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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소 ->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

하나님아들 2012. 9. 6. 11:53

I. 인류의 타락과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 

 

사망과 생명의 법칙

 

인류의 구원은 인류의 타락에서 연유되었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영원히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을 것이다.

 

사망, 질병, 슬픔, 고통, 늙음과 같은 죄의 결과들도 물론 이 지구상에 전혀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사랑과 화평과 행복과, 영원토록 전진되는 기쁨과 발전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해와가 범죄함으로 그 모든 조화는 깨어지고 엄청난 어두움과 재난의 그림자가 이 세상에 드리우기 시작하였다.“죄의 삯은 사망”이다 (로마서 6:23).

 

그런데 성경은 인류의 조상 아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범죄하였다고 선고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 

(로마서 3:23).

 

물론 죄를 시작하고 그 결과로 죄에 대하여 약하여진 본성을 유전하여 준 총체적인 책임은 아담과 해와에게 있다고 하겠지마는 그러나 그들의 모든 후손들도 한결같이 자기들의 선택을 통하여서 죄들을 짓게 되었고 그리하여 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인류가 타락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는 어떻게 성립되는 것인가?

 

성경은 죄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려 주고 있다.

 

를 짓는 자마다 불법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한일서 3:4.

 

다시 말해서 죄란 하나님의 율법인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우주에는 법칙이 있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존재하는데는 원칙이 있다.

 

별들이 회전하는 괘도가 있고 생물들이 호흡하는 생성 원리가 있는 것이다.

 

이 법칙을 깨어 버리면 질서와 평화와 행복이, 아니 더 나아가서 그 생명의 존재 자체가 파괴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그리고 영적인 세계에도 법칙이 존재한다.

 

그 법칙은 어떠한 면에서 천연계의 법칙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법칙이 또한 자연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잘못된 도덕적인 법칙을 세우고 원자 폭탄을 만들면 자연계에 엄청난 파멸을 초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도덕적인 법칙을 어기게 되면 이웃들에게 내지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아니 더 나아가서는 온 우주에 큰 슬픔과 고통을 불러 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들인 사기, 절도, 강간, 살인, 불효, 시기 질투등의 두려운 결과들을 주목하고 살지 아니하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부, 곧 우주의 헌법인 계명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타락하게 된 것이고, 그 결과로 무서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계획

 

하나님께서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신 분부는 에덴 동산의 눈에 보이는 계명이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분의 지배를 받는데에만 안정과 평화와 행복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는 그 계명을 어기고 사단의 꾀임을 더 신뢰하였다.

 

마귀는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으로 고소하였다.

 

불공평한 분으로 고소하였다.

 

이 과실을 먹으면 하나님 자신처럼 눈이 밝아질 것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도 괜챦은 것이며 결코 죽지 않을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기만하였다.

 

인류의 시조는 마귀의 말을 하나님의 말보다 더 신뢰하고서 우주의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인 계명을 어기고 반역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가슴에 너무나 커다란 슬픔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제 선택을 하셔야만 하게 된 것이다.

 

범죄한 인간을 그저 대수롭지 않은듯 용서해 주어 버리면, 온 우주에 거하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될 것이고, 그 결과로 엄청난 반역과 파괴가 우주를 휩싸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인류를 그저 영원히 소망없이 죽어 가도록 내버려 두실 수는 도저히 없으셨다.

 

그러한 갈림길에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고 두번째의 은혜의 기간를 가지고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 주시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유 의지와 자유 선택권을 주시었다.

 

자유 의지와 선택이 없는 인간은 로보트요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이요, 또한 자유 의지와 선택이 없이는 성품의 발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울러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와 선택권을 주셨을 때에는 인간이 반역과 불순종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신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계획 속에는 인류의 타락의 가능성과 그 사후 대책에 대한 계획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죄한 인간들을 위하여 인간이 되어 오셔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시고 또한 그들에게 의로운 삶의 모본을 보여 주시는 일이었다.

 

그 일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생명의 댓가를 치루는 어마어마한 값을 지불해야 하는 일이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의 선택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것은 쑈(Show)가 아니었다.

 

성소 제도 속죄제를 공부해 보면 알게 될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참으로 우리의 두뇌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인류는 두번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하여 태어나게 될 수많은 자손들을 보시고 차마 인류를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실 수가 없으셨다.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는 내어다 보신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영원히 살게 된다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이 생명의 가치야 말로 이루 형용 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우리의 지식과 성품이 계속적으로 영원토록 발전하여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태어날 아담의 후손들에게, 구원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그 적당한 숫자가 차기까지, 또한 죄악의 역사를 용납하실 수 있는 기간까지 이 땅에 태어 나도록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류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허용하셔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지구상에 죄의 결과가 그대로 임하도록 허용하시는 일이었다. 그것은 공평한 처사였고 또한 사단과의 전쟁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온 천하에 드러날 때까지 그 공정성을 지키셔야만 하시기 때문이었다.

 

또한 죄와 반역은 악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 결과를 보여 주심으로 공개하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는 하지만 잠깐 살다가 죽게 되어있고 또한 죄의 결과인 슬픔과 질병과 늙음의 영향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유일한 이유와 목적은, 사는 동안 더듬어서 진리와 하나님을 찾아 발견하여 구원의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기회를 주시는데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17:25-28 참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생명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발견하고 구원의 선물을 받으면 우리는 영원히 사는 삶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아무리 어려운 시련들을 당하게 되든지 간에 불문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놀라운 기회에 대하여 영원토록 감사와 찬송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은혜의 기회는 놀라운 것이기 때문이다.

 

 

II.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대한 계시

 

인간을 다시 살게 해 주신 후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아담과 해와에게 주신 계시가 바로 성소에 대한 계시였다. 그것은 창세기 3장에 나타나는데,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기는 인류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죽 옷을 해 입히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죽 옷을 해 입히시기 위해서는 동물을 죽이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소의 의식 속에는 반드시 소나 양이나 염소등 제사에 바치는 동물의 희생이 수반되어야만 하는데, 그 동물의 죽음은 바로 장래에 십자가에서 돌아 가실 속죄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소 제도야 말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실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신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유일한 계시였다.

 

그러므로 죽음의 선고를 들은 아담이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성소 제도의 제사 제도에 대하여 알고 난 후에 감격하여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해와” 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산자의 어미”라는 의미였다.

 

지금 방금 사망의 선고를 받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인 성소 제도에 대한 계시는 그에게 커다란 소망을 안겨다 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내를 산자의 어미라고 불렀다.

 

시편 77:13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킹 제임스 성경 번역).“오 하나님이여, 주의 길이(道-필자 주) 성소에 있으니 누가 우리 하나님처럼 그렇게 위대한 하나님이리이까?”

