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랜스 라킨-1
세대란 일정한 기간을 의미하며, 세대주의란 하나님이 인류를 역사적으로 나누어 다른 법을 가지고 통치한다고
믿는 신학 경향입니다.
예를 들어 아담시대에는 선악과 따 먹지 말라는 것이 계명이었고, 노아 시대에는 방주를 만들고 타라는 것이 계명이었고,
모세 이 후 구약시대에는 율법이 계명이었으며,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믿고 거듭남으로써 구원 받습니다.
시대에 따라 계명은 다르지만 계명을 지키면 구원이고, 지키지 못하면 심판이란 점은 같습니다.
또한 새로운 계명이 생기면 이전의 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법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세대주의의 공통된 특징으로는 성경의 자의적 풍유적 해석을 배격하고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과, 말씀의 대상을
유대인, 교회, 이방인으로 구분한다는 것과, 전천년주의의 실제적인 천년왕국을 고대한다는 점입니다.
에베소서 1/10 이는 때가 찬 경륜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나 자신 안에 있는 것들까지도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함께 모으려는 것이니라.
클라랜스 라킨은 세대주의의 핵심적 신학자로 불리며, 원래는 기계 기사였으나 34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본업을 버리고 신학 교육도 받지 않은 채 복음사역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성경 속에서 수 많은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증거하기 위해 예언과
관련된 도표를 만들기 시작했고, 1915년에 '경륜적 진리,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Dispensational Truth,
God's Plan and Purpose in the Ages)를 출간하였습니다.
출판된 책은 당시 교인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고, 여러 번 재판되었습니다.
클라랜스 라킨은 설계하면서 얻은 기술을 이용해 매우 정교하고 치밀한 많은 도표를 그려 넣었습니다.
경륜적 진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꼭 읽어야 할 매우 훌륭한 책입니다.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매우 상세히 기술하였으며, 이스라엘의 회복도 성경을 바탕으로 예언하였습니다.
Dispensational Truth (경륜적 진리)
부제: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목적 (Clarence Larkin 저)
A. 1부
B. 2부
6. 악한 현재 세상
7.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적 사역
1) 개 요
2)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사역
3) 창조후부터 성육신 때까지의 그리스도의 사역
4) 성육신후부터 승천 때까지의 그리스도의 사역
5) 미래의 그리스도의 직분과 사역
8. 성령의 시대적 사역
1) 성령의 시대적 사역
2)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
3) 세상에서의 성령의 사역
9. 유대인들
1) 유대인들에 관하여
2) 유대인들의 과거
3) 유대인들의 현재
4) 유대인들의 미래
10. 이방인들
1) 이방인들
2) 느브갓네살 왕의 꿈
3) "네 짐승들"에 대한 환상
4) "숫양"과 "숫염소"에 대한 환상
5) "북쪽과 남쪽 왕"에 대한 환상
6) "칠십 주"에 대한 환상
11. 교 회
1) 교회에 대한 잘못된 개념
2) 교회란 무엇인가?
3) 교회의 기원
4) 교회의 사명
5) 교회의 미래
12. 왕 (THE KING)
C. 3부
13. 왕 국 (The Kingdom)
1) 왕국의 출현과 연기
2) 천국의 신비와 비유
3) 왕국의 모습
14. 영의 세계
15. 영성술
16. 부 활 들
1) 민족적인 부활
2) 영적인 부활
3) 실제적인 부활
4) 부활의 방법
17. 심 판 들
개 요
1)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대한 심판
2) 그리스도인들의 행위에 대한 심판
3)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
4) 이방 국가들에 대한 심판
5) 죄인들에 대한 심판
18. 사 탄
개 요
1) 사탄의 기원
2) 사탄의 현재와 그의 왕국
3) 사탄의 전략
4) 사탄의 미래와 운명
19. 적그리스도
1) 적그리스도의 개요 및 그리스도와 대조
2) 이사야의 예언
3) 다니엘의 예언
4) 바울의 예언
5) 요한의 예언
6) 적그리스도의 미래와 운명
20. 사탄의 삼위일체
21. 네가지 복음
D. 4부
22. 일곱 교회
23. 대환난
24. 큰 바빌론
25. 땅이 불타버럼
26. 언약들
27. 신비들
28. 예표와 실상
29.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세나무
30. 주님의 명절들
31. 제사들
32. 피라밋의 경륜적 가르침
33. 성경의 숫자들
34. 시대의 표적들
이 책을 준비하고 출판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놀라운 결과이다. 나의 직업은 원래 기계 기사이며 설계사였다. 34세가 되던 해 나는 본업을 버리고, 신학 교육도 받지 않은채 복음 사역에 뛰어들었다. 그 당시 나는 제도하는 기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제도 용구만 남기고 제도에 관한 모든 전문 서적들과 도구를 모두 팔아 버렸다. 나는 조그만 시골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맡아 그곳에서 15년간 목회를 했다.
내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만 해도 나는 천년 왕국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으나 몇몇 책을 읽어가며 성경을 공부하던 중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설교에 이용하기 위해 "예언적 진리"에 관한 거대한 색채 도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목회와 관련된 두 성경학교에 초빙되어 가르치게 되었다. 이 무렵 "예언에 관한 도표"를 얼마정도 만들어 널리 보급시켰다. 그러자 "예언적 진리"에 관한 도표를 그려 넣은 책자를 발행해 달라는 요청이 내게 들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1915년 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도표를 삽입한
"경륜적인 진리"
(Dispensational Truth)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God's Plan and Purpose in the Ages)
에 관한 책을 만들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인도하셨다. 도표를 고안하고 그리는 일과 도표에 자세한 설명을 써넣는데 무려 3년이 걸렸다. 그러므로 이 책은 허둥지둥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성경의 예언서를 30년에 걸쳐서 세심하고 끈기 있게 공부한 결과이며 인간의 견해가 아닌 성경의 가르침만을 전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권위 있는 책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 책이 발행된 후 독자들의 반응을 통해 이런 종류의 책을 모두가 몹시 열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초판은 10개월만에 다 매진되었으며, 초판은 이런 책이 독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한가를 알아보는 "평가판" 이었기 때문에 최저 가격으로 출판하였다. "예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저자는 초판을 개정 증보하여 보다 실용적이고 편리하게 편찬하고자 하였으나 이 작업을 마치기도 전에 재판을 요구하는 독자들의 소리가 빗발쳐 어쩔 수 없이 초판의 형태로 인쇄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나온 3판은 초판과 재판보다 2배나 많은 도표와 설명을 추가하여 개정 증보판으로 발행하였다. 그리고 도표는 해설 내용 사이에 끼어 넣게 되었다. 책의 크기는 11인치 정도의 "도해서" 형태로 인쇄하고 천으로 제본하여 휴대하기 편리하게 했다. 초판과 재판에 실렸던 도표의 크기와 모양은 축소하지 않았으나 구형판화로 인쇄하였으며 책을 펴면 두 페이지에 펼쳐지게 하였다. 따라서 책을 이런 방식으로 인쇄함에 따라 비용이 훨씬 늘어나게 되어 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따르지만 반면에 먼저 것보다도 2배 이상이나 늘어난 귀중한 내용으로 더 나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책 속의 도표는 170페이지에 달하는 양면이지만 단면으로 계산하면 340페이지인데다 각 페이지의 분량은 보통 책의 1.5배 이상으로 실제로는 500페이지에 달하는 셈이다.
만일 내가 도표를 그리기 위해 제도사를 고용했다면 책값은 엄청났을 것이다. 더구나 도표를 제도사에게 맡길 경우 그도 나와 꼭 같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현재의 도표와는 다르게 그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표는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고안하고 전개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내게 모든 도표를 한꺼번에 그리도록 허락하시지 않았다. 종종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면 한 밤중이나 잠에서 깬 아침에 그 해답을 얻곤 했다.
나는 모든 도표가 완전 무결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내가 가장 중심 되는 도표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일"에 관해 그릴 때(사실 이 도표는 다른 부분적인 도표나 전체적인 도표를 전개시켜 나가는데 가장 합당한 도표이다) 오류를 범했더라면 그 잘못은 부분 도표나 전체적인 도표에서 즉시 발견되었을 것이다. 나 자신이 모든 도표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확신하는 것은 부분 도표와 전체적인 도표를 주요 도표와 검토했을 때 그 결과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나는 본 저서 "하나님의 경륜"에 관하여 비평가들이 서로 무자비한 언어로 부당하게 몰아 부치는 경향에 대해 항상 개탄하였다. 하지만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 같은 비평을 외면한 채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일에만 힘써 왔다. 성령의 가르침만을 기쁘게 따르며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 왔다. 따라서 이 책은 성경과 일치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나는 이제 개정 증보된 제 3판을 내놓으면서 먼저 나온 초판과 재판을 발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축복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번 판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수많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되기를 바라며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속이는 자들에게는 이 책이 마음의 변화를 받게 하는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기도한다.
저자 클래어런스 라킨
Clarence Larkin,
1920년 3월 25일
"Sunnyside" Fox Chase, Philadelphia, Pa
성경은 신학, 도덕, 역사, 과학 또는 어떤 다른 주제에 관한 체계적인 논문이 아니라, 하나님, 인간의 타락, 구원의 방법, 그리고 "각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보여주는 "계시의 책"이다. 성경이 다루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네 가지 인격 :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그리고 사탄
2. 세 가지 장소 : 하늘, 땅 그리고 지옥
3. 세 부류의 백성 : 유대인, 이방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
성경은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조금씩, 점차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약 B.C.1492년경부터 A.D.100년에 걸쳐서 약 1600년간 말씀이 선포됐다. 성경은 66권으로 이루어진 한 권의 책으로,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약 42명으로 다윗, 솔로몬과 같은 왕이나 정치가인 다니엘, 느헤미야, 제사장 에스라, 이집트의 지혜를 갖추었던 모세, 유대 율법에 정통한 바울, 목자인 아모스, 세리 마태, 어부인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 등은 '배우지 못한 무지한 자들'이었으며, 누가는 의사였고, 이사야, 에스겔, 스카랴 같은 능력 있는 선지자들도 있었다.
성경이 비록 아시아에서 기록되었다 하여도 결코 아시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시내 광야, 아라비아 절벽, 팔레스타인 언덕과 도성, 성전들, 벧엘과 여리코의 선지자 학교, 페르시아의 수산궁, 바빌론의 세바 강변, 로마의 토굴, 외딴 팟모섬, 그리고 에게 바다 등지에서 기록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편집된 어떤 책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예를 들어 대중요법, 동종요법, 수치료법, 안마요법등과 같은 다양한 치료 방법에 대해 40명의 내외과 의사들이 1600년간 걸쳐 내려오면서 66권의 비법을 저술하여 그것을 한데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든 후 그 책의 처방에 따라 환자를 치료한다고 가정해 보라 그것이 얼마 만한 효과가 있겠으며 그 치료 방법이 얼마나 일관성이 있겠는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경은 고대 역사, 신화, 전설, 교리와 미신등을 "여러 가지 뒤범벅"해 놓은 책이 아니다. 성경은 계시와 교리에 있어서 진전이 있다. 족장들보다 재판관들이, 재판관들보다는 선지자들이, 선지자들보다는 사도들이 더 많은 것을 알았다. 구약과 신약은 분리된 별개의 책이 아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속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레위기는 히브리서를, 다니엘서는 요한계시록을, 그리고 유월절이나 이사야서 53장은 사복음서가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이지만 그것은 초인간적이거나 천상의 언어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만일 그런식으로 기록되었다면 우리는 그 계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나랏말로 번역되든지 그 언어의 순수성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말씀의 활력이나 능력을 주는 영적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성경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부인할 수 없다.
성경의 언어는 세 종류가 있다. 즉 비유적(Figurative)이고 상징적(Symbolical)이며, 문자적(Literal)이다.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라."는 말씀은 비유적이므로 전후 문맥을 통해 그 뜻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느부캇네살의 '신상', 다니엘의 '네 짐승' 혹은 '일곱 촛대'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에 관해 묘사한 상징적인 표현은 성경의 동일한 장이나 그 외의 곳에 추가로 설명되어 있다.
성경의 문자적 표현은 일반 문법과 수사법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즉 성경 말씀을 은유적으로나 영적으로 풀이하는 대신 다른 책들을 볼 때와 같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을 은유적으로 영적으로 그릇되게 해석한 결과 수많은 교파들이 지금까지 난립하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룰 때 반드시 피해야 할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을 잘못 해석
2. 성경을 잘못 적용
3. 성경의 위치를 바꿈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 말씀이 계시하시고자 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된 이유는 사람들의 전통, 환경, 편견, 혹은 성경을 구미에 맞는 교리에 갖다 붙여서 가르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우리는 진리를 전하는 "비유적인 방법"을 알아두자. 예수님께서 주로 이 방법을 사용하시기는 했지만, 그 분이 고안한 것이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주로 이 방법을 사용했다. 신약 성경에 이것은 진리를 전하는 "신비적인 형태"이다(마13:10-17). 신비란 한 동안 숨겨져 있어도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내가 당신에게 봉한 편지를 보낸다고 할 때 바로 봉투 안에 든 내용이 신비가 된다. 봉투를 열어 내용을 읽으면 신비란 밝혀진다. 그러나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전문용어가 쓰여진 편지일 경우에는 그 용어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신비도 이와 같다.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경을 읽게 되면 모든 신비들은 자연히 풀릴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심각한 질문이 생길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인가? 아니면 인간의 책인가?
즉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단순히 사람들이 글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인가? 만일 성경이 하나님의 인도함이 없이 단지 사람들이 써 놓은 글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면 믿을 만한 것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책을 쓰셨다면 진리임이 분명하며, 우리는 이 말씀에 의지할 수 있다. 성경은 그 특징으로 미루어 보건대 사람이 쓰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쓸 수 있었다고 해도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솔로몬과 같은 위대한 인물들의 모든 죄, 즉 어리석음, 배반, 교만, 간음, 비겁, 살인, 음욕 등을 가혹할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배은망덕하고, 우상 숭배와 불신과 반란으로 일관된 굴욕적인 모습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었더라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범한 죄들을 그들의 역사책에 그렇게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경이 기록되었는가? 성경 자신이 그 해답을 주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딤후3:16)
I. 성경에 "영감(Inspiration)"을 불어 넣으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 분 자신이 택한 사람들을 명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메시지, 율법, 교리, 역사적인 사실, 계시들, 혹은 그 분 자신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모든 성경은(기록된 문자) 영감(The-op-neu-stos)에 의해 주어졌는데, 즉, 하나님께서 호흡을 불어 넣으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을 하시거나, 또는 성령을 통하여 옛 성별된 사람들에게 그분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 따라서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많은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이시므로 친히 말씀도 하시고 또 쓰시기도 하신다. 그 분은 친히 두 개의 증거판인 돌판을 새기셨으며(출31:18; 32:16) 벨사살 궁전 벽에 친히 글자를 쓰셨다(단5:5,24-28).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성막 및 성막 내부의 양식과 레위기에 적힌 모든 율법과 의식 절차를 모세에게 친히 말씀하셨다. 또한 그 분은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마3:17)와 변화산상에서도(마17:5) 말씀하셨으며, 한번은 예수님과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었을 때도 말씀하셨다(요12:27-30).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셨기 때문이다(딤전3:16, 요1:5-14).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총 49장에 1950절이 들어 있는데, 그 중 3/5, 즉 1140절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할 것과 이른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다(요12:49-59). 따라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글로 쓰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명하여 대신 말씀하시고 글을 쓰게 하실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II. 성경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는가?
그렇다. 무미건조한 연대기로부터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친히 모세에게 하신 말씀,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말씀 전체가 그렇다. 또한 성경 두루마리에 기록된 기록되어 있는 모든 문장, 단어, 일점, 일획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의 일점 일획도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고(마5:17-18) 말씀하셨을 때 일점 일획이란 히브리어의 가장 작은 점과 가장 작은 획을 가리키며, 이것까지도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사탄의 말과 악한 사람들과 영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말들, 사람들의 족보, 인류의 타락에 관한 설명, 노아홍수, 그리고 그 밖의 역사적인 부분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들도 성경의 기자들이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꼭 필요한 역사적인 사건들만을 기록한 것이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고 구약 시대의 여러 전통과 신화들까지도 기록되어 있는 세상의 역사서를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구약 성경의 기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각 시대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필요한 것들만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III. 성경의 기자들은 어떻게 영감을 받았는가?
성경 기자들은 단순히 일종의 '마력'이나 '무아지경'에 빠져서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기록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사용해야 할 정확한 단어들을 지시하셨는가?
생각은 말로 표현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말은 말하는 사람이나 기록하는 사람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생각도 불확실하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성경 기자는 단순히 받아쓰는 일만 옳게 하면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베드로후서 1:20에 이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즉 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예언은 예전에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
위 말씀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 자신들도 그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기록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벧전1:10-11). 그들은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을 뿐, 해석은 하지 못했다. 기록자 중에는 거룩하지도 않은 발람(민22:38;23:26), 벧엘의 예언자(왕상13:7-10;20:22,26), 사울왕(삼상10:10-12; 19:20-24), 카야파(요11:49-52)도 있음을 볼 때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도구로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약 성경의 기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어 주신 말씀을 정확히 말하고 기록했다. 모세는 주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 주셨다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이제 가라. 그리하면 내가 너의 입과 함께 할 것이요, 네가 말할 것을 가르쳐 주리라"(출4:10-12).
선지자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그리고 나서 주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내 말들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1:9).
에스겔과 다니엘 및 그 밖의 선지자도 마찬가지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등등 이와 같은 표현은 모세 오경에 560회, 역사서와 예언서에 300회, 선지서에 1200회(말라키만 해도 24회나 된다)로 구약 전체로 볼 때 2000회가 훨씬 넘는다. 이로써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는 베드로의 말이 그대로 입증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 기자들의 문체가 서로 다른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즉 이사야의 문체는 에스겔이나 다니엘과 다르며 베드로서는 요한의 서신이나 바울의 서신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는 쉽게 알 수 있고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법률적인 문서를 원할 경우 법률가를 찾고, 시적인 글을 쓰려면 시인을 택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상징들로 말씀하실 때에는 에스겔이나 다니엘이나 요한을 택하였고 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에는 다윗을 택하셨다.
신약의 기자들이 가끔 구약을 인용할 경우 문장 그대로를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바꾸어 쓰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를 들면 아모스9:11절의 말씀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그날에 내가 무너진 다윗의 성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리라. 또 내가 그의 패망을 일으켜 옛날처럼 세우리니"
하지만 사도 야고보가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 회의에서 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했다.
"이 일 후에 내가 다시 돌아와서 쓰러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울 것이며, 또 거기에 파괴된 것들을 다시 세워 일으키리라." (행15:16)
왜 말씀이 바꾸어 졌는가? 이유는 단지 두 성경 구절을 쓴 사람이 아모스나 야고보가 아니라,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뜻하는 바를 모순 없이 보다 명확하게 나타낼 수만 있다면 그분이 쓰신 1장에 사용한 표현법을 10장에서 다르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베드로전서1:11절 말씀이 뒷받침 해준다. 이 말씀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영"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고난과 다가올 영광을 미리 증거하셨음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 선지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들로 이사야53:1-12절의 말씀과 같이 그분 자신이 당할 십자가의 "고난"을 예언하도록 하셨다.
한편 "성경의 영감"과 소위 오늘날의 시인, 설교가, 웅변가 또는 작가들의 영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위해서는 "영감(Inspiration)"과 "계시(Revelation)"와 "조명(Illumination)" 사이의 의미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성경의 영감"은 시인, 작가 그리고 대중 연설가의 영감과는 완전히 다르고 독특한 차이가 있다. "영감"이란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의해 성경 기자나 선지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성경의 계시(Bible Revelation)"란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을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즉 '각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 가운데 감춰져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포하신 것이다.
"성경의 계시"는 요한계시록에서 끝났다.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어떤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사기꾼임이 틀림없다.
"영적 조명(Spiritual Illumination)"은 성경의 영감이나 계시와는 다르다. 단지 성령의 역사는 믿는 자에게 역사함으로써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영의 눈이 뜨이는 것이다(요16:12;15). 자연인은 성령의 일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이다(고전2:11-14).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들에게 새로운 계시를 전하거나 그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옛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처럼 말씀을 기록하거나 선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믿는 사람들의 영적 지각을 열어 주셔서 성경을 이해하며 그들이 성경을 깊이 상고할 때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또한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따라 각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그들에게 조명하시는 것이다.
2. 전천년설 (PRE-MILLENIALISM)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는 모든 "경륜적인 진리"를 푸는 열쇠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믿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있다. 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는데 하나는 '후천년주의자'들과 다른 하나는 '전천년주의자'들로 나누어진다. 전천년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천년 왕국"이전에 재림하실 것을 믿으나, 후천년주의자들은 천년 왕국 이후까지는 주님께서 재림하시지 않는다고 믿는다. "천년"은 계시록20:1-7에 기록되어 있는 1000년의 기간을 말한다. 전천년주의자들 모두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계시록 20장의 이 구절에 그들의 신앙의 근거를 두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사실 그리스도께서 천년 왕국 이전에 재림하실 것인지 아니면 이후에 재림하실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요한계시록 훨씬 이전에 기록되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명료한 말과 강력한 어조로 왕이신 메시아의 통치 아래서 이땅 위에서의 의와 화평의 시대가 올것을 예언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약속된 메시아가 통치하시는 "지상 왕국"에 대해 그들이 믿었던 것은 잘못된 믿음이 아니였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들이 그러한 믿음을 갖는 것에 대해 책망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에서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때에 이스라엘에 그 왕국을 회복하시겠나이까"(행 1:6)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지상 왕국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내가 와서 세우고자 하는 왕국, 즉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단지 "너희에게는 그 때나 시기를 알게 하신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셨다.
