한 예수의 근본적인 가르침(마19:1-12, 막10:1-12)을 필두로 예수와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예수가 윤리적 완전을 요구하였지만(마5:20,48) 구약 율법의 의식과 관련된 규례들에 대해서는 자유로웠음을 발견하였다(마12:9-14, 막3:1-6,눅6:6-11,요5:1-18). 예수는 자기가 율법을 “완성하고”(마5:17-20) 창조 질서를 회복하며(마5:33-37,마15:11,막2:27) 새 언약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렘31:31-34). 바울은 율법에 대한 좀 더 정교한 설명을 제시한다 : 그는 율법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부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보았고, 예수가 성령 안에서 자유의 새 시대를 열었다고 보았다(롬8:4,12:8-10,갈5:14). 바울은 성령에 대해서 예수의 가르침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적어도 공관복음에서)보다 훨씬 더 온전한 가르침을 보여 준다: 성령은 사역을 위한 은사들(고전12-14장), 하나님과 그의 율법에 대한 내적 지식을 준다(고전13:12). 바울에게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최우선순위(예수에서와 마찬가지로)이자 “율법의 완성”이었다(롬13:8). 바울은 사회적으로 급진적이었지만(“종도 없고 자주자도 없다”(갈3:28)), 그의 급진주의는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그의 믿음에 의해 누그러졌다. 바울에게 예수는 기독교 윤리의 중심이자 초점이었다.(골3:17)
2. 예수와 바울의 연관성
바울과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은 온갖 종류의 세부적인 내용들에서 서로 연관성이 있다. 바울은 혼인 및 이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고전7:10-11/마19:3-12, 막10:2-12),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자”에 관한 말씀(고전7:7-8/마11:11-12), 예수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을 방문한 이야기를 비롯한 그밖의 연관된 전승들을 알고 있었다.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바울의 가르침(롬12:14,17-20)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예수 전승을 반영한 것이다(롬12:14/눅6:28) “서로 사랑하라”는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법이었지만(롬13:8,갈5:13/요13:34,15:12-17), 바울은 예수로부터 외인을 사랑하는 것의 중요성,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사상을 배웠다(롬13:8-10). 그밖의 다른 주제들 - 세금을 내는 것, 다른 사람들을 받는 것, 소자들을 실족시키지 않는 것, 판단하지 않는 것, 섬김, 존귀하게 되는 길로서의 겸손 - 도 모두 예수의 가르침을 반영한 것들이다. 바울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 맹세와 관련된 “예, 예 --- 아니오, 아니오” 말씀(고후1:17-18)(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을 공격하는 데 이 말씀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 특유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투를 알았을 것이다. 바울이 독자들에게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권면한 것도(롬8:13,골3:5) 실족하게 하는 몸의 지체들을 잘라버리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 있고, 바울의 육신과 영의 대비도 겟세마네 이야기와 연관성을 갖고 있을 것이다(마26:41/막14:38).
F. 다시 오실 주님
1. 예수와 바울의 비교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 백성의 최종적인 구원을 내다보았고(마20:21, 막10:37, 눅19:11, 24:21, 행1:6)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비롯하여(마24장, 마가13장, 눅21장의 ‘종말강화’) 다가올 심판에 관하여(마13:24-30, 25:31-46) 말하였음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자기가 멀리 떠났다가 다시 올 것이라고 말했고, 그런 일들이 곧 일어날 것이지만(마10:23,16:28,막9:1,눅9:27,마24:34,막13:30,눅21:32) 하나님의 최후의 구원의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였다(마24:36,막13:32,마24:37-41,눅17:26-35). 바울도 구원이 가깝다는 강한 인식을 갖고 있었지만(롬13:11-12), 종말 이전에 여러 가지 일들(이방 선교와 유대인에 대한 심판을 포함한)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믿었다(롬11:24-25). 그는 주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을 “그날”을 기대하였다.
