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예배 기타!!!

[스크랩] 예배(禮拜)에 대한 이해

하나님아들 2018. 1. 15. 22:57

예배(禮拜)에 대한 이해

 


제1절  예배의 정의(定義)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으뜸의 자리를 차지한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삶 속에 포기할 수 없는 하나를 말하라고 한다면 분명 그것은 예배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존재하듯(롬 11:36; 골 1:16; 계 4:15, 5:13),
그리스도인 역시 예배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최고의 모습을 나타낸다(시 95:6).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배를 위한 삶인 것이다.
교회를 왜 출석하는가?
성경 공부, 친교, 전도, 봉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예배 없이 그 어떤 프로그램들도 스스로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
예배는 교회의 모든 행사를 끌어 안고 그것들이 가치를 나타낼 수 있게 해주는 어머니와 같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는 첫째 이유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이다.
열성적인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새벽 예배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열성적인 신앙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과는 예배인 것이다.
그러나 비록 열성적이지는 못하다 하여도 신자라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예배에 참석한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예배는 언제나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참된 교회를 언급하면서,
진정한 교회는 의미 있는 예배를 통하여 끊임없는 동력(動力, power of activity)을 얻는다고 했다.
이 동력은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바로 보며, 미래를 창조하는 동력이라 했다.(a)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규칙적인 예배를 드리지만 그것이 형식화되거나 의식화되지 아니하고 언제나 생명력이 넘치는 예배를 드린다.
참된 교회는 예배의 본질을 알고 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드림의 올바른 방법도 알고 있다.
참된 교회의 예배는 흐트러짐 없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지는, “신령과 진리”의 예배를 드린다(요 4:23~24).
그러나 오늘 이 시대의 교회 예배를 진단해 볼 때,
예배를 통하여 동력을 얻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많은 신자들이 예배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버리고 있다.
주일 낮 예배로 만족하려는 신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소위 대형 교회라고 하는 교회들의 저녁 예배를 보라.
성가대 좌석은 텅 비어 있고 회중의 좌석도 많이 비어 있다.
낮에는 1부, 2부, 3부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저녁 예배는 한 번의 예배로 끝내고 만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예배에도 낮 예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숫자만이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이같은 예배 참석의 불균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로버트 웨버(Robert E. Webber)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공중 예배에 대해 식상해 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진단하였다.(b)
첫째,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반역사적 편견(antihistorical bias)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일부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반역사적 편견을 가지고 교만하게도 과거의 예배를 부정하는 우(愚)를 범했다.
초대 교회의 예배로의 환원은 꿈도 꾸지 않고 있다.
이러한 그릇된 태도로 인하여 오늘의 예배는 성경적 예배와는 단절되었고,
그로 인한 피해와 손실이 가중되었고 역사적 통찰력의 사용마저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둘째, 예배가 합리주의(rationalism)나 감정주의(emotionalism)나 오락주의(entertainment)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는 이성에 주안점을 두어 지성적이고, 반사적이고, 인식적인 접근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또 어떤 교회는 감정적 요소를 강조하여 예배의 접근 방법이 느낌에 치우쳐 있다.
또 어떤 교회는 오락적 요소에 주안점을 두어 교회의 예배란 교인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제공하는,
그래서 성가대 자리와 단상이 무대가 되고 설교자는 연극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셋째, 균형의 상실로서 교회 활동의 모든 측면을 균형 있게 강조하지 못하는데 있다.
이러한 원인들을 지적한 로버트 웨버는 예배 갱신을 외쳤다.
로버트는 예배 갱신을 원하는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첫째 성경으로, 둘째 교회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c)
이제 분명한 사실은 예배 갱신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배에 대한 지식의 변화, 태도의 변화, 그리고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d)
공중 예배에 대해 식상한 신자들에게 예배의 참 뜻을 발견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이 시대 속에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뜻을 계시 받고
그리고 받은 바 계시를 주저함 없이 삶으로 표출할 수 있는 역동적인 신앙인(dynamical Christian)이 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 예배가 구약 희생 제사의 완성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신령과 진리의 예배”(요 4:24)임을 분명하게 일깨워 주어서
공중 예배에 식상한 신자들 모두가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요 4:23)로 만들어야 한다.
