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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2장. 한국 기독교의 현실.

하나님아들 2017. 8. 13. 23:17

제2장. 한국 기독교의 현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에 근거한 제자훈련을 정리하였다. 우리는 위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와 명령에 의하여 제자훈련을 실시한다. 한편 우리는 제자훈련에 앞서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먼저 정리한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정확히 알아야 제자훈련의 중요성과 제자훈련에 대한 사명감을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 1. 한국 기독교의 신학.


(1) 1) 한국 기독교 신학의 역사.


  한국 기독교는 불과 120여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성장은 양적으로는 세계가 놀라는 성장을 이루었지만 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심각할 정도로 낙후되고 오류되어 있는 실정이다. 한국 기독교가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한 반면에 질적으로는 심히 낙후되고 오류된 원인은 신학적 경륜의 부족 때문이다. 현재 한국 기독교에는 신학적 경륜을 갖춘 저명한 신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가는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신학적 경륜이 전혀 없는 자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낙후와 오류는 한국 기독교만의 실정이 아니라 현대 기독교 전체의 실정이며 나아가서는 초기 신약 기독교 시대 이후로부터 현대 기독교에 이르기까지의 전반적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초기신약 기독교 시대에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낱낱이 계시하여 주셨다. 그리고 수많은 신학자들을 세우시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섭리를 조직화하여 신학체계를 세우시게 하셨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수되어진 조직신학이 비록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섭리 일체를 완전하게 정립한 것은 못되지만 그 조직신학은 성경에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섭리를 거의 체계화시켰으며, 그것이 완성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시간과 수많은 신실한 하나님 종들의 불타는 사명감과 피땀 어린 노고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 종들의 불타는 사명감과 피땀 어린 노고에 의하여 정립된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에 의하여 수없이 거부되고 무시되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들에 의하여 사정없이 오류되고 변질되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헬라 철학적 사상에 매달려 성경의 계시들을 3류 일반종교의 무속 귀신론<鬼神論>으로 둔갑시켰고 중세 시대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스콜라주의 사상에 연연하여 기독교 신학의 진리를 사변적<思辨的> 일반학문으로 변질시켰다. 그리고 근대 기독교 신학자들은 인본주의 사상에 집착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발전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신학을 인간위주의 사상으로 둔갑시켰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독교 신학은 수없이 많은 오류와 변질적인 역사를 되풀이하였으며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가 크게 제한되어졌고 하나님의 섭리로부터 멀리 이탈 되어졌다. 이러한 신학적 오류와 변질의 역사적 계속은 한국 기독교에도 그대로 전이되었다.

  한국 기독교에 처음 신학을 전수해 준 것은 미국, 호주, 카나다 등등의 기독교 해외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선교사명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매우 아름답고 순수한 것이었지만 신학적 경륜은 매우 저급하였다. 때문에 그들로부터 신학을 전수받은 한국 기독교 초기 지도자들의 신학은 당연히 저급하고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한국인기독교 지도자들의 학력 수준도 매우 저급하였다. 아직 개화되지 않은 한국인 사회에서 교육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반면에 양반들은 유교를 숭상하여 기독교를 배척하였다. 때문에 당시의 기독교는 하층 계급사회를 통하여 확장되어갔고 지도자들 역시 대부분 하층계급들 중에서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일제 말기에 이르러 일제가 기독교를 극심하게 탄압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을 거의 폐교 조치함에 따라 한국 기독교 신학수준은 더욱 낮아지게 되었고 오히려 비진리와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기독교 말살 정책에 의하여 해외 선교사들이 추방되거나 또는 자진 출국하였기 때문에 얼마동안 신학교 운영이 정지되었으며. 이러한 사이에 자유주의 신학을 비롯한 사이비 이단적 일본 신학들이 대거 유입되었는데 당시의 한국인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는 아직 자유주의 및 사이비 이단적 일본신학들을 비판하고 퇴치할만한 신학적 경륜이 없었다.

  때문에 각종 사이비 이단적 신학사상들이 기독교 신학이라는 간판을 달고 범람하여도 그것이 제대로 비판되고 퇴치되어지지 않음으로서 한국 기독교 신학은 점차 낙후되어지고 혼란스럽게 되었다.


(2) 2) 한국 기독교 신학의 오류들.


