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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난신학의 맥락에서 본 야훼 神名 理解

하나님아들 2017. 8. 15. 22:29

 고난신학의 맥락에서 본 야훼 神名 理解

 

 

 

 


                                                                       김이곤



  머리말


  구약성서가 지니고 있는 아주 오랜 시(詩)들 중의 하나인 출애굽기 15장 3절의 시구는1) “야훼”(YHWH/Tetragrammaton)라는 이름 그 자체가 전쟁용사(戰爭勇士/the Divine Warrior)의 기능2)을 하고 있다는 것을 동의적 평행법(同義的 平行法/synonymous parallelism)의 형태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야훼는/전쟁의/용사(YHWH/’îš/milḥāmāh)

        야훼는/그의 이름(YHWH/šemô)


  이러한 평행법은, 그러나, 역사와 신앙이 한 곳에서 만나 조화와 통일로 수렴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야훼”는 역사에서는 전쟁을 주도하는 “전쟁용사”이고 제의에서는 신앙과 기도의 대상으로 불리워지는 그 “이름”(šēm/name)이다.

  역사비평학적 연구가 도달한 그 귀결점(terminus ad quem)에 의하면, 출애굽기 15장 3절은 「발람의 신탁」이나 「드보라의 노래」만큼 고대의 것인데,3) 그러나 이러한 고대시가 증언하는 전쟁용사로서의 야훼개념은 구약성서를 읽는 현대 독자들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하나의 직접적인 거침돌이 되어 왔다. 특히 전사(戰士)로서의 야훼 이미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사랑의 하나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데는 많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곤혹스러움을 느껴왔다. 실제로 ‘전쟁’과 ‘원수’에 대한 구약성서의 태도는 예수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며, 그리고 야훼의 전쟁활동과 예수의 가르침과의 부조화를 들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탄핵하는 많은 비판들 속에는 구약성서에 대한 준(準)마르시온적 태도가 작용하고 있음도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야훼가 주도해 온 것으로 주장된 이스라엘의 전쟁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문자적 이해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과학적 연구에 의해서도 결코 충분하게 해결될 수 없는 난제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해결의 길을 처음으로 열어보여 준 것은 역시 게르하르트 폰 라트의 “거룩한 전쟁”에 관한 이론4)이며 이 이론에 대한 가장 적절한 보충적 비판은 노만 K. 갓월드의 사회경제사적 분석5)을 통해서 읽을 수 있다. “거룩한 전쟁” 또는 “야훼의 전쟁”6) 이론은 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과 관련되어 있고 특히 신명기 기자(D) 또는 신명기적 역사가(Dtr)의 거룩한 전쟁 테오리가 주로 해석학적 난제의 대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을 주도한 야훼의 기본 의도가 족장들에게 준 민족형성(땅+후손)에 관한 약속을 성취시킨다는 것과 가나안 주민의 죄악을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제거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 이래,7) 거룩한 전쟁 설화의 절정인 “헤렘”(ḥērěm)이론, 이른바 거룩한 전쟁의 전리품은 성별하여 철저히 야훼신에게 드려야 하고,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성전군(聖戰軍)은 그 원수 자신은 물론이고 그 가족 그리고 그 소유물 모두를 ‘완전 진멸’ 시켜야 한다는 주장(신명 7,26; 20,16-18)은, 갓월드의 주장대로 하나의 변증법적 방법으로 재해석될 수 있을 것이며8) 결코 그 어떤 손 댈 수 없는 스칸달론의 하나로만 처리해 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폰 라트는 이 스칸달론을 제거하는 길을 거룩한 전쟁 설화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통하여 찾았다. 만일, 성전에 관한 기록이 하나의 “사후사건”(事後事件/post event)으로서 그리고 신학적 해석의 프리즘을 통하여 과장법적으로 기록된 히브리 문학의 한 특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면, 실제로, 그 스칸달론은 그 성전설화(聖戰說話)의 신학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규명함으로써 어느 정도 제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폰 라트의 주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군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혀 야훼 또는 야훼의 “루앗하”(靈)에 의하여서만 주도되는 ‘야훼의 전쟁’은 군사적, 정치적 목적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눌림받는 자’(고난 중에 있는 자)의 ‘부르짖음’(쩨/체아카)에 의하여 충동되고 그리고 그 승리는 전적으로 군대나 칼, 창, 그리고 그 어떤 전술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야훼의 ‘이름’(주로 “야훼 체바�”)에 대한 ‘절대적 신뢰’(빠타하)와 적진에 급습한 신의 공포(하라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며, 따라서 ‘원수’(여기서는 철저히 ‘야훼의 원수’이며 이스라엘의 역사적 원수만은 아님)로부터 탈취한 모든 전리품은 전적으로 야훼에게 속한 것으로 성별되고 ‘타부’로서 처리되어 야훼에게 전적으로 드려져야 하는, 이른바 철저히 진멸되어야 할 “저주 받은 것”(anathema), 즉 ‘헤렘’(ḥērěm)이 된다는 것이다.9) 물론, 이것은 올브라이트(W.F. Albright)가 전해주듯이10) 그렇게 “헤렘”에 관한 이러한 셈족의 관습이란 오히려 7세기의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상호학살이나 세계 제 1 차 대전 때 있었던 러시아의 알메니아인 대학살보다는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훨씬 덜 나쁘다는 식으로 지배논리를 호도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신학적 해석학의 문제요 고대 설화문학에 대한 비평학적 해석의 문제라 하겠다. 즉 구약 안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성전(聖戰)은 곧 야훼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눌림받는 한 민족, 히브리인 민족을 그 억압자의 손으로부터 건져내는 하나의 구원행위(여수앝 야훼 : 출애 14,13)에 불과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논문이 아래에서 주로 문제삼는 것은 초기 이스라엘 구원사 또는 출애굽 민족해방사로부터 전(全) 이스라엘 구원사까지를 주도해 온, 이른바, 야훼의 거룩한 전쟁사 속에 부각되어 있는 ‘야훼’ 신명(神名)의 의미와 그 신학적 맥락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일이다. 이스라엘 구원사를 주도해온 구원의 상징(saving name)은 전혀 배타적으로 “야훼”(yhwh)였다.


  Ⅰ. ‘야훼’ 神名에 관한 언어학적 고찰


  “야훼”(YHWH/הוהי)라는 신명의 의미와 그 기원을 논의하는 일은 구약성서학자들의 매우 중요한 과제에 속한다. 왜냐하면, 야훼 종교의 뿌리를 찾는 일은 이러한 신명의 기원을 논할 때 성공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야훼”(Yahweh)라는 이름의 형태는, 여러 비문(碑文) 자료들 안에 나타나고 있는 바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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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매우 고대의 것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과거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거의 정설처럼 널리 인식되어 온 가설,11) 즉 “야훼”라는 이름이 초기 시리아의 미확인된 비(非) 셈계 신의 이름인 “야후-”(yāhû)의 후대 확장형이라는 견해는 오히려 그 역(逆)진행의 작용을 요구하는 히브리어 음운론(音韻論/phonology)의 관점에서 볼 때나12) 또는 독립된 이름으로서의 “야후-”(yāhû)가 놀라웁게도 기원전 5세기 이전까지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볼 때13) 거의 지지하기 어려운 견해로 보인다.