이 작업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현대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천국 문을 열수 있고,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게 될 것이다(마 16:18~19).
이제 이 작업을 “예배”라는 단어의 어원적 고찰부터 시작한다.


1 . “예배”의 어원적 고찰
먼저 예배(禮拜)는 禮(예도 례)와 拜(절 배)로 글자 뜻만으로는 ‘예의를 갖추어 절함’이다.
우리 말 풀이를 백과사전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앙 대상과 인격 대상에 대하여
신순(信順)· 귀의(歸依)·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는 행위로 보통 저두(低頭: 머리를 숙임)·
합장(合掌: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음)· 박수(拍手)· 기도· 독경 등이 수반된다.
공적인 장소에게 의례적· 형식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공적 예배),
단독으로 개인 신앙의 차원에서 하는 경우도 있다(사적 예배)’고 설명하였다.(f)
이같은 설명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예배 본질과 일치한다기 보다는 범신적 예배의 모습을 더 잘 설명한 풀이라고 본다.
타종교의 예배가 하나의 의식을 위하고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한 절차적(節次的)인 것이라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전인적인 감격 속에 자신이 받은 거대한 은총의 주인 앞에 나아와 감사와 보답의 표현을 하는 것이다.(g)
영어의 “예배”(worship)은 "worth"(가치)와 "ship"(신분)이라는 두 의미가 합성된 앵글로색슨어 "weorthscipe"에서 유래되었다.
즉 "worship"은 ‘존경과 존귀를 받으실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란 뜻으로,
창조주 하나님만이 최고의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만한 가치가 있으므로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께 최고의 존귀와 가치를 돌려 드리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이런 의미의 표현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말씀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구약성서 시편 29:2에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하였고,
신약성서 요한계시록 5:12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안셀름(Anselm)은 “하나님 이상의 가치 있는 분을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고,
압바(R. Abba) 교수는 “오늘의 성도들이 ‘오! 하나님, 당신의 나의 하나님이시옵니다’라고 고백할 때
누구나 ‘오! 주님, 주님만이 영광과 경외와 권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라는 뜻과 표현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g)
구약성서에서 예배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 단어는 “아바드”(דꔨꘝ)이다.
아바드는 ‘일하다, 작업하다, 봉사하다’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동사(動詞)이다.
여기서 파생된 명사 “아보드”(הꕇוֹב꘥)는
‘수고, 봉사’의 의미를 가지며, 레위인들은 이 단어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였다(민 3:7~8; 4:23, 30, 47; 8:11,19).
LXX은 제사장들의 공적인 섬김만을 가리키는 곳에 쓰여진 이 단어를 “라트뤼오”(λατρεύω)로 번역하였다.
또 영어 service(‘봉사,’ ‘섬김’)의 유래도 이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또 다른 단어는 “샤하아”(הꖎꚂ)인데 그 본래 의미는 ‘구부리다’이다.
이 말이 “굴복하는 것” 또는 “자신을 엎드리는 것”으로써
숭배, 순종, 봉사의 뜻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과 몸으로 최고의 존경과 겸허의 자세로 엎드려 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에서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였다”는 표현이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다(창 24:26; 출 4:31; 34:8 등).
이 두 개의 대표적 단어에서 예배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예배자들의 주요한 삶의 근본이 되어졌다는 사실이다.(h)
신약성서에서 “예배”는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와 “라트레이아”      (λατρεία) 두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먼저 “προσκυνέω”는 ‘누구에게 입맞추다’, ‘고개를 숙이다’는 문자적 의미를 갖고 있으면서
신들에 대한 경의로운 숭배를 의미하는 고대 용어였다. 이 숭배는 땅의 신들의 경우, 땅에 입을 맞추기 위하여 몸을 땅에 구부리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 시에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 그리고 신약성서 안에 이 단어는 약 24회나 사용된 신약 “예배”의 대표적 단어이다.