 

성소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성소 제도는 인간들이 직접 그 의식에 참가하여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생생하게 보고 느끼도록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성소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은 우리들의 구원의 문제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III. 지상 성소 - 하늘 성소의 모형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를 지으라고 명령 하실 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식양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양식을 따라 지을지니라.”출애굽기 25:8,9.

 

이 성소는 하나님께서 인류와 다시 같이 사실 수 있는 계획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고안 되었다.

 

이 성소 제도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생애와 그 분의 사역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 가셔서 하실 봉사 사업까지를 상징하는 기구들과 예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속의 기구들 하나 하나, 의식 하나 하나, 그리고 색깔 하나 하나 마다에 인간을 구속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가르침과, 또한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해야 할 구원의 단계들을 상징하는 표상들이 알알이 맺혀져 있다.

 

이 성소의 모형은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양을 계시 가운데 보여 주시고 그 모형대로 짓도록 모세에게 지시 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8:5.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도 모세가 지었던 성소 모양 비슷한 참 성소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성소 제도야 말로 하늘이 내어 주신 우리 인류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이 아닐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을 인간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계획하심으로써, 인류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앞으로 몇번에 걸쳐서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함께 연구해 보도록 하자!

 

 

1. 성소의 모형에서 찾는 구속의 의미

 

성소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세 단계의 사역을 통하여서 이루신다는 뜻이다.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의 대 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 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 ...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 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 6:19,20; 7:24,25; 8:1,2.

 

예수께서는 우리의 대 제사장으로서 성소 뜰에서, 첫째 칸인 성소에서 그리고 둘째 칸인 지성소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속죄 사업을 이루시는 것으로 표상되어 있다.

 

성소 뜰에서 죄인이 끌고 온 희생 제물을 죽이고 번제단 위에 태우는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인류를 위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시어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돌아 가실 것을 상징한 것이요,

 

첫째 칸 성소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로 가시어 당신께서 흘리신 피를 힘입어 회개하며 나아오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시며, 죄를 사하시고, 나아가서는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나누어 주시는 일을 행하신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인데, 그 일은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해인 A.D. 31년 부터 진행해 오셨다고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11-12.

 

둘째칸 지성소는 예수께서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서 인간을 심판하시는 마지막 구속의 국면을 상징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의 세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들을 위한 구속 사업의 세가지 국면들을 상징하고 있다.

 

 

 

2. 성소가 보여 주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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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 제도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는 지성소이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아가야 하는 최종 목적지가 지성소라는 말이 된다.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성소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들어가 그 분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섭리들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으로 표상되어 있는 것이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다.

 

그 언약궤 속에는 십계명이 들어 있는데, 그 법궤의 뚜껑을 우리는 속죄소 (시은좌) 라고 부르며 그 속죄소 양편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그룹 천사 둘이 서 있었다 (출애굽기 25:17-21 참조).

 

그 속죄소에서는 하나님의 임재인 세키나 영광이 비추이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감히 지성소에 들어 가지 못했다.

 

죄있는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면 죽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제사장만이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서 일년에 한번씩만 대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앞에 설 수가 있었다.

 

성소제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류를 구속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구원의 청사진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지막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 곳이 그리스도인들의 최종 목적지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두번째 임하게 되실 때에는 더 이상 인성을 쓰신 분이 아니라 영광의 하나님의 본체 그대로 임하실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계시 가운데 외쳤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낮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요한계시록 6:15-17.

 

인류는 누구나가 다 언젠가 하나님의 면전에 서야 한다. 그 앞에서 인간은 그 영광의 광채에 타서 죽게 되던지 아니면 그의 앞에 서서 즐거워하며 다시 이별이 없이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든지 결정되는 것이다.

 

무엇이 그러한 차이를 만드는가?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문제의 해결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소 제도를 고안 하실 때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서 결국에 인간이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설 때에 그 영광에 의하여 타서 죽지 아니하고 당신과 함께 영원히 다시 살 수 있을지를 가르치시고자 계획하신 것이다.

 

성소 제도의 제일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를 보고 배우는 것이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를 지으라고 분부하셨는데, 이 성소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실물 교훈으로 주신 것이다.

 

아담과 해와는 범죄하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대화하고 그 분의 영광의 광채 앞에서 살았었다.

 

하나님의 세키나 영광은 그들에게 생명과 활력소의 원천이 되었고 하나님의 임재는 그들에게 큰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주었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여 죄를 짓자 마자 갑자기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을 파괴하는 대상으로 변하고 그들은 두려워서 피하여 숨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속성이 바뀌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변하여 타락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할 수 없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나올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음의 예를 들어 보도록 하자.

 

몇년 전에 집 앞에 있는 채소 밭에다가 배추를 심었다. 가을이 되자 그 배추들은 싱그럽고 푸르게 폭이 넓은 배추들로 성장하였다. 나는 이번 해에는 좋은 김치를 많이 담그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아내가 지금 당장 추수해 들여오자는 제안을 무시하고, 오늘은 피곤하니 일찍 자고 내일 아침에 뽑자고 말하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후 곧바로 배추가 있는 밭으로 가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간밤에 갑자기 이른 된 서리가 내린 것이 아닌가? 배추들이 다 꽁꽁 얼어 붙어 있었다. 나의 실망은 말할 수가 없이 컸다. 얼마나 공을 드려 키운 것인데.... 그런데 그 때 막 동쪽으로 부터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어제까지 그렇게 싱그럽던 배추들이 시들시들 녹아 내리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 김치를 담글 수 없는 배추로 다 시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바로 그 전날 까지만해도 태양 빛은 배추들에게 있어서 생명과 활력소의 원천이었었다. 그러나 갑자기 태양 빛은 그 뜨거운 열기로 배추들을 파괴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태양 자체에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라 간밤에 된 서리를 맞은 배추들의 본성이 더 이상 뜨거운 태양열을 견딜 수 없는 상태로 바뀌어져 버린 것이다. 그때 나는 그 큰 실망 속에서도 한가지 커다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해와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생명과 활력과 행복의 원천이었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하자 마자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없는 것을 알고 피하여 도망을 하였다.