  올브라이트에 의하면, 포로 후기의 표현인 “야후”(yāhû)는 “야호(yāhō) 또는 여호(yehô)→야후(yāhû)→야훼(yāhwěh)”로 진행되어간, 이른바 “야훼”의 그 원형이 아니라, 오히려 “야훼”는 히브리어 음운론상으로는 “야아콥”(ya‘qob), “잇츠학크”(yiṣḥaq), 또는 “요-셉”(yôsef) 등과 같은 미완료태 형식의 동사적(動詞的) 이름이며, 또 “엘”(’ēl)이라는 신명을 그 속에 지닌 이름들인 “야흐디엘”(yaḥdî-el), “야아시엘”(ya‘sî-el) 등과 같은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 미완료태의 기능과 아마르나 판(叛)과 페니키아 비문(碑文)들에서 발견되는 “야브니엘”(yabnî-el)이라는 가나안적 이름 속에서도 발견되는 그 미완료태적 기능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대로, “야훼”는 오히려 소원형과 직설형이 상호교환될 수 있는 하나의 ‘미완료 동사형의 이름’이기 때문에14) “야후”(yāhû)가 오히려(!) “야훼”(yahwéh)로부터 유래한 소원형, 즉 정규 미완료태에서부터 온 아주 정규적인 소원형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15)는 것이다. 즉 “야훼”라는 이름은 전혀 하나의 독립된 미완료 동사형의 이름으로서 매우 고대에 속한 것이며, “야후”(yāhû)는 오히려 “야훼”라는 미완료태 동사적 이름에서부터 온 ‘소원형’으로 ‘야훼’의 부차적 형태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로스(F.M. Cross, Jr.)에 의하면,16) ‘야훼’라는 이름은 기원전 7-6세기의 것인 라키쉬(Lachish)와 아라드(‘Arad) 서신에도 나타나고 하바드(Harvard)의 셈 연구 박물관이 확보하고 있는 기원전 8세기의 미(未)출판물 속에서도 발견되며, 기원전 9세기의 모압의 메솨아(Meša‘) 비문(碑文)17)에서도 발견되고, 심지어는 기원전 14-13세기의 남팔레스타인 에돔 지역의 지명 목록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야훼”라는 신명이 그 형태소적(morphological)인 면에서 볼 때 어디까지나 동사적인 요소를 지닌 이름이라는 견해(Albright)는 마리 텍스트(Mari Text: 기원전 18세기)에 나타나는 아모리식 이름들 안에서도 뚜렷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예들을 집약, 정리하면 거기 나타나는 지배적인 형태는 yahwī-N(Name) 형태와 yaḥwi-N형태로 나타나는데 비록 “목구멍 소리 ḥ가 불확실하다고는 하더라도”18) 그러나 아모리어에서는 ḥ가 h로 대치될 수 있는 이래, yahwī-N을 그 대표적인 형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아모리어 yahwī-를 신명의 형용사(epithet)로서 보고 그것을 ‘야훼’에 결부시킬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즉 yawéh-el과 같은 형식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크로스가 여기서 아모리어 자료를 제시하는 것은 구약성서의 “야훼”와 아모리 전승과의 관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원(原/proto) 히브리어 또는 남가나안어의 동사형 명사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언어학적 관계를 고찰하기 위하여서만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야후(yahû)는 “야훼”의 고대형(古代形)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미완료태 동사형 명사 “야훼”의 ‘단축 소원형’(shortened or apocopated jussive)이라고 하는 것과 따라서 “야훼” 신명은, 그것이 미완료 동사형의 명사인 이래, 동사 hyh<hwh<hwy에서부터 유래해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야후”(yāhû)는 본래는 신령(神靈/numen)들의 불평 소리나 부르짖음이었는데 후에 의식상(儀式上)의 호칭으로 확립되어 간 것이라는 견해는 거의 전적으로 지지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언급하고 지나갈 견해는 “야후”라는 이름에 대한 모빙켈(S. Mowinckel)의 제의적 견해다.19) 모빙켈은 고대 셈족 세계에서는 동사만으로 구성된 신명이 없었다는 전제20)를 가지고 출발하여 이사야 43장 10절(비교. 이사 41,4; 48,12)과 시편 102편 28[27]절을 그 성서적 전거(典據)로 삼고 우선 그 전거(典據)들 속에 나타나는 ‘후!’(hû: “그이!”/He!)라는 말이 신의 이름의 일종이라는 것과21) 그리고 “야후”(yāhû)라는 이름이 신명으로 통용되었다는 사실이 「엘레판타인 파피리」(Elephantine Papyri)를 그 대표로 하는 여러 다른 비문들을 통하여 논증된다는 것,22) 그리고 ‘신(神)의 이름을 자기 이름 안에 포함하는 이름들’(theophoric names)의 주요 구성요소로서는 전적으로 “야후”(yāhû)가 나타나고 또 “야훼”(yahwa/e)는 결코 그 이름(theophoric names)의 머릿글자로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23)을 들어서 “야훼”라는 신명이 동사에서 온 고유명사라는 견해를 부정하고 오히려 그것은 제의적 상황에서, 즉 탄원시나 기도에서 “오, 야훼!”라고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하는(invocation), 그런 제의적 상황으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고대 중동 종교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현현 의례문(顯現儀禮文/epiphany formula)들이 “나는 아르벨라의 이쉬탈이다”, “나는 나부 신이다”라고 되어 있듯이, 이스라엘의 경우에 있어서도 “나는 야훼이다”(’anî/’anōkhî YHWH)라는 자기 소개의 조문양식이 통용되었다는 것24)을 주장한 모빙켈은 이사야 43장 10절에서 “내가 그이인 줄을”(kî anî hû)이라고 했을 때의 “그이”(hû’)나 시편 102편 28[27]절에서 “그러나 당신은 그이”(we’attāh-hû)라고 했을 때의 “그이”(hû’)는 모두 “야훼”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 “그이”(hû’)는 신의 이름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빙켈은 또한 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이름들로서는 “요나단”(<야후나단)25)과 같이 그 첫 글자가 “야후>요”로 시작되는 이름들과 “아비후” 또는 “예후”등의 경우에서와 같이 그 마지막 글자가 “후”로 끝나는 이름들을 예로 제시함으로써 “후”(hû’)의 제의적 특수성격을 옹립했다. 이러한 이름들이 이와 같이 통용된 실례들은 앗시리아 사본들과 기원전 5세기의 신바빌로니아 사본들에서도 자주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빙켈은 “야”(ya)가 아라비아어에서는 ‘오!’와 같은 감탄사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하여26) “야후”(yāhû)는 곧 ‘오, 그분!’(Oh He!)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경우는 회교의 탁발승이 “알라 후!”라고 외치는 ‘열광적 외침’에도 역시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참조. R.Otto “ekstatische Urlaut”).27)

