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종교적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오만하고 교만한 종교, 비과학적 종교, 과대망상의 종교, 비윤리적이며 비도덕적인 종교 등등으로 몰아 부친다. 기독교에 대한 저들의 개념은 성경에 기록된 각종 역사들이 인간적, 종교적 범주를 크게 초월하기 때문이다. 우주만물의 창조기사로부터 시작되는 성경은 출애굽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인간의 범주를 크게 초월한다. 그러나 성경의 기사들이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의 기사들은 지극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이다. 뿐만 아니라 저들이 비난하는 기독교의 비윤리적 비도덕적인 내용들은 인간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지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저들의 종교야말로 허구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비과학적이며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다. 일반 종교가 섬기는 존재들은 지극히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며 허구적인 주장으로 사람들을 오도<誤導>하였으며, 그들의 삶 자체도 한결같이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으로부터 벗어나는 패륜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자신들의 비논리적, 비과학적, 허구적, 비윤리적, 비도덕적, 3류 종교 교리는 절대적으로 수용하고 이해하는 반면에 오히려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진리인 기독교의 교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저들이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두 가지이다.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저들에게는 성령의 조명하심이 전혀 없기 때문이며 다른 또 하나는 기독교가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을 미신<迷信>적 3류 종교로 무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장에서 위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대비<對備>하면서 기독교의 모든 것을 신학적, 역사적으로 정립한다.
기독교<基督敎>라는 명칭은<영-christianity> <라-christianismos>라는<그리스도-교-敎>에 대한 한국적 명칭이다. 그리스도교<영-christianity> <라-christianismos>라는 용어는 그리스어인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기독교라는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섬기는 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어져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에서의 명칭은 신앙적 차원에서의 명칭이다. 기독교 명칭의 참된 의의는 신앙적 차원에서 규명되어져서는 안 된다. 신앙이란 그것이 제아무리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명칭의 참된 의의는 신학적 차원에서 규명되어져야한다. 왜냐 하면 기독교는 사람을 위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명칭 자체가 그것을 내포하고 있듯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것의 정점으로 한다. 그것은 기독교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를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오직 유일한 통로요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한 오직 유일한 <중보자>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오직 유일한 <길>이 되었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강림 하였으므로 오직 유일한 <진리>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 권세를 이기고 살아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됨으로서 성도들이 자신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취득하게 하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한 하나님 사람들의 유기적 연합<조직사회>이다.<엡1:22-23> <골1:18>
바울은 유대인들의 신앙과 생활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들의 <야훼> 신앙을 <유대교>라고 명명하였다<갈1:13>. 그리스도의 복음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어가던 초대 교회시대에 이르러 기독교라는 명칭은 바울이 말한 유대교와의 구별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기독교라는 명칭이 바울이 말한 유대교에 대응하여 교회 내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사도 교부-예수 그리스도 직제자들의 뒤를 이어나가는 A.D.1-2의 기독교 지도자들>시대 이후였다. 기독교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가장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안디옥의 감독<주교>이었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였고, 기독교인의 신앙적 삶을 특징짓는 뜻을 가진 용어로 그가 사용한 문서의 이름은 <Letter to the Magnesi>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라는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적 삶을 사는 사람들과 유대인 및 유대교적 전통을 그대로 고집하면서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뚜렷이 구별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용어였다.
성경은 기독교라는 명칭에 대하여 사실상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도처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또한 유일한 메시야로서, 뿐만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종들, 하나님의 교회를 통치하고 관리한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선포한다. 따라서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기독교>라는 명칭으로 존재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성경은 증거하고 또한 선포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종교 개념에 의하면 현존하는 모든 종교들을 학문적, 사회적, 차원에서 종교라고 명칭한다. 종교론적인 차원에서 기독교의 위치를 논증하는 것에는 대략 세 가지의 견해가 있다
첫째... 기독교를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 종교들 중 하나로 간주 하는 것.
둘째... 오직 기독교만을 종교라 하고 그 외의 다른 종교를 우상숭배로 무시하고 종교로 인정하지 않는 것.
셋째...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를 종교의 범주에 두고 기독교는 종교의 범주에서 초월하여 다만 기독교의 위치에 두는 것.
이와 같은 견해 중에 첫 번째 것은 비 기독교인들의 견해로서 지극히 일반론적인 반면에 둘째와 셋째의 견해는 기독교인들의 견해로서 비 기독교인들의 견해와 크게 충돌되는 것이다. 반면에 둘째와 셋째의 견해 중에 어떤 것이 더욱 매력적이냐 하면 그것은 당연히 세 번째 것이다. 두 번째 견해는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 여타의 모든 종교를 전혀 무시하고 오직 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함으로서 기독교의 위상을 매우 드높였으나, 실상은 세 번째 것에 비하여 오히려 약하다.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 여타의 모든 종교를 종교라는 높은 위치에 좌정시킨 후,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들과 자리를 함께 할 수없으므로 종교의 범주에서 초월하여 기독교라는 독립된 명칭으로 존재한다는 세 번째의 견해가 기독교의 위상을 확실하게 높인 것이다.
성경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가 인류사회에 존재하는 여타의 종교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없는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음을 선포하시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엄금하셨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 출20:1-5>
이와 같은 선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선포가 아니다. 오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최고, 최대, 최상의 존재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포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이, 선포는 하나님만이 오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최고, 최대, 최상의 존재이심을 선포하시는 동시에 기독교만이 오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최고, 최대, 최상의 종교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인류 역사에 존재하였던 수많은 종교 중에 그 어떤 종교도 이와 같은 선포를 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 종교들에게 <하나님>에 버금가는 신이 없었음을 자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종교들이 오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최고, 최대, 최상의 종교가 못됨을 스스로 자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오직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최고, 최대, 최상의 종교로서 일반종교들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 그리고 존재하였던 모든 종교들은 인간들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인간들이 신을 만들어 내었고 제사 방법과 제물을 만들어 신을 섬겼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위하여 신을 만들고 그 신을 섬기는 제사 제도와 제사 방법을 만들어내었으며, 또한 신과 자신들 사이에 중계자들을 세워 그들을 통하여 신과 교제하고 신을 섬기다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 더욱 능력 있는 신들을 새로이 만들어 낸 후 병행하여 섬기거나 새로운 신을 섬기고 먼저의 신은 퇴장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들이 수많은 종교의 이름 하에 등장했다가 사라져갔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어떤 종교는 그 수명이 불과 반세기도 되지 못할 만큼 짧은가 하면, 어떤 종교는 계속하여 신들이 보강되고 첨가되어지는 가운데 수십 세기 동안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하였다. 반면에 그러한 종교는 계속되는 보강과 첨가로 인하여 본래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에 의하여 설립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하나님에 의하여 설립된 종교는 인간에 의하여 설립된 종교와 본질, 품위, 권위, 등등에 있어서 차원이 다르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그들을 찾아오셨으며 모든 의식들과 규례들을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과 의식들은 여타의 종교들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독교의 신학은 일반 종교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특별성을 갖는다.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교리와 <로고스>의 동정녀탄생,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한 인류구원의 교리, 등등은 일반 종교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교리 들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예배 의식은 타종교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룩성과 신실성을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선포하셨을 때, 그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의 오직 유일한 중보에 의한 예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일반 종교적 의미로 말한다면-신의 이름으로 신에게 예배드리는>것으로서, 일반 종교에서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일반 종교들과 같은 반열에 있을 수 없고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신은 모든 면에 있어서 절대적 존재이어야 하며 신의 절대성은 그가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들을 통하여 입증된다. 신의 통치 하에 있는 것들은 자연히 그의 소유이며 그 소유권은 그것이 그 신에 의하여 창조되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창조란 모름지기 절대 무<無>에서의 창조일 때에 비로소 완전한 창조의 예우를 받을 수 있으며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창조일 때에 창조 또는 창조주에 대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일반 종교에는 이렇듯 창조 또는 창조주로서의 예우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근거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 종교들에게는 창조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거나 있다 하여도 지극히 초보적인 것이거나, 또는 지엽적인 것으로서 <전설>이나 <신화>적 수준에 불과하다. 그들의 우주 만물 기원과 내력에 대한 기사들을 고찰해보면 한결같이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무<無>로부터 출발되어지는 창조는 없고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부터의 분리, 파생, 진화, 발전 등등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창조 또는 창조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조물 또는 조물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기독교는 우주 만물에 대한 전체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창조를 선포하고 있다. 기독교의 창조는 하나님에 의한 무<無>로부터의 창조이며, 우주 만물의 기원과 내력은 물론이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시간의 기원과 내력이 포함되어 있고, 인간의 육체와 영혼과 정신과 사상에 대한 기원과 내력까지 완전하게 포함되어진 참으로 완전무결한 창조이다.