2. 예수와 바울의 연관성
바울은 그의 가르침의 일부를 “주의 말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가 전한 전승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살전4:15), 그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밀접한 병행을 이룬다. 바울은 밤중의 도적에 관한 비유(살전5:2/눅12-39-40,마24:43-4), 야경꾼(살전15:6/눅12:36-38), 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살전4:16-17/마25:6-10), 청지기 비유(고전4:1-5/마24:45-51,눅12:41-46)들을 반영하고 있다. 주의 다시 오심에 관한 바울의 묘사와 특히 누가복음 21:34-36에 나타난 예수의 종말론적 가르침 간에는 두드러진 병행들이 존재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은 예수의 종말 강화(눅21:20-27)와 병행을 이루고, 데살로니가전서 2:15, 16은 예수의 종말론적 가르침(마23:29-38, 눅11:47-51)과 분명한 연관성을 갖는다.
G. 바울의 예수 이야기 (예수의 생애 및 사역) 인지(認知)
바울이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서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다양한 증거들이 결집되어 있다. 바울은 분명히 수난 이야기 형태로 된 부활 전승들, 기적을 일으키는 자로서의 예수 전승들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예수의 수세(롬8:15; 갈 3:26-27; 고전 12:12-13), 그의 사역(고전11:1) 및 가난과 독신을 포함한 생활방식, (좀 덜 확실하긴 하지만) 변화산 사건(고후3:1-4:6)에 대해서도 알았다. 바울은 마태와 누가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비슷한 예수의 유년시절 이야기들(롬1:3,갈4:4/눅1:32-35), 예수의 시험 이야기(고전7:5,고후11:14,12:7-10,갈6:1,살전3:5), 승천 이야기(고전15:3-9)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면, 이 증거들 중 일부는 이러한 전승들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었고(예수의 수세) 이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것(고후3:1-4:6) - 기적들과 변화산 사건의 의미를 놓고 바울과 그의 비판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 - 을 보여 준다. 이 논쟁의 양 진영이 동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은 예수 전승들이 규범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바울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사도직을 예수 전승에 비추어 정당화하고, 자기가 주를 변화산 사건이나 부활 현현 때에 보았던 자들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Ⅳ. 바울과 예수 문제의 결론
본 장에서는 지금까지의 검토결과들을 가지고 먼저 예수와 바울의 신학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바울이 예수 전승들을 알았고 또 사용했는가라는 문제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A. 예수와 바울의 신학: 공통점과 차이점
1. 공통점
우리가 제시한 예수의 가르침과 바울의 신학의 매우 제한된 비교로부터 밝혀진 첫 번째 것은 두 사람의 가르침 간에는 아주 많은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바울의 신학의 중심부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개입하였고 지금도 개입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은 구약의 약속들의 성취로서 특히 예수 자신의 오심과 희생제사적 죽음과 결부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종교인 또는 의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과 외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회복된 이스라엘 - 말씀을 받고 예수를 믿은 자들의 공동체 - 로 모여들었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의 새 성전으로서 주가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고 그의 구원 사역을 완성할 것이라는 대망을 가지고 완전한 사랑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구야 율법을 능가하여 완성하도록 요구받는다. 예수와 바울의 공통점들 중 일부는 그저 그들이 공통의 유대적 유산을 지니고 있었다는 견지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그들의 가르침과 쿰란 공동체의 가르침 간에는 병행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공통점들 중 다수(예를 들면, 죄인들에 대한 열린 태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 메시아적 구원의 날이 도래하였다는 선포)는 기독교 고유의 것으로서 다른 분파들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
2. 차이점
공통점이 훨씬 크긴 하지만, 차이점도 있는 것은 물론이다. 용어상의 차이가 있는데,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와 바울의 “의”라는 용어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두드러지긴 하지만 용어상의 차이이지 실질적인 내용상의 차이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 밖에 더 실질적인 차이들이 있다:예를 들면, 바울의 신학 전반에는 강력하고도 독특한 기독론적 초점이 존재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바울에게는 중요한 구원 사건들일 뿐만 아니라, 예수는 선재하는 우주의 주이다. 바울 신학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있었던 것보다 이방인을 강조한다. 성령은 예수의 가르침(적어도 공관복음서들)에서보다 바울의 사상에 더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반면에, 율법은 다소 부정적으로 다루어진다. 바울 신학에는 교회에 관한 좀 더 발전된 가르침이 나오고(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몸), 그의 신학은 좀 더 ‘말씀’, ‘십자가’, ‘교회’ 중심적인 데 반해 예수는 육체적인 것(예를 들어, 치유), 물질적인 것(즉, 돈), 사회관계 일반을 더 강조한다. 이러한 차이들은 중요하긴 하지만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예수의 신학에서 거의 모순에 가까울 정도로 편차를 보이는 경우는 없다. 편차들은 예수와 바울이 처한 상황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바울은 그의 신학적 사고의 출발점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글을 쓴다. 둘째로 바울은 오순절 사건과 이방선교 개시 이후에 글을 쓴다. 셋째 바울은 교회 생활의 실제적인 문제들과 쟁점들에 몰두하였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부활 이후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후에 글을 썼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를 우주의 주로 묘사하는 것이 놀랄 일이 아니다.