그러나, 고정된 제의적 개념을 강조할 때의 위험성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즉 ‘나는 야훼다’ 또는 ‘나는 그이다’라는 자기 소개의 공식문은 제의적 신현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계약법을 선포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비제의적 잠언들의 선포과정과도 긴밀히 유착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28) 오히려 올브라이트의 더 계속된 연구가 보여준 바에 의하면29) 포로 이후 초기의 “야후”와 “야”는 어떤 배후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편의상의 생략’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야후” “야우” “요”같은 생략식 발음을 사용하는 것이 엄격한 야훼주의자들에게는 종교적 방종과 이교적 모습으로 간주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네개의 자음 전부”(the full Tetragrammaton)를 사용하지 않고 “야후”라는 축소형을 엘레판타인의 유다인들이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던 것은 예레미야와 신명기 개혁에 반대한 유다인 써클에 속한 자들이 에집트 상부 지역에 식민해 와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옛 관습을 그대로 사용한 한 결과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는 우선, “야훼” 신명 연구의 가장 중요한 대본인 출애굽기 3장 14절의 “에흐예 아쉘 에흐예”(’ěhyěh ’ǎšěr ’ěhyěh)에서 사용되고 있는 동사 ’hyh(היה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려하면서 yhwh(야훼/הוהי)의 뜻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30)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오는 문제의 동사 ’hyh의 어근 hyh는, 어원상으로는 대체로, hyh<hwh<hwy라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왔다(pace Mowinckel). “하야”(HaYaH)의 본래적 의미는 “떨어지다”(fall) “생기다”(befall) “되다”(become) “생존하다”(be, exist)31)등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며, 게세니우스(Gesenius)의 히브리어 사전에서는 hyh와 hwh, ḥyh와 ḥwh의 공동기원을 말하므로 to be(become 또는 come into existence)와 to live를 동일 어원 아래 묶었다.32) 일반적으로, “야훼”의 기원을 hwh<hyh에서 찾으려는 그 근거는 아람과 아랍 방언들 속에서 자주 발견되는 hwh어근과 관련되어 왔다. 올브라이트 역시 고유명사 속에 “와우”(wāw)를 가지고 있는 고대형(archaic form)의 대표적 예를 “하와”(hāwāh/아담의 아내 이름/to live)에서 찾는다.33) 이리하여, hyh 또는 hwh를 희랍적 존재론과 결부시켜 ‘야훼’를 ‘존재 자체’(ό ὢν또는 τὸ ὄν)34)로 보는 견해는 대체로 배척당하여 왔다. 비록 아직도 희랍역, “에고 에이미 호 온”(LXX; ἔγω εἰμι ὁ ὤν)에 근거한 해석이 드 보(R. de Vaux)의 견해 속에 계속 남아있다고는 하지만(출애 3,14를 “I am Yahweh”로 번역)35), 데이빗슨(A.B. Davidson)이나 노트(M. Noth), 프리젠(T.C. Vriezen), 압바(R. Abba), 랏쇼브(C.M. Ratschow), 보만(Th. Boman) 등등의 학자들은 계속해서 “하야”(hyh: היה)를 본질개념보다는 현상(phenomenal)개념 또는 기능(functional)개념으로 이해한다.36) 대체로 희랍적 존재론(τὸ ὄν이거나 ὁ ὤν이거나)에 근거한 hyh이해는 학자들 사이에서 구약사상의 컨텍스트와 전혀 맞지 않는 견해로서 배척받아 왔다.37) 따라서 개역성서가 번역해 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초월적 존재론의 의미는 우리의 주장에 부합되지 않는 견해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hyh동사를 “미래형”으로 이해하려는 견해가 있다. 왜냐하면, 성서 히브리어에서는 hyh동사의 현재 시제가 완료태로는 표현되지 않고 주로 미완료태로 표현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애굽기 3장 14절의 미완료태는 ‘미래’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향성의 반영은 아퀼라(Aquila: 주후 130년 경에 히브리어본의 글자 한자 한자를 축자적으로 번역하여 희랍어로 옮겨 놓은 것)와 데오도션(Theodotion : 주후 180-190년 경에 이루어진 희랍어 번역본으로서 70인역을 수정하면서 번역한 것)이 출애굽기 3장 14절을 미래형으로 번역하여 “에소마이 호스 에소마이”(ἔσομαι ὅς ἔσομαι)라고 한 것에서 잘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마르틴 부버나 마르틴 노트, 그리고 폰 라트 같은 이들로부터 강변되었다.38) 마르틴 부버는 특히 출애굽기 3장 14절의 “에흐예 아쉘 에흐예”가 갖고 있는 ‘삶의 자리’의 의의를 강조함으로써 이 본문의 선언은 주로 애굽의 마술적 종교의식의 배경에 대하여 도전하는 신앙환경 속에서 선언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애굽에서처럼 그렇게 이스라엘도 신의 존재 여부에 관심한 것이었다거나 또는 그 신을 주술로 불러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는 단지 야훼가 그 백성에게 자신이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시리라는 것”(YHWH ‘immākh; 출애 3, 12)을 알려주는 것만이 필요했다는 것이다.39) 따라서 출애굽기 3장 14절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앞에 나오는 출애굽기 3장 12절의 “에흐예 임마      크”(ʼehyeh ‘immākh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와 그리고 그것(출애 3,14) 뒤에 나오는 출애굽기 4장 12,15절의 “에흐예 임 피카”(’ehyeh ‘im-phîkhā “내가 네 입과 함께 하리라”)라는 신의 약속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출애굽기 3장 14절의 뜻은 “내가 [거기] 너와(또는 너의 입과) 함께 있을 것이다”(I will be present [there] with you or your mouth)라는 신의 약속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카수토도 여기서 출애굽기 3장 14절은 출애굽기 3장 12절의 ‘미래에 관한 약속’이 현재적으로 재천명된 것이라고 하는 절충적 견해를 제시한다.40) 이러한 이상의 모든 견해들은 대체로 출애굽기 3장 14절의 “에흐예”(’ehyeh)를 hyh<hwh<hwy의 ‘칼(Qal: 단순동사) 미완료형’으로 해석하는 유형의 견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추상적 관념의 한 산물”41)이라는 비판과 구약에서는 hyh동사가 사역동사로 사용된 예가 없으며 그리고 그것이 사역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피엘동사(pi‘el: 强意動詞)로 표현되었었다.42)는 비판적 지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브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은 끊임없이 “야훼”(yahweh)를 사역적 의미로 해석하는 입장을 취해왔다.43) “야훼”(yahwéh)가 “하야”(hayah: “to be”)의 사역형이며 그 뜻은 “Creator et effector rerum”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을 1700년에 처음으로 밝힌 자는 르 끌레르끄(Le Clerc/Clericus)인데 이 견해를 학술적으로 적절히 발전시킨 자는 하우프트(Haupt)이다. 하우프트는 “야훼”를 “Insdaseinrufer”44)(the one who brings into existence: Creator)라고 설명하였는데45) 그에 의하면, 출애굽기 3장 14절의 “’hyh ’šr ’hyh”(에흐예 아쉘 에흐예)는 본래 미세한 본문파손을 일으킨 부분이었고 마소라학자들도 이 글자들에 정확하게 모음을 붙이지 못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아흐예 아쉘 이흐예”(’ahyéh ’ašer yǐhyéh: I cause to be what comes into existence/Ichrufe ins Dasein was da ist)라고 수정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수정문을 “야훼”라는 이름의 완전한 형태로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 다른 논문(JBL 37, p.142)을 통하여서도 이 수정문은 결코 하나의 “신비화”가 아니고 애굽의 사상형식과 표현양식을 반영하는 옛 의례문형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했다. 비록 ‘야훼’라는 신명을 “창조자”라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는 이 견해가 “풍요의 신”을 “야훼”의 기원으로 보는 모순을 범한다고 비판하는 모빙켈의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46) 이러한 하우프트의 이론을 언어학적, 고고학적 고찰과 자료들에 의해서 더욱 강력히 뒷받침해 준 것이 올브라이트 학파의 입장이다.47) 그러므로 이 ‘히프일 이론’(Hiph‘il theory)을 우리는 편의상 “하우프트-올브라이트 이론”(Haupt-Albright theory)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올브라이트는 우선 하우프트 이론이 에집트 비문들과 평행되고 있다는 것을 들어서 그 이론을 매우 강력히 지지한다. 즉 “아흐예 아쉘 이흐예”와 같은 문형(formula)은 에집트 제18왕조가 지상에 왕으로 화육한 태양신 파라오를 언급하는 비문들 속에서도 나타나는데, “shpr fpwwnn ty fy”(He causes to come into existence)라는 문형 이외에도 “아몬 레”(Amôn-Rê‘)에게 부여한 것으로서 “’Imn-R‘ qmz wnnt.”(Amon-Re who has created what exists)등이 있다. 이러한 관념은 에집트신학의 특징이고 메소포타미아 자료들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메소포타미아의 신학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세계가 시작될 태초에 이미 창조되었고 그 때, 태초의 때에 예표된 영원한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은 계속 자신을 드러내 보여가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히브리 종교가 수메르 아카드 문화의 영향에 못지 않게 에집트로부터도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48) 더욱이 모세가 속한 지파인 레위지파 계열의 인명들이 거의 에집트식 이름들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하며 이것은 곧 모세가 에집트의 지혜로부터 영향을 받았든 안 받았든 에집트 체류기간 동안에 받은 영향이 야훼 종교의 싹을 심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게 해준다.

  올브라이트는 강력한 아람어(Aramaic) 영향 아래에 있는 (Amorite이 아님) “야훼”라는 이름을 ‘칼’(Qal)형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며 또 “야훼”(yahwéh)라는 말의 ‘아’(a) 모음은 그것이 사역형(히프일/causative)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고 주장한다.49) “야훼”라는 동사적 명사의 줄기인 hwy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함께 나타나는 셈 말씨인데(참조. Holladay, p.403.) 이 동사의 “히프일”(사역형) 동사는 고전 히브리어에서 정규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아람어 방언은 “파엘”(pa‘el)형과 “아펠”([h]afel)형이 모두 꼭같이 사역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50)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51) 올브라이트의 ‘히프일 이론’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52)

  (1) “야훼”는 미완료 동사로 볼 수 있으며 그 동사의 줄기는 아직도 아람어 속에 남아있는 hwy이고 이것은 후에 hwh, 그리고 hyh가 되었다(hwy>hwh>hyh).

  (2) hyh의 의미는 “to come into existence, become, be”이다.

  (3) 고유명사 속에 “와우”(wāw)가 들어가 있는 고대형의 이름 “하와”(ḥawwah: 아담의 아내 이름)의 경우와 같은 경우를 고려할 때 모음 ‘아’(a)는 “야훼”(yahwéh)가 언어학적으로 사역형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후대 히브리어의 mehawweh(He who causes to be 또는 He who brings into existence)와 정확히 상응한다. 이러한 사역형이 기원전 제 2천년기(the second millennium B.C.)의 고대 히브리인들에게는 맞지 않는 지나치게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냐는 주장53)은 다음의 사실들을 고려하지 못한 넌센스다. 즉 앗시리아어로는 bašû의 사역형 šubšu(come into existence)가 아주 초기부터 사용되었고 에집트어로는 ḫpr의 사역형 ‘sḫpr(come into existence)가 피라밋 시대로부터 통용되고 있었으며, 페니키아어로서는 kwn의 사역형(아랍어 kâna처럼) yakîn이 el과 결합되어 yakîn-ilu(God brings into existence)라는 말로 이미 기원전 12세기 초반부터 사용되어 있었는데, 이 yakîn은 야훼의 속성을 인격화하는 솔로몬 성정 문 앞의 두 기둥 중 하나의 이름이기도 하다(이것은 페니키아 자료의 이스라엘적 응용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후대의 아람어에서는 아펠(af‘el)형 ahwî와 파엘(pa‘el)형(사역형 hawwî를 모두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모세 시대의 히브리인들이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생각54)도 전혀 엉뚱한 생각은 아니다.