 

그 이후로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을 죽이는 것이 되어 버렸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범죄하였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영광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니라, 범죄한 인류의 본성이 타락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 수 없는 존재로 변하여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여 다시 당신의 영광 앞에서 죽지 아니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는 인간 속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만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지성소 즉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기 전에 먼저 성소 뜰과 첫째 칸인 성소를 거쳐 가면서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성소제도를 고안하여 주신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성소 의식을 따라가면서 성소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3. 성소로 나아 가는 길

 

제일 먼저 성소로 나아가는 첫 단계는 죄인의 마음 가운데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범죄하였을 때에 즉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을 때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심판과 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 때에 죄인은 마음 속의 평화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죄의 용서와 기쁨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성소로 가져갈 흠없는 동물을 고르게 되는데, 그것은 죄 없으신 흠없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시에 흠없이 순전한 우리의 전적인 헌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려고 나아 갈 때에는 온 마음을 다하여서 진실된 회개의 심정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나누어진 반쪽 마음을 받으실 수가 없으시다.

 

이제, 죄를 진 자는 제사 드릴 제물을 가지고 성소로 향하여 걸어가게 되는 데, 그 때에 그는 성소를 바라보며 희망을 돋구워 주는 세가지 물체를 보게 된다.

 

하나 흰 세마포로 만들어진 성소 바깥 벽인데, 그 흰 색깔은 죄인이 성소 안에 머물러 있는한 하나님의 의로 가리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큰 위로를 안겨다 주게 된다.

 

또 한가지 번제단에서 타오르고 있는 연기인데, 그것은 죄인이 죄를 자복하기만 하면 자기의 죄가 연기처럼 올라가 버리고 말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 눈에 들어 오는 것은 성소 지붕위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었다. 그것은 성소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다는 엄숙한 마음을 갖게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두렵기만한 분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인간들 가운데 머물기를 즐거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인 사실을 일깨워 준다.

 

성소에 다다르자 성소의 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것은 문이라기 보다 휘장이었다.

 

그 휘장은 붉은 색, 청색, 자주색으로 짜여져 있었다.

 

붉은 색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 곧 구세주의 흘리실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청색은 그 분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온전하게 지키시는 충성스러운 순종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청색은 언제나 율법에 대한 순종을 상징하였다.

 

또한 자주색은 왕족들만 입는 색깔로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상징한다.

 

아울러 이 색깔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고 그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서 하늘 왕국의 자녀들이 된다는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다.

 

양을 끌고 온 죄인은 벌써 이러한 자세한 교훈들과 배려를 통하여서 깊은 감동을 받으며 성소 뜰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를 맞아 들이는 제사장은 그를 친절하게 안내하여 들이며 가져온 제물이 흠이 없는 것인지를 먼저 확인한 후에 성소 의식 절차를 설명하여 주게 된다.

 

이제 다음 기사에서 성소 뜰 안에서 벌어지는 제사 광경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하자.

 

그 성소 뜰의 경험은 바로 우리의 회개의 경험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하나님께서 실례로 보여 주신 것이다.

 

 

1. 성소의 제사 제도들 - 그 첫 번째인 번제

 

성소 뜰에 들어간 죄인은 제사장의 안내에 따라서 가져간 희생 동물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그 머리에 얹고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에 우리의 죄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옮겨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죄인은 칼을 꺼내어 양의 목을 따서 죽이는 것이다. 바로 우리의 죄가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게 만든 것처럼....

 

그런 후에 (제사 제도에 있어서 크게 네가지 종류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성경 레위기서에 기록된 순서대로 첫번째는 번제, 두번째는 화목제, 세번째는 속죄제, 그 다음으로는 속건제로 나뉘어 진다.

 

A. 번제는 헌신과 희생을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요,

 

B. 화목제는 회개한 죄인이 감사와 서약의 의미로 드리는 제사이고,

 

C. 속죄제는 말 그대로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희생의 제사요,

 

D. 속건제는 속죄제와 같은 종류의 제사로서 손해 배상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제사이다.

 

그 첫번째인 번제는 개인적으로도 드리는 것이었지만 특히 아침 저녁으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드리게 되어 있었는데, 이 번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경험해야 하는 거듭남의 경험이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가르쳐 주는 제사이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그는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 1:3-9

 

성소에 있어서의 의식 하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구원의 경험과 단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번제는 회개와 거듭남의 경험을 실물교훈으로 보여주신 제사제도이다.

 

죄를 고백한 죄인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위에 있는 번제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대로 희생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일이 있게 된다.

 

왜 그렇게 지시하셨을까?

 

그것은 회개하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선이나 의에 대하여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기의 의의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어야 겠다는 소원을 상징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추함과 속절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겸비의 표현이다.

 

그리고는 배를 가르고 그 속에 있는 모든 내장을 꺼내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물로 깨끗하게 씻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죄를 고백하였지만, 혹시 또 마음 속에 아직도 숨어 있는 죄가 있을까봐 자기의 마음을 활짝 열어 젖히고 “하나님! 혹시 내 속에 무슨 다른 죄가 있는지 살펴 주세요. 저는 하나님께 전적인 마음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생각과 묵상이 주님께 열납되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속의 내장들과 창자들까지도 다 물로 깨끗하게 씻는 것이다.

 

성경에서 물은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그래서 회개한 죄인은 죄만 고백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낱낱히 고백한 뒤 포기하여 내어버리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의 말씀을 따라 잘못된 부분들을 시정하고 개혁하는 일이 반드시 뒤 따라야 하는 것이다.

 

형식적인 회개와 쉽게 넘어가는 표면적인 회개가 아니라, 정말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죄를 포기하여 버리며 잘못된 생활들을 진리를 따라 바꾸고 개혁하는 철저한 회개를 가르치시기 위한 제사가 곧 번제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을 비추어 볼 때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회개가 얼마나 피상적인가!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얼마나 엉터리인가!

 

오늘날 기독교회의 진정한 문제점은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진정한 거듭남의 경험이 없는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열납받는 회개를 드려야 한다.

 

 

2. 속죄제

 

속죄제는 죄인이 자기의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로서 가장 중요한 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죄없으신 하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는 사실을 실물교훈을 통하여 분명하게 죄인에게 실감시키는 제사이다.

 

구속이란 영어로 “Redemption”인데, 그 낱말은“값을 치루고 도로 사옴” 혹은,“값을 치루고 도로 물러 줌”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피는 그 생애에 따라서 가치가 생기는 법이다.

 

죄를 지은 우리들의 피는 죄를 속하는 힘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죄를 한번도 지은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보혈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 샘물이 되는 것이다.

 

율법을 제정하신 창조주의 죄 없으신 피가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흘려짐으로 우리가 다시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게 된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소 뜰에서 동물을 죽여서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려야만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도록 계획 하셨을까?

 

피 흘리는 장면을 보기 좋아하시기 때문이었을까?

 

그럴리가 없다.

 

하나님께서 피흘리는 제사의 법칙을 주셨던 이유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용서가 무슨 댓가를 치룸으로 가능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깊히 인상 짓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회개하는 죄인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너그럽게 용서 하신다.

