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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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아들 2017. 6. 10. 00:50

종말론


 
종말론이란 신학적으로 정의할 때 '마지막 일들'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 개개인과 관련된 것이며(죽음, 부활, 심판, 내세가 포함된다), 이 세계도 관련된 것이다. 종말론은 '세상의 종말'(end of the world)이라고도 말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종말론'을 히브리어로는 베아하리트 하야밈으로 표기했다. 이것을 번역한 LXX(70인역)에는 헬라어로(in the last - or latter - days)로 표기하였다. 이것은 '마지막 날 또는 금후(今後)'(hereafter)를 뜻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광범위하게 그 정의가 내려지고 있다. 시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순환(cyclical)하는 것이 아니다(헬라어에서 말하는 종말론은 한 주기가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단순히 직선적인 것도 아니다. <종말론이라고 할 때에 어떤 선(line)의 마지막 지점(point)을 단순히 말할 수도 있다> 종말론이란 '죽음과 부활이라는 말로 표현될 때 이 의미 속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심판과 구원이 연결되어져야 한다(Charles Harold Dodd, According to the Scriptures, Nisbet, London, 1952, p. 129). 그래서 이 말은 "하나님의 구속적인 목적이 '역사의 마지막'(end of history)때에, 또는 예상되어지는 세계의 마지막 때에 완성되느냐 안되느냐를 말할때에 사용되어야 한다"(George Eldon Ladd, EQ, 30, 1958, p. 140). 이러한 완성은 최종적인 경우에 '꽃피고 싹이 나서' 완성되는 하나님의 계시된 목적이 달성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Ⅰ. 구약성경에서의 개인적 종말론

이 사상은 구약성경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죽음'(해당 항목 참조) 후에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이는 지극히 예표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실 때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은 뜻으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출 3:6)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눅 20:38)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는 구약 시대에는 실제로 현실화되지 않았다. 이것은 가나안 이교도들에게 대항해서 부분적으로도 있었다. 그 당시 구약을 보면 내세에 대하여 약간 강조하고 있다. 스올(She'ol)은 죽은 사람들이 어두움 속에서 함께 사는 넓은 곳으로 하계(下界)를 말한다. 거기에서 그들은 전생(前生)의 신분과 성격을 그곳에서 평가받는다. 생전에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사람도 스올(She'ol)에서는 노래하지 못한다(시 88:10). 일반적으로 스올은 여호와의 권한 밖의 곳으로 생각된다. 다만 소망적인 글만 찾아볼 뿐이다. 시편 73편이나 139편을 보면 저자는 생시에는 하나님과 함께 하다가 죽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을 자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8). 욥과 그 친구들도 사람이 죽은 후에도 다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욥 14:10). 그들이 그곳에서 생전의 고통을 당하지 않고 평안하게 지낼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욥은 다만 죽은 후에 육체가 썩은 후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말한다(욥 19:25).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할것이라는 말이다. 더욱 명백한 미래에 대한 기대는 부활로 연결된다. 에스겔이 보았던 골짜기의 죽은뼈들은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므로 뼈들이 살아났다. 여기에서 보여 주는 부활의 주된 목표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적인 것이다.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겔 37:11). 선지나 이사야도 부활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사 26:19). 그러나 이것이 민족적인 회복이라고 보는 데에는 논쟁이 있다. 개인적인 부활을 처음 밝힌 곳은 다니엘 12:2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이후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유대인의 전통적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옛날의 전통을 계승해 오는 바리새파를 반대한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는다. B.C. 168년 이후 안티오커스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하에서 고난을 받으며 순교했던 순교자들은 부활을 믿었다. '부활'(해당 항목 참조)에 대한 새로운 강조점도 있었다. 의인의 운명과 악인의 운명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낙원(Paradise)과 지옥(Gehenna)이다.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사이를 중간 상태(intermediate state)라고 한다. (눅 16:19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참조) 부활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이 있게 하였다(벧전 1:3).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딤후 1:10).