“λατρεία”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마지막 시험을 물리칠 때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 4:10)라고 하신 말씀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바울은 이 “λατρεία”를 구약의 제의와 관련하여 “섬기다”(롬 1:9) “바치다”(롬 12:1), “예배”(롬 9:4) 등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바울은 이 말을 복음의 섬김을 위탁받은 그 자신과 교회의 특권과 영광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섬김은 이방인들을 구원함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신 존귀와 가치를 지니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i)
그 외 예배의 예전(禮典) 의식과 관련하여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ία)가 있다.
기본적 의미는 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특별한 제의적 의미로서 이 단어는 신에게 봉사하는 섬김, 사역으로 쓰였다.
누가복음 1:23에서 이 단어는 제사장의 “직무”를 히브리서 8:6에서는 예수께서 구약의 제사장보다 더 “아름다운 직분”을 받으셨음을,
사도행전 13:2에서는 선교사의 직임을 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초대 교회는 점차 이 단어를 공식적인 성직자가 집전하는 공적 예배에만 엄격하게 적용하게 되었다.(j)



2 예배의 내적 의미
지글러(F. M. Segler)는 “예배는 예배 그 자체 안에 목적이 있다.
예배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한 방법이나 수단이 아니다.”라고 했다.(k)
그렇다. 지글러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는 신앙 표현의 한 모양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로 드리고자 함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하였다.
칼 바르트(Karl Barth))의 표현은 이렇다.
“교회의 예배는 그 자체를 위하여 수행하는 오프스 데이(Opus Dei) 곧 ‘하나님의 일’이다.”
성서의 예배 용어에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최고의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신이시고,
예배를 드리는 자는 그 분 앞에 최고의 경배의 자세로 섬김의 예(禮)를 다하여 엎드린다는 의미로 종합하게 된다.
로버트 레이번(R. G. Rayburn)은 성서에 나타난 예배 용어들의 의미를 이렇게 종합하였다.
첫째 그리스도교 예배는 신실한 신앙인이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존엄성을 인식하고
살아 있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굽어 엎드리는 것으로 이 때에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께 경외와 찬양과 감사와 존귀를 드릴 수 있다.
둘째 예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었던 그대로 순종하는 종의 자세로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으로 여기서는 예수께서 사탄의 유혹도 물리치고 십자가의 희생을 감수하시는 자세가 본이 된다.(l)
첫째,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만남”(meeting between God and His people)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오직 하나님 당신께서 긍휼을 얻어야 할 자들을 친히 만나 주시는 길뿐이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만남을 허락하여 준 인물들은 극히 제한적인 소수였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의인 노아, 아브라함, 야곱, 요셉 등이 그러한 인물들이었다.
출애굽기에 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셔서 당신과의 만남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특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남을 위한 특별한 장소, 곧 회막(會幕, the meeting tent)를 만들도록 명하셨다.
하나님은 회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고 그들의 제사를 받으셨다(출 29:42~43). 회막은 이동 예배 처소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향하여 이동할 대에 회막도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이동하였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 이동 예배 처소를 고정 예배 처소인 성전을 지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손으로 지은 집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니셨다(왕상 8:27).
이스라엘은 솔로몬 성전 이후 두 번 더 새 성전을 지었지만
결국은 예수께서 예언하신 바와 같이(마 24:1~3; 막 13:1~4; 눅 21:5~7) 손으로 지은 성전은 파괴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셨고(요 4:21),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은 장소가 아니라 때(ὥρα; 시기 the hour)임을 말씀하셨다.
둘째,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이 만나는 만남이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자 할 때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만남의 특별한 장소를 찾아 나가야 했다.
물론 예배를 위한 특별한 제물도 준비되어 있어야만 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에 심도있게 논의할 것이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더욱 온전한 예배를 친히 준비하셨다.
그 예배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신령과 진리”(m)로 드려져야 하는 예배로서,
이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고 하신 진리의 예수님을 통하여 드려지는 예배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 예배는 진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안에서(in),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through) 드려지는 신령하고 온전한 제사이다.
