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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적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17. 10. 8. 21:01

기독교적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적 리더십의 재고

 

리더십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요즘처럼 온 나라가 시끌벅적할 만큼 부패와 그로 인한 참사의 소용돌이 속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국민들이 일차적으로 비난의 화살을 독재의 리더십에 돌리고 있는 것만 봐도 리더십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가를 엿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 리더십은 얼마나 쉽사리 오용되고 타락할 수 있는가를 지각하게 한다. 크게는 국제적인 문제에서부터 작게는 한 가정에 이르기까지 리더십은 있어야 하며, 또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대리자인 인간들에게 당신의 리더십을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이 애초에 의도하셨던 방식대로 권한과 책임을 적절히 활용하기보다는 무책임과 권한만을 남용해왔다.

리더십의 문맥 : 제자도(Discipleship)

그러나 리더십이란 엄밀히 말하여 리더만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리더십이 행해지는 전 과정 가운데에 리더가 중심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리더십이 행해지는 전체적인 맥락을 무시한 채로는 리더 한 사람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 역할 수행이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가 없다. 이점에서도 기독교적인 리더십은 교회전체의 문맥,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사회의 특성과 목표에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예수께서도 이 세상의 리더십의 행사와 제자들 사이, 즉 교회내의 리더십 행사는 그 양식이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음과 꼭 달라져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즉 교회는 교회에 속한 지체들이 다함께 그리스도를 향해서 성숙해 나가도록 돕기 위해서, 그리고 나아가서 교회 밖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해 성숙하도록 해야 할 핵심적인 내용중의 한가지로서 바로 남의 성숙과 행복을 위해서 자신을 철저히 포기할 줄 아는 자기부인과 섬김의 태도 자체를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리더십이란 교회의 목표를 성취해 내기 위해서 주어진 수단이요, 사람들이 그러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양육하는 일과 불가불 관련되어 있다.

좁은 의미의 리더십 혹은 좁은 의미의 리더를 언급하기 이전에 리더십의 목표와 관련하여 넓은 의미의 리더십 혹은 리더의 문맥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리더십의 은사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리더의 자질은 어떠해야 하는지? 리더십의 역할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지? 그에 필요한 기술은 어떤 것들인지 등등을 논의하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서로 서로에게 성숙의 발판과 계기로 작용하도록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적인 리더십 혹은 교회(교회 병행체) 내의 리더십의 개념은 세속 사회의 리더십 이해와 본질상 달라질 수밖에 없는 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세속 사회의 리더십은 나름대로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에 크게 유익하지 않으면 도태시킬 만큼 철저히 목표 중심적으로 움직이는 측면이 없진 않지만, 그 목표 자체가 세속적인 지향점을 가지는 데다가 성공주의적이고 경쟁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리더십의 개념과 그 수행 과정을 세속적으로 채색시키고 규정짓도록 강요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런 성공주의의 흐름을 타고 리더십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시 되는 권위주의적인 발상을 야기시키게 되었다는 점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런 권좌에 오른 사람은 출세/ 성공한 사람이요, 우월한 사람이라는 계급의식을 조장하였으며, 리더란 바로 그 계급적인 구조 속에서 상위층에 속하는 사람과 동일시되게 되었다. 반대로 그러한 권좌에 오르지 못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뭔가 모자란 사람들이요, 그래서 상위에 있는 사람들을 떠받들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리더십의 본래적인 개념을 완전히 도착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다.

리더란 자신이 속한 사회/집단을 어떤 특정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리더십을 발휘하는 자들이며, 그 리더십은 목표의 달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도리어 리더가 되는 것 자체가 목적시 되고 그 사회/ 집단의 유익은 리더십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양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우리들 속에도 은연중에 이러한 리더십 도착적인 병리현상이 만연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느새 우리는 사회의 계층적 구조 속에 점점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마치 삶의 모든 안전이 자동적으로 확보될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고, 그것을 위해 발버둥치며 줄달음치는 삶을 살게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뭐든지 일류를 추구하게 되고 교회도 ‘제일교회’가 되어야만 할 것처럼 생각하는 강박관념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지 않은가? 반장이나 회장을 하면 잘난 사람이 되고, IVF에서도 대표나 임원을 하면 뭔가 남보다 우월한 존재로 으스대려고(?)하는 속성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가?