Ⅱ. 구약성경에서의 세계적 종말론

구약성경에서의 종말론은 '여호와의 날'과 그 개념이 밀접하다. 최초의 언급은 아모스 5:18-20에 있다. 아모스는 자기 나라 사람들을 책망하면서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께서는 경건한 자에게나 불경건한 자에게 나타내신다는 뜻이다. 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을 주시고 불의한 자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한 것이다. 택한 백성에게는 그들의 의무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주실 것도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여호와의 날에 대한 개념은 가을의 축제와 같게 생각하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왕권에 경의를 표하게 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호와의 왕권'에 대한 시에 많이 나타나 있다(시편 93:95-100편). 이 모든 시편은 여호와의 통치하심과 왕권에 대한 찬양으로서, 축제와 같은 표현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호와의 왕권을 찬양하고 있다. 그는 창조물 위에 주권을 행사하시며 철을 따라 풍성하고 비옥하게 다스리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며 인도하시며 다른 민족까지 다스리신다. 모든 영역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권은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는"그 날에 우주적으로 충만히 증거될 것이다(시 9:8, 96:13, 98:9). 시편 저자들이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왕권을 다방면으로 이미 증거되었다고 기술하고 있고, 그들이 알고 있는 이상(ideal)을 곧 보게 될 것이고 또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통치권이 이스라엘에게 지식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그를 알지 못하는 민족들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와 이상의 부동(不同)은 영원한 것이며 여호와의 날(on the day of Yahweh)에 그의 의로운 왕권은 우주적으로 알게 되며 땅(the earth)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사 11:9, 합 2:14). 후기 선지자가 말한 대로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다(슥 14:9). 여호와의 날에는 여기 저기서 여호와의 역사(役事)가 임하실 것이다(슥 14:3 이하). 여호와의 날에는 그의 백성들과 얼굴들이 싸우게 되고 그는 감람산(Mount Olivet)에 서시게 되며 승리하게 되실 것이다. 다윗의 왕권이 몰락한 데에도 상관되는 강조점이 있다. 다윗의 집(the house of David)은 지상이 있어서 거룩한 왕권을 대표한다. 그러나 그의 왕권이 분열되고 사회가 부패하고 외적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그의 찬란한 나라는 쇠퇴하게 되었다. 다윗의 왕권이 하나님의 왕권을 상징하는 것은 영원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도 쇠하여지는 것이다. 다윗의 집이 점점 낮아지고 낮아지므로 우리는 다윗의 계보에서 한 왕이 오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이 더욱 분명하게 대두하게 되었다. 다윗의 왕권을 회복할 한 왕은 다윗을 능가하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사 7:13 이하, 9:6 이하, 11:1 이하, 32:1 이하, 미 5:2 이하, 렘 23:5, 33:14 이하) 후기 유대의 많은 종말론 학자들은 다윗과 같은 메시야를 대망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다윗과 같은 메시야는 그의 백성들의 원수들을 정복하고 새로운 세대를 시작하며 왕좌에 올라 하나님의 영원한 대리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왕권은 제사장이나 선지자에 의해 장차 앞으로 일어날 것을 묘사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것이다. 예를 들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중간에 높이신다고 하신 것은 장차 그의 백성들이 회복될 대에 새로운 복지 국가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후에도 이와 같은 형태는 쿰란 문헌(Qumran Literature)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다윗과 같은 메시야는 장차 올 세대에 대제사장을 통해서 마음에 그려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니엘의 책에도 다른 형식의 종말론적 희망이 나타난다. 비록 히브리 왕권이 단절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왕권을 소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세상 사람들의 나라를 다스리시고 그의 뜻대로 이방 나라의 다양한 통치자들을 주관하셔서 그들의 흥망성쇠가 그의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지속된다. 이교도들의 지배는 제한된 것이다. 마지막 이교도 제국이 무너질 때 하늘의 하나님은 영원한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마지막 심판날에 대한 환상이 다니엘 7장에 묘사되어 있다. 영원하고 우주적인 통치가 세상 끝에 '인자 같은 이'(one like a son of man; 13절)가 나타나서 이루어지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the saints of the Most High)이 그를 섬기며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된다. (7:18,22,27)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은 계시적인 용어로 묘사된다(사 24:1 이하, 욜 2:30, 3:9 이하, 말 3:16-4:6). 비록 이러한 말은 포로 전 선지자들의 글에서도 발견된다(렘 4:23-26, 여기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할 것을 묘사하고 있다. 습 1:2 이하). 여호와의 날은 묵시적 용어와 그림 같은 묘사뿐만 아니라 그 사상(idea)을 전달하고 있다. 여호와의 날은 피할 수 없는 날이고 우리가 맞이하여야 할 날이라고 묵시록 기록자들은 날카롭게 강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몇몇 묵시록 문헌이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비난도 있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말이고 그 때를 제한하고 나눈 데서 기인한 것이다. 쿰란(Qumran) 문헌에는 종말이 기독교전(前) 세대의 마지막 시기에 있게 된다고 하였는데 흥미있는 말이다. ('사해문서' 항목 참조)

