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한국 성도들이 공적 예배에만 집중하고 삶의 예배를 등한시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예배 포만증’에 걸려 있다. 과다한 예배 중심의 생활이 신앙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는 지나치게 예배 제일주의 사고에 빠져 있다. ‘예배에 목숨 걸자’, ‘예배에 미치자’는 선동적인 구호가 자주 들린다.
그러나 일상의 삶에서는 예배스러운 거룩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예배는 풍성하지만 정작 예배 후 삶의 예배는 실패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진정한 예배라 할 수 있을까?
<의견> 제가 볼때도 많은 신앙인들이 공적 주일예배나 다른 공동체 예배후에 삶이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네요.....
예로들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이나, 원수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일흔에 일곱번이라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공적 예배 시간에 들었고, 깨달았는데, 전혀 말씀에 대해서 신중하지 못하고,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고, 변화되지 않는 모습등을 보게 되네요.
무엇보다, 공적 예배를 통하여 말씀만 듣지 , 성도간의 그 말씀으로 교제가 없는 것이 문제예요.
그리고 삶에서 그 말씀에 힘 입어서 어떻게 살았고, 승리했는지, 무엇을 느꼈고, 열매를 맺었는지에 대한 성도간의 교제가 약한게 현대 교회 성도들의 문제 같아요.한마디로 예배는 많이 드리고, 말씀을 많이 듣지만, 삶에서의 말씀이 뿌리 내리지 못한게 문제지요. 한국 교회가 공적인 예배도 중요하지만, 성도의 삶의 예배가 잘 되고 있는지, 서로 교제하면서 거룩한 성도의 삶의 열매에 치중해야 할 거예요.
실제 제가 다니는 교회도 공적 예배등은 강조하지만, 삶의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지 않아요. 정말 안타깝기만 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이 최고의 행위는 예배라는 형식 안에서 표현되고 일상의 삶의 영역에서 확장된다. 여기서 인간의 예배행위를 담고 있는 예배의식은 단지 형식만이 아니라 예배하는 인간의 본질을 구현한다. 예배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예배하는 행위를 통해 존재와 행위의 일치를 구현한다. <신앙인의 삶이 곧 예배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의 문재는 예배와 삶이 분리 되어서 살아 가고 있다는데 있다.
예배와 삶이 분리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원론적 그리스도인 삶의 방식이다. 육을 경시하고 영을 중시하며, 세속사를 가벼이 여기고 종교사를 숭상하고 차안의 삶이 부정된다. 이런 존재론적 이원론은 필연적으로 윤리적 이원론을 가져오고야 만다.
삶이 곧 예배이기에 그리스도인은 삶의 전 영역에서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로부터 퇴각될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직장과 가정에서, 시장에서, 정치, 경영, 문화적 삶 전체에서 인간은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도 초대교회 노예들에게 상전을 모시며 가사 일을 하는 것을 “주께 하듯 하라”고 권면했다. 그리스도인 노예들에게 바울은 집안일을 돌보는 그 자리가 주님을 섬기는 자리가 되라는 것이다.한편 요셉의 삶에서 발견되는 특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한 번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삶속의 예배자로 살았다는 것이다.
요셉의 신앙은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만 예배자로 살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신앙 고백적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이다.요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자리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어떤 불합리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예배하는 태도로 거룩한 성도로서의 삶을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셉신앙의 위대한 점은 그가 성전이나 성막에서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직장과 일터에서 주님을 예배하면 산 것이다.
이를 통해 요셉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했으며, 이것이 요셉의 복음전도였다.또한 하나님께서는 창조세계를 지으실 때 가장 먼저 만드신 기관은 교회가 아니다. 가정, 경제, 국가를 구성하여 창조세계 안에서 모든 문화적 활동을 수행하도록 위임하셨다. 따라서 국가 안에서 정치적 행위, 땀 흘려 일하는 노동,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경제활동은 교회를 섬기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주일 내내 찬양과 기도를 하며 성경공부 하면서 교회에 머물면서 생활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에서 어머니로서 음식을 만들고, 아버지로서 직장에서 생계를 책임지며 회사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예배만큼이나 소중한 사역이다.