일반 종교들은 인간들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므로 그 수준이 완전무결한 신적 차원이 되지 못하고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적 수준이다. 일반 종교의 불완전성은 저들이 제례의식과 교리들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수시로 바꾸고 계속적으로 수정, 보완하는 것에서 증명된다. 종교학자들은 이러한 종교의 변경과 수정, 보완을 종교의 발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종교의 발전은 결국 그, 종교의 불완전성과 미완성을 자증하는 것이다. 종교가 완전하게 완성되었다면 결함이나 부족함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변경, 수정, 보완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완전무결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설립되었기 때문에, 변경, 수정, 보완이 전혀 필요 없다.
종교학자들은 기독교도 발전하였다고 말한다. 물론 저들의 좁은 안목에서 보면 기독교도 발전하는 것이 된다. 기독교의 역사를 고찰해 보면 구약시대 기독교와 신약시대 기독교가 크게 다르며 신약시대 기독교도 초기 신약시대 기독교와 현대 기독교 사이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발전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구약시대 기독교와 신약시대 기독교 사이에 차이가 있거나 또는 초기 신약시대 기독교와 현대 기독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실제로 차이가 있거나 또는 발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만한 경륜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서서히, 점진적으로 기독교를 정립시켜 주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규명되지만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입증된다. 첫째는 성경의 완전성이고 둘째는 아직도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부족성이다. 성경은 구약시대의 성경과 신약시대의 성경이 하나로 연계되어 있다. 구약성경은 신약시대를 예고하고 예표하는 반면에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이 예고하고 예표한 것을 완성하고 입증한다. 따라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에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으며 그리하여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함께, 그리고 영원히 유효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7-19>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기독교의 진리를 성경 말미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 계22:18-19>
이와 같이 구약성경을 통하여 예고, 예표되고 신약성경을 통하여 완성된 성경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까지 영원히 유효하다. 이러한 성경의 완전성과 영원한 유효성은 곧 기독교의 완전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기독교의 변경, 수정, 보완, 발전 등등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반면에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하게 정립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완전무결한 기독교의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함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하나님의 섭리를 오해, 오류, 왜곡, 변경, 누락, 추가하는 등등의 어리석음을 계속하였다.
따라서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나는 각종 변경, 누락, 추가 등등은 기독교의 발전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오해, 오류, 왜곡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진리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완전성을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 우주적인 문제.
인류에게 있어서 땅과 바다에 존재하면서 계절에 따라 생성<生成>을 거듭하며 묵묵히 자신들의 영역적 역사를 전개하는 대자연의 섭리는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지하에 매장되어 있으면서 인류에게 자원을 공급해주는 각종 지하자원들의 정체와 그들의 격동적인 운동은 한편으로는 중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운 존재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우주 공간에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는 은하계<銀河界>이다. 영원히 타오르면서 낮의 대자연을 주관하는 영원불변한 태양의 정체, 밤하늘을 아름답게 밝혀주면서 바다를 비롯한 대자연의 밤을 주관하는 달의 정체, 저 광활한 우주에 끝없이 전개되어 있는 별들의 존재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들이다. 인류는 유사이래 지금까지 그러한 것들의 시작과 진행, 존재 원리 등등에 대한 원인규명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우주는 자신들의 세계를 밝혀주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간섭을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철학과 과학이 우주의 생성 원리와 진행 원리를 밝혀 내기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지극히 일부분에 대한 해답을 얻었을 뿐이며 그것도 완전한 해답이 아니라 추측과 가정이 포함된 불완전한 해답이었다. 한때 일부 종교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통하여 우주의 신비를 밝혔으나 저들의 주장은 지극히 허구적인 것으로서 철학과 과학이 밝혀낸 것에 혼란만 가중시켰다. 때문에 철학은 우주를 형이상학적 존재라고 하였고 과학은 불가사의한 존재라고 하였으며 종교는 신비한 존재라고 하였다. 이러한 저들의 결론은 당연한 것이었다. 저들은 우주를 하나님의 목적 있는 창조로 보지 않고 오히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배제한 채 우주에 대한 결론을 찾아내려 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한 것이다.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목적에 의한 신적 작정하에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우주만물을 창조하였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관리하신다. 때문에 우주 만물의 생성 원리와 진행 원리는 철학에게는 형이상학적 존재이고 과학에게는 불가사의한 존재이며 종교에게는 신비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존재일 뿐이며 때로는 우주에 엄청난 사건이 도래하여 곧 종말이 닥칠 것 같으나 하나님의 섭리를 근거로 할 때에 그것은 곧 정리될 평범하고 일상적인 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이루어진 후에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우주적 심판>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유유히 자신들의 영역을 진행해 나가도록 완전하게 창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인간적인 문제.
인류는 자신들의 문제에 대하여 항상 고심하여 왔다. 인간은 언제, 어디에서부터 존재했으며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존재되고 진행하여 현재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과 각고의 연구를 거듭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우주만물에 대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철학은 인생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었으나 <나그네, 부평초, 뜬구름> 등등과 같은 시적 표현만 남겨 놓았을 뿐 인생의 본질을 찾는 것에 실패하였고, 과학은 인체에 매달려 수많은 시간과 정열을 기울였으나 <만물의 영장, 작은 우주론, 진화론> 등등의 학술적 용어들만 제시한 채 아직도 여전히 해답을 얻지 못하였다. 종교는 더욱 한심한 입장에 처해 있다. 수많은 종교들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용감하게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으나 퇴폐적이고 허구적인 혹세무민<惑世誣民>의 3류 우상숭배 사상만 만연시켰을 뿐이다. 철학, 과학, 종교의 실패는 당연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 목적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나 철학, 과학, 종교는 이러한 진리를 거부한 채 인간의 존재를 규명하려고 하기 때문에 현재까지 실패를 거듭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인간을 규명하면 매우 간단한 것을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고 부정하기 위하여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해답을 구하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철학, 과학, 종교가 전혀 밝혀내지 못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확실하게 그리고 간단명료하게 정립시켜 준다. 인간의 근원과 출발시기, 인간의 생성원리와 목적, 인간의 현재성과 미래 등등에 대하여 완전무결하게 정리해 주는 것이다.
(3) 영적인 문제.