Ⅲ. 신약성경의 종말론 :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으로 옮겨서 볼 때 우리는 종말론적 어세가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된다. 구약성경의 종말론은 미래를 보는 것이며 그 중에 두드러진 점은 희망과 약속의 사상이다. 한편 신약성경에서도 이러한 것을 찾아볼 수 있지만 특별히 에수님 안에서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약성경들 가운데는 차이가 있는 내용의 책들도 있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그 문체가 매우 다르다. 그러나 뒤에 가서 보면 본질이 같은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책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을 들을 수 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계 5:5, 19:13) 예수님의 사역에서 성경적인 종말론이 결정적인 때에 도래한다고 증거한다. 마가복음 1:15에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사역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간략하게 말씀하신다. 이것은 다니엘의 환상이 성취된 것이다.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단 7:22). 하나님의 나라는 같은 의미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에 나타났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참조, 마 12:28). 그러나 다른 의미로는 '하나님의 나라'(해당 항목 참조)는 미래적인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 "나라이 임하옵시며"(눅 11:2). 하나님의 나라는 '권능으로'(with power) 임한다는 의미가 있다(막 9:1). 그리고 인자(人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 - advent - 을 의미한다. (막 13:26) 인자의 재림에 대한 교훈 - 하나님 나라 - 은 에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다. 특별히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은 후(막 8:29) 더 명백하게 되었다. 이 말씀은 다니엘이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one like a son of man)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는 예언을 이루는 것이다(단 7:13 이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교훈은 그의 사역을 완수하는 일이라 이것을 평이하게 가르쳤다. 예수님의 교훈은 다니엘의 예언에 대한 반복적인 의미가 있다.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것을 너희가 보리라"(막 14:62). 그는 종종 인자는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말했다. 그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순종하고 고난을 당할것을 말했는데 이것은 이사야 52:15-53:12의 예언과 일치되는 것이다. 인자(Son of Mn)와 종(Servant)을 실제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 새로운 변혁은 아니다(다니엘이 말한 '인자 같은 이'는 아마 초기의 한 사람일 것이다.
초기의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종에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에 있어서 인자와 종의 개념은 큰 차이가 있다. 그는 두 실재를 각각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두실재는 각각 자신이라는 것을 나타내었다. 다니엘의 "인자 같은 이"가 고대(古代)로부터 온 왕국으로 받아들일 때 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는 왕국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니엘 7:18 이하의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는 것을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그의 "적은 무리"(눅 12:32, 22:29이하)들과 함께 나누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능력으로 나라가 이루어지려면 인자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쳤다. 때때로 예수님은 생명(life)이라는 말씀을 하실 때 - 더 정확하는 영생(eternal life, 장차 올 세대에 있을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새로운 세대에 이루어지고 의인들이 사망으로부터 일어나 부활의 생명을 얻어 기쁨을 누리며 살기 때문이다. 사도들을 가르치신 것을 볼 때(여기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하신 내용을 종합한다) 영생이라는 것은 현재에서도 기쁨으로 살고, 장차에도 그렇게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국면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미 그의 부활의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며 비록 땅에 살고 있지만 영생을 얻은 것이다. 여기에는 간격이 있다(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advent에도 간격이 있다. 이간격이 끝나는 때에 '시간'(Time; 항목 참조) 위에 마지막 시간이 도래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현세(this age)에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내세(that age)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몸이 부활하기 전에 영생(eternal life)을 소유한 것이다. 특별히 바울과 요한은 '현실화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말했다. 신약에서 말하는 현실화된 종말론은 오늘날 말하는 종말론과는 다르며 장래에 있을 완전한 종말론과도 구별이 된다.

