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선교

[스크랩] 전도에 대한 성경적 이해

하나님아들 2017. 7. 13. 23:41

전도에 대한 성경적 이해



1. 전도에 대한 성경적 이해


  전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먼저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기독교에 있어서 모든 신학의 재료는 결국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전도에 대한  이론과 실제적인 교과서는 성경을 떠나서는 찾을 길이 없다.

 

 

 


   1) 구약성경적 이해


  구약성경에서는 여러 이방인들에 대한 피나는 전쟁과 멸절에 대하여 은급하고 있으나 이방인에 대한 자비나 복음의 축복이 거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이와같이  구약성경에서는 전도에 대한 개념이 희미한 것으로 여겨 진다.  오직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들어서 선민으로 세워 하나님은 그들과 계약관계를 맺고 진행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를 모든 나라에 선전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부름받은 이스라엘은 오히려 악을 행하고 불순종과 불복종으로 선택의 목적에서 이탈하여  나갔다. 그러기에 구약에서의 전도의 의미는 상실되고 전도라는 목적에서도 위배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전도에 대하여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 나타난 최초의 전도는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 그 곳에서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을 때 이렇게 거절함으로 옥중에 매이는 몸이 된 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것이다. 요셉은 비록 죄인이 되어 옥중에 있을지라도 그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셔서 반드시 그 고난에서 자기를 구해 주실 뿐만 아니라 불행을 만난  모든  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란 것을 굳게 믿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러한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몸가짐과 마음의 자세로 본을 보인 것이다(창41:9). 요셉의 전도방법은 소극적이기는 하였으나 그 입장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단 바로왕에게 부름을 받아 해몽을 통하여 인정을 받고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실재성을 증거하였다(창41:25).

  또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가면서 하나님의  격노로 배가 침몰 직전에 놓였을 때에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욘1:11)고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만민이 믿어야 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이것 역시 요나가 하나님을 입증한 전도라 하겠다.

  신자가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불신자에게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다(겔33:7-9). 그 외에도 많은 선지자가 이방에 전도한 기록은 구약성경에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사14:28, 15:1-9, 17:1-3, 18:1-3,  19:24, 20:1-5, 21:1-9, 23:1-7, 나1:1, 슥11:1-3).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이방 열국을 위한 설교자, 예언자, 제사장이란 표본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능동적인 하나님의 현존은 온  세상 속에 계시고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표상이요 실상이다. 이스라엘의 위치는  세상 모든 나라들에게 계속 호소하는 데 있다. Blaw가 주로 제시하는 본문은 이사야 40-55장과 요나서이다. 이들에 대한 이해를 집약해 본다면 이사야의 메시지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되는 전도에 있지 않다고 본다. 즉 예언자로 개종에 그 뜻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선택된 백성의 존재 근거로 '존재함'에 있다고  하겠는데  이 존재함이란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데 있으며, 하나님이 그 백성과 온 세상을 아끼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 그 특유성이 자리잡는다고 본다. 바로 이런  '드러냄'이야말로 이사야가 드러내고 있는 전도적 관점이라는 것이다. 요나서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전도적 관심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본문으로 기억되어 왔으나 최근의  연구로는 단지 이스라엘의 폐쇠성에 대한 훈계 이상일 수 없다는 주장을  보이고  있다.

이들 성경 본문들이 보편주의라는 차원보다 더 높은 것을 관심한다고 보면 이사야나 요나는 그런 시각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며 구약에서 외부로 뻗쳐 나는 전도적 개념을 찾을 수 없다고 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이들 본문에 대해 전도적 동기를 캐려는 주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견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구약에서 살필 수 있는 전도의 개념은 하나의  논쟁거리로 남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이러한 전도에 대한 논점은 더 나아가서 종말론과 연결지어 살펴진다. 그러나 종말론의 핵심이 좁은 의미의 전도라는 차원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행위를 기다리는 차원으로 집약하고 있다. 세상을 복음화시킨다는 것은 말이나 행위로 될 것이 아니라 임재 즉 사람들 한가운데서  서로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생겨나는 사건(Matter)인 것이다. 그런고로   구약성경에서 전도의 이해를 요약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구원은 전 세계적 구원이었으며, 종말론적 사실로서의 이 구원은 구약의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기대될 뿐인데 이 종말론적  구원은  결국 메시야의 오심과 연결되어진다. 그런고로 메시야적인 구원은 설교나 증언의  결과일 수도 없고 하나님 자신이 주시는 은사인데 이 은사는 메시야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2) 신약성경적 이해


  [전도]는 그 자체에 근거를 두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를 둔다. 그런고로 전도한다고 하는 동사의 목적어로 '복음'이란 말을 하게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전도)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15:14)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하면 전도는 성립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전도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  시작되는 신약성서에서 찾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겠다. 신약성경적 이해에서 '복음전도'란  낱말의 정의로 신약성경 안에 나타난 다음의 다섯 단어를 올바르게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1) '유앙겔리조'라는 낱말은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우리 말로는 '복음'(Gospel)이다. 이 말은 헬라어 eu(좋은)와 aggelia(소식)라는 말에서 왔다. 앵글로 색슨어의 매우 동일한 언어로는  good(좋은)과  spell(이야기,말)인데 그것들이 결합되어 복음이 되었다. 이 낱말의 동사는 '복음을 전한다'(to gospelize)를 뜻한다. 이것은 신약 성경 안에 흔히 사용되었고 '선전'(propa-ganda)과 같은 뜻이다. 예수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말씀했을 때 이 낱말을 사용했다. 여기서 이 낱말의 뜻은 '기쁜 소식'이다.  신약성경적  관념에 있어서 복음 전도자는 왕국의 기쁜 소식을 퍼뜨리며 전파하는 자였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11:5,눅7:22)고 하였다.  예수는 이러한 메시야적 징후들을 열거하여 이것들이 지금 다가옴을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복음을 전파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연설이나 교훈에 그치지 않고 권위와 능력과 함께 선포함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  선포는  이적과 기사 특히 구원을 동반한다고 말하는 데서 극치를 이루고 있다(행16:17). 예수의 선포는 좋은 소식이었으며 동시에 그 분은 좋은 소식을 선포하시는 분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는 이것이 더 구체적으로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있다.