인류 초미의 관심사는 역시 인간의 영혼에 대한 문제였다. 인간의 조그마한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두뇌<頭腦>를 통하여 전개되어지는 각종 사상과 천차만별의 개념과 이념들, 그리고 백절불굴의 정신들과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하는 지혜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들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발전되어 왔을까? 또한 인간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굴복시키고 포기시키는가 하면 때로는 절망하게 하거나 반대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전환시켜 놓기도 하는 사랑이라는 저 위대하고도 숭엄한 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부모형제까지도 원수로 만들어 적대하게 만드는 미움은 무엇에서 발생하며 온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기까지 하는 저 무서운 욕망의 정체는 또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인가? 선함은 어디에서 왔고 악함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총괄하는 긍극적 실체인 영혼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류역사는 이러한 문제를 알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과 정열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도록 해답은 그 어떤 것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철학이 인간들의 영혼에 대하여 노심초사한 끝에 얻어낸 결론은 <이데아의 세계>라는 수식어뿐이었고 과학이 영혼과 사투를 벌인 끝에 찾아낸 결론은 <심령술> 또는 <체면 요법>이라는 한 모퉁이에 불과하였다. 종교는 인간의 본질을 찾아내려는 어려움을 아예 포기하고 오히려 인간의 영혼을 책임지겠다는 시건방을 떨었다. 그러나 저 오만방자한 종교들이 남긴 유산은 인간의 영혼을 책임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황폐, 염세, 침체시켰을 뿐이며 인간의 영혼을 담보로 하여 자기 유익을 도모하는 3류 종교적 부류들을 양산했을 뿐이었다. 결국 철학과 과학은 인간의 영혼문제에 대한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한 채 오히려 인간 영혼에 대한 혼란과 의혹만 증폭시켰으며 종교는 영혼을 미끼로 하여 인간을 혹세무민하는 3류 종교들을 무수히 양산하는 사회적 병폐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확실하고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인간영혼의 본질과 실체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을 완전하고 분명하게 정리해 주었다. 기독교가 인간 영혼에 대하여 완전하고 확실한 정립을 해준 것은 인간 영혼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고 하나님에 의하여 관리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섭리 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인간의 영혼 문제에 관여할 수 없다. 일반 종교들이 인간의 영혼에 직접 관여한다는 것은 사기이며 거짓이다. 일반 종교들은 모두가 허구이거나 또는 사단의 영향 하에 있는 것으로서 때로는 인간의 영혼에 어떤 간접적인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인간의 영혼에 직접적인 관여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5) 5) 오직 기독교에만 인간의 영혼 구원이 있다.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교만 중에 하나는 자신들에게 어떤 문제<특히 인생>에 대한 해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결코 어떤 것<특히 인생>에 대한 아무런 해답이 있지 못하며 사실상 있을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들의 신과 교리를 통하여 입증된다. 일반 종교의 신들은 한결같이 살아있지 않은 죽은 신들이다. 그들의 신은 가공된 것이라 지금까지 그 실체를 보여주지 못했다. 따라서 살아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죽은 신인 것이다. 어떤 종교는 현존하였던 인간을 신격화하여 섬기지만 그 역시 살아 존재하지 못하는 죽은 존재이다. 그들에게는 부활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조차도 살아 있지 못한 존재가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교리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일반 종교의 신들은 살아 있지 못함으로서 자신들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교리가 성립될 수없다. 때문에 인생문제는 언제나 본인이 해결하게 되어있다. 본인의 선한 삶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문제를 해결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현존하는 종교의 교리에는 그 종교의 신이 인생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아무런 약속이 없다. 다만 그 종교의 지도자들이 그러한 식으로 신도들을 이끌어가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상 거짓말이다. 한국 불교의 성자라 할 수 있는 <성철>은 임종을 앞두고 한국 불교 지도자들의 그러한 거짓말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이의를 허락하지 않는 증거와 선포를 단행하신다. 이스라엘과 로마의 국가적 역사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였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생>이 아니라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심에 있어서 그것을 인류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그 문제를 해결하신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와 섭리주로서의 주권을 통하여 인류의 생사화복을 직접 주장하시는 것이다.
일반 종교들에게는 우주적인 종말이라든가 또는 우주적인 심판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세계적 종교 중에 우주적 종말에 대하여 약간이나마 언급한 것은 <힌두교>인데, 힌두교의 우주적 종말은 그들의 창조론과 연계된 것으로서 신의 목적에 의한 섭리적 종말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적 현상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일반 종교에는 우주적인 종말이나 심판에 대한 것은 없고 다만 인간의 개인적인 종말이나 심판만 존재한다. 일반 종교에 우주적인 종말에 대한 신학적 교리가 있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종교적 목적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있으며 인간의 내세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장차 하나님께서 우주를 심판하시거나 종결지으신다는 사실을 엄숙하게 선포한다. 그리고 그 우주적인 심판과 종결 속에 인류의 심판과 종말이 포함되어진다. 그것은 창조주로서의 주권적인 권리이며 필연적인 섭리이다. 하나님에 의하여 시작된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당연한 종결인 것이다.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견해는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견해가 있다.
종교역사 학자들은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독립한 것으로 본다. 기독교는 본래 이스라엘인들의 국가적, 민족적 종교였던 유대교였는데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유대교에 머물고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독립하여 세계적인 기독교로 발전하였다고 이해한다. 종교역사 학자들의 이러한 개념은 기독교를 표방하는 이단자들을 통하여 더욱 발전되어진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 이단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본래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메시야였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여 십자가에 처형시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계획을 변경하시어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 인류의 메시야로 확장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저들은 만약에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지 않고 메시야로 받아 들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이스라엘 민족만의 메시야가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기독교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기독교<유대교>가 되었을 것인데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처형함으로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로 확산 되었고, 그리하여 기독교가 세계적인 기독교로 독립하여 확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논리에 의하여 저들은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배교를 크게 감사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기원을 유대교로부터의 계승으로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유대교를 설립하셨고, 그 유대교를 통하여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셨으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서 유대교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가 그것을 계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일부 기독교 역사 신학자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일부 기독교 역사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여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로 나눈다. 저들은 구약 시대를 유대교로 명칭하고 신약 시대를 기독교로 명칭한다.
역사 학자들이 기독교의 출발을 그와 같이 구분하는 것은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배격했던 유대인들에 근거한 것이고 다른 또 하나는 사도 바울이 자신이 과거에 소속되어 있던 바리새파적 교회를 유대교로 명칭한 것<갈1:13-14>에서 비롯되어졌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의 율법적인 것과 신약 시대의 복음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 사도는 구약 시대의 기독교와 신약 시대의 기독교가 오직 하나의 기독교임을 언제나 선포하고 주장했다. 따라서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여 분리하면 안 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유대교는 유대교가 아니라 사실상 기독교이다. 아직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기독교와 구분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자신들만의 <야훼>로 고집하고 있으나, 성경은 분명히 그들의 회심을 말하고 있으며 메시야,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하여 오시기로 작정되어 있었고, 또한 그렇게 오신 것은 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독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 사도의 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종교를 기독교로부터 분리시키심을 확인한다. 그들은 본래 기독교의 출발이었으나 그들이 끝내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함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독교로부터 분리하여 유대교에 머물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배교와 불순종에 대하여 진노하사 징계와 심판의 차원에서 그들을 추방하셨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유대인들이 기독교로부터 배교하여 유대교로 분리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징계와 심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저들 스스로 그리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어떤 학자들은 기독교 명칭 자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기원을 예수 그리스도로 주장한다. 즉,기독교는 이스라엘 국가와 유대 민족을 통하여 시작되었으나 그들과 전혀 관계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였으나 기독교의 운영은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이므로 성령강림 이전에는 신학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기독교가 존재할 수없다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진정한 기독교의 시작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교회>는 창세전에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신 때에 그 작정 안에는 이미 기독교가 존재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영원하고 완전하심으로 당연히 창세에서부터 우주의 종말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것을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알고 계셨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기독교의 기원도 당연히 영원전의 그 작정 속에 포함되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창세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다. 만약에 기독교가 유대교를 계승한 것이라거나, 또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 한다거나 오순절 날에 이르러 비로소 기독교가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구약 시대의 교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회>가 아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당연히 구원과 무관하게 된다. 구원이 교회로부터 비롯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과 교회는 분리되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받은 자들이며 구원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작정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하심은 그것이 결과로 나타났을 때를 완성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정하신 그 자체로서 이미 완성된 것이며, 따라서 작정과 동시에 영원히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유대인들과 무관하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 한다거나 오순절 날에 이르러 비로소 기독교가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기독교는 구약시대의 경전인 구약성경을 배제해야한다.
기독교는 사람에 의하여 창립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기독교를 창립한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다. 기독교의 명칭이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며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진행하지만 기독교의 창립과 기독교의 진행 일체에 대한 주권과 섭리 일체는 성부 하나님에 귀속되어 있다.
일반 종교가 설립된 배경과 목적에 의하면 일반 종교는 신을 위하여 설립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설립되었다. 일반 종교가 설립된 배경과 과정에는 초자연적, 신적 존재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그리하여 그, 초자연적, 신적 존재들을 위무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그들이 초자연적, 신적 존재들을 위무하려는 근본적인 이유와 목적은 결국 초자연적, 신적 존재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초자연적, 신적 존재들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현재적, 미래적, 길흉화복들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신<하나님>을 의존하여 어떤 유익을 도모하려는 목적 하에 창립된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섭리역사를 진행하시려는 목적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기독교 창립 목적은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의 사명> <하나님의 우주 창조>와 직접 관련된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창조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사람 창조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명을 부여하신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기독교의 설립 목적과 직접 연결된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창조를 비롯한 모든 것을 계획하실 때에 전지하신 속성에 의하여 이미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을 아셨고 그리하여 그에 따른 모든 후속조치를 세우셨으며 그리하여 기독교의 창립까지도 계획하셨던 것이다.