  (4) “야훼”는 hwy>hwh>hyh의 사역형에서 유래한 좀 더 긴 기도문 형식의 이름(litanic formula) 또는 문장 이름(sentence name)에서부터 줄여진 생략형 또는 애칭형(abbreviated or hypocoristic) 이름이다. 이러한 현상은 바빌로니아, 에집트, 그리고 가나안에서부터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다. 가령, 수메르 바빌로니아의 Dumu-zid-abzu가 나중에 Tammuz(참조. 에제 8,14의 “담무스”)가 된 경우(그 외, Asari-lu-dug→Marduk; Gishbilgamesh→Gilgamesh), 에집트의 오시리스-오노프리스(Osiris-Onnophris)가 나중에 오시리스가 된 경우 등을 들 수 있으며 가장 주목할 만한 예는 기원전 15세기의 가나안 종교로부터 얻을 수 있는데,


        나는 압도한다(’al’iyu), 전터에서 만나는 투사들을.

        ’al’iyu qurâdîma qâriyêya ba’arṣi milḥámati54a)


이라는 ‘긴 문장형태’(!)로 된 완전한 형태의 폭풍신 바알의 이름이 나중에는 생략된 형태의 “알리얀”(Al’iyan)으로만 불리워진 경우가 그 경우다. 따라서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타나는 수수께끼같은 문형 “에흐예 아쉘 에흐예”는 본래 사역형 동사 이름 ‘야훼’가 거기로부터 유래한 “문장형 이름”인데 그것을 사역형 3인칭으로 바꾸면, “야흐웨(예)아쉘 이흐웨(예)”(He causes to be what comes into existence)가 된다. 그리고 이 조문형식(formula)은, 후대에 와서, 옛 사역형이 히브리어에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자 현재의 형식(qal-form)으로 수정되었다. 이 형식을 모세 시대의 방언으로 추론해 보면 “야훼 쩨-이흐웨”(yahweh zê-yihweh)가 될 것으로 보이며 판관기 5장 5절의 “쩨-시나이”(the one of Sinai)는 그러한 예가 남아 있는 한 모습이다. 특히 올브라이트는 기원전 15세기의 「아문(Amun)에게 드리는 찬양시」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동일한 사역형 문형이 또한 그 전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올브라이트의 견해는 그의 제자들인 프리드맨(D.N. Freedman)과 크로스(F.M. Cross)에게서 가장 강력한 지지를 받고 변호되었다.55) 프리드맨의 견해는 올브라이트의 ‘히프일(Hiph‘il)이론’을 원칙적인 면에서 받아들이되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오는 문제의 문형의 제 두 번째의 “에흐예”(’ehyeh)를 3인칭으로 수정하는 하우프트-올브라이트 이론(Haupt-Albright theory: ’ahyeh ’ašery ǐhyéh/היהי רשא היהא/I cause to be what comes into existence)을 좀더 개선해 보려는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출애굽기 3장 14절의 idem per idem 형식에 의하여 반복되는 주요 어휘들, “긍휼”(라훔/raḥûm), “은혜”(한눈/ḥannûn), “질투”(칸나/qannā’)등을 발견하고 이것들이 곧 “에흐예”의 의미를 암시해 주고 “야훼”의 기능을 반영해 준다는 것을 논증한다.56) 그러나, 프리드맨도 역시 올브라이트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야훼’가 “히프일”과 연결되는 전통이 왜 성서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성서 바깥에서만 그 전거가 발견되었는지에 관한 명쾌한 설명을 제공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크로스의 견해도57) 역시 원칙적인 면에서 올브라이트의 길과 같은 길을 가고 있는데 그의 관심은 주로 최근의 고대 중동에서 얻은 평행구문들의 도움을 받아 “야훼”는 본래 엘(El) 제의에서 분리되어 나온 창조신, 즉 엘의 제의적 문장 이름이었다는 이론을 역설한다. 그는 이러한 그의 주장의 근거를 히브리어 관계사 “아쉘”(ašer)이 후기 청동기 시대 말기의 우가릿 문학에 나타나는 관계사 dū를 대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고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오는 문제의 유형 “에흐예 아쉘 에흐예”는 본래 엘의 형용사인 dū yahwī와 평행된다고 보았으며 우가릿 안에서 발견되는 그 대표적 예로서는 dū yakāninu([He] who creates)라고 본다. 따라서 출애굽기 3장 14절의 문제의 문형은 본래는 ’ēl dū yahwī였는데 “야훼”가 주요한 제의명(祭儀名)이 되었을 때 ’ēl 대신에 “야훼”가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전히 출애굽기 3장 14절의 신학이 제 2차적인 것이라는 견해를 좀 더 확실히 확증해 주는 이론적 근거가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비록 올브라이트 계열의 ‘히프일 이론’이 지금까지의 신명 연구에 가장 설득력있는 해석학적 길을 열어 주었다고는 하더라도 이것은 현대 성서 언어학과 고고학 그리고 역사비평학이 갈 수 있는 그 한계점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의 다음 과제는 지금까지의 논구를 바탕으로 한 신학적 접근과 해석학의 과제를 통해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Ⅱ. “야훼” 神名에 관한 신학적 접근


  ‘야훼’ 신명에 관한 이상의 언어학적 고찰이 주는 공헌은, 그 연구의 한계점 인식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가 증거하려는 야훼의 한 현실을 잘 번영해 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즉 이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마치 아테네 시민들이 알지 못하고 섬겼던 그 “아그노스토스 데오스”(ἀγνώστος θεὸς/알지 못하는 신)58)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고대 셈족 사회가 갖고 있던 히브리적 신 이해의 맥락 안에서 다시 살펴보게 하고, 동시에 구약성서의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 주었다.

  지금까지의 언어학적인 고찰은, 비록 아직은 학자들간의 의견일치를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히브리인의 하나님 야훼’(출애 3,18/yahweh ’elōhê ha‘ivrîyim)는 희랍적 존재론을 통하여 유출될 수 있는 그런 ‘존재’(Being/τὸ ὄν)가 아닌 ‘비존재의 신’(deus absconditus)이며 그리고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서는 오히려 “왜 너는 내 이름을 묻느냐?”(lāmāh zĕh tiš’al lišmî/창세 32,29[30]; 판관 13,18)59)라는 반문의 형식으로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고 그 대신에 “하야”동사를 이러한 익살부리는 말놀이(paronomasia)로 표현하여(idem per idem) ‘고난’의 상황에서 행할 자신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알렸던 분이라는 것을 밝혀 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우선 ‘히프일 이론’을 근거한 신학적 변을 어느 정도 논할 수 있다고 본다.

  오버만(J. Obermann)이 남방 아나톨리아(Southern Anatolia) 카라티프(Karatepe)에서 발견된 페니키아 비문의 yqtl’nk의 yqtl이 갖고 있는 분사적(分詞的) 서술 기능에 대한 깨달음을 근거로 하여 “야훼”60)의 사역적 어간이 갖는 신학적 맥락을 들추어 내준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오버만이 말하는 바, 분사형 접두어가 ‘맴’(m)이 아닌 ‘요드’(y)라는 새로운 주장은 ‘요드’ 전철 조차도 어간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스펄버(A. Sperber)의 이론61)만큼 과격하지는 않다고 해도62) 비판의 여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63) 그러나, 그의 “Nomen Agentis”로서의 야훼 이해는 구약에 나타난 야훼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된다.

