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선교사! 목회자란!

[스크랩] 목사의 성공적 가정 교육

하나님아들 2018. 1. 18. 23:03

목사의 성공적 가정 교육

 

1). 가난한 목사와 훌륭한 아들들.

강원도 어느 산골에 아주 가난한 시골 목사님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분은 아들 4형제를 두셨다. 그 목사님은 너무 가난해서 아들들을 제대로 공부시킬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목사님이 암으로 고생을 하게 되었는데, 메디칼썬타에서 입원을 하고 보니 암 세포가 너무 많이 퍼져서 수술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퇴원을 하게 되었을 때 목사님은 병이 다 나아 퇴원하는 줄 알고 기뻐했다. 그러나 병은 점점 깊어지고 병원비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

 

군목으로 입대한 큰아들은 어떤 선교사에게 돈을 빌려 아버지의 병원 비를 감당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목사인 아버지는 많은 고통을 당하시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가 부인과 자식에게 남긴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믿음과 많은 빗을 남겼을 뿐이 였다.

그 후에 사모님은 어떤 선교사 집에 들어가 가정부 노릇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사람들은 그런 목사님과 가족들이 축복을 받았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어도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되돌려 주시는 은혜는 그 다음에 구체적으로 시작 되였다.

큰아들이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한국에 돌아 온 큰아들은 광화문에 있는 작은 교회를 맡았다. 그 목사님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강남의 압구정동에 배 밭을 사 놓았다. 그 목사님은 그곳으로 교회를 옮길 계획을 가지고 그곳에 가서 수개월 동안 기도를 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그곳은 오늘과 같은 신도시가 되었고 목사님이 사 놓은 그 배 밭은 신도시의 한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그곳으로 교회를 옮기고 이름을 광림 교회라 하였다. 그리고 그 교회는 오늘 세계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가 되었다. 그 목사는 바로 김선도 목사님이시다. 그리고 그 김목사님의 4형제는 모두 우리 나라에 가장 성공적인 목회를 하시는 훌륭한 목사님들이 되셨다.

기도로 4형제를 기르신 어머니는 지금도 작은 교회를 섬기시면서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를 하신다고 한다. 이 목사님과 그 가족들을 보면서 어느 누가 감히 병으로 세상을 떠나신 선친 목사님이 세상을 잘못 살았다고 말할 것인가?

 

2). 세상의 명예를 버린 목사 이야기.

나와 아주 절친한 친구 목사가 있다.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을 나왔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삼성 회사에 스카웃이 되어 전주에 있는 제지 회사의 창설 맨버가 되었다. 그의 장래는 창창하고 확실히 보장되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황해도 안악이라는 곳에서 집사로 교회를 충성스럽게 잘 섬기던 분이 였는데, 전쟁통에 가족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전라도 어느 곳에서 살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늦게 사 목사가 되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평양에서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전도사로 안악의 어떤 교회를 섬기시다가 남하하여 교회를 개척하시고,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시면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시던, 당시는 매우 드문 여자 부흥사로써 많은 은혜를 끼친 분이 였으며, 전라도 지방에서는 이름이 많이 알려진 분이셨다.

그러나 목사님도 학교를 다니시면서 학비를 써야 했고, 슬하에 두신 3남매도 모두 학교를 다니는 터여서 지출이 많았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시골 교회에서 여 전도사에게 드리는 생활비가 워낙 적어서 도저히 지출을 감당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래서 그 분들은 늘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 분들은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들이 였다. 나는 그 분들을 가깝게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그 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으며, 교회를 섬겼는가를 잘 볼 수 있었다.

그 분들의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하나님 섬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의 아버지는 50이 넘어 목사가 되었지만 고통을 많이 당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강도사가 되자 마자, 시골의 담임 목사와 장로의 배척을 받아 시골 교회를 떠나 경기도 어느 곳에 있는 아주 적은 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을 하셨다.

그러나 그 분들의 생활은 언제나 궁핍하고 어려워서 자식들을 마음대로 공부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도 학교를 다니면서 고학을 하다 싶이 했고, 딸들도 제대로 공부를 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가난한 시골 교회의 목사였고, 가난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모든 어려운 일들을 기도와 말씀으로 해결하려고 애를 쓰셨다.