Ⅳ. 실현된 종말론

종말이란 무엇이며 종말론적 희망의 적합한 목적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고난과 승리가 없었더라면 완전한 종말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신약에서 말하는 '종말'은 실제적으로는 '마지막 사람'(the Last One)이 되는 것이다. - (중성)보다 (남성)이 더 좋다. 우리는 예수님을 '처음과 나중'(The First and the Last)이라고 호칭하는 것으로도 비교할 수 있다(계 1:17, 2:8, 22:13).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희망을 완전히 성취하셨고,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하여 '아멘'으로 화답하게 하셨다. 한 세대 혹은 두 세대 전 이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며 연구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수바이쳐(Albert Schweitzer)이다. 그는 '지나가는 종말론'(thorough going eschatology)을 주장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마지막 때(the end-time)에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믿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는 당신의 때가 절정에 이르지 않은 것을 아셨다. 그는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약속된 advent로서 먼저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세상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순환 작용에 있다고 하지만 그는 그것에 자신을 던졌고 그것을 막았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굴러가며 위대한 사람을 죽였지만 그는 영적인 지도자로서 그의 목적에 의해 역사를 통치하고 있다. 그는 승리했고 통치하게 되었다"(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Black, London, 1911, p. 369). 예수님의 사상과 메시지는 말하자면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이다. 종말론적이라는 의미는 그의날에 대한 노골적이며 계시적인 의미를 예시하는 것이다. 그의 도덕적 교훈은 중간기에 조금 있었다. 그의 사역에 있어 임박한 advent를 말한 것은 말기에 있었다. 그의 죽음은 종말론을 파괴한 것같이 보이지만 죽음은 이것을 확립한 것이고 천국의 선언인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지에 대한 슈바이처의 해석은 자유주의자에 대한 건전한 반작용으로 보고 있고 치우친 것으로 보고 있고 과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해석에 대해 많은 논란을 거듭하였다. 최근에 다드(C.H. Dodd)는 '실현된 종말론'을 말하였다(특별히 Britain 에서). 그는 "천국 비유" (Parables of the Kingdom, Nisbet, London, 1935)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비유는 천국에 대한 복음을 가르치실 때에 나타났다고 하였다. "사도들의 교훈과 그 발전"(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Hodder and Stoughton, London, 1936)이라는 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생애.죽음.부활 사건이 포함된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목록들을 잘 분리하여 서술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달하고 있다(pp. 46).
여기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언급이 없다. 복음의 역사적인 사건만으로서 종말론적 과정은 충분히 확립된다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 끝에 있을 징조에 대하여는 유대인이 돌아오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작품인 "그리스도의 강림" (The Coming of Chris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1)에 보면 다드 (Dodd)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미래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오신 것은 인간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위한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사건이다. 또한 역사 (history) 안에서 우리와 만나기 위한 것이고... 마지막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다". (p. 58) 다드(Dodd)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죠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는 "예수님의 비유"(The Parables of Jesus, S.C.M., London, 1954)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종말론에 대한 비유는 '현실화되고 있다'고 하였다. '때가 차매'라고 선언한 것은 예수님의 복음사역 때부터 듣는 자들에게 그대로 나타났다. (p. 159) 이 학파에 있어서 로빈슨(John Arthur Thomas Robinson)보다 더 적극적인 사상가는 없다. "말세"(In the End, Clarke, London, 1950)라는 책에서 그는 예수님의 재림은 장래에 있을 하나의 문자적인 사건만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상징적이며 신화적(Mythological)인 현현(顯現)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도 있다고 하였다. 언제든지 에수님은 사랑과 능력으로 오시며, 어디서나 예수님은 그의 임재를 나타내시며 십자가를 보여 주신다. 심판날은 매일 매일에 대한 극적이며 이상적인 날이다(p. 69). 마지막 작품 "예수님과 그의 강림" (Jesus and His Coming, S.C.M., London, 1957)이라는 책을 보면 그는 중대한 문제에 봉착한다. 예수님이 하늘에서부터 지상으로 다시 돌아오신다고 생각되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는가? 비평적 데이타에 의한 대답은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의 언급은 명백하게 나타났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네가 메시야냐 아니냐 하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I am). "내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 14:62)고 대답하셨다. 마태복음 26:64과 누가복음 22:69에는 "너희가 보리라"는 말씀 앞에 "이후에" 또는 "이제 후로는"이라는 말이 삽입되어 있다. 로빈슨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시편 110:1과 다니엘 7:13에 근거한 것이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예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인자가 세상에 오신다는 것은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에비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人子)가 오기 때문이다(눅 12:40, 마 10:23, 눅 18:8). 심판을 위한 임재는 '이후에' 되어지는 일일 것이다. 로빈슨은 '실현된 종말론' 대신에 '개시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 -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개시된 종말론 - 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과 부활이 그의 메시야적인 사역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아버지의 구원사역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P. 81). 죽음과 부활에 앞선 예수님의 사역을 로빈슨(Robinson)은 '예정적 종말론'(proleptic Eschatology)이라고 말했다(p. 101). 왜냐하면 예수님의 지상 사역중에 말씀과 사역이 장래의 될 일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생각함과 동시에 그가 장차 오실 것도 기대해야 한다.