  문학 이전 시대에 히브리인들 사이에 가장 빈번히 사용되어 온 것으로 알고 있는 두 개의 대표적 공식문형 즉 “아니 야훼”(anî YHWH)와 “야훼 체바�”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이 경우 “야훼”를 분사형(participle) nomen agentis로서 이해한다면 “아니 야훼”(’anî YHWH)는 단순히 “나는 야훼이다”라는 의미는 물론 아니고 올브라이트 학파가 말한 “I am the one who causes to be”라는 의미보다는 좀 더 다듬어진 의미 즉 “나는 …을 붙들어 주는 자다”(I am Sustainer)라는 의미가 되고 “야훼 체바�”(yahweh ṣeḇā’ôṯ)도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때는 “군대를 붙들어 주는 자”(He who sustains the armies 즉 Sustainer of armies)라는 의미가 된다.64) 이러한 이론은 또한 ‘야훼와 연결된 복합어의 수수께끼’가 지닌 난해성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하겠다. 예컨대, “야훼 닛시”는 단순히 “야훼는 나의 기(旗)”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기를 붙드는 자”를 의미하며 “야훼 치데크누”는 “야훼는 우리의 의(義)”가 아니라 “야훼는 우리의 의를 세우는 분(붙드는 분)”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65) 이렇게 하여 우리는 “야훼”라는 신명의 의미는 ‘○○○를 붙들어 주는 자’(Sustainer of ○○○)라는 기능을 갖고 있는 이름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게 된다. 즉 구약성서가 말하는 신, “야훼”는 영고성쇄하는 인류사에 끊임없이 생명을 부여하며 그 생명을 붙드는 분(Sustainer, Establisher)이라는 말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우리는 출애굽기 3장 14절의 야훼 신명 계시는 그것이 속해 있는 본문의 맥락에서 볼 때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고 “야훼”는 누구를 붙들어 주는 자이며 무엇을 있게(무엇을 발생하게)하는 분(One who causes to be)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것을 물어야 할 것이다. 즉 출애굽기 3장의 컨텍스트에서 볼 때 야훼의 이름이 가지는 의의가 무엇이냐가 문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출애굽기 3장 14절의 문맥은 3중의 반복구로 구성된 문학적 틀 안에 들어있는 한 보도, 즉 ‘타지 않는 불꽃떨기’에 관한 보도가 신명계시 사건의 ‘신학적 서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이 부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66)


        출 2,23-25……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으니(쩨/체아카), 그 고역                      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를…하나님이 들으시고…하셨다.


                출 3,1-6 타지 않는 불꽃떨기 속의 하나님 계시


        출 3,7-8………내 백성의 고통을…내가 보고, 내가…그 부르짖음(체아카)을 듣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인도하여…하리라.

        출 3,9-10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체아카)을 듣고…그 억압도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보내어…을 인도하여 내리라.


                출 3,11-14 야훼의 신명 계시 “아흐예 아쉘 이흐예”


  이상의 구조가 말하는 신학적 의미는 ‘불꽃떨기 속의 신 계시’와 ‘야훼 신명 계시’가 서로 상응을 이루고 있고 이 ‘계시들’을 연결시키고 있는 신학적 틀은 ‘야훼 전쟁’의 기본 주제인 ‘부르짖음(쩨/체아카)→신의 응답(여수아)’이라는 구원사적 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차일즈(B.S. Childs)는 이 두 개의 계시가 출애굽기 3장 12절에 나타나는 “이것이 너에게 주는 그 징표(오트/’ôth)이다”라는 선언과 결부되며, 그것은 곧 모세에게 예언자로서의 직무를 맡겨 ‘고난’의 임지로 보내는 그 징표(’ôth)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67) 즉 여기 나타나는 익살스러운 야훼의 신명계시는 결코 “이름이 무엇입니까?”(출 3,13)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거절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야훼’는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속에서”(밑토크 핫스네) 현존하는 분(Insdaseinrufer)68)이며 동시에 ‘부르짖음(쩨/체아카)→응답(여수아)’으로 이어지는 히브리인 이스라엘의 ‘고난사’와 거룩한 전쟁사 속에서 구원활동의 기능을 행하는 분이라는 것을 계시하는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세에게는 “놀라운 일”(hammar’eh hāggādhōl/출 3,3)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비로소 이스라엘 ‘고난신학’의 한 태동을 본다. 왜냐하면 떨기(스네) 속의 엘로힘과 야훼 사이에는 명백한 유형론적 상응이 성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떨기’는 그 본질이 너무 연약해서 만일 그것이 여름의 사막 열기를 받으면 인위적인 인화작용이 없이도 스스로 쉽게 발화되고 쉽게 소멸되어 버리는 그런 가련하고 연약한 것의 상징인데,69) 그 연약한 떨기에 저렇게도 거대한 [질투의]신의 불길이 붙었는데도 타지 않는 이 기이한 현상(맏두아/máddûʽāh/출 3,3)이란, 분명, “야훼”라는 분은 스네(senê)와 같이 연약한 이스라엘, 고난받고 있는 히브리인 민중을 결코 소멸시키지 않고(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사 42,3) ‘붙드는 분’이요, 그 고난받는 민중이 부르짖는 ‘부르짖음’(쩨/체아카)에 성실히 구원으로 응답하는 분(One who creates mercy to whom he wants to show mercy)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계시사건이라고 하겠다. 이로서 우리는 히브리인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의 기본 속성과 기능, 그리고 그것이 활동하는 역사적 자리 및 신학적 컨텍스트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드라이버(S.R. Driver)가 인식하고 프리드맨이 발전시킨,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타나는 idem per idem 구조와 동일한 구조가 일어나는 다른 본문(출 33,19; 34,6·14)에 대한 한 고찰은70) “야훼”의 속성과 기능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도와 준다. 그 idem per idem 구조의 카테고리를 도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출 3장과 33장 34장에 나타나는 idem per(아쉘) idem 도식


        출  3,14……나는 / 있게 하는 자다(아흐예․아쉘․이흐예)

        출 33,19……은혜 베풀 자에게 / 은혜를 베풀고(한노티․�․아쉘․아혼)

                   긍휼 베풀 자에게 / 긍휼을 베푼다(라함티․�․아쉘․아하렘)

        출 34, 6……야훼! / 야훼 // 긍휼의 / 신 // 은혜의 / 신

                          (야훼․야훼 // 엘․라훔 // [엘]․한눈)

        출 34,14……야훼! / 그의 이름은 / 열정(질투) // 그는 / 열정(질투)의 / 신

                          (야훼․칸나․쉬모 // 엘․칸나․후)


  이와 같은 순환반복어법(idem per idem/circular formula)의 구조가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야훼의 속성과 그 기능은 ‘야훼-한눈-라훔-칸나’로 요약되는데, 이들이 지닌 공통된 속성은(‘한눈’과 ‘라훔’을 문자적 반복평행으로 간주한다면) ‘라훔의 칸나’(긍휼의 열정/passion of compassion)라고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칸나’(qannā’/‘열정’ 또는 ‘질투’)는 물론 계약사건의 컨텍스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출애굽 해방→가나안 점유’라는 민중 해방사 사이에 가로놓인 계약사건의 역사적 자리를 떠나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고 그러한 해방사를 주도하는 야훼 신이 고난받는 자를 향하여 가지는 “열망”(qǎnnā’/passion, envy, jealousy)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나타낸 말(이사 26,11)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야훼의 열망은, 위의 순환반복어법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분명, 고난받는 자에 대한 ‘긍휼’(라훔/rāḥûm)을 가리킨다(참조. 느 9,17; 시 86,15; 욜 2,13; 욘 4,2; 시 103,8; 145,8).

  ‘야훼’의 대표적 속성과 그 기능인 ‘라훔(rāhûm/긍휼)은, 그러나, 여인의 진통(birth pang)이 일어나는 장소인 ‘자궁’을 의미하는 말, ‘레헴’(rěḥěm)이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71) 그러므로 이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야훼의 ‘열망’(칸나)의 자리는 ‘진통’의 자리라는 것을 지시해 준다. 예언자 호세아, 미가, 예레미야, 제2이사야, 그리고 현자 욥은 이러한 ‘고난신학’의 맥락을 증언해 준 챔피언들이다.


        호  세  아 - 내가 네게…‘긍휼히 여김으로’(beraḥamîm) 장가들리라(2,21[19];

                      참조. 1,6·7; 2,1[13]·4[6]·23[25]).

        미       가 - 해산하는 여인처럼 몸부림쳐 낳을지어다(4,9).

        예 레 미 야 -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내가 기어코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araḥamennû/31,20).

        제 2 이사야 - 너는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라(이사 42,14b).

        욥       기 - 얼음은 누구의 ‘태’(beṭen)로부터 나왔으며 하늘의 서리는 누가 ‘낳았                      는가’(yelādhô) (38,29)


  이상과 같은 수사학적인 시적 아날로지는 분명 ‘진통하는 고통’이 곧 야훼 하나님의 창조적 구원 활동의 자리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출애굽기 3장 14절의 신명 계시 사건이 증언하는 야훼의 속성은 고난받고 있는 민중에게 구원을 낳아 주기(창조해 주기)위하여 ‘스네’(떨기 : 연약함을 상징) 안에서 구로(劬勞)하며 진통하는, 그래서 절규하며 부르짖는 ‘레헴’(자궁, 태/womb)의 긍휼(라훔)이라고 주장할 수 있고(미 4,9) 또 그 신의 이름의 ‘삶의 자리’는 ‘고난받는 히브리인 “스네”들의 부르짖음’(쩨/체아카)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고난받는 자의 ‘부르짖음’(쩨/체아카)이 야훼의 ‘긍휼’(라훔)의 ‘열정’(칸나)을 자극한다는 고난신학적 테오리는 구약의 역사설화, 예언문학, 그리고 시편(특히 “탄원시”) 문학 및 신약성서에서까지 광범위하게 반영되어 있는데72) 그 중에서도 구약의 율법구조가 지닌 고난신학적 패턴은 주목할만 하다.73)


        너희는 나그네(gēr)를 압제하지 말라!