  현대 <21세기> 한국 기독교는 교파나 교단에 관계없이 총체적으로 부패되고 오류 되었다는 것이 기독교 관계자나 비 기독교인들의 공통된 개념이다.    한국 기독교의 부패 및 오류와 비 진리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출발과 함께 시작되었고 그것이 계속하여 발전되는 가운데 거의 체질화되어있는 형편이다. 때문에 한국 기독교를 바라보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 기독교의 부패와 오류적 병폐를 치료불능<治療不能>의 상태라고 한탄하는가 하면 전면적인 개혁이 단행되야 한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하나님께서 <한국 기독교에서 촛대를 옮기실 것이다.>라는 우려까지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가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는 전혀 그러한 위기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부패, 오류, 비 진리성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심각하여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낙후와 오류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신학의 낙후와 오류에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 문제를 <한국 기독교 개혁>이라는 주제 하에 별도로 정리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고 핵심적인 문제들만을 간단하게 정리한다.


(1) 신학의 부재.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것이며 기독교의 근본적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것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기독교의 본질을 외면하였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독교의 근본적 사명을 이행하지 않았다.

  한국 기독교가 기독교의 본질을 외면하고 기독교의 사명을 이행하지 않은 것은 한국 기독교에 그러한 신학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에는 조직신학, 역사신학, 성경신학, 목회신학, 실천신학, 선교신학 등등의 신학이 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에는 이러한 신학들을 바로 가르칠만한 차원 높은 신학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 반면에 한국 기독교에는 현대 자유주의자들에 의하여 양산된 각종 인본주의, 자유주의 사상들이 기독교 신학이라는 주제 하에 범람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신학적 경륜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인본주의 자유주의 사상들을 분별없이 받아 들여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전수하므로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이 크게 오류되고 변질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군소 신학교에서 신학 부재의 교수들로부터 마구잡이로 길러진 수준 낮은 목회자들이 무더기로 배출됨에 따라 한국 기독교에서 차원 높은 신학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지경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현대교회 목사들은 기독교의 본질과 사명에 입각한 목회를 하지 않고 오직 구원, 천국, 전도, 축복, 목사 섬김, 교회충성, 등등에 입각한 목회에 전념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신학적 경륜이 심히 약화되었고,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각종 사이비 이단들과 비 진리자들의 유혹과 미혹을 분별하고 거부할 수 있는 신학을 정립하지 못한 것이다.


(2) 하나님 섭리의 제한.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요약되어진다. 성경은 이와 같은 기독교의 본질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로 요약하여 선포하였고, 그에 대한 사명을 창조기사를 통하여 <정복하라, 다스리라-창1:28>라고 명령함으로서 하나님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이 기독교의 본질을 전개하는 섭리적 영역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를 <인간 구원>이라는 <구속사-救贖史>적 신학으로 제한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온 인류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축소되고 제한되었다.

  이와 같은 하나님 섭리의 제한과 변경은 하나님 존재 자체를 오류시키고 변질시켰다. 현대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을 행사 하시는 우주의 섭리자가 아니라 오직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되었고 또한 인간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온갖 복을 내려주는 <강복의 하나님>이 되었다.


(3)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에 대한 오류.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어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은 어쩌다 생각이 나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란 <우주적 기독교의 주권주 하나님, 섭리주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기독교의 구원주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다. 즉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고 관리하시면서 그 모든 섭리 역사를 통하여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면서 인류 구속사를 통하여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인 것이다.

  어떤 자들은 이 두 가지의 문제를 같은 내용인 것으로 말하지만 이 두 가지의 신학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구별이 존재한다. <우주적 기독교의 주권주 하나님, 섭리주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영역 전체를 통하여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은 곧 현존하는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반면에 <구속사적 기독교의 구원주 하나님>으로서 기독교의 구속사를 통하여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은 하나님의 섭리 영역을 인류 구속사로 제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위한 우주적 기독교 섭리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구속적 기독교 섭리 영역>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위한 우주적 섭리 영역>이 아니라 오직 <인간을 위한 섭리적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오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신학도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에 대한 신학과 동일한 원리이다. 구속사적인 차원에 매달려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독교인들이 사후<死後>에 가는 천국으로만 이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의를 인류를 구원하는 복음 전파 사역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영역 전체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도 복음전파 사역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영역 전체가 하나님의 섭리대로 통치되고 관리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의 삶을 마친 후에 가는 천국은 하나님 나라 중에 하나의 영역이며, 복음 전파 사역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총체적인 사역 중 하나이다. 천국과 구원은 인간에게는 최고 최상 최대의 문제이지만 그것이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빛과 소금의 전사>로 선포하면서 우리의 실천 신학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라고 명령한 것<마5:13-16>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최우선 과제임을 선포한 것<마6:33>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대한 전 우주적이며 전 포괄적인 신학 원리를 정립시켜준 것이다.