나는 청년 시절에 그 분들의 도움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신앙적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별히 거의 밤을 세며 춥고 어두운 교회의 찬 마루 바닥에 끓어 엎드려 밤을 세우시던 두 분의 모습을 거의 매일 볼 수 있었다.

친구는 어려운 가운데 공부를 마치고 삼성 계열의 회사에 취직이 되어 직장 생활을 잘하고 있었으며, 좋은 아내를 맞이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전도사로 교회 일을 하시던 모친이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병 문안을 간 아들에게 당신께서 하나님께 서원하신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것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목사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이라는 것이 였다. 아들인 친구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당장에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신학교에 들어 가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다. 옆에서 그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그런 친구의 행보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효자였던 친구는 부모님의 소원을 따라 목사가 되었고,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된 일에 전혀 후회함이 없이 교회를 개척하여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했다.

 

친구와 그의 부모들을 잘 아는 여러 사람들이 친구를 돕게 되었다. 교회를 개척한지 3년이 안 되여 서울의 강남에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고, 비교적 평탄한 목회 생활을 30년 넘게 하고 있으며, 슬하에 3남매를 두고 다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목사이신 그의 아버지는 경기도의 어떤 교회에서 10년 넘게 교회 일을 보시다가 은퇴를 하셨는데, 지병인 당뇨의 합병증으로 80순이 되었을 때 실명을 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효심 깊은 아들과 며느리와 귀여운 손자들의 사랑을 받으시며 90순이 거의 되도록 장수하셨고, 전도사로 평생 하나님을 섬기시던 기도의 사람, 사모님은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신 몇 달 후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 분들은 소문나게 뛰어 난 목사가 아니셨다. 너무 늦게 목사가 되어 목회의 즐거움을 느끼시기도 전에 은퇴를 하셔야 했으며, 목회 생활의 즐거움 대신 고난과 가난과 괴로움을 많이 당하셨던 분들이시다. 그러나 정말 짧은 목회 생활이 였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진실하시고, 참된 생활로 우리 청년들에게 많은 신앙적 감화를 끼치셨고, 하나뿐인 아드님의 약속된 성공의 길을 버리게 하여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셨다.

 

그 때 친구와 함께 삼성에 스카웃 된 창립 맨버들 중 어떤 이는 삼성의 사장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은퇴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는 교회의 목사가 되어 30여년을 한결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여기서 우리가 누가 세상에서 더 성공을 했는가를 따질 필요는 없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더 잘 살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내 친구는 오늘 하나님의 종으로 산 지난날들을 결코 후회한다거나, 떠난 세상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많은 선교사를 후원하고 있으며, 선교 사업을 위해 온 세계를 누비며 분주하다.

세상살이의 도토리 키 제기 같은 비교를 할 시간도 마음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친구는 입사 동기들을 부러워하지 않지만, 입사 동기들은 친구의 열정적인 복음 사역을 부러워하며 그 때, 그 결단이 잘되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3). 돌아 온 목사의 아들

우리 교회에 충청도 지방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서울 근교의 어떤 군부대에 근무하는 군의관 대위였는데, 야간에는 인근 개인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주 잘 생긴 부인과 어린 아들 하나와 함께 세 식구는 단란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나는 처음에 그들이 그저 평범한 평신도 인줄 알았다. 그러나 시골에서 올라오신 그들의 모친을 만나서 그들이 목사의 자녀들임을 알게 되었다. 목사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안 이후에 나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즉시 내 눈에 뜨이는 것이 있었는데, 저들이 도무지 목사의 자녀들로서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였다. 교회 출석도, 기도 생활도, 교회 봉사도, 심지어 구역 예배에도 참석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11조 생활이나 감사의 생활은 거의 영점에 가까웠다. 나는 그들은 심방해서 여러 가지로 타일러 보고 신앙 생활에 좀더 적극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별반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의무감에 의해 하는 평범 이하의 신앙 생활을 했다. 나는 그들에 다하여 차츰 실망하기 시작을 했다.