메시아의 재림에 관한 구약 성경의 전체 가르침은 "천년 왕국 이전"에 오신다는 것이다. 전천년주의자들이 계시록20:1-7에 나오는 "천년"에 관한 구절을 인용하는데 있어서 이 구절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이 구절이 "의와 화평의 시대"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창세기2:1-3의 "안식"에 기반을 둔 유대인의 전통은 창조 때로부터 "일곱 번째 천년"이 "안식 기간" 즉, "천년 왕국"이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계시록에 기록된 "천년"에 대한 구절은 유대인의 이러한 전통을 단순히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그 구절을 없애 버리더라도 이러한 관점을 약화시키지는 못한다. 그것은 단지 그 기간에 대해서 지속되는 길이만이 불확실한 채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도 시대의 교회"(초대 교회)는 천년 왕국 이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전 천년설)을 믿었으며, 그 후에도 200년이 넘도록 어떠한 다른 견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부"들의 저술들이 풍부하게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 그러나 A.D.250년 경 교부들의 중의 하나였던 오리겐(Origen)이 성경의 말씀은 단지 성경 진리의 "알맹이"를 숨겨 놓은 "껍질"에 불과하다는 착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은유적(allegorize)"이고 "영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을 "은유적"이고 "영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의 학파를 창설하였다. 그 때로부터 교회와 성경은 수많은 곤욕을 겪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대부분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지상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
콘스탄틴이 AD 323년에 로마의 황제가 되었을 때 기독교에 호의적이었으며, 그는 교회와 국가를 통합하였다. 그리하여 성경 해석상에 새로운 난점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믿음으로는 로마가 적그리스도가 앉는 자리가 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콘스탄틴이 적그리스도가 아닌가?"하는 의문이 제기되었고, 그 소문은 은밀하게 퍼져 나갔다. 그 같은 소문은 로마 황제에게는 불쾌한 것이었으므로 안전한 해석이 고안되고 채택되게 되었다. 즉 "적그리스도는 '이교도 로마'였으며, '천년 왕국'은 콘스탄틴이 즉위했을 때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해석은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에 수여한 특혜와 특권에 의해 채택되어졌으며, 심지어는 구약에 있는 천년 왕국의 축복들이 유대인에게서 교회로 옮겨졌다는 주장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적그리스도라는 주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계시록을 정경에서 삭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되자 마침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성경은 봉인된 책이 되었고 암흑의 밤이 모든 기독교계 위를 휩쓸었다. 그 결과가 곧 "암흑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그 암담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증인들이 없지 않았다. 폴리시안즈(Paulicians), 알비게네스파(Albigeneses), 왈덴파(Waldenses) 등이 주님의 천년 왕국 이전 재림을 증거 하였다.
그러나 암흑시대가 영원하지는 않았다. 때가 차자 종교개혁의 선두 주자인 죤 위클리프가 일어났으며, 곧 그 뒤를 이어 마틴 루터가 나타나 어두운 암흑시대를 물리쳐 버렸다. 주님께서 천년 왕국 이전에 재림하신다(전천년설)는 교리가 재생되었으나 개혁자들 또한 널리 나아가지 못했다. 이 기간은 종교적 분쟁과 새로운 기독교 종파가 형성된 기간이였다. 그 결과 "영적인 것"에 대한 물결이 쇠퇴하고 이성주의가 성장하면서 이 세상은 심판을 향해 급히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 통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구되었다. 영국 교회의 목사인 다니엘 틻비(Daniel Whitby,1638-1726)가 이러한 이성주의를 창안하였는데, 그는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다윗의 보좌가 다시 설립된다는 약속들을 읽으면서 "이 약속들은 영적인 것으로서 교회에 적용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를 그는 "새 가설"이라 불렀다.
그는 이스라엘과 시온산은 교회를 상징하며,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굴복하게 된다는 약속은 이방인이 개종하여 교회로 된다는 단순한 예언으로 보았다. 또 사자와 양이 함께 누워 있다는 것은 옛 성품과 새 성품의 조화를 상징하며, 예루살렘에 외관적이고, 눈에 보이는 왕국이 설립되고,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통치한다는 것은 지상에서 인간과 영적인 존재들이 다함께 혼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저속하고, 육신적이며, 이성에 반대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새 가설"은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마호메트교가 전복되고, 유대인들이 회심하며, 적그리스도인 교황과 함께 로마 카톨릭 교회도 멸망하게 될 것이고, '천년 왕국'으로 알려진 1000년간의 의와 화평의 시대가 뒤따를 것이며, 그 기간이 끝날 무렵에 잠시 동안의 배교가 있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심으로 끝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는 죽은 자들의 일반적인 부활, 그리고 일반적인 심판이 뒤따르며, 땅은 불로서 멸망하게 되는데 그후 영원한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시대는 "새 가설"에 대해 호응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 당시의 공개적인 부정으로부터 반작용이 일어났다. 영국 전 지역에서는 기독교의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다. 휫필드(Whitefield)와 웨슬리(Wesley)의 영향 아래 "대부흥"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마치 휫필드가 주장했듯이 천년 왕국이 곧 도래할 것처럼 보였다. 그도 역사의 사건들을 오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천년 왕국 안에 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어느 곳에서나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아주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으며 교회의 확립된 교리가 되었으며, 그것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후천년주의"의 관점으로 알려진 것으로 교회의 전통적 신앙으로 간주되었다. 간단히 말해 오늘날에도 지지를 받고 있는 "천년 왕국 이후 재림설(후천년설)"이 겨우 2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반면 천년 왕국 이전 재림설(전천년설)의 역사는 이사야와 다니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 "거짓 교리"인 후천년설은 구약 성경에서 각 장들의 머리 제목으로써 성경들을 통해 가르쳐지고 있다. 예로 이사야 43,44장의 제목에 "주님께서 그 분의 약속으로 교회를 위로하신다"라고 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 장들은 결코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그 장들을 읽을 경우 그것은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의 장 제목이 발행자에 의해 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제목일 경우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계시록"의 제목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계1:1
로 불려져야 하는데 "요한 계시록"이라고 되어 있다.
천년왕국 이전 재림의 해석을 달리하는 "과거학파(Preterist)", "역사학파(Historical)", "미래학파(Futurist)"가 있다.
이들은 서로 상반된 주장을 가지고 있다.
"과거학파"는 예수회 일원인 알카사가 창시하였다. 그는 서기 1614년 묵시록(apocalypse)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완전히 체계화하여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그 논문에서 계시록의 범위를 사도 요한의 사건으로 제한하려고 했으며 로마의 타이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후 뒤이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그 당시의 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이 때 모든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믿고 있으며 네로 황제가 바로 적그리스도라고 단정을 내렸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분명히 "음녀 교회"로 낙인찍힌 로마 교회와 "적그리스도"로 일컬어지는 교황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그의 견해는 전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주의자(Presentist)"라고 하는 "역사학파"는 요한 계시록이 요한의 시대에서부터 마지막 날까지, 이 세계와 교회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계속해서 예언한 책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상징들은 현재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역사적 사건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들은 적그리스도란 한 인간이 아닌 어떤 "체제"를 가리키며 음녀 교회로 일컬어지고 있는 로마 교회가 바로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시간 요소"를 "연일"로 해석한다.
이 학파에는 유능하고 능력 있는 몇 명의 변호사들이 있었다. 이 학파는 과거학파처럼 초대 교회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2세기 중엽에 나타나 13세기 초에 수도원장 요아킴(Joachim)이 이를 체계화했다. 그후에 종교개혁의 선구자들과 지도자들이 이 학파의 견해를 정식으로 채택하고 교황에게 적용했으며 엘리코트의 저서인 "호라에 아포카립티카(Horae Apocalypticae)"에서 그 견해는 절정이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견해는 카톨릭을 반그리스도적인 세력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종종 프로테스탄스적 해석이라 일컬어진다. 종교 개혁자들에게 이것은 강력하고도 가공할 무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견해가 진리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16세기 장렬한 순교의 비밀은 여기에 기인했던 것이다.
"미래학파"는 묵시록은 몇몇 상징들을 제외하고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며 3장 끝부터 계시록 끝까지는 장차 이루어질 예언이며 6장 처음부터 19장 끝까지의 대부분의 내용은 다니엘이 예언한 70주 가운데 마지막 한 주 기간 중에 일어날 일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의 역사는 단지 16세기말부터 오늘날에 이르고 있지만 가장 오래된 견해이다. 이 견해의 큰 특징은 초기 교회의 교부들이 이미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으로 올바른 성경 해석이었지만 교황이 세력을 잡게 되자 세상에서 잊혀 졌다가 나중에 다시 되살아났다.
미래학파의 견해가 현재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16세기 말엽 예수회의 일원인 리베라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도 예수회의 일원인 알카자와 마찬가지로 교황이 "적그리스도"의 낙인을 면하게 하려고 애썼으며 계시록의 예언을 먼 훗날로 돌렸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 견해를 받아들였으나 오랫동안 외부로 유출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이 견해가 다시 살아났다. 이 마지막 견해가 셋 가운에 가장 널리 인정받은 견해이다. 그러나 이 견해를 교황 체제와 마호멧 체제를 무시하고 있다고 하여 비평하고 있으나 사실과 거리가 멀다. 이 견해에 의하면 그러한 체제들은 모형과 원형이 예시되어 있으며 그들 가운데 앞으로 나타날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래학파의 성경해석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천년 왕국 이전에 재림하신다는 예언이 성경의 신비를 푸는 열쇠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의 최종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지금 이 세상은 어둡지만 "확실한 예언"이 우리를 비춰 주고 있다(벧후1:19). 예언은 일기예보처럼 아무렇게나 추측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언은 미리 기록된 역사이다"
이런 식으로 예언을 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진리대로 천년 왕국 이전에 재림하신다는 말씀을 깨닫게 되면, 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책이 될 것이다. 교리와 예언적인 진리가 정돈되어 더 이상의 혼동이 없게 되어 우리의 신학 체계는 질서가 잡힐 것이다.
성경 이외의 다른 모든 경전들은 미래에 관한 예언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만약 그 저자들이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하려 했었다면 예언들이 성취되지 못함으로 인해 그들의 작품들은 신뢰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성취된 예언은 기적들 보다도 성경의 영감성과 확실성에 대한 더 강한 증거가 된다. 예언은 "대강 추측"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일기예보"처럼 불확실한 자료로 이루어진 확률도 아니다. 예언은 "미리 기록된 역사"이다. 혹자는 "예언은 역사의 주형틀이다"라고도 말한다.
성경의 예언을 연구하는 중요한 이유는 성경의 ⅔가 모형, 상징, 직접적인 진술로 된 예언들이며, 구약 예언의 ½ 이상과 신약의 거의 대부분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 사건들을 예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두운 세상이어서 베드로후서1:19의 말씀처럼 우리들에게는 광풍이 부는 이 "어두운 세상"에 비춰 줄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던 그 당시에도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의 예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 분이 그리스도인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시대의 기독교 지도자들도 성경의 예언에 관한 연구를 무시하고 거절한다면,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준비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에는 분명하게 나타나는 "네 가지 예언의 기간들"이 있다.
1. 족장 시대 - B.C. 1921-1491
2. 모세 시대 - B.C. 1491-1370
3. 유대인 시대 - 바벨론 포로 이전 - B.C. 900-600
바벨론 포로 기간 - B.C. 600-500
바벨론 포로 이후 - B.C. 500-400
(400년간의 침묵 기간)
4. 사도 시대 - A.D. 27-100
이 예언들은 자체적으로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1. 과거 - 이미 성취된 예언
2. 현재 - 성취되고 있는 예언
(이것들은 그 시대들의 유대인, 이방인들, 그리고 도덕적, 종교적 인물에 관한 예언들이다)
3. 미래 - 성취되지 않은 예언
참된 예언이 되는 구성 요건은 다섯 가지가 있다.
1. 예언은 그것이 성취되기 이전에 알려져 있어야만 한다.
2. 모든 인간의 예견을 능가해야 한다.
3. 아주 상세해야 한다.
4. 예언자가 예언한 것이 성취되었는지는 충분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 검증받을 수 있어야 한다.
5. 그 예언의 성취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성경 예언이 "영감으로 기록되었는가"의 여부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복식 확률"을 공부해 볼 때 분명해 진다. 만약 내가 내년에 필라델피아에서 지진이 일어난다고 예언할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1/2이다. 만약 내가 지진이 7월4일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할 경우 그 확률은 1/4로 감소된다. 또 거기에다 지진이 낮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할 경우 그 확률은 1/8로 되며, 그리고 또 한가지 덧붙여 예언할 경우 그 확률은 1/16로 줄게 된다. 그리고 네 번째 사실을 덧붙일 경우 확률은 1/32이 된다. 그러한 방법으로 10회를 거듭하면 그 확률은 1/1024이 될 것이다.
성경에는 구약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반당하시고, 시련을 겪고, 죽으시고, 장사되는 것등을 예언한 25가지의 특정한 예언들이 있다. 이 예언들은 B.C. 1000년에서 B.C.500년 사이에 각기 다른 선지자들이 예언했으나, 24시간 내에 한 사람에게 그대로 성취되었다. "복식 확률"에 따라 이러한 25가지 예언들이 예언대로 성취될 확률은 1/33,554,432이다. 만일 한 선지자가 어떤 일에 관해 몇 가지 예언을 할 경우, 다른 선지자와 모의함으로써 그 예언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쳐 분포되어 있었던 많은 선지자들이 상세하고도 특정한 예언들을 했을 경우 그러한 공모의 가능성은 성립될 수 없다. 무려 109가지 예언들이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복식 확률"의 법칙을 이 숫자에 적용해 볼 때 그것들이 한 사람에게 성취될 확률은 "수십 억 분의 일"이 된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제자에게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확신시키기 위해 동행하신 것도 예언에 대해 알리시기 위해서였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부터 시작하여 자신에 관하여 모든 성경에 있는 것들(구약 성경)을 그들에게 설명하시더라}(눅24:27). 우리가 그날 오후에 있었던 두 제자와의 대화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본다면 아마 매우 흥미롭고, 놀라울 정도로 유익한 기록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시련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시던 그 전 주간에 일어났던 일들뿐만 아니라 그분의 부활에 관한 소문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오실 때 그에게 일어나리라고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내용을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보여 주신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성취된 예언들의 구체적으로 간단히 펼쳐 보자. 메시아가 은 30냥에 팔리고(슥11:12), 친구도 그를 대적하며(시41:9),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고(슥13:7), 거짓 증인이 그를 고소하며(시35:11), 그를 참소한 자 앞에서 그 입을 열지 않을 것이며(사53:7), 매를 맞으며(사50:6), 겉옷이 나뉘어지고(시22:18), 원수들이 조롱하며(시22:7,8), 원수들이 쓸개를 주고, 초를 마시게 하며(시69:21), 뼈가 꺽이지 아니하고(시34:20), 범죄자와 함께 죽으며(사53:12), 그를 배반한 값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살 것이며(슥11:13), 그분께서 부자의 묘실에 장사되어져야 함(사53:9)등을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예언의 모든 필요 조건이 충족됐다는 것을 단순히 입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6마일 떨어진 엠마오로 가는 동안, 그들과 동행하면서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모형"을 설명하셨을 것이다. 즉 창세기22:7-8의 이삭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을 살려주셨지만 그 분 자신의 아들은 아끼지 않으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유월절" 절기를 살펴보면, 양을 굽기 위해 준비할 때 두 개의 불꼬챙이를 사용하여 하나는 몸통 속에 세로로 길게 찔러 불 위에서 지탱할 수 있게 하고, 또 하나는 양쪽 어깨를 가로로 찔러 돌릴 수 있게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매달리신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또 내가 땅에서 들리우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오리라}(요12:32)는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놋뱀'에 관한 사건은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 뱀에게 물려 구세주를 필요로 할 때 예수님께서 땅에서 들리심으로 '놋뱀'의 역할을 하시고 믿음으로 그를 보는 자는 누구나 죄에서 구속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또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지만 사흘 낮과 밤을 땅 속에 계시다가 부활하실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곧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그처럼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을 것이라}(마12:40).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예언을 알고 살펴본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음에서 일어났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기이하고 놀랍고,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언된 그리스도"이며, 제자들이 사랑했던 "역사적 그리스도"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시고 성경을 펼쳐 주셨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눅24:32). 어려운 수수께끼도 정답을 알고나면 얼마나 쉬운가?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얼마나 단순하게 되겠는가? 왜냐하면 "예수의 증거는 예언의 영"이기 때문이다(계19:10). 다시 말해서, 성경의 모든 예언의 목적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언에 대한 연구는 얼마나 중요한가?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가운데 109가지가 문자적으로 성취된 것임을 알고 있다. 신약은 구약 성경 말씀을 845회나 인용하였는데 그 중 333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다. 그것들은 그리스도를 대입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형이나 비유로부터 시작해서 때로는 정확한 예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신약에 인용되지 않은 구약은 룻기, 에스라, 느헤미야, 솔로몬의 노래, 오바댜 뿐이다.
구약 성경은 예수님에 관해 "두 가지 증거"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증거하고 있다. 한 선지자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항상 순서대로 기록한 것은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 당시의 성경 연구가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실상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두 번 오실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해서 가혹한 비난만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곧 바로 지상의 왕국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분이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에 관한 예언을 구분하지 못했다(벧전1:10-12). 그들은 메시아(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그분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실 때에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 당시의 많은 백성들은 그분께서 지상왕국을 세울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 시대", 즉 "교회 시대"가 "고난(십자가)"와 "영광(면류관)" 사이에 끼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갈보리산 이편에 서서 예언이 성취된 "초림"과 아직 성취되지 않은 "재림"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예언의 산봉우리들"이라는 도표에 잘 나타나 있다.
구약의 선지자는 여러 개의 산봉우리들로 이루어져 있는 미래를 내다보았다. 그들은 이 봉우리들이 그룹별로 모여 있고 그룹과 그룹 사이에 골짜기 즉, "교회의 골짜기"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첫 번째 그룹에는 예수님의 탄생, 갈보리, 그리고 오순절의 봉우리가 들어 있다. 둘째 그룹에는 적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권의 봉우리가 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서61:2절에서 "주의 기뻐받으시는 해를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의 복수의 날을 선포하며"를 구분하는 쉼표(,)를 보지 못했다. "현 시대" 전체를 총괄하는 기간으로써 벌써 1900년이란 쉼표로 구분되는 기간이 흘렀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 선지자도 예레미야서23:5-6절에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즉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리니, 한 왕이 치리하고"라는 구절을 쉼표(,)로 분리시키고 있다. 선지자들은 선지자이며,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했다. 선지자들은 "번제단"과 "보좌"는 보았으나 그 둘 사이에 있던 "식탁"(주님의 만찬)은 보지 못했다.
앞 도표에서 보듯이 선지자는 예언의 봉우리들만 직선으로 보기 때문에 봉우리와 봉우리 상에 있는 "교회의 골짜기"는 보지 못했다. 측면에서 도표를 보면 계곡의 왼쪽에는 "초림"(십자가)를, 오른편에는 "재림"(왕관)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리스도에 관한 구약의 예언에서 "초림"에 관한 예언을 분리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재림과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예언을 공부하면 간단해진다.
이사야의 예언은 주로 메시아와 이스라엘을 다루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본토로 돌아가는 것을,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회복, 천년 왕국의 영토, 성전의 재건, 그리고 예배 의식에 관해서 다루었다. 이방인들의 선지자 다니엘은 이방인들의 거대한 지도자인 적그리스도를 다루었고 스카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날 다음과 같은 사건들에 아주 상세히 기술하였다.
1. 적그리스도 (어리석은 목자) (슥22;11:15-17)
2. 아마겟돈 (슥14:1-3)
3. 이스라엘의 회개 (슥12:9-14)
3. 올리브산에 재림하시는 예수님 (슥14:4-11)
5. 예루살렘의 늙은 남자들 (슥8:3-8)
6. 장막절 (슥14:16-21)
스카랴는 이러한 일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지 않았음에 주의해야만 한다. 모든 대선지자들과 소선지자 9명은 "그리스도의 왕위"를 강조했다. 바로 이점 때문에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시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혼동하였던 것이다.
예언의 투시도
도표 "예언의 투시도"를 보면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새하늘"과 "새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개개인이 어떤 일을 미리 보았는가를 알 수 있다. 도표를 자세히 보면 나훔 선지자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 이상으로는 보지 못한 반면에 선지자 이사야는 모든 선지자들 보다 가장 먼 미래의 날까지 내다보았다.
역사상 그리스도의 초림보다 더 분명하게 입증된 사실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과 관련된 모든 예언들이 그 분의 "초림"에서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모든 예언들이 완전히 성취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다른 "오심"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한 이유는 그 분의 "초림"에 관한 예언들과 "재림"에 관한 예언들을 구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1:10-11에서 선지자들 자신들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 사이의 차이점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했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즉, 그들은 "십자가"와 "면류관" 사이에 "시간적 공백"이 있었다는 것과 "십자가"가 "면류관"보다 앞서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은 변명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십자가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고,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성취되어진 모든 예언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머지 예언들을 그의 "재림"에 적용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초림"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초림이 모든 성경교리를 포괄하는 하나의 원의 중심이 아니므로 전 성경의 교리적 중심은 될 수 없다. 오히려 "재림"이라는 또 하나의 촛점을 가지고 있는 큰 타원형 속에 있는 두 개의 촛점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도표 I 참조)
이 도표는 "두 번 오신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선지자로서,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왕으로서 전체 사역을 보여 준다. 이는 하나의 큰 타원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 타원의 두 촛점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다. "십자가"는 그 분의 초림을 나타내며, "왕관"은 재림을 나타낸다. "인간의 타락"과 "초림" 사이에는 "제단"이 있는데, 그 제단은 "인간의 타락"을 뒤돌아 보게 하며, "십자가"를 바라보게 한다. "두 개의 오심" 사이에는 "식탁"이 놓여 있는데, 이는 뒤로는 "십자가"를, 앞으로는 "재림"을 바라 보게 한다. 그리고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 사이에는 "보좌"가 놓여 있는데, 이는 뒤로는 "재림"을, 앞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보게 한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들 속에서 분명히 "두번의 오심" 사이의 "교리적 의미"들을 구별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나타나셨느니라"(히9:26), "지금 나타나 계시기 때문이라"(히9:24), "나타나시리라"(히9:28)로 구분하고 있다. 디도서 2:11-12에서도 바울은 이들 "나타나심"의 교리적인 중요성을 보여 주는데, "선지자"로서 그 분은 우리의 "의롭게 됨"을 위해 죽으셨고,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변호인"일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그리고 "왕"으로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은 현 세대(교회시대)에 의해 나누어져 있지만, 그것들은 독립적으로는 완전할 수 없다. 재림은 초림을 필요로 하고 초림은 재림을 요구한다. 이것들 모두가 구원의 계획을 완성시키는데 있어서는 필수적이다. 초림은 우리의 "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재림은 우리의 "몸"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몸의 부활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 예수님 자신의 증거
마태복음16:27, {이제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으로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그가 각자에게 그들의 행한 대로 상 주실 것이라}.