        그리고 학대하지 말라!

        왜냐하면(kî)

        너희도 이 땅에서 나그네(gērîm)로 있었기 때문이다(출 22,20[21]).


  즉 이스라엘은, 고난받는 자를 도와 주는 일을 해야 하도록 요구하는 그 신의 법령을, 그들이 겪은 ‘고난’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kî[!]) 지키도록 요구받고 있다. 특히 출애굽기 22장 25[26-27]절에 나오는 한 계약법전은 이러한 법령을 주는 이유를,


        왜냐하면(kî) 그가 내게 ‘부르짖을 때’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야훼의 ‘긍휼의 열정’(라훔의 칸네)은 고난받는 자의 ‘부르짖음’을 들을 때는 참고 있을 수 없도록 한다(요나 4,2). 눌림받는 자의 ‘고난’은, 실로, 야훼의 긍휼을 생산해내는 ‘모태’(母胎/레헴)다.

  출애굽기 3장 13-14절의 신명 계시가 지닌 고난신학적 맥락은 이상에서와 같은 출애굽기 3장 13-14절의 ‘서론’(출 2,23-3,12)에서만이 아니라 그 ‘결부론’(출애 3,15-22)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출애굽기 3장 13-14절에서 야훼가 모세에게 응답한 ‘순환반복어법’적 말놀이에 대한 보충적 설명은 결론부(출 3,15-22)에서,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74)…야훼이시다(출 3,15․16).

        히브리인들75) 하나님, 야훼께서 우리와 만나셨다(출 3,18).


라는 말로 설명되었다. 이 문맥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스네’ 가운데 현현한 ‘야훼’는 그 어떤 새로운 신이 아니라, ‘조상의 하나님’임과 동시에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조상의 하나님’(θεὸς πατρός)이라는 말은 출애굽기 2장 23절-3장 22절에서는 네 번 나타나는데, 신명 계시 사건(출 3,14)이전에 두 번(출 3,6․13) 나타날 때는 ‘야훼’와 평행으로 쓰여지지 않고, 그 신명 계시 사건 이후에 두 번(출 3,15․16)나타날 때는 ‘야훼’와 평행으로 쓰여지고 있다. 즉 이 증언(E)은, 이 계시사건(출 3,14) 이전의 이스라엘 조상들에게는 야훼께서 자신을 “야훼”로서가 아니라 “전능의 신”, “엘 사따이”로만 나타났다는 출애굽기 6장3절(P)의 증언과 신학적 일치를 이루고 있다.76) 따라서 위의 문맥의 논리를 출애굽기 6장 3절(P)과 병행시키면, ‘스네’ 가운데 현현한 신은 ‘조상의 신, 엘 사따이’였고 동시에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었으며 그분이 곧 ‘야훼’라는 말이 된다. 즉 ‘스네(불꽃 떨기)의 신’=‘엘 사따이’=‘야훼’=‘히브리인들의 신’이라는 등식이 가능해진다. 이 등식은 논의의 여지없이 ‘고난신학적 진술’이다.

  ‘스네’의 신과 야훼의 고난신학적 상응은 이미 위에서 ‘라훔의 칸네’라는 주제 아래 논의해 왔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나머지 ‘엘 사따이’와 ‘히브리인들의 신’이 어떻게 고난신학적 맥락 안에 들어와서 상응을 이루게 되는지를 간단히 언급해 보자. 이스라엘의 가장 대표적인 ‘조상의 신’으로 알려진 ‘엘 사따이’(’ēl ‘ôlām, ’ēl ‘elyon, 그리고 ’ēl ro’î 등보다 훨씬 더 조상신과 밀접함)에 관한 고전적 연구는 1935년 올브라이트에 의해서 가장 설득력있게 진행되었으며, 후에 크로스에 의해서 발전되었는데,77)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따이”(shadday)라는 말의 서방 셈어(ṯdw/ṯdy)와 동방 셈어(šadû<tadwum)의 어원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여러 가지 곤란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山)이라는 의미(엘 사따이=El the Mountain one)를 갖는다.78) 올브라이트는 특히 아카드어 šadû의 어원을 세 가지로 추측한다.79) 즉 (1) 아랍어 sadd, sudd는 ‘울타리’ 또는 ‘산’을 의미하고, (2) 히브리어 šadê는 ‘초원’(들)을 의미하며, (3) 아랍어 ṯadyu나 아람어 tedayyâ 그리고 히브리어 šādáyim은 ‘젖가슴’, ‘두 개의 젖가슴’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북 셈계의 증거자료가 “사따이”의 어원을 결정하는 데 더 결정적이라고 보는 크로스는 우가릿어 ṯdy가 ‘산’을 의미한다는 점을 유의함으로써 šd(들)과는 구별하고(!) 그리고 그것을 동방 셈계의 šadū/tadwum(산)과 연결시킴으로써 “사따이”의 원의미는 결정적으로 ‘산’이라고 규정짓는다.80)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이고 주목할만한 점은, 올브라이트나 크로스 모두가 서방 셈어 ṯdw/ṯdy의 의미를 ‘the mountain one’으로 읽는 일은 제 2차적인 것이고 그 원초적인 의미는 ‘젖가슴’(특히 히브리어 쌍수 šadday를 참조하면 ‘두 개의 젖가슴’)을 의미한다고 밝힌 점이다.81) 이것은 조상의 하나님(θεὸς πατρός)은, 본원적으로 볼 때는, ‘두 개의 젖가슴의 신’ 즉 생산과 창조 그리고 양육을 담당한 신이었음을 지시해 준다. ‘긍휼’(라훔)과 ‘자궁’(레헴/子宮)의 신을 ‘두 젖가슴’의 신 “엘 사따이”와 일치시켜 읽는 것은, 실로 히브리인 이스라엘의 구원이 연약한 ‘스네’ 가운데서 계시되었다는 증언과 신학적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82)

  ‘레헴’(자궁)과 ‘사따이’(두 젖가슴)의 본원적인 기능이 산고(産苦)와 관련되었다는 관찰은 바로 이 ‘조상의 신’(데오스 파트로스), ‘엘 사따이’가 곧 ‘히브리인의 신’이라는 증언도 역시 동일한 신학적 관점에서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 구약에 나타나는 ‘히브리인’(이브리)의 정체를 “하비루”(메소포타미아) 또는 “아피루”(에집트)와 일치시킬 수 있는지는, 그린버그(Moshe Greenberg)의 저서 The Hab/piru가 부정적으로 분석해 준 이래,83) 그 판단이 용이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올브라이트는 긍정적 견해를 보임84)),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히브리인”은 대체로 에집트 자료(아피루)와 메소포타미아 자료(하비/피루)가 말해 주는 것과 비슷하게   (‘apiru-Hab/piru-‘ivrî), 주로 외국의 환경 속에 낯선 자로 있을 때(창 14,13의 아브라함), 노예상태(창 39,14·17의 요셉), 강제노역의 상태(출 1,16·19; 2,11·13), 유기된 아기의 경우(출 2,6의 모세), 그리고 여기 출애굽기 3장 18절의 경우 등에서 특징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리하여 연약한 가시떨기, ‘스네’ 속에 현존한 신이 ‘조상의 신’ ‘엘 사따이’요, 동시에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며 그가 “야훼”이다는 출애굽기 3장의 증언은 곧 구약의 하나님 ‘야훼’란 고난받고 있는 자를 붙들고(Sustainer) 세우며(Establisher) 그리고 자궁의 진통(rēḥěm) 속에서 그들을 위한 긍휼의 은혜를 ‘창조해 주는 분’(yahweh one who Causes to be)이라는 증언(출 33,19; 34,6)이라고 하겠다. 즉 눌림받는 민중의 하나님은 고난받는 민중의 자리인 ‘스네 중심부에서’(mittôkh ḥǎṣṣenê) 고통당하는 민중의 소리(쩨/체아카)를 듣고 (šāma’) 예언자를 부른다. 그가 곧 ’hyh ’šr yhyh이다.