<예배의 3가지 >
<만남, 사귐 그리고 반응—전 인격적 예배>
‘예배란 무엇인가요?’라고 성도들에게 질문을 할 경우 대부분 그 의미를 알고 있지만 한마디로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을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예배’가 한마디로 정의하기에 너무 큰 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예배는 아주 간단히 정의될 수 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 그리고 반응이다. 우리는 ‘예배’라는 방법을 통해 극히 제한적인 인간의 머리로는 감히 추측할 수 없는 지극히 광대하신 하나님을 친밀하게 만날 수 있게 된다(만남).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더욱 깊이 알아가게 되고(사귐),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면서 그의 성품과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감사와 찬송을 올리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이 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반응). 그러기에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친밀한 교제'이고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
이 예배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 그리고 반응’이 우리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세 가지 영역이 있는데 그 공간적 넓이에 따라 1)개인적 예배, 2)공적 예배, 3)삶의 예배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 첫 번째 영역인 개인적 예배는 예배의 기초(foundation)로 나 자신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하나님과 1:1로 이루어진다. 매일 매일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을 통해(만남) 속삭이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자신의 부족함을 그분께 아뢰며(사귐), 주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영의 간구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이루시기를 요청하는 중보기도로 이루어진다(반응). 하루의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는 개인적 의지를 하나님께 드릴 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 개인적 예배는 온전케 된다. 두 번째 영역은 공적 예배로서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셀모임, 가정예배, 직장경건회 등 우리가 ‘예배’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부분이다. 이 영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만나고 사귀고 반응하는 좀 더 넓은 영역이다. 개인적 예배와 마찬가지로 공적 예배도 믿음의 공동체가 정한 시간과 공간에 모여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 나아가(만남),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신 일들을 찬양의 노래들로 높이고 자랑하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은 진심으로 드리는 찬양과 경배의 마음을 받아주시며 죄의 용서를 베풀어 주시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신다(사귐).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인해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과 결단을 노래와 헌금으로 나타내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공적 예배를 통해 성도의 교제를 나누게 된다(반응). 이 공적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모임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적극적 참여라는 공동체적 의지가 필요하다. 예배모임을 그저 좋은 이야기를 듣는 시간으로 알거나,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높여드리는 순서인 찬양과 경배 시간에 노래를 잘 모른다고, 음악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든다고 굳게 입을 닫고 있거나 건성으로 입만 여는 모습, 더 나아가 아예 찬양과 경배 시간이 끝나고 늦게 나타나는 모습들은 이 공적 예배의 영역을 무너지게 하는 요소이다. 마지막으로 삶의 예배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우주 만물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는 광대한 영역이다. 삶의 예배는 어떤 순서가 있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동행하여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심을 느끼는 임재의식을 갖고 각자의 직장에서, 가정에서, 친척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 가운데 살아갈 때(만남), 개인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를 통해 깨닫게 된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품고(사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섬기셨듯이 우리도 그들을 진실되게 섬기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진실된 사랑을 담아 우리의 삶으로 전할 때(반응) 이 마지막 예배의 영역은 완성된다. 이 세 가지 영역의 예배는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영, 혼, 육이 우리의 전인적인 몸을 구성하듯이 이 세 가지 영역의 예배도 우리 안에서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기에 어느 한 부분도 소홀히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세 번째 영역인 삶의 예배야말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영역의 예배가 얼마나 참된 것인지를 결정하게 되는 ‘열매‘에 해당된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공적으로 하나님을 만나 눈물로, 열정으로 반응했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실현하는 삶의 예배가 죽어있다면, 결국 첫 번째, 두 번째 영역의 예배는 하나님과는 상관 없는 자기 만족으로 끝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만남, 사귐, 반응이라는 예배의 본질을 항상 인식하며 개인적 예배, 공적 예배, 삶의 예배에 우리 모두 임하자.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우리 각자를 변화시켜 주시고, 말씀하여주시고, 그분의 큰 꿈과 비전을 함께 이루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놀랍고 신비한 일들이 진정으로 드려지는 전인격적인 예배를 통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장 9절) 류세종목사 / 예능교회 예배담당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는 잘못된표현 서옥식 (서울동노회,대청교회,집사) 2014-09-06 (토) 13:11 2160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는 잘못된 표현 신령은 ‘산신령’처럼 쓰이는 비기독교적 용어 ‘영과 진리’가 바른 표기 교회에서 설교를 하거나 기도를 할 때 아직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 문구는 오역된 것이다. 기독교 관련 여러 TV에서도 설교하거나 기도하는 것을 방영할 때도 이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www.prok.org
요한복음 4장 23-24절을 개역성경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로 번역하고 있다.그러나 개역개정성경에서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로 바뀌었다.