마태복음25:31-32, {인자가 그의 영광 중에 오고, 또 모든 거룩한 천사들이 그와 함께 오면 그 때에 그가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그 앞에 모든 민족들을 모아 놓고 마치 목자가 양들을 염소들에서 갈라 놓듯이 그들을 따로 갈라 놓으리라}.
요한복음14:2-3, {내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들이 있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리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가 있는 그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복음21:2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니라}.
2. 천상의 존재들의 증거
사도행전1:10-11, {주께서 올라가실 때에 그들이 하늘을 주시하고 있는데, 보라,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말하기를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너희는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올라 가신 이 예수는 너희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더라.}
이 구절은 "예수님 그 분"이 승천하실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다시 오실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즉, 그 분의 다시 오심은 [눈에 보이고, 실제적]인 오심이다. 곁에 서 있던 "두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그들은 변형산상에 예수님과 함께 나타났으며, 또한 틀림없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던 무덤에서 여인들에게 증거한 그 "두 사람"일 것이다(눅24:4-5). 후에 그들은 대환난 기간 중 증거하게 될 "두 증인"이 될 것이다(계11:3-12).
3. 사도들의 증거
바울 -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므로 우리가 그 곳으로부터 오실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가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그 능력의 역사로 인하여 우리의 천한 몸을 그 분의 영광스러운 몸같이 변모시키리라.}(빌3:20-21).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2:13).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려지셨고, 두 번째는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죄 없이 나타나시리라.}(히9:28).
야고보 -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들이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오래 참으며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5:7).
베드로 - {이는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오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은 교묘하게 꾸며낸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라 그의 위엄의 목격자들이었기 때문이라.}(벧후1:16).
베드로가 여기서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모형이었던 변형산에서의 그리스도의 변형에 대한 것이다(마17:1-5). 모세는 "부활한 성도"의 모형이며, 엘리야는 죽지 않고 변모되어질 성도들의 모형이다.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그 분이 오실때 그분을 보게 될 유대인의 남은 자의 모형이다. 그리고 산기슭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마귀를 소년에게서 쫓아낼 수 없었는데 휴거 때에 뒤에 남게 될 자칭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의 모형이다.
유다 - {아담의 칠 대 손 에녹도 이들에 대하여 예언하여 말하기를 "보라, 주께서 무수한 성도들과 함께 오시나니 이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그들 가운데 있는 경건치 않은 모든 자가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말한 모든 거친 말에 대하여 정죄하시려는 것이라."고 하였느니라.}(유14-15).
요한 - {어린 자녀들아, 이제 그 분 안에 거하라. 이는 그가 나타나실 때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며, 그가 오실 때 그의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보라, 그가 구름들과 함께 오시리니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애곡하리라. 그대로 되리로다. 아멘.}(계1:7).
4. 주님의 만찬의 증거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 분이 오실 때까지 선포하라.}(고전11:26).
주님의 만찬식은 영원한 의식은 아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오신 후에는 끝날 것이다. 이것은 기념하는 의식이다. 이것은 "십자가"를 뒤돌아 보고, 앞으로는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약혼반지는 약혼이 영속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단순히 상호 간의 사랑과 충성의 서약이다. 그후 결혼반지에 자리를 내어 주게 된다. 그러므로 만찬은 교회의 약혼자가 없는 동안에 교회에게 남겨놓은 약혼서약으로 간주 될 수 있다.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들 속에서 침례에 대해 단지 13번 언급하였지만, 반면에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50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신약에서는 매 30구절 중 한 구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초림에 대해서보다 재림에 대해 20배나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가지 이론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대다수가 그리스도의 재림의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들은 그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재림에 대해서는 5가지 이론이 있다.
1. 주님의 재림은 "영적"이며, 오순절에
성취되어졌다는 주장
오순절에 오셨던 분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령이셨다. 그리고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을 동안이라는 조건이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러나 내가 진실을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하니라. 만일 내가 가지 아니하면 위로자가 너희에게 오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내가 떠나가면 내가 그 분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라."(요16:7). 성령이 단지 그리스도의 또 다른 나타나심이라면, 예수님과 동일시 되는데 그것은 '삼위'를 무시하는 것이다. 사실, 신약 전체는 오순절 이후에 기록되어졌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은 여전히 미래에 속한다고 150번 이상이나 언급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수반될 것이라고 예언되어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의 부활", "살아 있는 성도의 변화", 그리고 "사탄의 묶임" 등과 같은 것들은 오순절에 일어나지 않았다.
2. "죄인의 회개"가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주장
이 주장은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죄인의 회개는 성령의 사역이지 그리스도의 사역이 아니므로 이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믿는 자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내주하심은 사실이나 그 분의 재림은 초림과 마찬가지로 외관적이고 눈에 보이도록 실제적인 몸을 가지고 오신다.
3. [죽음]이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주장
장례식 설교에서 자주 사용되는 본문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희는 인자가 오실 그 날짜와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라"(마25:13)는 구절이다. 그 문맥은 이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미래에 오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이 죽을 때마다 지상에 오실 수 없다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사람의 혼은 죽는 매 순간마다 영원으로 들어가므로, 이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필수적으로 지상에 계속해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2)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대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죽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제사장의 임무를 버리시고 지상에 오실 수는 없다. 사실 성도가 죽으면 그리스도께로 가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오시지는 않는다. 죽음은 항상 떠남으로써 표현된다. "정녕 몸에서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것이라."(고후5:6-8).
"죽음"이 예수님의 재림을 뜻한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가면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고 내가 "죽음"을 보내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장에서 이 문제를 풀수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주여, 이 사람(요한)은 어떻게 되겠나이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라오라."(요21:21-23)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이 "주님의 오심"이 죽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과 "주님이 오심"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죽음은 원수이며(고전15:26,55), 우리를 무덤에 묶어둘 수 없으며, 역사하는 곳은 우리의 몸이며, "죄의 삯"(롬6:23)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관자"이시다. 그분이 계시는 곳에는 사망이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사망이 아니라 부활이다. 예수님은 "부활"이시며, "생명"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시면 우리의 천한 몸을 그 분의 "영광스러운 몸" 같이 변모시킬 것이다(빌3:20-21).
4. A.D 70년에 로마인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이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주장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에 계시지 않았다. 그것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파괴되었으며, 그리고 그 분의 "재림" 때에 일어날 일들, 예를 들면 죽은 자의 부활, 살아있는 성도의 변모,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나게 될 물리적인 변화와 같은 어떤 것도 그 당시에 일어나지 않았다(꽺14:4-11; 겔47:1-12). 예수님의 재림의 목적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곳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그 곳은 [이방인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에 의해 짓밟힐 것이며 "그때 사람들은 인자가 권세와 큰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눅21:24-28)고 하셨다. 계시록은 예루살렘 멸망 후, 26년 뒤에 기록되었는데, 그리스도의 재림을 여전히 미래로 말하고 있다.
5. "기독교 신앙의 확산"이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주장
"기독교 신앙의 확산"은 점진적이지만, 반면에 성경은 "주님의 재림"을 "밤에 도적같이" 갑작스럽고 예기치 않게 일어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마24:27,36,42,44; 살전5:2; 계3:3). 단지 기독교 신앙의 확산은 하나의 과정이고 반면에 성경은 주님의 재림을 하나의 사건으로서 말한다. 또한 기독교 신앙의 확산은 악한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만 주님의 재림은 구원이 아니라 [갑작스런 멸망]을 안겨다 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살전5:2-3; 살후1:7-10).
부활은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분이 승천하실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재림하실 것이다(행1:11). 그 분은 몸을 지니시고, 눈에 보이도록 올라 가셨는데, 마찬가지로 그 분은 같은 방법으로 오실 것이다. 그 분은 구름속으로 올라 가셨고 구름 속에서 돌아오실 것이다. "보라, 그가 구름들과 함께 오시리니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애곡하리라. 그대로 되리로다. 아멘."(계1:7). 유일한 차이점은 예수님께서는 홀로 올라가셨으나, 왕으로서 재림하실 때에는(눅19:12) 수행된 천사의 무리가 뒤따를 것이다. "이제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으로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그가 각자에게 그들의 행한 대로 상 주실 것이라."(마16:27).
두 단계(Two Stages)
그렇지만 그 분의 다시 오심은 "두 단계"로 될 것이다. 그 분은 먼저 우리의 대기권의 영역안으로 오실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살아있는 성도들"은 "공중에서" 그분을 만나기 위하여 "끌려 올라갈" 것이다. 부활한 자들과 변형된 성도들이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과 상을 받고 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로서 그 분과 혼인한 후에 그 분은 그들과 함께 지상에 재림하셔서 그 분이 승천하셨던 곳인 올리브산에 서실 것이다. "그 분의 발이 그 날에 동편 예루살렘 앞 동편에 있는 올리브산 위에 서시리니, 올리브 산은 그 중간이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산의 절반은 북쪽으로, 산의 절반은 남쪽으로 옮겨지리라"(스가랴 14:4)
주님의 재림의 첫 단계는 "휴거(The Rapture)", 두번째 단계는 "재림(The Revelation)"이라고 불리워진다. 그 두 단계 사이의 시간은 "7년" 이상이다. 그 기간 동안 하늘에서는 "성도들의 행위에 대한 심판", 지상에서는 "대환난"으로 채워질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도표 No 3를 참조하라.
첫 번째 단계 - 휴거
휴거는 데살로니가전서 4:15-17에 묘사되어 있다. 이 구절들을 통해 볼 때 휴거는 두개의 요소로 되어 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잠들어 있는 자들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미카엘)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나서 살아 남아 있는(성도들만)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올라 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
여기서 보는 것과 같이 "휴거"에는 두가지 면이 있다.
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
나. "살아있는 성도들"의 변형
휴거에 관한 이 두 요소의 성격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때 그녀에게 알려 주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첫번째 성도들의 부활)이며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11:25-26). 휴거에 관한 두 요소의 성격은 바울이 그의 위대한 부활에 관한 장에서 강조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하여 이 썩을 몸(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살아있는 성도들)을 입게 되면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음부야!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전15:51-57)
위에 언급된 구절들은 단지 죽음을 보지 않고 변화되어질 성도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5:1-4에서도 바울은 그의 소망과 성도들의 소망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곳에는 사망에 의하여 벗어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보지않고 불멸에 의하여 옷입혀지고자 하는 자들 가운데 있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몸)이 무너지면(죽음) 하나님께서 지으신 큰 집, 즉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이라. 정녕 우리가 여기에서(몸) 신음하며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입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나 만일 우리가 옷입고 있다면 벗은 채로 발견되지 아니하리라. 이 장막 집(몸)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지고 신음하는 것은 '벗으려는 것(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옷입혀 지고자 함이니, 이는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서 삼켜지는 것이라.}
또한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그의 서신에서 바울은 소망하기를 . . .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들의(첫 번째 성도들이의) 부활에 이르려는 것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표적을 향해 좇아갈 뿐이라}(빌3:11-14)고 했다. 즉 바울은 첫번째 부활 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변화된 성도들과 함께 휴거되는 것을 위대한 일로 여겼지만,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죽음을 보지 않고 휴거될 수 있다면 그것을 상으로서 받고 싶어하였다.
휴거는 "갑자기"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떤 시간에 너희 주께서 오실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이것을 알라. 만일 그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간에 올 것인지 알았더라면 그가 깨어 있어 자기 집을 뚫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은 시간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라}(마24:42-44).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켜서 벗은 채로 다니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자기 수치를 보이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16:15)
{그러나 형제들아, 그 때와 시기에 관해서는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으니 이는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라는 것을 너희 자신이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니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할 때에 아이 밴 여인에게 진통이 오듯 갑작스런 멸망이 그들에게 임하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1-2)
이 언급들은 그리스도가 오시는 "두번째 상황", 즉 "재림"을 언급하는데 이때 그의 원수들에게 복수하실 것이다(살후1:7-10). 그리나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니 그 날이 너희를 도둑같이 덮치지 못하리라.}(살전5:1-4)고 덧붙여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그 분을 전혀 예기치 않고 있을 때 그 분은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분은 도둑같이 오실 것이다. 도둑은 그가 오는 것을 알리지 않는다. 도둑은 어떤 목적 때문에 온다. 그는 집에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지 않고, 그가 필요한 귀중한 것들(금, 은, 보석, 좋은 옷 등)만 가지고 간다. 그는 머무르려고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목적한 바만 이루면 떠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휴거 때에 오셔서 그 분의 성도들만 데리고 가신다. 주께서도 휴거 때에 사악한 자들과 수많은 무리의 이교도(이단)들을 남겨두고 떠나실 것이다.
휴거는 "선별적"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휴거는 성도들과 믿지 않는 자들을 분리하는 것은 물론이요, 남편과 아내, 육신의 형제들과 자매들, 친구와 친구를 분리시킬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그 밤에는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두 여인이 함께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또 두 사람이 들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고 하시니라}(눅17:34-36)
이 구절들 가운데 "두 사람"은 "두 남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침대에 있던 두 사람", 즉 남편과 아내 혹은 형제들이나 자매들, 혹은 친구들이 있을 것이라고 읽어야 한다. 잠자리에 있는 두 사람은 "아침이나 저녁", 그리고 밭에 있는 두 사람은 "한낮"임을 가르킨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순식간에" 혹은 "눈깜짝하는 순간에"(고전15:52) 이 땅 위의 모든 곳에서 동시에 일어날 것이라고 묘사한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번개가 동편에서 치면 서편에서까지 비치는 것같이 인자의 오심도 그러하리라}(마24:27)고 그 방법을 말씀하셨다.
"휴거"는 이 시대와 세대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사건"이 될 것이다. "주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소리"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살아 있는 성도들"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듣거나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던 날 그리스도께서는 알아들으셨으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천둥"소리로 잘못 알았다(요12:28-29). 주께서 다메섹으로 가던 다소 사람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와 동행하던 사람들은 말도 못하고 음성은 들었으나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말한 것을 전혀 알아 듣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행9:3-7).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그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깊은 무덤도 바위로 덮힌 지하묘지도, 피라밋이나 아주 두터운 묘지도 강렬하게 뚫고 들어가 "잠자는 너희 성도들아, 깨어나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아침이 되었으니 첫번째 부활의 아침이로다."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영광스러운 날의 아침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혼들이 이 땅으로 돌아와 그들의 육신을 입고 부활하여 영광을 얻은 후 공중에 가득할 것이다. 묘지들과 시골 교회 마당이 쟁기로 파례치진 것처럼 보일 것인지, 그 묘비와 묘석이 뒤집히고, 마지막 안식처였던 지하 묘소가 산산히 부서져 버림으로 죽은자들의 부활을 증거하게 될는지, 죽은 성도들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을 봉한 돌을 깨뜨리지 않으신 채로 부활하신 것처럼 무덤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빠져 올라갈런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천사가 돌을 옮겨 놓았다는 것과 부활한 상태는 휴거가 발생하면 그 때 잘 알 수 있다는 것 뿐이다.
만일 죽은 자들이 묘지를 부수지 흐트리지 않고 빠져 나온다면, 첫번째"살아 있는 성도들"에게는 비밀이 될 수 없다. 휴거가 있을 때 우리가 사는 곳이 지구의 밤이라면 아침이 되고나서야 그 지역 사람들은 밤 사이에 참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침이 되고 난 후 비로서, 밤 사이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밤중의 외침"...
"보라 신랑이 왔다."
라는 음성을 들을 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단지 천둥소리로 생각하고 잠을 더 자기 위해 몸을 뒤척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침실에서 같이 잠자던 사랑하는 사람의 옷가지는 그대로 있지만 그리스도인인 사랑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형제 자매들이 행방불명되고 귀여운 어린이들도 있지 않을 것이며, 유아는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 피고용인이나 고용주들이 출근하지 않게 될 것이며, 세상은 성경이 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또한 주님께서 그의 성도들을 데리러 천년왕국 이전에 오신다는 전천년 교리를 멸시했던 많은 자들은 전천년설 성경해석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만일 낮이라면, 그 "사건"은 놀라운 것이 될 것이다. 노아의 때와 같이(마24:36-39)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며, 사고 팔며, 씨를 뿌리고 집을 짓고 있을 것이다.
이때가 연중 행락철에 일어나면, 배나 차들 그리고 공원같은 곳에는 즐겁게 보내려는 사람들로 붐빌 것이다. 그때가 주중의 바쁜 시간이라면 상점들은 물건 사는 사람들로, 공장에는 일하는 사람들로, 도시의 거리에는 괘락을 좇는 사람들과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남녀노소로 붐빌 것이다. 실내에 있던 사람들은 출입문과 창문으로 하늘을 쳐다 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놀랍고 무서운 소리로만 들릴 것이나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릴 것이다.
엄청난 놀라움과 겁에 질린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행방불명되었고, 바로 없어진 그들이 그 지역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큰 백화점과 은행, 그리고 공장과 기타 상업 지역에서 일하던 성실한 근무자들이 갑자기 없어져 일해야 할 부서에 사람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거리를 걷고 있던 사람들은 함께 걷던 동료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거리에 버스들은 운전수가 없어져 교통이 막힐 것이다. 철도와 배도 마비 될 것이며 어디나 혼란이 생길 것이다. 많은 가정에서는 가족들이 사라져 버리고 가족들이 집에 돌아와 보면 사랑하는 이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신비"가 될 것이다. 그 후에 "성도의 휴거"에 관하여 책을 읽었거나 들었던 몇몇 사람들은 일어난 것을 깨닫고 그 상황을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날에 일어날 놀라운 일들 중 하나는 많은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 일꾼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자들은 남아있게 되고 반면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알려져 있지 않았던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행방불명 될 것이다. 세상의 소금인 성도들이 "휴거"되어 가버렸으므로 급속한 타락과 "도덕적 부패"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죄와 불법과 온갖 종류의 범죄와 비속함이 증가되어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위한 길이 예비될 것이고, 그의 통치 아래서 세상은 심판을 향해 급속도록 부패해질 것이다.
누가 휴거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대환난을 통과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대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깨어 기다리는 성도들만이 대환난 전에 휴거되고 나머지는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을 히브리서 9:28에 근거하고 있다. "두번째는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죄없이 나타나시리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주님께서 천년왕국 이전에 오실 것에 대해 결코 들어보지 못했거나, 혹은 적어도 그 의미조차도 알지 못하고 주 안에서 잠든 자들도 수천만 명이 넘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주님의 재림을 깨어 기다린 적이 전혀 없었던 자들이 대부분이다. '주 안에서' 잠들어 있는 그들은 확실이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로서 휴거 때에 부활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6-17에서 휴거될 사람들은 '깨어 기다리고 고대하던' 죽은 자들이라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살아남아 있는 우리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사실은 교회의 연합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한 몸에 지체는 많아도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시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고전12:12-13).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들"은(요3:3-7)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나누어 진다고 생각할 수 없다. 즉, 몸의 일부는 무덤 속에서 여전히 잠자고 있고 일부는 영광 가운데서 부활하며, 일부는 대환난을 통과하기 위하여 남아 있고, 또 일부는 공중에서 그분을 만나기 위하여 "변화되어" 휴거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일 모든 교회가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바라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기다리며 고대하는 결과가 되므로 주님 자신의 가르침에 상반된다(마24:42-44).
대환난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대환난은 "야곱의 환난"의 때(렘30:7),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때로서 교회를 환난으로부터 지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렘30:7).
계시록 4장 후에는 교회가 더 이상 지상에 보이지 않으며 19장에서야 비로서 "하늘로부터" 신랑과 함께 재림함으로써 나타난다. 4장과 19장 사이의 모든 기간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무서운 심판들로 가득차 있으나 교회는 지상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늘의 처소(엡2:6)에 함께 있을 것이므로 교회는 대환난 동안에 지상에 있는 자들 가운데 있지 않는다. 이러한 혼돈은 예언의 진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의 성도들을 "위하여" 오심과 성도들과 "함께" 오심을 구별하지 못하는데 대부분 기인한다. 전자는 "휴거"이며 후자는 "재림"이다.
성경에서 수 많은 구절들이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성도들과 "함께" 오심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꽺14:4; 골3:4; 살전3:13, 4:14; 유14). 그러므로 성도들이 먼저 그리스도에게로 휴거되지 못한다면 분명히 그 분과 함께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구절들은 모두 같은 것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는 "재림"에 대해 후자는 "휴거"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형적인 가르침은 교회가 환난 전에 휴거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요셉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는 형들에게 버림을 받은 후 이방인인 "그의 신부" 아스낫과 결혼하였다. 그 때는 기근이 있기 전으로서 기근은 형제들이 심판 받을 때를 가르키므로 대환난 기간을 의미한다. 즉 그 기간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들인 유대인에 의해 배척을 받으신 때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모세도 그의 형제들에게 배척을 받은 후 이방인 신부를 맞아들였다. 이때는 파라오왕에게 환난을 겪기 전이었다(출2:23-25).
"휴거될 성도"들의 모형인 에녹은 대홍수 이전에 휴거되었다. 대홍수는 환난을 뜻하며 노아와 그의 가족은 환난을 통하여 살아남게 계시록7:4절의 인을 받은 144,000명이 될 유대인을 상징한다.
우리들의 중의 일부가 무서운 죽음의 손길에 의해 육신의 장막을 벗지 않은 상태로 눈깜짝할 순간에 변화되어, 영원히 살 수 있는 영광스러운 몸을 덧입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가 고동치는 영원한 생명의 감격을 갑자기 맛보고, 살아있는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예수 안에서 잠든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중으로 휴거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얼마나 황홀한 기쁨이 넘치겠는가?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하늘에 있는 신부의 처소로 올라가면 얼마나 성대한 영접을 받겠는가! 그곳에서 우리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축하하는 새 노래를 같이 부를 것이다(계5:9-10).