Ⅴ. 재림

대제사장의 예수님이 세상에서 인자(人子)로 재림하느냐 안하느냐하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명백하다. 다니엘 7:13에 보면 "인자 같은 이"(one like a son of man)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자에게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다. 과연 예수님이 생각한 인자는 그 자신이며 하늘 구름을 타고 인자가 오는 곳은 하나님 앞(the presence of God)이 될 것으로 인용하였다. 그러면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어디에서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인가? 옛적부터 항상 있는 곳은 어디인가? 다니엘 7:9의 왕좌(thrones)는 하늘에 있다기보다는 지상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옛적부터 심판의 장소로 지상(on earth)에 위치한 것이다. 인자는 높은 자리에서 성도들을 심판하게 된다. 마가복음 13:26을 보면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 구절을 볼 때 의심할 것도 없이 인자가 오는 곳은 지구(earth)이다. 이는 그를 볼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때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elect)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게 된다(막 13:27). 마가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교훈이 현실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24-27절은 특별히 이차적인 것이고 초대 교회의 다른 양상이 또 있는데 그것은 데살로니가후서 1:6-10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 13장의 논쟁은 그렇게 빨리 해결되지 않았다. 본장에서 예수님의 교훈은 마가의 복음과 사전에 협력이 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잘 연결되지 않은 점이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24-27절은 확실히 구약에 나타난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에 대한 예언의 성취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가? 하나님이 그(him) 앞에서 우주를 구원하기 위한 조치로서 말이다. (George Raymond Geasley-Murray, A Commentary on Mark Thirteen, Macmillan, London, 1957, p. 67) 인자(Son of Man)가 구름을 타고 어두운 하늘에서 - 지구(earth)로 - 온다고 하는 데에도 반발이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 14:62에 납득이 될 만한 해석이 있는데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였다. 이 구절을 반대로 해석하였는데 "영국에 거의 새로운 정교회가 서게 될 것이다"고 하는 것이다(Beasley-Murray, op. cit., p. 91). 그러나 '새로운 정교회'(new orthodoxy)는 우주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휘슨(Joseph Edward Fison)은 마가복음 14:62은 에수님이 세상으로 다시 오시겠다는 명백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였다. (The Christian Hope, Longmans, London, 1954, p. 194) 만일 예수님이 세상으로 다시 오신다고 마음에 그리면서 말씀하셨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그의 재림의 사이에서 그의 재림을 마음에 그리면서 구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는데 있어서 우리는 현실 생활에서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생각과 장래에 완성될 예수님의 사역(work)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 자신이 가르칠 때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교훈과 사상에도 있었다. 우리가 신약성경 가운데서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나 미래의 종말론(future eschatology)을 분명하게 설명할 때 그 공정성을 상실할 때가 있다. 예수님은 그의 고난과 재림을 분리하여 생각하셨고 고난과 재림 때는 마가복음 13:10(복음이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과도 구별되는 것같이 보인다. 