  맺는말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고난신학’의 역설성은 고난받는 민중의 아픔 한가운데서(mittôkh ḥǎṣṣenê) 그 고난받는 자가 부르짖는 고난의 언어(탄식 : 쩨/체아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 하나님, 자궁(레헴)의 창조성과 그리고 두 젖가슴의 전능성을 가지고 그 고난받는 자 안에 구원을 창조해 내는 자인 그 야훼가 우리의 이 죄스러운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와서(incarnate) 홀로(인간의 전쟁참여는 거부하면서! 참조. 출 14,14) 전쟁의 용사 또는 ‘군대를 창조하는 야훼 체바�’85)이 되어서 억압자들(rešā‘îm)의 악(reša‘)을 박멸(ḥērěm)시킨다는 구원사 신학의 증언 속에 잘 나타나 있다.86) 그러나, 놀라운 것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야훼의 ‘거룩한 전쟁’(밀하마 커도샤)이란 거의 배타적으로 눌림받는 자의 부르짖음(고난의 언어 : 쩨/체아카/the cry for help of the helpless oppressed87))의 충동을 받아 억압하는 자들(rešā‘îm)을 쳐부수기 위하여 갑자기 야훼가 일어나심(쿰!/qûm)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거룩한 전쟁 설화에서는 눌림받는 자들은 철저히 의인(빛의 아들들)으로 범주화되고 억압하는 자들은 또한 악인들(어둠의 아들들)과 야훼의 원수들로 범주화됨으로써 저주받을 헤렘(ḥērěm: anathema)으로서 처리된다. 승리는 전적으로 야훼에게 속한 것이므로 (시 3,8[9]), 눌림받는 자들은 단지 ‘야훼의 이름’(šēm YHWH)을 신뢰하고(삼상 17,45; 대하 20,20-21) 두려움 없이(출 14,13) 소고 잡고 춤추며(출 15,20) 다음과 같은 찬양을 드린다.88)


    야훼를 찬양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시며 말과 그 기병을 바다에 던지시는 분!(출           15,21)1)89)


  야훼는 전쟁을 한다. 그러나, 그는 고난받는 자(히브리인)의 부르짖음(쩨/체아카)에 성실히 응답하기 위하여 전쟁에 나선다. 그리고 출전하려고 그가 임재(현현)하는 장소는 전혀 배타적으로 고난받고 있는 자들이 겪는 아픔의 자궁(레헴)이며 약하고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의 자리인 불꽃 떨기 ‘스네’이다. 그리고 구원을 창조하기 위하여 (“야훼”의 ‘히프일’ 기능) 그가 사용하는 거룩한 전쟁의 무기는 완전히 배타적으로 긍휼(라훔<레헴/자궁)과 전능한 창조력(사따이/젖가슴)일 뿐이다. 이것은 “야훼”라는 신명이 지닌 의미의 두 주축인 ‘창조자’(One who causes to be: creator, ‘라훔’의 신)와 ‘붙드는 분’(Sustainer: “사따이”의 신)의 이미지가 조화되고 종합된 한 표현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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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M. Cross, Jr., & D.N. Freedman, “The Song of Miriam,” JNES 14(1955), pp.237-250; P.C. Craigie, “Yahweh is a Man of Wars,” SJT 22(1969), pp.183-188: A. Gelston, “The Wars of Israel,” SJT 17(1964), pp.325-331; P.D. Miller, Jr., “God the Warrior,” Interpretation 19(1965), pp.39-46; B.S. Childs, The Book of Exodus (Philadelphia : The Westminster Press, 1974), pp.248-253; Ee Kon Kim, The Rapid Change of Mood in the Lament Psalms (Seoul: Korea Theological Study Institute, 1985), pp.33-36등을 참조하라.




2) F.M. Cross, Jr., “The Divine Warrior in Israel's Early Cult,” Biblical Motifs (Cambridge &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66), pp.11-30; P.D. Miller, Jr., The Divine Warrior in Early Israel(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3, 1976).




3) 대체로 출 15장의 시(時)는 기원전 12C경의 것이며, 그것의 문학화는 늦어도 기원전 10C경에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본다. F.M. Cross, Jr., & D.N. Freedman, “The Song of Miriam,” JNES 14(1955), p.240 참조.




4) G. von Rad, Der Heilige Krieg im alten Israel (Zürich: Zwingli-Verlag, 1951); idem, Studies in Deuteromomy (London: SCM Press, 1953), pp.46-49.




5) N.K. Gottwald, “War, Holy,” IDB Supp, pp.942-944; idem, The Tribes of Yahweh (New York: Orbis Books, 1979); idem, The Hebrew Bible:A Socio-Literary Introduction (Philadelphia: Frotress Press, 1985), pp.258, 279-280.




6) G.H. Jones, “‘Holy War’ or ‘Yahweh War’” VT 25(1975), pp.642-658.




7) A. Gelston, “The Wars of Israel,” SJT 17(1964), pp.325-331.




8) N.K. Gottwald, The Hebrew Bible: Socio-Literary Introduction, p.258.




9) G. von Rad. Der Heilige Krieg im alten Israel; idem, Studies in Deuteronomy, pp.46-49.




10) W.F. Albright,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New York: Doubleday & Company, 1940, 1957), p.280.




11) Ibid., p.259.




12) Albright, “Contributions to Biblical Archaeology and Philology,” JBL 43(1924), p.370.




13) F.M. Cross, Jr.,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3, 1976), p.61.




14) 이 주장은 그러나, “야웨”가 “야훼-엘”(yawéh-el)과 같은 신의 애칭명(愛稱名 ; hypocorism)이라는 말은 아니다.




15) Albright, “Contributions to Biblical Archaeology and Philology,” pp.371-374 참조.




16) F.M. Cross, Jr.,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pp.61-62.




17) 이 비문은 1868년에 발굴된 것으로서 모압왕이 그모스와 모압의 피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아타로트(Ataroth)의 모든 이스라엘 주민들을 어떻게 학살했는지를 기록해 주고 있다.




18) F.M. Cross, Jr.,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p.62.




19) S. Mowinckel, “The Name of the God of Moses,” HUCA 32(1961), pp.121-132.




20) Ibid., p.128.




21) Ibid.




22) Ibid., p.129.




23) Ibid., pp.128-130.




24) W. Zimmerli, I am Yahweh (Atlanta: John Knox Press, 1982), pp.1-28.




25) 모빙켈의 의하면, “야후나단”의 머릿글자인 “야후”는 후에 “요나단”의 머릿글자인 “요”로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The Name of the God of Moses,” HUCA, p.130.




26) Ibid., p.131.




27) Das Heilige (Breslau, 1922), p.263. n.1. (S. Mowinckel “The Name of the God of Moses” p.131에서 重引).




28) 이 점에 관해서는 W. Zimmerli, I am Yahweh, pp.27-28. 참조.




29) W.F. Albright, “Further Observations on the Name Yahweh and its Modifications in Proper Names,” JBL 44(1925), pp.158-162.




30) Ee Kon Kim, The Rapid Change of Mood in the Lament Psalms (Seoul: Korea Theological Institute, 1985), pp.29-30. fn. 49.




31) 히브리어에서는 I am Yahweh라고 할 때의 영어의 “be”동사 같은 것은 없으며 hyh는 그런 의미의 “be”는 아니다.




32) W. Gesenius, Hebrew and English Lexicon(1844), pp.252, 356, 304. Gesenius의 사전을 기초로 하여 엮은 F. Brown, S.R. Driver, and C.A. Briggs 편집의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Oxford: Clarendon Press, 1953, 1976), pp.224, 295도 같은 입장이며, L. Köhler와 W. Baumgartner를 기초로 한 W.L. Holladay, A Concis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Michigan: W.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1)도 ḥwh의 경우는 제외하고 hwh에 대해서는 역시 같은 입장(p.78)이다. 특히 p.403의 아람어 부분 참조.




33) Albright, Contributions to Biblical Archaeology and Philology, p.374; M. Noth, Exodu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2), p.44.




34) R. Abba는 LXX의 번역, ὁ ὤν을 희랍철학이 “절대자”에게 부치는 명칭인 τὸ ὄν과 구별하여 말하고 이 둘 사이를 서로 엇갈리게 하는 Philonic한 견해를 날카롭게 견제한다. Abba의 “The Divine Name Yahweh,” JBL 80(1961), p.327을 참조하라.




35) R. de Vaux, “The Revelation of the Divine Name YHWH,” Proclamation and Presence (Richmond: John Knox Press, 1970), pp.48-75. De Vaux의 고전적인 옛 견해는 그의 논문 “Les Textes de Ras Shamra et L’ancien Testament,” Revue Biblique(Paris), 46(1937), pp.526-555에 수록되어 있다.




36) A.B. Davidson, The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pp.55-56에서는 hyh를 εἶναι와 연결시키지 않고 ϓίνεσθαι와 연결시킴. T.C. Vriezen, An Outline of Old Testament Theology, p.195 (Abba, “The Divine Name Yahweh,” pp.320-328에 이상의 Davidson, Vriezen, Ratschow, Boman등의 견해가 소개되어 있다); M. Noth의 Exodus, p.45도 참조하라.