 

그러나 그 용서를 위하여서 갈바리의 십자가의 댓가를 지불하셔야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동물이 피를 흘리는 장면을 직접 목도하도록 성소제도를 고안하셔서 죄인이 구세주의 사랑과 희생에 대하여 뼈저린 감사의 마음을 느끼게 됨으로, 그 결과로, 인간들이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도록 만드시기 위하여 제사제도를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성소를, 동물을 잡는 도살장처럼 만들어 버렸다. 제사제도를 마치 죄를 용서받는 면허증처럼 사용하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죄를 그치게 되기를 바라셔서 제사제도를 주신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다시 죄를 지으면 양을 한마리 또 끌고 오면 된다는 식으로 죄를 짓기에 과감하여 졌던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용서를 마치 죄를 짓는 면허증인양 생각하고 죄 짓는 일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처럼....

 

아담과 해와가 범죄한 직후의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인류의 시조와 하나님 사이에 있었을 법한 다음과 같은 대화를 상상하여 보도록 하자. 이 이야기는 필자가 만든 것이지마는 분명히 그러한 내용의 말들이 오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범죄한 후 떨고 서 있는 아담과 해와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아담아! 네 뒤에 있는 동물들을 보느냐?”“예! 하나님! 두 마리의 어린 양들이 뛰 놀고 있군요!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동물들 중 하나입니다.”“그 양들을 불러보렴!” 아담과 해와가 휫파람을 불자 그 두마리의 어린 양들은 껑충 껑충 뛰어와 한 마리는 아담의 품으로 또 다른 한 마리는 해와의 품속으로 안긴다. 그 때 하나님의 아들께서 다시 명령 하신다.

 

“아담아! 저기에 있는 돌 두개를 집어 오너라!” 영문도 모르고 돌들을 집어오는 아담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아담아! 그 돌들을 서로 부딪쳐서 깨뜨려라!” 아담이 돌들을 깨뜨리자 하나는 칼처럼 날카롭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다시 명령하신다. “아담아! 이제 그 돌로 그 어린 양의 머리를 힘있게 내리 치거라!” “하나님! 저보고 이 양을 죽이라는 겁니까?” 놀라서 쳐다보는 아담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더 엄숙하게 말씀하신다.

 

“그렇다!”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할 수 있는가! 아담은 명령에 따라 돌을 들어 양의 머리를 내리 쳤다. “더 세게!” 더 세게 내려친 돌을 맞은 죄없는 양이 바르르 떨면서 눈을 크게 뜨며 피를 흘리며 죽어 간다. 죽음의 장면을 처음으로 목격한 아담은 두려움에 질려서 양의 시체를 땅 바닥에 떨어뜨리 며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겁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아담아! 아니다. 너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앞으로 너희를 위하여 내가 저렇게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야!” 구속의 계획을 한 눈으로 알아차린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외친다.

 

“하나님! 오, 하나님! 그렇게 하시지 마십시요!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오, 주님! 우리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무참한 죽음을 당하셔야 속죄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부터 죄를 정말로 미워합니다. 어떻게 주님의 마음에 고통을 다시 가져다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오, 하나님!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정말로 미워합니다! 다시는 그러한 일을 반복 할 마음이 없습니다!”

 

속죄제에서는 희생 동물 전체를 번제단에서 태우는 것이 아니라 그 기름만 잘라내어서 태우게 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기름은 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시편 37:20). 그 나머지 시체는 이스라엘 진영 밖에 지정된 장소에 내다가 불로 소각해 버렸는데, 그것은 죄와 분리되지 아니한 죄인들은 결국 새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유황 불로 타서 멸망받게 될 것을 상징한 것이었다 (요한 계시록 20장 참조).

 

속죄제에 있어서,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이 죄를 범했을 경우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그 둘을 동일한 크기의 죄로 다루었는데, 그러한 경우에는 제물의 피를 성소 안으로 가져가서 지성소 앞에 있는 휘장 앞 바닥에다가 일곱번 뿌리게 하였다.

 

그 피를 통하여 죄인이 고백한 죄는 상징적으로 성소로 옮겨지게 되는데, 제사장이 그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중보의 기도를 올려야 죄를 용서 받게 되는 것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레위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의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장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또 그 피로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그 기름은 다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르되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레위기 4:16-20.

 

성경은 제사장이 성소에서 속죄한즉, 다시 말해서 중보기도를 드려야 죄가 사함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 성소 안에 뿌려진 피는 죄인의 죄가 성소 안으로 옮기워진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궁극적으로 죄인이 고백한 죄가 하늘 성소에 있는 죄의 기록책으로 옮기어 져서 하늘 성소에 계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죄인을 위하여 중보기도하셔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일련의 과정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는 일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 끝나버렸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인류의 죄를 위한 용서를 마련하신 것이요 또한 구속을 시작하신 것이다.

 

성소의 번제단으로 표상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의 죽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마련하신 이후, 당신 자신의 피를 가지고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 우리들을 위하여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중보하시며 당신의 보혈의 은혜와 능력을 제공하고 계신 것이다.

 

성소제도에 있어서 희생 제물의 피가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자세히 살펴 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피 속에 상징적으로 전가된 죄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했을 경우나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범죄했을 경우는 피가 휘장안으로 옮겨져 뿌려지는데, 평민인 개인이 범죄했을 경우에는 피가 성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뜰에 있는 번제단 주위에 뿌려 졌으며 죄는 다른 방법으로 옮겨져 중보의 기도를 드리게 되어 있었다.

 

왜 그랬을까?

 

거기에는 참으로 감동적인 속죄의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다.

 

 

두 가지 경우의 속죄제

 

속죄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하여 보여주신 실물교훈이다.

 

다시 말하자면, 속죄제는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마련된 제사제도이다.

 

구약 시대에 어떤 사람이 죄를 범했을 경우, 먼저 그 죄인은 양을 끌고 성소로 가야만 하였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죄를 지은 인간은 하늘에 계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가 범한 죄를 가지고 믿음의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어린 양되신 예수의 피의 공로를 힘입어 나아가서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면, 그 죄인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어린양에게 전가되어서 죄인이 그 지은 죄로부터 용서받고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 속죄제가 상징하는 바이다.

 

성소 뜰에서 행해지는 제사제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 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무한한 댓가를 치루셔야 했는지를 인간의 우둔한 마음 속에 깊이 심어주고 가르쳐 주기 위하여 마련하신 상징적 제도이다.

 

특별히 속죄제의 경우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가 더욱 깊이 담겨 있다.

 

속죄제는 다른 제사와는 조금 다르게 디자인 되었다.