 

그럴 지음 그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병원에서 밤 근무를 하고 있을 때, 급한 환자가 응급실에 들어 왔는데 그의 실수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응급 처치를 받던 환자가 사망해 버린 것이다. 환자가 죽자 사망자의 유가족들은 처치를 맡은 의사의 실수로 환자가 죽었다고 격렬히 항의하기 시작을 했고, 그런 사건을 맡아 처리하는 사람들까지 동반을 해서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로 몰고 갔다. 의료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들은 그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해결이 되기커녕 점점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졌다. 더욱이 그가 군의관으로써 일반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점이 더 큰 약점이 되어 꼼짝없이 어떤 중한 처벌을 받게 되는 지경까지 몰리게 되었다. 유족 측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화질을 하기도 하고 찾아오기도 하면서 갖은 공갈 협박을 했다. 목사의 아들과 그 가족들은 피골이 상접해져 갔다. 그렇게 어렵게 공부한 의사의 면허증을 취소 당하고 감옥에 갈 수 있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그렇게 사건이 복잡해지고 어려워지자 나를 찾아 왔다.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다 듣고 났지만 나로서도 뾰쪽한 해결 방법이 없었다. 나는 유족들도 만나보고, 그 사건의 브로커도 만나 보았지만 그들의 살기 등등한 자세 앞에서는 백약이 무효였다. 그러나 유족들의 말을 다 들어 본 결과 그들이 요구하는 위자료를 주면 일이 해결될 수 있음을 알았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너무 큰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살던 전셋집의 전세금을 빼고 그것도 모자라 빗을 얻어 유족 측에서 원하는 거액의 보상금을 주고서야 그 사건은 끝이 났다. 그러는 사이에 어머니인 사모님은 수도 없이 아들의 집에와 기도를 하고 무엇인가 후회를 하면서 한탄을 하곤 했다. 일이 수습이 되고 나서 그들은 이사를 갔다. 가기 전에 그들 부부가 나를 찾아 왔다. 그리고 후회와 회개가 가득찬 고백을 했다

 