37) 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I, p.180; U.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Exodus (Jerusalem: The Magnes Press, 1967, 1974), p.37.




38) M. Buber, Moses (London: East & West Library, 1946), pp.51-55; 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New York: Harper & Row, 1962), I, p.180; cf. T.C. Vriezen, “’ehje ’aser ’ehje” Festschrift für A. Bertholet (Tübingen: 1950), pp.478-512.




39) M. Buber, Moses, p.52.




40) U.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Exodus, p.38.




41) S. Mowinckel, “The Name of the God of Moses,” p.128.




42) R. Abba, “The Divine Name Yahweh,” p.325.




43) W.F. Albright, “Contributions to Biblical Archaeology and Philology,” JBL 43(1924), pp.370-378; idem, “Further Observations on the Name Yahweh and its Modifications in Proper Names,” JBL 44(1925), pp.158-162; idem,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pp.257-272; idem, Yahweh and the Gods of Canaan (Winona Lake: Eisenbrauns, 1968), pp.168-172; F.M. Cross, Jr.,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pp.60-75; D.N. Freedman, “The Name of the God of Moses,” JBL 79(1960), pp.151-156; J. Obermann, “The Divine Name YHWH in the Light of Recent Discoveries,” JBL 68(1946), pp.301-323; G.M. Landes, “Creation and Liberation,” USQR 33 no.2(1978), pp.79-89.




44) 이와 상응하는 희랍어는 게네시우르고스(Υενεσιουργος)와 데미우르고스(δημιουργος)이다.




45) Haupt, Der Name Jahwe (Orientalistische Leteraturzeitung; Leipzig: 1909), pp.211-214.




46) S. Mowinckel, “The Name of the God of Moses,” p.128.




47) Albright는 1924년에 내어놓은 논문(“Contributions to Biblical Archaeology and Philology” p.376)에서 Haupt 이론을 지지한 후 Haupt의 수정문을 “happy emendation”이라고 평했다.




48) Albright, “Contributions to Biblical Archaeology and Philology,” p.378. 참조.




49) Ibid., p.374.




50) Albright의 이 주장은 hyh의 사역적 기능이 히브리어에서는 pi‘el형에 의하여 표현된다는 Abba의 반론을 충분히 해소시켜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W.L. Holladay의 『히브리어 사전』pp.404,405참조.




51) Albright, Yahweh and the Gods of Canaan, p.169.




52) 이 요약은 Albright의 “Contributions to Biblical Archaeology and Philology,” “Further Observations on the Name YHWH,”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Yahweh and the Gods of Canaan에 나타난 그의 주장들을 정리한 것임.




53) S. Mowinckel, “The Name of the God of Moses,” p.128.




54) Albright, Contributaions to Biblical Archaeology and Philology, p.375.

54a) Albright,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p.232. fn. 41. 여기 나타나는 첫 글자 ’al’iyu에서부터 Al’iyan이라는 바알의 일반적 명칭(appellation)이 생겨났다고 올브라이트는 주장한다. 이 “문장이름”은 Virolleaud가 1938년에 출판한 텍스트에 나타나고 있다.



55) Freedman, “The Name of the God of Moses,” JBL 79(1960), pp.151-156; F.M. Cross,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pp.65-75. 이 두 학자의 지지 논리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B.S. Childs, The Book of Exodus, pp.62-64 참조.




56) Freedman은 여기서 idem per idem의 카테고리에 관한 자신의 연구에 S.R. Driver의 두 책, Notes on the Hebrew Text of the Books of Samuel (2nd ed.; Oxford: 1913), pp.185-196과 The Book of Exodus (Cambridge: 1911), pp.362-363이 큰 빛을 던져주었음을 지적한다.




57) Cross의 견해는 주로 그의 책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pp.60-75에 정리되어 있다. 이에 대한 Childs의 비판을 위해서는 그의 The Book of Exodus, p.63을 참조하라.




58) 아레오파고에서 사도 바울로가 증언하려 한 창조의 신 하나님은 그 무슨 이방의 새로운 신이 아니고 “이미 알려진 분”이지만 그러나 그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신”이었다. J. Munck, The Acts of the Apostles (New York: Doubleday and Company, 1967, 1979), p.171.




59) L. Köhler는 출 3,14의 진술을 창 32장과 삿 13장의 것과 비슷한 한 상황, 즉 물음에 대한 하나의 회피의 경우와 일치시킨다. Childs, The Book of Exodus, p.69.




60) J. Obermann, “The Divine Name YHWH in the Light of Recent Discoveries,” JBL 68(1953), pp.301-323.




61) A. Sperber, Hebrew Grammar: A New Approach (New York: 1943), p.191.




62) 김이곤, “와우(wāw)의 형태소에 관한 한 고찰”, 『신학연구』21(1979), pp.37-54[본서, pp.193-206].




63) Obermann 박사의 히프일 이론에 대한 G.R. Driver의 비판, “Reflections on Recent Articles,” JBL 73(1954), pp.125-131을 보라.




64) J. Obermann, “The Divine Name YHWH in the Light of Recent Discoveries,” pp.306-314.




65) Ibid., pp.314-318.




66) 김이곤, “타지 않는 불꽃떨기 속의 하나님”, 『기독교사상』, 317(1984. 11), pp.216-229. 특히 p.218[본서, pp.40-54].




67) B.S. Childs, The Book of Exdous, pp.60-70.




68) Haupt의 용어. 참조. Albright, Contributions to Biblical Archaeology and Philology, p.375.




69) U.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Exodus, p.31.




70) D.N. Freedman, “The Name of the God of Moses,” pp.153ff.




71) P. Trible, “God, Nature of, in the Old Testament,” IBD Supp. p.368.




72) 김이곤, “시편 탄원시의 신학” (Ⅰ) 「신학사상」48(1985, 봄), pp.128-147[본서, pp.87-179].




73) Ibid., pp.143-145[본서, pp.87-179].




74) A. Alt, “The God of Fathers,” Old Testament History and Religion (New York: Anchor Books, 1966), pp.1-100; F.M. Cross, “The God of Fathers”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pp.3-12; 13-75; idem, “Yahweh and the God of the Patriarchs,” HTR 55(1962), pp.225-259; J.P. Hyatt, “Yahweh as the God of my Father,” VT (1955), pp.130-136; W.F. Albright, “The Name SHADDAI and ABRAM,” JBL 54(1935), pp.173-204.




75) M. Greenberg, The Hab/piru (New Haven: American Oriental Society, 1955).




76) S. Mowinckel이 출애 3장을 E로 보지 않고 J로 보는 것은(“The Name of the God of Moses,” p.121),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77) W.F. Albright, “The Names SHADDAI and ABRAM,” JBL 54(1935), pp.173-204; F.M. Cross, Jr., “Yahweh and the God of the Patriarchs,” HTR 55(1962), pp.225-259.




78) Cross, Jr., “Yahweh and the God of the Patriarchs,” p.246.




79) Albright, “The Names SHADDI and ABRAM,” p.183.




80) Cross, Jr., Canaanithe Myth and Hebrew Epic, p.54.




81) Albright, Yahweh and the Gods of Canaan, p.189; Cross, Jr.,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p.55.




82) “엘 사따이”를 ‘전능의 신’이라고 번역하는 전통은 LXX가 그것을 παντοκρατωρ(전능)이라고 번역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83) M. Greenberg, The Hab/piru (New Haven: American Oriental Society, 1955), pp.91-96. 그의 결론은 대체로 “The proposed ‘Apiru-Hebrew equation faces thus at present a series of objections.” (p.96)라는 말 속에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84) Albright, Yahweh and the Gods of Canaan, pp.73-91; idem,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pp.240, 277.




85) J.P. Ross, “Jahweh ŠEBĀ’OT in Samuel and Psalms.” VT 17(1967), pp.76-92 참조.




86) E.K. Kim, The Rapid Change of Mood in the Lament Psalms, pp.159-175.




87) M. Noth, Exodus, p.41.




88) G. von Rad, Der Heilige Krieg im alten Israel (Zürich: Zwingli-Verlag, 1951); idem, Studies in Deuteronomy, pp.46-49; F.M. Cross, Jr., and D.N. Freedman, “The Song of Miriam,” JNES 14(1955), pp.237-250.




89) 출 15,21(미리암의 노래)은 구약의 고대의 노래인 출애 15장(바다의 노래)중에서도 가장 고대적인 요소이다. 이 부분은 실전(實戰)에 대한 묘사가 아니고 하나의 post eventum이며 하나의 신학적 doxology이다. 참조 M. Noth, Exodus, pp.1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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