 

속죄제를 드릴 때는 동물의 전체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제물의 기름만 도려내어 태우게 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희생 제물의 기름은 죄 또는 죄인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시편 37:20참조).

 

그런데 속죄제에 있어서 한가지 다른 제사들과 현저하게 다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 했을 경우와 이스라엘 백성 전체 회중이 함께 범죄했을 경우에 제사하는 방법과, 어떤 개인이 범죄 했을 경우의 제사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가지 경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희생 제물의 피를 처리하는 면에 있어서 뚜렸하게 나타났다. 제사장이 범죄 했을 때나 온 회중이 함께 범죄 했을 때는 속죄제의 제물의 피를 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휘장 앞에 일곱번 뿌렸다.

 

이러한 속죄제의 과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죄인이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죄를 고백하면 상징적으로 그의 죄가 흠없는 희생제물에게 옮겨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희생 제물이 흘린 피를 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휘장 앞에 뿌리는 것은 그 희생 제물의 피에 전가된 죄가 성소 안으로 옮겨지는 것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인류의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셨던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자신의 피에 전가된 인류의 죄를 가지고 하늘 성소로 올라 가셔서 하나님 앞에 중보 기도하시는 중요한 사실을 예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범죄했을 경우에는 색다른 절차를 밟도록 지시하셨는데 그 특이한 속죄제의 절차가 우리로 하여금 갈보리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뼈저리게 이해하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의 속죄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에 앞서, 한가지 간단한 사실을 짚고 지나가 보도록 하자!

 

믿음은 선물이다. 왜 그럴까?

 

어린아기가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긴 어머니의 손길을 매일 경험하고 나면 자연히 어머니를 신뢰하고 믿게 된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가 믿음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을 경험한 후에 자연히 생겨난 반응인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믿음이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돌봄의 결과로 생기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해 할 수 없는 크신 사랑과 희생을 보여 주셨기에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바로 우리의 믿음인 것이다.

 

속죄제는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그 크신 사랑을 이해케 하기 위하여 디자인 하신 제사이다.

 

속죄제는 우둔한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속죄의 희생과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디자인하신 제도였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서..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에야 비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를 시작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속죄제에 있어서 한가지 흥미있는 일은 개인이 범죄하였을 때에는 속죄제물의 피가 성소에 들어가 휘장 앞에 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특이한 면이 우리에게 한가지 큰 깨달음을 주게 된다.

 

그것은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피가 성소 안으로 가져가 휘장 앞에 뿌려지지 않으면 제사장이 죄인이 고백한 그 죄를 성소 안으로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중보의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제사장은 죄인이 고백한 죄를 위하여 성소 안에서 중보하는 기도를 할 때에만 죄의 용서가 있다고 레위기서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레 4:20,26,31,35).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어도, 당신의 피를 가지고 죄인이 고백한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대신 속죄하는 중보의 역활을 하늘에서 해 주셔야 우리에게 죄의 용서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이 사실은 히브리서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히 8장~10장 참조).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아무리 십자가 위에서 귀한 보혈을 흘려 주셨어도, 죄인은 회개와 고백으로 주 앞에 나와야 하며, 또한 예수께서 그 죄인의 회개의 기도를 용납하시고 그를 위하여 대신 흘려 주신 보혈의 은혜를 나누어 주시며,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중보의 기도를 대신 드려 주심으로써, 그 죄인을 인정해 주셔야만 용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제물을 가지고 성소 뜰에 들어와 제사를 드린 사람은, 제사장이 그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 휘장 앞에 뿌리고 대신하여 중보 기도를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오히려 제사장은 그 속죄제의 피를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 뿔에만 바르고 그 주위에 피를 뿌린 후 나머지를 땅에 쏟아 버리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었다.

 

그 때에 속죄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아니, 제사장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피를 그냥 성소 뜰에 쏟아 버리다니요! 소 안에 들어가 휘장 앞에 뿌린 후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셔야 제 죄가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놀란 죄인에게 제사장은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형제여! 속죄제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특별히 교육시키고자 하시는 중요한 교훈을 담아 두셨습니다. 이 속죄제에는, 장래에 올 메시야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하여 가르치기 위한 귀중한 실물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형제가 죄를 고백하였을 때에 형제의 죄가 어디로 갔습니까?”

 

“예! 저의 죄가 속죄 양에게 전가 되었지요!” “그렇소! 맞습니다. 그러면 이제 잘 지켜 보시지요!” 그렇게 말하고는 제사장이 그 속죄제물 짐승의 살점을 조금 칼로 도려내어 입에 넣고 씹어서 삼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이렇게 질문하였을 것이다.

 

“형제여! 이제 당신의 죄가 어디로 갔습니까?” 그 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차린 죄인은 떨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이다.

 

“네! 제사장님! 저의 죄가 바로 당신의 몸으로 전가되었군요! 상징적인 의미에서, 내가 지은 죄가 바로 당신의 죄가 되어 버렸군요!” 그때 제사장은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이제 나는 당신의 죄, 아니 내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그 죄를 가지고 성소 안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당신의 죄, 아니 내 죄를 위하여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드릴 것입니다.” 죄인은 눈물이 함박고인 눈으로 성소 안으로 들어 가는 제사장의 뒷 모습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가르쳐 주는 얼마나 힘있는 실물교훈인가! (레위기 6:25-30참조).

 

 

속죄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의미가 과연 무슨 뜻일까?

 

베드로 전서 2:24은 우리에게 힌트를 제공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당신의 몸으로 지실 수가 있었는가?

 

몸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다는 의미가 과연 무슨 뜻일까?

 

11-23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우리 몸에 어떠한 반응이 나타나는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형제에게 커다란 거짓말을 하였는데, 길을 가다가 그 사람과 마주쳤다고 하자.

 

그 때에 우리의 몸에 어떠한 반응이 일어나는가?

 

갑자기 불안과 초조함이 엄습하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며 식은 땀이 흐르면서 두려움이 마음속에 밀려 오지 않는가!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이 가슴을 메워 오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죄를 지시는 경험을 겪으신 것이다. 우리들의 죄가 마치 당신께서 지으신 죄들처럼 그 분 위에 엄습하여 왔다. 한번도 죄를 지어 보지 않으신 분께서 죄책감을 우리를 대신하여 경험하시게 된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느끼는 몸의 반응들이 갑자기 예수께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인류의 수없이 많은 죄악들이 한꺼번에 예수님의 영혼 속으로 밀려왔기 때문에, 그 분의 마음은 그 때까지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의 그 고뇌는 말로 다 형언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당신 자신의 몸으로 짊어지신 것이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5:21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시편 22장 전체와, 40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계실 때에 당하신 심적 고통이 어떠하였는지를 미리 예언하여 준 장들이다.