한편 기독교 역사학자들 및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본질과 사명이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라고 정립하였다. <주후 1647년>에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결정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비롯한 각종 신앙고백서들은 한결같이 기독교의 본질이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라고 선포하였고 기독교 각 교파의 헌법들도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을 전제로 하여 수립되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세우신 교회는 <에덴교회>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은 에덴교회의 지도자로서 기독교 최초의 성도이며 목회자였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창2:8-14>
<창2:8-14>에는 하나님의 기독교 교회에 대한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에덴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교회로서 장차 계속하여 세워질 하나님의 모든 교회를 대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전체 교회들에 대한 모든 것을 상징하고 예표한다.
여기에서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첫 교회이며 에덴으로부터 발원하여 흘러 갈라진 네 개의 강은 에덴교회로부터 시작되어 동서남북 사방 곧, 세계로 확산되어지는 하나님의 기독교 교회들을 예표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에덴교회는 문자적인 순서에 의하면 우주 창조의 마지막 날에 창립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로 신적 작정하신 목적을 기독교 설립의 목적과 같은 차원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 하에 <창1:26>을 기독교 설립의 시작과 목적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이며 증거라고 이해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반면에 성경은 현존하는 모든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어 졌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모든 것의 출발이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자존-自存>하셨다고 선포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존하심으로부터 시작된 역사 자체가 곧 기독교의 출발이라는 역사적, 신학적, 개념을 대전제로하여 모든 것을 정리한다. 하나님의 자존하심으로부터 출발되는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우주 창조는 기독교의 창립을 전제로 하여 작정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를 통한 모든 것의 진행을 전제로 하여 우주 만물의 창조와 섭리 일체를 작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창립은 현재적으로는 에덴교회이지만 하나님의 자존 다음에 계획된 것이기 때문에 우주 만물의 창조보다 우선한다. 즉 기독교의 창립은 우주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창2:8-14>은 기독교의 권세, 권위, 거룩성, 영광성 등등을 포괄적으로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과실 나무를 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인도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상태적으로 아름다울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가운데 훌륭한 결실들을 이룰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특히 강들이 아름답고 훌륭한 보석들로 상징되었다고 표현되는 것은 장차 계속하여 세워지게 될 하나님의 교회들에 대한 권세와 권위와 거룩성과 영광성을 아울러 선포하는 것이다. 에덴교회를 통하여 선포되어진 하나님 교회들의 권세와 권위와 거룩성과 영광성들은 훗날 기독교 역사들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입증된다.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의 기독교<에덴교회>는 실제로 최고, 최대, 최상의 권세, 권위, 거룩성, 영광성 등등을 유지하였다. 에덴교회는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면서 최고 최대, 최상의 권세와 권위를 누렸고 거룩함과 영광적인 삶을 살았다. 우주 만물은 교회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아담<하나님의 종>으로부터 이름을 부여 받았던 것이다.
반면에 인류 역사에 수많은 종교들이 범람하였지만 그들에게는 기독교 교회들에게 존재하는 권세, 권위, 거룩성, 영광성, 등등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반 종교들에게는 인류의 생명을 영원히 책임질 수 있는 어떤 기능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초기 신약 기독교 시대의 개념.
초기 신약 기독교 시대는 기독교의 본질을 두 가지로 인식하였다. 첫째는 영원한 진리이며 둘째는 보편적인 구원의 원리이다. 저들이 말하는 영원한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에 유행하였던 철학을 포함하여 윤리와 도덕과 법률과 질서를 총망라한 것이었다. 그리고 저들이 말하는 보편적인 구원의 원리란 인간의 신분과 영적, 육적, 형편을 초월하는 지극히 보편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 이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의 이러한 신학적 정립은 현대 신학의 기준으로서는 매우 미흡한 것이겠지만,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모든 분야에 대한 학문적인 체계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가설들이 난무하였고, 인류 사회는 아직 자유 민주적인제도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분의 계급적인 차별이 분명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매우 특별한 진리와 보편적인 구원론은 그들의 세계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2) 중세 기독시대의 견해.
로마 카톨릭은 기독교의 본질을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립하였다.
첫째... 기독교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는 인간을 구원하신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기독교의 모든 것을 구속사적인 차원으로 몰아갔고 교회의 모든 기능을 하나님 예배<미사>로 집약하였다. 이러한 차원에서 저들은 교회 안과 교회 밖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교회 밖에서의 구원을 절대 사절하였고, 오직 교회 안에서 만의 구원과 미사를 통한 구원론을 강조하기 위하여 각종 예배의식과 엄격한 성직 제도를 신설하고 강화해나갔다.
(3) 기독교 개혁시대의 견해.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개념은 기독교 개혁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교리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어지게 되었다. 개혁주의자들은 기독교의 본질이 교회의 형식적인 예배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고 선포하는 교리들을 지식으로 인정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에 있다고 정의하였다. 당시의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교리적인 면에서 규명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의 기독교 본질을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끊임없는 논쟁과 오랜 시간을 허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에는 실패하였으며 다만 프로테스탄트를 로마 카톨릭의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것과 구분하는 것에 만족하고 말았다. 기독교 역사에 기독교의 본질을 가장 폭넓게 규명한 것은 칼빈이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신학을 정리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를 진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정리하였다.
(4) 현대 기독교의 개념.
현대 기독교의 기독교 본질에 대한 개념은 오히려 종교 개혁시대 이전으로 되돌아가 로마 카톨릭의 개념으로 환원하였다. 현대 기독교는 기독교의 본질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인간의 영혼구원으로 고착시켜 버렸다. 저들은 심지어 <교회는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고 복음 전도에만 전념해야하며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나 교육, 상공업 등에 관여하는 것은 세속적인 것으로서 교회의 본질을 오류 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오히려 교회의 본질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칼빈에 의해서 천명되어진 전 우주적인 기독교의 본질을 오히려 세속적인 것이라 하여 배척해버린 것이다.
(1)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나는 기독교의 본질.
성경은 기독교의 본질을 창조 기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 : 27-28>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모든 만물들 위에 더욱 뛰어난 존재가 된 것은 하나님의 목적 있는 특별하신 섭리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세계, 특히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우주 영역을 인간을 통하여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게 하셨다. 물론 <창1 : 27-28>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면 그것은 자연에만 국한된 것으로 제한하여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과 섭리적인 차원에서 광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러한 원리에서 해석할 때에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를 관장하도록 창조되어졌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며 선포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를 관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증거 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 나타나는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를 통하여 정립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 : 13-16>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 33>
기독교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 선택되고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전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신앙적 삶을 통하여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의 사명이 구령사업<救靈事業>인 것으로 이해한다. 때문에 기독교는<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종교>이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을 전파> 하는 것이 사명 인 것으로 생각 한다. 때문에 기독교는 지금까지 그 일에 전념 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기독교의 사명과 본질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기독교의 본질.
①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나는 기독교의 본질.
성경은 기독교의 본질을 창조 기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 : 27-28>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모든 만물들 위에 더욱 뛰어난 존재가 된 것은 하나님의 목적 있는 특별하신 섭리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세계, 특히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우주 영역을 인간을 통하여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게 하셨다. 물론 <창1 : 27-28>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면 그것은 자연에만 국한된 것으로 제한하여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과 섭리적인 차원에서 광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러한 원리에서 해석할 때에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를 관장하도록 창조되어졌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며 선포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를 관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증거 한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 나타나는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를 통하여 정립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 : 13-16>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 33>
기독교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 선택되고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전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신앙적 삶을 통하여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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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이와 같은 기독교의 본질을 <영혼구원> 과 <복음전파> 로 제한하였다. <영혼구원> 과 <복음전파> 가중요한기독교의 본질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기독교의 본질 중에 하나의 영역 인 것이다.
(2) 기독교의 사명.