2. 두번째 단계 - 재림
그리스도의 두번째 오심의 단계, 즉 재림 때에 우리는 그 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처음 오셨을 때에 그 분은 육신 안에 자신을 감추셨다. "성육신"은 그 분의 능력을 숨기고, 그 분의 신성을 가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분의 영광의 광채들은 변화산에서처럼 때때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분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있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옷 입으신 그 분을 보게 될 것이다. "재림"은 휴거처럼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하게 일어날 것이다. 그날에 태양이 강렬하고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사람들은 사고 팔며, 집을 짓고,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갈 것이다. 정치가들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계획을 곰곰히 구상하고 있을 것이고, 박애주의자들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강구하고 있을 것이며, 또한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은 새로운 쾌락의 원천을 찾고 있을 것이고, 사악한 자들은 어둠의 행동을 계획할 것이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도, 천국도, 지옥도, 다가올 심판도 없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만족감을 충족시키고 있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한 변화가 생길 것이다. 먼 하늘에 태양을 능가하는 "한 점의 빛"이 나타나 지상을 향해 내려오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 빛이 내려올 때 맑은 구름의 형체로 느껴지고 그 맑은 구름으로부터 눈부실 정도의 광선과 번개가 흘러 나올 것이다. 그 빛은 마치 돌풍의 날개를 가지고 내려오는 것같을 것이고, 그 목적지인 올리브산에 도착하게 될 때에 그것은 두려움에 떨며 오금을 펴지 못하고 있는 목격자들에게 멈추어 서서 본래의 모습을 펼쳐 보일 것이며, "흰 말" 위에 앉아 계신 예수님(계19:11-16)께서는 그분의 성도들과 하늘의 군대와 함께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올리브산 설교에서 예언하셨던 것을 성취시키실 것이다. 그후에 하늘에 계신 인자의 표적이 나타날 것이며, 세상 모든 족속들이 통곡할 것이다. {그 후에 하늘에 있는 인자의 표적이 나타나리니 땅의 모든 지파들이 통곡할 것이며 또 그들은 인자가 권세와 큰 영광으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마24:30).
재림의 임박성
후천년주의자들(Post-millennialist)은 주장하기를 "신약의 기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그 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므로 그것은 그 저자들이 오인한 것이었고, 바울도 그의 후기의 서신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에 대한 진술을 수정하였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떤 시간에 너희 주께서 오실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 .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은 시간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라}(마24:42-44)고 말씀하셨지만 이 구절들 속에서 그 분은 자기에 대하여 기록한 기자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다시 돌아오실 것이라고 가르치시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달란트 비유와 같은 많은 비유들 속에서 그 분의 재림이 지체될 것임을 암시하셨다.
달란트 비유에서 말씀하시기를 "오랜 시간이 지나(long time) 그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계산을 하였는데"(마25:19)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것은 급작스러움과 예기치 못함으로 대변되는 재림의 특성이었다. 사도들도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밤이 거의 지났고, 낮이 가까움이라", "주님의 오심이 가까이 이르렀다."고 하면서 "준비하고 있으라"고 권면했지만, 그 말은 단순히 "급작스럽게 오실 것"을 의미할 뿐이지 반드시 "즉각적으로 오실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고린도전서 15:51에서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해서 주께서 바울 시대에 다시 오실 것이며, '몇몇 사람은 죽지 않고 변화될 것이다.'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도는 "우리"라는 말을 휴거에 관하여 말하는 것으로 바울 시대이든 혹은 나중에든 그 사건이 일어날 때 살아있게 될 성도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재림 이전에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야 하지만 그 사실을 밝혔다면 "깨어 있으라"는 명령은 무용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분은 마태복음 13장의 7가지 비유들에서처럼 그 분의 재림을 "신비적 형태"로 감추어 두셨다. 씨를 뿌리고, 밀과 독보리가 자라고, 겨자나무가 자라고, 누룩이 반죽을 부풀게 하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1세기에는 복음전파가 아주 빨랐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이 빠른 시일내 재림하기를 기다리면서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 세기마다 우리는 "수확물"의 한도가 얼마나 되며 그것이 다 무르익어 주님이 추수하러 오시기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마13:30). 사실 주님의 재림의 시기가 불확실한 것은 우리로 방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초대 교회가 주님의 재림이 20세기 동안 지체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진지하게 살고자 하는 동기가 결핍되었을 것이다.
"임박하다"는 말은 "어느 때에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기차를 타기 위해서 철도역으로 서둘러 갔으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차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 때 그 시간은 지났지만 기차가 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기차가 언제라도 올 것이므로 그 때 당신이 역을 떠나 버린다면 현명치 못한 일일 것이다. 만일 당신이 탈 기차가 30분 동안 지체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당신은 아마 기다리거나 지켜볼 필요도 없이 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갑자기 오신다"는 것은 반드시 "즉각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상 어떤 때도 현재처럼 주님의 재림에 필요한 조건들이 완전히 성취되어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임박한 주님의 재림이 아마 오래도록 지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준비하고 깨어 있도록 하자!
저자가 확신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신성한 임무를 순종하지 못함으로써 주님이 재림할 때가 이미 지나갔어야 할 정도로 불필요하게 지체되어 있다는 것이다(마28:19-20).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미리아심으로 이방인의 충만함, 즉 곡식이 다 익어 추수할 때까지 악의 세력이 번성하지 못하게 끔 저지해 놓으셨다(계14:14-20).
그리스도의 교회가 역사상 어느 때도 지금처럼 주님의 재림에 필요한 조건들이 거의 완전히 성취되어 있던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가까운 주님의 재림이 아마 더 이상 지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준비하고 깨어있자.
위에서 언급한대로 필자는 주님의 재림이 연착되고 있다(Past due)고 생각하며 또한 미래에 주님이 재림하실 시간을 미리 정하고 싶지 않다. 재림의 시간을 정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재림의 임박함
을 조명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이론을 소개해 본다. 그것은
"인류 역사의 위대한 주간"
으로 불리우는 것으로서, "창조 주간"의 "7일"과 베드로후서 3:8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구약에서는 '천년왕국'이 쉬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기간으로 묘사되어 있고, 신약에서는 천년왕국이 창조의 한 주간 중 7일째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히4:4-11). 이제 우리는 천년왕국이 천년 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계20:1-9). 그것이 창조의 한 주간 중 일곱 번째 날과 일치한다면 나머지 6일도 똑같은 기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 날들이 과거의 인류 역사와 일치한다면 창조의 한 주간으로부터 천년왕국의 시작까지 인류역사는 6천년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확신 속에서 족보와 구약의 역사를 주의깊게 연구해 본다면 아담에서 그리스도까지 약 4천년 혹은 하루가 천년씩 4일 간으로 창조 주간의 첫 4일에 해당한다는 것과 그리스도로부터 현재까지는 1900년 이상이 지났으므로 하루를 1000년씩 약 1일로 생각하면 인류 역사는 각각 1000년씩 6일이 지났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천년왕국 전에 재림할 예정이고 모든 징조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창조 이후 7일 간은 곧 인류의 역사 기간이 7천년이라는 이론이 성경적으로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추론이 옳다면 주님의 재림은 지금 현재의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현세기가 끝나기 얼마전에 일어나겠느냐 하는 것은 알 수 없다. 천년왕국이 A.D 2000년에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휴거는 천년왕국에서 최소한 7년 전에 일어나야 한다. "인류 역사의 7천년"이라는 다음 도표를 보라.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확실하게 어떤 날짜를 정하기에는 성경의 연대기가 너무 복잡하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님의 재림의 정확한 날짜에 대하여 우리가 확정하지 못하게 해 놓으신 것이 틀림없다.
아담에서 그리스도까지 일반적으로는 4004년이라고 하지만 4075년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1918년 필자가 이 책을 기록한 당시를 기준으로 우리는 아담의 창조 이래 A.D 5993년 즉, 휴거되는 전해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예언의 연대기"에서 1년을 360일로 계산하시는 반면 우리는 1년을 365¼일로 계산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어떤 종류의 달력으로 계산했는지 확실히 알아내어 달력 계산법에 따라 년수를 더 줄여서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6000년의 마지막에 더 가까이 와 있으며 또한 주님의 재림도 그만큼 임박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론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음을 강하게 암시해 주는 것이지 결정적인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여기에 기초하여 어떤 날짜도 정할 수 없다. 더구나 휴거는 환난이 시작되기 전, 곧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세기가 끝날 정확한 날짜를 정한 다음 거기에서 7년을 빼어 계산한다하더라도 바벨론 재건과 그 밖의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일어나게 되어 있는 다른 사건들에 소요되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휴거는 20세기 말에서 7년을 뺀 것보다 5년, 10년, 혹은 25년 이전에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휴거는 불시에 닥칠 놀랄만한 사건이 안 될 것이다.
때와 시기와 징조를 찾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할 일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그는 "내 주인이 오시는 것이 늦어지리라."(눅12:45)고 말하는 사람들의 부류에 속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그는 다른 일에 몰두하느라고 근신하여 깨어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어느 때에도 다시 오시리라"고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왜 그렇게 강조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실제적인 일상생활에서 대해서, 세상의 경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을 복음을 통해 해결할 방법에 대해서는 왜 언급하고 있지 않은지? 그러나 이런 모든 문제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야 해결될 수 있다. 그의 재림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이런 문제들이 풀리는데 그만큼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1. 유대인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짓밟힌 민족이다.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주님의 재림이다. 그 분이 다시 오실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의 땅을 회복하고 다시 하나의 민족이 될 것이다.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그 날들이 오나니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한 주의 살아 계심으로는 더이상 말하지 않고. 그대신 북쪽 땅(러시아)과 그들을 쫓아내었던 모든 땅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자손을 인도한 주께서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었던 그들의 땅으로 그들을 다시 데려오리라}(렘16:14-15). {이는 내가 내 눈을 그들에게 영원히 두며, 내가 그들을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또 내가 그들을 세우고 넘어뜨리지 아니하며, 내가 그들을 심고 뽑아 내지 아니하리라}(렘24:6). 이 일은 아직까지 성취되지 않았다.
2.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깨끗케 하는 날에 내가 또한 너희로 그 성읍들에서 살게 하리니, 폐허에 집을 짓게 되리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목전에 황폐하게 버려졌던 곳, 황폐한 땅이 경작되리라. 그러면 그들이 말하기를 "황폐했던 이 땅이 에덴의 동산같이 되었도다. 삭막하고 황폐하고 파괴된 성읍들이 성벽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살고 있도다." 하리라}(겔36:33-35; 욜3:18; 욜2:24-26).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의 거리들에는 여전히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살 것이며, 사람마다 나이 많음으로 인하여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라. 성읍의 거리들은 거리에서 뛰어 노는 소년들과 소녀들로 가득 찰 것이라}(스가랴 8:4-5).
{그 날에는 말들의 방울들 위에 "주께 거룩함"이 있을 것이요, 주의 집에 있는 솥들도 제단 앞에 있는 대접들과 같게 되리라. 정녕,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모든 솥이 만군의 주께 거룩함이 될 것이요, 희생제를 드리는 자들이 모두 와서 솥들을 가져다가 거기에 삶으리라. 또 그 날에는 만군의 주의 집에 카나안인이 더이상 있지 아니하리라}(스가랴 14:20-21).
3. 모든 나라들에 대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분은 예루살렘에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양의 나라들"과 "염소의 나라들"을 구분할 것이다. 그때 단지 "양의 나라들"만 살아 남아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될 것이다(마24:31-40). 이 민족들은 의롭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을 치러 온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남아 있는 자도 각기 그 왕, 만군의 주께 경배하러, 또 초막절을 지키려고 해마다 올라올 것이라}(스가랴 14:16). 모든 민족들의 운명은 {그가 많은 백성 가운데서 심판하시며 먼 곳의 강한 민족들을 책망하시리라. 또 사람들은 그들의 칼들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들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 이 민족이 저 민족을 대적하여 칼을 들어올리지 아니할 것이며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리라. 오히려 그들 각 사람은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요, 아무도 그들을 두렵게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만군의 주의 입이 그것을 말씀하셨음이니라}(미4:3-4)(이사야 2:4). 전쟁과 노동 문제와 모든 사회적 운동과 무정부주의 운동을 종식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그 분의 천년왕국을 세우는 것이다.
4. 사탄에 대해서
사탄과 그의 모든 악한 세력들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다. 이는 그 분께서 다시 오실 때 사탄이 결박되어 1000년 동안 '끝없이 깊은 구렁'에 던져지기 때문이다(계20:1-3).
5. 땅에 대해서
타락 이후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모든 종류의 병균과 해충으로 저주를 받아 얼굴에 땀을 흘려야만 인간은 매일의 양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야생동물도 육식을 하게 되어 서로 잡아먹게 되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고통받는 것을 우리가 아노니...}(롬8:22). 그러나 이 모든 것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바뀔 것이다.
{광야와 메마른 곳이 그들을 기뻐하고, 사막이 기뻐하며 장미처럼 피리라.}(사35:1),
{그리하면 땅이 그 소산을 낼 것이요,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이다.}(시67:6).
{그 때에는 밭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을 것이다}(암9:13).
축복된 소망
그리스도의 재림은 "복된 소망"이다. 디도에게 편지를 쓸 때 바울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2:13)라고 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소망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은 "구원의 소망"을 의미하지만,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소망" 할 수는 없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지금 신뢰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구원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주님의 재림"이다. 인간은 삼중적인 존재로서 "몸과 혼과 영"을 지니고 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의 "몸"을 잃어 버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부활시에 몸이 다시 살아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재림 하실때에 부활이 있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재림은 "축복된 소망"인 것이다. 이는 사람이 죽으면 다시 부활될 것이고, 사람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되면 그는 죽지 않고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휴거될 것이기 때문이다(살전4:13-18).
"축복된 소망"은 또한 "정결케 하는 소망"이다.
{그 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그 분이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하느니라}(요일3:3).
즉 주님의 재림하심을 간절히 바라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정결케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 소망은 우리에게 "인내"를 심어줄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들이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오래 참으며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인내하며 마음을 견고케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움이라}(약5:7-8).
이 소망은 우리를 깨어 있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그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저녁일는지, 밤중일는지, 닭이 울 때일는지, 아니면 아침일는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라. 그가 갑자기 와서 너희가 잠든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니 깨어 있으라."고 하시더라}(막13:35-37).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다면 행동에 주의하게 될 것이다. 주님이 오셨을 때, 우리는 의심스러운 장소에서 의심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길 원치 않으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함으로써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길 원할 것이다. "복된 소망"은 우리가 이 세상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붙어 있도록 해 준다.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그 분이 오실 때 우리는 "수치"로 부터 지켜줄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이제 그 분 안에 거하라. 이는 그가 나타나실 때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며, 그가 오실 때 그의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주님의 오심에 주의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것을 잘 관리함으로서 우리의 청지기의 직분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신실한 대답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가 오실 때에 그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마25:15-30).
주님의 천년왕국 이전에 재림하시리라는 소망을 지닌 사람의 마음은 기쁨으로 채워져 있다. 누가복음 24:52절에는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실 때 "그들이 주를 경배하고 기쁨이 충만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와"고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제자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의 추측으로는 예수님이 떠남으로써 그들은 자연히 슬픔으로 가득찰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올라가실 때 두 사람이 흰옷을 입고 서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말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기뻐했던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행1:11).
예수님의 재림에 이의를 제기하는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예수님은 곧 재림할 것이라는 점을 믿는다면 그들은 왜 집과 교회를 짓고 투자를 하며 그들의 자녀에 대한 교육 등과 같은 일을 하는가?"라고 묻곤한다. 그에 대한 해답은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서 집과 교회 건물과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모두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세상은 예수님이 초림하신 이후에도 그 전과 같이 계속 움직이며 재림하신 후에도 같을 것이다. 사람들은 가정과 교회 건물을 필요로 할 것이다. 사업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의 구원받지 못한 자녀들은 후에 남아서 가정과 교육과 살아나갈 수단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러한 생활 전반에 관한 문제들을 무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라는 것은 환난 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셨다가 환난이 끝나고 예수님이 통치하기 위해 다시 오실때, 우리도 주님과 함께 영광스러 몸으로 변화되어 천년왕국을 통치하며 과거에 우리가 예배드렸던 교회건물과 돈을 들여 지었던 시설들을 방문해 보는 것 등이 될 것이다. 천년왕국 이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양날이 날카로운 검"을 사용한다.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찔림을 주었을 때 나는 젊고 시간이 많으므로 결정할 시간을 미루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이 구원받는 문제는 시간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예수님께서 언제든지 다시 오실수 있기 때문에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 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면 즉각적인 결단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친애하는 독자여,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축복된 소망"을 지닌 사람인가? 당신은 주님이 빨리 재림하시기를 기다리면서 왕이신 그분을 맞이하기 위하여 모든일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신이 모든 일을 잠시 접어두고 생각해 보길 바란다. 과연 당신은 주님이 오실때, 공중에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휴거됨으로써 지상에 임할 무서운 환난의 때를 피할 수 있겠는가? 그 환난기에는 "짐승의 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사거나 팔 수 없으며 또한 그 표를 받은 사람은 모두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 떨어져야 함을 잊지말기 바란다(계13:15-17).
바울은 디모데에게 쓰기를...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2:15).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을 "일꾼"으로 언급하고 있다. 어떤 일꾼도 계획 없이는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그는 반드시 설계도와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에 관하여 말씀하실飁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보기(example)와 그림자라. 모세가 성막을 지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 지시를 받은 것과 같으니 말씀하시기를 ...
{보라, 너는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여 준 "모형"을 따라 지으라}(히8:5).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성경해석에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설계도면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설계도면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빌딩의 설계도와 세부계획은 분리된 반면 그것들은 조화를 이룬다. 성경의 도면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오류를 초래한다. 이 두 가지는 반드시 비교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기간들과 성경을 구별하는 것은 조화를 이룬다"고 말했으며, 골던 목사(Dr. A.J Gordon)가 "시대에 따른 계획"이란 설교는 마친 후 마차에 어떤 한 청년이 다가와서 "왜 목사님은 매 본문마다 칸막이를 쳐서 구분하십니까?"라고 물었던 일도 있었다.
우리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진리의 말씀"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으며 우리가 배우도록 기록되었다. 일반적인 모든 사람에게 씌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본문은 유대인, 어떤 본문은 교회, 어떤 본문은 이방인에게 쓰여졌다. 이 세 가지 구성은 인류가 이 세 부류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고전10:32). 성경의 전체는 교회에 관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교회에 교훈을 주기 위하여 쓰여졌다. 교회에 관하여 구약성경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교회는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감추어진 것이었으며, 바울에게 처음으로 계시된 것으로 에베소서3:1-10에서 그에 의해 말해졌다. 구약의 대부분은 한 나라, 즉 이스라엘의 역사이며, 창세기의 처음 다섯 장은 창조의 역사이며, 1700년 간의 인류의 역사이다. 그 다음 네 장은 홍수에 관한 역사이다. 10장과 11장은 400년 이상의 인류역사를 설명하고 있으며,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하신다(창12:1-3). 여기서부터 성경은 유대 민족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구약을 이룬다.
우리가 구약의 약속을 취하여 교회에다 그것들을 적용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약속된 권리를 빼앗는 것이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이사야의 예언을 교회에 적용하지만,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상"(사1:1)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신약에서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는 유대적이다. 야고보서는 교회에 쓴 서신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야1:1)인 유대인에게 쓴 글이다. 그러므로 병든자를 위한 "믿음의 기도"는 주로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에 주어진 약속이다. 비록 그것이 상황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히브리서에서 많은 신자들은 "떨어져 나간"이란 말에 걸려 넘어진다(히6:4-6). "만약 우리가 고의적으로 죄를 지으면"(히10:26) 하지만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 거듭난 적도 없는 배교한 유대 기독교인들이 주를 입으로만 고백한다면 이는 실제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형제 유대인들처럼 악한 것이며, 예수를 다시 못 박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몇몇 서신은 보편적이다. 예를 들면 로마서 같은 서신이다.
아무도 로마서8장을 유대인에게 로마서11장을 교회에게 적용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역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롬11:11-13).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 넣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일은 본보기와 훈계를 위해 기록되었다(고전10:11).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 속하지 않은 것을 교회에 적용해서는 안된다. "말씀을 올바로 나눔"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 또한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선지자", "제사장", "왕"이심을 배웠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 가지 사역을 묶어서 같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수행해 나가신다. 아담의 타락에서부터 십자가의 대속까지 그분은 "선지자(Prophet:예언자)"이셨다. 주님은 현재 "대제사장"이시며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왕"이 되실 것이다. 에덴에서 십자가 사이에는 "제단"이 있었으며 십자가에서 왕관 사이에는 "주님의 식탁"이 있으며,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넘기실 때까지는 "보좌"가 있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생애와 사역"이란 도표를 참조할 것
히브리서1:1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 번에" 걸쳐서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만약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해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분이 유대인, 교회, 이방인 중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를 구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가 "말씀하신 횟수"와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서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선지자로서 말씀하신 "지나간 때"와 그분의 아들로서 말씀하신 "마지막 날"에 관해서도 구분해야 한다(히1:1-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합하는 것"과 "나누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와 "구원", "믿음"과 "행위"처럼 합하신 것과 반대로 "천국과 지옥", "침례와 거듭남", "육신적 성품"과 "영적 성품", "신분"과 "상태"(Standing and State), "교회"와 "왕국"등과 같이 나누신 것을 합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반드시 "때들)"와 "시기들"를 구별해야 한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그는 '때'와 '시기'를 바꾸시며"(단2:21)라고 말했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에게는 그 '때'나 '시기'를 알게 하신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한에 두셨느니라(행1:7) 욥은 "전능하신 분에게서 '때'가 감추어지지 않음을 알면서"라고 증거하였다.(욥24:1) 그리고 잇사칼 자손 중에서 "때들(Times)을 알고"(대상12:32)란 말씀이 있다. 시기들로 우리는 해, 달, 별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변화되는 기후를 알 수 있으며 이와 같은 현상을 하나님께서 시기를 통제하기 위해 명하신 법칙이다(창1:14). "때들"에 관하여 우리는 "무지의 때들(Times of ignorance)"(행17:30), "이방인들의 때(Time of gentiles)"(눅21:24), "새롭게 되는 때(Time of refreshing)"(행3:19), "회복될 때(Time of restitution)"(행3:21), 그리고 "때가 찬 경륜 안에서 만물의 충만한 때들(Fullness of Times)"(엡1:10)과 같이 일컬을 수 있다. "때들과 시기들"이란 도표를 참조할 것
"이방인들의 때"라는 어휘 속에서 우리는 이방인이 권력을 잡고 있는 때이며 유대인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현재도 여전히 "이방인들의 때"가 지속되고 있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의 교회는 결코 정부를 세우거나 왕권을 차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방법으로만 성경을 구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반드시 "때"와 "영원"을 "시대들"과 "시간"의 "경륜"에 맞춰 구분해야 한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를 보면 성경에 언급된 시간대 외에 "두 시대"를 언급하고 있는데 "시간"이 창조되기 이전인 알파 ԡ(Alpha)시대인 "창조 시대"와 끝나는 영원 시대인ԏ오메가 ԟ(Omega) 시대인 "시대들의 시대들"의 있다는 사실이 계시되어 있다. "때(Time)"에는 세 "시대"와 일곱 "경륜"이 있다.
