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설교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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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성경적인 설교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모임들에서는 이제는 설교를 그만 두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제 설교를 지나서 보다 효과적이고 시대에 부응하는 또 다른 방법들이나 사역들을 지향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왜 설교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는가에 대한 설명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드러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설교자의 모습 즉 설교자상이 변했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설교자는 그 사회에서 지적이고 영적인 지도자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교회의 회중석에 앉아있는 어떤 사람에게 설교자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그 대답은 그리 기뻐할 만한 것이 아닐 것이다. 카일 하셀든(Kyle Haselden)은 사람들이 설교자에 대하여 가고 있는 이미지가 ‘회중의 마음에 맞고, 항상 도움이 되며, 보이스카우트를 도울 준비가 되어있는 목사, 연세 드신 부인들은 물론이요 젊은 여인들에게도 충분히 시간을 내어주는 사랑 받는 자, 젊은이들에게는 아버지요 외로운 사람에게는 친구이며 차 마시는 자리나 공공클럽의 오찬에서는 상냥하고 친절한 손을 내밀 수 있는 이미지들의 부드러운 합성’ 정도로 나타날 것에 대해 염려했다.
여기에 덧붙어서, 설교가 지지를 얻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루에도 수백 수천의 메시지들이 퍼부어지는 과다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에서 설교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는 기업의 홍보문안을 그대로 전하는 광고출연자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복음전도자 만큼이나 진실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는 러스킨(Ruskin)의 말처럼 삶과 죽음의 교리를 가지고 장난치는 또 다른 종류의 세일즈맨처럼 들릴 수 있다.
이러한 이유들에 더하여 자유주의는 권위 있는 메시지의 강단에 서있던 사람을 빼앗아갔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는 최신 유행이 진리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멀티미디어 프레젠테이션, 영화, 비디오, 잘 나눠진 조직, 조명 그리고 현대음악이 커뮤티케이션의 건강함이나 질병의 증후로 나타나게 되었다. 확실히 최신의 도구와 방법들이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할 수 있지만 종종 그러한 방법들은 전달할 메시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사용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별난 것들이 어떻게 해서든 메시지가 없는 공허함을 가리우고 있다.
또한, 행동이라는 것이 말하고 듣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더 호소력을 준다. 사람들은 “나에게 설교하지 마시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설교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설교라고 하는 것이 크리스천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필요악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라고 했던 사도들을 보면서 뒤떨어진 사람들이라고 결론지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행동주의 시대에는 오히려 이렇게 선포하려는 유혹이 있다. “우리가 공궤하는 것을 제쳐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성경을 신중하게 다루는 것
성경말씀을 신중하게 다루는 사람치고 설교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울은 성경기자로서 그의 펜을 통해 우리는 신약의 영감된 말씀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글 목록의 표제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신(로마서)이다. 역사에 끼친 영향력을 볼 때, 로마서와 비교될 수 있는 문서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 편지를 로마에 있는 회중들에게 썼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11~12). 어떤 사역들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루어 질 수 없다. 영감된 편지를 쓰는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to preach the gospel) 원하노라”(1:15). 선포되는 말씀에는 기록된 말씀이 대체할 수 없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의 마음에 담겨있는 설교는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라고 상기시켰다. 어떻게 이 말씀이 그들의 삶 가운데 역사할 수 있었을까? 베드로는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라고 설명한다. 결국 설교를 통해 그들이 구속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살전 1:9~10)고 썼는데 그는 이러한 변화가 발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그러므로 설교는 단순하게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 설교는 청중들 앞에 있는 설교자의 메시지와 인격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었고 그들을 그분에게 인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왜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바울이 그의 어린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격려하고 있는지 설명해준다. “전파하라”는 말은 ‘외치라’, ‘선포하라’ 또는 ‘강권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메시지는 마치 한 사람을 뒤흔들어서 흥분과 열정으로 말씀을 흘러 넘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강단에서 선포되는 모든 열정적인 호소가 다 신성한 권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전달자’(herald)가 되어야 하는 한 그는 성경말씀을 선포해야만 한다.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정당하게 설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설교자에게 있어 계속되는 유혹은 성경말씀 이외의 어떤 다른 메시지 즉, 정치제도, 경제이론, 새로운 종교철학 등을 외치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아무리 권위 있는 톤으로 외쳐진다 해도 설교자가 성경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의 권위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회중들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사람의 말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성경은 단순히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것들을 담은 ‘아주, 아주 오래된 이야기’도 아닐 뿐더러 영감되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의 단순한 진술도 아니다. 성경은 그것을 통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도구인 것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과(딤후 3:15) 그리스도인의 인격 성숙과 부요함(딤후3:16-17)에 이르게 하신다.