이런 경향은 비단 리더가 된 사람의 문제이기보다는 리더가 되지 못한 사람의 의식 속에도 매한가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점이 바로 예수님으로 하여금 기독교적 리더십의 개념을 리더십에 대한 이 세상의 이해/ 행태와 구별시키도록 만들었던 중대한 이유였음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구분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리더십의 개념은 본질상 제자도와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셨다. 그분은 사실 제자도의 모범으로서 바로 스승이신 자신의 삶을 거듭 부각시키셨는데, 이것은 교육효과를 위한 방법론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그 이전에 제자도의 핵심내용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그 삶의 특성자체를 배워야 하는 문제였다.

제자도는 다름아닌 스승을 본받는 것이리라.

그 가운데서도 무엇을 본받으라는 것인가? 그 분의 삶의 태도, 삶의 목표를 본 받으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과 그 대속의 의미를 설파하는 주변에서조차 제자들간의 세속적인 ‘일류다툼’과 맞부딪쳐야 했으며, 어쩌면 내우외환의 이중적인 투쟁을 감당하셔야 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다.

대속의 죽음이라는 값을 일껏 치르고 나서, 그 대속의 은혜를 받은 제자들의 삶의 태도나 목표가 여전히 하등 달라진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자신의 죽음은 무슨 의미일 것인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는 면책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일반적이고 세속적인 리더십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자신들의 톱 리더인 예수님의 죽음은 도무지 있어서는 안될 것으로 규정지었던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를 접한 예수님께서는, 그 오해와 무지의 벽을 깨뜨리기 위해 치밀하게 그리고 끈덕지게 공략을 게시하셨다. 베드로의 부인과 변화산 사건을 포함하여 세 번씩이나 자신의 죽음과 제자도를 교묘히(?) 병렬시키는 작업을 통해서(막8:31-9:8, 막9:30-37, 막10:32-45), 자신의 삶은 죽음의 삶이요, 반드시 죽음을 통한 부활의 삶임을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자신을 따른 제자들의 삶 역시 그러한 죽음의 삶이어야 함을 강조하셨다. 마가는 이 부분의 결론을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 주러 왔다”(막10:45)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대신하고 있다.

이처럼 리더십, 기독교적인 리더십은 제자도, 기독교적 제자도를 전제로 성립되는 것이다. 그것은 삶과 성공의 리더십이 아니요, 자기 부인과 죽음의 리더십이다.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을 삶으로 인도하며 자신도 부활하게 되는 그런 리더십이다.

이것을 그분은 섬김의 리더십, 종의 리더십이란 말로 표현하시려 하셨던 것 같다.

섬김이란 말을 남발하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 집단 안에, 말이 무성한 만큼, 실제로 그러한 삶의 태도나 개인과 집단의 목표와 지향점이 분명한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나 문서 속에 남아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주변적인 문제가 결코 아니다. 이는 우리가 속한 집단의 사활이 걸린 문제요, 우리 개인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로 그 문맥에서 이러한 자기 부인의 제자도와 우리의 구원을 직결시키고 계시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의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 놓겠느냐?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막8:34-38)

이처럼 지도력(Leadership)을 논하기 전에 우리는 마땅히 제자력(Discipleship)을 먼저 확인해야만 한다.

지도력이란 제자력의 문맥이 없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참된 지도력일 수 없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지도력을 상술할 의도보다는 제자도를 강조하시기 위하여 세속적으로 굴절된 지도력을 개탄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은 자들끼리 한 몸을 이루어서, 서로 서로에게 헌신을 다짐하고 서로 서로를 섬기기로 작정하며, 그리하여 실제적으로 기꺼이 피차 복종하려는 이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 리더십이다.

이와같은 섬김의 삶은 자발적인 것이며, 상호적인 것이다. 이것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거나, 반대로 누군가에게 항상 의존적이 되는 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서로가 서로의 존엄성과 존귀함을 인정하며,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는 그러한 관계 안에 묶여 있다. 광의로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서로 서로에게 리더인 셈이다.