세 시대란:
1. 노아 홍수 이전의 "시대" (The Antediluvian age)
이것은 "타락"에서부터 "홍수"까지
2. 현 시대(The Present Ages)
"노아 홍수"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3. 시대들의 시대(Age of Ages)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서부터 "시간의 끝"까지 이 마지막 "시대"는 다시 "두 시대"로 나누어지는데
1.천년왕국 시대(The Millenial Age)
2.완전한 시대(The Perfect Age)
"천년 왕국" 시대는 앞선 여섯 "경륜"과 연관이 있다.
성경에서 "시대"란 "지각"의 대변동이나, 지구상의 "기후"의 대변화 등을 동반하는 것이다.이것은 흔히 지질학에서 말하는 "시대" 개념과 일치한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과 성경이 "시대"란 말의 개념에서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대홍수의 때에는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기 때문에 지상에는 엄청난 지각, 지표, 기후 변화가 있었다(창7:11). 노아의 홍수로 지구의 기후에 영향을 준 커다란 물리적인 변화가 있었고 대기권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살고 있는 동물들과 사람들은 수명이 단축되어서 60년에서 100년 정도밖에 살지 못하게 되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천년왕국이 시작되면 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다.
{그의 발이 그 날(천년의 날)에 예루살렘 앞 동편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서시리니, 올리브 산은 그 중간이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산의 절반은 북쪽으로, 산의 절반은 남쪽으로 옮겨지리라.}
{온 땅이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쪽 람몬까지 평원처럼 바뀔 것이요, 예루살렘은 높여져서 그곳에 사람이 거하게 되리니.}(스카랴14:4,10)
{살아있는 물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와 반은 "앞바다(홍해)"로 흘러 들어갈 것이고 반은 "뒷바다(지중해)"로 들어갈 것이다}(에스겔47:1-12)
이는 지중해보다 1200피트가 낮은 사해가 높여질 것이며 그 물이 넘쳐 남쪽 홍해로 흐를 것이며 소금기가 없어서 큰 고기떼가 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에스겔서 47:1-12절에서 어부들이 그들의 그물을 해변가에 친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12절).
이 "큰 지각변동"은 대홍수 이전의 상태로 회복된다는 의미이며 생명 또한 길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사야65:20에서 볼 수 있는데 천년 왕국에서는
{거기에는 날 수로 되는 어린 아이도 자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한 노인도 더이상 없을 것이니, 이는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요 백세가 된 죄인은 저주를 받은 것이 될 것임이라}
즉 100세는 어린 아이로 여겨진다면 대홍수 이전의 므두셀라처럼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는 것이다.
도표는 "세 시대"로 나누는데 여기서 "셋"은 하나님의 수인데(성부, 성자, 성령)이며 "7 경륜"이란 하나님의 수인 3과 세상의 수인 4(봄, 여름, 가을, 겨울) 또는 4가지 원소인(땅, 공기, 불, 물)을 합한 완전수인 7과 상응한다.
"시대"와 "경륜"의 차이는 "시대"가 지구상의 물리적인 엄청난 기후, 지표상의 변화를 초래하는 반면, "경륜"은 인간 역사의 "도덕적" 또는 "과도기적" 기간을 나타낸다. "경영"은 각 "경륜"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의 경륜에서 경영원리는 "율법(Law)"이었고 현시대의 경영방침은 "은혜(grace)" 이며 다가올 경륜은 "공의(righteousness)"이다.
"시대"와 "경륜"과 "세상의 끝"에 관한 모든 혼란은 헬라어 두단어를 잘못 해석하는데 기인한다. 그 첫 번째 단어는 "Kosmos(코스모스)"이다. "Kosmos"란 뜻은 자연세계의 외적인 아름다움과 질서를 뜻하는데 마태복음4:8절에서 처럼 세상적인 소유와 민족과 국가의 사상을 포함한다.
{마귀는 다시 주를 아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주께 보여주며}
또한 마태복음 13:38절에서 "밭은 세상이요"와, 누가복음11:50절에서 {'세상의 기초'가 생긴 이래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는 이 세대에서 찾아내야 하되} 여기서 이 "코스모스"란 단어는 170회 이상 나타나며 세상과 연관되어 있다.
두 번째 단어는 "Aion"으로서 그 의미는 "시대", "경륜", "무한한 시간"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28회 나타나며, 또한 "세상"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들을 얼마나 잘못 번역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13:39,40,49절만 들어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을 13:39,40, 49을 보라.
{독보리를 뿌린 그 원수는 마귀이며, 추수는 세상의 끝이요, 추수꾼들은 천사들이니라}
여기서 "세상의 종말"이란 "시대(Age)의 끝"이라는 말이다. 로마서12:2에서 또 같은 예를 볼 수 있다. "너희는 이 세상(age)과 일치하지 말고", "그들 가운데 이 세상(Age)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느니라"(고후4:4) "주께서는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자신을 주셨으며 이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악한 현 세상(Age)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함이라"(갈1:4) "이 마지막 날들에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를 통하여 그 분께서 세상(Ages)들을 지으셨느니라"(히1:2)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들(Ages)이 하나님의 말씀(예수님)으로 지어진 것을 아나니(히11:3).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세계"를 지으셨을 뿐 아니라(요1:1-3). "시간의 세계"도 지으셨으며 "시대"와 "경륜"을 계획하셨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1:1)
라는 장엄한 선포로 시작한다. 여기서는 "하늘"이란 말이 단수로 쓰인 것을 볼 때 이 때 창조행위는 우리들의 행성에만 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운이 있는 은하계의 공간이나 우주 전체라기 보다는 태양계에 한정되어 있다.
1. 아담이전의 최초의 땅 (Pre-Adamite or Original earth)
이 창조는 말할 것도 없이 무한한 과거이며 그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창1:1). 이것은 창세기1:3-5에 묘사된 첫째날의 시작이 아니다. , 창세기 1:3-31에 기록되어 있는 6일동안의 일은 하늘들이나 태양계 밖의 우주 공간이 아니라 "형체가 없고 공허한" "물과 어두움"이 스며들기 이전의 땅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로써 "이전에 있던 세상"은 물이 범람해서 멸망하였느니라}(벧후3:5-7)
아담이 지음 받기 이전의 "창조" 방법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냥 단순히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1:1)라고 선포한다.
과학을 참고로하여 살펴보면, 태양계와 최초의 지구에 관한 몇가지 가설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라플라스 성운 가설"이다.
성운 가설 (Nebular Hypothesis)
1796년 천문학자인 라플라스는 태양과 태양계의 행성들과 위성들은 엄청나게 큰 고온의 성운이 발전되어 이루어졌다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 거대한 가스 성운 물질이 냉각되면서, 수축되면서 중심을 기준으로 회전 속도가 점차 빨라지면서 적도 부근이 돌출되고, 극이 평평해지고, 불록 렌즈처럼 가장자리가 길어지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중심 물질이 응축되면서 떨어져 나간 많은 환상 물질도 또한 응축되었다. 중심 부분과 멀리 떨어져 나간 성운 물질은 동일한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일부는 늦게 돌아 더욱 멀어지고, 나머지는 뭉쳐지면 더욱 가속되었다. 이로써 가장 바깥의 궤도는 해왕성이 가장 안쪽은 수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달과 같은 "위성"들도 마찬가지로 형성되었는데, 성운을 이루는 물질이 각 행성들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떨어져 나가 형성되었다. 이때 형성되다가 남은 흔적으로 목성의 띠를 예를 든다.
또한 지금 화성과 목성 사이에는 이 때 남은 잔재들로 추측되는 소행성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행성들의 파편들이다. 이것들은 다른 행성들과 마찬가지로 태양의 주위를 같은 방향으로 공전하고 있으며, 이 소행성들이 행성들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소행성들 거대한 행성인 목성에 근접해 있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태양과 태양계의 행성들이 동일한 원시 성운으로부터 기원한다면 화학적 구성이 동일하며, 스펙트럼 분석과도 서로 일치하여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가장 바깥의 행성들이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행성이 클수록 천천히 식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성운 가설"이 옳다면 목성과 토성은 여전히 뜨거워야만 하고, 점차 시간이 흘러 지구처럼 적당한 온도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성운설"의 반대 주장으로서 성운설의 바탕인 "가스" 성운은 이 차가운 우주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성운의 이루는 물질은 가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빛나는 유성에서 알 수 있듯이, 유성 입자들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입자들이 결합하여 행성들이 형성되거나, 작은 소행성들이 서로 충돌하며 결합하여 뭉쳐졌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 가설들은 증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다.
우주에는 "태양계"로 형성되가는 것처럼 보이는 "나선형의 성운"들이 수 없이 많다. 이것들을 고성능의 망원경으로 관측한 결과 이러한 성운들은 가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별들의 잔재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수 많은 성운들은 가스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1914년 5월, 아리조나에 있는 플래그스태프 천문대의 슬리퍼 박사(Dr. Slipher)는 슬펙트럼 분석을 통하여 처녀자리 성좌에서 "라플라스 성운설"을 증명하는 성운들을 발견하였다.
성운설에 관한 증거로써는 (1) 행성들의 궤도가 거의 원에 가깝다. (2) 태양의 적도와 거의 같은 선상에서 행성들이 공전한다. (3) 행성들은 태양과 같은 방향으로 공전한다. (4) 각 행성들의 자전 방향이 서로 같다. (5) 각 행성들과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는 성운들과 "위성(달)"들이 있다. (6) 지구는 식어 가고 있다. 예를 들어 뜨거운 철구를 식힐 경우 외부는 금방 식지만 내부는 여전히 뜨겁다. 즉 지구의 지각은 식었지만, 화산 폭발로 알 수 있듯이 내부는 여전히 뜨겁다.
지구가 형성되가고 있을 당시 가스와 금속성 기체로 가득찬 대기로 둘러싸인 용융 상태의 뜨거운 덩어리였다. 이 구형의 덩어리는 복사열을 방출하면서 식어가기 시작했으며 겉 표면에는 얇은 지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천천히 식어가면서 지각은 점차 두꺼워졌으며, 지각의 식은 부분은 내부로 가라앉고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진, 화산폭발과 지충이 기울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로써 지구 표면의 산맥들과 다양한 지형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태양계가 형성되는 수천년 간 땅은 식어가면서 대기중에 수소와 산소를 방출했으며 이 원소들은 물을 형성하여 지구 위에 떨어졌다. 지구는 매우 뜨거운 상태였기 때문에 물은 즉시 증발하여 수증기로 변했다. 처음에는 증기 상태로만 존재했으나, 계속적인 순환으로 바다와 대양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바위로만 뒤덥혀 있던 지구 표면은 풍화작용으로 토양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채소와 나무들과 초목들이 나타났다. 그 후 바다 생물과, 물고기 새들이 뒤따랐으며, 다른 생물들이 생겨난 후에야 지상의 동물들이 처음의 땅에 거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구가 이처럼 거주하기 적당한 환경이 되기 위해 걸린 시간을 관한 막연히 추측만 할 뿐이다. 우리는 알고 있듯이 석탄은 죽은 식물들로 형성된다. 이 석탄이 말들어졌던 "석탄기"의 대기는 탄소산 가스로 가득차 있어 동물들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당시 대기는 축축하고 한증탕의 수증기 같았을 것으며 식물들은 매우 조밀하게 자라나, 양치류와 초목은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지각 변동과 환경의 변화로 석탄기의 거대한 산림은 땅밑으로 묻혔으며, 이 죽은 식물들은 엄청난 압력이 가해져 석탄이 되었다. 이러한 작용이 계속되면서 석탄층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현재의 가장 무성한 식물들로 석탄층 6인치를 형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1200년이 걸리며, 3피트(약0.9m)의 층을 형성하는데는 약 7200년이 걸린다. 노바 스코티아는 76피트의 석탄층을 측정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22피트, 다른 사람은 37피트를 측정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지구의 석탄층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수천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구가 용암상태에서 거주하기 적당한 상태가 되기 위한 수만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는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성경과 과학 사이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과학은 땅이 형성되기 위한 수천년이 필요하다. 즉 이 모든 시간은 창세기 1:1절의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라는 경이로운 말씀이 해답이다. 이 구절은 땅이 형성되는 모든 기간과 인간이 거주하도록 땅을 준비시키는 모든 기간이 포함된다.
옛날 이집트인인 플라토는 땅과 하늘은 "펄프"의 일종에서 기원하였으며, 사람은 나일강의 진흙에서 발생하였다고 가르쳤다. 이집트의 다른 현자들은 세상은 "날개 달린 달걀"에서 부화하여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이집트의 모든 지혜를 배웠던"(행7:22) 모세는 왜 날개 달린 달걀에서 세상이 시작되었다고 가르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어떻게 세상이 창조되었는지 모세에게 계시하여 주셨던 것이다.
2. 혼돈된 땅 (The Chaohic earth)
"태초의 땅"이 창조된 후 측량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났다. 분명히 이 땅은 가장 아름답고 땅위에는 식물들과 고기와 가축들이 덮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이 상태가 지속되었는지 말할 수 없지만 여기에 엄청난 재앙이 발생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게 되었으며 물과 어둠속에 잠겼다(창1:2). 이 사건이 태초가 아님을 이사야45:18절에서부터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늘들을 창조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하나님은 스스로 땅을 조성하고 만들었으며, 그는 그것을 견고히 세우되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셨으니, 사람이 거주하도록 조성하였느니라."
태초에 창조한 땅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헛되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것은 분명히 인간이 창조되어지기 이전에 아담과 이브를 타락시켰던 죄가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여기에 대해 에스겔28:12-19절에 매우 주목할 만한 계시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투로 왕"
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것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에 있었으며 아름다움과 지혜가 충만했었다. 여기서의 에덴은 아담의 에덴이 아니라, 처음 창조된 땅의 에덴이었다. 여기서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서 걸어다녔으며", "그는 창조된 날로부터 죄악이 그에게서 발견되기까지 완벽하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높아졌으며" 그의 지혜는 찬란함으로 인하여 부패되었다.
아직 이 지상에는 말씀에 기록된 "투로 왕"이 존재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여기에 묘사된 투로왕은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육신을 입은(육화:Incarnated) 사탄으로 그가 타락하기 이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일 것이다. 이 때 사탄은 엄청난 무리의 천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태초의 땅, 즉 아담이전의 지상을 책임지고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교만으로 인해(딤전3:6, 사14:12-14) 하나님과 동등 되고자 하였다. 이 땅은 혼돈케 되었으며 하나님은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심판하셨다. 사탄과 그의 천사들(하늘의 천사 중 1/3정도의 수)(계12:4)은 하늘에서 쫓겨나 그들의 처소가 된 둘째 하늘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 둘째 하늘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기권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세째 하늘의 사이의 우주공간이다. 그리하여 그는 "정사와 권세", "이 세상의 어둠의 주관자" 높은 곳들에 있는(둘째 하늘) "영적인 악"이 되었다.
이에 대한 경고는 에베소서 6:12에 잘 나온다. 이것은 일리 있는 말인데, 왜냐하면 성경은 사탄은 "이 세상의 공중 권세의 통치자"(엡2:2), "이 세상(시대)의 신"(고후4:4)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은 그가 이 세상의 통치권을 다시 얻은 것과 같다. 만약 인간과 같은 존재가 아담 이전, 태초의 땅에 존재했더라면 아마도 틀림없이 사탄이 타락할 때 그 부류에 속했거나 함께 멸망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바와 같이 "마귀들(demons)"은 아담 이전의 시대에 육체가 없는 영들로 이 땅에 살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인간의 몸에 들어가려 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도 다시 몸을 입고 싶어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몸이 인간의 몸과 비슷한 몸을 입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당연한 의문을 갖게 되는데, "만약 아담 이전의 지상에 살았던 거주자들이 인간과 비슷했다면 혼동되었을 때 그들의 화석이 어디엔가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우리는 그들의 화석을 바위나 흙에서 찾을 수 없는 거지?" 대답은 이렇다. "그들의 몸은 불로 소멸되었으며, 마치 천년왕국의 말기에 곡과 마곡에서 반역한 무리들의 경우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계20:7-9) 그리고, 모면한 영들은 위에서 언급한 마귀들이 되었다.
마귀들은 분명히 사탄의 천사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귀들은 자유로운 반면에 사탄의 천사들은 끝없이 깊은 구렁(bottomless Pit)에 갇혀 있으며 단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서 제한된 자유가 주어질 뿐이다(계9:1-21). 그들은 또한 베드로후서 2:4과 유다서 6-7장에 나오는 "타락한 천사들"(fallen angels)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보좌 심판 때에 흑암의 사슬에 갇힐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들이 고통받을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마8:29).
만약 사망이 아담 이전의 시대에도 있었다면, 아담이전 시대에 살던 자들의 육체도 땅에 묻혔을 것이다. 그들이 점령하고 있던 이 땅에 그들이 매장되었다면 아마도 그 장소는 대서양이나 태평양이 될 것이다. 이 말이 그러한지는 다음의 성경구절이 대답해 줄 것이다. "바다도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고 또 '사망'과 '지옥(Hades)'도 그들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 주니 그들이 각자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계20:13). 여기서 우리는 "사망"(Death)과 다른 "바다"가 있음을 알게 되며, 육신을 삼켰던 (무덤) "지옥" 또는 "하데스"에서 죽음과 부활사이에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바다의 죽은 자들"은 해저 밑바닥에 잠들어 있는 인간의 부류와 다르며, 아담이전의 세계의 죽은 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같다. 아담 이전의 죽은 자들은 현 세대의 죽은 악인들보다 먼저 심판을 받을 것이 확실하다.
아담 이전 세상의 모습은 "형체가 없고 공허" 하였으며, 이것은 단지 거주지로서의 지구의 외면의 모습만을 언급하는 것이며 베드로에 의해서 분명히 계시되었다.
{이는 그들이 이것을 고의로 잊으려 함이라.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다는 것과, 땅도 물에서 나왔고 물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 이로써 이전에 있던 세상은 물이 범람해서 멸망하였느니라}(벧후 3:5-6).
여기서 베드로가 언급하는 물은 노아의 홍수가 아니다. 노아의 날의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은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으되(창3:1-11)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큰 백보좌 심판)(계 20:11-15) 불사르려고 간수되어진 것이라}
아담 이전의 세상은 물에 의해 "형체가 없고 공허"하게 되었다. 땅의 표면 위에 있는 물은 땅덩어리의 약 1/4950 이다. 물이 11마일의 깊이로 땅을 덮으면 온 세상을 평평하게 완전히 덮을 수 있다. 격렬한 지각 변동은 아담 이전의 지구에 생존해 있던 모든 생물들을 완전히 파괴시켰으며 물이 땅을 완전히 덮었다. 땅위에 살아있는 동물은 모두 죽었다. 모든 목적과 의도 속에서 비록 셋째 날이 되면 부활의 싹을 틔울 준비가 되어있는 식물들의 씨앗이 땅 속에 묻혀있었지만 땅은 여전히 지구는 죽은 행성이었다. 태양의 따듯한 광선이 없음으로 이 땅을 생명의 "겨울"로 만들어 버렸으며 잠긴 물들이 얼음으로 응고되어 네발 달린 짐승과 날개 달린 짐승들이 보존되어 아담이전의 지상의 생물들이 있었음을 짐작한다. 이것이 지질학에서 말하는 빙하시대일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 그 시대의 환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땅을 보았더니, 보라, 형체도 없고 공허하며 하늘들에는 빛도 없더라. 내가 산들을 보았더니, 보라, 그것들은 떨고 모든 작은 산들도 가볍게 진동하더라. 내가 보았더니, 보라, 사람도 없고 하늘들의 모든 새들도 날아 갔더라. 내가 보았더니, 보라, 비옥한 곳이 광야가 되었으며 거기에 있는 모든 성읍들이 주의 임재 앞에서 그의 맹렬한 진노로 무너져 내렸도다.}(렘4:23-26)
만약 이것이 보이는 대로 지상의 모습과 그 파괴를 묘사한 것이라면, 아담이전의 거주자들은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아담이전의 이 땅을 파괴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이 땅을 점령한 자들의 죄성의 증거들과 역사적 유적들을 지워 없애는 것일 것이다.
이 땅을 창조한 시기와 "형체가 없고 공허하게 되었을 때"의 시간적 경과가 얼마나 되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또 그러한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거주할 수 있는 장소로 회복하시고자 하신 목적을 가지셨을 때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적의 환경으로 조성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6일이란 기간 동안 이 일을 하셨다. 히브리어로 "날"(day)는 하루 24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고 더 길 수도 약간 짧을 수도 있다.
3. 현재의 지구
창세기 1:1-31절에 묘사된 6일 동안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최초의 지구를 어떻게 만드셨는가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형체가 없고 공허한" 이 땅을 어떻게 현재와 같은 상태로 회복하셨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만약 노아 때의 홍수가 지역적이고 단지 이 세계의 한 부분에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면 회복된 지구의 지형은 아마도 오늘날과 똑같았을 것이다.