<신령이라는 표기의 문제>
우리나라 국한문 성경에서는 한술 더 떠 ‘진정’을 ‘眞正’이 아닌 ‘眞情’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더더욱 잘못된 번역이다. 국어사전은 신령(神靈)을 ①신령하다(신기하고 영묘하다)의 어근(語根) ② 무당이 몸주로 받아들인 신으로 풀이하면서 ‘신령한 기운’, ‘신령한 영산’, ‘신령한 바위’, ‘호랑이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등처럼 쓰인다고 지적한다. 2001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펴낸 ‘한국고전용어사전’은 <풍습으로 숭배하는 모든 신(神). 령(靈)>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한국사전연구사가 1998년에 펴낸 ‘국어국문학자료사전’에 따르면 신령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한국 민속신앙에서 초자연적인 신이(神異)한 존재로 쓰이는 특이한 용어. 천지신령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고 산신령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가 하면 조상의 신령이라는 말도 쓰이고 있어, 그 사용범주도 한결같지는 않다. 천지신령이나 산신령이라는 용례에서는 자연 그 자체를 신격화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나 이 경우에도 천지 및 신이란 자연에 깃들어 있는 영혼에 대한 믿음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친지신령일 때는 천지의 지배자, 천지의 주인이라는 관념이 이야기될 수 있으나, 산신령일 때는 더러 노인으로 표상되는가 하면 호랑이로 표상되기도 하여 그 함축성이 다양해진다. 이와는 달리 조상의 신령이면 단적으로 신격화된 조상의 혼령이어서 개념을 정립하기가 한결 단순해진다. 이 경우, 신령이라는 관념 아래서 조상이 숭앙되는 것이어서 조상숭배의 기틀에 신령이란 관념이 깔려 있게 된다. 역대의 문헌과 민속현장에는 신령이라는 말 이외에도 영지(靈地) · 영산(靈山), 그리고 산천지령(山川之靈)이나 정령(精靈) 등의 말이 쓰이고 있다. 이들 용례에서 영은 단순히 영혼이란 뜻만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고 초자연적인 것, 신비로운 것 등의 뜻을 아울러 함축하고 있다. 실제로 영험(靈驗)이나 영이(靈異)라는 말은 신비주의적 색채가 짙거니와 특히 영이란 말은 신이(神異)란 말과 맞바꿀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령이란 말에도 영이 지닌 함축성이 포괄될 수 있다. 여러 구체적인 사례들을 종합하게 되면, 신령은 가장 단순하게는 신격화된 영혼, 혹은 신으로 숭상된 영혼이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신령에게는 두 가지가 있어서 하나는 사람의 영, 곧 인령이 신격화된 신령이고, 다른 하나는 신격화된 자연에 내재하는 것으로 믿어진 신령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초자연적이고 초합리적인 존재로서 여러 가지 신비현상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으로 믿고 있다. 또한, 원칙적으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이나, 때때로 사람 혹은 그밖의 자연물의 모습을 띠고 나타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이처럼 ‘신령과 진정’이란 표현은 오역된 문구로, ‘영과 진리’가 올바른 표현이다.
히브리어 원문은 ‘en pneumati kai aletheiai’이며, 영어성경은 예외없이 ‘in spirit and truth’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이 아니고 ‘영(靈)과 진리(眞理)’가 바른 번역이다.
이 성경 대목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의 잘못된 예배관을 시정해 주는 말씀으로서,
(1)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법조문적이고 형식적이며 물질적인 제사를 부정하고 경계하는 것이며, 성령(Holy Spirit)으로 예배한다는 뜻은 아니다.
(2)한편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사마리아인 등 이방인들의 ‘거짓 신’에 대립되는 ‘참 신’에 대한 예배를 뜻하는 것이다.