① 진리의 사수와 보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진리<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교회로 하여금 진리의 귀중한 보화를 지키는 수호자가 되게 하셨다. 교회는 모든 비 진리 자들로부터 진리<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섭리>를 사수하고 보존해야할 막중한 의무와 책임을 부여받은 것이다.<딤전1: 3, 4> <딤후1: 13> <딛1: 9-11>. 따라서 수많은 비진리적 도전자들이 말씀에 대항하고 오류의 세력들이 도처에 난무할지라도 교회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사수하고 보존하는 사명을 완수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과 진리는 영원히 불변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② 진리의 보전 <말씀의 생육, 번성, 충만>
교회는 진리<하나님의 말씀>을 사수하고 보존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를 보전해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러한 책임과 의무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사명이며<마28 : 19-20>, 뿐만 아니라 아담이 태초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본래적 사명<창1 : 28>에 기초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는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되, 온 세계에 복음이 생육되고 번성하여 충만하도록 그 사명을 끝임 없이 진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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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이 신성한 책임과 의무를 온전하게 이행하지 않았다. 지난 수 세기동안에 수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경에 대한 적대적 비평을 오히려 받아들였고,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특히 근자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이 도처에서 함부로 오류 되고 변질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막고 바로 잡아야할 책임과 의무를 가진 자들이, 그것을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과 연합하고 있고 야합하고 있다.
③ 복음에 의한 정복과 통치.
교회는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통치하고 관리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지위를 회복하신 것도 그리고 그들에게 교회라는 조직 사회를 세워 주신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통하여 세상이 복음<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되고 통치되고 관리되어지는 가운데 세상이 하나님 영광을 찬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를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마6 : 13-16>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복음으로 무장시켜 그들을 사회 각 영역에 빛과 소금의 전사들로 파송하여 그들을 통하여 세상이 밝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게 함으로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원하심을 찬양할 수 있게 하여야할 막중한 책임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완전한 독립적 체제를 이루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국가와 교회의 독립은 상호 불가침의 독립이지만, 교회는 국가에 대하여 선지자적 직무를 행하여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국가 정부가 비 진리적 상태에 직면하면 교회는 선지자의 직무를 행사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국가 정부에 권면하고 충고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사명을 외면하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와 국가 정부를 분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비 진리적 분리를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교회는 교회와 세상을 영적으로 구분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거룩하고 신성한 반면에 세상은 악하고 추한 것으로 구분한 것이다. 교회는 이와 같은 영적 구분에 의하여 교회의 영적 순수함을 보호한다는 개념 하에 교회와 세상을 엄격히 구분하였고, 성도들의 삶을 교회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또한 구분하여, 세상적인 삶을 버리고 교회적인 삶으로 가꾸어가도록 유도하였다. 의식주와 문화적인 것을 교회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성도들의 삶을 세상으로부터 계속하여 격리시켜 나간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님의 세계를 사단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세상은 사단의 통치 하에 있는 사단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서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구분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결코 악하고 추한 곳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매우 기뻐하셨다.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완전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큼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상태적으로 저하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답다. 악하고 추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그 세상을 운영하고 인도하는 인간이 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부여하신 것은 악하고 추한 세상을 정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악하고 추한 인간들을 정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이러한 구분은 교회의 사명을 외면한 어리석은 구분이다. 교회는 성도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킬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정복하게 하여야한다.
교회는 교회와 사회를 분리시켰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예술, 상공 등등의 조직 사회로부터 교회를 분리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러한 영역에 대하여 전혀 관계하지 않고 오직 복음 전도를 통한 인류 구원에만 전념해야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사회적 격리를 추구하는 동안 교회는 사회로부터 점점 무시당하고 거부당하는 가운데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세상을 정복하고 통치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과 은사와 책임과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교회가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자초하여 ,이제는 사회로부터 정복되어지고 통치되어지고 관리되어지는 역<逆>현상을 초래한 것이다.
교회가 구분한 또 다른 것은 시간적인 구분이다. 교회는 시간을 <주의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주의 것은 거룩하고 신성한 반면에 세상 것은 악하고 추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주일날은 거룩하고 신성한 반면에 그 외의 날들은 악하고 속된 날들이라고 강조하였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은 거룩하고 신성한 반면에 그 외의 시간은 악하고 속된 시간으로 분리한 것이다. 이와 같은 구분은 시간을 하나님의 것과 사단의 것으로 구분하는 것으로서 매우 잘못된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시간까지도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심으로서 시간조차도 자신의 통치 영역에 속한 것임을 만 천하에 선포하셨다. 시간이나 장소에 대한 거룩함이나 신성함, 또는 악함이나 추함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느냐 하는 것에 의해서 구분되어지게 되는 것이지 그곳이 교회 안이냐? 교회 밖이냐? 하는 것과 또한 그 시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냐? 아니냐? 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곳이 비록 교회 안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비 진리적인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면 그곳은 악하고 추한 곳이다. 그러나 교회 밖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일들이 진행된다면 그곳은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 예배가 진정과 신령의 예배가 아니라 비 진리적 예배라면 그 시간은 악하고 추한 시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 아니라도 그 시간에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어떤 역사가 진행되어진다면, 그 시간은 분명히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다운 시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시간을 내적, 진리적으로 구분하지 못하고 외적 형식적 차원에서 구분하는 것은 비신학적이며 비 진리적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게 성도의 신앙적 관리를 사명으로 부여하셨다<마28 : 19-20>. 교회에게 부여된 성도의 신앙적 관리는 성경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다음의 세 가지이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서 법적, 행정적인 것이다. 성도들은 세례를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법적, 행정적으로 보증 받으며 또한 확인하게 된다.
교회 교육은 일반적인 교육과는 전혀 다르다. 교회 교육은 신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그 학문은 일반적인 학문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것으로서 어떤 이론이나 학설이나 사상과 같은 학술적인 것이라,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섭리이다. 교회 교육은 또한 교회의 역사를 가르치지만 그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서 과거는 물론이요 이미 예고되어진 미래의 것까지를 포함하는 전 우주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 교육은 하나의 이론이나 역사적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교회 교육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되어 왔으며, 또한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지고 그 결국이 어떻게 되어지리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 역사가 왜 그렇게 시작되었고, 왜 그렇게 전개되어져 왔으며, 왜 그렇게 종료되어지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필연성들을 가르쳐야한다. 때문에 교회 교육은 사실상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대한 증거이고 선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교회 교육의 원리를 실천적 교육 방법을 통하여 전수하셨다.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까지<요13 :4-10> 하시면서 철저한 실천적 삶을 통하여 교육의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사도들의 교회 교육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 방법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고, 초대 교회들의 지도자들 역시 그와 같은 전통을 이어갔다. 따라서 교회 교육은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 방법을 그대로 전수받아 철저하게 실천적으로 시행되어져야한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적인 삶을 살도록 지도 관리하여야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도 관리는 사역자들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 직원들의 실천적 삶을 통하여 이루어져야한다. 교회 교육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요구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진 교육의 원리이고 사도들을 통하여 전수되어진 교회적 전통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비롯한 직원들의 실천적 신앙의 삶은 성도들의 신앙적 삶의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된다. 성도들은 지도자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과 직원들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성도들을 교육하고 관리하여야 하는 것이
5. 교회의 설립
교회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설립하여야할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초대 교회시대에 사도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로마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한 것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절대 절명의 책임과 의무였음을 자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교회 설립은 성도 개인이나 또는 신앙적 단체들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노회나 총회 등의 연합 기관 주도 하에 설립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인이나 사설 단체들이 교회를 설립하게 되면 그들이 교회의 재정권이나 운영권을 주장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교회법에 의하여 운영되어야한다. 개인이나 사설 단체가 교회의 운영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의 설립이 교회의 주관 하에 이루어지지 않고 개인이나 사설 단체에 의하여 이루어지면 그러한 폐단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개인이나 사설 단체가 교회를 설립하고자 하면, 그 취지를 노회나 총회에 알리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맡기어 노회나 총회의 주관 하에 교회가 설립되어지게 할 것이며, 교회의 모든 재정권과 경영권이 교회법대로 시행되어지게 하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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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회는 이와 같은 교회 설립의 원칙이 무시되어지고 있다. 특히 군소 교단들은 연합 기관들이 교회를 설립할 능력이 없음으로 인하여 개인들이 교회를 설립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고, 따라서 교회의 재정권이나 경영권도 전적으로 설립자 개인에게 일임되어져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설립자의 의사에 따라 교회의 위치나 소속이 함부로 변경되는 경우가 허다하며, 교회의 재정과 운영 문제로 인하여 교회 내에 심각한 갈등과 내분이 발생하고 있다.
① 현대 목회자들의 개념.
일부 사이비 이단들은 교회의 사명이 <귀신을 물리치고 병자를 고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 목회자들은 교회의 사명이 <복음 전도>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행1:8>에 근거하며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전제로 합니다.