물질의 기원
1. 첫째 날- 우주의 빛
2. 둘째 날- 대기권의 재정리,창공을 나눔
3. 셋째 날- 1.마른 땅이 다시 나오게 함
2.식물이 다시 나옴
생명의 기원
4. 넷째 날- 태양 빛이 회복됨
5. 다섯째 날- 물고기와 새들의 창조
6. 여섯째 날- 1.육지의 동물을 창조
2.인간의 창조
7. 일곱째 날- 일하지 않으시고 안식하심
첫째 날
창세기1:2-5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 거니시더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더라.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그 빛을 어두움에서 나누시더라.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고 낯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이것이 "첫째 날"이더라}
때가 되어 이 지구를 거주할 수 있는 환경으로 회복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이 땅을 거주할 수 없게 만들 때와 반대 과정을 밟으시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성령은 물의 표면 위를 알을 품듯이 품으셨으며,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창조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단순히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마치 "불을 켜라"와 같은 식의 말씀이다. 이 빛은 태양의 빛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름들은 걷히지 않았기 때문에 태양 빛이 땅에 비추일 수 없었다. 최소한 넷째 날까지는 창조하지 않으셨다. 이 빛은 의심할 바없이 '전기 에너지의 빛'일 것이다. 마치 오로라 현상이나 북극의 빛과 비슷한 것이다. 전기는 최초의 힘이었으며, 공기중에 항상 존재하고 있지만 최근에야 우리는 이 전기를 이용하는 법을 배워 도시를 밝히고 있다. 대기권의 백열은 말할 것도 없이 매우 강렬하여 지구를 둘러 싸고 있는 얼음들을 녹여 물을 형성했으며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형성되어 구름이 생겼다. 이리하여 둘째 날 사역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어두움(Darkness)이 빛(Light)으로 변했으므로 하나님은 "어두움"을 밤이라 하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게 된 것이다. 지구는 역사의 밤(Night)을 통과하여 이제 부활의 날의 밝음(the brightness of Resurrection day)으로 나오게 되었다. 매일의 사역은 전날의 사역에서 약간씩 나아갔으며, 밤에 시작해서 아침에 끝났다.
둘째 날
창세기1:6-8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 가운데 창공이 있으라. 창공으로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게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창공을 만드시고 창공위에 있는 물들에서 창공 아래 있는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창공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둘째 날"이더라}
하늘이라고 부르는 "창공"은 하늘이란 말을 통해 우리의 대기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혼돈된 땅'에서는 대기권이 없었으며 구름의 형성에 상관이 없는 우리들이 하늘이라고 부르는 창공, 즉 대기권으로 둘러싸인 하늘로 이해할수 있다. 혼돈된 땅"에는 대기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수증기를 통해 구름을 형성하기에 부적합했다. 땅위에 있는 물(바다)을 창공(대기권)위에 있는 물로 나누셨다. 둘째 날의 사역은 현재의 지구와 같은 바로 "대기권의 회복"이었으며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둘째 날이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이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는 말씀을 주목할 만하다. 나머지 모든 날들에 있는 이 말이 둘째 날은 빠져있다. 우리는 이 까닭을 별로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에베소서 2:2에서 "공중의 권세의 통치자"란 말을 읽게 되는데 "높은 곳에있는 영적 악들"(엡6:12)은 그들의 두목인 사탄과 함께 다시 이 땅을 그들의 거주지로 삼으로 의도로 대기권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공과 대기권을 보고 "좋았더라" 라는 말씀을 할 수 없으셨다.
셋째 날
"셋째 날"의 사역은 두 가지인데, 바다로 부터 땅의 출현과 식물의 재출현이다.
땅의 출현
창세기 1:9-10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의 물들이 한 곳으로 함께 모이고 마른 곳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마른 곳을 땅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함께 모인 곳을 바다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이것은 단순히 아담 이전의 물로 뒤덮였던 세상을 반전시키고 땅의 융기를 통해 "물에 잠겼던 지구"에서 땅을 드러 낸 것이다.
식물의 출현
창세기 1:11-1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땅 위에 풀과, 씨를 맺는 채소와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씨를 가진 과실수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땅이 풀과, 그 종류대로 씨를 맺는 채소와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씨를 가진 나무를 내더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셋째 날"이더라.}
이것은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부활이다. 땅은 "죽음의 물"로 부터 나와서, 씨들, 식물의 뿌리들과 풀과 나무들이 싹트도록 명령을 받았으며, 아담 이전에 물에 잠겼던 대재앙(catastrophe)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싹을 내고 씨를 맺고 자라도록 하셨다. 만약 "대재앙"'이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빙하기"에 있었던 일이라면, 식물의 부활은 더이상 "창조적 행위"가 아니라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면 싹을 내는 것과 같은 그런 이치일 것이다. 이는 다음 구절에서 분명해 진다. "땅은 땅위에 풀과 씨를 맺는 채소와 그 종류대로 열매맺는 씨를 가진 과실수를 본래대로(in itself)내라"(창1:11-KJV역) 즉, 씨는 이미 이 땅에 있었으며 아담 이전에 땅을 휩쓸었던 물에 매장되었지만, 파괴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적절한 환경을 조성하시고 명하시자 싹이나 신록과 함께 이 땅을 덮게 되었다. 이것은 아담 이전의 지구는 현재의 지구와 마찬가지로 나무들과 식물과 신록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넷째 날
창세기 1:14-19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낮과 밤을 나누기 위하여 하늘의 창공에 '광명들'이 있으라. 그것들로 하여금 징조와 계절과 날짜와 연도를 위해 있게 하라. 그리고 광명들은 하늘의 창공에 빛이 되어 땅 위에 빛을 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두 가지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은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은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별들도 만드시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늘의 창공에 두시고 땅위를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넷째 날"이더라.}
넷째 날의 태양과 달의 출현은 새로운 창조가 아니다. 그들은 아담 이전의 지구에 이미 존재했으며, 땅이 공허해졌을 때 파괴되지 않았다. 16절의 "만드사"(made)란 단어는 1절의 "창조"(created)와 같은 단어가 아니며, "창조" 행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구름이 벗겨지고 태양과 달의 광선이 보여졌으며, 그때부터 해와 달은 현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징조와 계절과 날짜와 연도를 측량하도록 명해졌다. 다시 말하면, 넷째 날에 "영원"에 대비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다섯째 날
창세기 1:20-2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은 생명이 있는 생물들을 풍성히 내고, 땅 위 하늘의 넓은 창공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며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에서 풍성하게 나온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모든 날개 있는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식하여 바다의 물들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다섯째 날"이더라}
"다섯 번째 날"은 물고기와 새를 창조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란 단어를 1절에서 '태초의 땅'을 창조할 때 접한 이후로 처음 보게 된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아담 이전의 세상에 살았던 모든 동물은 "대재앙"때 멸망하였음을 보여준다. "다섯째 날"에 창조된 고기와 새들은 오늘날 살고 있는 것과 똑 같은 종(種)이다. 화석에 나타나 있는 거대한 바다 고기들, 동물, 새들은 아담 이전의 세상에 속한 것들이다.
여섯째 날
"여섯째 날"의 창조 사역은 두가지로, 땅의 짐승과 인간에 관한 것이다.
땅의 짐승 창조
창세기 1:24-25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어다니는 것과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땅의 짐승들은 현재 우리 시대의 짐승과 똑 같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종류대로"
란 말은 5번 반복되는데, 이는 한 평범한 종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와 "진화"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동물의 모든 종(種)들은 각각 서로 다르게 지음받았기 때문에 종(種)과 종(種)의 결합은 불가능하거나 후손을 양성할 수 없는 종(種)으로 출현한다. 당나귀와 말을 교배하면 노새가 나온다. 이 노새는 자손을 생산할 수 없는 종이다. 만약 동물과 식물의 점진적 발전을 주장하는 진화론이 맞다면, 우리는 화석에서 종과 종의 중간단계를 발견할 수 있거나, 현재도 진화 도중에 있는 종자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인간으로 변할 것같은 동물이나 식물)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에서도 그런 것을 볼 수 없다.
동물과 식물은 인간의 지식속에는 항상 같은 모습으로 존재해 왔다. 새들은 예전에 늘 그러했던 것처럼 둥지를 짓고 알을 낳으며 새끼를 기른다. 비버는 둑을 만들고 벌은 벌집을 만들지만 옛날과 달라진 것이 없다. 인간만이 홀로 생활양식을 발전시키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농업에서만 보아도 인간은 돌조각으로 만든 쟁기로 시작해서 키를 만들고 복잡한 쟁기와 경운기와 바인더와 컴바인과 탈곡기를 만들며 농업기술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농기구를 통해서도 인간의 삶의 여러 형태를 추적해 나갈 수 있지만 어떤 동물계나 식물계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이는 중간 단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진화론이 정확하다면, 이 원리는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종족에서 슈퍼맨의 종족으로 진화되어 가고 있는 중간 형태의 인간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이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두 번째 사역
창세기 1:26-28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image)대로 우리의 모습(likeness)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모든 땅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니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으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Replenish) 그것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위에 언급된 인간은 물론 "창조"되었지, 원숭이의 후손이 아님을 보여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지 "원숭이"의 형상으로 지음받지 않았다. 인간은 짐승을 재료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땅의 흙"으로 형성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고등 동물이라도 저능한 인간과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 "잃어버린 연결고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한 종족인 것은 서로 다른 인종이나 민족이 결혼을 했을 때 후손은 불임이 아니라는 것을 볼 때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백인종과 유색인종은 서로 다른 조상을 가지고 있으며, 백인종만이 아담의 유일한 후손이라는 주장이 근거없는 소리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 창세기 1장과 2장은 아무런 모순이 없다. 창세기 1:26-28은 인간 창조의 사실을 말해주며, 창세기 2장은 인간 창조의 방법을 말해준다(창2:7). 하나는 또 다른 하나를 보충해 설명해 준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엘로힘"(Elohim)으로 계시되어 있고, 2장에서는 인간과 더불어 계약을 맺으시기 때문에 "여호와(JEHOVAH-The Lord)"로 불리운다. "엘로힘(Elohim)"과 "여호와(Jehovah)"란 이름은 복합어로 형성되어 있으며 그분의 존재(Being)에 관한 모든 의심을 불식시켜 준다. 이 두 이름은 이 부분에서는 참으로 적절한 이름이며 다른 곳에서는 다른 적절한 이름이 계시된다. 성경 비평가들은 "엘로힘파"와 "여호와파"라고 명명하는 조잡스럽고 모순되는 여러 문서들에서 편집했다는 주장을 하지만 실은 거룩한 성경 기자들이 이 두 이름을 철저히 구별해서 사용한 것이다.
창세기2:7에서 우리는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부터 인간을 취하셔서 회반죽으로 만든 조각품 같은 인간을 단장하시고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인간이 삼중적인 존재로 지어졌음을 알 수있다.
1. "몸(body)"의 형성-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2. "영(spirit)"을 주심-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이것은 성령(Holy spirit)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인의 영(Natural spirit)이다. 그래서 인간의 영안에 성령이 반드시 내주하셔야만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의 영에 "하나님의 영이 안식" 하신다.
3. "혼적인(soulish)" 부분-"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혼은 인간의 "자아를 인식(self-conscious)"하며, 감정, 애정, 기억등의 기능을 한다.
인간의 주요한 두부분은 몸(Body)과 영(Spirit)이지만, 각각의 기능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첫째는 육이요, 둘째는 영, 셋째는 영과 몸을 연결해 주는 혼이라 부르는 부분이다. 혼을 통해 영과 육은 교통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삼중적이다(살전 5:23, 히4:12). "영적 세계"와 "인간의 3중성"이란 도표를 참고하라.
아담 안에서 원래 창조되었을 때는 인간의 혼은 거의 완벽한 매개체로써 육과 영의 교통에 아무런 다툼이 없었다. 영, 혼, 육 이 세부분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인간이 타락하자, 혼은 몸과 영의 전투 장소가 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7:7-24절에서 이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브는 아담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약간 나중에 지음받았다.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동료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그에게 "돕는 베필"을 주시기로 하셨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드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대신 거기를 채우시더라.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했던 "갈비뼈"로 여자를 지으셔서(made) 그녀를 그 남자에게로 데려 오시니 아담이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니, 그녀를 여자라 부르리라. 이는 그녀가 남자에게서 나와(out of Man) 취해졌음이라." 하니라.}(창2:21-23)
아담과 이브는 똑같은 방식으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둘 다 하등 동물에서 진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지음을 받았다. "그를 창조하셨으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니라."(창1:27) 이브가 아담과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지음받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각의 남자와 여자는 남편과 아내가 되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육체적인 관계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본다. 이브가 그에게 주어졌을 때 그는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우리가 그의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체임이라.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 둘이서 한 몸이 될지니라. 이것은 위대한 '신비'라.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그 교회에 관하여 말하노라"(엡5:30-32).
아담은 어린 아기나 원시인으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장한 어른으로 지음받았으며,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의 이름을 다 지을 수 있을 만큼 지능과 지식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의 후손이 음악과 악기를 만들고 기계 장치를 고안하였으며, 도시와 탑을 건설할 수 있었으며, 노아는 방주를 지을 수 있을 만큼 지혜와 재능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하등 동물에서 진화한" 대신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창세기 1:29-30절에서 우리는 본래는 동물과 인간이 모두 식물만을 먹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아의 홍수 이후부터 인간과 동물은 육식이 허락되었다.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동물)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되리라. 내가 모든 것을 푸른 채소(그들의 음식)같이 너희에게 주었느니라. 그러나 "고기"를 생명과 더불어, 즉 "거기에 있는 피째" 먹지 말지니라}(창9:3-4).
고기를 먹을 때는 반드시 먼저 피를 완전히 빼야한다. 왜냐하면 "피"는 동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에 와서야 비로서 시내산으로 부터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졌다. 율법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기어다니는 짐승, 날아다니는 새 등등을 그들에게 금지하셨다(레위기 11:1-47).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하시다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그것이 아주 좋았더라(very good). 저녁과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더라."(창1:31).
하나님은 악의 근원이 아니다. 악은 죄와 불순종의 열매이다. 가시와 엉겅퀴와 독있는 식물, 씨앗들, 뱀과 같은 독있는 동물들은 모두 죄의 결과이다. 이것으로 하늘과 땅은 6일동안 모두 회복되고 다시 거주하게 되었다. 이를 "회복 주간"이라고 한다. 과학의 순서와 성경의 회복주간에 있었던 8가지 하나님의 사역의 순서가 정확히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 8가지를 경우의 수로 정확히 순서대로 일치시키려면 1/40,320 (1×2×3×4××6×7×8)의 확률이 나온다. 확실히 모세는 영감을 받아 이것을 기록했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여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곱째 날
창세기 2:2-3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하시던 일을 끝내시고, 자신의 하시던 자신의 모든 일로부터 일곱째 날에 쉬시니라.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그것을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지으신 그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음이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3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아버지 하나님은 물질을 창조하셨고, 아들 하나님은 그 물질을 취하셔서 세상과 거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만드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생명이 존재하는 것들 속으로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다(요1:1-3,엡3:9,골1:12-16). 하나님은 일이 모두 끝났을 때 쉬셨다. 일이 끝난 것은 안식을 위한 합당한 이유이다. 하나님이 쉬신 것은 일이 끝났기 때문만이 아니라 보시기에 좋았기(Good)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으신 것에 대해 조금도 불만이 없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이 죄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훼손되었을 때 하나님의 "안식"은 깨어졌다. 인간이 타락하자 마자 하나님은 다시 일을 시작하셨는데, 이 일은 물질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의 구속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물(New Creation)"이 되도록 하는 일이었다(고후5:17).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실 때-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나의 아버지께서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지금 구속을 위해) 일하노라."(요5:17).
창세기 2:1-3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사역의 "일곱째 날"에 쉬셨다라고 듣는다. 그 날은 안식일(Sabbath day)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을 안다. 즉 일곱째 날을 쉬는 날로 떼어 놓으신 것이다. 우리는 창조 때의 일곱 째 날의 길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죄가 그 날을 짧게 하지만 않았다면 아마 다른 날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약 안식일을 "인간의 타락" 이전에 제정하셨다면, 창세기에서 안식일이란 단어가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아담이나 노아나,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선조들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록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가 칠일에 대에 가진 유일한 암시는 창세기 7:4,10이며, 홍수가 나기 이전에도 일곱 째 날은 은혜의 날로 인식되었다. 창세기 8:8-12에서, 비둘기를 내보는데 칠일의 간격을 둔다. 안식일에 대해서 우리가 처음으로 읽을 수 있는 곳은 출애굽기 16:23-26에서이다. "육 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둘 것이나 칠일째는 "안식일"이니 그 날에는 아무것도 없으리라." 하더라. 여기서 일곱 째 날은 안식일로 인식되었다.
창조주간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의 모형으로써 출애굽기 20:11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엿새 동안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는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 날을 복 주고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출애굽 후에야 비로소, 안식일은 지켜야 하는 계명이 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하나님의 "안식"은 "인간의 타락"으로 깨어졌으며, 구속이 완료될 때까지 안식이란 없으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유월절을 통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의 집이 출애굽할 때 잘 드러난다. 이스라엘을 구속한 목적은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과 힘든 노역으로부터 해방하여 카나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다(신5:15).
몇주 후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며,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날을 기억하고 그것을 거룩하게 지키라."(출20:8)고 명하셨다. 그들이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켜야 할 "안식일"은 하나님이 쉬신 일곱째 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지정하신 그 날은 친히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신 날이다.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준수하라는 명령이 주어진 것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방인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안식일은 "모세의 언약"으로서 이스라엘에게 "표적"(sign)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너는 또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들을 참으로 지킬지니 이는 너희 대대에 걸쳐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임이라. 이로써 내가 너희를 거룩케 하는 주임을 너희로 알게 하려는 것이라(출31:13; 겔20:12,19-21).
안식일은 유대인에게만 속한 것이며 이방인(세상)이나 교회(자녀들)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여러분들은 유대인을 제외한 어떤 민족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폐기되거나 변경되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이다. 지금은 호세아서 2:11의 예언대로 안식일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다시 결합되어서 그들의 땅으로 되돌아 올 때 안식일은 지켜질 것이다(사66:23,겔44:24, 46:1-3).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안식일"은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의식도 아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율법"의 일부분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롬6:14). 갈라디아 교회에 쓴 바울의 편지에는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을 어리석다고 책망했으며, 율법을 행하려하는 자는 은혜 아래 있지 않고 "저주 아래 있다"고 선포했다(갈3:10).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알려졌는데 어찌하여 너희는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종교적 의식들)으로 다시 돌아가 거기서 다시 종노릇하기를 원하느냐? 너희는 날(안식일)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도다. 나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9-11). "그러므로 음식으로나 마시는 것으로나, 거룩한 날이나 새 달이나 안식일들에 관해서는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골2:16).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키려한다면 그는 그들의 모든 율법과 의식을 다 지켜야 할 것이다.
유대인의 의식으로서 안식일은 다른 모든 "명절"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경륜이 마감됨과 동시에 그 기능들도 중단되었다. "할례"가 "침례"가 아니듯이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그리스도인들의 주일로 대체된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유대인과 연관되어있고 "그리스도인"은 은혜와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분리하신 "율법"과 "은혜"를 다시 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week)의 첫째 날에 모였다(요20:1,19, 행20:7, 고전16:2). 안식일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경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이다. "주의 첫날"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들이 쉬고 예배드리는 날로 모였다. 구약에서 "제 팔일" 또는 "안식일 후 다음날"로 예시되어 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거기서 수확을 거두면, 너희는 수확의 '첫 열매들'의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올 지니라. 그러면 그가 주 앞에서 그 단을 너희를 위하여 받아들여지도록 흔들지니 '안식일 후 다음 날'에 제사장은 그것을 흔들지니라"(레23:10-11). "첫 열매들"은 무엇을 예표하는가? 고린도전서15:20절을 읽어 보자.-"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셔서 잠들었던 자들의 '첫 열매들'이 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첫 열매들"이 되신때는 언제인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신 때는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일 다음날 아침"인 "주(Week)의 첫째 날"이다.
부활하신 때는 교회의 "탄생"은 오순절이었다는 사실과 이 날이 바로 "주의 첫째 날"이었다는 점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즉 "일곱째 날"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첫째 날"을 지켜야 한다는 근거가 된다.
유대인들의 안식일(토요일)이 구약 시대에 해당되는 진리라면 주의 첫째 날(주일:周日)은 신약에 해당되는 진리인 것이다. 로마 캐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7일째인 안식일이, 8일째인 주일로 바뀌었다는 교리는 완전히 거짓이다. 왜냐하면, "주의 첫째 날"이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드리는 날로 정착된 후, 한참 후에야 로마 캐톨릭 교회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서 제 4 계명인 안식일을 준수하는 사항만 제외하고 나머지 계명들만이 다시 한번 재 강조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롬13:8-10, 엡6:1-2, 약5:12, 요일5:21). 만약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여전히 있다면 왜 신약 성경에서 빠져있겠는가? 그것은 '주일(Lord's day)'로 불린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한 날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안식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날은 예배와 경배와 거룩한 행위로 채워져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 날은 게으름이나 쾌락이나 세상적인 토론이나 행사를 하는 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기 위한 날인 것이다.