지글러(F. Segler)는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다”라고 말하였다.(n)
셋째,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계시된다.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만나 주실 뿐 아니라, 당신의 뜻을 계시하여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응답한다.
예배학자 헉스터블은 (Paul Waitman Hoon)은 예배의 현장을 계시와 응답이 만나는 지점으로 경험한다고 했다.(o)
즉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대화의 현장이 이 예배 가운데서 발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을 통하여 예배자들의 가슴 속 깊이 임재하게 된다.(p)
넷째, 그리스도의 예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든 섬김을 받으신다.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자녀로서 드릴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을 드리는 예배이다.
그리스도교의 예배의 무엇을 얻으려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self-offering)이다.(q)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빈손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출34:20; 시 96:8).
구약은 제사 의식에 알맞은 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신약의 예배는 더 이상 짐승의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단번에 바쳐진 온전한 제물이기 때문이다(히 10:10, 14).
그럼 무엇을 바칠 것인가? 결론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변화된 모습 전부를 드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다(롬 12:1).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최고의 섬김을 받으실 가치를 분께 최고의 섬김을 드리는 자발적이고 자원하여 드리는 낙헌제(樂獻祭)이다.



제2절   예배의 성서적 근거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그 준거(準據)를 성서에 둔다.
성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전(原典)일뿐만 아니라 교회 예식의 총서(叢書)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의 전승(傳承, tradition)보다 성서의 절대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올바른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는 노력은 성서를 연구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 신· 구약 성경 안에서 발견되는 예배의 준거에 대해서 간략하게 검토한다.

1 . 일반적 사실
사람은 원래부터 종교적이며 그 어떤 경외의 대상을 예배하며 살아왔다.
종교학에서 사람의 심성은 그 출발부터가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독일의 종교학자 헷팅게르(H. Hettinger)는 인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은 듀르케임(Durkheim)의 말과 같이 종교적 동물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그 속에,
가장 깊은 마음 속에 본성적으로 종교 의식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을 왜 종교적 동물이라고 하느냐고 묻는 것은 인간을 왜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존재양식(存在樣式) 구성한 것의 원인을 찾는 것이 된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결국 인간은 신에게서 창조를 받은 것이요,
창조를 받은 자로서 창조한 자에게 대한 의존성을 암암리에 항상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다 창조주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땅에서 집어서 공중에 올리친 돌이 반드시 지구의 중심을 향하여 떨어지는 것처럼,
어머니에게서 난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것처럼, 자석의 한 끝이 북극을 가리키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소원은 항상 창조주 신에게 돌아가려는 것이다. 신의 모든 물건의 태양이요, 모든 신령의 중심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에 있어서는 상호(相互) 간에 인력이 모든 천체로 하여금 그 위치를 지니게 하고
태양계의 모든 유성은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는 것과 같이 인간의 정신은 항상 신을 지향(指向)하고 있다.
이것이 곧 인간의 종교심의 본원이다.
말하자면 태양의 광선이 사람의 눈에 들어오듯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그러나 매우 강하게 들어오고 있다. 인간 생명의 시작도 되고 중간도 되고 종말도 되는 신은 인간을 끊임없이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r)
원시 인류는 자연을 숭배하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물을 신으로 만드는 다신교이거나 자연의 만물을 신적인 실체로 간주하는 범신론이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런 예는 애굽 사람들이 태양을 “라”(Ra)라고 하는 신으로,
나일강과 풍요의 신 “오시리스”(Osiris)를 섬김 것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원시 예배의 형식은 일반적으로 악령을 막아내고 노한 신을 달래기 위한 제물과 미신적인 제사로 구성되었다.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주술적인 의식이 예배 의식의 전부였다.
인류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의 수고에 의하여 발견된 원시 종교의 예배 의식은 현대인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끔찍한 형태도 많이 있었다.
고대 어떤 사회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쳤으며, 제단 위에 산채로 묶어 불태워 죽이기도 하였고 또 생매장하기도 했다.