기독교는 기독교라는 명칭이 의미하듯이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사회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인류의 구속사<救贖史>와 연관됩니다. 기독교는 창세로부터 예정된 것이지만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이 타락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을 결정하심에 따라 설립하기로 예정된 것입니다. 만약에 아담이 범죄 하지 않으므로 인류 구원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메시야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기독교>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인류 구원문제로 인하여 설립되어졌다고 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설립 목적을 인류 구령사업<救靈事業>이라고 정립하면 않됩니다. 기독교가 인류의 범죄와 그에 대한 구속사 차원에서 설립되어졌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의 본질과 설립 목적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것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인류 창조의 목적과 인류에게 부여된 사명에 근거한 것입니다.
한편 기독교의 사명은 에덴교회를 통하여 전체교회에 영원히 부여되었습니다. 에덴교회는 하나님께서 전체 교회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모든 교회의 선두교회이며 또한 대표교회로서 수령하였습니다. 에덴교회가 받은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생육과 번성을 통한 충만 이며 그 충만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으로 압축되어집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어떤 신학자들은 <창1:28>을 다만 문자적인 것으로만 해석하여 그것을 자연에 대한 정복과 관리와 다스림으로만 해석합니다. 따라서 저들은 <창1:28>을 교회적인 사명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연에 대한 인간적인 사명으로만 이해합니다. 물론 <창1:28>을 당시의 입장에서만 적용한다면 그것은 교회적인 차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당연히 자연에 대한 인간적인 사명으로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신학적 무지로 인한 좁은 안목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기독교 교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에덴은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창1:28>이 당시의 에덴교회에게만 적용되어질 때에 그것은 우선적으로 자연에 대한 것만을 의미하게 되며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인간들의 숫자적인 생육과 번성을 통한 지구 전역에 대한 충만함으로 제한되어집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담 이래의 초기 인류의 생명이 매우 장구하였던 점을 통하여 분명하게 증명되어집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아직은 오직 에덴교회 하나뿐이었으며 따라서 교회적인 연합이라던가 하는 유기적 조직체제하에서의 교회적 사명은 아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기독교>을 창조<설립>하신 궁극적 목적은 인간<교회>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창조세계를 주권적으로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인간<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역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확장되고 발전하여>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부여된 정복과 관리의 사명은 인류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연, 정신, 사상, 학문, 문화, 예술, 등등의 영역 사회에 이르기까지 전, 포괄적으로 적용됩니다. 반면에 그러한 정복과 통치는 일반적이며 물리적인 권력과 수단에 의하여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주어진 수직적인 권위와 권세인 하나님의 말씀<신학>과 수평적인 권위와 권세<사랑과 봉사>와 실천적인 권위와 권세인 <신앙과 사명>으로 실시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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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기독교는 기독교의 사명을 <영혼구원> 과 <복음전파> 로 제한하였습니다. <영혼구원> 과 <복음전파> 가중요한기독교의 사명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기독교 사명 중에 하나의 영역 입니다. 한국기독교는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잡기 위하여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개혁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권위는 절대적인 권위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는 오직 순종만을 명령할 뿐 피조들과의 연합이나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는 법과 공의<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에 의하여 행사되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와 긍휼과 사랑으로 행사되어진다. 법과 공의는 자비, 긍휼, 사랑, 등등과 조화되기 어렵다. 법과 공의에도 눈물이 있고 자비와 긍휼이 있으며 따라서 <선처-善處>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에는 사회가 인정하고 용납할 수 있는 법적, 공의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무결하고 절대영원하기 때문에 사회가 인정하고 용납할 수 있는 법적, 공의적, 한계까지도 초월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가 자비와 긍휼과 사랑으로 행사되어지는 역사적 섭리 현장에는 그 어떤 모순이나 부조리가 없으며 때문에 그 누구로부터의 이의나 항의가 용납되지 않는다.
한편 기독교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행사되고 인정받는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법과 공의<하나님의 말씀-성경-로고스 신학>로 인준되었으며 따라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신학 원리는 기독교 최초의 교회였던 에덴교회에 생명의 원리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것을 통하여 선포되었다. 하나님께서 에덴교회에 세우신 <생명나무>는 곧 예수 그리스도였다. 에덴교회에 세워진 생명나무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머리이며 원리로서 모든 교회에 영원히 존재하며 곧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로 존재한다. 교회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기독교도 한시적인 생명이 존재하는 일반 3류 종교와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의 교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짐으로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가 또한 세워질 수 있고 보장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선포하고 있으며 바울사도는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바가 없다<행4:12>고 단언함으로서 교회의 권위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성을 갖는다고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절대적인 교회 권위는 하나님께서 교회들에게 부여하신 권세를 통하여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권세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이며 다른 또 하나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권세는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원리 안에 존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권세가 행사되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던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따라서 교회에 하달되어진 권세는 도구적 차원에 있어서는 두 가지<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종>이지만 신학적 원리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즉, 하나님의 법<말씀-로고스-λογος-예수 그리스도> 하나인 것이다. 교회에서 가시적으로 사용되어지는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의 도구적 기능에 불과하며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할 때에 교회의 권세로서의 기능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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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의 범죄와 관련된 과실수<果實樹>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정리한다.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은 과실수였다. 그리고 그 과실수는 다른 과실수하고는 다른 것으로서 인간의 욕심을 자극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었다. 인간의 욕심을 자극할 수 있는 특별한 것, 그것은 곧 권세중 최고의 권세인 하나님의 권세였다. 하나님의 권세는 이미 사단이 욕심내었던 권세였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자들이 탐하였던 권세였다. 반면에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탐하였던 자들의 결과를 수없이 확인한다. 사단이 그랬던 것처럼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권세를 탐한 자들은 한결같이 몰락하였다.
그러나 에덴교회에 존재하였던 하나님의 권세<과실수>를 인간의 범죄와 연관시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세우신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에덴교회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권세는 인간을 유혹하고 미혹하여 넘어뜨리는 권세가 아니라 모든 교회, 모든 하나님의 종들의 권세를 세우시는 하나님 권세의 실제이다. 따라서 그 권세는 하나님의 법<말씀-로고스-λογος-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최고 최상 최대의 형이상학적인 권세로 행사되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법<말씀-로고스-λογος-예수 그리스도>을 무시하고 거부하면서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도-道>가 된다.
(1) 현대 목회자들의 개념.
일부 사이비 이단들은 교회의 사명이 <귀신을 물리치고 병자를 고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 목회자들은 교회의 사명이 <복음 전도>인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개념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행1:8>에 근거하며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전제로 한다.
기독교는 기독교라는 명칭이 의미하듯이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사회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인류의 구속사<救贖史>와 연관된다. 기독교는 창세로부터 예정된 것이지만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이 타락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을 결정하심에 따라 설립하기로 예정된 것이다. 만약에 아담이 범죄하지 않으므로 인류 구원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메시야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기독교>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인류 구원문제로 인하여 설립되어졌다고 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설립 목적을 인류 구령사업<救靈事業>이라고 정립하면 안된다. 기독교가 인류의 범죄와 그에 대한 구속사 차원에서 설립되어졌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의 본질과 설립 목적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것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인류 창조의 목적과 인류에게 부여된 사명에 근거한 것이다.