이 시대는 공허한 땅을 회복한 때부터 노아 홍수 때까지의 기간이다. 여기에는 두 경륜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에덴의 경륜(무죄 시대)
이 시대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때부터 이들이 타락하여 동산에서 쫓겨날 때까지이다. 이 기간이 얼마나 오랫동안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다만 그렇게 길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무죄 시대"였다는 점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지구위에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 한 때는 가장 완벽한 환경을 구비하고 있었다. 이 땅은 창조이전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물들에는 고기들이 놀았고, 땅위에는 온갖 진귀한 과실들과 채소들이 있었으며 언덕과 계곡과 평지에는 양들과 소들, 온갖 종류의 짐승들이 평화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향기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사람을 위협하는 해일이나 폭풍, 자연을 파괴하는 재해도 없었을 것이다. 땅은 안개로 지면을 덮어서 수분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완벽했으며 우리가 창세기 1:31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의 동편에 동산을 지으시고 거기에 사람을 두셨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거주하게 하신 이 동산에는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은 많은 과실수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도 있었다. 동산은 에덴에서 흘러나온 아름다운 강으로 적셔졌으며, 하나님은 그곳에 아담을 두시기 위해 준비해 두셨던 것이다. 에덴의 동산은 비교할 수 없는 희락과 형용할 수 없는 사랑과 상담자이신 하나님과 손님으로 방문하는 천사들과 교제하며 죄없이 순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며 인간의 선조들은 살 수 있었던 곳이다. 환경은 너무나 이상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과 같은 동료가 없었다. 남자가 홀로 지내는 것은 좋지 못했기에 그런 완벽한 환경 가운데서도 외로왔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자를 지으리라"고 하시며 그를 깊은 잠이 들게 한후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셔서 여자를 지으셨다. 이것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최초의 수술이다.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신 후 얼마나 지난 후에 살을 채워넣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눈을 뜬 후에는 옆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담은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분명히 알았다.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니, 그녀를 여자(Isha)라 부르리라. 이는 그녀가 남자(Ish)에게서 취해졌음이라."(창2:23) 이는 처음부터 아담이 그녀를 깊이 사랑했음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왜 죽음의 위협을 무릅썼겠는가?
이들 최초의 부부는 행복한 생활을 했으며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이 밟고 있는 이 땅은 반역으로 이미 심판받은 적이 있는 땅임을 알지 못했으며, 초목이 우거진 아름다운 동산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회복하신 땅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하늘에는 사탄의 지휘 아래 타락한 천사들의 무리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며 "희락의 동산"인 에덴에서 자신들이 쫓겨나 조만간 육체의 죽음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사탄이 와서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유혹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도록 할 것이라는 사전 경고를 주시고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몇 차례 주의를 주셨더라면, 아마 사탄의 계획을 좌절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더라도 따르는 것이다. 아담이 시험에 들어 타락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는 복음(the Gospel) 안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시험과 타락을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갈보리 언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용서와 사랑, 값없는 구속의 은혜와 같은 최고의 광경을 절대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담이 지음받은지 얼마나 지난 후에 이브가 지음받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데려오는 들의 모든 짐승들과 가축들의 이름을 짓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브가 시험에 들기전에 얼마나 오랫동안 아담과 살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떻든 이들은 성인으로 지음받았기에 유아의 성장기를 겪은 경험이 전무했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최대의 원수인 사탄의 간교한 술책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것 같다.
사탄이 인간을 "유혹(Temptation)"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땅위에 있는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 창1:27) 좌절시켜 자신들이 반역함으로써 잃어버렸던 빼앗긴 땅을(失地)를 다시 차지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인간이 이 땅위에 생육하고 번성하기 이전에 범죄하도록 하여 하나님께서 이 최초의 부부를 파멸시키기를 바랬다. 그는 아주 유능한 솜씨로 게임을 운영했다. 아담과 이브가 함께 있다면 저항할 것을 염려하여 여자 혼자 있을 때를 기다린 것이다.
금지된 실과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 여자는 아담의 눈을 피해 혼자서 그 나무 근처에 있었다. 사탄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시 그녀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만약 이브가 "선악의 지식의 나무" 부근에만 있지 않았더라도 그 나무의 실과를 먹고자 하는 욕구에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탄은 먼저 여자로 하여금 무엇인가에 대한 불만을 품게 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금하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불어 넣으며 교묘하게 그녀에게 접근해서 말을 걸었다. 여자가 사탄과 이야기 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사탄은 무섭거나 아주 싫은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녀에게 완전히 낯선 존재도 아니었다. 여자는 전에도 이미 사탄을 본적이 있었거나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사탄은 결정타를 날리기까지 자신의 정체나 지혜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 뱀이 저주를 받아서 땅위에 기어다니기 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모습은 대단히 아름다웠음에 틀림없다. 뱀이 말을 할 수 있었던 존재였는지, 단순히 사탄의 도구로 쓰임받았는지에 대해서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이 육화되어서 그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브가 한동안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쳐다보고 있었을 때 뱀(Serpent:사탄≠snake)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와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질문의 교묘함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암시를 불러 일으키는 동시에 하나님이 선악의 지식의 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신 것은 불공평하며 불친절하다는 불만을 갖게 했다. 사탄의 질문에 대한 이브의 답변에서 그녀는 "그것을 만지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금지사항에 없는 말을 갖다 붙임으로써 불만을 토로했다. 그녀는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혹 죽을까 함이라"는 말로 죽음의 확실함에 대한 의심을 표출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이다(계22:18-19). 타락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다룸"으로써 출발했다(고후4:2).
사탄은 최초의 "고등 성경 비평가"이다. 그는 "불신의 씨앗"을 심는 창조자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 .라고 말씀하시더냐?"는 질문에 이브의 지성과 이성에 불신이 심기운 것이다. 이 질문이 하나님 이브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했다. 이 "불신의 병균"은 이브로부터 시작하여 전인류가 감염되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만큼 그렇게 심하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공개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런일은 하면 안된다고 말씀셨는가? 이 일은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오해하거나 잘못해석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분명히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셔서 악한 자를 영원히 벌주지는 못하실거야" 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탄이 일단 의심의 씨앗을 뿌리고 나면 그 독은 급속도로 번진다. 그 후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마귀는 "거짓말의 아비"이다. "인간은 죽지 않을 수 있다". "악인은 영원한 형벌 가운데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 거짓말은 오늘날 세상 종교 속으로 흘러들어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선"과 "악"의 지식을 알게되어서 "신들(gods)"과 같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그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금지했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동기를 비난했다. 이 말은 이브의 호기심과 야심을 자극했고 그녀의 마음가운데 "욕망의 급류"를 흐르게 했다. 그녀가 그 나무를 보았을 때 "먹음직 하고"(육신의 정욕), "보기에도 즐겁고"(안목의 정욕), "현명하게 할 만큼 탐스러운"(이생의 자랑)(요일3:16) 나무로 보였으며, 그녀는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남편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손을 내밀어 그 실과를 따 먹어 버렸다. 그녀의 무죄의 시대는 끝나버렸다. 아담이 나타났을 때, 그녀는 마음의 갈등도 없이 바로 남편을 유혹해서 그 실과를 먹게 했다. 아담은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 먹었다. 그 결과는 인류의 파멸이었다. 무죄(Innocence)의 시대는 끝나버렸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았다고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그것은 여자의 잘못이었다(딤전2:13-14).
사탄이 이브에게 제공한 미끼는 "지식의 습득"이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그녀와 아담을 신들과 같이 되어 하나님과 같은 수준이 될 수 있다고 유혹했다. 사탄은 오늘날도 사람들에게 동일한 야심을 제공하며,그의 앞잡이들을 통하여 거대한 도시 문명을 건설하고 발견과 발명을 통해서 하나님없이 스스로를 높이도록 한다. 그의 최종목적은
"인간의 신격화"
이며, 이를 통해
"수퍼맨(Superman)", 즉 "적그리스도"
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전에 앉을 것이며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선언할 것이다(살후2:3-4). 이것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인 "세상 제도"의 통합운동이, 인류의 진보라는 슬로건 아래 세계 단일정부로 나아가는 현상을 잘 설명해 준다.
아담과 이브는 "무죄"의 상태로 지음받았다. "무죄"는"의"가 아니다. "무죄"는 시험(test)을 받을 때까지 "의"가 될 수 없다. 만약 아담과 이브가 "시험"을 잘 이겨냈다면, 그들은 "의롭게" 되거나 "거룩"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해서 "죄인들"이 되었다. "무죄"는 "거룩함"에 이르는 첫 단계일 뿐 아니라 "죄"와 "죄인"에 이르는 첫 단계이기도 하다. 만약 시험을 이기는 길을 걸었다면 "죄"를 지을 가능성 마저도 넘어 설 수 있는 "거룩함"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제 인간은 "새로운 탄생" 없이 "거룩함"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타락에 대한 사탄의 승리는 완벽했다.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에 대한 첫번째 결과는 "자아 의식"(Self-consciousness)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 알고"(창3:7). 이것을 알고 나서 그들이 한 첫번째 일은 "무화과 잎"으로 옷을 창안하였다.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은 천연적인 옷을 입고 있다. 고기는 비늘이 있고 새들은 깃털이 있고, 짐승들은 털과 가죽이 있고 심지어 뱀들도 아름다운 색깔의 살가죽을 지니고 있다. 아무것도 없이 태어난 종도 많이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자연이 제공해 주는 옷을 지니게 되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 오직 인간만이 옷이 없는 채로 남았기에 부득이하게 인공적으로 옷을 만들어 입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죄의 결과이다.
처음에 아담과 이브는 옷을 입지 않았으며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무죄한 상태에서는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타락하기 이전의 성품은 빛나는 광채가 몸에서 나와서 그들의 벌거벗음을 감추었을 것이라고 한다. 타락할 때 그들은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타락하자마자 바로 부끄러움을 알았고, 곧바로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옷은 죄를 가리기 위한 것이다. 옷의 모양과 특성은 곧 변했지만, 죄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옷은 사람의 눈으로부터 우리들의 수치를 가리지만,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는 없다. 더러운 마음이 흰 옷 뒤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타락한 날을 지켜보았던 그 날의 해가 진다. 어두움이 깔리고 두려운 밤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평상시와 같이 시원한 때에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 동산 나무들 사이에 자신들을 숨겼다. 그들은 평소 하나님의 일상적인 방문을 기대했지만, 지금은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죄는 우리 모두를 겁장이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하심으로써 그들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심판석에 앉아 판단하도록 하셨다. 아담은 자신의 죄에 대해 이브를 비난했고, 여자는 뱀에게 핑계를 댔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변명하고 정당화할 기회를 주시며 인내심있게 들으신 후 그들 위에 심판을 내리셨다. 그러나, 주님은 뱀에게는 정당화할 기회를 전혀 주시지 않고 바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이것을 행하였으니 너는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저주를 받아 네 배로 다닐 것이며 네 평생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그리스도) 사이에 적의를 두리니,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라}(창3:14-15).
"너의 씨"(사탄의 씨)란 표현에서 우리는 데살로니가후서 2:3에 있는 "멸망의 아들"로 불리는 적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죄를 짓고 선고를 기다리는 범죄자에 대한 심판의 말이며, 사탄이 전에 지은 범죄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앞으로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선포하고 계신다. 뱀이 사탄이었든지, 사탄의 도구로 쓰임 받았던지간에 그는 기어다니며, 메스껍고, 해로운 파충류로 변하게 되었다. 여자에 대한 선고는 남편과 동등한 지위를 잃어버리고, 남편에게 복종하게 되었으며,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어머니가 될 때의 고통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로 인하여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너의 전생애 동안 고통중에서 그 소산을 먹으리라. 또 땅은 네게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낼 것이요 너는 들의 채소를 먹을 것이며 네가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선고하셨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는 옷을 입지 않은 채로 동산을 쫓겨 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만든 "무화과 나무잎"으로 엮은 옷은 부적합한 옷이었다. 그 옷은 그들이 범한 죄의 형벌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옷은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사람은 스스로의 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제거할 수 있는 모형으로서 적합한 옷을 하나 만들어 주실 필요가 있으셨다. 우리는 창세기 3:21에서 "또 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으로 옷들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히시니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왜 하나님께서 더 세련되고 아름다운 옷을 제공해주지 않았을까?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너무나 동물적이 되어서 그가 입기에 가장 적합한 옷은 동물의 가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이 가죽은 모형이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형이었던 죄없는 짐승(아마 양일 것이다)의 죽음으로써만 안전해 질 수 있으며,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히9:22). 그들이 입은 양가죽은 인간이 다시 옷입을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옷입혀 질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끔찍한 날의 밤하늘에도 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 한 개의 "약속의 별"이 어둠 가운데 떠 있었다. 그 약속은 다음과 같다.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이 아름다운 땅위에 더럽혀 놓은 그의 모든 자국을 깨끗이 지워버릴 것이다.
이 약속을 주신 분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하신 약속이란 사실에 주목하라.
"여자의 씨"(Seed of Woman)"
아담과 이브에게 옷을 지어 입히신 분은 "주 하나님"이셨으며 삼위중 제 2위이신 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
이 되신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벌거벗음을 가려주기 위해 필요했던 옷을 입히기 위해 살해되었던 양은 갈보리산 위에서 죽으실 자신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다.
사탄의 아래에 있는 이 세상 체계는 몇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뜻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그를 막지 못해서나, 타락한 인간에 대한 형벌로써 철저히 무관심해서 그냥 놓아두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씨가 사탄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는 약속안에서 구속의 치료책을 마련해 두신 것이다. 인간이 멸망하게 되는 이유는 사탄의 그물로부터 피할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피할 길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이 사탄의 기원과 목적과 운명을 기록해 놓은 "확실한 예언의 말씀"(벧후1:19)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사탄의 "계략"(고후2:11)에 속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언의 말씀은 무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교리의 목적에 "짜맞추는데"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멸망에 이르고 있다. 그들은 마치 성경을 "우리에게 '불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어 무엇에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읽는 것 같다.
에덴의 경륜은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이 시대는 "죄의 부재"와 "하나님의 임재"로 특징지워진다.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까지, 새하늘과 새땅에서 인간과 함께 거할 때 까지 이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계21:3). 에덴의 경륜에 하나님은 아담을 "무죄"에 근거해서 다루셨으며, 인간의 죄로 인한 저주가 이땅에서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이렇게 다루실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시련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요3:18). 타락한 이후로 하나님은 인간을 죄인으로서, 잃어버린 자로서, 쓸모없고 타락한 자로써 다루셔야 했다. 타락한 죄인으로써 뿐만 아니라 타락한 피조물로써 대하셔야 했다. 인간 안에는 어떤 선한 것도 거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원수"된 자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는 자"(롬8:6-7)였다. 인간은 완전한 실패자였다.
하나님은 이 타락한 인간을 죄인으로써 동산에서 추방하신 것이 아니라, 용서하셨으며, 그들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죄인으로서 불멸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지 못하도록 동산에서 내보내셨다. 이로써 인간의 첫 경륜은 실패로 막을 내린다. 인류는 저주 아래 있고 온 땅은 저주 아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완벽한 환경만 주어지면 어떤 악도 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에덴의 재앙은 이것이 진리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 경륜은 "타락"에서 "홍수"까지를 일컫는다. 기간은 약 1656년간 지속되었을 것이다. 이 경륜을 "양심"의 시대라고 한다. 이때는 사람의 모든 행동이 양심에 인도함을 받았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기 이전에는 양심이란 없었다. 양심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나무의 실과를 먹기 전에는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양심은 때때로 두려움과 후회를 낳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옳지 못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능력"을 부여하지는 못한다.
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그들의 죄에 대한 "피의 희생제물"에 대해 설명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구약 시대의 믿음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아담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벨로부터 시작한다. 아벨은 최초로 피의 희생제물을 드린 사람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아담과 이브가 동산에서 추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있음을 암시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담과 이브는 타락하기 이전에 자식이 없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은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으신 후 복을 주시며 하신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창1:28)
우리는 "땅을 다시 채우라"는 말씀에서 놓칠 수 없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땅이 공허한 상태가 되기 전에 땅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은 어떤 이유로 멸망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들과 똑같은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담의 창조이전에 인간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에덴의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자식이 있었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아마 지음 받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바로 타락하였을 것이다. 첫번째 아이는 아들이었으며 이름은 카인이었다. 이름에 담겨진 뜻은 "획득하다", "얻다"라는 의미인데 이브는 카인이 "약속의 씨" 인줄로 잘못 알았다. 아벨이란 이름은 "수증기", "안개"라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이브가 매우 실망했던 것 같다. 아벨이 꼭 둘째 아들이란 뜻은 아니다. 카인을 낳고서 아들과 딸을 많이 낳았을 수도 있다. 카인과 아벨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카인과 아벨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 사람은 악한자의 계열이요, 다른 한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나온 의로운 사람의 계열이다.
이브에게 내린 저주 가운데서 약간의 암시를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너의 고통과 너의 임신을 크게 늘리리니"(창3:16)란 말을 통해볼 때 임신은 자주 있었을 뿐 아니라 한 번에 여러명의 아이를 낳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류는 매우 빠른 속도로 번성해 나갔다. 이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모두 근친혼인 밖에 할 수 없었으며 홍수 이후에도 얼마간은 계속해서 이런 일은 금지되지 않았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카인과 아벨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마도 100살이 넘었을지도 모른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으며, 그의 양이 아니라 아버지의 양이었다. 그는 장성한 사람이었으며 가축의 주인이었다. 카인은 농사꾼이었으며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담이 셋을 낳을 때 130세였다는 것을 안다(창5:3). 셋은 아벨의 죽고 난 후 곧 태어났을 것이다.
아벨의 죽음은 카인과 누구의 제물이 더 옳으냐에 관한 종교적인 분쟁으로 시작되었다. 아벨은 "피의 희생제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카인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땅에서 나온 소산물, 행위의 제물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였으나 카인의 것은 배척하셨다. 하나님은 칼멜산에서 불로 제물을 태운 방식으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셨다. 이것이 카인을 분노하게 했다. 그는 그날 바로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다. 주님은 카인에게 "속죄를 위한 제물"을 드리도록 기회를 주셨으며 아직도 시간은 있었다. "죄가 문앞에 엎드리니라"(4:7)는 표현은 "속죄를 위한 제물이 문앞에 놓여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카인은 듣지 않고 그의 분을 오랫동안 누그러뜨리지도 않았다. 어느날 카인은 들판에서 혼자 있다가 다시 이 문제를 끄집어 내었다. 그는 아벨을 들판으로 불러서 아벨과 이야기 했다(창4:8). 카인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게 그가 서있던 자리에서 바로 돌을 집어 들고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이 모든 계획은 사탄이 아벨을 죽이기 위해 꾸몄던 것이다. "약속의 씨"가 아벨을 통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아벨은 자식이 없었다. 최소한 그의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던 것은 셋을 통해서 볼 때 더욱 분명하다.
사탄은 아벨을 살인하도록 충동했을 뿐 아니라 카인의 종교의 창시자이다. 이는 유다서에 기록된..
"카인의 길"
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들이 가진 종교의 기원을 본다.
카인이 유랑할 때 그는 그의 아내를 데리고 갔다. 그는 놋땅에서 그의 아내를 얻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그녀를 알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거기에서 임신해서 아들 에녹을 낳았다. 여기에서 언급된 에녹은 셋의 계열에서 나오는 에녹이 아니다.
에녹이 태어난 후 카인은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도시문명과 거기에 따르는 현존하는 모든 악이 시작된다. 카인의 후손들 가운데 악기를 만든 조상인 유발이 있었으며, 동과 철을 사용한 투발카인이 있었다. 당시에는 하나님이 없는 도시 문명의 건설을 위해 그들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였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 당시의 사람들의 수명은 70년정도가 아니라 1000년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지식과 경험과 기술이 축적되었을 것이며 이런 것들이 도시문명을 건설하는 촉진제가 되었을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을 볼 때 더욱 잘 설명할 수 있다. 노아의 홍수이후에도 바벨을 건설하면서 다시 한번 도시문명의 건설이라는 메아리는 울려퍼진다. 후에 축조된 대피라미드 등을 볼 때 그들의 수학이나 천문학적 지식이 우리 시대를 능가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명철로 세상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문명화되었고 인구가 증가되었다. "사람들이 지면에서 번성하기 시작하고"(창6:1) 경건한 셋의 자손들도 카인의 자손들과 결혼을 함으로써 홍수 때에 노아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범람하는 죄의 물결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살고 있던 이 세상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들로 삼으니라.}(창6:2).
여기서 일부다처제가 등장하며, 그들의 결혼은 "셋의 아들들"과 "카인의 딸들"과 결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건한 사람들과 사악한 사람들이 결혼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본문을 깊이 생각해보면 더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사람의 딸들"이란 셋의 후손만 일컫는 것이 아니다. 카인의 후손도 사람들의 딸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은 "인간과 다른 어떤 존재들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은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의미와 다르다. 신약성경에서는 "거듭남" 의해 새롭게 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요1:12, 롬8:14-16, 갈4:6, 요일3:1-2).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는 "천사들"을 가리키는데 이런 표현은 다섯 번 나온다. 창세기에서 두 번(창6:2-4) 욥기에서 세 번(욥1:6,2:1,38:7) 등장한다.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의해 지음받은 존재들이다. 천사들도 지음받았고, 아담도 지음받았다. 그래서 아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다(눅3:38). 아담 이후로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행위로 지음받지 않았다. 아담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음받았지만(창5:1), 그의 후손들은 모두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입고 태어남을 창세기 5:3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담은 "자기 모습대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아담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육신의 출생을 통해 "사람의 아들들"이며 단지 "거듭남(born again)"(요3:3-7), 새로운 창조(New creation)을 통해서만 신약적 의미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창세기 6:2-4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셋의 후손"들이 아니다. 셋의 후손들은 "사람의 아들들"이지 "하나님의 아들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이며 인간의 아들들이 아니며, 더욱이 셋의 후손들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부활한 자들은 장가가거나 시집가지 않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으니, 이는 그들이 천사들과 동등하며 또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라."(눅20:27-36)는 이유로 흔히 사람들은 여기서 천사들은 성(性)이 없고, 동거하거나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식을 낳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라.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 성(性)이 없다는 말이 아니며, 의인들이 부활했을 때 이 세상에서의 아내와 자식들로서 서로 알 수 있다.
본문이 가리치는 것은 천사들이 생식을 통해서 출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사들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통틀어서 창조되었으며, 그들은 죽지 않기 때문에 결혼이 필요없는 것이다. 결혼은 종족의 멸종을 방지하기 위한 인간의 제도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두개인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인간이 부활하면 죽지 않으므로 하늘 나라에서는 결혼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천사들과 인간이 교접했을까하는 의문을 많이 갖지만, 창세기의 본문은 분명하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더 확신을 가지려면 베드로서와 유다서를 읽어보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조차 아끼지 않으시고 지옥(타타루스)에 던져서 흑암의 사슬에 내어주어 심판 때까지 가두어 두셨으며}(벧후 2:4-9).