「목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저는 목사의 아들이 싫었습니다. 너무 많은 부분에서 목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부자유하고 걸리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던 목사의 아들이 아니고 싶어 지금까지 몸부림을 치다 싶이 하고 살아 왔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교회에서 선생들이나 교인들이 특별한 관심을 가져 주어서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가고 부터서 목사의 아들이라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나를 따돌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더욱 심하게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목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모범생이 되어야 했는데 나는 모범생이 될 생각도 없었을 뿐 아니라, 모법 생이 되어야 한다는 그 자체가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원래 제 본명은 지금 부르는 이름이 아니고 '요셉'입니다. 그 '요셉'이라는 그 이름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였습니다. 너무 기독교 신자의 냄세 가 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놀고도 싶고 장난질을 치고도 싶었으며, 술도 먹고 담배도 피우고 싶고 여자 친구들과 사귀고도 싶었는데 아무도 나를 그런 모임에 끼워 주지 않았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졌습니다. 술자리가 있어 한잔하려면 언제나 나는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요셉이가 술을 먹으면 되나' '요셉이가 술을 먹으면 세상이 끝장나는 거지 뭐'등등--- 친구들과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나를 가지고 한차례 농담을 하며 킬킬거렸습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목사의 아들로 정말 모범생이 되지도 못했고 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굴레를 벗어버리고 훨훨 날아 자유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초신자인 것처럼 교회를 다녔습니다. 안 다니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불신자들과 똑같은 생활을 지금까지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술집에도 가고, 아시다 싶이 담배도 많이 피우고, 여자 친구들과 사귀고, 돈을 벌기 위해 양심의 소리를 접어 두기도 하면서 목사 아들의 탈을 완전히 벗어 버렸습니다. 물른 교회를 섬기는 일은 아시는 바와 같이 그렇게 소극적이며 오히려 교회에 대한 이상한 반감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나를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감옥처럼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이 세상에 교회가 하나도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 까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목사님들의 설교는 언제나 거짓과 가식으로 가득찬 말들의 나열이 였고, 자기들도 그렇게 못 살고 있으면서 교인들만 들볶은 자들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교회를 완전히 떠날 수가 없었으며, 내 마음에서 교회에 대한 의식을 지워 버릴 수가 없어 더욱 미칠 지경이 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 나이 34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 괴로움을 겪으면서 내가 얼마나 못된 인간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자와 술, 담배, 오락, 돈, 세상의 친구, 내가 추구했던 출세들이 얼마나 보잘 것이 없는 허무한 것들인가를 알 수 있었으며, 그런 것들을 미끼로 하고 나를 유혹했던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세상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자신 있게 떠났다고 생각했던 하나님과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으면서 세상을 향한 망상에 사로잡혀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으로 살아 왔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밤낮으로 집과 직장으로 날아드는 공갈과 협박, 정신적인 테러와 터부니 없는 죄 뒤집어 씌우기, 싸늘하고 냉정한 친구들과 사람들, 엄청난 그들의 돈에 대한 요구로 인해 이제까지 밤낮으로 일해서 모은 재산들의 무가치함, 이로 인한 가족들의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밤낮으로 기도하시며 근심하시는 부모님들 사이에서 저는 너무 사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은, 가족들이 아니고 내 장래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왠 일인지 그렇게 부인하고 조소했던 지옥 때문이 였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 고통스럽고 무서운 일 때문에 길을 가면서도 기도를 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기도를 하고, 잠을 자면서도 기도를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처음에는 정말 많이 놀랐습니다. 나는 내 의식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지워 버린지 20년이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염치도 없이 맹렬히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인간이 이럴 수도 있는 가라고 스스로 반문하면서 다시는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겠다고 생각을 고초 먹었습니다. 아니 그 동안의 내 생각과 생활이 어떻게 하나님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가라고 생각이 되어, 죄송하고 몰염치한 마음에 내 일을 도와 달라고 하나님을 찾아 기도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 없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고 맹세를 해도 어느 사이에 나도 모르게 '하나님 아버지'가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제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터져 버릴 것 같은 답답한 심정을 견딜 제간이 내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생전 처음 기도원이라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답답하기도 했지만, 협박하는 사람들 때문에 너무 심신이 허약해진 아내가 측은하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정리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기도원에서는 어떤 모임이 있었는데, 몇 사람되지 아니한 사람들이 모여 저녁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자존심이 살아 그들과 어울려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기도하는 시간에 아내와 함께 기도원 뒷산으로 올라가 한숨을 쉬며 이 괴로움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 것인가를 의논했지만 특별한 대안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실컷 울었으면 좋겠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으며, 협박자들을 보지 않으니 다시 지금 우리가 당하는 일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화급히 이렇게 기도원에 와 멍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헛일이 아닌 가라고 생각이 들었으며, 하나님을 찾는 일도 드물어 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목요일 밤 예배에서 저는 제가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시는 분은 그 날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갔다가 망해 돌아 온 탕자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도 전에 수없이 많이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설교하시는 분의 설교는 그 탕자의 이야기를 그저 평범히 이야기하는 그야말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내게 그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였습니다. 바로 나를 두고 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나쁜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다 들쳐 먹고 돈 떨어지자 아버지에게 돌아 왔다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되지 못한 아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한없는 사람의 이야기로 들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못된 인간을 그렇게도 오랫동안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닐 때나, 군대에 와서 하나님의 자녀로는 할 수 없었던 못된 짓거리를 했을 때, 우리 부모님은 늘 괴로움을 당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에는 부모님에게 죄송한 생각이 들었으나 하나님에게 죄송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는 그게 아니였습니다. 내가 세상으로 나가 보잘 것 없는 세상 것들에 미쳐 날 뛰고 있을 때, 속이 타고, 마음이 아파 그런 짓을 그만 두고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시면서 기다리시는 분이 우리 부모님 말고,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우리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고 고통스럽게 한 것의 천만 배의 아픔과 고통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나로 인한 마음 상하심이 결국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해 나를 구원하신 사랑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순식간에 내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찾았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여 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세상으로 가야 자유가 있고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일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게 되었으며,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회개를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저는 생전에 사람의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그렇게 많은 물이 쏟아지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몇 시간을 회개했는지,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덧 날이 훤하게 밝아 온 후에 사 우리 부부는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정리해서 그들의 요구대로 다 주고, 새로운 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제 모든 정리가 다 끝이나  내일 우리는 이사를 갑니다. 그 동안 목사님을 괴롭혔던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며칠 후에 새로 이사한 우리 집에 오셔서 예배를 드려 주십시오.」