한편 기독교의 사명은 에덴교회를 통하여 전체교회에 영원히 부여되었다. 에덴교회는 하나님께서 전체 교회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모든 교회의 선두교회이며 또한 대표교회로서 수령하였다. 에덴교회가 받은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생육과 번성을 통한 충만이며 그 충만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으로 압축되어진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어떤 신학자들은 <창1:28>을 다만 문자적인 것으로만 해석하여 그것을 자연에 대한 정복과 관리와 다스림으로만 해석한다. 따라서 저들은 <창1:28>을 교회적인 사명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연에 대한 인간적인 사명으로만 이해한다. 물론 <창1:28>을 당시의 입장에서만 적용한다면 그것은 교회적인 차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당연히 자연에 대한 인간적인 사명으로만 해석될 수 있다. 신학적 무지로 인한 좁은 안목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기독교 교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에덴은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창1:28>이 당시의 에덴교회에게만 적용되어질 때에 그것은 우선적으로 자연에 대한 것만을 의미하게 되며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인간들의 숫자적인 생육과 번성을 통한 지구 전역에 대한 충만함으로 제한되어진다. 이러한 사실은 아담 이래의 초기 인류의 생명이 매우 장구하였던 점을 통하여 분명하게 증명되어진다. 왜냐하면 교회는 아직은 오직 에덴교회 하나뿐이었으며 따라서 교회적인 연합이라던가 하는 유기적 조직체제하에서의 교회적 사명은 아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기독교>을 창조<설립>하신 궁극적 목적은 인간<교회>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창조세계를 주권적으로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인간<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역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확장되고 발전하여>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여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부여된 정복과 관리의 사명은 인류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연, 정신, 사상, 학문, 문화, 예술, 등등의 영역 사회에 이르기까지 전, 포괄적으로 적용된다. 반면에 그러한 정복과 통치는 일반적이며 물리적인 권력과 수단에 의하여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주어진 수직적인 권위와 권세인 하나님의 말씀<신학>과 수평적인 권위와 권세<사랑과 봉사>와 실천적인 권위와 권세인 <신앙과 사명>으로 실시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었다.
에덴교회를 통하여 하달된 생육, 번성을 통한 충만함과 정복, 다스림을 통한 관리는 교회의 사명임과 동시에 교회에 부여된 권위이며 권세였다. 그러나 교회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과 권위와 권세는 순종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즉 교회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절대 순종할 때에만 교회의 사명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며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절대 순종할 때에만 교회의 권위와 권세가 살아 역사되어지는 것이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8-17>
이와 같은 성경의 선포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우리는 그 언약을 신학적으로 정립할 때에 <하나님의 계약> 또는 <하나님의 계약신학>이라고 하며 아담교회에 주어진 언약은 사람의 행위가 전제되어지는 것이라 하여 <행위언약> 또는 <행위계약>이라고 한다. 아담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계약>은 아담교회의 승인이나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체결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일방적인 언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교회의 승인이나 의사를 반영한 것 이상의 은총이 배려된 것이었다. 아담교회는 피조로서의 특성상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은총적 배려에 버금가는 어떠한 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담교회는 피조로서의 부족함 때문에 이미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못하는 결과를 이루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담교회에게 주신 <행위언약>은 이미 실패를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실패한 행위언약에 대한 후속조처로서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언약>이 또한 전제되어진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게 된다는 말씀은 그 나무의 실과가 그를 죽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금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 하나님께 징계 받아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때의 죽음은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과 권세와 권위에 대한 죽음을 아울러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순종하면 교회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면서 찬란한 역사를 진행하게 될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풍요로운 상태 하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진리는 이미 앞에서 논증한바 있듯이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법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대로 진행되어질 때에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는 반면에 그, 반대의 경우에 해당될 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지게 된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선포였다. 그러나 에덴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서 교회에 부여된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으며 아울러 교회에 부여된 권위와 권세도 몰수당하였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창3:23>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에덴교회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에덴교회는 이제 더 이상 <에덴교회> 명칭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아담교회>의 명칭으로 존재하게 된다. 에덴교회가 아담교회로 존재하게 된 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에덴교회가 영원히 폐지되지 않고 아담교회로 존속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관리에 대한 특별하신 섭리를 나타낸다. 만약에 에덴교회가 영원히 폐지되어진다면 에덴교회를 근원으로 하는 기독교의 계속적인 확장도 영원히 종료되어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 교회의 영원성 때문에 에덴교회는 영원히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담교회로 명칭이 바뀌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에덴교회>는 기독교의 전체교회인 <천상교회>이며 <아담교회>는 현존하는 <지상교회>를 상징하고 예표한다.
한편 하나님의 교회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형적인 것이다. 외형적인 교회는 내형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에 불과하다. 따라서 교회가 폐지되는 것은 내형적인 교회의 폐지가 아니라 외형적인 교회의 폐지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들을 폐지하시는 것은 교회의 외형적인 것 즉, 그릇을 폐지하시는 것이며 내형적인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유기적 조직체를 이루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자녀>들은 또 다른 외형적 교회<그릇>들로 옮겨질 뿐이다. 이와 같은 모든 원리는 기독교에 대한 절대성을 증명한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법<말씀-로고스-λογος-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 절대 순종할 때에만 그의 의를 갖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는 폐지되는 교회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중에 대표적인 교회가 이스라엘의 <유대교회>이며 <로마 카토릭 교회>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는 유대교회와 로마 카토릭 교회들과 같은 전철을 밟은 교회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도 이미 폐지된 교회들이 수없이 많으며 장차 폐지될 교회들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교회는 폐지되어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폐지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유기적 조직체를 이루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자녀>들은 외형적 교회<그릇>들이 하나님의 법<말씀-로고스-λογος-예수 그리스도>안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폐지될 때에 함께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외형적 교회<그릇>들로 옮겨지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기독교가 비과학적이며 비논리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비과학적, 비논리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과학적, 비 논리적일수도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주인이 곧 과학의 창조주, 논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비과학적, 비논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적 진행과정에 여러 차례 나타난 기적, 이적, 등등의 불가사의한, 초자연적인 역사들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유한적 존재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기적, 이적, 등등의 불가사의한 초자연적인 이야기들이며 따라서 비과학적, 비논리적인 사건들이지만 스스로 자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절대적 존재 완전무결한 존재이신 하나님께는 다만 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지극히 과학적인 일이며 지극히 논리적인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기독교가 비윤리적이며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비윤리적, 비도덕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 비도덕적일수도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주인이 곧 윤리의 창조주, 도덕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비윤리적,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적 진행과정에 여러 차례 나타난 비윤리적, 비도덕적 사건들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비윤리적, 비도덕적 사건들은 모두가 인간들에 의하여 발생한 사건이지 하나님께서 범죄하신 사건들이 아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비윤리적, 비도덕적 패륜을 범한 자들에 대하여 관용을 베푸시거나 또는 오히려 그들을 들어 쓰시는 점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며 특히 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일방적인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조치에 대하여 불만한다. 저들은 <다윗, 압살롬, 솔로몬>의 패륜적 악행을 하나님께서 관용으로 용서하신 것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며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군과정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무참한 공격과 일방적 승리에도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원론을 불만하며 만인 구원론을 지지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토기장이>를 근거로 하여 선포한다.<사45:9><롬9:21>
토기장이에 대한 비유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정립하는 신학이지만 반면에 하나님을 독재자. 편애자 등등으로 오해하게 한다. 그러나 신학을 아는 자들은 토기장이의 비유로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는다. 신학은 성경의 단편적인 부분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조화있게 적용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를 정립한다. 우리는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정리한다.
(1) 다윗, 압살롬, 솔로몬의 패륜적 악행.