강해설교의 정의
그런데 성경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어 그 진리로 사람을 직면케 하는 설교의 유형은 강해설교라 할 수 있다. 강해설교에 대한 정의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다음과 같다고 본다. “강해설교란 오늘날의 상황 안에서 본문을 역사적, 문법적, 문학적으로 연구하고 그것을 통해 파생되고 전달되어지는 성경적 개념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선적으로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시고, 그 다음에 설교자를 통해 청중들에게 적용하게 하신다.”
이러한 정의는 여러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강해설교의 내용은 성경말씀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주해자는 성경이 다른 책과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하나의 책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사실 성경은 다른 문학작품처럼 연구되어질 수 있는 기록물들의 모음이라고 할 수 있다. R. A. 몽고메리(Montgomery)는 그의 「강해설교」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이 최근의 베스트셀러를 제시하는 것과 같이 설교자는 성경의 특정 책들에 대한 소개를 한다. 설교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한 단위의 메시지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마치 그가 성경기자가 된 심정으로 그 책의 메시지의 주요 주제나 연속되는 부분을 발견한다. 그가 단어들, 구절들, 본문들, 부분들을 다루는 것은 그 각각이 말하고 있는 것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저자의 주요주제와 이 책을 기록함에 있어 견지하고 있는 목적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므로 더 큰 의미에서 강해설교는 하나의 방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준다. 설교자가 그의 생각을 성경말씀에 복종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성경말씀을 그의 생각에 복종시키고 있는가? 본문이 축구경기장에서 시작을 알리기 위해 울려 퍼지고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애국가와 같이 사용되는가? 아니면 본문이 사람들에게 드러내어지는 설교의 본질인가?
성경구절을 설명하는 것 없이 정통적인 설교가 행해지는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성경말씀을 펼치는 것은 설교자의 생각을 이단으로부터 지켜준다. 정기적으로 성경말씀을 펼쳐 살피는 것은 설교자로 하여금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간과했을 삶의 많은 이슈들을 성경 안에서 말하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설교자는 그 자신의 권위로 말하지 않게 되고 청중들도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다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강해설교의 정의에 있어 두 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청중에게 성경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들과 관계된다. 설교자는 성경적 메시지를 그가 받은 것과 동일한 원리로 전달하게 된다. 성경 연구시 주해자는 문법, 역사, 그리고 본문의 정황 등을 살피게 되며 강단에서 설교자는 언어, 배경 그리고 본문의 환경을 충분히 다루어 주의 깊은 청중이 성경으로부터 메시지를 점검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효과적인 강해 설교는 대부분이 성경말씀의 설명으로 채워지게 된다. 좋은 강해설교는 성경 본문을 그 중심 메시지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전개, 목적 그리고 분위기에서까지 반영한다. 이러한 설교가 되어질 때 사람들은 그들이 듣는 바 성경을 배울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들을 위해 성경 연구하는 것을 훈련하게 되는 것이다.