{또 자기들의 처음 위치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주께서 영원한 사슬로 묶어 큰 날의 심판 때까지 흑암 속에 가두어 두셨느니라. 소돔과 고모라와 또 그 주위의 성읍들까지도 그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을 음행에 내어 주어 다른 육체(strange flesh)를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한 본보기가 되었느니라}(유6-7).
여기서 언급된 천사들은 사탄의 천사들일리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천사들은 현재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들은 "흑암의 사슬에 내어주어" 갇힌 것이 아니라,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못(게헨나)"으로 들어갈 자들이다(마25:41). 그 당시에 이 천사들은 틀림없이 특별한 부류에 속한 천사들이었을 것이며, 어떤 특별한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다. 우리는 위에 언급한 두 구절을 통해서 그들이 죄를 지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자신들을 음행에 내어주어 '다른 육체'를 따라간" 죄악이었다(유7). 죄의 때는 마치 홍수이전의 시대와 비슷하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던 죄와 똑같은 죄악이다. 롯에게 천사들이 왔을 때 거기에 살던 거민들은 롯에게 두 천사를 넘겨달라고 했다. 이들은 남성 동성연애자들이었다. 그들은 육체적 교제를 원했다(벧후2:6-8, 유7, 창19:5).
성경은 천사들이 육체적 몸을 입고 있으며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있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창18:1-8).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을 읽을 때 어려움은 다 사라진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처럼 몸을 입고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것이다.
우리는 천사들이 떠났다는 "처음 위치"는 잘 모른다. 그들은 아마 사탄의 추종자들처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속한 거룩한 처소를 떠나 버렸던 자들일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까지 에덴의 동산은 파괴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담의 후손들은 틀림없이 동산을 지키는 천사들(스랍들)과 가까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창3:24). 하나님의 아들들이 때때로 사람의 딸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위치(동산)를 떠나서 '사람의 딸들'과 섞였으며, 성경에서 기록하는 것처럼
"다른 육체(strange flesh)"
를 따라 가서 동산을 지켜야 할 그들의 임무와 "처음 위치"를 떠나버린 것이다.
이런 관점을 지지해 주는 또 다른 강력한 견해는 이 결합이 힘센 사람(mighty), 즉 거인(giant), 고대의 유명한 사람가 되었다는 성경의 기록이다(창6:4). 오늘날도 경건한 후손들의 남자들과 불경건한 후손들의 여자들이 결혼하지만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인간의 딸들" 사이에서 거인들을 낳은 사람은 없다. 즉 고대의 유명한 사람들은 인간들의 정상적인 결혼에서 태어난 자손이라면 왜 전에는 이들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없겠는가? 이전에도 셋의 아들들과 카인의 딸들이 결혼했음은 분명한 일인데도 그들 사이에 "능력있는 사람"(mighty man)이 나왔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 세상에 천사들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어느 민족이나 가지고 있는 신과 인간 간의 사랑, 반신 반인의 신화등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이 바로 베드로전서 3:18-20에서 말하는 "처음 위치"를 지키지 않고 떠나 감옥에 있는 영들이다. 주님은 이들에게 사람이 아닌 성령으로 복음을 전파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시지 않는 새로운 종이 출현하여 인간세계에 깊이 관계를 맺게 됨으로써 노아의 홍수의 원인이 되었다. 노아의 홍수는 에덴의 동산까지 모두 없애 버렸다. 이로써 홍수이전의 경륜이 막을 내린다.
홍수 이전의 인류는 개인으로써가 아니라 인류 전체로써 다루어졌다. 그렇다고 민족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경륜을 사도행전 17:30에서 "무지의 때"라고 말하고 있으며, 율법 시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죄의 간과하심"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다. 이 때 인간은 서로 서로 고발하고 용서하며 양심의 기준대로 살았다. 로마서 2:15절을 읽어보라. 출애굽기까지는 율법이 인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율법이 없었던 시대에는 율법으로 인간의 행위를 판단할 수 없으며 기준이 될 수 없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다."(롬3:20). 그 당시 하나님은 인간과 매우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변명하거나 핑계할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들으셨기 때문에 카인을 꾸짖으셨고(창4:14), 에녹과 동행하셨으며(창5:22-24), 노아와 대화하셨던 것이다(창6:3).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았고 감사치도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정욕에 따른 더러움 가운데 내어 버려 두셨던 것이다."(롬1:20-32). 이런 점에서 인간들은 어떤 죄인들보다도 더 불경건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무지의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은 모세의 시대와 같지 않았다. 우리는 율법이 없었던 시대와 율법아래의 시대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이것은 심판의 근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로마서 2:12에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난다.
{율법 없이 죄를 지은 사람들은 모두 율법 없이 멸망할 것이요, 율법 안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은 모두 율법에 의하여 심판받게 되리니}
이 말씀은 율법이 없었던 시대, 무지의 시대라 할지라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핑계가 없으며, 형벌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큰 백보좌 심판"에서 심판이 행해질 때 구원받을 수 있는 인간이 누구일까? 하지만 어쨌든 율법없이 죽은 사람들과 율법안에서 죄를 지은 사람과는 심판의 근거가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과 복음을 듣고도 영접하지 않는 사람과는 분명히 심판의 원칙이 다를 것이다(살후1:7-10).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성문법"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기록된 양심과 이성이라는 "손으로 씌여지지 않은 법"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 안에서 스스로 법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양심과 이성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롬2:11-16). 오늘날도 복음을 듣는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마음으로 영접하는 자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 만약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코넬료와 같이 본성으로 하나님을 찾고 양심과 이성에 따라 행동했다면(행10:1-6),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만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며,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런 논리를 내세워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가지 않으려는 핑계거리를 삼아서는 안된다.
"홍수 이전 시대"의 특성에 관해서 피어슨 박사(A.T. Pierson)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계시의 충만함이 분명했다. 그 후에 성령께서 육체가 되어 버린 인간을 떠나 버리셨다. 인간들은 통일성과 단결력으로 일치되어 있었다. 거인들의 문화는 진보적이고 엄청난 문명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없었다. 선과 악은 함께 발전하다가 '배교'로 끝장났으며, 결국은 심판으로 멸망 받았다."
우리는 완전한 시대가 올 때까지 모든 시대가 이런 과정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아의 홍수로부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를 일컫는다. 여기에는 4개의 경륜으로 다시 구분할 수 있다.
1. 홍수 이후의 경륜.
이 경륜은 "인간 정부"의 시대이다.
만약 인류의 모든 종족이 한 정부로 통일해서 동일한 목표를 향해 달려간 시기가 있었다면, 홍수 이후에 바로 세워진 정부일 것이다. 노아는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600세의 인간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인류 정부를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영적인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노아의 막내아들인 셈의 나이 98세였으며, 자치 국가를 세울 수 있을 만한 역량의 소유자였다. 그들에게는 홍수라는 하나님의 경고와 엄청난 심판을 눈으로 목도한 경험과 아담때부터 축적된 여러 가지 지식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아의 언약(창8:20-22)이라고 일컫는 하나님이 주신 세로운 언약도 가지고 있었다. 노아는 제단을 세우고 희생제를 드림으로써 보다 온전한 예배의 형태를 다시 세웠다. 하지만 이 세대도 예외없이 그들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한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흩어지라는 말로써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고 하셨다. 그들의 후손들은 함께 모여 살며 도성을 건설하고 하늘에 닿을 수 있는 큰 탑을 세워서 "자신들의 이름"을 내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시켜 버리시고 땅의 온지면으로 그들을 흩어 버리셨다. "님롯"이란 이름을 제외하고는 이 탑을 건설한 사람의 이름은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창10:8-10). 여기서 우리는 땅의 언어들이 기원을 알 수 있다. 오순절에 언어를 하나로 합하시는 표적이 나타난다(행2:4).
바벨의 흩어짐은 홍수가 있은지 약 325년 뒤에 발생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10:25에 셈의 후손인 펠렉의 때에 "땅이 그 때에 나뉘었음이요"라는 말씀이 나온다. 민족들이 나뉜 사건이다. 펠렉은 홍수가 있은지 340년이 지난 후에야 죽는다(창11:10-19). 그러므로 이 경륜은 102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모두 합하면 427년간이며, 전에 조상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역시 실패로 막을 내린다. (창세기 10:25과 11:10-19을 자세히 비교해 볼 것)
2. 족장의 경륜
이 경륜은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써 시작해서 430년간의 노예생활을 마감하는 이집트를 탈출할 때까지를 일컫는다. 우리는 이 경륜을 "가족"의 경륜이라고 한다.
바벨의 사건 후에 노아와 그의 아들들의 후손들은 우상숭배자가 되어 버렸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신실한 증인을 두셨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지만,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성경은 이 시대에 누가 하나님의 일을 수행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아버지까지 우상숭배자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그들의 가족 가운데서 따로 불러 내셔서 새롭게 시작하시기로 결심하셨다. 아브라함은 택함받은 사람이었으며,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승되는 것이 아니었다. 믿음은 대를 거치면서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삭은 선한 사람이었지만, 아버지만큼 믿음의 용사는 아니었으며,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속여서 장자권을 획득했지만 아버지가 소유한 만큼의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다. 요셉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은 믿음에서 많이 뒤떨어졌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결국 이집트에서 430년간의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마지막 절이 "그를 이집트에서 관에 넣었더라"는 말씀으로 끝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집트는 인류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서 세상의 무덤이었을까?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계획은 사탄에 의해 4번씩이나 좌절되었다. 첫번째는 에덴에서, 두번째는 홍수로, 세번째는 바벨사건으로, 네번째는 이집트의 노예생활이었다. 사탄이 하나님보다 더 강하단 말인가? 그가 항상 하나님을 이길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점을 알아 볼 것이다.
3. 율법의 경륜.
이 경륜은 출애굽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탄생까지로 약 1491(?)년간 지속된다. 우리는 이 경륜을 "율법의 경륜"라고 한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하나님께 그들을 속박으로부터 풀어 줄 것을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간구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세라는 한 구원자를 보내셨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다스릴 수 있도록 허락셨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율법과 규제를 통해서 국가를 조직했으며 지정된 장소에서 정하신 방법대로 예배를 드리고, 눈에 보이는 규제를 많이 두셨다.
이 국가는 신정국가(Theocratic)이다. 하나님은 이 지상에서 자신이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해서 한 민족을 통치하시고, 그 민족을 통해서 전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다스릴 작정이셨다. 그 한 사람은 바로 모세였다. 모세가 죽었을 때, 여호수아가 그 뒤를 이었다. 여호수아가 죽자 이스라엘에는 그들을 이끌 지도자가 없었다. 그들은 이웃 민족과 전쟁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당하자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 450년간 그들에게 재판관을 주셨다(행13:20).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구했다. 그래서, 사울이 왕으로 선출되어서 40년간을 다스렸다. 그 뒤를 이어서 다윗이, 그 다음에는 솔로몬이 각각 40년간씩 다스렸다.
B.C 975년 솔로몬이 죽자, 왕국은 분열되어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두 지파를 차지하여 유다가 되었으며, 여로보암이 열지파를 차지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254년간 지속되다가 B.C721년에 앗시리아의 포로가 되었으며, 115년후에 유다는 바빌론의 포로가 되었다.
B.C. 536년에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유다는 바빌론에서 귀환했다. B.C. 166-40년에 에스모니언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B.C 40년에 헤롯대왕은 로마에 의해 왕이 된 이두메인이었다. A.D. 70년에 로마의 타이터스(Titus)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방화를 해서 유대인을 팔례스타인 땅에서 완전히 쫓아내 버렸다.
율법시대에서 하나님은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을 다루셨다. 이스라엘을 다루신 근거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기록된 율법"이었다. "의식에 관한 율법"은 세계의 어떤 다른 민족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는 오직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이 율법은 내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외적이었으며 행위로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파괴된 A.D.70년 이후에는 이 율법도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다. 거기에는 어떤 자비도 없다. 하나님은 선민인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대적해서 싸우시며 그들을 파멸시키신다. 율법은 "저주의 찬미"이다.
율법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적적인 간섭을 하신 장면이 수없이 나타난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실 때부터 시작된 이적들은 장자 재앙, 역병, 개구리, 우박, 홍해를 가르시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직접 음성을 발하셔서 말씀하셨다. 또한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세우셔서 그들을 인도하셨다. 광야에서 40년간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먹여 살리셨으며, 요단강을 건너게 하셔서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거기에 기거하고 있던 민족들을 정복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수세기 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친히 거두시고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넘기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의 씨"를 보내주셨지만 그들은 불신과 시기심으로 가득차서 오히려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 이로써 이들 세대도 전에와 마찬가지로 배교로 끝나 버렸다. 인간은 단순한 실패를 반복할 뿐만 아니라 전혀 은혜를 모르는 존재들인 것이다.
4. 복음의 경륜.
흔히 "은혜의 경륜"라고 부르는 시기로써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시점에서부터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면류관을 쓸때까지다. "성령께서 내려오신 때"로부터 주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해 재림하실 때 "성도들의 공중 휴거"까지를 말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 시기는 또한 이스라엘이 흩어지고 그들의 땅으로 돌아올 회복의 시기까지의 기간이기도 한다. 이 시대의 목적은 "그분의 이름을 위한 백성"들을 모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교회라고 한다.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없이 구성된다.
교 회
하나님의 이런 목적은 구약 성경에는 계시되지 않았다.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했을 때 약간 언급하셨을 뿐이다.
{이 반석 위에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그 분이 계시로 내게 신비를 알게 하신 것이며 그것이 성령으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지금 계시된 것처럼 다른 시대들(구약시대)에서는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알려지지 아니하였으니"(엡3:3-6)." 그리고 또한 이것은 창세로부터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엡3:9).
이방인들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신비가 아니다(롬9:24-30). 하나님의 목적에서 신비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안에서 하나로 묶는 것이다(고전13:12-13).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교회"라는 장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도 모두 다윗의 언약하에 살고 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한 아들"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오늘날 민족 단위로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별로 대하신다. 이 세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는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이라."(롬11:25). 성령께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분하지 않고 각 개인을 부르셔서 교회라는 몸으로 조직하신다. 이 "새 몸"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롬6:14). 심판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했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보좌를 받으셔서 "심판의 보좌"가 아닌 "은혜의 보좌"로 바꾸셨다. 그래서 이 경륜은 하나님께서 악인과 악한 민족들에 대해서도 오래참고 호의로 대하시는 것이다(벧후3:9).
그렇다면 이 경륜도 다른 경륜들과 마찬가지로 배교로 끝날것인가? 그렇다. 에덴에서, 홍수로, 언어의 혼란, 이집트의 노예 생활, 십자가에 못박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시대도 결국은 배교로 끝난다. 지금까지의 경륜은 이미 흘러간 과거이므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교회시대는 지금 진행중인 현재의 경륜이다. 그렇다면 예언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일반적인 견해로는 끊임없는 복음의 전파로 세상은 변화되고 그 뒤에 천년왕국이 도래하고 영광스런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은 추수때까지 알곡과 독보리가 함께 자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물에는 좋은 물고기들과 나쁜 물고기들이 함께 있다. 양과 염소가 함께 자라며 현명한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이 함께 신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고하셨다(눅18:8).
바울은 우리에게 마지막 때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온다"고 경고했다(딤후3: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대는 홍수 이전의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다.
{그러나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의 날들에 그들이 먹고 마시며 장가가고 시집가고(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아들들"과 "인간의 딸들"과의 혼인을 의미하는 것 같다.)하기를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던 날까지 하다가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다 쓸어 버릴 때까지 그들이 알지 못하였던 것같이 인자의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마24:37-39)
우리는 노아의 때의 특성을 잠깐 살펴봄으로써 마지막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경륜을 알아 보자. 우리는 일곱가지 특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을 죄를 속량하신 구속주가 아니라 단순한 조물주 정도로 섬기려는 경향이 팽배해진다.
2. 예술과 과학, 문명의 급속한 발전이 있다.
3. 거룩한 셋의 계열과 악한 카인의 계열의 결합이 성행한다.
4. 인구의 급속한 증가와 도시로의 집중현상이 가속화 된다.
5. 결혼의 원칙이 깨어지고 동성애가 성행한다.
6. 사람의 딸들과 외계에서 온 존재들과의 불법적인 결혼을 한다.
7. 에녹과 노아의 전파를 거부했듯이 복음을 거부한다.
조금만 주의해서 이 현상들을 관찰해보면 "시대의 표적"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오늘날의 시대적 특성에 대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영적인 부흥"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이 영은 "미혹하는 영"이다. 그래서, 마귀들의 교리가 아주 성행하고 있다(딤전4:1).
이것은 영성술(Spirtulism)이란 이름 대신 "영성 탐구(Psychical Research)"라 부르며 근래에는 "불사주의"(Immortalism)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주의 오심에 관해 설교하고 전파하면 거의 대부분 배척받는다. 베드로의 말을 들어 보자.
{먼저 알 것은 이것이니 마지막 날들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그들의 정욕대로 행하며 말하기를 "그가 다시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 하니}(벧후3:3-4).
곧 성령께서는 더 이상 사람과 다투지 않으실 것이다. 홍수가 있기 전에 인간들을 포기하신 것처럼 포기하실 것이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120년간이나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창6:3).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교회가 들림받고 나면 세상은 심판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교회시대 또한 전과 마찬가지로 배교로 끝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판의 경륜
복음의 경륜과 천년왕국의 경륜 사이에 심판의 경륜이 있을 것이다.
과도기적인 경륜
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과 교회는 모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 경륜이 시작될 때 곧바로 들림받아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심판을 받는다(고후5:10).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의 통치로 이 땅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들의 심판은 "야곱의 환난"이라고 불린다(렘30:4-7, 단12:1). 이방인들은 환난 끝에 심판을 받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 모든 민족들은 "양의 민족"과 "염소의 민족"으로 나뉘어 질 것이다. 양의 민족만이 천년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을 것이며 "염소의 민족"은 멸망당할 것이다(마25:31-46).
여기서 "두 시대"는 "천년 시대"와 "완전한 시대", 즉 하늘과 땅이 불로써 타버려지기 전의 시대를 말한다. 현 시대는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하면 교회의 "휴거"와 뒤따르는 환난으로 끝이 날것이며,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 시대들의 시대는 재가 될 것이며, 그리고 그분께서 "나라들"을 심판하신 후에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1. 천년시대
작가들과 시인들은 우주적인 의와 평화의 시대를 "황금 시대"라고 기록하고 노래했으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 시대에 관한 묘사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유대인들은 창조 이후 일곱번째 천년을 "안식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때는 사탄은 결박당하며,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통치하실 것이고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다. 이 기간을 계시록에서 여섯 번이나 언급하고 있다(계20:1-7).
성경은 창조로부터 새하늘과 새 땅이 오기까지 7번의 커다란 시험을 거친다. 에덴동산에서 "무죄의 상태에서" 시험을 거쳤고, 홍수 이전에 "양심의 경륜에서", "바벨에서 인간 정부를 세웠을 때", "족장시대 때에 한 가족의 우두머리로써", "율법의 경륜"에서, 그리고 지금은 "은혜의 경륜"에서 거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번 더 시험하실 것이다.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고, 소망없고,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요, 불순종하는 존재임이 완전히 증명되어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인간을 포기하시기 전에 최종적으로 한 번 더 시험하실 것이다. 이 마지막 시험은 인간에게 변명의 여지조차 없애 버릴 것이다.
그 변명의 여지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그의 실패와 죄를 늘 사탄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왔다. 인간은 "사탄만 없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고 실패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탄을 제거해 주십시오. 그를 결박해 놓이시고, 우리에게 더 이상 걸림돌이 없는 완벽한 환경에서 살게 해 주신다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것이며, 배교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할 가능성을 일컫는다.
하나님은 여기에 응답하신다. 사람들을 속이지 못하게 사탄을 천년동안 끝없이 깊은 구렁에 가두어 두신다. 그리고, 인간들이 죄악된 습성이 너무 깊이 뿌리박혀서 단시간에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천년간이란 긴 시간을 주신다. 인간은 그 천년이란 검증기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완벽한 환경과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 천년왕국의 끝에 사탄이 풀려날 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반역하는 존재임을 드러낼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세대도 예외없이 배교롤 끝맺게 된다(계20:7-10).
천년왕국의 경륜에서는 하나님은 인간을 개개인으로 다루시지 않으시고 전체로서 다루신다.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와 천년왕국 정부를 수행할 행정각료들만 있을 것이다. 민족으로써 유대인은 민족들의 머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신28:13). 그들은 다시 율법을 지키게 될 것이며, "새 언약"을 체결할 것이다(렘31:31-37;히8:7-13). 그 때에 하나님이 인간을 율법도 은혜도 심판도 아닌 "공의"에 근거해서 다루실 것이다. 그 정부는 일인 독재 정부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쇠막대기(iron of rod)"로 다스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사11:1,4; 계2:27,19:15;시2:9).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의 통치 또한 사랑이 저변에 확고하게 깔려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때에는 사탄이 묶여 들어가고, 인류 역사상 어떤 시대에서도 누려 보지 못한 평화와 완전함이 있을 것이다.
2. 완전한 시대
"천년 기간"이 끝난 후에 현재의 땅은 "불로써 타버리며" 의가 거하는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할 것이다(벧후3:13).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바칠 완전한 왕국이 될 것이다(고전15:24,28). 왜냐하면 "천년 왕국"은 죄가 있기 때문에 완전한 곳이 아니며, 마지막은 "배도"로써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완전한 "왕국"은 또한 "때가 찬 경륜"이라고 하는 경륜이다(엡1:10). "천년왕국"과 "완전한 왕국"은 "인자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V. 시대들의 시대
"창조의 시대"는 "알파" 시대였다면, 이것은 "오메가" 시대가 될 것이다. 시간이 더 이상 없는 "완전한 왕국"을 아버지께 바칠 때 "시대들 중에 시대"라 부르는 "영원한 시대"의 시작이 된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오는 시대들"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시대들은 천년왕국과 영원한 시대를 일컫는 것이다(엡2:7). 요한은 계시록에서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밤낮, 영원무궁토록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계20:10). 이 시대는 하나님의 종들이 통치할 시대이기도 하다(계22:5).
우리는 "시대들의 시대들"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정확한 계시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분의 것이고, 그분에게 속해서 영원히 살아가면서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이 시대들의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며, 영원 "시대"는 여전히 작은 기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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