그가 이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은 그만큼 그것이 자신의 관심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관심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것을 미루어서 더욱 분명한 것이다(고전2:2). 그리고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롬1:16).     


   (2) '케룻소'라는 낱말은 예수님과 요한 그리고 초대 복음전도자들에게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9:35) 여기에서 케룻손이  사용되었다. 그 뜻은 '예고하다'(to herald)이다. 이것은 임금의 법령을 알리기  위하여 이 지방 저 지방으로 돌아다니는 전령자를 묘사하는 말이다. 왕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전령자가 대신 선포하는 것이다. 전령자는 왕의 뜻을 백성에게 바로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물론 일관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예고한다는 뜻 외에도 '크게 외치다', '이르다', '제외하다', '금하다', '명령하다', '흥정을 벌이다'라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이 낱말이 신약과 구약의 용법에 있어서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자의 영역,  하나님의 날에 대한 고지, 통치자의 선포와 성취를 가져오는 말씀이다. 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한 일종의 강의가 아니라 선포 즉 사건의 선포인  것이다.  예수께서 설교하셨다 함은 다른 뜻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알렸다는 것이다. 회개를  가능케 하는 요인은 인간의 죄 지음에 있다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급박함에 있다.  따라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 앞에서 이 알림은 사죄로 혹은 심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요소로 인해 선포자는 박해와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알리는 일은 계속 되어야 함을 말해 주고 있다.


   (3) '디다스코'라는 낱말은 예수님의 복음 전도를 설명함에 있어서 다른 어떤 낱말보다 더 자주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마9:35) 그는 대화 형식으로 위대한 영적 진리를 설명하고 해명했다. 진리를 알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분명케 하고 또 예증했다. 그는 능숙한 교사였다. 가장 훌륭한 복음  전도자들은 예수님의 본을 따라 가르칠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디다스코였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에 대한 여러 전승체들을 이러한 가르침의 영역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의 사역은 예수 자신의 유별난 것이기도바든 유대주의의  관행을  따라 이해될 수 있으며 이 지적은 옳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유대교회 랍비들과의  전적인 차이점은 자의식의 문제에서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규정하고  말씀을 듣는자를 압도하는 것이다. 율법의 마지막으로 나타난 신분으로서 절대적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것에서 유대주의 흐름에서 벗어나 계시는 분이라 하겠다.

  요한서신에서도 같은 차원의 증언을 들 수 있다.  요한의 특징적인 용법에서 직접적인 영감 혹은 계시를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바로 성경과 직접  관계되는 언급이라 하겠다. 이 말은 사도 시대에 들어오면서 예수의 구원하심을  선포하는 데로 관심이 쏠리고 있음을 관찰할 수가 있다. 때문에 구약의 주석이나 예수께서 행하신 새로운 율법해석은 서술하는 차원으로 한정될 수도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이  가르침의 극치는 예수를 선포하는 데서(In the kerygma about Jesus) 추구되는 회개에서 찾아진다.  이렇게 가르침은 점차 전도적 역동성을 띠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4) '마르투스'낱말의 뜻은 '증인'(witness)이다.


  "너희로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엄밀한 의미에서의 증인은 곧 증명, 증언이다.

'증인'이란 낱말에서 '순교자'란 뜻을 찾게 된다. 순교자는 자신의  피로써  자신의 증거를 뒷받침하는 사람이다. 신약성경적인 진정한 증인은 복음을 전파할 것이고 또 그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죽을 뿐 아니라 진리에  대한 모든 주장을 위하여 죽을 것이다. 그는 한 목표에 바쳐진 몸이다. 그 목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사를 내걸고 증인이 되는 것이다.

  마르투스의 기본적인 의미는 '기억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마음에 새기다' 등이다. 이 말의 동사 '마르투레인'은 언급한 바와 같이 '증언하다', '증언키 위해 나서다'는 의미로 전용되고 있다. 때문에 명사의 의미원으로 들어오기 이전의  일반적인 용법은 법률적인 것이었다. 어떤 사람의 신상에 모슨 일이 일어났는자를  증언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어떤 역동성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크리스챤은 자기들에게 새로운 삶을 가능케 했던 하나의  사실을 증언했으며 그 배후에는 당위성이 자리잡고 있는 깊은 만남의 체험이 있었던 것이다.


   (5) '마데테스'라는 낱말의 뜻은 '제자'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치라(제자를 삼으라)(마28:19).  희랍어의 '가르치다'는 우리 말로 정확하게 번역되지 않는다. '마데투사테'는 여기에  사용된 동사형이다. 이것은 '제자를 삼다'란 말로서 '가르치다'라는 낱말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제자를 훈련하는 것에 내포되어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룬다는 뜻이다.

 

  이상과 같이 전도에 대한 몇 단어에 대해서 이해하였는데 여러 낱말들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선전'이라고 할 수가 있다. Autrey는 "복음전도란 불타는 마음으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고 제자를 만들려는 뚜렷한 목적으로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의 긴박성을 느끼게 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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