즉 예배할 장소와 예배할 때와 예배할 대을 바로 알아서 참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진리’라고 말씀하셨다.----아래는 다른 분이 해석한 부분---------
<"하나님은 영이시니">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뜻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신령적 존재'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쉽게 말해서 산신령이나 귀신과 같은 존재란 개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이란 단어의 뜻은 정의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단어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영'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루아흐', 헬라어로는 '프뉴마'라는 말로서, 문자적으로는 '바람' 또는 '숨(호흡)'으로 해석되며 그 깊은 의미는 생명, 또는 생명력을 의미한다(바람이나 숨의 역동적인 모습을 연상해보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무슨 귀신과 같은 어떤 초현실적, 신령적인 존재란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생명자체와 생명력의 원천이시요 생기의 근원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참고로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2장7절의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영', 즉 거룩한 생기, 생명력을 받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기, 생명력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목숨을 받았다는 것인가? 성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적 존재라고 말한다. 또는 인간은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영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 거룩한 성품과 의를 사랑하는 바른 정신과 마음을 부여받은 존재이며 그러한 삶을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라는 뜻이다. 이를 가리켜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신령으로, 즉 영으로의 의미>
'신령으로'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영으로'- 곧 '하나님의 생명으로' 란 말이다. 영어로는'in spirit' 이다.
이것은 어떤 거룩한 마음의 자세나 경건한 태도를 말함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그런 식의 어떤 자세나 태도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성령안에서' 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본성인 영-생명(Spirit)을 받은 사람으로서', 또는 '그 받은 바 거룩한 생명의 본성으로(in spirit)'란 뜻으로 해석한다.<진정으로, 즉 진리로 의 의미>
'진정으로' 란 '진리를 따라서(in truth)' 란 뜻이다. 이것 역시 결코 '진지한 마음으로' 라는 식의 예배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바른 도리, 진리의 말씀, 즉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본과 진리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참뜻을 깨닫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배할지니라". 의 의미>
이 구절이 가장 오해되고 있는 대목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예배를 오늘날 보통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적인 예배(제사의식)를 말함이 아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한 번도 그런 의식적인 예배를 경건하게 드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예배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며, 그런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참된 예배라는 뜻이다. <요약>
예수는 이미 이천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이든 그리심 산이든 이제는 그런 의식적 예배를 드리는 시대는 지나갔음을 선포하고 모든 일상의 삶 속에서 진실하고 바른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참된 예배라고 가르쳤다.
요약한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란 뜻은 결코 의식적인 예배를 거룩하고 경건하게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밖의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거룩하고 진실된 마음과 정신으로, 참된 진리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서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곧 진정한 예배라는 뜻이다. <오늘날 교회당의 예배에 대한 잘못된 인식> 1. 에배를 진지하고 거룩한 마음을 다잡고 드리는 것으로 인식
오늘날 교회는 예배 때 이 구절을 어떤 의미로 선포하고 있는가?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단지 마음을 경건하게 추스리고 세상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진지하고 거룩하게 마음을 다잡고 예배드리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예배를 감정 띠우기 방식과 분위기를 이끌려는 현대 교회당 오늘날 많은 교회가 그런식으로 예배를 이해하고 있기때문에 교회의 모든 역량을 예배를 어떻게하면 좀더 감동적이고 은혜롭게(?) 드릴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 최고의 음향기기, 영상기기들, 최고의 성가대 등, 예배의 분위기를 최고조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 붇고 있다. 혹은 요즘 유행하는 경배와 찬양팀을 세워서 예배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방법을 선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 식의 분위기나 감정 띄우기 방식의 예배 행태가 예수께서 원하신 예배인가? 그런 고양된 분위기나 감정에 사로잡혀 몰아적 태도로 예배드리는 것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의 의도를 완전히 왜곡하고 있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예배는 모두 교회안(건물안)에서 드리는 의식적인 예배형태이기 때문이다. 3, 교회당에서의 의식 예배 중심이 된 한국 교회 성도들
성전안 의식예배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버리고,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성전밖 삶의 참된 예배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만 결과가 오늘의 기독교 신앙생활의 모습이 아닌가. 4. 참된 진리의 말씀 가르침으로 하나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게 예배다
삶이 아니라 마음만 거룩하고 경건하게 집중해서 진지하게 예배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왜곡된 가르침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 밖에서는 여전히 더럽고 죄악된 삶을 살면서도 교회 안에서의 형식적 예배에만 열심인 것은 아닌가. 이러한 예배는 예수가 의도한 참된 예배와는 거리가 먼 행태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는 이 구절로 결코 의식적 예배에서 경건한 태도를 가지라고 한 것이 아니라 삶의 실천을 말한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가르침은 바른 예배의 구현을 위해서라도 시급히 정립되어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예배 포만증’에 걸려 있다. 과다한 예배 중심의 생활이 신앙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는 지나치게 예배 제일주의 사고에 빠져 있다. ‘예배에 목숨 걸자’, ‘예배에 미치자’는 선동적인 구호가 자주 들린다.