어떤 가나안 사람들은 불의 제단에 자기 자녀를 바쳐서 몰록 신을 예배하였다.
심지어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s)까지도 섬겼다.
이와 같은 종교적 심성이 각각의 문화와 일련의 사회 정황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나름대로 독특한 예배 의식을 발전시켜 왔다.
원시적인 예배 형태로는 하늘, 땅, 해, 달, 번개, 비 등을 숭배하는 천연 숭배(天然崇拜)에서부터 조금 진보된 것으로는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섬기는 예법을 만들어 숭배하는 우상 종교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나라와 사회마다 종교가 있고 예배가 있다.
그렇다고 우리 그리스도교의 예배가 일반 종교 예배 의식의 발전 과정을 밟아 오늘에 이르렀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일반 세상의 종교는 인간이 만든 인간 종교이지만,
우리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이 계시하여 준 계시 종교이며 예배 의식도 사람의 방법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드려진다.
물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예배에 관한 일체의 계시는 성서에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창세기부터 그 기원을 찾아보아야 한다.

1 . 구약 성서의 근거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그들은 동침하여 가인을 얻고 또 아벨을 얻었다.
가인과 아벨은 장성하여 때가 되어 각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가인은 농사 짓는 자이었으므로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으므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다.
가인은 심히 분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동생 아벨과 단 둘이 들에 있게 되었을 때, 동생을 쳐죽였다(창 4:1~8).
위 창세기 기사(記事)는 인류 예배에 대한 첫 공식적 기록이다.
이 기사에서 세 가지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인류는 그 시초부터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올바른 예배가 있고 하나님이 거절하는 그릇된 예배가 있다는 것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불행하게도 그릇된 예배자가 올바른 예배자를 죽였다는 사실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류는 다양한 종교와 그 예배 의식의 차이의 시발은 가인의 그릇된 제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창세기의 첫 예배 기사에서 가인은 그릇된 제사를 드렸고,
또 불행하게도 가인은 올바른 제사를 드린 동생 아벨을 쳐죽였다.
이는 장차 인류가 그릇된 제사를 드리는 자들로 인한 싸움이 그치지 않을 것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분명한 사실은 가인의 후예들이 지상에 충만해졌다는 사실이고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예배가 아닌 자기 만족을 위한 그릇된 예배를 끊임없이 드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가인 이후로 당신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자를 찾고 계셨다.
그러나 타락하고 범죄한 인류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드릴 수 없었다.
결국 인류는 여러 종류와 갖가지 모습으로 신을 예배하고자 하였지만
모든 예배는 신을 기쁘게 하는 예배가 아니라 인간의 만족을 추구하는 잘못된 제의(祭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예배 일체를 계시하여 주셔야 만했다.
고대 세계에서 이교 예배와 구약 성서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예배와의 차이점은
하나님께서 한 특별한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사실과 하나님께서 자기를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선택하신 사실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받으실 예배 일체를 계시하여 줄 인물을 찾으셨다.
 가인 이후로 몇 세대가 지나 하나님께서는 올바르게 예배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아 내셨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던 날에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새들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하나님은 노아의 제사를 받으셨고 무지개를 새 언약으로 주셨다.
그리고 또 몇 세대 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예배자였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까지도 아낌없이 드리고자 하였다. 분명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받으시려는 뜻이 아니라,
당시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가나안 이교 제사의 그릇됨을 깨뜨리시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을 선택하셔서 당신께서 받으시는 예배와 예배자의 모형을 삼으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났으며 가나안 땅에서도 오직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예배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계시하여 주셨으며,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는 백성을 만들 것을 약속하셨다.(t)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법을 배웠다.
그는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26:24~25).
이삭의 아들 야곱은 독특한 예배 경험을 체험하였다.
벧엘에서 사닥다리의 꿈을 꾸고 그 감격을 찬양하였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殿)이요 이는 하늘의 문(門)이로다”라고 하였다.
야곱은 그곳에 돌로 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 하였다.
아브라함의 씨가 땅에 편만 하여졌을 때에 하나님은 새로운 제사 법을 계시하여 주셨다.