 

시편 40:12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당하실 깊은 고뇌를 예언하면서 “나의 죄가 나의 머리털 보다 많”다고 표현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셨다.

 

도대체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 하늘을 우러러 볼 수도 없고 머리털보다 많다고 하셨을까?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대신 지셨던 우리들의 죄들을 말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라는 영어 성경의 표현은 “Therefore my heart failed me” 이다.

 

다시 말해서“나의 심장이 멈추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꼐서는 십자가의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들의 죄를 지시는 영혼의 고뇌 때문에 심장이 파열되어 돌아가신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의 장면을 찾아보면, 큰 소리를 지르시고 고개를 떨구시며 갑자기 운명하셨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성경은 로마 군병이 예수께서 죽으셨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그분의 심장이 파열되었다는 의학적인 증명이다. 죄로 인한 깊은 고뇌 때문에 심장이 터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심장이 피를 생성하는 일을 멈추자 혈청과 혈구가 분리되어서 창에 찔린 상처로 흘러 나왔던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부르짖으신 말씀 가운데 우리가 잘 기억하는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이다. 그 뜻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는 과정에서 우리 죄의 악함과 두려움을 짊어 지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신 것이었다.

 

우리의 죄 그 자체가 되어 버리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비없이 자신이 범한 죄의 댓가를 있는 그대로 당하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은 “죄를 대신 지셨” 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느끼지 않고 사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갑자기 인류의 죄를 지시고 우리들의 죄 그 자체가 되심으로써, 죄인인 우리들이 당했어야 할 그 형벌과 심판을 대신 지신지게 되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만을 느끼게 되셨고 완전히 버림받은 느낌만 가지게 된 것이었다.

 

주님의 눈 앞에는 이제 모든 소망이 사라졌고, 마치 대신 지신 우리의 죄 때문에 영원히 아버지와 분리되어 완전히 멸망당할 것처럼 느끼게 되신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순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게 되신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예수께서는 한가지 선택을 하셔야만 하였다. 마귀는 지금 이렇게 죽으면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고 멸망 당해 버릴 것이라고 그분의 귀에 속삭임으로써, 예수님을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에는 이전에 들었던 하늘 아버지의 모든 약속도, 삼일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도 다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졌고, 더 이상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처럼 느끼졌다.

 

또한 당신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메달고 조롱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순간에도 당신 자신이 온 인류를 대신하여 영원히 심판을 받고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인류를 포기 할 수 없다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나타내시었다.

 

당신 자신이 영원히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대신 죽어줌으로써,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겠다는 놀라운 사랑을 실현하셨던 것이다.

 

인간의 부모의 사랑에서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희생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지만, 예수의 죽음의 선택은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 상태에서 이루어졌던 것이기 때문에, 그 종류가 전혀 다른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고 믿을 때에는 그 지은 죄에 대한 댓가를 받지 않고 용서를 받는 것은 예수께서 그 댓가를 이미 십자가에서 치루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비록 인류가 타락하였지만, 그분의 사랑은 결코 인류를 그냥 죽게 내어버려 두실 수가 없으셨다.

 

온 우주의 천사들은 십자가 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러한 사랑의 장면을 지켜 보면서 감탄하였을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이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보답하여야 하겠는가?

 

독자들이시여! 예수께서는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깊이 명상하라.

 

십자가에서 치루어진 희생과 죽음 때문에, 우리에게 값없는 용서와 구원의 소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또한 인류를 위한 값없는 용서와 구원이 마련되기 위해서 치루어진 댓가는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이다.

 

십자가는 쑈(show)가 아니다.

 

당신의 생명까지 포기할 정도로 보여 주신 엄청난 사랑의 현시이다.

 

우리가 2000년전에 갈보리 산 위에 서있지 않았다고 해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지 내가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자!

 

우리의 죄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순교자의 죽음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순교자의 죽음도 우리에게 영생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인류에게 다시 한번 영생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죽으신 대속의 죽음이었다.

 

속죄제는 바로 이 감동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 보고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될 때에야 비로서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이해나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믿음은 우리의 온 생애를 바쳐 하나님을 순종하며 따르기를 원하도록 만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기별의 중심이다.

 

성소제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진리가 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속 사업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용서받은 죄인이 다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게 되기 위하여 회복되는 과정이 또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감리 교회의 창시자이며 위대한 개혁자인 요한 웨슬레가 부르짖었던 성령의 열매이다.

 

그는 성령의 열매인 변화된 거룩한 생활이야말로 구원의 필수 요건이라고 가르치는 성화의 가르침을 설교하였다.

 

성화에 대한 요한 웨슬레의 그러한 가르침은 성소에도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를 실물교훈으로 보여 주시기 위하여, 또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어떠한 사역을 하셨으며, 현재에는 어떠한 일을 하고 계신지를 가르쳐 주는 청사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성소제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성소제도는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희생과 대속의 죽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성소 뜰을 지나서 들어가게 되는 성소의 첫째칸에서는 구속 사업의 두번째 국면으로써 예수님의 중보의 사역과 인류에게 구원의 은혜를 나누어 주시는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거룩함

 

먼저,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본 다음, 성소제도가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실물교훈을 주고 있는지 살펴보자.

 

사도행전 26: 18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라는 말씀을 유의하여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전체 66권을 통하여서 성화 즉, 거룩한 생활과 변화된 순종의 생활을 구원받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경험해야만 하는 과정으로 소개하고 있다.

 

“...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데살로니가 후서 2:13)라는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의 거룩하고 깨끗한 생활을 강조하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5:26,27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거룩함을 이상한 기분이나 황홀경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상태를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고 말씀하셨으며(요한복음 14:15),

 

사도 요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라고 말씀하였다(요한일서 5: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그 결과로 거룩하게 되며,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에베소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인 삶을 설명하여 주고 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 

에베소서 2:3,4,5,10.

 

 

성소를 통해서 알아보는 거룩함

 

이제, 성소로 돌아가서 성소제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의 의미를 살펴보자.

 

성소 제도는,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십자가)에서 어린 양(그리스도)을 잡아 죽이는 일(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통하여 진정으로 회개하고 죄를 버리기로 결심한 죄인이, 이제는 믿음으로 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하게 사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막의 첫째칸인 성소 안에는 금 촛대와 떡상과 분향단이 있다.

