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사랑의 영원성(고전 13:8~12)

하나님아들 2012. 9. 7. 16:06

사랑의 영원성(고전 13:8~12)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8절로써 "사랑의 영원성" 을, 둘째 부분은,9~12절까지 "사랑의 완전성 혹은 온전함" 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영원한 것이며 그리고 사랑만이 완전한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사랑의 영원성에 대하여 생각하겠습니다. 바울사도는 "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 " 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 떨어진다" 는 뜻은 "잎사귀가 시들어 버린다" 혹은 "무대에서 배우가 사라진다" 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사랑은 시들지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모든 육체는 풀의 꽃과 같아서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아가페 사랑은 마르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고 변화가 심한 것이 사랑임을 모르세요? 그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며, 이기적인 사랑이며,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반면에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사랑은 아가페적인 희생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온 사랑,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 곧 아가페의 사랑은 결코 시들지 않습니다. "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허무한 곳이 있다면 인기 연예인들이 서는 무대일 것입니다. 무대는 그들이 추구하는 열망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하는 가장 고독하고 가장 불안한 삶의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비추는 조명은 "반짝" 하고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인기도 박수도 청중도 다 사라지며 커튼도 닫힙니다. 인기 연예인은 홀로 서 있고 그리고 어둠이 다가옵니다. 연예인은 반드시 사라집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온갖 소욕들은 모두 연예인이 서는 무대와 같은 것입니다. 다 사라집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간다”(요일 2:17) 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장 10절 이하에 보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옷과 같이 낡아지리라" 고 말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작은 산들도 녹을 것이라" (암9:13) 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고 선언합니다. 대영제국의 기사들, 일본의 산하를 누비던 사무라이들, 중국의 고고했던 황제들, 미 대륙 기척시대의 날쌘 총잡이들도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은 영원하다" 고 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습니다.

 

둘째로 사랑의 완전성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이 사랑의 영원성을 영적 은사들의 부분적인 순간성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열렬하게 은사를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예언을 사모하고 방언을 구하고 영적 지식을 얻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 말은 은사를 구하는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은사보다 더 구할 것은 사랑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영원하고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가치는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 권장합니다. 성경은 예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예언은 본질상 부분적이며 일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일단 성취되어 버리면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14장의 예언을 설교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도 잠간입니다. 주께서 오시는 날 이 세상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주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더 이상 설교가 필요 없습니다. 천국에는 예언자도, 설교자도 없습니다. 천국에는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있습니다. 예언이나 방언은 일시적인 은사이기에 폐합니다. 지식이라는 것도 보다 새로운 지식, 완전한 지식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갖가지의 은사를 이야기합니다마는 이들 모두는 하나 같이 일시적이요 제한적인 은사에 불과합니다. 그러고 보면 결국은 사랑만이 완전한 것이며 사랑만이 남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 외의 그 모든 것은 부분적이요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베드로후서 1:5~7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며 한층 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서 설명을 한다면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즉 덕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지식이 없는 덕은 사람을 해치며, 절제가 없는 지식은 교만하게 만들고, 인내가 없는 절제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경건이 없는 인내는 자기중심적인 완고함을 낳게 하며, 형제 우애가 없는 경건은 외식에 빠지게 되고, 진정한 사랑이 없는 형제 우애는 인간적인 사랑의 범위를 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에 가서는 "사랑을 공급하라!"며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어디까지나 사랑이 있고, 그 사랑 위에 세워짐으로만이 본래적인 의미가 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에 기록된 에베소교회를 향한 말씀의 내용이 그러한 것입니다. 너희는 수고도 있고, 인내도 있으며, 판단력과 정의감, 그리고 진실도 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사랑 없는 수고, 사랑 없는 비판, 사랑 없는 정의로 인하여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즉 “복을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내가 너를 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 없이는 그 어떤 고상한 명분이나 행위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하는 그 말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하는 것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에는 낙심함이나 좌절함이 없이 죽기까지 사랑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 보면 그 중 어느 한 제자도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베드로 같은 제자는 정신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 예수를 판 가롯 유다까지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허리를 굽히시어 제자들의 때 묻은 발을 하나씩 하나씩 씻겨 주신 것입니다. 이 장면을 사도 요한은 뒤늦게 말하기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변함없고 영원하며 헌신적인 사랑의 은혜를 크게 받아 끝까지 헌신적이며 변함없는 사랑 가운데 살아가십시다. 아 멘

출처 : 영성회복훈련원
글쓴이 : 양승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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