리더십의 기능 : 지도력(Leadership)

협의의 리더십 혹은 리더란, 앞에서 언급한 문맥 위에서 특정한 역할 혹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자질이나 능력을 갖추고 있거나 혹은 은사를 가진 자들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말이다. 이러한 리더십은 다양한 여러 사역 혹은 섬김의 형태 중의 하나를 언급하는 것으로서 특별히 어떤 모임/ 집단 전체의 방향유지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이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리더십의 은사를 크게 두 가지 특성으로 분류하고 있다.

하나는 기능과 관련된 리더십으로서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 교사를 언급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교회 내의 직책이라는 관점에서 집사, 장로, 감독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 둘은 서로 배타적인 범주는 아니며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른 분류를 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겠다. 이 은사들이 특별히 우월하거나 권위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고유한 역할을 맡은 것임은 부인할 수가 없다.

즉 이들은 다른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서로서로를 섬기며 세워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에 중요한 틀을 형성하는 일에 필요 불가결한 역할들을 감당하게 되는 자들을 일컫는다. 그리고 장로, 집사들의 직책을 만들고 부여되게 된 것도 결국은 이들의 기능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해 내기 위한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러한 초기 교회 공동체 형성에 필수적인 은사 이외에도 리더십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은사를 더 언급하고 있는데, 하나는 롬 12:18의 ‘다스리는 자’(leadership)이며 또 다른 하나는 고전 12:28의 '관리하는 사람'(administration)이다.

전자는 ‘proistemi'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앞에 서다‘(stand before) 그리하여 ’인도하다, 돌보다‘ 등의 의미를 지니는 단어로서 리더십 본연의 역할과 직결되어 있으며, 후자 역시 ’안내하다‘를 의미하는 ’kuberneo'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서 특히 배나 비행기의 조종사 역할을 감당하는 자와 관련되어 사용되는 말이다.(예: 선장 /행27:11, 계18:17)

리더십과 관련된 특별한 은사/직책들은 크게는 양육하는 일과 공동체 전체의 방향을 잡는 일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리더십을 목자에 비유하는데 양을 치는 목자가 반드시 양의 앞에서 양들을 인도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리더란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리더십은 이런 방향감 혹은 비전의 결여시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으며 오히려 혼란을 초래하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본다. 리더는 결코 그저 ‘묵묵히’ 섬기는 사람만은 아니다. 그는 섬기되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비전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섬기는 이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아버지의 뜻을 정확히 알고 계셨으며,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자신에게는 양식과도 같이 귀중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4:34) 그는 비록 몸으로는 십자가의 쓴잔을 마셔야 했지만 그의 영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기뻐하셨다. 그는 장차 제자들이 어디로 행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계셨으며, 장차 이 세상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말씀하셨다.

존 스토트는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 세대가 기독교적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임을 역설하면서 그 리더십의 첫 번째 요건으로 비전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는 잠언 29:18의 말씀이 70인 역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관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로 번역되고 있음을 주지한다면 모든 것이 다원화되어 가는 이 시대에 방향잡이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절감할 수 있다.

요약하건대 기독교적 리더십이란 그 개념에 있어서는 우리의 안전이나 나아가서 세속적인 지배와 군림의 수단으로서의 권한/ 권위를 휘두르는 것과는 코페르니쿠스적으로 궤를 달리하는 죽음/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제자도 정신 -피차에 대한 섬김과 사랑이 책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신명을 다 바치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실제적인 기능과 역할 있어서는 우리의 공동체 전체의 방향을 잡아 나가는 중대한 기능을 맡은 이들과 양육의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가운데에 이런 참된 리더십이 세워져 나가도록, 하나님께서 이런 참된 리더들을 많이 일으키시도록, 그리고 그런 리더십의 권위에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도록 더욱 간구하며 애써야겠다. 그리하여 우리의 캠퍼스가 전도, 제자도, 선교의 열매들로 가득차게 되며, 이 땅의 교회가 빛과 소금의 영향력/리더십을 발휘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출처 : 한국상담교육원 김태영원장
글쓴이 : 아카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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