 

첫째칸인 성소 안에 있는 기구들과 제사장의 활동은, 성소 뜰에서 죄를 회개하고 버림으로써 용서받고 의인이 된 사람이, 이제 어떻게 하면 받은 바 그 의로운 삶을 계속해서 지켜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르쳐 주며, 또한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하여 은혜를 통하여 도와 주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 용서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범했던 죄의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 승리하는 생애를 살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란 용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힘을 말한다.

 

은혜는 습관적인 죄의 속박으로부터 죄인을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한다.

 

은혜는, 죄로 인한 영적 죽음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아니하는 사람을 영적으로 부활시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단어이다.

 

디도서에서 바울은 은혜를, 가르치시고 역사하는 하나님의 힘으로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디도서 2:11~13

 

그래서 히브리서 4:14~16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 갈 것이니라.”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아서 의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죄의 유혹과 마귀의 공격은 우리를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범했던 죄악의 습관들이 우리를 다시 찾아와서 시험을 주며, 날마다 우리를 괴롭히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와 꼭같은 시험을 당하셨으며, 고난 가운데서 살아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날마다 당하는 시험들의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를 도우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당하는 시험과 유혹도 받으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한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묘사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서 담대히 은혜의 보좌”가 있는 곳인하늘 성소로 나아가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하늘 성소 안에 우리를 시험에서 도와줄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성소 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승리의 생활을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고안하신 하나님의 아이디어들이 나타나 있는데, 성소의 첫째칸 안에 있는 금촛대와 떡상과 분향단은 그러한 하나님의 아이디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기구들이다.

 

성소 안에 있는 기구들은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순결한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소의 첫째칸에 있는 기구들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던 것은,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두가지 금속의 합금인 놋으로 만들어졌던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성소 뜰에서 회개의 경험으로 번제단에서 죄를 태우고, 물두멍에서 깨끗하게 씻어서 순결하게 된 그리스도인은 그 다음 단계로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활동적이고 순결한 믿음의 경험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성소 안의 기구들이 순금으로 만들어 졌던 것이다.

 

 

 

 

세 가지 기구에 담겨져 있는 의미들

 

촛대 :

 

자 이제, 성소의 첫째칸 안에 있는 세가지 기구들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자.

 

금으로 만들어진 촛대에는 올리브 기름이 들어 있어서 그 기름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촛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상징하며, 촛대 안의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성령의 감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영생의 진리를 가르치는 거룩한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앞 길을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주는 등불과 같다.

 

성소 안에는 외부로부터 다른 빛이 들어오게 하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오직 촛대만이 성소 안에 있는 빛의 근원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어떤 다른 빛이 우리를 인도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것이다.

 

한 줄기의 빛이 칠흙같은 어두움을 내어 쫓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의 쓰레기들로 마음이 혼돈되고 복잡해 있을 때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는 한마디의 성경 말씀이 모든 잡된 것들을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퇴치해 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명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유지 할 수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또한 거룩한 열매를 맺는 성화의 길을 걷고 싶은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읽는 대신에, 정직한 양심으로 읽어라. 성령께서 그대의 무지하고 둔한 마음에 깨달음을 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생활을 위하여 준비해 두신 유일한 방법이다.

 

떡상 :

 

떡상도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하늘을 향하여 여행하는 나그네에게는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필요할 뿐 아니라, 나그네에게 계속해서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음식도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며 사단과 죄의 유혹을 이기게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다 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라고 말씀하시면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한 것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고 말씀하시었다(요한복음 6:63).

 

먹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먹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만나가 하늘에서 내렸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는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하여 반드시 먹어야 하는 하늘의 만나이다. 하늘의 만나를 제대로 먹지 않는 그리스도인마다 지치고 피곤하여 쓰러지게 될 것이다.

 

 

분향단 :

 

분향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드리는 중보의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아무리 의롭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열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분향단의 향은 특별하게 만들어 졌고, 다른 목적으로는 절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분향단에서 올라가는 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의로운 생애와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릴 때에 예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소원에 당신 자신의 흠없는 의를 섞어서 아버지 앞에 올리심으로써,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도록 중보하고 계신 것이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우리가 도움을 요청 할 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시험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드는 당신의 은혜와 능력을 공급하여 주시고 있는 것이다.

 

분향단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를 상징하고 있다.

 

그 분께서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시험 받는 자를 돕고 계신다.

 

그러므로 성소는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의로운 생애를 유지해 나갈 수 있으며, 어떻게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 말씀의 연구와 기도이다.

 

마음을 하늘로 여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기 위하여 두손을 모으는 기도!

시험당하고 어려울 때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매일 읽고 명상하며 우리의 마음 속에 담아두는 만나를 먹는 생활!

 

무엇이 진리이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께 가납되는 생활을 살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성경만을 유일한 빛으로 삼아서 연구하는 생활!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를 성화케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성소의 최종 목적지인 지성소

 

이제 결론적으로 지성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지성소 안에는 두 돌비에 새겨진 십계명을 보관하는 법궤(언약궤, 속죄소, 증거궤)가 있었으며, 법궤 위에는 시은좌(은혜를 나누어 주는 곳)가 있어서,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인 쉐키나가 비쳐 나오고 있었다.

 

그 곳은 아무나 들어 갈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면 즉시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결하게 준비된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완전한 정결과 도말을 위하여서 기도하였다.

 

그 날을 성경은 대속죄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성소는 성소제도의 결론이요, 최종 목적지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그 지성소에서 다시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십계명)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0-22).

 

성소의 구조와 그 제도에 새겨져 있는 성소 뜰에서의 죄의 용서(칭의)와 성소 안에서의 성화의 경험은, 결국에는 인간을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국면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며 순종하는 거룩한 생활을 살도록 가르치시고 힘 주시는 이유는, 결국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자로 회복시키시기 위한 것이다.

 

구원은 회복이다.

 

다시 원래의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야 한다.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십자가는 죄인의 마음에 죄를 미워하는 심령을 심어주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좋아하는 새로운 마음을 창조해 준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를 아무리 용서해 주신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계속적으로 똑같은 죄를 범하며 계속적으로 불순종하는 생애를 고집한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분의 용서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이유는, 이제 다시는 그러한 죗된 생애를 살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생애를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시면서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실 때에 아울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그분을 위하여 살 수 있는 능력을 용서와 함께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경험하게 되는 재 창조의 경험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될 것을 명하시었다.

 

그들은 일년 내내 죄들을 고백하며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면서 용서를 받아 왔다.

 

그러나 매년 마지막 날인 대속죄일 날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들을 그들의 회개가 정말 참된 것이었는지, 지금도 여전히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정말로 죄를 참회하고 버렸는지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일을 하셨다(레위기 16장 참조).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유대력의 마지막에 있는 대속죄일은 심판의 날로 이해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각각 심판하시는 날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5:28,29.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사도행전 17:31.