B. 바울의 예수 전승 사용
1. 예수 전승에 대한 바울의 태도
바울이 예수 전승들을 잘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 전승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바울은 그가 주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두 대목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되어 왔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예수가 이혼을 금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자기가 보기에 이혼이 허용될 수 있는 상황들에 관하여 말한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9장에서는 바울은 일꾼이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에수의 명령을 자기가 듣지 않은 것에 대하여 아주 구체적으로 변명을 한다. 그러나 둘 중의 어느 예도 그 점을 입증하지 못한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이 예수가 말하지 않은 문제(그리스도인과 그 믿지 않는 배우자)를 거론하고 있고, 그런 경우에 이혼이 허용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혼 및 재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출발했고, 그것을 이러한 상황을 규율하는 일반 원칙으로 보았다(10, 11절). 게다가 그러한 상황에서 이혼하면서 바울은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 - 이원칙은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예를 들어, 막 9:49) - 을 근거로 든다. 그리고 바울은 그러한 경우에 재혼이 허용된다고 말하는 것(일부 주석자들은 이것을 전제하지만)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의 기본적인 “한 몸” 원칙으로부터 후퇴한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일꾼이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예수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상”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말씀을 그 어떤 상황에도 그대로 기계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불변의 규칙으로 보았던 것(마치 그리스도인 사역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생계를 책임지라고 요구해야 한다는 뜻으로)이 아니라 복음의 섬김 속에서 포기할 수도 있는 권리로 보았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 자기 손으로 일해야 하겠다는 자신의 방침을 “거저 주는 것”과 관련된 예수의 다른 말씀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을 겸손한 섬김을 통한 리더십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에 맞는 것으로 보았다.(고전 9:18, 19과 마10:8; 막10:44,45을 비교해 보자) 바울이 예수 전승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근거로 내세우는 또 하나의 대목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예수가 말한 것과 같은)도 사랑 없이는 아무런 가치고 없다고 바울이 말하는 고린도전서 13:1-3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은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또는 같은 구절에 나오는 모든 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 방언으로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결코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요지는 믿음이나 방언(이 둘에 대하여 바울은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같은 성령의 가장 큰 은사들도 성령의 가장 큰 역사인 사랑 없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예수의 가르침을 폄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실제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강조하면서 사랑을 최우위에 두고 있는 것은 예수 전승의 강조점이다. 여기서 바울이 하고 있는 일은 예수 전승을 인용하긴 했지만 예수의 의도를 충실하게 반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곡하였던 고린도 교회의 은사자들에 대응하여 그 전승을 해석하고 우선순위들을 밝힌 것이다.