유월절 제사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더욱 분명하고 올바른 제사 법과 제사 처(處)인 성막을 계시받았다.
특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실한 신앙심을 요구하셨다.
여호와 외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일체 금지되었다.
그리고 이 주의(主意) 말씀을 하나님은 친수(親手)로 새겨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제사 법과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막도 계시되었다.
이제 이스라엘의 모든 제사는 성막에서 드리게 되었다.
성막은 공식적인 예배 장소인 것이다.
성막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는 회막(會幕)이 된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제사를 전무(專務)하는 제사장도 임명되었다.
사사 시대는 가나안 이방 신들과의 전쟁의 시대였다.
바알(Baal) 종교로 대표되는 가나안 우상 숭배에 포위된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을 견지하기 위하여 사사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기드온에게 “여룹바알”(u)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삼손은 그의 장렬한 최후를 다곤 신전의 두 기둥을 끌어안고 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점차 가나안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사울은 길갈 성소에서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화목 제물을 드렸다(삼상 11:15).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예루살렘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사고 그곳에 단을 쌓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삼하 24:25).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계획과 재료들을 준비하였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예배에 바친 거룩한 장소들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정교한 곳이었다.
이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적 성소가 되었다.
성전 안에는 봉헌된 기구들로 정성 들여 갖추어졌다.
“금단과 진설병 상들과·······정금 등대와 그 등잔·······또 전 문 곧 지성소의 문과 외소의 문을 금으로 입혔더라”(대하 4:19~22).
솔로몬은 장로와 레위 사람들을 명하여 성전의 법궤를 모시게 하였다.
성전 제의에서 레위 사람들은 제금과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장엄한 성전과 함께 성전 제의는 더욱 발전되었다.
여기 전국적으로 지키는 절기는 이스라엘을 새로운 성전 신앙으로 결속시켰다.
예루살렘 성전은 전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지였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올라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였다.
그들은 십일조와 성전 제의에 바칠 희생 제물을 가지고 왔다.
성전 제의 예배에는 희생 제사와 함께 음악, 축송, 충, 행렬, 기도, 악기 연주, 간단한 설교, 서원, 제단의 제물을 나눠 먹음, 정결 의식 등이 첨가되었다.
그러나 성전 제의는 차츰 순수한 신앙의 본질을 잃어 갔다.
솔로몬 말기부터 왕의 타락과 함께 형식화되기 시작하였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본래적 목적을 상실하는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후기의 많은 예언자들은 성전 제의의 개혁을 외치기 시작하였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절기, 성회, 번제, 소제를 아주 싫어하고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신실한 예배로 돌아오도록 촉구하였다(암 5:21~24).
호세아 선지자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여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외쳤다(호 6:6).
미가 선지자도 이와 비슷한 권고를 이스라엘에게 외쳤다(미 6:6~8).
또 요시아 왕도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B.C. 640에서 B.C. 609년까지 재임 기간에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읽고 거국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은 요시아 왕의 죽음으로 다시 타락하였다.
개혁을 위한 예언자들의 목소리도 있었다.
예레미야는 예배의 인격적 또는 경험적 요소를 주장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인격적이시고 그의 백성이 그를 신실하게 예배하기를 원하신다고 외쳤다.(v)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1~13).
에스겔 역시 개혁을 부르짖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경배하는 천상의 예배 환상을 보았다(사 6장).
그러나 이스라엘은 상기와 같은 종교 개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깨닫고 돌아서지를 못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참히 허물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은 성전 제의가 아닌 새로운 예배 의식을 출발시켰다. 이스라엘은 회당(synagogue)에 모여 율법을 낭독하고 해석하였으며 기도를 드렸다.
회당 예배는 희생 제사가 아닌 율법을 읽고 해석하는 율법 중심의 예배를 발전시켰다.
또 회당 예배는 제사장이라는 성직자 중심의 예배가 아닌 회중 전체가 참여하는 평신도 중심적인 예배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회당 예배는 안식일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을 결속시켰다.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회당 예배에서 많은 유산을 이어 받았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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