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성전!! 하나님의 집!!!

[스크랩] 법 궤

하나님아들 2012. 9. 6. 11:28
법 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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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8장 9절

주요 요점
예수님은 우리 안에 법궤가 되셔서 오늘도 기적과 안식과 복을 주시고 계신다. 우리 속에 그 거룩하신 분이 와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잘 섬겨야 한다.

오늘 이 시간에는 법궤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성물이 바로 법궤입니다. 왜냐하면 삼하6:2대로 “그 궤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궤는 하나님 혹은 예수님 혹은 말씀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성전에서 법궤가 없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 법궤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법궤는 변함이 없는 성물이었습니다.
다윗이 성전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을 때 법궤에 대한 다른 계시를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법궤만은 변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는 다른 것은 커지거나 수효가 많아지거나 새로 만들었지만 법궤만은 성막의 것 그대로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시대도 변하고 역사도 변하고 문화도 변하고 예배당도 변해도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그의 말씀도 변함이 없습니다. 약1:17에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했고, 히13:8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처럼 말씀이 없어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용납하면 안 됩니다(고후11:4). 다른 신을 취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은 영원한 파멸입니다.
2.법궤 안에는 두 돌판이 들어있었습니다.
히9:4에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했습니다. 법궤 안에 두 돌판과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 등 세 가지를 넣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는 법궤 안에 십계명만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출25:26에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하셨습니다.
지팡이에 대하여 민17:4을 보면 “그 지팡이를 회막 안에서 내가 너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앞에 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민17:11에서 “모세가 곧 그같이 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더라” 했습니다. 만나 항아리 역시 출16:33을 보면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호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했고, 율법책도 신31:25을 보면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하신 대로 언약궤 곁에 두었습니다.
학자들은 후에 고핫자손이 법궤에 모두 넣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왕상8:9이나 대하5:10을 보면 법궤를 안치하려고 열어보니 십계명 외에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넣은 것은 사라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머지도 귀한 성물이었지만 제 위치에 놓지 않은 것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 심령 법궤에도 영원하신 예수만이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산상에서 모세도 엘리야도 나타났지만 그들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만 보였고 하늘에서 소리 있어 가라사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즉 모세의 율법도 엘리야의 은사도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돕는 것일 뿐 그것의 목적은 오직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래서 예수가 나타나도록 측면에서 돕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처럼 모세만 모시고 마음에 예수를 쫓아내서도 안되고, 나의 심령은 변화되지 않은 채 능력을 휘두르고 다니는 신비주의자여서도 안되고 그것을 주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것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예수를 바로 모시도록 영성을 입혀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 어떤 것이 있다 해도 예수 잘 믿어 영적으로 성장하는 도구로 주신 것이지 그것이 목적이 되면 그것을 사라지게 하십니다.
3.법궤는 이스라엘을 안식과 축복으로 인도했습니다.
민10:33에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여기 쉴 곳을 찾았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법궤가 머문 곳이 바로 이스라엘이 쉴 곳이었습니다. 법궤만이 생수의 근원을 알았습니다. 그 후 법궤는 더 나은 쉴 곳인 가나안으로 인도했고, 다윗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안치되어 세계의 열국을 평정시키고 평화의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영원히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제는 참법궤되신 예수님이 믿는 자의 심령에 임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 결과가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을 안식의 도수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외적인 복을 받았어도 아직 육에 속해 있으면 평안하지 않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마음은 도리어 평안해야 그것이 잘된 신앙입니다. 다윗이 주변 이방의 세력을 다 몰아내고 법궤를 모신 것처럼 우리도 육에 속한 것을 제거해야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 외에도 법궤는 기적과 축복을 주었습니다.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강은 갈라졌습니다. 오벧에돔 집에 법궤가 머물 때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온갖 복을 주었습니다. 그 복의 소식이 3개월만에 다윗궁에까지 들렸는데 소문날 만큼 얼마나 놀라운 복들이 임했으면 다윗의 궁에까지 들렸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법궤의 생명성에 비추어 온갖 생명의 역사가 나타났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적적으로 태가 열려 자손이 끊기지 않고, 기적적인 치료가 임하여 건강을 얻고, 짐승들은 번성하여 떼를 이루고, 먼 나라로 뛰쳐 나간 애 피운 탕자도 되돌아오고,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나 이 집의 복받은 소문이 왕궁까지 난 것을 보아 뭔가 크고 놀라운 경사가 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 중심에 계시면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영에 속한 성도가 되자고 이렇게 강조합니다.