(5) 하나님 창조 세계의 이원화.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가 기독교의 구속사로 제한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시간적 장소적으로 이원화되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주일>을 <안식일>로서 거룩한 날로 만들었고, 반면에 주일을 제외한 나머지 날들은 <세속>적인 것으로서 악하고 불결한 날로 이원화하였다. 저들의 주일에 대한 개념은 구약적이며 율법적이고 유대교적이다. 저들은 주일날을 안식일로서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주일날에는 일하는 것과 물건을 사고파는 것과 T.V를 보는 것과 여행을 하는 등등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마12:8>이라고 선포한 것과, <모든 것을 완성한 자-요19:30>로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선포한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던 구약신학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완성한 신약신학은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들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한결같이 거룩하다. 그러나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순간들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한결같이 거룩하다는 신학은 신약 신학에 의하여 새롭게 정립된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원리로부터 유래된 신학이다. 그것이 구약시대에는 아직 하나님의 신학을 이해할 만한 신학적 경륜이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로 제한되었을 뿐이다.  모든 시간, 모든 순간들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한결같이 거룩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창조역사 자체가 거룩하다는 이유에서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거룩한 것이다. 반면에 저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거룩하게 성별한 주일<안식일>을 스스로 범하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저들은 다만 주일에 일하는 것과 물건을 사고파는 것과 T.V를 보는 것과 여행을 하는 등등의 몇 가지 일을 제한하였을 뿐, 실제로는 구약적이며 율법적이고 유대교적인 안식일 준수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구약적이며 율법적이고 유대교적인 안식일 준수를 제대로 지키려면 안식일 전날에 교회 앞 가까운 곳에 도착하여 안식일 전날 밤을 보내야 하며 교회를 가기 위하여 차를 타고 이동하거나 이발소나 목욕탕 등등에도 가지 말아야 하며 음식을 먹기 위하여 불도 피우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안식일을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느냐 아니면 제대로 못 지키느냐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대한 율법의 완성으로 인하여 안식일 제도가 주일 제도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저들은 또한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장소로서 거룩하고 신성한 반면에 교회 밖은 비천한 인간들의 세속된 것으로서 악하고 불결한 곳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개념은 로마 카토릭이 교권주의를 확립시키려는 의도에서 만들어낸 비 진리이다. 로마 카토릭은 사제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교회를 구원의 방주로 선포하였고, 그리하여 구원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로마 카토릭의 주장이 발전하여 교회의 장소적인 거룩성과 신성성이 수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모든 영역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창조 역사 자체가 거룩하다는 이유에서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거룩하다. 어떤 시간 어떤 장소가 거룩과 신성, 악함과 불결함으로 성별되는 것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현재 어떠한 일이 진행되는가? 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된다. 주일과 교회라 할지라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일이 진행된다면 그 시간 그 장소 <주일과 교회>는 악하고 불결한 것이 될 것이며 주일 아닌 다른 날과 교회 밖이라 할지라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이루어진다면 그 시간 그 장소 <주일 아닌 다른 날과 교회 밖>은 거룩하고 신성한 것이 될 것이다.


나. 2. 한국 기독교의 신앙.


  한국 기독교의 신앙은 한국 기독교 신학과 동행하면서 같은 차원의 비 진리적, 오류적 역사를 이루었다. 신앙이란 본래 신학에 의하여 성장되고 발전되어진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의 신앙은 한국 기독교 신학의 비 진리적, 오류적 역사에 영향을 받아 같은 차원의 비 진리와 오류적 신앙을 형성하였다.