그러나 일상의 삶에서는 예배스러운 거룩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예배는 풍성하지만 정작 예배 후 삶의 예배는 실패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진정한 예배라 할 수 있을까?
<의견> 제가 볼때도 많은 신앙인들이 공적 주일예배나 다른 공동체 예배후에 삶이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네요.....
예로들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이나, 원수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일흔에 일곱번이라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공적 예배 시간에 들었고, 깨달았는데, 전혀 말씀에 대해서 신중하지 못하고,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고, 변화되지 않는 모습등을 보게 되네요.
무엇보다, 공적 예배를 통하여 말씀만 듣지 , 성도간의 그 말씀으로 교제가 없는 것이 문제예요.
그리고 삶에서 그 말씀에 힘 입어서 어떻게 살았고, 승리했는지, 무엇을 느꼈고, 열매를 맺었는지에 대한 성도간의 교제가 약한게 현대 교회 성도들의 문제 같아요.
실제 제가 다니는 교회도 공적 예배등은 강조하지만, 삶의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지 않아요. 정말 안타깝기만 해요.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의 문재는 예배와 삶이 분리 되어서 살아 가고 있다는데 있다.
예배와 삶이 분리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원론적 그리스도인 삶의 방식이다. 육을 경시하고 영을 중시하며, 세속사를 가벼이 여기고 종교사를 숭상하고 차안의 삶이 부정된다. 이런 존재론적 이원론은 필연적으로 윤리적 이원론을 가져오고야 만다.
삶이 곧 예배이기에 그리스도인은 삶의 전 영역에서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로부터 퇴각될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직장과 가정에서, 시장에서, 정치, 경영, 문화적 삶 전체에서 인간은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요셉의 신앙은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만 예배자로 살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신앙 고백적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이다.요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자리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어떤 불합리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예배하는 태도로 거룩한 성도로서의 삶을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요셉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했으며, 이것이 요셉의 복음전도였다.또한 하나님께서는 창조세계를 지으실 때 가장 먼저 만드신 기관은 교회가 아니다.
<만남, 사귐 그리고 반응—전 인격적 예배>
‘예배란 무엇인가요?’라고 성도들에게 질문을 할 경우 대부분 그 의미를 알고 있지만 한마디로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을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예배’가 한마디로 정의하기에 너무 큰 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예배는 아주 간단히 정의될 수 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 그리고 반응이다.
이 예배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 그리고 반응’이 우리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세 가지 영역이 있는데 그 공간적 넓이에 따라 1)개인적 예배, 2)공적 예배, 3)삶의 예배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님과의 만남, 사귐, 반응이라는 예배의 본질을 항상 인식하며 개인적 예배, 공적 예배, 삶의 예배에 우리 모두 임하자.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우리 각자를 변화시켜 주시고, 말씀하여주시고, 그분의 큰 꿈과 비전을 함께 이루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놀랍고 신비한 일들이 진정으로 드려지는 전인격적인 예배를 통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장 9절)
요한복음 4장 23-24절을 개역성경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로 번역하고 있다.