말세는 예수께서 처음오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오셔서 천국을 완성하였고 또 약속하였다. 그의 약속은 그의 생(生)과 사(死)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졌다. 그의 생과 사가 이루어짐으로 인해서 그의 약속이 진실로 성실하게 그리고 충실히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긴장의 암시는 큄멜(Werner Georg Kuemmel, Promise and Fulfilment, S.C.M. London, 1957)에 의해 이루어졌다. 큄멜에게 은혜를 입은 것으로 알려진 쿨만(Oscar Cullmann)에 의해서도 같은 주제가 조명되었다(cf. "The Return of Christ" in the Early Church, S.C.M., London, 1956, pp. 141 ff). 그는 D-day 그리고 V-day(승리의 날, Victory Day)에 대해서 행복한 생각을 많이 하였다. D-day는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였을 때의 일과 재림할때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다. 한번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그 마지막은 확실한 것이다. 궁극의 승리를 증거하고 축하하기 전에 그 간격은 지나가 버리는 것이고 그것은 불확실하고 중요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과 재림은 복음의 결정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결정적 사건의 결과이다. 이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일어난 일이다. 결정적 사건은 분명하지만 그 때(time)는 분명치 않다. 초림 때에(first coming) 예수님에 의해 그의 사역은 완성되었고 종말의 시대는 시작된 것이다. 죽임당하신 '어린 양'(해당 항목 참조)은 역사의 주(Lord)님이 되셨다는 예수님의 호칭이다. 여기에 대한 말씀은 요한계시록 5:5 이하에 나타나 있다. 종말론 시대의 시작은 데살로니가후서 2:8 이하에 잘 나타나 있는데 주 예수께서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이루어진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입증이 되었으나 그에 대한 증거는 우주적으로 드러나고 알려지지는 않았다. 현재 살아 있는 신자들은 "강림하여 나타나실"승리자이며 구원자인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현현과 승리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한 신약성경의 글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일까지 기록해 주고 있다. 지금 주님은 영광 가운데 계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히 2:8 이하). 그는 잠깐 후에 지체하지 않고 오시겠다고 하였다. (히 10:37)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의 백성들의 부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신약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인류의 부활과도 일반적인 관련이 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 주님은 세상을 심판한다. 그리스도인은 현세(現世)에서 부활을 경험하게 되며 반대로 그를 거부했던 사람들은 "벌써 심판"을 받는 것이다(요 3:18). 실현된(realized) 부활과 심판은 신자들의 장래 완성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심판을 강조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을 동일시하며(요 12:31) 신자들은 이미 구원(영생)을 얻은 것이다(요 3:16). 또한 마지막 날에는 그리스도에 의해 얻어진 유효한 부활을 하게 된다(요 6:39 이하).
그때는 요한복음 5:28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몇몇 소수의 복음주의자들은 특별히 재림과 요한계시록 20:2 이하의 '일천 년'의 시기를 연결시켜 활발히 연구하고 있고 마가복음 13:19 등의 '환난의 날'과도 연결시켜 성경적 종말론의 일반적 연구를 넘어서서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우주적인 효과가 확실히 기대될 때 복음의 필수 요건은 성취될 것이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1)

출처 : 하나님 내가 누구죠?
글쓴이 : 隸僕 (예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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