  일반종교의 신앙은 자신의 현재적 길흉화복이나 내세의 삶을 위하여 신을 섬기는 신앙이다. 그러나 일반 종교의 신앙과 기독교의 신앙은 차원이 다르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내세를 보장받은 자들로서 내세를 보장해 주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며, 내세와 현세의 모든 복을 이미 받은 자들로서 이미 받은 모든 복을 누리고 즐기면서 그 복을 주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며, 현세의 모든 복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 기독교에서 이러한 차원 높은 신앙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현대 한국 기독교 신앙은 거의 대부분 현재적 길흉화복을 구하는 신앙이며 천국을 가기위한 신앙으로서 일반 3류 종교의 신앙과 같은 것이다. 일반 3류 종교인들이 감히 기독교와 저희들의 종교가 같은 차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자신들의 신앙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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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기독교의 모든 성도들이 비 진리적 오류적, 이질적 신앙을 소유한 것은 아니다. 현대 기독교 성도들 중에 성경적인 신앙, 아름다운 신앙, 모범적인 신앙을 소유한 이들이 많다. 성도들은 자체적으로 신앙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섬기는 교회의 목회자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되어진다. 따라서 차원높은 신학적 경륜과 신앙을 갖춘 목회자로부터 신학과 신앙을 배운 자들은 순수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진리 안에 거하는 신앙을 형성하였고 비 진리와 오류된 신학을 소유한 목회자로부터 신앙을 배운 자들은 기독교와 전혀 무관한 3류 무속 종교적 신앙을 형성하였다.

  반면에 섬기는 교회 목사의 비 진리와 오류에 자극받아 오히려 모범적인 신앙을 형성하는 지혜로운 이들도 많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은 진리적 형태보다는 비 진리와 오류된 형태의 신앙이 더 많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과 신앙이 비진리와 오류로 인하여 심히 부패되고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다. 3. 한국 기독교의 인격.


  한국 기독교가 신학적, 신앙적 오류와 변질로 달려가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의 인격도 함께 낙후되었다. 인간의 인격이란 원리적으로는 학문과 지식에 비례한다. 많이 배우고 지식이 많은 차원에 따라 차원 높고 고매한 인격을 형성하게 되며 그 반대의 경우에 따라 상대적으로 저급하고 우매한 인격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이 배우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 중에 오히려 저급하고 우매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허다하며, 많이 배우지 못하고 그리하여 지식이 적은 사람들 중에 오히려 고매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원인은 학문이나 지식이기보다는 신학과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정리할 때에 한국 기독교인들의 인격은 오류되고 변질된 신학과 신앙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 중에는 오히려 비 기독교인들의 인격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급하고 우매한 인격을 소유한 자들이 많다. 우리는 그러한 원인을 변질되고 오류된 신학과 그로부터 형성된 이질적 신앙에서 비롯되어 졌다고 생각한다. 변질되고 오류된 3류 무속적 신학과 그로부터 형성된 3류 무속적 이질신앙이 기독교인들의 인격을 저급하고 우매하게 만들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의 인격을 비판하고 비난하며 불신하고 무시한다. 그것은 그동안 기독교인들이 비인격적인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답지 못한 언행을 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있으며 오히려 비 기독교인들의 인격보다도 저급한 언행을 통하여 자신은 물론이요 전체 기독교인들의 명예를 실추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의 말이기 때문에 진실로 믿었는데 오늘날에는 기독교인들의 말이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하고 불신한다.

  기독교인들의 비 진리적인 인격은 교회분규, 교회내의 갈등과 반목 등등을 통하여 드러나기도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언어행동을 통하여 그대로 나타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을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하대하며 자신의 지위, 권세, 재력, 능력, 부귀영화 등등을 과시하고 자랑하며 온갖 불법, 탈법, 위법, 편법, 등등을 행하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경우들이 여과없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라. 4. 한국 기독교의 사명.