<신령이라는 표기의 문제>
우리나라 국한문 성경에서는 한술 더 떠 ‘진정’을 ‘眞正’이 아닌 ‘眞情’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더더욱 잘못된 번역이다. 국어사전은 신령(神靈)을 ①신령하다(신기하고 영묘하다)의 어근(語根) ② 무당이 몸주로 받아들인 신으로 풀이하면서 ‘신령한 기운’, ‘신령한 영산’, ‘신령한 바위’, ‘호랑이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등처럼 쓰인다고 지적한다. 2001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펴낸 ‘한국고전용어사전’은 <풍습으로 숭배하는 모든 신(神). 령(靈)>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국 민속신앙에서 초자연적인 신이(神異)한 존재로 쓰이는 특이한 용어. 천지신령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고 산신령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가 하면 조상의 신령이라는 말도 쓰이고 있어, 그 사용범주도 한결같지는 않다. 천지신령이나 산신령이라는 용례에서는 자연 그 자체를 신격화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나 이 경우에도 천지 및 신이란 자연에 깃들어 있는 영혼에 대한 믿음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친지신령일 때는 천지의 지배자, 천지의 주인이라는 관념이 이야기될 수 있으나, 산신령일 때는 더러 노인으로 표상되는가 하면 호랑이로 표상되기도 하여 그 함축성이 다양해진다.
이처럼 ‘신령과 진정’이란 표현은 오역된 문구로, ‘영과 진리’가 올바른 표현이다.
히브리어 원문은 ‘en pneumati kai aletheiai’이며, 영어성경은 예외없이 ‘in spirit and truth’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이 아니고 ‘영(靈)과 진리(眞理)’가 바른 번역이다.
이 성경 대목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의 잘못된 예배관을 시정해 주는 말씀으로서,
(1)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법조문적이고 형식적이며 물질적인 제사를 부정하고 경계하는 것이며, 성령(Holy Spirit)으로 예배한다는 뜻은 아니다.
(2)한편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사마리아인 등 이방인들의 ‘거짓 신’에 대립되는 ‘참 신’에 대한 예배를 뜻하는 것이다.
즉 예배할 장소와 예배할 때와 예배할 대을 바로 알아서 참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진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뜻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신령적 존재'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쉽게 말해서 산신령이나 귀신과 같은 존재란 개념이다).
<신령으로, 즉 영으로의 의미>
'신령으로'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영으로'- 곧 '하나님의 생명으로' 란 말이다. 영어로는'in spirit' 이다.
이것은 어떤 거룩한 마음의 자세나 경건한 태도를 말함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그런 식의 어떤 자세나 태도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성령안에서' 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본성인 영-생명(Spirit)을 받은 사람으로서', 또는 '그 받은 바 거룩한 생명의 본성으로(in spirit)'란 뜻으로 해석한다.
'진정으로' 란 '진리를 따라서(in truth)' 란 뜻이다. 이것 역시 결코 '진지한 마음으로' 라는 식의 예배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바른 도리, 진리의 말씀, 즉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본과 진리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참뜻을 깨닫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구절이 가장 오해되고 있는 대목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예배를 오늘날 보통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적인 예배(제사의식)를 말함이 아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한 번도 그런 의식적인 예배를 경건하게 드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예배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며, 그런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참된 예배라는 뜻이다.
예수는 이미 이천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이든 그리심 산이든 이제는 그런 의식적 예배를 드리는 시대는 지나갔음을 선포하고 모든 일상의 삶 속에서 진실하고 바른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참된 예배라고 가르쳤다.
요약한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란 뜻은 결코 의식적인 예배를 거룩하고 경건하게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밖의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거룩하고 진실된 마음과 정신으로, 참된 진리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서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곧 진정한 예배라는 뜻이다.
오늘날 교회는 예배 때 이 구절을 어떤 의미로 선포하고 있는가?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단지 마음을 경건하게 추스리고 세상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진지하고 거룩하게 마음을 다잡고 예배드리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의 의도를 완전히 왜곡하고 있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예배는 모두 교회안(건물안)에서 드리는 의식적인 예배형태이기 때문이다.
성전안 의식예배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버리고,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성전밖 삶의 참된 예배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만 결과가 오늘의 기독교 신앙생활의 모습이 아닌가.
삶이 아니라 마음만 거룩하고 경건하게 집중해서 진지하게 예배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왜곡된 가르침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 밖에서는 여전히 더럽고 죄악된 삶을 살면서도 교회 안에서의 형식적 예배에만 열심인 것은 아닌가.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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