2. 바울의 예수에 대한 새로운 시각(고린도후서 5:16)
우리는 바울이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말하고 있는 많은 논의되는 고린도후서 5:16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바울의 이 말을 바울이 한때 예수의 내력(육체대로의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나 그리스도인이 된 지금에는 더 이상 그런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이제 바울은 예수의 육신적인 삶이 아니라 믿음의 그리스도 -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에 관한 복음 - 에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5:16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받아들일 수 없다. 문맥으로 보면, 바울이 자기가 한때 그리스도를 육신대로 알았다고 말할 때 “육신대로”라는 어구는 명사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가 ---- 알았으나”라는 동사를 수식하기 때문에, 바울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때에 자기가 그리스도를 제한적이고 육신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관련된 바울의 말은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는 말 다음에 나온다: 바울의 요지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덕분에 어떤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3. 바울이 예수의 생애와 말씀들을 자주 인용하지 않은 이유
첫째로 바울은 사실 예수의 가르침을 매우 광범위하게 반영하고 간접 인용하였고 그러한 간접 인용을 사람들이 알기를 기대하였다. 둘째로 바울은 신자들이 예수 이야기들과 말씀들을 알고 있다고 전제할 수 있었다 셋째로 바울서신들의 목적이 교회들에 속한 일부 교인들에 의해서 잘못 해석된 예수 전승을 올바로 해석하고 적용을 분명히 하는데 있었으므로 예수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말할 필요가 없었다.
Ⅴ. 결론: 예수의 추종자냐, 기독교의 창시자냐?
지금까지 예수에 대한 바울의 관계라는 문제를 전반적으로 상당히 폭넓게 살펴보았는데 본 발제를 통해 우리는 첫째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말씀)을 바울이 몰랐거나 중요시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것들은 오히려 바울 신학 전체를 형성하는 탄탄한 토대이자 기초를 제공하여 주었던 것이었고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서신들에 예수의 말씀들에 대한 언급이 드물고 또 그들이 대게 암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은 일부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일부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바울은 기독교 사상과 교회 생활의 발전에 참으로 지대한 공로를 끼쳤다.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팔레스타인의 예수 이야기들 및 예수의 말씀들을 이방 세계, 도시화된 로마 제국이라는 훨씬 폭넓은 맥락과 부활 이후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관한 교회의 사고를 형성해 놓았다. 바울은 그때 이후로 계속되어 온 과정, 즉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전승의 의미를 놓고 씨름하는 과정의 시작점에 살았다. 온갖 종류의 어려운 상황들과 상반되는 해석들에 직면하여, 바울은 예수에게도 충실했고 그가 사역하고 있던 새로운 상황에도 적합한 방식으로 예수의 진리를 표현한 것으로 교회에 의해 인정받은 해석을 내놓았다. 당시는 온갖 종류의 다른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의 말씀들과 예수 이야기들을 음행을 정당화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독신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해석하였다(후대의 영지주의적 해석의 선구자로서); 어떤 이들은 예를 들면 사도는 일에 대한 삯을 받아야 한다는 등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기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우겼다; 어떤 이들은 종으로서의 섬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지도자들을 떠받들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 전승에 대한 바울의 해석은 유연하였다. 예를 들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예수의 말씀의 문자에 얽매이지 않았다. “너희 앞에 차려진 것”을 먹으라는 사도들에 대한 예수의 지시를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을 먹는 문제에 적용한 데서 나타나듯이, 바울의 해석은 독창적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해석은 예수의 정신과 의도에 충실한 것이었다. 바울은 예수의 관점과 우선순위들을 보존하였고,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고 말할 수 있었다. 바울의 해석은 방법론의 견지에서 모범이 되었고 교회를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견고히 세웠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의 해석이 극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독교의 창시자였다고 누가 주장했다면, 바울은 기겁을 했을 것이다. 바울에게 신학의 원천은 예수였다: 첫째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요, 둘째는 기독교 전승의 예수였다. 바울은 물론 이 둘을 동일시하였다. 바울은 자신을 기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보았다. 그가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본 것은 옳았다. 이러한 결론 - 대체로 올바르다고 한다면 - 의 중요성은 대단하다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결론은 복음서 전승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 초기 기독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바울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영향을 미친다.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해설하고 있는 주된 본문이 예수에 관한 본문이라면, 바울 서신들을 복음서들과 분리해서 읽기보다는 복음서들에 비추어서 읽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 어설프게 조화시키려고 하는 시도에 빠지지 말고 바울의 동기는 그 무엇보다도 예수를 따르려는 열망이었다는 것을 고려하고서 말이다.
참고문헌 데이비드 웬햄,『바울:예수의 추종자인가 기독교의 창시자인가 』, 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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