  기독교에 주어진 사명은 현존하는 모든 영역을 총망라하고 총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에게 하나님의 창조 영역 전체에 대한 <정복, 다스림, 관리-창1:28>의 사명을 부여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빛과 소금의 전사-마5:13-16>로 선포한 것과 <모든 족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고 훈련시켜 일하게 하라-마28:19-20>고 명령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 영역 전체에 대한 <정복, 다스림, 관리-창1:28>의 사명을 이행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빛과 소금의 전사들을 지도자로 양육하여 모든 영역에 투입시킴으로서 그들을 통하여 모든 영역들이 정화되고 성장 발전되게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기독교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였고 이탈하였다. 한국 기독교가 사명적 오류와 이탈을 하게 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기독교에 대한 탄압과 관련된다. 일제 치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칙>이라는 3류 종교적 개념을 내세웠다. 저들은 현존하는 모든 영역이 기독교에 의하여 관장된다는 <창1:28>의 원리와 사명을 이행하지 않고 회피하였으며 그러한 자신들의 과오를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이라는 3류 종교적 개념으로 합리화시켰던 것이다.

  일제 치하의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거의 대부분 해외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신학적 차원보다는 일제 치하의 한국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적 차원에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제기하였다. 특히 장로교 선교사들은 칼빈주의 신학 원리에 입각하여 종교와 정치의 <상호 독립> <상호 존중> <상호 지원> <상호 보완> <상호 견제> 원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일제 치하의 한국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그와 같은 신학원리를 삼가고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신학원리로 내세웠다. 이러한 역사적 오류가 해방 후에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선교사들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해방 후에도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원칙으로 세웠다. 그들은 정치는 정치가에게 일임하고 교회는 정치에 절대 간여하지 않으며 오직 복음전파 사업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기독교의 사명은 오직 복음전파로 한정되었다. 때문에 모든 기독교 사업은 오직 복음에 관련된 것으로 제한되었고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범위가 좁고 부분적인 것이 되었다.

  기독교에 부여된 사명이 구속사적인 것으로 축소되어짐에 따라 제한되고 축소되어진 교회사업은 자연스럽게 지 교회 위주의 사업으로 고착화되어 갔다.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빛과 소금의 전사들을 지도자로 양육하여 모든 영역에 투입시킴으로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창조영역들이 정화되고 성장 발전되게 하며 그와 같은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교회 연합적, 사업을 전개하지 못하고 각자 지 교회 차원의 사업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교회들은 교회가 부흥 성장하면 교회건축, 기도원 설립, 교회 공원묘지 설립, 선교비 지원, 선교사 파송, 등등을 진행하는 것이 지정된 사업과정으로 고착화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한 가지 추가하여 신학교를 설립함으로서 교회의 위상과 담임 목사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최고의 교회사업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마. 5.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류와 부패.


  한국 기독교 오류와 부패의 주범<主犯>은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다. 한국 기독교의 신학, 신앙, 인격, 사명, 등등이 전반적으로 오류 되고 변질된 근본 원인은 그것들을 가르치고 진행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류와 변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 기독교를 전체적으로 오류 시키고 변질시킨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실태를 상세하게 정리한다. 그러나 미리 밝혀 두거니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 전체가 오류 되고 변질되고 타락한 것은 아니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경륜 높은 신학을 갖추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고자 하는 충정으로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명예와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순전하고 아름답고 고결한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사명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밝히는 비진리적 지도자들은 한국 기독교 전체 지도자가 아니다.


(1) 1)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


  현대 한국 기독교가 불신 당하고 비판당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지도자들의 타락과 부패와 교권을 둘러싼 패거리 싸움질이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타락과 부패와 교권을 둘러싼 패거리 싸움질은 일제 치하에서도 6.25동란의 와중에서도 여전히 존재하였으며, 박정희의 유신 독재정권과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 치하를 거쳐서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점점 극심한 상황으로 치달려 왔다.

  현대 한국 기독교는 미래를 향한 어떤 장기적인 안목이나 비전을 계획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류, 비 진리, 등등의 수많은 고질적인 병폐 속에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상황들을 전혀 외면한 채 자신들의 부귀영화와 권력, 권위, 권세, 명예, 등등에만 집착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에 정치, 경제, 교육, 도덕, 윤리, 등등의 국가적, 민족적, 사회적 위기들이 닥쳐와도 심지어는 기독교를 위협하는 각종 이단주의 사상과 교회들이 발생해도 전혀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그러한 일들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으로 대하면서 자신들의 누리고 즐기는 삶과 부귀영화, 권력, 권위, 권세, 명예, 등등을 쟁취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이전투구를 계속하는 것이다.