 

“네가 어찌하여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로마서 14:10.

 

“하나님 앞과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디모데후서 4:1.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베드로전서 4:17.

 

성소제도는 우리에게 결국은 모든 인간이 누구나가 다 한번은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을 엄히 가르치고 있다.

 

물론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가리움을 받고 있으며 은혜를 통하여 구원의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우리가 예수의 손을 놓지 않는한 주께서 우리를 결코 놓치 않으실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자!

 

이제 곧 머지 않은 장래에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태어났던 모든 인류를 각각 그 동기와 마음을 살펴서, 그들의 믿음의 동기가 참된 것이었는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말씀을 따라 살아 왔는지 살아오지 않았는지를 헤아리시기 위하여 마지막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서 그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대속죄일 날에는 아사셀 염소에게 모든 죄를 다 옮기어서 씌우고 광야로 데리고 나가 죽게하는 일이 있었다.

 

이미 다 용서한 죄를 왜 그렇게 하는 것이었을까?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죄에 메달려 있기를 선택한 죄인들은 최후의 날에 멸망당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변화되지 못한 죄인을 다시 하늘에 들이심으로써 또 다시 하늘에 전쟁과 반역이 일어 날 수 있는 가능성을 용납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 자신이 과연 진실된 마음과 동기로 하나님을 옳바로 섬기고 있는지 엄숙하게 살펴 볼 시간이다.

 

그대는 과연 지금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현주소를 잃어 버렸다.

 

하늘을 향하여 막연하게 기도드리지만, 예수께서 하늘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모른채 방황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현주소와 그곳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사업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창조 후 지금까지 성소를 통하여 인류의 구속 사업을 이루어 오셨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즉시로 시작된 것이 성소 제도인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성소의 모양과 형태가 아래와 같이 바뀌어졌지만, 성소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존재해 왔다.

 

그리하여 마지막 시대인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당신의 마지막 봉사를 끝내고 있다:

 

1. 원시 성소: 아담 이후부터 노아 때까지
2. 제단 성소: 노아 이후부터 모세 때까지
3. 성막 성소: 모세 이후부터 솔로몬 때까지
4. 성전 성소: 솔로몬 이후부터 예루살렘성 멸망까지
5. 하늘 성소: 그리스도의 승천(A.D.31년) 직후부터 재림 직전까지

 

노아가 쌓았고, 아브라함이 쌓았던 제단 성소 시대가 지나고, 모세 때에 이르러 성막 성소 시대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으라.”출애굽기 25:8.

 

그런데 모세에게 보여주신 지상 성소의 원형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그 대답을 분명하게 찾게 된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copy)과 그림자라.”히브리서 8:5.

 

바울은 지상 성소를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라고 표현했는데(히브리서 9:23), 이 말은 모세가 지은 성막 성소의 원형이 하늘에 있다는 뜻이다.

 

또한 지상 성소를 가르켜 “그림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것 역시 이 땅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드는 원형이 하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언제 지상 성소의 원형인 하늘 성소에 들어 가셨나?

 

A.D. 31년이었다.

 

A.D.31년은 무슨 해인가?

 

예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신 해. 그런데 예수께서 승천하신 직후, 곧바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이 그 사실을 증언하였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속죄를 이루신 후 부활하셔서 하늘 성소로 들어가셨다.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던 A.D. 31년 이후, 그리스도께서 봉사해 오신 하늘 성소의 모습을 살펴보자:

 

신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늘 성소

 

하늘 성소(첫째칸)의 모습

 

1. 성소에서 봉사하시는 그리스도: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요한계시록 1:12~13.

 

2. 성소에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니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요한계시록 8:3~4.

 

하늘 지성소(둘째칸)의 모습

 

1. 요한이 본 언약궤: “하늘에 있는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법궤)가 보이며”

요한계시록 11:19.

 

2. 요한이 본 하늘 지성소: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지성소)의 성전이 열리니” 요한계시록 15:5.

 

예수 그리스도, 지금 그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늘 성소에서 인류의 죄를 위해서 중보하시며,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구원을 간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의 은혜를 나누어 주심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고 계신다.

 

하늘 성소에서 우리 각 개인을 위한 변호사로서, 그리고 중보자로서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좀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분의 도우심을 청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하늘 성소에서 벌어지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변호사로서 일하시는 그분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들 각 개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심판하는 과정은 매우 정확하고 실제적인 과정이다.

 

우리 각 사람의 구원 문제가 하늘 성소에 계신 하나님 앞에 상정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 각 개인을 위한 변호사로서 일하신다.

 

마지막 시대에 최고의 변호사를 앞장 세우고 하늘 법정에 들어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가장 복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였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기록책에 기록되어 있다.

 

아담의 이름도 기록책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예를 통하여 심판을 실제적으로 생각해 보자.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께 범죄하였던 기록이 적혀 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의 기록이 함께 쓰여져 있다.

 

예수께서는 즉시로 죄의 기록책과 하나님 사이에 들어가셔서, 자신의 피묻은 손을 들어 올리면서 “아버지여, 나의 피를 보소서. 아담은 회개하였으며, 나의 희생은 그의 죄값을 치루었나이다” 라고 변호하신다.

 

그러면 주변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천사들이 증인의 자격으로 “그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그대로 두십시요”라고 큰소리로 증언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하나씩 지성소에서 벌어지는 심판대 위로 올라가게 된다.

 

사울의 이름도 불리워질 것이다. 그는 처음에 선한 왕으로 시작했지만, 자존심과 이기심이 그의 마음을 채우면서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책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슬픔으로 머리를 숙이시면서 그를 위하여 변호할 수 없음을 통탄해 하신다. 예수께서는 사울을 위하여 “나의 피”를 주장할 수 없다. 그리하여 사울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완전히 지워지게 된다.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들의 심판이 차례로 진행되다가, 언제가는 기록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열려질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을 것이다.

 

이제 곧 심판이 끝마쳐지면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런 왕과 심판자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첫번째 오셨을 때에는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지만, 두번째 오실 때에는 의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상을 주고 악인들에게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주기 위해서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언젠가 마지막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의 운명이 결정될 때, 예수께서는 하늘 성소에 서서 자신의 피묻은 손을 들어 올리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면서,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하고 ...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롭게 하라”라는 선언과 함께 인류를 위한 은혜의 시간을 마치실 것이다(요한계시록 22:11).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구원받을 수 있는 날”이다.

 

기록책의 마지막 장이 덮힐 때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가 끝마쳐지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지금 그대를 위한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그대의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려는가?

 

샬롬~


출처 : 예수 생명
글쓴이 : loudcr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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