하나님께서 <다윗, 압살롬, 솔로몬>의 패륜적 악행을 관용으로 용서하신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자비이며 둘째는 그러한 사건들을 교훈삼아 인간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게 하심이다. 이미 앞장에서 정리한 바 있지만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법과 공의를 초월한다. 만약에 하나님의 법과 공의가 원칙대로 시행된다면 이 세상에 징계 받지 않을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성경은 이점을 단호하게 선포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따라서 <다윗, 압살롬, 솔로몬>의 패륜적 악행에 대한 관용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이며 긍휼인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다윗, 압살롬, 솔로몬>의 패륜적 악행을 관용으로 용서하셨지만 그들은 결국 그로 인한 대대적인 징계를 받았다. 이스라엘은 <다윗, 압살롬, 솔로몬> 때문에 국가적, 민족적 수난과 멸망을 당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여러 차례 경고하시고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이 끝내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음에 이스라엘에게 매우 혹독한 징계를 내리신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사람들은 <다윗, 압살롬, 솔로몬>의 패륜적 악행에 대한 징계가 어찌하여 그들 자신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그들의 후손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내려졌는가? 하는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의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대한 무지이며 오류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압살롬, 솔로몬> 등등에 대한 관용을 통하여 그들의 후손들이 선조들의 악행적 전철을 밟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교와 불순종으로 거부하였다. 따라서 저들이 받은 징계는 그 책임이 <다윗, 압살롬, 솔로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다윗, 압살롬, 솔로몬> 등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어디까지 적용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과 솔로몬>을 위대한 성군으로 추대하며 그들 시대의 부귀와 영광을 찬양하지만 그들은 분명 국가와 민족에게 수난과 고통을 안겨준 원흉들이며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심히 죄송한 자들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적용 한계를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2) 가나안 진군과정의 이스라엘 승리.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군과정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무참한 공격과 일방적 승리는 하나님의 무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과정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결과들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군과정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무참한 공격과 일방적 승리는 기독교, 비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크고 분명한 교훈을 준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권능과 함께 하심을 확인시켜 주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을 갖게 하며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확인시켜 주심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한다. 반면에 당시에 죽은 자들이나 수난 당한 자들에게도 그것은 자비이며 긍휼이다. 당시에 죽은 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죽음이 곧 하나님의 자비이며 긍휼이고 산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으므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거나 또는 더 이상의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니 역시 하나님의 자비이며 긍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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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원주민 진멸에 대한 문제.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할 때에 하나님께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것<신20:10-18>에 이의를 제기한다. 하나님께서 잔혹하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의 제기는 성경을 분별하지 못함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정리함에 있어서 먼저 성경의 내용을 확인한다.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평화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만일 너와 평화하기를 싫어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 죽이고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육축과 무릇 그 성중 에서 네가 탈취한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취하라 네가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것인즉 너는 그것을 누릴 지니라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 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 - 신20:10-18>
성경의 내용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는 도중에 있는 민족들에 대한 것이고 다른 또 하나는 가나안 원주민들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에 입성하는 도중에 있는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게한 후 그들이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받아들이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그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면 진멸하라고 명령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원주민들에 대하여는 완전한 진멸을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 명령은 이스라엘이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배교의 범죄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염려는 실제로 나타났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가나안 원주민들을 살려두어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배교하는 결과를 자초한 것이다.
그러나 <신20:10-18>의 하나님 명령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교회와 하나님의 모든 종들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된 명령이다. 즉 모든 교회와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명을 진행할 때에 가나안 원주민<비 진리자>들과 타협하고 연합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과 타협하고 연합하여 결국은 하나님을 배교한 것과 같이 교회와 하나님의 종들이 비진리와 타협하고 연합하면 비진리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신20:10-18>의 사건은 하나님의 모든 교회와 모든 종들에게 비진리와 타협하고 연합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의도적, 목적적, 경고이며 명령인 것이다.
(3)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원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원론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기로 예정하신 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은 책망받아 마땅한 악행이다. 이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책망 받아야 한다.
① 비 기독교인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
만약에 비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원론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책망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불만이라면 하나님의 품<교회>로 들어오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불만하고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② 기독교인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
만약에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원론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들은 더욱 크게 책망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불만과 이의제기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줄 모르는 악행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죄인들을 구원하실 책임과 의무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는 하나님에 의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하여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들은 당연히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자들의 구원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악행으로서 크게 책망 받아 마땅한 것이다.
로마 카토릭의 제45대 교황 레오 1세<Leo. I, A.D.440-461.재위>는 <A.D.445년>에서 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니안 3세를 통하여 교회의 수장을 교황이라고 선포하였다. 따라서 로마 카토릭의 교회 수장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황이다. 로마 카토릭 교황은 교회 수장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교회의 모든 결정권을 교황에게 일임하였고 교황의 의복을 구약시대 대제사장의 의복과 같이 하였으며 심지어는 <교황 무오설> 교리를 만들어 내어 교황의 말에는 일점의 오류도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의 수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며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수장으로 하는 지체임을 선포한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1:20-22>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8>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의 수장되심은 창세전부터 신적 작정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우주 창조 때부터 실현되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후 에덴교회를 설립하셨을 때 에덴교회의 중심에 세워진 생명나무는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며 예표였다. 이, 예표와 상징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생명>이라고 선포하신 것을 통하여 입증되어진다<요1:4; 5:24,26; 6:33,35,48,51; 14:6>.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유기적 조직체계를 이루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생명의 원리>로서 기독교의 근원이며 원리이고 또한 기독교의 오직 유일한 통치주이시며 관리주이시기 때문이다.
일반적 차원에서 논증하면 역사학자들의 역사 연구가 인류 역사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 논증의 중심은 당연히 인간이 된다. 저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 모든 역사적 논증을 전개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출발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당연하듯이 역사의 중심 역시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우주 만물은 3류 종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느 날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며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기운이나 정신이나 운동력에 의해서 생겨나고 발전된 것도 아니고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생물들로부터 진화되어 현재에 이른 것도 아니다.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목적에 의하여 작정되고 계획되어 창조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목적에 따라 진행되어져 왔고 계속하여 진행되어져 갈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중심은 당연히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일반 역사가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특별한 존재임으로 인간을 모든 역사의 중심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이 특별한 존재인 것은 인간이 스스로 어떤 능력을 발휘하여 자체적으로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임무를 부여하셨고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피조세계를 역사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결국 현존하는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역사이며 따라서 모든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다. 역사의 정립이 기독교 역사를 중심으로 한 것이 되지 않고 일반역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된다면 일반 역사의 중심인 인간이 우선이 되고 모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차선이 된다. 그와 같은 역사의 정립은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것으로서 창조주와 피조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그와 같은 역사의 정립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신의 피조 세계를 섭리하시는 것이 되지 못하고 인류 역사를 뒤쫓아 가면서 인류 역사의 진행에 맞추어 자신의 섭리 역사를 꿰어 맞추는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역사의 정립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고 거부하는 용서받지 못할 악행이다.
인류역사는 물론이요 인류역사와 동행한 다양한 영역의 역사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독특한 역사를 전개하였으나 그 모든 역사들은 결국 하나님 섭리역사의 한, 영역에 불과하다.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섭리 역사의 주역은 기독교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전개하심에 있어서 그 중앙무대에 기독교를 주역으로 세우셨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들의 역사를 진행시키시고 그 인간들의 역사를 아우르시고 다듬으시면서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를 진행시키신다. 이와 같은 사실은 기독교 역사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시공간에는 언제나 이미 인류 역사가 먼저 존재하고 있었음을 통하여 증명되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의 역사가 진행되어질 시공간에 이미 인류역사<일반역사>를 전개시키시어 그, 일반역사<인류역사>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대한 보좌적, 준비적, 예비적, 보증적, 변증적,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역사란 참으로 많은 것을 아우르고 어루만지며 전개된다. 역사는 때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가 하면 때로는 치사하고 더럽고 유치하여 울분을 토하게하며 처절한 슬픔과 극도의 분노를 수반하는가 하면 가슴뭉클한 감동과 전율하는 희열을 선사한다. 그리고 때때로 끝없는 절망과 견딜수 없는 고통을 밀어 부치어 피를 토하는 아픔과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역시 위대하다. 역사는 그러한 모든 것을 휘감아 안고 유유히, 전개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의 특성들을 장엄한 역사, 비장한 역사. 도도히 흐르는 역사, 등등으로 표현한다. 반면에 역사는 보는 자의 견해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난다. 어떤 개념과 주관하에서 역사를 보는가? 하는 것에 따라 그 역사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입장이 달라지는 것이다. 일반적 차원에서 인류 역사를 보면 인류 역사는 아름다움보다는 고통이 더 많으며 희망적이기보다는 절망적인 경우가 더 많고 자부심과 긍지보다는 부끄러움과 허무함을 갖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기독교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면 역사의 전반에 흐르는 주제들은 역시 위대하고 장엄하고 감동적이다. 역사를 인간적 차원에서 보면 고통, 슬픔, 절망, 분노, 허무, 등등의 연속이지만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과 사명적 차원에서 보면 역사는 위대하고 장엄하고 감동적이며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역사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 슬픔, 절망, 분노, 허무, 등등은 일시적인 것인 반면에 창조주 섭리주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영광이요 기쁨이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상급과 면류관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의 명칭은 1904년에 제정되었다. 1904년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협의하여 한국 기독교의 명칭을 <대한 예수교>로 통일하였고 따라서 교파의 명칭을 <대한 예수교 장로회> <대한 예수교 감리회>로 구분하였다. 당시에는 교회의 모든 행정과 역사를 미국 선교사들이 주관하였고 따라서 모든 기록도 영어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명칭이 제정됨에 따라 이때로부터 교회회의 진행 기록을 한국어로 기록하였으며 장로 장립과 집사 임명에 대한 규칙과 교육제도가 제정되었다.
http://www.제자훈련교회.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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