  한국에 <I.M.F>라는 경제위기가 도래하였을 때 온 국민들이 일치단결하여 위기 극복을 진행해 나갔으나 그들은 금강산 유람선에 몸을 실었고, 이라크 사태로 인하여 중동 국가들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정부당국이 중동 지역 여행을 삼가 달라고 통사정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 순례를 고집하여 신자들을 이끌고 이스라엘 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각종 어려움으로 고난 받고 신음하는 이웃들이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의 신자들이 고난 받고 고통 받는 것조차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당연히 예우 받고 존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믿는다. 때문에 그들은 교회가 아무리 어렵고 성도들이 어려워도 자신들은 여전히 그러한 삶을 누리고 즐기려 한다. 그리하여 성지 순례를 빙자한 해외여행을 즐기며 심지어는 성경의 안식년 제도를 함부로, 마음대로 오류시켜 목회자의 안식년 제도를 만들어 지키고 누리고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접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기독교의 기본 원리들은 신자들의 사명이고 자신들은 <대접받고 사랑받고 섬김 받는> 대상이다.


(2) 2) 지도자들의 신학 부재.


  한국 기독교가 기독교 본래의 권위와 위엄을 상실한 채 비판, 비난, 외면, 거부, 무시, 당하는 이유는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 부재 때문이다. 역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기독교의 본질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일체를 깨달아 알고 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신학적 경륜을 갖춘 신학적 지도자는 별로 많지 않았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 부재 이유는 이미 앞장에서 말한바 있듯이 선교사들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적 저급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은 책임 소재를 1960년대 이전까지로 제한하고자 한다. 1960년대 까지는 일제 치하 -해방 후의 혼란기- 6.25 동란- 4.19 의거-5.16혁명, 등등의 연속적인 사건들 속에서 기독교의 정체성도 아울러 혼란과 갈등의 격동적 시대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1960년대부터 획기적인 신학적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기회와 여건이 제공되었다.

  비록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이 무소불위의 강압적 통치를 전개하였지만 당시의 정부는 국가 정부 체제에 도전하지 않는 한 기독교를 탄압하거나 강제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오랜 독재적 철권통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오히려 종교적 자유라는 당근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통치에 제동을 걸지 않는 한 오히려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해 준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부터 기독교 신학에 관한 세계적 자료들이 대거 한국에 유입되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학공부를 하려는 마음만 있었으면 차원 높은 신학적 경륜을 쌓을 수 있는 제반여건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비진리가 크게 양산되고 발전하는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학공부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는 차원 높은 신학을 갖추어 성도들의 신앙을 향상시키려는 사명감이 없었고 다만 성도들의 취향과 기호에 맞는 설교와 목회를 통하여 성도들의 숫자를 늘리는 목회에만 전념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이미 일제 치하에서부터 유포되고 있던 각종 자유주의 신학과 종말론 등등이 1960년대부터 더욱 극성스럽게 전개되었고, 순복음 교회와 부흥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복신학, 체험주의 신학 등등이 기독교 전체에 만연되었다. 이때에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자유주의, 종말론, 기복신학, 체험주의 신학, 등등에 심취하여 기독교로부터 이탈하여 그들에게 합류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신학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한국 기독교 신학 수준의 저급성과 오류 및 변질은 신학 부재의 신학교를 통하여 더욱 가중되었다. 1960년대부터 수많은 신학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고 그러한 와중에서 갖추어지지 않은 무자격, 사이비, 목회자들이 마구잡이, 무더기로 배출되어졌다. 신학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무자격, 사이비 목사들이 교수라는 명함으로 강의를 하였고 그들은 자신들의 명함을 빛내기 위하여 가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다. 그들에게는 신학이 없었기 때문에 신학적인 강의를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목회사상이나 방법을 소개하는 것으로 강의를 대신하였으며, 그것마저도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멀리 이탈되어진 3류 종교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학교들이 교세확장을 위하여 또는 개인적 유익을 챙기기 위하여 4년-2년 <심지어는 1년>에 이르는 교육과정을 통하여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무자격 목회자들을 무더기로 배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목회자가 된 자들은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3류 무당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21세기 현재에도 동일하게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21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불어 닥친 여자 목사 제도에 의하여 전혀 갖추어지지 못한 무자격 여자 목사들이 무더기로 배출된 것이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는 기독교 신학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무자격, 사이비 남녀 종교인들이 기독교라는 간판과 목사라는 명함을 내세워 기독교를 자처하고 있으나 그들은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3류 종교의 무당들에 불과하다.