4.법궤의 뚜껑은 속죄소요 시은좌였습니다.
출30:6에 “증거궤 위 속죄소” 라고 했는데 난하주에 시은죄라고 했습니다. 속죄소란 그 곳에서 죄를 사해 주신다는 뜻이요, 시은죄란 그 곳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와 속죄와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귀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체험은 얼마나 죄를 제거했느냐와 정비례합니다. 예를 들면 죄과는 해결되었느냐? 여기에 따라 구원이 해결되고, 죄성이 어느 정도 해결 되었느냐? 여기에 따라 은혜 체험의 깊이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축복은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많이 받으면 주님을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 많은 여인이 사함을 받고 예수를 섬기는 것을 보시고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자신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5.그런데 법궤에는 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먼저는, 함부로 법궤를 열어보아서는 안됩니다. 삼상6:19을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함부로 들여다 보다가 70명이 죽었습니다. 이것을 신앙에 그 원리를 적용하여 보면 자신의 심령을 지나치게 분석하듯이 들여다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들어다 보면 백 번이면 백 번 실망합니다. 심령을 들어다 보면 텅빈 자신과 더러움과 무능력함에 좌절하고 실망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령해서 무엇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아보았더니 보통 거위와 같더라는 이야기처럼 우리는 역시 인간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대단해서 기적을 행했습니까? 법궤도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법궤의 주 재료는 조각목인데 조각목은 광야에서 나는 천한 아카시아 가시나무의 일종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가시나무처럼 가치도 없고 오히려 찌르는 죄밖에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임재하시기에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우리의 심령은 강이 되고 의로워지며 거룩하고 지혜로우며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여기 70명의 죽음은 능력의 종들의 수로서 주님 말고 자신을 바라볼 때 실망하여 아무 쓸모없다고 좌절하고 낙심할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시나무 같지만 하나님이 계시니까 거룩한 것임을 깨닫고 오늘부터는 하나님의 임재만 사모하고 절대 심령의 법궤는 더 이상 분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속죄소를 보아도 죽습니다. 그래서 레16:12을 보면 향로의 불을 피워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린 후에 지성소의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섬겨야지 나의 육으로 섬겨서는 안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기도함으로 섬겨야 됩니다. 매년마다 우리 교회의 교육의 달 7월이면 전교인 기도의 주간을 정하여 한 두 주간씩 틀별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니까 낮에는 성경학교 밤과 새벽에는 장년들 기도회입니다. 해마다 그 맛을 보았기에 올해도 그렇게 했는데 주일학교 교사들은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합니다. 모두 뭔가 성령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또 그 장난만 하던 학생회원들은 이제 모두 큰 은사를 경험하여 아멘을 외치는 함성이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도로 섬길 때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나도 살고 모두가 살게 됩니다.
다음은, 피 없이는 법궤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히9:7을 보면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지만 피 없이는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속죄의 짐승의 피를 가지고 속죄소의 앞 뒤에 일곱 번 뿌렸습니다(레16:14, 15). 이처럼 예수의 피공로를 의지해야 양심이 보호됩니다. 그리고 일곱 번은 완전수로 완전히 씻도록 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나아만처럼 심령이 어린이 새 살과 같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법궤를 손으로 만져서는 안됩니다. 웃사가 법궤를 붙들다가 죽었습니다. 이는 법궤 취급법에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원래 법궤는 채를 꿰어 메게 되어 있습니다. 이 채가 20규빗 약 9-10미터로 길어 성소에서 법궤의 채가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얼마나 법궤를 거룩하게 취급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신앙에 적용하면 주의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방법대로만 해야지 아무리 동기와 목적이 좋아도 세상과 인간의 방법으로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선하다면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다 하면서 웃사의 꼴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세마포 옷을 입고 그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레16:4을 보면 세마포 속옷 겉옷 띠 관까지 모두 세마포로 단장된 거룩한 옷을 입고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세마포는 성결의 옷으로 성도들의 거룩한 행실을 뜻합니다. 세마포 겉옷은 그리스도의 칭의의 공로요 속옷은 변화 받아 새롭게 된 성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거룩하게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안에 법궤가 되셔서 오늘도 기적과 안식과 복을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 속에 그 거룩하신 분이 와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잘 섬겨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나의 육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두려운 심정으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법궤되신 주님께서 우리 심령의 중심에 좌정하셔서 우리에게 한 없는 안식과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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