 

말을 하는 동안 김 대위는 많이 울었다. 그의 아내도 울었다. 나도 울고 내 아내도 울었다. 돌아 온 탕자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들이 였구나 생각되었다. 그는 한 동안 하나님을 떠났어도 하나님은 그를 떠나지 않으셨으며, 언제나 하나님의 품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목사의 아들로------

 

그가 연락을 해서 그의 새로 이사한 집에 심방을 갔다. 그가 사는 새 집은 그가 근무하는 부대 옆에 붙어 있는 7평도 체 못되는 아주 작고 낡은 집이 였으며, 그것도 천신만고 끝에 그들 식구들에게 돌아 온 부대의 사택이 였다. 짐이 많아 산처럼 쌓아 놓은 살림들 속에서 우리는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곳은 바로 천국이 였다.

그 부부는 그곳에서 일년 이상을 살고 만기 제대를 했는데, 군복을 벗고 나를 찾아 왔다.

 

「목사님! 그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 고맙습니다. 저희는 서울이 싫어졌습니다. 시골로 가려 합니다. 아주 먼 시골로 들어 가 제가 할 수 있는 일로 자유롭고 보람되게 살려고 합니다. 자리를 잡거든 연락을 드리겠으니 멋있게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한 번 꼭 오십시오.」   

 

4). 자식을 하나님의 종으로 가르치기.

어느 날 초등 학교 4학년이 된 우리 아들 녀석이 이런 말을 했다.

「아빠! 우리는 왜 거지처럼 맨 날 다른 사람들에게 얻어먹고 살아???」

「아니, 그건 무슨 말이야. 얻어먹고 살다니------」

「그렇잖아. 사람들이 가져 다 주는 것만 먹잖아.」

「뭘????」

「쌀도 그렇고, 반찬도 그렇고, 과일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뭐---- 다 그렇네.」

 

아이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돈으로 시장에 가서 사 먹지 않고 성도들이 가져 온 것만 먹는다는 말이다.

우리 부부는 이들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났다. 그래서 정색을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하고 목사를 위해 가져오는 제물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건 우리들이 사람들에게 얻어먹는 것이 아니란다. 성도들이 교회에 가져오는 모든 물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가져오는 제물이다. 그리고 그 제물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란다. 그런데 아빠는 목사로써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 너희들 공부시키데 필요한 돈을 벌 수 없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성도들이 가져 온 것을 먹고 쓰도록 해 주셨단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들이 가져 온 것을 먹고 쓰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먹고 쓰는 모든 것들은 사람들이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사 오는 것과는 그 의미가 엄청나게 다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그것이 돈이던, 쌀이던, 과일이던, 거룩한 제물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들은 그 거룩한 제물을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쓰는 것이다. 우리가 먹고 있는 밥도 그렇고, 반찬도 그렇고, 너희들이 입고 있는 옷도, 학용품도, 차비도 모두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통해 주신 거룩한 제물들이다.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쓰는 모든 것에 대하여 단순한 물건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우리가 쓰는 모든 것에는 성도들의 사랑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성도들을 통해 주신 물건들을 쓸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물건을 하나님께 드려 우리들이 쓰도록 해 준 성도들이 잘 되도록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 거룩한 제물에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한다. 다시는 얻어 먹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처럼 좋은 것을 먹고사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그리 많지 않단다.」 그 한 번의 교훈은 아이에게 잘 주입이 된 것같다.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둥근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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