(3) 3) 지도자들의 신앙 부재.


  현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앙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논리상으로는 분명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이란 신앙을 가르치고 심어 주고 성장 발전시켜 주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앙 부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그들의 신앙 부재를 말하는 근거는 그들의 현세적 삶에 대한 애착과 그들의 실제적 삶의 모습이다.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신앙적 모습이 전혀 없으며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적인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종들의 신앙적 삶에 대한 지표를 세워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온 인류의 메시야이심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검소하고 검약한 삶을 살았던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현세에 연연하는 삶을 버리고 천국에 대한 소망적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현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전혀 다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도 전혀 다르다. 그들의 삶은 분에 넘치도록 호화로운 경우들이 많으며 정도에 지나치도록 넉넉하고 여유롭다. 지도자들의 삶이 호화롭거나 넉넉하고 여유로우면 일반 신자들의 삶도 같은 것이 된다. 그러한 삶은 검소하고 검약한 기독교인들의 삶과 정면으로 반대되며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적 삶을 변질시키고 오류시키는 근원이 된다. 신자들은 현세의 삶을 누리고 즐기는 가운데 현세의 삶에 애착을 갖게 되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현세를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현세에서 누리고 즐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영적인 것이지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물질적 현세를 누리고 즐기게 되면 천국에 대한 소망적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므로 3류 일반 종교들의 현세적 신앙과 같은 변질적인 신앙을 형성하게 된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신앙 형태가 바로 이러한 변질적인 신앙 형태가 된 것은 지도자들의 오류되고 변질된 신앙을 본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궁핍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될 수 있는 한 궁핍하지 않고 안정된 삶을 살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의 삶이 궁핍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우고 복음사업에 지장을 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삶이 지나치게 풍요롭고 호화로운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기독교인들은 안정된 삶을 살되 사치스럽고 호화찬란한 삶을 살지 않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검소, 검약한 삶을 살면서 이웃들에게 베풀고 나누어 주는 자비와 긍휼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한편, 현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존재하는 3류 일반 종교들의 현세적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의 결여에서 그대로 입증된다. 그들은 중병<重病>에 걸리거나 또는 연로<年老>하여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도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천국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살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들은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며 살기 위하여 처절한 몸부림을 친다. 이러한 그들의 신앙적 모습은 기독교에 대한 회의<懷疑>와 불신앙으로 연계되어진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천국에 대한 회의<懷疑>와 불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현세적 재물에 대한 무한적인 욕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설교하면서도 자신들은 돈에 대한 무한적 사랑과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러한 그들의 신앙적 모습은 기독교에 대한 회의<懷疑>와 불신앙으로 연계되어지며 신자들의 신앙적 삶에 치명적인 오류를 제공한다. 목숨 걸고 돈을 사랑하는 지도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신자들 역시 돈을 사랑하고 욕심내는 신앙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4) 4)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욕심.


  한국 기독교의 병폐와 오류 중에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것이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은혜보다 목사의 법, 목사의 뜻, 목사의 권위, 목사의 은혜 등등이 더 받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목사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보다 더욱 높이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위와 권세를 행사하면서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모든 것을 가로채고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욕심과 그로 인한 오류와 만행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도 있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교 지도자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책망한 것<마23:1-2>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오류적 전통은 로마 카토릭의 교권주의자들에게로 계승되었다.

  로마 카토릭의 교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확립시키기 위하여 교황을 비롯한 사제들에게 무소불위의 권위를 부여하였고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직무와 권위까지 탈취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오류적 전통이 현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뜻 보다는 목사의 뜻이 우선되어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목사의 말씀에 더욱 권위가 있다. 그리하여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과 충성을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목사를 섬기고 목사에게 순종하고 충성하는 목사의 신자들이 되어 버렸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목사의 영광과 목사의 기뻐하심으로 바꾸어졌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목사의 나라와 목사의 의로 둔갑된 것이다.


(5) 5) 지도자들의 사명감 부재.