강해설교의 유익점들
강해설교는 설교자에게 엄청난 유익점들을 제공한다. 그 중 하나가 강해설교는 설교자에게 설교해야 할 진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많은 교역자들은 그들의 설교 준비를 시작하기 위한 출발을 하면서 한 주간의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낸다. 오직 천재만이 동일한 청중을 일 년에 수백 번이나 흥미있게 만들 수 있는 신선하고 감동적인 자료를 충분하게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에서 주제들을 뽑아내는 사람이 웅덩이에서 물장난하는 것과 같다면 성경말씀을 주해해 내는 사람은 큰 물에서 노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강해설교는 설교자에게 많은 유형의 설교를 제공해준다. 하나의 구절이 상세히 설명되어질 수도 있다(알렉산더 맥클라렌[Alexander McLaren]이 이런 면에서 탁월했다). 또는 한 단락이 주해될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보통 강해 설교로 간주되는 것이다. 또한 설교자는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의 주제나 교리를 추적할 수도 있다. 이것을 위해 설교자는 그 주제나 교리가 다루어지는 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찾는다. 먼저 어떤 주제는 그것이 발견된 특정한 단락과 연결 되고 다음으로는 다른 단락들과도 연관이 된다.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는 설교 역시 강해적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은 역사나 전기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만약 창세기에서 6명의 인물을 제외시킨다면 별로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강해설교에 대한 정의는 강해설교가 설교자 역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발전시켜준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해자가 성경을 연구할 때 성령께서는 그 설교자의 삶을 감찰하시는 것이다.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준비시키신다. 알렉산더 맥클라렌은 그의 모든 설교가 날마다 성경말씀을 공부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주해자가 하나의 구절을 완전히 숙달할 때 그는 그를 지배하는 성령의 손길 안에서 그 구절의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P. T. 포사이스(Forsyth)는 이것을 이해했기에 이렇게 썼다. “성경은 설교자를 위한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다.”
강해설교의 목적
최종적으로 강해설교의 근본적인 목적은 성경의 근본적인 목적과 동일하다. 강해설교는 성령께서 사람들의 삶과 운명을 바꾸도록 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물론 설교와 가르침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만드시는 유일한 수단들은 아니지만 그분의 중요한 수단임에는 분명하다. 유능한 강해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성경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그것이 마치 역사나 고고학의 교과서였던 것처럼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성령께서는 오늘날에도 성경을 통해 사람들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강단의 사람이나 회중석의 사람들은 유다, 다윗, 베드로 혹은 솔로몬을 판단하면서 앉아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말씀의 가르침 아래서 자신들을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강해설교자는 그 메시지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메시지가 전달되어질 사람들에 대하여도 알아야 한다. 성경말씀과 회중 양자를 모두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고린도교회를 위해 바울이 쓴 서신이 잘못 배달되어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로 도착했다고 상상해 보라. 아마도 그들은 바울이 쓴 내용으로 인해 당황스러워했을 것이다. 빌립보에 살았던 성도들은 고린도에 사는 형제들과는 다른 상황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구약의 선지서들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상황 속에 살고 있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쓰여진 것이다.
교리들은 실제적으로, 의무들은 이론적으로 설교되어야 한다는 것이 개신교 선조들의 방식이었다.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소위 강해 설교라고 불리는 것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설교자는 그때에 관하여 마치 하나님이 아주 먼 옛날 살았던 것처럼 강의하고 지금 여기의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에 초점을 맞춘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가져오는 것에는 실패한다. 적용은 효과적인 강해설교에 있어서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것이다.
물론 성경을 경험으로 연결함에 있어 강해설교자는 사람들의 삶에 맞추기 위해 성경을 비틀어서는 안된다. 대신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의 표준들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현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다가올 세대를 좇아야 한다. 그 적용은 양방향으로 작용한다. 성경적 진리는 사람들의 삶에 관계되어야 하는 한편, 사람들의 삶은 성경적인 믿음에 적절하도록 변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결론
그 자신이 재능 있는 강해자였던 F. B. 마이어(Meyer)는 성경적인 설교자가 그의 임무에 접근함에 따른 두려움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강해설교자는 위대한 계승의 선상에 있다. 개혁자들, 청교도들, 순례자들의 목사들은 본질적으로 강해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적인 해석이나 의심스러운 생각의 문제일 수 있는 그들 자신의 독특한 견해들을 전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성경 안에 굳건히 서서 그들의 메시지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라는 저항할 수 없는 효과를 가지고 본질에 접근시켜나갔다.”
우리 사회의 중대한 문제들은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것들이다.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는 한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며, 그분에 대하여 듣지 못하는 한 주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설교자를 만나지 않는 한 주님에 대하여 듣지 못할 것이며, 설교자가 보내어지지 않는 한 설교자를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4~17).
이 글은 해돈 로빈슨의 Making a Difference in Preaching 가운데 제 5 장 “What Is Expository Preching?”을 Baker Books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Copyrightⓒ2002 by Baker Books. Used by Permission.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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