  하나님의 창조 영역 전체에 대한 기독교적 사명과 함께 목회자들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된 사명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종들을 섬기는 자로 여러 번 선포하면서 부활승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기라-요 21:15-18>은 모든 목회자들에게 일률적으로 부여된 목회적 사명이었다. 그러나 현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 부재와 신앙 부재는 그들의 사명감 부재로 연계되어졌다. 현대 한국 기독교 목회자 중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자들을 찾는다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이 힘들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망각하고 착각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위에 군림하는가 하면,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받들어 섬기라고 강요하고 심지어는 그들을 착취하고 그들에게 온갖 상처를 안겨 주는 것이 현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기까지 본을 보여 주면서 가르치고 명령한 섬김의 사명은 목사들의 통치와 착취와 군림으로 바뀌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상처받고 실족하여 슬픔과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종들을 세우신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종들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양들을 보내주신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자 하는 사명감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고자 하는 사명감도 전혀 없다. 그들은 종말론, 자유주의 신학 사상, 등등을 비롯한 각종 비 진리들이 시도 때도 없이 기독교를 엄습하여도 그것을 방관하며 기독교 지도자들이 불의, 부정, 부패, 타락을 행사하며 기독교를 오류 시키고 변질시켜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다.

  저들에게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는 사명의식도 없으며 후진을 양성하여 교회의 미래를 튼튼하게 하려는 책임의식도 없다.

저들은 오히려 바른 말을 하거나 또는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신자들이나 또는 바르고 실력 있어 교회로부터 존경받고 예우 받는 신자들은 목회에 걸림돌이 된다 하여 장로, 권사, 집사, 등등의 교회 중직에 세우지 않으며 교묘한 방법으로 따돌리거나 추방해 버린다. 어떤 자들은 아예 장로 권사 등등의 직분을 교회에 세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저들은 오직 교회를 자기중심으로 부흥발전 시킨 후 교회를 통치하고 다스리면서 교회 위에 군림하고 교회로부터 복종 받고 예우 받는 통치자적 삶을 구가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6) 6) 지도자들의 회개 부재.


  현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모순 중에 가장 큰 것은 회개할 줄 모르는 것이다. 저들은 일제 치하에서 반국가적, 반민족적, 친일 행위와 신사 참배를 비롯한 배교 행위를 하고서도 그것을 회개하지 않았고, 6.25동란과 자유당 정권,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정치자들과 야합하면서 온갖 불의, 부정, 부패, 타락을 범하고서도 전혀 회개하지 않았다. 저들은 자신들의 불의, 부정, 부패, 타락 등등으로 인하여 교회가 갈등과 혼란을 겪고 신자들이 고통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도 결코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교회를 분리하고 자기 유익을 챙겼다. 저들은 자신들의 불의, 부정, 부패, 타락 등등으로 인하여 노회, 총회, 신학교 등등이 갈등과 혼란을 겪고 구성원들이 고통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도 결코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새로운 노회를 설립하고 새로운 총회를 설립하고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면서 자기위치와 권력과 권위와 권세와 명예와 유익을 챙겼다. 저들에게 있어서 회개는 오직 타인의 것이요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자들은 자신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자신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핍박 받고 탄압 받는 순교자적 하나님의 종이었다.

  이와 같은 저들의 모습은 저들이 때때로 실시하는 범 기독교적 회개 운동과 회개기도 집회를 통하여 분명하게 나타난다. 저들은 대대적인 홍보와 광고를 통하여 범 기독교적 회개운동과 회개기도 집회를 실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형식적인 집회에 불과하다. 저들은 그 집회들을 주관할 때에 가슴에 꽃을 달고 단상에 위엄있게 좌정한다. 저들이 촉구하는 회개는 단상 아래에 있는 신자들의 회개이지 단상 위에 좌정한 자신들의 회개가 아니다. 물론 저들도 그 집회를 통하여 회개를 한다. 그러나 저들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의식적 회개, 형식적 회개, 거짓 회개이다. 왜냐하면 저들의 회개는 집회적 회개로 끝날 뿐 저들의 실제적 삶은 회개와 전혀 관계없이 동일하게 계속되기 때문이다. 저들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라면 저들의 사역현장, 삶의 현장이 오류와 타락과 부패에서 진리로 복귀되어야 한다. 그러나 저들의 사역 현장, 삶의 현장은 전혀 진리로 복귀되지 않는다.




http://www.제자훈련교회.com


출처 : 복있는 그리스도인
글쓴이 : 예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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